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지희. (E)
* * *
‘윽…!’
지희씨가 내 바지를 닦으면서 점점 내 그곳을 자극한다. 어떻게든 떼어내려 했지만, 지희씨 또한 나에게 필사적으로 달라붙으려 했다.
“지희씨 이거 놔!”
“네, 과장님. 아 주말…에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최 과장의 마음을 아니 함부로 큰 소리를 낼 수도 없다. 내가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없으니까. 혹시 들키기라곤 했다간, 술 약속까지 빼먹으면서 간 곳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유희가 있다. 유희가 있는데 이런 짓을 해 버리면 진짜로 바람을 피워버린 게 된다.
“꺄!”
어쩔 수 없이 힘을 써서 지희씨를 뿌리쳤다. 지희씨가 그 자리에서 자빠졌지만 다행히 어디 부딪치지는 않았다.
“갈게.”
“…….”
결국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나는 도망쳐나왔다.
~~~
“…….”
「지희씨. 무슨 일 있어?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났는데.」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 벌레라도──」
“아니라구요! 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쳐 버렸다. 부장님한테 소리 친 것처럼, 과장님한테도 실례를 범했다.
“죄송해요.”
「……옆에 부장님 계셔?」
“……!”
「바꿔줘.」
“가셨어요.”
「아… 그래?」
정말 두 사람을 뵐 명목이 없다. 부장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나 혼자 정리하면 될 걸, 괜히 과장님까지 휘말려버렸으니… 죄송한 마음 밖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집 치워주시고 가셨어요.”
「지희씨도 은근 성가시네.」
“…….”
「정말 그것뿐이야?」
“………네.”
「뜸이 너무 긴 데.」
“과장님 때문에 실패했다구요…. 전화 거시는 바람에….”
「그거 잘됐네.」
“네에…?”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줄 줄 알았더니, 오히려 잘됐다니, 지금 나 놀리는 건가?
“저 놀리시는 거예요?”
「아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장난은 그만 둬주세요. 저 지금 엄청 심란하거든요.”
「지희씨 그만 안둔다고 하면 그만둘게.」
“……이제 두 분을 어떻게 뵈라구요… 얼굴 붉힌 사인데. 전 그렇게 회사 못 다녀요.”
「누가 그런 걸 신경 쓰냐. 내가 너한테 화낸 게 몇 번인데.」
“그렇게 멋대로──”
「멋대로인 건 너잖아.」
“…….”
「세상에 누가 차였다고 퇴사를 하냐. 다른 회사 면접에서 ‘차여서 퇴사했어요’ 하고 말할래?」
“……말씀이 너무 심하세요.”
자기가 뭘 안다고. 요즘 감정상해서 퇴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과장님이 뭘 아시는데요.”
「75 꽉찬 A」
“에…?”
「키 163, 몸무게 49, 주량 소주 1병, 아침에는 맨날 초코우유 사오고, 이상하게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하는 습관도 있고, 입사할 때부터 부장님한테 반했고.」
“…….”
「틀린 거 있어?」
“스토커예요? 그리고 살은 더 빠졌다구요.”
사실 그대로지만, 괜히 간파 당한 게 분해서 말했다. 그리고 내 강박증이랑 입사부터 부장님한테 반했던 거는 또 어떻게 안 거야….
「그리고 말했지. 차이면 나한테 오라고.」
“……그거 진심이었어요?”
「당연하지! 너 입사한 날부터 눈독들이고 있었다고! 근데 니가 부장님한테만 관심 있으니까 티 안 낸 거야. 너야말로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과장님의 언성이 평소 이상으로 높다. 게다가 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과장님… 술 드셨어요?”
「그래. 한 잔 했다. 왜.」
“……저 때문이에요?”
「그럼 누구 때문인데.」
“…….”
어쩐지. 통화하고 계속 만나자고 약속 잡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술을 먹으면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고 한다.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 지금 과장님의 상태가 딱 그렇다. 그래서 술 먹는 것을 즐겨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도 술의 힘을 빌렸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부장님을 불렀지만, 결국 술이 깨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러니까 과장님도 술이 깨면,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을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 상사의 푸념 들어 주기. 이것도 사회 생활의 일환이다.
