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31)

이제 1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있으면 2월이고 조금 더 있으면 3월이었다.

꽃피고 새싹이 나고 온 세상이 푸르러지면서 새들이 지저귈 때가 되면 수인을 데리고 좋은 곳에 가고 싶었다. 해외여행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상 회화 정도라면 영어도 가능했다. 우등생 수인도 영어를 잘 하지 않을까. 둘이 함께라면 어디를 가도 즐거울 것 같은데 말이다.

"다녀왔다!"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를 낸 영도는 조용한 집안에 입을 다물었다. 캄캄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건가 싶었던 영도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겉옷을 하나 하나 벗으면서 고개를 빼고 주변을 둘러보는 영도는 마치 오리새끼 같았다. 어미를 찾듯이 주변을 살피던 영도는 중얼거렸다.

"벌써 자나?"

거실에 없으면 방에 있는 거다. 영도는 당장 그리로 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문수인. 벌써 자냐?"

"음? 아니요?"

방금 귀가한 영도가 문을 활짝 열면서 물어도 수인은 놀라치 않고 태연히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했다.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수인은 '나 계속 공부만 했소.'라는 포스였다. 그걸 본 영도는 수인의 옆으로 가선 책상 위를 살펴봤다.

"지금 무슨 공부하고 있었어?"

"수학이요."

"난 수학이 제일 싫더라."

"좋아서 하는 사람이 있나요.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거지."

대답을 하면서 수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지금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영도 입장에서는 살짝 토라지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나 들어오는 소리 못 들었어?"

"미안해요. 집중하느라고 못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수고했다는 말도 못했네요."

가만히 바라보며 하는 말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애초에 서운할 것도 없으면서 지금 괜히 응석을 부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인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그의 머리에 뺨을 싹싹 비볐다. 수인은 영도가 하는 걸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영도가 떨어지자 그의 손을 양 손으로 꼬옥 쥐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밥 차려줄까요?"

"시간이 몇 시야. 먹고 들어왔어."

"바깥에서 잘 챙겨먹고 그래요?"

"물론이지. 나름 좋은 것만 다 챙겨서 먹고 있어. 지금부터 건강관리 해야지. 우리 같이 홍삼액이나 달여 마실까?"

"난 괜찮으니 형이나 챙겨서 마셔요."

좋은 건 나 먼저 챙겨주고 싶다는 거냐.

꼭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이미 제멋대로 생각을 하며 헤실거리는 영도였다. 암만 해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런 상태로 마냥 방 안에 있을 순 없었다.

"공부 그만하고 좀 나와 봐. 나가서 놀자."

"그래요. 좋아요."

수인은 순순히 책을 덮었다. 계속 공부를 한다 그러면 혼자 나가려던 영도였다. 그런데 수인이 바로 받아주니까 기분이 더 좋아졌다. 헤실거리고 웃는 얼굴이 된 영도는 수인과 팔짱을 끼고는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수인을 먼저 앉게 한 영도는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다리를 주욱 뻗고 누운 영도는 '우와.'하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좋구나. 여기가 천국이야."

간혹 몸을 끌어안고는 뒹굴거리면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해대는 영도였다. 아닌 척 하면서도 닭살 멘트를 많이 하는 영도이기에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수인은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물렸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머리를 만지는 수인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던 영도는 긴 숨을 토해냈다.

"기분 좋지. 오늘 내가 연기가 좀 됐거든."

"배우들은 연기가 잘 되면 기분 좋은가 보네요."

"당연하지. 엄밀히 말하면 직업이잖아. 오늘 내가 꼭 해야 할 할당량을 다 채운 느낌이지. 기분이 아주 그만이야."

영도의 입술 꼬리가 위로 사악 올라갔다. 뿌듯하고 만족해하는 얼굴. 그걸 바라보던 수인은 고개를 숙여 영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에 영도는 눈을 떠 수인을 바라봤다. 가만히 보나 싶던 영도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굉장한 서비슨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요. 수고하고 왔는데."

".......수인아."

감동해서 이름을 부르자 수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미소였다. 지금 이 순간 수인이 무슨 무리가 되는 말을 한다 해도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간이고 쓸개고 할 것 없이 다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정없이 속이 울렁거린다. 영도는 수인의 뺨에 손을 대려 했다. 그리고 타이밍 더럽게도 요란하게 핸드폰이 음악소리를 토해냈다.

말랑말랑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영도는 정말 싫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너랑 분위기 한창 좋을 때 오는 전화가 제일 별로더라."

"그래도 안 받을 순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에그그. 싫다."

영도는 수인의 위에서 내려와 거실 가운데에 대충 벗어둔 겉옷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켁. 엄마잖아.' 라고 하는 것에 수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수인이 다시 방으로 가는 걸 확인한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 얼굴이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방으로 들어간 수인은 책상 아래쪽에 숨겨둔 봉투를 끄집어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로 복잡함이 서린다.

분명 살 때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막상 주려고 하니 망설여진다.

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도 되고 환불을 해버리면 되니까.

지용에게 그렇게 하는 방법도 있다는 걸 들었다. 그러니 너무 부담을 갖지 말자며 수인은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영도는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잘 하고 있지요. 그럼요. 어머니 생각은 매일 해요. 안 그런 것 같지요? 안 그래요.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어머니 생각을 한다니까요? .....어울리지 않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그러죠. 뭐. 저도 말 하면서 닭살 돋더라고요. 솔직히 아침마다 어떻게 어머니 생각을 하겠어요. 품 안의 자식이라고 하잖아요. 이제 전 제 앞가림 잘하면서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지내세요.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도 친구분들하고 재미나시잖아요. 어디 제 생각이나 나시겠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도는 당장 핸드폰을 귀 옆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날카로운 고음의 여자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니 울렸다. 매번 있는 패턴이니 색다를 것도 없었다.

수인은 담담하니 소파 위에 쪼그리고 앉았고 영도는 재차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대고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네. 아니요. 그럼요. 알겠어요.' 같은 단답형의 대답만 하던 영도는 핸드폰을 수인에게 내밀었다.

"전화 바꾸래."

언제나 늘 이렇게 된다. 때문에 영도가 핸드폰 내미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수인은 그걸 받아들고는 '고모세요?'라고 말했다.

[수인아. 내가 정말 너 볼 낯이 없다. 저런 개차반인 놈하고 어떻게 지내니? 힘들고 괴롭지? 정말 미안하다. 내가 한국에 가게 되면 크게 혼내줄게. 그 때까지만 눈 딱 감고 참으렴. 알았지?]

"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형도 잘 대해주고요."

[분명 그렇게 말하라고 옆에서 주먹 들고 협박하고 있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수인아. 너무 겁먹을 것 없이 그냥 솔직하게 말하렴. 내가 그 놈을 모르겠니? 나 그 자식을 낳은 사람이야.]

고모의 말을 들으며 수인은 옆을 돌아봤다.

영도는 소파에 다시 누워선 수인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있었다. 좁은 소파에 구부정하게 누운 자세가 불편해 보이기만 했지만 영도의 표정은 너무도 편안했다. '아, 천국이다.' 그리 말하고픈 듯 푹 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직후 수인은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아요. 형이 많이 이해하고 배려해주고 있어요. 덕분에 공부도 잘 되고 하루하루가 편안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쩌면 우리 수인인 이리도 착하니. 내 아들 놈이 너 반에 반이라도 닮았으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거로구나.

