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수현. (8) Remake
* * *
수현씨와 강제로 사귀게 된 지 며칠 째.
사무실에서는 그 관계를 철저히 숨기고 있지만, 밖에서는 서슴없이 나에게 스킨쉽을 한다.
그 후에 있는 첫 데이트.
젊은 아가씨와 늙다리 아저씨가 데이트를 하는 그림은 별로 좋아 보이진 않지만, 수현씨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아, 저거 타요 저거.”
첫 데이트를 놀이공원으로 가면 기다리느라 서로 할 말도 없고 어색해져서 헤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이 먹고 오는 건 자녀랑 함께이길 바랬는데, 조카뻘인 부하직원하고 이런 곳에 와버리다니, 내 자신에게 좀 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수현씨가 팔짱을 계속 끼고 있어서 주변에서 자꾸 이쪽을 쳐다본다.
툭.
“아 죄송합니다.”
“…….”
검은 후드와 마스크를 쓴 사람(체구를 보아 아마도 여성)과 부딪혀서 사과를 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지 대꾸도 안 하고 가버렸다.
“뭐야 저 사람…….”
“그럴 수도 있죠 뭐….”
“안 돼요. 부장님한테 상처 입히는 건 용서 못해요.”
“전 괜찮아요. 놀이기구나 타요.”
“……알았어요.”
계속 수상한 점이 있을거라 생각해서 그런가. 처음만난 그날도 그렇고, 여전히 수현씨의 사무실과 밖에서의 모습의 갭이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런거 있죠~”
누가 보면 정말 커플인 것처럼 자신의 사생활 이야기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일단은 커플이 맞긴 하지만….
유희에게는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숨긴 채, 놀이공원을 갔다 온다곤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유희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다. 따르지 않으면 회사에 잘리게 되니까.
만약 유희가 없었으면 순수한 마음으로 수현씨를 마주했을까… 그건 또 아닌 거 같다.
“부장님?”
“아… 뭐라고 했죠?”
“친구랑 수영장에서 넘어졌는데 친구 브라가 벗겨졌다고요.”
“아… 하하….”
“제 말 제대로 듣고 계시긴 한 거예요?”
“듣고 있어요….”
“아닌거 같은데요. 좀 더 저한테 집중해 주세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 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머리를 비우고 즐기기로 했다.
“어! 줄 비었다. 가요!”
“네… 윽.”
줄이 너무 길어서 뭔지도 몰랐다만, 설마 자이로드롭이었다니, 학생 때도 무서워서 못 탄 걸 지금 탈 수 있을 리가…….
“혹시 못 타세요?”
“아, 아뇨… 그냥 오랜만이라서요.”
“아하~”
생각해 보니 거의 20년 만에 놀이공원에 오는 건데.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니. 기둥이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거절할까 했지만 이대로 자이로 공포증을 이겨볼까 생각해서 타기로 했다.
「출발합니다~」
안내원의 방송과 함께, 엔진 가동음이 들리더니 의자 전체가 조금씩 회전하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의 전경과 한강 너머의 전경이 눈에 보인다.
“부장님~ 기대돼요~”
“하하. 기대되네요.”
기대되긴 개뿔. 무섭다. 이대로 떨어지다가 혼절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열차는 이미 떠났고, 정신력으로 이 순간을 버텨야 했다.
덜덜덜 떨고 있는 사이에 꼭대기에 도착했고, 위에 달려 있는 집게와 도킹하면서 회전이 멈췄다.
여름이지만 몸을 덮치는 서늘한 바람이 안 그래도 커져가고 있던 내 두려움을 더 증폭시켰다. 옛날에 나온 그 고양이랑 쥐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처럼, 자유롭게 뗄 수만 있다면 심장을 따로 빼놓고 싶을 심정이었다.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다…….’
속으로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물론 효과는 전혀 없었다.
「자 떨어집니다~ 하나 둘─」
이 사람들은 항상 ‘둘’이라고 말할 때 떨어뜨린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응?”
떨어지지 않았다. 웬일로 다른 패턴을 사용하나 보다.
「셋~ 넷~」
넷까지 세? 언제까지 셀 셈──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
전혀 다른 느낌의 우리 둘의 비명은, 다른 사람들의 비명들에 섞여 들어갔다.
~~~
뒤지는 줄 알았네.
내 속마음은 모른 채, 수현씨는 나를 깔깔 비웃어댔다.
“부장님 표정 완전 웃겨~”
“그, 그렇게나 우습나요…….”
내리자마자 알바생에게 증오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더 빨리 떨구는 건 여러 번 봤어도 늦게 떨구는 건 진짜 처음 본다고.
“이번엔 저거 타요~”
밖에 있는 롤러코스터 비슷한 놀이기구. 탑승인원은 적지만 그래도 빠르고 물까지 맞을 수 있는 놀이기구다.
서로 편한 복장이라 물에 맞아도 상관은 없지만, 내심 흰 티셔츠 속에 수현씨의 속옷이 비칠까 좀 걱정됐다.
