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지희. (14)
* * *
“미안해.”
내 대답이었다. 아무리 지희씨라지만 이 부탁만큼은 들어 줄 수 없다. 나에게는 유희가 있으니까.
「왜요…?」
“나는 이미──”
「제가 없어도 된다는 거예요?」
지희씨의 취기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가 스마트폰의 스피커로 전해졌다.
“아니, 지희씨는 있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 줄 수 없어.”
「……제가 조금 더 빨랐으면.」
「제가 조금 더 빨리 부장님한테 고백했으면 받아줬어요?」
‘좀 더 빨리 고백했으면.’ 인가…. 그래도 나는 아마 유희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귀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으니까. 지희씨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래도 안 받아줬을 것 같아.”
「너무해요….」
“……미안.”
「후으으웅!」
“지희씨…!?”
어딘가에 얼굴을 파뭍고 있었는지 펑펑 우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어쨌든 미안해서, 지희씨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너무, 해엑! 왜 나눙 안 되는 건데에…!」
“…….”
확실히 취했다. 녹음해서 들려줄까라는 장난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그랬다간 정말로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좀 울더니 정신을 차렸는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한테 말했다.
「부장님 들어가셔야되죠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미 훨씬 지났지만, 일단은 모른 척해줬다.
「그럼 이 부탁은 들어 주실 수 있어요?”
“뭔데?”
「저희 집 좀 치워 주세요….」
“…….”
참으로 터무니없는 부탁이었다. 딱 봐도 이게 진짜 부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정말 치우기만 할 거야.”
「……네에. 들어가세요….」
뚝. 전화가 끊겼다. 정말 치우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지희씨가 퇴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우웅.
“여보세요?”
「부장님? 어디계세요?」
“미안 수현씨. 지금 내려갈게.”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가자, 일거리가 엄청 쌓여 있었다.
~~~
‘어떡해…!’
술에 취해서 부장님한테 터무니없는 부탁을 해 버렸다. 뭘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집 청소를 해 달라니, 참으로 염치없다.
“하아아아….”
나는 병신이다. 왕병신이다. 왜 사람을 잊지는 못할 망정 계속 귀찮게 하는 걸까. 이래서는 부장님을 잊지 못한다.
캔에 있는 맥주가 비었다. 이젠 사러 나가기도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잊은 척 할까?’
잊은 척하면 부장님도 괜히 귀찮게 안 올 수도 있고, 나도 편해질 수 있다. 언제 한 번 한 달 내내 놀아보는 게 소원이었으니까.
‘그래도 싫어…!’
그래도 부장님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러기는 싫었다.
‘난 정말 제멋대로야…’
사회생활은 만렙이지만, 인간관계는 빵렙이다.
어디 놀러가기도 싫고, 이상한 강박증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손에 넣는 이기적인 여자.
그게 바로 나. 박지희다.
~~~
“…….”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갑자기 업무량이 확 늘어버리면서 정말 오랜만에 야근을 하게 됐다.
“부장님. 오늘 술 어떠세요?”
“오늘은 좀…. 내일 어때?”
“네 그래요.”
안 그래도 유희에게 늦어진다고 말했는데, 더 늦어지게 생겼다. 이대로면 막차도 못 탈지도 모른다.
최 과장의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희씨를 만나러 가는 게 우선이었다.
“하아… 드디어 끝났네. 들어갈게요.”
“응.”
최 과장이 퇴근하고, 나도 일이 겨우 끝났다. 갑자기 일거리가 떼거리로 들어오다니, 어디 부서 통째로 없어지기라도 한 건가.
보통 영업 1부, 2부, 3부 같은 같은 부류의 부서들은 가끔 인사 정리를 하면서 아예 없어지거나 분해 돼서 다른 부서로 통합되거나 한다.
“흐음….”
막상 가려니 긴장된다. 내가 아는 한 지희씨도 혼자 살고 있고, 이런 밤늦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혹시라도 술 취한 상태에서 부탁한 거라 전화 했을 때 기억을 잊어먹었다면 뻘줌해지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우우웅.
“여보세요?”
「자기야. 끝났어?」
“응. 끝났긴 했는데….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
「어디?」
“음…. 부하 직원 집에──”
「여자야?」
“…….”
순간 유희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보란 듯이 여자친구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다니 화낼만 하다. 그래도 안 갈 수는 없었다. 유희를 위해서라도 직원관리는 필수적이니까.
「여자구나.」
“유희야 그게 아니라──”
─뚝.
“하아….”
오늘 밤 집은 평소보다 더 추울 것 같다.
~~~
“오우….”
문을 열자마자 에어컨의 한기가 날 덮쳐 오고, 헝클어진 머리로 편하게 티셔츠와 딱 달라붙어 있는 트레이닝 레깅스를 입고 있는 지희씨가 나를 맞아줬다.
“오셨…어요…?”
“응.”
다행히 기억을 잃지는 않았는지, 유희에게 혼난 게 허사가 되진 않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집 더럽네.”
“아하하… 괜히 부탁 드린 게 아니니까요….”
