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지희. (2)
* * *
“부장님 안녕하세요!”
“어, 응.”
“오, 오늘도 수고하세요~”
“그래.”
부장님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아랫쪽이 꾸욱하고 눌리는 느낌이다. 지하철에서 느꼈던 거 때문인가…?
부장님의 거기가 내 엉덩이 사이에 딱 끼워진 그날부터 이상해졌다. 엉덩이에 뭔가 닿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뭔가 단단하면 서도 뜨거운 것, 그건 아마 부장님의 자ㅈ──
‘뭘 생각 하는 거야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지금까지는 부장님이 마냥 좋은 사람으로 보였는데. 수현씨 일도 그렇고 점점 들면 안 되는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수현씨가 사실 부장님한테 차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좀 놀랐다. 그때는 너무 아저씨 취향이라고 놀리면서 위로해 줬는데, 막상 수현씨와 같은 처지가 되니 뭔가 분했다.
‘확실히 잘생긴 건 맞지만….’
입사하자마자 엄청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6살 차이라 애초부터 포기했다. 나는 동갑이나 연하가 좋으니까. 연상의 오빠들은 너무 챙기려고만 해서 별로 였으니까.
그런데 뭐냐고. 갑자기 이런 감정이 들다니. 이게 다 자지 때문이야.
“지희씨.”
“네, 네엣!?”
“어디 아파?”
“아뇨! 그냥 잠깐 멍때리고 있어서… 무슨 일이세요?”
“아~ 다다음 주 일주일 동안 휴가 낼려고.”
“아, 네! 처리해드릴게요.”
“저번에도 말했지. 쉴 때는 무리하지 말고 쉬어.”
“네…….”
쓸데없이 남 신경 써주는 것도 전에는 귀찮게만 생각했는데, 낮은 목소리로 말하니까 왠지 설렌다. 뭐야 이 사람! 언제부터 이렇게 설렜냐고!
복장도 더 깔끔해지고, 머리도 잘 정돈돼서 안 그래도 잘생긴 사람이 더 잘생겨 보였다.
‘관리하니까 완전 반칙이잖아….’
평소에는 잘생겼지만 뭔가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젠 빈틈 없는 완벽한 미중년이 되었다. 사내연애는 안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못 지킬 거 같다.
‘내가 고백한다고 받아줄까?’
로맨스 웹툰에서 자주 나온다. 예전부터 같이 지내다가 줄곧 좋아했어서 고백했는데, 소꿉친구라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 결국 주인공은 그 사람보다 잘난 사람을 택한다.
부장님과 소꿉친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3년 동안 지내 왔는데, 부장님이 나한테 그런 감정을 가질 리 전무하다.
‘그래도….’
그 주인공이 소꿉친구에게 잠시라도 휘둘리는 순간이 나온다. 그리고 현실은 소꿉친구가 있다면 대부분 그 소꿉친구와 결혼한다. 이성으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중에 결혼 상대가 없다면 결국은 소꿉친구를 찾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부장님한테 가자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승산은 있다.
~~~
“부장님.”
“왜 또.”
여느 때처럼 출근하니 또 최 과장이 딴지를 걸어왔다. 저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별거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오늘따라 깔끔하시네요.”
“그런가? 평소랑 같다고 생각하는데.”
“아뇨, 옷에 각이 잡혀 있다고나할까… 아무튼 평소랑은 느낌이 다르네요.”
“흐음….”
뭐… 확실히 뭔가 옷이 각잡혀서 불편한 감이 있긴 하다. 그도 그럴게 아침에 유희가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 줬으니까.
─삐뚤어졌잖아. 제대로 해. 내가 안 해주면 안 된다니까.
─잘 다녀와 자기♥
…상상만 해도 심장이 설레서 일에 제대로 집중을 못 할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알바한댔었지. 잘할 수 있으려나. 유희라서 걱정되지 않지만, 반대로 유희라서 조금 걱정된다. 뭔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부장님. 이거 맞나요? 값이 잘못 넣어진 거 같은데….”
“잠시만….”
역시 유희 생각을 해서 그런지 바로 수현씨에게 지적을 받았다. 나란 놈은 정말….
젊은 사람이 결혼하면 이런 느낌일까, 퇴근 후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상상해버리는 바람에 일에 지장이 생기는 그런 바보 같은 일상.
‘안 되지 안 돼.’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오탈자와 틀린 값을 수정했다. 아무리 좋다지만 그렇다고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 그리고 유희는 나보다 늦게 돌아오기도 하고.
‘음… 뭔가 잊어버린 거 같은데.’
유희가 돌아 올 동안 해야할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뭔지 까먹었다. 음… 뭐였더라….
「부장님 처리해드렸어요!」
「고마워요.」
지희씨에게서 휴가 신청이 됐다는 메신저가 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영화 약속을 잡았었지.
「오늘 끝나고 바로 가나요?」
「아, 네! 뭐 보고 싶은 거 있으세요?」
「잠시만요.」
음… 뭘 볼까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그제 본 공포 영화도 볼 거 없는 것들 중에 그나마 볼 만한 거였으니까.
