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지희. (3)
* * *
“지희씨. 아직이야?”
“죄송해요…! 조금만 더 하면 돼서….”
영화 상영시각은 7시 20분. 지희씨와 영화를 보려면 넉넉 잡아 2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의외로 역삼 주변에는 영화관이 없어서, 강남까지 가려면 열차를 타고 또 사람들이 막혀서 10분은 걸어야 하는데, 지금은 퇴근시간을 훌쩍 넘긴 6시 40분이었다.
“…….”
부하 직원이 일을 하겠다는데 누가 안 좋아할까. 아마 야근 수당도 못 챙겨 주는 중소기업 사장 말고는 없을 것이다.
나는 월급 주는 입장도 아니고, 어디 중소기업 사장도 아니지만, 분명 자기 일을 다 했음에도 굳이 일 거리를 찾아서 하는 지희씨를 보고 뭔가 화가 났다.
“자꾸 이러면 나 갈 거야.”
“……정리할게요.”
차라리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면 들어 줄 텐데, 아무리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정작 최 과장 말고는 개인적인 얘기를 한 적이 없으니 원… 역시 나이가 문젠가.
지희씨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짐을 정리했다.
“지희씨. 진짜 무슨 일 있어?”
직장인 평균 퇴근 시간은 6시~7시. 엘리베이터와 거리에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밤 10시 넘어서까지 건물에 불을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자동으로 애도하게 된다.
지하철로 가며 지희씨에게 물었다.
“아뇨…. 그냥 미리 해 두고 싶어서….”
“그러는 거 좋지 않다고 저번에도 말했잖아. 너무 요령피우는 것도 안 좋지만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 않아.”
“그러니까….”
“뭔가 고민이 있으면 말해도──”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
높은 소리에 사람들이 이쪽을 잠깐 쳐다보다가 다시 갈 길을 간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희씨 어깨에 손을 걸치고 역사 안으로 들어오자 관심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아….”
지희씨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 본인도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바로 나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부장님….”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친해도 막상 나이차는 극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경험하니 마음속이 새삼 씁쓸해진다.
“저 강박증 같은 게 있거든요…. 뭔가 가슴이 떨린다거나 그럴 때 일을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아요…. 연차를 안 쓴건… 딱히 쉬어도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뭔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린달까….”
“아하….”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일을 했구만. 그리고 그 일이 다 끝날 때까진 중단하기 싫고.
이건 뭐 강박증이 아닌 사람도 필 받았을 때 그만두기 싫은 거랑 똑같은 상황이니, 나는 이해한다.
“가슴이 떨릴 일이 있었어?”
“그건… 그게….”
지희씨가 얼굴이 빨개지며 시선을 회피했다.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나보다. 아, 오늘 그날이라 했었지. 그래서 그런 건가. 나도 참. 너무 깊게 물어 본다니까.
“말하기 그러면 안 말해도 돼. 그보다 빨리 가자. 늦겠다.”
“에? 가시게요?”
지희씨가 뭔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안다. 아마 갈 분위기가 아닌데 가자고 해서 그런 거겠지. 그래도 여기서 이대로 가버리면 어색해져버릴 거 같아서, 내빼지 않았다.
“당연하지. 돈 아깝잖아. 힘들면 안 가도 되고.”
“갈게요!”
그리고 간신히 영화 상영 5분 전에 도착해서, 순식간에 표를 뽑아 입장했다.
~~~
‘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더니, 너무 야하다.
포스터는 남녀가 손을 잡고 있는 정말 평범한 포스터였지만 영화 시작부터 무슨 딥키스를 3분이나 했다.
「선배….」
왜 상스럽게라는 제목을 넣었는지 바로 이해됐다. 12세 주제에 키스 소리가 너무 달달해서 X튜브에 19금채널에서 ASMR을 치면 나오는 웬만한 소리보다 더 흥분됐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영화관 안에 있는 모두가 모두 숨죽이고 그 현장을 지켜봤다.
‘저건….’
드디어 끝나는 키스에 늘어지는 침. 보통 촬영할 때는 깔끔하게 연기하기 위해 침이 흐르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촬영이라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을 정도로 정말 야했다.
“하아….”
지희씨도 못 참겠는지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서 나 포함 모두가 그쪽을 쳐다봤다. 다행히 손은 정상적인 곳에 놓여 있었다.
뭐… 이해한다. 본인도 지금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영화가 그만큼 야했으니까.
지희씨의 손을 올려 주의를 줬다.
“지희씨.”
“앗, 죄송해요…!”
스토리는 그냥 평범했다. 대학에서 서로 부딪치고 만나서, 친해지고, 놀러 가고, 그리고 잠깐 싸우다가 그대로 키스. 처음 키스 장면은 엔딩 장면 후의 일로, 엔딩은 서로 넘어지면서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간 후에 오프닝 장면이 한 번 더 나왔다.
“어땠어?”
“나, 나름 볼 만했네요….”
아무래도 그 장면을 두 번이나, 그것도 영화관 내 불이 꺼진상태로 봐서 여운이 남아서 그런지, 서로 조금 어색해졌다.
“갈까요? 불도 켜졌고….”
“어, 응…?”