굳이 고모의 불신을 정정하려 들진 않았다. 말이 길어지면 고모도 더 집요해질 테니 말이다.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렴. 나중에 대학 들어가서 유학가고 싶어지면 어려워 말고 말하렴. 너 하나 여기서 내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알았지?]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고모."

[내 아들놈이랑 같이 지내줘서 나야말로 고맙다. 혹시 말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주저하는 것에 수인은 '뭐가요?'라고 되물으며 눈을 꿈벅였다.

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영도 여자 만나는 거 아니지?]

"......여자요?"

그 순간 영도가 눈을 크게 떴다. 입모양으로 '우리 엄마가 이상한 소리 하냐.'라고 하는 것에 수인은 손가락 하나를 입술 앞에 세웠다.

"영도 형한테 애인 있냐고 묻고 싶으신 거예요?"

[뭐, 그렇지. 예전에 스캔들 났을 때에는 짜증이 확 나더만, 막상 또 아니라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더라고. 솔직히 내 아들이 뭐가 부족해. 그만한 외모에 몸에 능력이면 여자들이 줄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야. 그런데 스캔들도 아니라고 하고, 그렇다고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니. 내가 좀 초조해져서 말이야.]

원래 부모란 다 이런 걸까. 스캔들이 터질 때에는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만 막상 영도에게 여자가 없는 것 같으니 이런 걱정의 말을 한다.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인 거다. 원래 제 자식은 고슴도치라도 예쁘다 하지 않은가.

이때는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하는 게 현명한 걸까. 곰곰이 생각을 하던 수인은 입을 열었다.

"애인은 있는 것 같아요."

[뭐?! 그게 정말이야?!]

고모의 큰소리도 소리지만, 영도의 반응도 최고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영도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물었고 수인은 재차 손가락을 세웠다. 쉿. 조용히 하라는 사인에 영도는 바로 입을 다물었고 고모는 난리가 났다.

[수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애인이 있다니. 그 녀석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거야?]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누군데?!]

"저는 잘 모르죠. 그냥 추측이에요. 나중에 확실해지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그, 그래. 흥분은 하지 말아야지. 진정. 진정을 해야지.]

연거푸 숨을 내쉰 후 고모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싶었을 때 수인은 물었다.

"형 바꿔드릴까요?"

영도는 당장 고개를 저어댔다.

전화 받고 싶지 않아. 그냥 끊어!

그 사인을 읽은 수인은 웃음을 참으며 고모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 심호흡을 하는 것 같던 고모는 '그래. 알았다.'라고 말했다.

[일단은 잘 살펴보고 말을 해주렴. 다음에 내 다시 전화를 하마.]

그걸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났다. 수인은 핸드폰을 영도에게 내밀었다.

"전화 끊으셨어요."

핸드폰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영도는 웅얼거렸다.

"엄마한테 지금 무슨 말을 한 건데?"

"형한테 애인이 있다고만 말했지. 그 애인이 나라고는 안 했잖아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수인은 평소대로 차분하게 말을 했지만 뉘앙스가 좀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런 말도 하면 안 되는 거냐.'라는 가시가 박혀 있는 듯 싶어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게 아니었던 만큼 영도는 당장 부정을 했다.

"나 너 숨기고 싶은 게 아니야. 실제로 믿음이 가는 사람들에게는 연인이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어. 솔직한 마음 같아선 모든 사람들에게 다 말해버리고 싶어. 애인 있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잖아. 말하는 순간 너한테 피해가 가."

이쪽이 모든 걸 다 책임지고 감싼다 해도 수인에게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모아둔 돈으로 수인과 함께 도피를 할 수도 있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쪽에서 판단을 내린 것이지 수인의 의사는 1% 담겨 있는게 아니었다. 그런 만큼 혼자 만의 판단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눈동자 때문에 상처가 많은 수인이었다. 그런데 자신과의 일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될 경우, 그가 더 큰 상처를 입으면 어쩌란 말인가.

굳어지는 영도의 얼굴에 수인은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다 알고 있어요. 나랑 형이랑 같은 마음인데 왜 그걸 모르겠어요."

말을 하는 중에 갑자기 감정이 격해진다. 수인은 영도 쪽으로 몸을 가까이 하고는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안겨오는 수인이나 영도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수인을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형하고 오래 함께 하고 싶으니까. 그런 욕심에 때때로 말을 하게 되네요. 형은 내가 어른스럽다고 하지만 실은 안 그래요. 나 굉장히 유치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수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영도는 웅얼거렸다.

"널 묶어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싶어. 일을 하면서도 네 생각으로 얼마나 바쁜지 몰라. 이상한 남자나 여자들이 너한테 접근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 때마다 술렁이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다잡으려 해. 속박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지금 너 나이 때에는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걸 아니까. 너에게 집착을 하게 되면 이 관계가 불안해 질 수도 있는 거잖아."

만약에 수인이 실증 내면 어쩌나 싶었다. 집착을 하게 될 경우, 그것에 신물이 난다며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는 거였다. 영도는 생각한다. 만약 수인이 그렇게 떠나 버린다면 쉽사리 추스를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동정이었던 게 아니고, 여자와 사귀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지금의 이 감정은 최초였다. 그리고 최후로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간간히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네가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 너와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수인과 있을 때 보이는 이상할 정도로 바보 같은 모습들. 그것을 두고 내가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수인이 좋아하는 것 같으면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되어버린다. 그냥 그걸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연기자인 원혁이 어느새 영도와 하나가 되어서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애써 멋져보이도록 치장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가다보면 어느 게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모를 수가 있었다. 어느새 원혁이라는 사람과 한 몸이 되어서 인기라는 것에 노예처럼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 때부터 사람은 피폐해지고 망가지는 건 순간이었다.

수인을 만난 게 딱 그 직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수인과 만나면서 사람의 살 냄새를 맡고 부딪치며 생활을 하는 동안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나.

조금씩 사람과 함께 생활을하면서 지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을 지금에 와서 재차 알게 되어 영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고개를 든 수인은 그런 영도의 뺨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형은 정말 잘났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생각해요. 정말 형 같은 사람이 날 좋아해주는 건가. 하고 말이에요."

좋아하는 상대에게 잘났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 편하게 웃기만 할 수 없었다.

나 그렇게 멋진 놈은 아니야. 얼마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데.

아니라며 영도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수인은 영도의 손을 마주 잡고는 위로 올렸다. 수인이 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그가 영도의 손가락 위에 입을 맞추었다. 닿았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고 위로 고개를 든 수인은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고마워요."

"그런 말은 하지마. 당연한 거잖아. 너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지게 돼."

수인처럼 올바르고 곧고 마음이 예쁜데다 사랑스럽기까지 한다면 그 누가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새삼스러운 듯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수인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고 엄지로 이목구비를 천천히 더듬었다. 눈과 코와 입술을 더듬다가 눈을 가늘게 뜬다. 감탄을 하듯 그는 중얼거렸다.

"네가 선택한 게 나라서 정말 다행이야."

"......."

영도가 하는 모든 말들이 꿀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지금 들은 말들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듣기를 원해서 울리는 환청인지 알 수 없었다. 반은 취한 듯한 상태가 되어 수인은 영도의 몸을 끌어안았다.