「지희씨는 보고 싶은 거 있어요?」
「저는 이거요!」
아주 달달한 영화포스터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 왔다. 뭐, 개인 메시지라 딱히 상관은 없지만, 누가 보면 근무태만 같다. 음… 근무태만 맞잖아 이거.
『달달하게, 상스럽게.』
제목은 아찔하지만 의외로 12세였다. 생각해 보니 공포 영화와 이것 중에 고민 했던 것 같다.
「그걸로 해요.」
「네~ 저녁은 뭐 드실래요?」
「거기 있는 거 먹죠.」
이 근처에서는 본 적 없어서 뭐가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는 물가가 너무 비싸다. 역삼이니 그럴만 하긴 하다마는.
「네~」
뭔가 오늘 지희씨 상태가 유난히 들떴다고 해야 할까, 뭔가 서두르고 있는 느낌이 난다. 그래도 나보다 낫긴 하지만. 나는 유희 때문에 숫자도 틀렸으니까.
음, 유희는 저녁을 어떻게 하려나, 먹고 가나? 아니면 내가 차려놔야 되나?
‘흐음….’
요리를 아예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맛있다고 말할 퀄리티도 되지 않는다. 딱 먹을 만한 수준. 그것도 볶음밥류의 요리 밖에 못 한다. 요리교실이라도 다닐걸 그랬다.
“부장님 뭐 드실래요?”
“아, 나는 패스.”
“웬일이세요?”
“그냥 속이 좀…….”
물론 거짓말이다. 무려 유희가 도시락을 싸줬다는 사실을, 다른 직원들에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저도 오늘은 패스할게요~ 그날 이라서….”
“아 그랬어? 휴가 쓰지.”
“아니에요~ 과장님 잘 다녀오세요~”
“네 뭐… 가요 수현씨.”
“네.”
아니 그날이면 휴가를 써야지, 우리 회사는 그런 거 관대한 편인데. 지희씨는 안 써도 너무 안 쓴다니까.
“그럼 저 잠깐 좀 다녀올게요.”
사무실에는 나와 지희씨 두 명이 남았다. 뭐… 원래였으면 여기서 떠먹었을 텐데, 타이밍이 안 좋다.
지희씨에게 보이지 않게 도시락과 물이 들어 있는 보온병을 품에 넣어 놓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흡연구역이긴 하지만, 이 시간에는 그나마 사람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빨리 먹으면 깨끗하게 먹을 수 있다.
“오….”
엄마한테도 받아본 적 없는 도시락을 딸… 아니, 여자친구한테 받다니, 가슴이 울컥했다.
고소한 냄새가나는 계란을 볶은 황금 밥. 거기에 식용 색소를 얹었는지 분홍색 하트가 그려져 있다. 반찬칸에는 미트볼과 김치가 담겨져 있고, 도시락의 국룰인 계란 말이도 있었다.
맛은 물론 금상첨화. 미트볼의 육즙과 계란밥의 고소함이 입안에서 엉키며 저절로 맛에 화합을 일으킨다.
좀 느끼하다 싶으면 김치를 먹으면 되고, 계란 말이도 완벽하게 익혀져 있어서 입안을 즐겁게 해 줬다.
‘이거 먹고 힘 좀 내볼까.’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건 정성이라는 말이 맞는 거 같다. 원래부터도 맛있어 보였지만, 유희가 정성을 들였다고 생각하니 더 맛있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나오다가 멈췄다.
“…부장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오늘따라 들떠보이는 지희씨가 눈앞에 있었다.
“아… 지희씨.”
“그거 뭐예요?”
“아… 이거.”
뭐라고 변명할까 머리에서 생각나지 않았다. 유희의 존재를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괜히 속보이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요, 요리를 시작할까 해서….”
“요리요…?”
“그래. 뭔가 X튜브에서 요리 채널 좀 보니까 직접 만들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하~”
다행히 믿어 준 모양이다. 물론 가끔 요리 채널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하거나 식욕을 채우긴 하지만, 요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다.
“그럼 부장님이 만드신 거예요?”
“그, 그렇지.”
“미트볼 하나 먹어 봐도 돼요?”
“응. 먹어 봐.”
“감사합니다~ 우와~ 엄청 잘하시네요!”
“고마워.”
내가 한 음식이 아니라 괜히 양심에 찔렸다.
“목맥히지. 마셔.”
“정말요? 감사합니다~”
보온병의 뚜껑을 열어 물을 받아다줬다. 이 보온병은 뚜껑이 컵도 돼서 물마시기 편하다. 지희씨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목이 말랐다.
“부장님 그거….”
“응? 왜?”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잘 먹었어요! 먼저 내려갈게요!”
“응. 나도 곧 내려갈게.”
지희씨와 비밀을 만들게 된 건 이게 처음 아닐까. 더 친해진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지희씨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이 사실을 다른 팀원들에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
지희씨가 흡연자였었나? 라는 생각이, 순간 뇌리에 살짝 스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