분명 에어컨 때문에 약간 서늘했었는데, 지희씨가 앉았던 의자가 자동으로 접히면서 얼핏 보인 흔적, 위아래로 늘어진 마름모의 젖은 흔적이 지나갔다
‘음료라도 흘렸나?’
뭔가 물어 보면 후회할 거 같아서, 굳이 뭔지는 물어 보지 않았다.
~~~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볼 걸 그랬나.”
“그러게요.”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팝콘은 사지 못했지만, 콜라를 라지 사이즈로 사니 배가 빵빵해져서, 덕분에 밤늦게 뭘 먹을 필요는 없었다.
흘끗 쳐다본 지희씨의 배도 아까보다 나와 있는 게 보여서 자동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오늘 재미… 는 없었지만. 가끔 부장님이랑 데이트하는 것도 재밌네요.”
“데이트…?”
“네. 아, 혹시 설레셨어요?”
“아니. 전혀.”
그냥 아무 관계도 아닌데 데이트라는 말을 써서 좀 놀랐을 뿐이다. 내게 있어선 그냥 부탁을 들어 준 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유희와 조금 더 빨리 사귀었다면 지희씨의 부탁을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들어가세요! 내일 봬요!”
“그래.”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건지, 지희씨가 도망치듯 역쪽으로 뛰어 갔다. 설마 또 일 하러 가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집에 갈 겸 걱정돼서 쫓아간 곳에는 아직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지희씨가 보였다.
‘휴….”
다행히 지희씨는 나와 같은 방향의 열차를 탔다.
…이러면 굳이 안 헤어졌어도 됐었네.
“…….”
지희씨의 문 한 칸 옆에서 타서, 우리는 한 공간에 있다. 지희씨는 눈치채지 못 한 거 같지만, 내가 아는 척하는 것도 좀 그래서 가만히 보기로 했다.
…이거 완전 스토커가 따로 없잖아.
「열차 문 닫습니다.」
9시가 넘었지만 직장인들이 많은 만큼 이곳에서 노는 사람들도 많은지라, 새벽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여전히 붐빈다.
「다음 열차 타 주세요!」
가만 보면 다음 열차 타라는 것도 참 계륵이다. 열차 출발 시간이 지연돼서 그런다곤 하지만, 다음 열차도 금방 온다면서 5분넘게 안 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차면서 다음 열차 타라는 기관사도 본 적 있다.
‘윽.’
인파에 밀리는 바람에 순간 넘어질 뻔했다.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받쳐 줘서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지만, 땀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낑기는 것은 별로였다. 덕분에 주시하고 있던 지희씨도 놓쳤다.
「이번 역은 교대. 교대 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사당까지는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특히 방배 서초는 한 명도 안 내리는 일이 허다하다. 적어도 내가 있는 칸에서는 그렇다.
가끔씩 내리는 사람 때문에 인파에 쓸려 가장 중간쪽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또 아래쪽에 익숙한 뭔가가 닿았다.
“흐…!”
“…….”
열차가 덜컹거리며 비벼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커졌다. 이번엔 가방도 안 챙겨 와서 손으로 가릴 수도 없고, 참 곤란했다.
또 양옆에 부드러운 것이 내 것을 감싼다. 공간이 딱 알맞게 형성돼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결국 사당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 상태로 있어야 했다.
“…….”
“…….”
사람들이 좀 빠지자 그제서야 떨어졌고, 나도 모르게 공손한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
“부장님 때문이에요.”
“응?”
“제가 이렇게 된 건 부장님 때문이라구요….”
“…….”
“내릴게요.”
서울대입구역에서 열리는 문. 그 말을 끝으로 지희씨는 내렸다.
‘나 때문이라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다만…. 그래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는 할 수도 없었기에,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유희야 나왔… 아, 아직 없지.”
전화라도 해 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알바할 때에 전화하면 방해될 거 같아서 딱히 하진 않았다.
“흐아….”
씻지도 않고, 옷도 벗지도 않고, 에어컨만 틀어 놓고 침대에 누웠다.
방금 일 때문에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지희씨가 강박증을 갖게 된 원인이 나라니. 그것도 성희롱 때문이라 내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게다가 유희가 있는데 흥분 같은걸 해버리다니. 남자는 이런 생물인 걸까. 불륜이 왜 발생하는지 알 거 같다.
이러다 최악의 경우에는….
‘…….’
내가 일부러 한 것도 아니고,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던 것을 지희씨가 말할 리는 없었지만, 사람들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내일 제대로 사과해야지.
“졸려….”
정시에 집에 안 들어오니 감긴 눈이 떠지지 않는다. 씻어야 되는데,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
몇 분이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유희 올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아무리 졸려도 이대로 자면 안 되기에, 끄응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켜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들어 갔다.
─띡 띡 띡 띡.
마침 비누칠을 하는 중이라 밖에서 비밀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욕실 문 너머로 유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샤워해?”
“응.”
거절할 수 없어서 영화 보고 온다고는 이미 말한 상태다. 빨리 유희 모습을 보고 싶어서 샤워를 마무리하고 나왔다.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고, 본인도 샤워를 하고 싶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리고 손에는 내가 꺼내놨어야 할 도시락과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유희였다.
“자기야.”
“응? 알바는 어땠어?”
“이거 뭐야?”
유희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나를 보는 시선이 싸늘하게만 느껴진다.
“이 립스틱. 뭐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