영도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평소라면 잘 하지 않는 수인의 애정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안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조금씩 보여주는 수인의 수줍은 애정표현은 영도에게 있어 큰 즐거움이었다. 그걸 느낄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는 생각으로 약간의 우월감에 젖어있을 수도 있었다.

수인의 품에 안긴 채로 영도는 눈을 감았다. 폐 안쪽으로 깊숙이 수인의 향이 스며들어왔다. 달콤하고 청량했다. 숲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 영도는 수인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형한테 줄 게 있어요."

수인에게 안겨 그 느낌에 폭 빠져 있었던 영도이기에 자연스럽게 반응이 늦다. 여전히 안긴 채로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응? 나한테?"

팔을 푼 수인은 소파 아래쪽에 잠시 두었던 걸 들어 영도에게 내밀었다. 뭔가 싶으면서도 기대하게 된다. '이게 뭐야?'라고 물으면서 영도는 봉투를 뜯고 안에 담긴 것을 끄집어냈다.

"이건......목도리네."

손에 잡혀 주욱 나오는 건 청색과 붉은색, 녹색이 섞인 목도리였다. 색감이 예쁘고 털이 부들부들한데다 길이감도 딱 좋았다. 어쩌면 수인이 산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모든 단점이 보완되고 장점으로만 인식되는 걸지도 몰랐다.

영도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한다. 무척이나 감격한 사람 마냥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수인을 바라봤다.

"나 주려고 산거야?"

"마음에 안 들면 환불도 되고 교환도 할 수 있데요."

"이걸 나한테 주려고 네가 직접 산거야?"

수인이 환불, 교환 운운하는 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금방 목도리를 목에 두르며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손은 바쁘게 목도리의 모양을 잡아댔다.

"나 어때?"

"바보 같아요."

"이건 멋있다고 그러는 거야!"

"그래요. 멋있어요."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말을 들은 영도는 흐뭇하게 웃었다. 고개를 돌려 꺼진 TV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목도리를 멋들어지게 잡은 영도는 다시 수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때? 멋있어?"

눈을 두어번 깜박깜박 거리는 게 귀여운 척을 하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영도가 잘 생기긴 했지만 저런 식으로 억지 귀여운 척을 하면 부담스러워 진다. 바로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쳐다만 보려니 들떠서는 본인의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막 넘긴다.

"큰일인데? 나 더 잘 생겨져서 여자들이 줄줄 따르겠는데."

잘난 척을 해대던 영도는 본인이 한 말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래 입술을 꾹 다문 그는 수인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수인은 소파 위에 한쪽 팔을 올린 채로 앉아있었다. 일단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긴 했으나 신경 쓰였기 때문에 바로 한 말에 대한 정정을 했다.

"농담이야."

"신경 안 써요. 그래봤자 형한테는 나 밖에 없는 거잖아요."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니. 심장이 크게 뛰었다.

깊이 숨을 삼킨 영도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머뭇거리며 영도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건 그렇지만."

이건 좋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인의 자신감이 영도에게 있어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곱씹으면 씹을수록 기뻐지기 때문에 영도는 참으로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에헤헤헤헤."

"바보처럼 웃지 말아요."

"그래도 좋은 걸 어떻게 해."

수인이 준 선물이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너무 귀한 것을 받은 느낌이었다.

연신 목에 두른 목도리를 쓰다듬으며 영도는 헤죽거렸다.

"정말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여름에도 이거 하고 다녀야 겠다."

"그러지 말아요. 사람 바보로 알 거예요."

"모르는 소리. 원혁이 하고 다니면 그 때부터는 유행이야. 모두들 나 따라하기에 바쁠 걸?"

부들부들한 털을 코 위까지 올린 영도의 눈이 하도 가늘게 접혀져서 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너무 좋아하니까 선물을 준 입장에서는 뿌듯할 수 밖에 없었다. 흐뭇하게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그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많이 비싼 게 아니라서 미안해요."

"가격이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나 좋은데. 나 평생 이것만 하고 다닌다."

영도는 어린애처럼 굴었다. 몇 번이나 본인이 목도리를 두른 모습을 수인에게 자랑처럼 내보인다. 몸을 조금씩 비트면서 '어때? 잘 어울려?'라고 묻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인이 피식. 하고 웃었다.

"좋아해서 나도 기뻐요. 그러니까 전에 나 속이고 비싼 옷 사준 거 용서해 줄게요."

그 순간 영도의 행동이 멈췄다.

뜨끔해하면 지는 거다. 이런 상황은 태연하고 유들유들하게 넘길 필요가 있었다. 난 전혀 모르는 일이고, 네가 착각을 하는 것뿐이다. 그런 느낌으로 영도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는 사람이 왜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걸까요?"

"아니. 그게......"

어떻게 안 거지? 혹시 옷에 택이 붙어있었나? 그게 아니면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같은 옷을 보고 가격을 알게 된 게 아니야? 그도 아님 누가 알려줬나? 어쩌면 단순한 찍기일 수도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구는 게 현명한 대처 방법인지를 모르겠다. 어찌할까 싶어 눈을 굴리던 영도이나 머리 속이 텅 비어진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결국 영도는 배 째라 식으로 나왔다. 그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수인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건데 뭐가 잘못인데?"

"정도라는 게 있잖아요."

수인은 영도의 머리카락을 잡아 주욱 당겼다. 아얏. 하고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영도는 입을 꾸욱 다물기만 할 따름이었다. 원래 이런 일에는 말을 많이 할수록 손해이기 때문이다.

입을 다문 영도는 고집스러운 어린애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잘 참나 계속 죽죽 늘이고 싶지만 수인은 손을 떼고는 팔짱을 끼었다.

"CF 찍고 가져온 옷들이나 물건들. 정말 그냥 얻은 거지요?"

"당연하지. 그건 다 무료였어. 비굴하게 달라고 한 것도 아니야. 촬영을 너무너무 만족스럽게 잘 해줘서 고맙다면서 그쪽에서 억지로 나한테 준 것들이야. 나 처음에는 모두 안 받겠다고 그랬어."

"그래요?"

"그렇지"

다른 애들하고 다르게 난 CF 찍는다는 걸로 이런저런 걸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얼마나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데. 그런 걸로는 평판도 높은 사람이야.

허리에 양 손을 올린 영도는 가슴을 넓게 펼쳤다. 당당한 척을 하는 모습에 수인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진다. 수인이 웃자 영도도 살짝 안심이 되었다. 수인 쪽으로 몸을 붙인 그는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그만 두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고. 아까 분위기 좋았잖아."

"지금도 나쁘진 않아요."

"어허. 그러지 말고."

영도는 수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기분이 별로라면 당장 그 팔을 밀어냈을 수인이 가만히 있었다. 미소 띤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각기 색이 달라서 더 특별한 수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영도는 고개를 숙였다. 수인의 이마에 본인의 이마를 갖다 댔다.

"나 정말로 기뻐. 이거 잘 하고 다닐게."

"그래요. 정말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선물한 보람이 있네요."

수인은 미소를 지었고 영도는 그런 수인의 턱을 붙잡았다.

다가오는 영도를 확인한 수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입술이 닿는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촉감에 금방 수인의 뺨으로 홍조가 생겼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은 오래오래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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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친 여자는 '에이 뭐야.'라며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 일단 얼굴 보고 싫은 소리나 잔뜩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여자는 막상 눈에 들어오는 인물을 보곤 순간적으로 벙쪄 버렸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날렵한 턱선. 가늘고 길지만 속 쌍꺼풀이 있는 눈과 쭉 뻗은 콧날. 그리고 입술. 너무도 묘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 중에서도 압권인 건 바로 눈동자였다. 한쪽이 회색이었다. 이렇게 아래서 보면 확연이 차이가 날 정도로 말이다.