약 7평 정도 되는 너비라 혼자 살기에는 충분해 보이지만, 각종 옷가지와 이것저것 짐들이 방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어 엄청 좁아 보였다.
“혹시 나 때문이야?”
“네!?”
이런 경우가 드문 건 아니다. 밖에서는 관리를 잘하지만 막상 집은 더러운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하지만 지희씨 모습도 그렇고, 도저히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맞아요.”
“하하….”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지어 봤지만 돌아온 것은 지희씨의 시무룩해진 표정이었다. 최대한 무시하고, 지희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일단 청소부터 할까?”
“……좋아요.”
우선은 쓰레기 정리부터다. 요 3일 동안 집에서 계속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는지, 플라스틱 용기와 나무 젓가락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지희씨. 봉투는 있어?”
“아, 네. 잠시만요… 여기 쯤에….”
“…!”
봉투가 있어 보이는 베란다에 손을 뻗으면서 자세를 잡는 지희씨의 바지가 당겨지면서, 엉덩이 아랫쪽 둔턱부터 허리까지 올라오는 작은 라인이 보였다.
“여기 있어요.”
“아, 응.”
나는 지희씨를 도와주러 온 입장이지, 놀러 온 게 아니다. 게다가 거절하기까지 했는데, 여기서 흥분하면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겨우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근데 오늘 늦게 오셨네요…. 야근이라도 하셨어요?”
“아. 응.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최대한 지희씨를 보지 않고 작업을 하려 노력했다. 더 이상 봤다가는 흥분했다는 게 들킬 수준으로 지금 거동이 불편했으니까.
“부장님 불편하신데 재킷이라도 벗고 하세요.”
“그럴까…… 아니다. 괜찮아. 금방 끝날 거 같고.”
와이셔츠는 바지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게다가 벨트까지 하고 있어 허리가 조인다. 즉, 내 아랫쪽을 가릴 것은 재킷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다.
“이거는 어디다가 버려?”
“아 그건 저쪽에…. 읏!?”
“응? 뭔일 있어?”
“아뇨!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 재활용 쓰레기 드릴게요!”
“응.”
치운지 30분 정도 되자 어느 정도는 활보 할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확보됐다. 옷거지 같은 것들은 지희씨가 다 정리했고, 재활용이나 기타 쓰레기들은 전부 재활용 봉투에 넣고 버렸다.
“부장님은 쉬고 계세요. 이제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응.”
“읏챠….”
앉을 데가 침대 밖에 없어 침대에 앉았다. 끙끙대는 지희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도와주고 싶었다.
“엣? 부장님?”
“무겁잖아. 어디에 두면 돼?”
“아, 그럼 이쪽으로…….”
뭔 옷이 이리 많이 들어 있는지, 상자가 꽤나 묵직했다. 위치도 내가 손을 뻗어야 닿을 수 있는 위치였다. 이걸 혼자서 넣을 생각을 하다니. 어쩌면 나서길 잘한 건지 모르겠다.
“저기 위에다 넣어 주세요.”
“여기?”
“네.”
옆으로 열 수 있는 북박이 안쪽 위에 있는 빈 공간에 팔을 뻗어 상자를 밀어 넣었다.
“더 없어?”
“네. 감사합니다 부장님…. 아, 차라도 마시고 가세요! 저기 타놨어요.”
“그럴까.”
뭐… 술도 아니고 차라면 괜찮겠지.
지희씨가 구석에 펴져 있는 원반형 테이블에 홍차를 올렸다. 등받이가 긴 의자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것을 보면 손님 맞이 용으로 만들어낸 공간 같다.
“그… 정말 이걸로 된 거야?”
단순히 이러려고 날 부른 게 아닌 것은 알기에, 홍차를 마시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은은하게 감도는 향이 뭔가 마음을 진정시켜줘서, 차분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다행히 지희씨가 퇴사하는 건 막은 것 같다. 청소하면서도 별 일 없었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우우웅.
“아, 전화다. 과장님이 웬일로…?”
“최 과장…?”
큰일이다. 낮에 그런 얘기를 했으면서 바로 옆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 뭔가 틀어질 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지희씨어깨를 톡톡 두드려서, 간다는 표시를 보냈지만, 지희씨가 내 팔을 잡고 보내주지 않았다.
“아, 네….”
“지희씨!?”
“아뇨. 괜찮아요….”
최 과장과 통화를 하며 계속 뿌리치려는 내 손을 잡는다. 계속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테이블에 있는 홍차가 쏟아졌다.
“으읍!?!?”
하필 쏟아진 곳이 하반신쪽이라 엄청 뜨거웠다.
“헉! 과장님 잠시만요!”
“크으읍…!”
지희씨가 핸드폰을 냅두고 수건을 가져와 바닥을 닦으면서 내 바지도 닦아준다.
“…!”
바지를 닦는 척하면서 사타구니에 무언가 닿는 감각.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네 과장님. 죄송해요 물을 쏟아서….”
그리고 지희씨는, 여전히 태연하게 최 과장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