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예진. (9)
* * *
“으으….”
신 팀장이 엄청 부끄러워하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신 팀장 말대로 날 좋아했다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건 전부 관심을 받으려고──
‘어필하는 방법이 잘못 돼도 너무 잘못 됐잖아….’
이런걸 츤데레? 라고 했던가, 그것과도 너무 멀다. 데레는 없고 츤츤츤츤만 있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렇다.
나에게 그런 짓을 했을 때라면 아마도 나영이와 이혼하기 조금 전.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도 했다. 이때는 신 팀장은 물론,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을 때였으니까.
물론 신 팀장은 예쁘다. 옷을 좀 못 입었을 뿐이지, 얼굴이 못생긴 건 아니다. 안경도 잘 어울리고, 외모로 흠잡을 데는 없다.
하지만 나는 신 팀장을 연애감정으로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이번 출장도 따라가 주겠다고 한 거다. 단순히 비즈니스 관계로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한숨을 쉬고 신 팀장의 어깨를 잡았다.
“미안해요.”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신 팀장이 움찔 거렸다.
다짜고짜 날 좋아한다 해도, 난 받아줄 수 없다. 그동안 날 괴롭혔던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무언가 연이 있었으면 모를까, 전부 안 좋은 기억 밖에 없기 때문에 좋아할래도 좋아할 수가 없다.
“ㄱ, 그러시겠죠… 저 같은 건….”
“하아… 팀장님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좋지도 않았지만요.”
“그럼…….”
“이런 말 하는 건 그렇지만, 전 단 한 번도 신 팀장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 적이 없어요. 물론 지금도요.”
“…….”
사람이 안 좋다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악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냥 자신의 감정 표출 방법이 이상하게 왜곡돼서, 주변 사람들에게 안 좋은 형태로 각인 된 것 뿐이다.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니까.
단지 개인적으로 별로라는 소리다.
그리고… 내 가정사를 알았다간 무슨 소리를 듣게 될 지 모른다.
“역시 저는 연애를 할 수 없는 걸까요…. 이대로 평생 혼자서….”
신 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 대놓고 차인데다가 면박도 받았으니 당연하긴 하다만…. 너무 심했나.
“아뇨. 할 수 있을 거에요.”
“부장님 같이 좋은 사람도 저를 거절했는대도요…?”
“…….”
“저 알고 있어요. 사람들한테 평판 안 좋다는 거. 그래서 팀원들이랑도 말 못하고… 유일하게 부장님만 절 상대해 주셔서….”
자기 평판을 아주 잘 알고 있구만. 그래도 이 정도면 중증은 아니다. 대부분의 이런 부류들은 자기들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진짜 진상들은 악마를 자처한다는 되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뇌를 거치지 않고 상대를 깎아내리며, 자기 만족을 느낀다.
성격드러운 장인들과는 다르다. 그 사람들은 실력과 미담이라도 있지, 이 사람들은 일도 못하면서 자기 일도 남한테 미룬다. 생각하니까 화나네.
아무튼, 아직 신 팀장은 가능성 있다.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람은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
“어떻게요? 알려주세요.”
“음…. 말하자면 길어지는데… 괜찮으세요?”
“네. 알려주세요.”
그로부터 약 2시간. 나는 신 팀장에게 이것저것 주저리주저리 설명해줬다. 옷입는 법부터, 직접 유혹해보진 않았지만 상대 눈에 드는 법, 그리고 인생 3년 선배로서 쓸데없는 잔소리까지.
뭔가 꼰대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동안 당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면서 삭친 셈 쳤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쓸데없는 소리까지 해버린 거 같아서….”
“이런 잔소리도 가끔은 들어야 되니까요.”
“하하…….”
잔소리였구나… 젠장. 꼰대는 아무리 안 되려고 의식하면서 노력해도 자연스럽게 물든다니까.
“그럼 내일 봬요 부장님.”
“네. 내일 봐요.”
신 팀장이 주차장까지 마중 나온다고 했지만 말렸다. 아무래도 저녁이기도 하고, 왔다갔다 하게 하기는 실례니까.
“아놔….”
하필 퇴근 시간. 그것도 역삼이라 역 하나 가는데 30분은 걸린다. 사당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빠질 거 같은데, 이거 엄청 늦을 거 같다.
유희한테 늦는다고 전화해야──
「부재중 전화 10건」
망했다.
~~~
“ㄴ, 나 왔어….”
유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도 차려져 있지 않았고, 방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밤 9시가 넘은 지금, 집 안은 깜깜했다.
─똑똑.
용기내서 방문을 두드려봤지만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일단 내 방으로 들어와 대자로 뻗어 누웠다.