"괜찮으세요?"

목소리도 좋고 예의도 바른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여자는 귓가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 지금 사랑에 빠지는 거야? 그런 느낌이 든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뺨에 손을 댔다.

"괘,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이만."

사내가 그냥 가 버리려 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사내의 멀쑥한 차림새와 고가로 보이는 가방 및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월척이었다. 여자는 황급히 그리로 손을 뻗었다.

"잠시만-."

"수인아. 얼른 와!"

여자는 붙잡으려던 사내의 앞에 서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확인했다. 준수하게 생긴 사내의 옆으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자 둘이 붙어 서 있었다. 몸에 딱 붙는 나시를 입고도 군살은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멋진 몸매를 지닌 여자들이었다. 그걸 본 순간 수인을 붙잡으려던 여자는 급격하게 용기가 사그라졌다. 부름에 뒤를 돌아봤던 수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색하니 미소를 짓는 여자의 모습에 쉽사리 발을 옮기지 못했다.

"뭐해. 어서 와! 다른 곳으로 가자!"

거듭되는 재도의 부름에 마냥 서있을 수 없었던 수인은 그쪽으로 향했다.

수인이 다가오자 재도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찾는 참고서 찾았어?"

"아니. 이쪽이 아닌가봐."

"그러면 다른 데 가봐야 겠네."

삼성까지 왔는데도 찾는 참고서가 없다면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하나 싶었다. 지금 당장 자리를 뜰 기세인 재도를 본 여자들은 당장 눈을 번득였다.

수인의 참고서를 사기 위해서 벌써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고작 참고서 때문에 모처럼의 휴일을 공칠 순 없음이었다. 이렇게 좋은 여름 날에 말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암암리에 통하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그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재도에게 매달렸다.

"나 다리 아파.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영화나 보러 가자."

"그래. 그래. 나 배도 고파. 어디 앉아서 뭐라도 좀 먹자. 응?"

"쉬고 싶어. 쉬고 싶단 말이야~."

콧소리를 섞은 과한 애교에 재도는 아하하-하고 웃었다.

"그래. 영화도 보고 뭐도 좀 먹고 그러자. 일단 수인이 참고서 사고 나서 말이야."

"......그게 뭐야."

이렇게나 예쁜 여자 둘이 매달려서 애교를 떨어대는데 저 무슨 바가지 깨지는 소리란 말인가. 완전 썩은 얼굴이 된 둘을 두고 재도는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 가자. 다음은 어디냐."

"너는 이분들이랑 같이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래. 난 따로 가서 참고서 살 테니까."

수인의 말에 재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당장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나온 건 애초에 참고서를 사기 위함이었어. 애들도 그걸 알고 따라온 거야. 일부러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일부러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말하는 순간 여자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살기가 번졌다. '뭐라 씨부리는 거야. 이 나쁜놈.' 같은 느낌이었다. 여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러다가 괜한 화살을 맞게 생겼다.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간혹 재도는 눈치가 없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중재를 하는 건 수인 뿐이었다.

"아니. 실은 약속이 잡혔어. 그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약속? 나랑 있는데 누구랑 약속을 잡아?"

"친척 형이랑. 갑자기 가족 모임이 잡혀서 그래. 미안하다."

상대로 하여금 불쾌함을 느끼지 않고 거절을 하는 핑계로 가족모임 만한 게 없었다. 전이라면 몰랐을 수법이지만 재도와 어울리면서 저도 모르게 익힌 것이었다. 실제로 재도는 수인의 말을 듣곤 멋쩍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게까지 하면 나도 뭐라 할 수 없는 거고."

아무래도 수인은 그냥 보내야 하는 모양이었다. 원체 전환이 빠른 편이었던 재도는 냅다 웃는 얼굴로 양 옆의 여자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 아가씨들. 우리 영화나 보러 갈까요?"

"언제는 개밥 취급 하더니만."

"어허. 내가 언제 그런 취급을 했다 그래. 들어서 서로 마음 아플 말은 하지를 말자고. 일단 부지런히 걸어볼까? 응?"

여자들은 화가 난 듯 샐죽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싫은 투가 아니었다. 그걸 확인한 수인은 가보겠다며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백화점에서 나선 수인은 핸드폰을 꺼냈다. 조금 전 문자를 하나 받았다. 아무도 없으니 이제 전화를 걸어야 할 듯 싶어 기다리고 있는데 신호음이 얼마 울리지도 않아 상대가 받았다. '수인이야?'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뜬 듯 싶었다.

"갑자기 시간이 난 모양이네요."

[응. 일 하나가 금방 끝나게 되었거든. 지금 정리하고 있어. 30분 후부터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어디야?]

"삼성역 부근이에요."

[어? 나도 그 쪽인데?]

"어디에요? 근처까지 갈게요."

[일단 설명해 줄 테니까 찾아와 볼래?]

"그러죠. 뭐."

서울에서 생활을 한 지도 벌써 반년이었다. 겨울에 올라왔던 수인은 서울에서 첫 번째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덥다면서 혀를 내밀고 다녔지만 수인은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이 정도 햇볕으로는 내 피부를 다시 검게 태울 수 없다고 영도에게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빠른 걸음을 옮기는 수인은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얼굴이었다. 차분하니 영도의 설명을 들은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일단 그쪽으로 갈게요. 모르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죠."

[이상한 사람한테 괜히 말 걸었다가 피 보지 말아라.]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린애는 아니어도 내가 걱정이 된다고.]

구시렁거리는 말에 수인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알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낸 수인은 옆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넜다. 느낌으로는 이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았지만 혹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지나치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실례합니다. 재선 빌딩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아. 거기요? 여기서 가까워요. 이 골목으로 주욱 가서 왼쪽으로 꺾어 죽 가다보면 큰 도로변이 나오거든요? 거기서 오른쪽에 있어요."

설명이 무척 간단했다.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상대가 주춤하는 것 같았다. 눈을 본 건가. 그런 생각을 한 수인은 여자가 가르쳐준 대로 이동했다. 주욱 뻗어진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머리속으로 설명을 되뇌었다.

"여기서 왼쪽이라고 했지."

모르는 길을 간다 해도 당황하는 일 없이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서울에서 지내길 반년, 이곳은 재미없을 정도로 균형에 맞게 골목길과 대로가 형성되어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산길이나 포장이 되어있지 않아 지름길을 발견해야 했던 강원도에 비하면 아주 쉽게 수월했다. 잘 정리가 된 길을 설명에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주변에 펼쳐진 것들이 낯선 풍경이라 해도, 수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이. 거기 형씨."

막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형씨.'라는 호칭이 이쪽을 두고 하는 말이라 바로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응을 취하지 않았다. 그런 수인을 배려라도 한다는 듯 앞으로 껄렁해 보이는 두 사내가 다가왔다.

"오우. 부잔데? 아주 삐까리 한데?"

갇자기 나타나 사람을 위, 아래로 살펴보는 태도에서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딱 봐도 불량한 사내들이었지만 수인은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용무십니까?"