“…어디세요?”
「몰라.」
“……회사 주변이에요?”
「아니. 서울대.」
“네?”
「지희씨 집 아는 건 당연한 거잖아.」
“하아….”
이 정도면 만취 상태다. 왜 과장님이랑 술을 안 먹으려 했는지 알 거 같다.
벌써 막차도 끊긴 시각. 과장님은 여기에는 안 사시니 분명 역 근처 술집으로 갔겠지.
“거기서 기다려요.”
「뭐?」
“과장님이 좋아하는 제가 글로 갈 테니까 기다리라구요.”
「지희씨 내가──」
괜히 짜증 난다. 택시 태워서 집으로 보내야 정신을 차리지. 다음 날 나한테 뭐라고 하든, 지금까지 날 놀려왔던 것처럼 평생 놀림거리로 삼을 것이다.
‘절대로 좋아한다던가 그런 거에 흔들려서 그러는 거 아니니까.’
서둘러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
“어우 과장님!”
“에?”
역 근처에 있는 유일한 술집에 갔더니, 예상대로 과장님은 그대로 엎드려져 있었다. 과장님 주량은 2병 정도인 걸로 아는데, 4병이 넘는 소주병이 쌓여있었다. 용케 오바이트 안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일어나세요 빨리! 민폐잖아요!”
“으응….”
말은 하고 있지만 정신은 없다. 왜 겨우 나 때문에 술 먹고 꼴은 건데. 나도 뻗어버리고 싶었는데.
멋대로인 건 과장님이잖아.
“과장님 댁 주소 어떻게 되세요?”
“…….”
“아이 씨!”
쓸데없이 무거운데다 축 늘어져서 옮기도 힘들다. 택시에 던져두고 가면 택시 안에다 토할 거 같아서 무섭다.
대충 적당한 모텔에다 던져두고 와야겠다…. 돈 두 배로 받아야지.
“305호 입니다.”
“과장님 305호래요… 조금만 힘내세요.”
“우욱….”
“엑….”
“우욱!”
“자, 잠깐! 과장님 제발…!”
다행히 헛구역질이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305호. 과장님을 침대에 던져두고 나오려 했다.
“저 갈게요 과장님.”
“…….”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다. 저러다 자면서 토하지는 않으려나… 가장 걱정되는 건 그건데….
‘나 같은 게 뭐가 좋다고.’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나 때문에 술에 꼴았다. 그거에 대한 책임이랄까, 아무튼 상사가 흉하게 있는 꼴을 볼 수는 없었기에 데려왔지, 딱히 무슨 감정이 있다거나 그래서 데려온 것은 아니다.
그냥 친한 과장님. 잘 쳐줘서 오빠. 단지 그뿐이다.
‘부장님도 나를….’
셋이서 3년이나 있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서로 진전 한번 없었으니, 당연히 부장님은 내가 그냥 친한 동생으로 보일만 하다. 나도 깨달은 건 최근이니까. 단지 그 시간이 아까워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그러니까 죄송해요 과장님.”
부장님이 날 차버린 것처럼, 나도 과장님을──
“꺅!?”
돌아가려는 내 손목을 굵은 손이 잡아당겨서, 침대로 강제로 앉게 되었다.
“과장님 저── 엑!?”
그러고는 날 눕히더니 끌어안는다. 술 냄새가 코끝을 찔러서 손으로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
“이놈의 술주정!”
벗어나려 하면 벗어나려 할 수록 과장님은 더 꽉 끌어안는다. 쓸데없이 힘도 세서 벗어나지를 못하겠다.
“과장님 더 이상 그러시면 저 못 참아요!”
아무리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쯤 되면 일부러 그러는가 싶을 정도로 의도적인 움직임이 보였다.
“지희씨…….”
정말, 졸려죽겠는데, 빨리 자고 싶은데. 이런 잠꼬대는 나 없을 때 하라구…
하는 수 없이 조금 그대로 있자, 나를 속박하던 힘이 점점 약해지더니, 아예 없는 수준으로 약해졌다.
‘뭐냐구.’