‘젠장.’
오늘은 신호도 없다. 나와 점점 대화하면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게 됐지만, 정말로 방에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자는 건 아닐 테고, 아마 단단히 화가난 것 같다.
오늘 나올 때까지만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내 부주의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하아…….”
겨우 쌓은 유희를 향한 탑이 무너지는 거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회사에서도 무슨 일이 있다면 보고하는 것이 기본 상식인 것을, 나는 가족한테도 지키지 않았다.
이대로 또 어색해지는 걸까. 하룻밤의 추억이라고 생각해야하는 걸까. 어제 일은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걸까. 앞으로 더 이상 유희와 제대로 된 관계는 될 수 없는 걸까.
‘너무 아깝잖아.’
줬다 뺏으면 화가 나듯이, 있었다 없어지면 슬퍼진다. 그게 소중한 것이라면 더더욱.
이대로 유희와의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다.
그 계기를 통해 겨우 유희와 가까워졌는데. 다시 멀어지면 영원히 못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가만히 죽치고 있을 수 없다.
─똑똑.
다시 한 번 유희의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 유희가 듣던 안 듣던, 나는 늘 유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고 전혀 다른 상황은 없는 것이다.
“유희야.”
역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그래도 말했다.
“그…. 연락 안 받아서 미안해. 좀 상담해주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그리고 차도 엄청 밀리는 바람에… 아, 그 사람 역삼에 살거든. 아무튼 1시간동안 앞뒤 꽉막힌 차 속에서 있다가…. 그… 미안.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받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용서해줘. 유희야.
“…….”
할 말은 했다. 용서받든 용서받지 못하든, 나는 만족한다. 유희가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걸로──
“아까부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희…야.”
유희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왔다. 깔끔하게 일자로 잘린 앞머리와 부스스하지만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눈에 들어온다.
유희가 눈이 부신듯 게슴츠레 눈을 뜨며 나를 봤다.
“하아암….”
“…자고 있었니?”
“응. 아빠 기다리다 지쳐서 잤어. 저녁도 깜빡해서 안 해놨어. 지금할게.”
“ㄱ, 굳이 안 차려줘도──”
“빨리 씻어. 발냄새나.”
“미안…….”
전부 나의 착각이었단 사실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유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둘러 화장실에 들어왔다.
“후우…… 난 멍청이야 진짜.”
그래도 들어가기 직전 얼핏 본 유희의 모습은 약간의 미소가 서려있어서, 썩 부끄럽지만은 않았다.
~~~
“부장님.”
“응?”
다음 날. 아침부터 최 과장이 나를 사람 없는 곳으로 불렀다.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둘이 사귀세요?”
“…뭐? 누구랑?”
“누구긴요. 신 팀장이죠.”
“아~ 아니. 왜?”
“그게요. 어제 부장님이랑 신 팀장이랑 함께 있었다는 걸 본 사람들이 있어서요. 어제 여기 오셨었어요?”
역삼이라 설마설마했지만 주말 근무하는 사람한테 보여질 줄이야…. 아니, 적어도 일요일에는 쉬게 해주라고.
그리고 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눈에 보여지는 것만 믿고 과장되서 설명한다. 그게 재밌지도 않다. 이래서 난 기레기들이 싫다.
“하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정장 사는거 봐주러 갔을 뿐이라고.”
“그런 거 치고는 사람이 너무 달라졌는데요?”
“달라져?”
“네. 뭔가 색기가 있어졌달까… 혹시 부장님이랑──”
“안 했어.”
“제가 뭔 말 하실 줄 알고….”
“시말서 쓰고 싶냐?”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런거 아니니까…. 알아서 전달 해.”
“넵.”
괜히 기분이 찜찜해졌다. 정작 당사자랑의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했는데 주변에서 호들갑이니 원.
다시 사무실에 복귀하자, 어디선가 맡아본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
사람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수수하고 앞 뒤 꽉 막힌 답답한 사람에서, 색기있고 밝은 팀장으로 바뀌었다.
흰색 셔츠를 반 정도 걷어 산뜻한 분위기가 났고, 다리 사이가 약간 갈라진 셔링 스커트를 무릎 위까지 올려 입었다. 그리고 평소의 답답해 보이던 검정스타킹과 달리 속이 약간 비추는 검정색 스타킹을 착용함으로써 섹시한 각선미가 한층 더 강조됐다.
무엇보다 저 미소는 하루만에 나올 수 있는 미소가 아니었다.
“안녕… 하세요.”
“목요일.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신 팀장이 나와 스쳐지나가면서 느껴진 향기가 나를 감싸면서, 왠지 모르게 불안한 감각이 내 등골을 타고 흘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