"역시 부자집 도련님은 뭔가가 달라도 달라. 이 품위 있는 말투 좀 봐. 무슨 용무십니까? 있지. 용무가 아주 많아아아니~."

양 팔을 들어 큰 원을 그리며 사내는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 이쪽도 따라 웃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수인은 무표정이었고, 다소 오바스럽게 웃던 사내도 덩달아 표정이 굳어졌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사내는 수인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돈 좀 있냐?"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이 영 껄끄러웠다. 외관이 지저분하고 입에서는 담배냄새와 썩은 쓰레기 내가 나는 사내였다. 일차적인 목적이 돈이었던 만큼 그들은 수인의 눈동자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돈을 요구하는 데에도 뻗대고 서있는 수인이 마음에 들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부탁 좀 할게. 우리가 배가 출출한데 수중에 돈이 없어서 말이야. 따아악 1장만 부탁할게."

"천원짜리일리는 없겠지요."

"아하하하하! 천원이라니! 넘했다~. 적어도 만원까지는 불러주지~."

웃어대던 사내는 당장 웃음을 거두고는 수인을 노려봤다.

"십만원만 줘. 아님 백만원도 상관없는데."

십만원. 백만원. 그건 수인에게 있어서 큰 돈이었다. 돈을 버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는 더더욱 줄 수 없었다.

"돈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입고 있는 옷 한 벌만 해도 십만원은 될 것 같은데. 지갑 꺼내서 돈 꺼내기가 귀찮은 거면 그냥 간편하게 가방 다 넘겨도 돼. 신발도 괜찮네. 그것도 벗고 가."

가만히 있다가는 손목시계며 뭐며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요구를 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수인은 미동이 없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수인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난 건지 사내들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도련님. 시간 끌지 말고 얼른얼른 움직여야-."

"이 새끼들은 또 뭐야."

사내의 목소리에 섞여서 쉰 목소리가 섞였다. 사내 둘과 수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한창 더운 날에도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한 눈에 보기에도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이 샵샵리 새끼들아. 여기가 지금 어디라고 껄렁거려. 좇 다 털리고 싶으냐. 좋은 말로 할 때, 지금 당장 꺼져라. 응?"

주머니에 손을 딱 집어넣고 고개를 살짝 위로 올린 채로 눈을 내리뜬 사내는 지나치게 험악하고 무서웠다. 수인의 돈을 털러 온 깡패와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이었다. 그걸 느낀 상대방들은 얼어붙어 있다가 황급히 뒤로 몸을 물렸다.

"죄, 죄송합니다!"

허리를 90도로 굽힌 사내들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뛰어간 방향으로 조폭 사내는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다음에 걸리면 그 때는 뭣도 없다. 잘 가그라."

그렇게 점이 되어 사라지는 이들을 확인한 이는 수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수인도 움찔했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사내는 예의 바른 태도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설마하니 도와준 걸로 보다 심한 걸 요구할 생각은 아니겠지?

예전 진성일 때의 기억이 나려 했다. 그 순간 앞에 선 조폭은 옆으로 물러나 멀찍이 세워져 있던 차량을 가리켰다. 가만히 있던 수인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뒤쪽 차문이 내려가고 거기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아서 몰라봤다. 전에 추측했던 대로 역시나 잘 생긴 사내였다. 또렷한 이목구비가 사내다웠고 일자로 다물린 입매에서 그의 강한 성품이 느껴졌다.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낸 수인이 입을 열었다.

"분명 류강씨였지요?"

"그래. 오랜만에 보는 군. 그 때보다 좋아진 모습인데."

"조금씩 적응을 해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데에 왜 계시는 겁니까."

"원래 이쪽이 내가 활동하는 반경이야."

"아, 서울 분이셨지요."

말을 하고 나서 멍청한 소리를 했구나 싶었다. 서울에서 보고, 거기서 활동을 한다고 해서 서울 분이셨군요-라니. 이건 어떻게 들어도 촌에서 올라온 사람이 할 만한 소리 밖에 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수인이 무안한 얼굴을 하는 걸 본 류강의 눈동자 안쪽으로 살짝 웃음기가 서린다.

"웃기는 녀석이로군. 됐다. 가봐라. 나랑 오래 이야기를 나눠봤자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창문이 올라가고 수인의 옆으로 사내가 다가왔다.

"가시는 곳이 어디십니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골목만 지나가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면 조심해서 가십시오."

사내가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그런 상대의 반응에 수인도 고개를 꾸벅인 후 몸을 돌렸다. 도로변으로 가는 동안 뒷통수에 닿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쪽이 이 골목길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볼 심산인 듯 싶었다.

서울 바닥은 좁구나. 새삼 그걸 느꼈다. 진성의 일을 마지막으로 저 사람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애초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서로 통성명을 할 사이도 못 되었을 터였다. 상대의 직업이 조폭이라 할 지라도 아는 얼굴을 보고 났더니 한결 차분해졌다. 그래도 깡패를 만난 것도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며 수인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도보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변을 둘러보던 수인은 반대편 도로 쪽에 세워진 벤을 발견했다. 번호를 보자 확실했다. 영도가 타고 다니는 벤이었다.

마침 오른쪽 횡당보도의 불이 켜졌다. 수인은 당장 횡단보도를 건너선 벤으로 걸어갔다.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턱대고 차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운전석 쪽으로 간 수인은 손을 들어 유리창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지만 기다리고 있으려니 창문이 내려가고 용한이 얼굴을 내밀었다.

"오. 수인이 왔어?"

"안녕하세요."

수인은 고개를 꾸벅였다. 그 모습에 용한은 흡족해졌다.

영도를 안 닮아서 참 예의가 바르다니까. 그리 생각을 하며 용한은 차문을 열었다.

"안 그래도 영도가 올 거라고 하더라고. 집에 같이 들어갈 거라며? 뒤에 타고 있어."

"형은 언제 나오는 데요?"

"금방 나와. 너 온다고 해서 시동 걸고 있으라고 해서 차에 있었지. 나도 방금 나왔어."

용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쪽에 있던 세련된 건물의 문이 열리고 영도가 나왔다. 그의 뒤로 여자 둘과 사내가 따라 나왔다. 밖으로 나오지 않은 몇몇 이들은 영도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완성된 사진은 추후 소속사로 보내드릴게요."

중간에 발을 멈춘 영도가 그들 쪽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다시 움직였다. 이동하는 영도를 알아본 사람들이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핸드폰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일은 익숙했던 영도는 동요 없이 곧장 차에 올라탔다. 다른 쪽 스텝들은 뒤쪽 차에 올라탔다. 그걸 본 용한은 수인의 등을 밀었다.

"일단 이동하자. 타."

수인은 앞으로 넘어와서 차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영도가 운전석 쪽으로 몸을 내밀고 따지듯이 묻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었어? 수인이 어디에 있어?"

"나도 방금 들어와서 숨 돌리고 있었어."

"웃기지마. 수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

"저기에 있잖아."

용한은 영도의 닦달이 힘겨웠던지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뭐라 하면서 고개를 돌렸던 영도는 수인을 발견했다.

"언제 왔어?"

표정이 확 변했다. 시크한 도시남자가 순식간에 촌구석 순정남으로 변신했다.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입술 양 꼬리가 위로 사악 올라가는 만면의 미소였다. 그렇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사람이 달라 보이는 착각마저 하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주춤하게 되었지만 문을 닫고 옆 자리에 앉았다.

