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지희. (5)
* * *
이틀 뒤.
“잘 다녀와.”
“오늘은 알바 없어?”
“응. 월 수 금.”
“아하. 그럼 다녀올게~”
흡사 신혼부부 같은 아침. 유희가 앞치마 차림으로 내 출근길을 배웅해준다. 웃는 듯 웃지 않는 흐뭇한 미소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괜히 설렌다.
아침도 차려 주고, 도시락도 챙겨 주고, 정말 현모양처가 따로 없었다.
“잠깐만.”
“왜──”
그 순간 겹쳐진 입술. 유희의 혀가 내 입 안을 슥 훑었다.
“키스는 나랑만.”
역시 어제 일 뒤끝 남았구나….
“응….”
그래도 아침부터 이런 호사를 누리니 오늘 하루도 알찰 거 같은 기분이들었다.
~~~
“흠흠~”
오늘도 기합이 잔뜩 들어간 유희의 도시락과 점심을 함께했다. 흰 쌀밥과 불고기와 시금치, 그리고 귀엽게 문어발을 펴고 있는 비엔나까지. 밥에 하트가 그려진 게 없어서 약간 아쉬웠지만. 챙겨 주는 것 자체만으로 기분 좋았다.
‘오늘은 지희씨도 없으니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불고기 냄새를 풍기며 점심을 먹으니 배덕감이 장난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밥맛도 더 달았다.
간이 잘 벤 제육과 맛이 없을 수 없는 비엔나 소시지가 입안에서 춤을 춘다. 참고로 비엔나는 벌려진 다리들부터 하나씩 잘라먹는 게 국룰이다.
“하아….”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셨다. 이번엔 간접키스할 일도 없으니 마음껏 마셔도 뭐라 할 사람이──
“부장님…?”
“우왓, 깜짝이야. 지희씨 왔어? 점심은?”
“아, 먹고 왔어요.”
웬일로 반차를 쓰고 지희씨가 늦게 출근했다. 내가 하도 눈치를 줘서 그런지, 드디어 반차라도 쓴 것이다.
영화 본 다음날부터 지희씨의 태도가 꽤나 차분해졌다. 평소의 발랄한 부분은 어디 가고 수현씨 같이 차분해졌다.
다행히 도시락을 들킨 사람이 지희씨라 안심했다. 또 다른 사람이 알았다간 골치 아파질 것 같았으니까.
“부장님.”
“어.”
“이따 시간 되시나요?”
“일 얘기면 지금해도 되는데.”
“아뇨. 개인적인 건이예요.”
“개인적인 건?”
─바람 피면… 안 돼?
바람피는 건 아니지만,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아니까. 이제부터는 유희가 말하는 대로 잘 거절해야 한다.
“미안 지희씨. 없을 거 같아.”
오늘만 없다고 하면 분명 다른 날 시간 내자고 할 게 뻔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지희씨도 이 점을 알았는지 좀 더 적극적이 되었다.
“퇴근하시고 안 된다는 건가요.”
“응….”
“그럼 그 전은요?”
지희씨가 뭔가 상대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정말 진지한 눈이라서 농담으로 넘길 수도 없었다.
“그 전이라면….”
뭐… 이상한 짓하면 바로 재제하면 되니까… 상관없겠지.
~~~
실내에 있는 휴게실.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많아서, 결국에는 옥상에 가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보인다.
담배 냄새도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더 좋다.
지희씨가 커피를 타서 내개 건네줬다.
“고마워.”
“부장님은 여자친구분 있으신가요?”
“윽……!”
당황해서 안 식히고 삼키는 바람에 식도가 전부 데인 거 같았다.
“컥, 컥!”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다행히 지희씨가 재빠르게 찬물을 떠다 줘서 살았다. 죽는 줄 알았네.
“그래서… 뭐랬지?”
“여자친구분──”
“아, 그랬지 그랬어. 그러니까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돼서 말꼬리가 길어진다. 유희와 나는 ‘부녀'인가 ‘연인'인가, 내 안에서는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된다.
‘간과하고 있었어….’
유희만 좋으면 되는 것은 변함없다. 다만 주변에서 신경쓰게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유희는 과연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걸까.
‘보이고 싶기는 한 건가?’
유희가 이 관계를 자랑스러워할 리는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리는 없을 것이다. 방학이라 그렇지, 개강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말할까 걱정되긴 한다.
‘그럴 리 없나.’
유희라면, 아마도 나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하겠지. 그게 윤리적으로 잘못 되었든 아니든 유희는 나를 좋아하니까. 나도 유희를 좋아하고.
그러니까. 나도 유희에게 맞춰야 한다.
“응… 있어.”
“역시….”
“알고 있었어?”
“부장님이 그런 예쁜 도시락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
단번에 간파당하다니, 역시 여자들의 감은 무섭다니까.
“어떤 분이예요?”
“어떤 분이라니….”
내 딸이라고 어떻게 말해….
“뭔가 만난 계기라던가, 아니면 장점이라던가, 있을 거잖아요.”
“장점….”
유희의 장점.
예쁘다. 가슴이 크다. 엉덩이가 말랑말랑하──
‘이러면 섹스하려고 만난 거 같잖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봤다.
