〈 52화 〉 일본여행. (4)
* * *
잠시 휴식 후에 나온 거리. 태양 빛이 내리쬐서 썬크림이 없으면 피부가 탈 정도였다. 유희도 더웠는지 검은 띠가 둘러진 여행용 밀짚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갈 거야?”
“아키하바라!”
많이 들었다. 원래는 용산처럼 전자상가의 메카였지만 지금은 오타쿠들의 성지가 된 곳이라고 알고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 중 한 명이 그렇게 여기를 가보고 싶다고 소리쳤었는데. 지금은 이미 가 봤으려나.
‘역시 비싸구만.’
197엔. 대략 2000원 정도가 결제되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가 참 싼 국가였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우리나라도 1500원으로 올랐지만, 500원 차이면 그래도 꽤 큰돈이라 생각한다.
“이제 내리면 돼.”
바로 1정거장이라 금방 도착했고, 출구를 나오자마자 용산과는 또 다른 상가들이 펼쳐졌다. 신도림에 있는 마트처럼 그런 대형 백화점도 있고, 대놓고 노출도가 심한 2D캐릭터들의 일러스트가 전광판 한가운데에 떡하니 나온다. 순간 흠칫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오….”
그 광경을 보고 절로 탄성이 나왔다. 직장인들이 일할 시간인데도, 젊은 청년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아무래도 관광지라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유희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었나?
“자기야 저기봐 저기!”
유희가 내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표정을 보니 들뜬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젊어서 그런가, 이런 것에 흥미가 많은가 보다.
유희가 가리킨 곳을 보자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한구석에 모여 사진촬영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와 저 사람들봐.”
“코스프레 지리네.”
“우리도 찍어도 되나?”
금발의 양 갈래 머리 가발과, 눈은 아마도 푸른 컨택트 렌즈를 낀 것 같고, 파란색 바탕의 화려한 자수가 박혀있는 드레스를 입고, 팬티가 보일 듯 말 듯 자세를 잡아 들러리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저런 노출을 하는데도 눈 하나 꼼짝 안하고 자세를 잡다니, 프로는 프로인가 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여 있어서 그런지 일본어보단 한국어가 더 잘 들렸다.
“자기야.”
“응?”
“너무 보는데.”
“아… 미안….”
유희가 뽀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정신팔리지 말고 빨리 다른 곳을 가자는 것처럼 보인다. 손이 살짝씩 닿아서 그런지 괜히 부끄러웠다.
유희의 뒤를 따라가서 빨간색의 건물에 들어왔다.
“오락실이 많네. ”
“응. 우리나라랑은 비교도 안 될 걸?”
아마 신촌이었나. 거기에도 건물 전체가 오락실이었던 곳이 있었지만 3층 정도 되는 작은 곳이었던 것에 비해 여기 아키하바라는 건물 전체가 1층부터 6층까지 오락실로 가득했다.
이쪽은 오락실도 메이저한 유흥인지, 우리나라는 그냥 기기 고장이나 가끔 관리하는 정도의 인원으로 그친다면, 이쪽은 안내하는 직원들까지 있어 뭔가 더 신이 났다.
“여기선 이걸 UFO뽑기라고 한대.”
“아~”
한국의 크레인과는 다르다. 물론 똑같은 것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방식의 뽑기 기계가 많이 있었다. 평범한 인형보단 캐릭터 피규어나 여러 굿즈들이 더 많았다.
유희를 계속 따라다녔지만 어지간히 뽑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찾고 있는 게 있나?
“유희야. 뭐 찾고 있는 거 있어?”
“아, 그게…. 자기는 몰라도 돼.”
“왜?”
“그러니까… 아니야! 자기는 게임이라도 하고 있어봐! 나 혼자 다닐 거니까!”
“뭐…?”
그러고는 갑자기 윗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뒤쫓아가자 어느 뽑기 기계 앞에 서서 벌써 돈을 넣고 하고 있었다
‘유희가 혼자 있고 싶댔으니까….’
내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보니 아마도 초 집중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멀리서 지켜보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서 나도 뽑기 기계에 100엔 동전을 넣었다.
민트색의 긴 양갈래 머리의 소녀. 아무리 내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 캐릭터만큼은 안다. 사실 동창덕분에 안 거지만.
아래로 눕혀진 피규어 박스에, 뒤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손잡이가 있었다. 아마 구멍에 크레인을 넣어서 뽑는 것 같다.
“쳇.”
호기롭게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 오히려 뽑기 힘든 방향으로 틀어졌다. 반쯤 튀어나와서 떨구기만 하면 되는 거라 쉬울 줄 알았는데 이게 또 고역이었다.
‘질 수 없지.’
피규어엔 관심이 없지만, 괜히 이런 것을 뽑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100엔짜리 동전을 하나 더 넣어서 이번엔 구멍에 정확히 크레인이 들어갔다.