"방금 왔어요."

"금방 찾아왔네? 별 일 없었어? 늦게 오면 차 끌고 가려고 했지."

"별 일은 없었어요."

오는 길에 깡패들을 만났다가 류강씨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라고 말하면 걱정할 게 빤하니까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정말 시원했다. 차 안에서는 바깥의 더위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풀어 뒤로 넘기자 영도가 마저 정리를 해준다. 가방을 살짝 들었을 때 꽤나 무게가 나갔다. 수인이 그만큼 공부를 하고 왔다는 거다. 괜히 뿌듯해서 실실 거리던 영도는 수인이 빤히 바라보자 당장 뺨에 손을 댔다.

"왜? 뭐 묻었어?"

"얼굴에 화장했어요?"

"어? 응. 방금 촬영 끝났잖아. 원래 이건 이동하면서 지우는 거야."

거짓말이 아닌 듯 영도는 뒷자리에서 화장품이 담긴 상자를 들고 와 무릎 위에 올렸다. 상자를 열고 안에서 솜을 꺼내 액을 묻히고 눈가부터 슬슬 문질렀다. 그러자 검은 게 묻어났다. 팬더가 되기 전에 금방 깨끗해졌다. 거울을 보는 것도 아닌데도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는 게 대단하기만 했다.

"능숙하네요."

"한, 두 번이 아니잖아. 이상하지? 남자가 화장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수인의 대답에 영도는 더 기분이 좋아졌다. 양 손으로 열심히 화장을 지우는 동안 용한이 차를 출발시켰다. 움직이는 차 속에서 영도는 화장을 지우고 다시 로션을 바르는 등, 정확히 14분을 투자했다. 그러는 동안 조용히 있던 수인은 손을 들어 영도의 뒷목을 건드렸다.

"여기에 아직 묻어있다."

"응? 여기?"

솜으로 목 뒤를 비비지만 제대로 지워지지 않았다. 안 보이니까 확인이 되지 않아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이리 줘 봐요. 내가 닦아줄 테니까."

수인은 영도의 손에 들린 솜을 가지고 가 목 뒤를 슬슬 문질렀다. 영도는 아예 수인 쪽으로 목을 내민 채로 조용히 있었다. 꼼꼼하게 뒷마무리까지 제대로 한 수인은 솜을 차 옆에 붙은 봉투에 넣었다.

"이걸로 오늘 일 없다고 했지요?"

"응. 집에 들어가서 쉬자. 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어."

한창 바쁠 때가 지나면 또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여름이 되어 덥기만 한데 일은 평소처럼 하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은 다 끝나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곧 무대 하나에 출연을 하고 영화 대본도 받아봐야 했다. 바쁘게 사는 건 좋지만 더위 때문일까. 묘하게 축축 처지는 것 같았다. 

아직 오후 3시인데도 영도는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해댔다. 그걸 빤히 보던 수인이 중얼거렸다.

"집에 들어가도 당장 먹을 게 없는데."

"김치랑 된장 있잖아. 그걸로 먹지 뭐."

"가끔은 색다른 게 먹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냥 네가 해주는 거면 다 좋은데...... 뭐, 가끔씩 다른 걸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집 근처 마트라도 가볼까?"

"아파트 장 열렸으면 그쪽으로 가는 게 더 쌀 수도 있는데."

"확실하게 모르는 거니까 그냥 마트로 가자."

"그래요. 그렇게 하지요 뭐."

내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수인과 영도였다. 얼핏 들으면 참 사이좋은 사촌지간으로 여겨지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건 사촌이 아니라 연인 같은 느낌이었다. 알콩달콩한 신혼부부 느낌이랄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핑크빛 분위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괜한 느낌인건가 싶어 뒤를 흘깃흘깃 보다가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엿보고 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었기에 움찔하던 용한은 곧 감탄을 했다. 차가 멈춘 틈을 타서 아예 고개를 돌려 수인을 바라봤다.

영도가 관리를 해주기 때문일까. 볼 때마다 피부가 하얗게 되고 피부결도 좋고, 이목구비도 날렵해지는 것 같았다.

"수인인 점점 인물이 사는 것 같아."

"이상한 말은 하지마."

영도는 수인의 무릎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이건 내거야. 그러니까 건들이지 마. 라고 하는 꼴이었다. 지 사촌동생 잘 생겼다고 칭찬하는 건데 왜 저렇게 노려보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영도가 수인이 챙기는 건 알아줘야 한다면서 용한은 앞으로 몸을 돌렸다.

다시 차가 움직이고 수인은 에어컨의 바람을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선글라스 쓸 거지요?"

"응. 모자도 쓸까?"

"그러면 덥잖아요. 마트 안은 시원하려나."

"선글라스만 쓰지 뭐. 골라 줘."

영도는 옆에 손을 대고는 판을 내렸다. 그러자 안쪽으로 가득이 들어가 있는 선글라스가 나타났다. 차 안에도 저런 수납공간이 있는 게 여전히 신기했지만, 그보다는 너무 많은 선글라스에 질리게 된다.

"지나치게 많아요. 봐도 모르겠네요. 아무거나 골라서 써요."

"그러지 말고 골라 줘. 뭐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

정말 봐도 모르기 때문에 영도더러 고르라 한 거였다. 하지만 영도는 양 손을 내리고 있었다. 어서 골라주라는 듯 눈을 꿈벅이며 이쪽을 보기만 하는 것에 수인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러다가 찬찬히 위를 살피고 가장 왼쪽에 있던 걸 꺼냈다.

"이거?"

"좋은데?"

영도는 당장 선글라스를 받아 써봤다. 본판이 좋기 때문인지 잘 어울렸다. '괜찮아?'라고 묻는 영도에게 수인은 엄지를 세웠다. 기분 좋게 웃은 영도는 당장 그 엄지를 붙잡고는 공중에서 크게 두 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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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물건이 비싼 듯 싶어 마트는 자주 찾는 편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환한 빛 아래에 놓인 물건들은 확실히 다른 것들보다 때깔이 있어 보이는 듯 싶었다. 게다가 원 플러스 원이라고 붙여진 상품의 경우 저절로 손이 나가게 된다. 이거 하나 사는데 더 주는 거야. 같은 느낌으로 냉큼 집어 들어 카에 넣으면 기다렸다는 듯 손이 내려와 그걸 끄집어냈다.

"왜? 나 먹고 싶어."

"이걸 먹고 싶다고요?"

수인은 다시 보라는 듯 영도가 고른 걸 들었다. 공중에 들린 건 왕소세지였다. 이런 건 초딩들이나 반찬으로 먹는 거야. 그리 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도 안 먹을 거예요. 그리고 나 이런 걸로 반찬 안 할 거예요."

수인은 햄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놨다.

"이런 몸에 좋지도 않은 걸 일부러 조리해서 먹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전에 피자는 너도 잘 먹었잖아."

"그런 건 가끔씩 먹는다 쳐도 이건 아니에요."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수인은 당장 햄을 제 자리에 던지고 카트를 끌고 가버렸다. 미련이 남은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영도였으나 금방 다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잘 진열이 된 스팸을 가리켰다.

"스팸이다. 저런 것도 먹으면 짭쪼롬하니 맛있는데......"

