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예진. (3)
* * *
“신 팀장이…?”
“네. 보아하니 진짜 모르셨던거 같네요….”
아니 그 상황에서 좋아했다고 하는게 오히려 이상한거지…. 있는 곳 마다 와서 시비 걸고, 쓸데 없이 일 만들고. 실수했을 때 뒤치닥거리 하느라 얼마나 귀찮았는데.
“그럼 나한테 부탁한 것도 전부…….”
“그래서 일지도요.”
“그래…?”
뭐…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겠다만, 진짜라도 나는 받아줄 생각이 없다. 이미 수현씨의 고백도 거절한 시점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는 것은 수현씨를 기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신 팀장이 이성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튼 부장님도 슬슬 다시 꾸리실 때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뭘 생각해. 내 타입 아냐.”
“오~? 부장님도 타입 따지는 사람이셨네요?”
“시꺼.”
최 과장이 재떨이에 재를 털고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자기나 잘할 것이지.
타입을 따진다기 보다는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다. 유희를 두고 또다른 가정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유희한테나 잘해야지.’
그래. 나에겐 유희 뿐이다.
~~~
기다리던 주말. 날씨가 엄청 좋았다.
문틈으로 태양이 보란듯이 창문을 넘어 우리 집 안을 비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배란다 쪽 창문에 비친 그림자는 병정들이 일렬로 늘어선 듯 보여서 조금 무서울 정도다. 뭐, 보나마나 울타리겠지만.
‘잘 할 수 있을까.'
유희가 권해준 데이… 아니 나들이. 절대로 실망시킬 수는 없다. 그 부담감과 기대감이 어제 계속 나의 잠을 방해했다. 사실 기대되는 더 마음이 컸다.
“…!”
갑자기 옆에서 봉긋하게 솟아오른 것이 쓱 지나갔다. 분홍색의 패드가 감싸고 있지만, 새하얀 것의 볼륨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게다가 허리를 타고 흐르는 유려한 곡선과, 또 한 번, 뒤로 포동하게 튀어나온 엉덩이를 레이스 달린 팬티가 감싸고 있다.
‘왜 저런 상스런 차림을….’
아니, 딸이 입은 것을 상스럽다고 할 순 없다. 뭐랄까. 야했다. 속옷 차림이야 아침에 당연히 서야 할 그곳이, 마치 유희를 보고 선 것처럼 상황이 민망하게 변해버렸다. 이쪽을 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
왜 안 지나가는 거지?
뭔가 일이 끝났다면 다시 유희의 모습이 보일 텐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탁탁탁 도마 위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그 상태 그대로 요리를….
아무리 더운 날씨라고는 해도 다 큰 유희가 속옷차림으로 돌아다니다니, 나로써는 민망하기만 하다. 아빠라서 의식을 안하는 건가.
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고 그런 관계인 것을 서로 인지하고 있으니 조금은 신경써줬으면 한다만…….
어떡하지, 나가야하나? 평소처럼 아침만 차려주고 들어가려나? 아니, 요즘은 밥도 같이 먹는데, 설마 저 차림으로 계속 있을 셈인가?
일단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만약 유희가 일부러 그런 옷을 입은 거라면, 나도 그에 맞춰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부엌에서는 이쪽이 나오는 것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리면, 옷을 입으러 갈지도 모른다.
“휴우….”
다행히 화장실까지 유희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깔끔하게 세안을 마치고, 부엌으로 갔다.
“…….”
내 예상과는 달리, 유희는 여전히 속옷을 입고 있었고, 거기에 에이프런을 두른 상태였다. 유희가 황급히 획 돌아보며 자신의 뒷모습을 감췄다.
유희의 얼굴이 홍당무마냥 새빨개져있었다.
“ㅇ, 왜 이리 빨리 일어난 거야….”
“아니… 그냥…….”
시간을 보고 당황했다. 한 9시는 된 줄 알았더니, 7시인 것이다. 내 기대감이 너무 컷던건가….
일단 유희가 민망하지 않도록, 내 방으로 돌아와서 문을 닫았다.
“후우…. ㅇ.”
분명 세안을 하면서 가라앉았을 거기가, 텐트처럼 부풀어 올라있었다.
‘본 건 아니겠지……?’
서둘러 손으로 가라 앉히고, 유희가 어서 아침을 차리기만을 기다렸다.