가사를 잘하고, 나를 잘 신경 써주고, 평소에 무심한 척하면서도 날 챙겨 주고, 흐뭇하게 웃는 미소가 내 심장을…."
“의외로 시니컬한 사람을 좋아하시는군요 부장님은.”
“응? 나 말했어?”
“네.”
“어디서부터?”
“가사를 잘하고부터요.”
“아하….”
‘가슴이 크다’같은 천박한 단어는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사람 사진 보여 주실 수 있어요?”
“사진…?”
유희 사진을 막 보여 줘도 되나…? 지희씨가 여자라서 상관없나….
어디선가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줬다가 뺏겼다는 썰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노래도 있기도 하고… 물론 그 노래는 서로가 사귀지 않는 상태였지만.
“잠깐만….”
생각해 보니 유희와 찍은 사진이 있던가…? 아니, 그전에 유희 사진 자체가 있었나?
고등학교 졸업앨범은 있지만 유희가 보여 주지 않아서 그 때 사진도 없고, 어렸을 때 아기 사진 말고는 없다. 그렇다고 애기 사진을 보여 줄 순 없으니 원.
다음에 놀러가면 잔뜩 찍어둘까.
“미안… 없는 거 같아.”
“사진도 안 찍으셨어요?”
“걔가 그런 거 워낙 싫어하거든….”
“남는 건 사진 밖에 없으니까 찍어두세요… 결혼이면 얘기가 또 달라지긴 하는데….”
“결혼…?”
지희씨의 말대로다.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날지, 아니면 더 나아갈지, 나아갈 수는 있기나 한지,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유희는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을 거 같고, 나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한날의 놀이라거나 추억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하아….’
갑자기 생긴 수많은 문제점들 때문에 머리가 피로해졌다.
“부장님 머리 아프세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 지희씨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정도다. 덕분에 유희와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고마워 지희씨.”
“네? 네에….”
“뭐 더 물어볼 거 있어?”
“아뇨! 감사합니다… 와주셔서….”
“응. 먼저 일어날게.”
“아, 제가 치울게요.”
“고마워.”
결혼.
우리나라에선 법적으로 8촌까지 혼인 금지다. 그래서 결혼약속까지 잡았는데 알고 보니 8촌이라서 못한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지 않는 한, 이 법령은 절대 바꿀 수 없다. 대통령이 되어도 아마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즉, 우리는 결혼 할 수 없다.
‘유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암울한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느 영화처럼 1400만 분의 1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고, 평범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희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 전부다.
“하아….”
그리고 유희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하지 않기로,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사실은… 할 말 있었는데….”
~~~
“자기 왔어~?”
“응.”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 유희의 얼굴은 언제나 새롭다. 늘 짜릿하다. 매일 이런 일상이 반복됐으면 좋겠다.
“무슨 일 있어? 좀 피곤해 보이네?”
“일이 좀 많았어. 또 어제 너무 힘을 써서 그런지 피곤하더라고.”
“뭐야~ 앞으로는 횟수 좀 줄여야겠네….”
“하하하….”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요새 계속 밤에 격력하게 사랑을 나누는 바람에 지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얼굴이 어두워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으셨을까?”
“직원이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 봤어.”
“뭐…?”
유희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뭔가 생각지도 못한 곳이 찔려 어벙벙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마저 귀여웠다.
“그래서… 뭐라 그랬어?”
“……있다 그랬어.”
“그래…?”
쭈뼛쭈뼛대며 괜히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다. 덕분에 울상이었던 내 얼굴도 조금은 폈다.
“유희 너는 어쩔래?”
“응? 뭐가?”
“만약 다른 사람이 물으면…….”
“당연히 있다고 할 거야. 소개도 시켜 줄 거고.”
“…….”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나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다니, 그것도 나이차도 엄청 많게 보일 텐데. 유희가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유희는 이 관계가 좋은 것이다. 나와 연인이 된 이 관계가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렇지.”
“왜? 자기는 그렇게 생각 안해?”
“아니!? 전혀. 사진도 보여주려다 없어서 못 보여줬어.”
“아…. 그러고 보니 사진 찍은 적 없구나.”
“응.”
“그럼 찍을까?”
“바로?”
유희가 넥타이로 나를 잡아 끌고 내 얼굴에 딱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셀카에 익숙한 듯이 팔을 쭉 뻗고 우리를 비춘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이는 내 얼굴과 유희의 작은 얼굴이 차이가 나서 뭔가 부끄러웠다.
“찍는다? 웃어 봐.”
“이렇게…?”
유희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 호기롭게 내 턱 아래에 브이자 포즈를 취하며 버튼을 눌렀다.
“잘 나왔다.”
“오….”
사진에 찍혀 있는 유희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유희를 설득시키려 했던 내 마음이 사라져 갔다.
‘…….’
이렇게 나를 좋아해주는데 정작 나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타협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현실이 있어야 이상이 있는 법이다.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럼… 오늘도 힘내 볼까.”
“뭐? 피곤하다매! 무리하지마!”
“아니, 사진보니까 불끈불끈해졌어.”
“뭐야…♥”
그래서 유희와 평생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