스팸 앞에 멈춘 영도는 그것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예전에 시켜먹는 것도 귀찮았을 때 이거 하나면 두 그릇은 뚝딱이었다. 그 때의 기억이 나기 때문일까. 지금 당장 그렇게 먹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먹고 싶어요?"

영도는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된장 주먹밥 위에 올려서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

수인은 스팸을 살펴봤다. 이런 거 말고 그냥 고기 한 번 구워주고 싶은 게 진짜 마음이었다. 하지만 스팸이나 햄 같은 걸 아주 안 먹을 수도 없었다. 영도가 쉽사리 발길을 옮기지 못하는데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고. 조금 양보를 해야만 하나.

"기다려 봐요."

수인은 스팸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인스턴트를 살 때 영도가 확인하는 건 유통기한 뿐이었다. 하지만 수인은 재료성분까지 꼼꼼하게 보더니 3개를 골랐다.

"이걸로 살게요."

"좋았어. 고마워어어어."

"귀여운 척은 하지 말고요."

집 안이라면 모르겠지만 바깥에서 부비작 거리면 곤란했다. 수인은 다시 카트를 끌고 옆으로 지나갔다. 수인이 쌀쌀맞게 굴어도 속마음은 안 그런다는 걸 알기에 영도는 조금도 마음 상하지 않았다. 뒤를 졸졸 따르던 영도가 갑자기 수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초밥이다."

그리 말을 하고는 수인을 질질 끌고 간다. 싱싱한 생선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 한쪽으로 초밥이 올려져 있었다. 때깔도 곱고 한 눈에 보기에도 맛있을 것 같은 것들 뿐이었다. 전에 사먹은 적이 있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영도는 수인의 어깨에 양 손을 올리고는 설득에 들어갔다.

"이거 맛있는데. 여기 거는 깔끔하고 싱싱해. 사먹어도 괜찮은 거야."

사먹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수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설명이 길어진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도 수인이 안 된다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말이다.

수인의 결정을 기다렸다. 꼬리만 안 흔들 뿐이지. 겉으로만 보면 말 아주 잘 듣는 강아지였다. 수인은 일단 초밥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봐도 알 순 없었다. 그저 맛있게는 생겼는데 비싸구나. 라는 생각을 할 따름이었다.

"혹시. 원혁씨 아니세요?"

수인과 영도 두 사람은 동시에 움찔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푸근한 인상의 아줌마가 보였다. 초밥 쪽에서 일하는 점원인 듯 싶은 그녀는 원혁을 보고는 양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나. 맞구나. 오랜만에 마트 오시는 거 아니세요?"

영도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상대는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예전에 이곳을 종종 찾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어머머.'라고 묘한 감탄사를 연발하던 점원은 초밥 쪽을 가리켰다.

"초밥 드시려고요? 이거 사가세요. 제일 평판이 좋아요. 이거 사시면 제가 몰래 서비스 넣어드릴게요."

"라는데 어떻게 하지?"

영도는 수인을 봤고 점원도 마찬가지였다. '친구 분이세요? 이거 방금 한 거라 정말 싱싱하고 맛있어요.'라며 적극 추천을 했다. 강원도에 있을 때 초밥은 구경도 못하던 수인이었다. 여기서 와서 영도가 고급 횟집에서 먹여준 게 처음이었다. 독특하지만 맛있었다. 그 때의 기억이 나면서 괜히 입 안으로 침이 고인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걸로 사가요."

"아싸. 고마워."

영도는 신이 나서 추천을 받은 초밥을 가리켰다.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신이 난 영도와 덩달아 점원도 손길이 바빠졌다. 투명 봉지에 선택한 초밥을 넣나 싶던 그녀는 그 안에 작은 상자도 같이 넣었다. 그건 사지 않았는데. 수인이 한마디 하려는데 점원이 영도를 보며 말했다.

"여기 서비스에요. 그냥 같이 넣어 가면 모를 거예요. 그리고 이번 드라마도 잘 봤어요.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연기를 잘 한데요? 우리 식구들은 모두 원혁씨팬이에요."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괜찮으시면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종이 있으세요?"

기다렸다는 듯 냉큼 스프링 노트가 나왔다. 매직을 받아 멋들어진 사인을 하고 점원에게 넘기자 그녀는 크게 기뻐하며 그걸 양 손으로 끌어안았다.

"가보로 삼을게요. 아이고 정말 잘 생기셨어요."

목례를 한 영도와 수인은 초밥 코너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영도가 카트를 끌었다. 옆을 졸졸 따르면서 수인은 카트 안을 살폈다.

영도가 무작정 집어넣으면 꽤 골라냈다고 생각은 하는데도 뭔가가 가득했다. 그곳에 놓인 초밥. 원혁이라는 연예인의 후광 덕분에 서비스도 두둑이 받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갈비를 산 곳에서도 고기가 더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수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이쪽을 주시하거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분명 영도가 마트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들은 눈치 챘을 터였다. 그걸 몰랐던 건 수인 뿐이었다. 고작 선글라스 하나로 영도가 감추어질 거라고 생각하다니. 너무 안일했구나. 묘한 충격을 받고는 당장 영도를 올려다봤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 같아요."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챘겠지. 난 변장을 해도 금방 들켜. 스타의 아우라가 있거든."

머리카락을 뒤로 삭 넘기며 잘난 척을 하는 영도를 빤히 바라봤다. 남들 보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겠지만 영도는 알 수 있었다. 그쯤 해두라는 거지. 이제는 수인이 저렇게 바라봐도 무안해지지도 않고 그저 웃기기만 할 따름이었다. 수인이 재미있다고 웃어도 좋지만, 저렇게 정색을 하는 것도 좋았다. 카에 팔을 올린 영도는 앞으로 죽죽 끌고 가면서 과자 코너를 가리켰다.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것 좀 사가자. 뻥이요 같은 거."

"과자는 잘 먹지도 않잖아요."

"먹을 거야. 들어가서 밥 만들어먹고 게임 좀 하자. 닌텐도 재미있잖아. 그치?"

재미있지. 최근 수인이 조금 빠져있는 거기도 했다. 닌텐도 말을 들었을 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내일 테스트 있는데......"

"내일 있는 테스트 미리 공부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꼬박꼬박 공부하고 있었으니까 오늘 하루 쉬어도 괜찮아. 오히려 공부를 안 하는 편이 훨씬 더 좋을지도 몰라."

"듣기 좋은 말로 그냥 갖다 붙이지 말라고요."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난 가서 과자 고른다?"

"마음대로 해요."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도는 카트를 끌고 과자 코너로 돌진했다. 무작정 고르면 한 소리 더 해야 겠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잘 살펴보면서 하나씩 안에 집어넣었다. 너무 단 건 아니고 고소하거나 바삭한 것 위주였다.

생각해보니 일을 하고 집에서만 쉴 수 있는 영도였다. 과자가 몸에 안 좋다고는 해도 먹고 싶은 걸 먹는 것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일 터였다.

사고 싶은 걸 너무 제지하지 않는 편이 좋으려나.

문득 든 생각 때문에 수인은 조용히 영도의 뒤만 졸졸 따랐다. 그러다가 사과 음료를 발견하고는 그걸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시원할까요?"

"맛있기도 하지. 일단 넣자."

수인은 순순히 카트 안에 음료수를 넣고 팔짱을 끼었다. 영도는 박스에 넣어진 과자를 들고는 유심히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이건 처음 보는 과자잖아. 일단 넣어볼까나."