“…….”
방금전과는 다르게 1mm도 움직이지 않는다. 뭔가 딸려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힘없이 손잡이가 떨떨궈졌다. 그 후 몇 번. 1000엔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내 만원….’
100엔이 동전이라 우리나라처럼 싸게 생각했다가 큰코 다친다. 아무리 동전이지만 1000원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잠깐만…!’
정신을 차리고 유희쪽을 보니 유희가 없었다. 아직 포켓 와이파이가 잡히는 것을 보아 건물 내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째 보이지 않으니 내심 불안했다.
게다가 리듬게임기에서 나오는 음악들이 시선을 분산시키는 바람에 정신도 없다. 이걸 어쩌지….
“자기야!”
다행히 유희쪽에서 나를 불러줬다. 한 손에는 쇼핑백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휴… 없어진 줄 알았잖아.”
“없어지긴 왜 없어져~ 자기도 뽑기 하고 있었어?”
“응. 근데 잘 안 되네….”
“어떻게 뽑았는데?”
“저기 구멍에 넣어서….”
“그러니까 안 되지!”
“…….”
유희가 쇼핑백을 들려주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계 앞에 섰다. 집중하느라 몸을 앞으로 숙여서 그런지, 옷이 올라가면서 뒤에 작은 레이스가 달린 팬티가 조금 보여서 바로 뒤에 서서 가려줬다.
위잉… 이이잉. 텅.
“…!?”
단 300엔 만에 1000엔을 쓰고도 못 뽑은 피규어를 뽑았다. 구멍에 넣는 게 아니라, 튀어나온 손잡이 부분을 당기면서, 피규어 박스를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두 번, 마지막은 그냥 크레인으로 내리 찍어서 박스를 떨어뜨렸다.
“어때~”
“엄청 잘하네….”
유희도 이런 뽑기는 처음일 텐데, 엄청난 실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유희가 비닐을 갖다줘서 피규어를 담았다.
“나는 더 뽑을 거 있는데… 자기는 어쩔래?”
“나는….”
하는 방법을 알았다곤 하지만 솔직히 내 실력으론 돈이 너무 아깝다. 그리고 딱히 흥미가 당기는 것도 없다.
‘아….’
멀리 보이는 기계에서 담요가 보인다. 저거라면, 흰색 반발 티 속에 비치는 유희의 속옷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유희의 속옷을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나도 뽑기 좀 더 할게.”
그리고 저 담요를 뽑기 위해 2400엔을 날렸다.
~~~
‘유희는 어디 있으려나….’
유희를 찾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윗층에 올라가자, 약간의 담배 냄새가 섞여서 머리가 좀 어질어질 했다. 일본 오락실은 금연 구역이 아닌건가…?
“어우….”
일단 유희에게 줄 담요를 뽑았으니 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담배냄새 나는 곳 보단 차라리 더운 곳이 낫다. 유희가 그런 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걱정된다.
유희에게 톡을 남기고, 오락실에 있는 140엔 짜리 아이스크림을 뽑아 밖으로 나왔다.
‘성지라 불릴만 하네.’
맛집은 물론이고, 사람이 많다. 용산이 요즘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이 줄어서 창고 취급 당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그에 비해 아키하바라는 여전했다. 그러게 어지간히 했어야지.
‘학생들도 있네.’
8월이라 이쪽도 방학일 텐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보였다. 가쿠란이었던가, 어느 정도 교복이 자유로운 우리나라와는 다르게(원칙상은 우리나라도 안 되지만) 바지통이 넓고, 옷도 못입는다 싶을 정도로 핏이 별로였다.
학교 규정 때문인지, ‘우리 아이는 곧 클 거야!’ 같은 희망에 휩싸여 일부러 큰 옷을 산 건지…. 내 기억으론 옷 크게 사놓고 결국 거기까지 성장한 사람은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하지만 이 생각은 곧 다른 학생들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저건 나름….’
남학생들이 멋을 낼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저 학생들만 멋을 낸 건지, 치맛단이 박히지 않은 것만 빼면 우리나라 여학생들과 다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유희가 저 교복을 입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흥분됐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냐고…’
유희가 오늘 밤까지만 참으라고 하니 최대한 참아야 한다. 고개를 돌려 정신을 차렸다.
─휘이이잉.
“いきなり風なんなのも~(갑자기 바람이 왜 불어 진짜~)”
“パンツまる?えだよ?(팬티 다 보였어!)”
“うそ!(진짜!?)”
못 봤다. 봤어도 안 봤다 하는 게 도리다. 밝은 분홍색 바탕에 작은 빨간색 꽃 바탕이라고 절대 말 못한다.
저쪽이 눈치채진 못한 것 같지만 괜히 헛기침을 해서 시선을 돌렸다. 유희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パンツ…パンツ…パンツ…….
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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