술 냄새 때문에 그런가, 나도 괜히 취한 거 같아 일어나기 싫었다. 아무짓도 안 당한 게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일어나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지금 보니 과장님의 몸도 부장님처럼 널찍하다. 부장님이 태생 근육이라면, 이쪽은 관리를 빡세게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이런걸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는 거지….’
이제 와서 이런 거 봐봤자… 아무 감정도 안드는데… 그런데 왜….
‘왜 편안해지는 거냐구….’
부장님한테 차여서 그런가 누군가가 날 좋아해준다는 게 이렇게 기뻤던 일인지 몰랐다. 상대가 과장님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진짜로 짜증 나….’
그래도 지금은 좀 더 있고 싶어서, 과장님의 품에 더 깊숙이 안겼다.
~~~
“…….”
‘낯선 천장이다.’라는 단어가 익숙한 천장이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좋아서 움직이기가 싫다. 그리고 어딘가 따뜻하면서도 무겁다.
“…!?”
왜 지희씨가 여기 있는 거지? 여긴 우리 집이──
‘아니구나.’
우리 집 치곤 넓은 킹 사이즈의 침대. 그리고 각종 블링블링한 장식과 놓았을리 없는 테이블. 무엇보다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지희씨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혼자서 술 먹은 건 기억이 나는데, 이후로 기억이 애매하다.
‘설마 덮치기라도 했나?’
옷이 입혀진 상태로 봐서 다행히 아무짓도 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아랫쪽이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건 그렇고 난 어제 무슨 짓을──
─75꽉찬 A.
─그래. 한 잔 했다 왜.
─그럼 누구 때문인데.
당장이라도 이불킥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술 처먹고 부하직원한테 꼬장을 부리다니, 누가 봐도 민폐인 행동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게다가 정황상 지희씨가 나를 여기까지 옮겨 준 것 같다. 필름이 끊겨서 기억나진 않지만.
‘쓸데없이 자는 모습도 귀엽네.’
자느라 입을 약간 벌린 것도, 손이 힘없이 내 손에 닿아 있는 것도, 옷깃이 약간 올라가 배가 살짝 보이는 것도, 운동용 레깅스를 입어서 팬티라인이 보이는 것도. 모두 귀엽다.
…마지막 두 개는 좀 변태같은데.
“지희씨.”
“……으, 응…?”
“지희씨가 나 데려다 준 거야?”
“아……. 네.”
지희씨가 일어나지도 않고 대꾸한다. 나한테 최대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게 또 귀여웠다.
“고마워… 윽.”
그건 그렇고, 어제 몇 병이나 마셨던가, 머리가 너무 아프다. 출근날인데 과음하지 말 걸…. 그냥 병가 쓸까….
“과장님….”
“응.”
“그거 진짜예요?”
“……뭐가.”
지희씨가 정신을 차린 듯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더니,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제 저한테 말씀하신 거요.”
“아… 그거… 진짜긴 한데…….”
막상 제정신으로 말하니까 부끄럽다. 왜 어제 술을 마셨는지 알 것 같다.
“부장님보다 잘해 줄 자신 있어요?”
“……솔직히 그건 몰라.”
부장님은 넘사다.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부장님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희씨를 설레게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바람 안 피울 자신은 있어. 전여친이 문어발이었거든.”
“뭐예요 그게….”
“…!”
지희씨의 부드러운 몸이 닿았다.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저 그만 안둬요.”
“그래…?”
“부장님이 하도 쓰래서 쓴 것뿐이에요. 이번기회에 쭉 쉬려고요.”
“다행이네 그거.”
“그리고… 주말에 놀러 가자고 했죠?”
“아, 뭐 그렇지….”
술 들어가서 뱉은 말이었는데, 그것도 기억해주다니. 내심 기뻤다.
“그럼 그때 봬요.”
“……응.”
“아직 제 마음 정리 안됐으니까… 과장님이 잊게 해 주세요.”
“……몸으로?”
“변태예요?”
“남자들은 대부분 그래.”
서로 대화하면서 우리의 거리는 서로 가까워져 갔고──
그날 나는 병가를 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