~~~
주말엔 사람이 많다. 평일에는 출근길 때문에 길이 막힌다면, 주말에는 나들이가는 사람들 때문에 길이 막힌다.
옆으로 흘끗 보이는 검정색 돌핀 팬츠와,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허벅지가 음양이 대비되는 것처럼 태양에 비친다.
흰 반팔이라 약간 속에 있는 브라가 비쳐서 그런지,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아침에 봤던 것과 똑같은 속옷이다.
……신경쓰여서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잖아.
“차. 밀리네.”
“ㄱ, 그러게…….”
러시아워.
9시가 조금 넘은 지금, 출근 시간은 아니지만, 주말이라 좀 늦춰진 듯 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지하철을 탈 거 그랬다. 용인선도 개통 했는데, 차보다 더 빨리 도착할 거라 생각한다..
아니 이게 아니라, 기껏 유희가 말을 걸어줬는데 여기서 말을 끊어버리다니 뭐하는 거야 나는.
“…….”
유희와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집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가, 최근에 조금씩 가벼워져가던 공기가 다시 무거워진 느낌이다.
“차. 기름 있어?”
“응. 어제 다 채워놨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음… 이 다음에 뭘 얘기해야 좋아할까. 아니, 딸과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날씨가 참 좋네.”
“…갑자기?”
“아, 아니 그냥…….”
나영이랑 처음 얘기 할 때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는데, 나이차 때문인가… 정작 수현씨랑도 얘기는 잘만 했잖아… 거의 수현씨가 말을 걸고 내가 받아주는 구도였지만.
그래… 받아주는 구도….
“방학때 뭐 할 예정이야?”
“방학때?”
유희가 종강을 하고 방학한지 약 2주. 그러고 보니 방학때 뭘 할지 전혀 듣지 못했다.
“응. 뭐… 아빠가 이런말 하기도 뭐하지만, 아빠는 유희의 대해 모르는 게 많아서…. 이참에 알아가려고 해.”
“…….”
유희에게 말한대로, 솔직히 말해서 유희에 대해 잘 모른다. 그간 소통을 안해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다.
조금씩 유희에 대해 알면, 나도 유희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진정한 가족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최근 관계가 발전해서 우쭐댄 것일까,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다. 유희가 계속 창 밖을 응시하며, 일부러 이쪽을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알바할 거야. 언제까지고 아빠 용돈만 받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렇구나.”
“그리고…….”
유희가 몸을 쭈뼛쭈뼛거리며, 작게 소리내서 말했다.
“나도.”
“….”
못 들은 거라고 생각한 걸까. 유희가 팔까지 올리며 얼굴을 가린다.
그래도 사이드 미러에 비친 유희의 모습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보여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
“휴우… 겨우 도착했네.”
길찾기 검색중에 대중교통으로 검색한 결과보다는 빨리 도착했다. 찬 바람을 좀 쐬서 그런지 냉탕에 들어갔다가 온탕에 들어간 것처럼, 작은 바늘들이 피부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다.
“안 추웠니?”
유희가 에어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서 에어컨을 끄지 않고 계속 있었건만, 그게 아무래도 독이 된 모양인지 몸을 약간 떨고 있었다. 안 그래도 흰 반팔티라서 더 떨렸을 거 같다.
“자.”
자연스럽게 내가 쓰던 가디건을 건내주었다. 유희가 머뭇 거리다가. 결국에는 팔은 끼지 않고 어깨에 걸쳤다.
“더우면 다시 아빠한테 주렴.”
“…응.”
내가 한 행동이지만 괜시래 부끄럽다. 뭔가 풋풋한 느낌이 든달까. 약간 껄끄러운 느낌이다.
“어른 둘이요.”
“자유이용권 하시나요?”
“아, 네.”
개장시간보다 약간 뒤라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바로 입장권을 살 수 있었다. 이것만큼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얇은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조끼를 입은 점원의 안내를 통해 신속하게 예약했다.
“커플할인 20%되세요~ 해드릴까요?”
“아… 그게…….”
커플이라니… 우리 사이가 커플로 보이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편법으로 돈을 뜯어먹을 수는 없다.
“저희는 가족──”
“네. 커플 할인 해주세요.”
“…?”
ㄱ, 괜찮은 거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