“아, 그전에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짐 저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유희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말 만약. 천 분의 만 분의 일의 확률이지만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유희와는 10살도 차이 안나는 엄마가 생기게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유희를 생각하니 역시 자연스럽게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기다리자,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며 간 수현씨가, 힘없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셨어요?”
“네.”
“수현씨?”
수현씨의 표정이 좋지 않다. 누구에게 혼나기라도 한 듯, 정말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 네. 부장님?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수현씨가 내가 들고 있던 짐을 다시 홱 낚아채갔다. 갔다 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하지만 수현씨의 얼굴은 곧 아무일 없었다는 듯 밝아졌다.
“부장님 앞줄 비었어요!”
조금 기다리니 우리 차례가 되었다.
“부장님 처음 타보세요?”
“처음은 아니지만… 타본 지 오래되긴 했네요.”
확실히 십 년도 더 됐다. 마지막으로 놀러간게 고등학교 때니까. 거의 20년 다돼 간다.
「출발~」
8인승의 보트형 롤러코스터. 올라가는것 은 롤러코스터와 똑같지만, 내려올 때는 또 느낌이 다르다. 바닥에는 물이 있어서 내려올 때 튀길 수도 있다.
“오오…. 옥!”
“꺄~!”
체감속도가 엄청난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옆에 수현씨는 팔까지 놨지만, 나는 그럴 자신까진 없었다.
두 번을 떨어지다가 겨우 끝났다.
“하하하. 부장님 물 다 튀기셨어요.”
“어쩔 수 없죠 뭐.”
물이 다 튀긴 것은 어쩔 수 없다.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놀이기구니까. 조금 많이 튄 게 좀 그렇긴 하지만….
“다음은 저거 타요!”
“아 저거….”
지하에 설치되어 있고, 빙글빙글 돌면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놀이기구이다. 가끔씩 건너편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 인사하기도 한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안녕하세요~”
반면 수현씨는 당연한 듯이 힘차게 인사했다.
~~~
‘뭐냐고 저 여자….’
아빠에게 팔짱끼고, 있는 척 없는 척 온갖끼를 다 부린다. 살랑살랑 나풀대는 검은색 원피스와 슬쩍 보이는 팬티가 대놓고 아빠를 유혹하고 있다.
‘설마 둘이…?’
분명 아빠는 사귀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스킨쉽을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빠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꺄아아아아~”
자이로드롭이 낙하하며 사람들의 비명이 들린다. 아빠가 정신 나간 표정으로 멍 때리고 있는 것을 강수현이 챙긴다.
“부장님 표정 완전 웃겨~”
“아하하….”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다른 놀이기구에 줄을 서다가 혼자 빠져나온다. 인터넷에서 저 여자에 대해 조사해보니 내 예상대로 과거에 꽤 날리던 여자였다. 하도 고소를 해서 그런지 안 좋은 쪽의 글들은 거의 다 삭제되었지만, 어떻게든 조사해서 찾아냈다.
몸굴리면서 돈까지 뜯어 내다니, 최악의 걸레가 따로 없다.
“걸레년.”
화가 났다. 아빠에게 접근한 것 자체가 화가 났다. 다른 남자들이 뜯기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다. 다만 우리 아빠에게까지 손을 댄다는 사실이 너무 화난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얼굴도 보기 싫다.
‘빨리 사라졌으면.’
아빠가 한시라도 빨리 저 여자에게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
“수현씨 잠깐 기다려요.”
생각보다 회전속도가 빨라져서 그런지 조금 어지러웠다. 벤치에 앉아 있는 수현씨를 두고 음료수를 뽑아왔다.
“감사합니다….”
“어디 안 좋아요?”
수현씨도 약간 어지러웠는지, 놀이기구 탈 때 모습과는 다르게 안색이 별로 안 좋았다.
“아뇨… 그냥 좀 어지러워서요.”
“조금 쉬어요.”
“네….”
바깥이 너무 땡볕이라 실내로 들어와 벤치에 앉았다. 수현씨도 지쳤는지 내 어깨에 기대서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조금 쉴 겸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장님은….”
“네.”
“저랑 이러는 게 싫으세요?”
“…….아뇨.”
솔직히 이런 관계는 언젠가 끝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싫은게 아니다. 수현씨를 좋아하냐 아니냐로 답하면 아니라고 하지만, 수현씨와 놀러 온 게 좋으냐 싫으냐라고 하면 좋다고 답할 수 있다.
즐길거 다 즐겨 놓고 아니라곤 할 순 없으니까.
“수현씨랑 노는 건 즐거워요.”
“’노는 건’ 말이죠….”
기대고 있던 수현씨가 일어났다. 에어컨 때문에 그런지 수현씨가 기댔던 어깨 부분이 서늘하게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 안 되겠어요.”
“뭐가요?”
“부장님. 제 부탁 들어 주실 수 있어요?”
“물론이죠.”
연애 감정이 있든 없든을 떠나서, 수현씨는 내 부하직원이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돌아가요.”
“네…? 갑자기 왜….”
“그때 그 일, 이어서 하고 싶어요.”
“수현씨….”
그 말을 하는 수현씨의 얼굴은, 울상으로 가득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