"너무 많이 사는 것 같은데요."

"빈 수레가 요란한 거야. 이렇게 생겨놓고서는 의외로 별 거 없을지도 몰라. 그냥 사지 뭐."

영도가 휙-하고 카트 안에 넣은 걸 끄집어내 가격을 확인했다. 무려 8,700원이었다. 과자 주제에 왜 이렇게 비싼 건가 싶었다. 정말 말도 안 된다 싶었던 수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되게 비싸다."

"그러지 말고 사가자. 날 더울 때에는 이런 거 야금야금 먹는 재미가 그만이야."

카트에 팔을 올린 영도는 정말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일단 골라. 사자고. 나 그만한 능력 있어.'라는 어필을 하려는 것도 같은 모습이었다. 영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인은 과자를 위로 올린 채로 물었다.

"정말 먹고 싶은 거예요? 단순히 들떠서 아무거나 집어넣는 거예요?"

".......으음."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간다. 입술을 앞으로 툭-내밀며 귀여운 척을 하던 영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같이 마트 다니는 거에 살짝 들뜬 것 같기도 해."

"그러면 당장 이것들은 빼버려요."

사주게 두자 싶지만 역시나 이건 안 되겠다 싶었다. 가만히 있는 동안 카트가 가득 찰 정도로 장을 봐버린 것이다. 수인이 과자를 하나하나 빼서 제자리에 두자 영도는 당황했다.

"왜, 왜 그래?"

"과자 말고 아이스크림 몇 개 집고 이만 들어가요. 더 살 순 없어요."

"그러지 말고 조금 더 놀다가 들어가자. 나 빵도 먹고 싶어."

완전 어린애였다. 그렇다면 더 영도의 페이스에 끌려갈 필요가 없었다.

잘 들으라는 듯 수인은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형. 바깥에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집 안에서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드는 거예요."

영도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입을 반쯤 벌린 그는 '아. 그렇구나.'라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깨달음 후에는 더 이상 '이거 사자. 저거 사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원혁을 알아보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서 계산대로 직행했다. 당장 물건을 내리고 계산을 하려는 모습에서 성급함마저 느껴졌다.

사람이 왜 이렇게 단순할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그 모습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던 수인은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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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되니 내리쬐는 햇볕은 나날이 강렬해졌다. 수인은 더위에 강한 편이고 영도도 그럭저럭 버티는 상태였다. 하지만 유난이 더위에 약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람이 더위에 지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싶었던 수인은 최씨 영감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손 하나 까닥 못하고 축 늘어지게 된다.

"으아아아. 죽겠다."

경비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의자를 그 앞까지 끌어서 앉은 최씨 영감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바지를 돌돌 말아 무릎 위까지 올리고 반팔을 입은 데다 등 뒤에서 선풍기가 강으로 돌아가고 있는데도 왜 저렇게 힘들어하나 싶었다.

장보고 나서 양 손에 짐을 가득이 들고 있던 수인과 영도는 최씨 영감의 모습이 너무도 측은하여 그 앞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죽겠다. 에그그그그. 어? 수인이?"

수인 옆에는 영도도 있었다. 최씨 영감은 모자를 위로 슬쩍 올렸다.

"원혁씨. 안녕하십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좀 참아주십시오. 너무너무 더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냥 문 닫고 에어컨을 틀지 그러십니까?"

"제가 에어컨 알러지가 있어서 켤 수가 없습니다. 에그그그. 죽겠다."

에어컨 알러지가 있다니. 참 안 되었다. 이럴 땐 문 닫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는 게 제일인데. 동정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동안 수인이 봉지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좀 녹았을지도 모르지만 드세요. 시원해지실 거예요."

"아이구. 아이고. 우리 수인이. 역시나 너 밖에 없다."

아이스크림을 받자마자 뜯어서 한 입 문다. 황흘한 얼굴이 되어선 눈을 감는 게 측은하기만 했다.

"있다 저녁에 시원한 맥주랑 치킨 보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래주시면 고맙지요. 에고고고고."

평소 먹을 걸 보내면 환희에 몸을 떨던 최씨 영감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은 리액션이 평소와 달랐다. 그만큼 에너지가 떨어진 상태라는 거겠지. 그냥 두자며 영도는 수인의 등을 툭툭 쳤다. 최씨 영감이 신경 쓰였던 수인은 자꾸만 그를 돌아봤고, 영도가 뒤를 밀었다. 일단 올라가자는 거였다. 양 손 가득이 짐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여기에 서있을 순 없었다. 수인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장 보고 오시는 길이십니까."

로비에 있던 지용은 웃는 얼굴이었다. 에어컨을 짱짱하게 틀어두기 때문에 그는 최씨 영감보다는 근무환경이 좋은 편이었기에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일 터였다. 실제로 바깥으로 나가 따가운 직사광선을 정면으로 받으면 당장 표정이 바뀌겠지.

그냥 들어가기도 뭐했던 수인은 초밥집에서 서비스로 받은 걸 끄집어내 지용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드실래요?"

"아닙니다. 드시려고 사 오신 게 아닙니까. 전 됐습니다."

"출출해지시면 드세요.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

원래 사려고 했던 초밥이면 충분했다. 서비스로 받은 것도 초밥이었다. 이런저런 것들이 10개 정도 들어가 있는 거였다. 이 정도면 지용 한사람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터였다.

수인의 뒤에 선 영도는 기다리고 있었다. 받지 않으면 두 사람이 마냥 서있을 태도였다. 결국 지용은 초밥을 받아들었다.

"고맙게 먹겠습니다. 이만 올라가서 쉬십시오."

수고하라는 말을 한 영도는 수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1층에 멈춰져 있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영도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벌써부터 졸려."

"들어가자마자 침대로 누울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일단 씻고 정리 하는 거 도와줘요. 알았지요?"

"그래.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을 한 영도는 눈을 감았다. 높은 층이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내리게 되었다.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이는 동안 수인이 '어디에 넣었는지 잘 생각해 봐요.'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도는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열쇠를 발견하곤 그걸 끄집어냈다.

열쇠를 밀어 넣고 돌리면서 영도는 수인을 흘깃 봤다. 수인은 양 손으로 짐을 높이 든 채로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너 마누라 같다."

"......"

수인은 눈을 꿈벅이며 영도를 바라봤다. 이를 보이며 웃는 얼굴이 꽤나 의기양앙했다. 그리 말해서 이쪽이 동요를 했구나 싶은 모양이었다.

이런 유치빵구. 사람이 점점 더 왜 이렇게 깜찍해지는지 모르겠다.

이대로만 당할 수 없었던 수인은 태연히 받아쳤다.

"새삼스럽게 왜 이래요. 처음부터 난 형 식모였잖아요."

영도가 막 문을 열던 참이었다. 그의 고개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휙 돌아갔다. 정말 놀란 듯 눈이 댕그랗게 떠져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인은 쿨하게 발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너 말이 너무 심하다. 식모라니. 나 안 그랬어."

"그럼요. 개김 정신 투철한 촌닭이었지요."

"아, 안 그랬다니까!"

"한국 제일의 배우라는 사람이 기억력이 그렇게 없어서 어디 쓰겠어요."

먼저 집으로 들어간 수인은 식탁 위에 짐을 올려놨다.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는 수인의 뒤를 졸졸 따르던 영도는 식탁 위로 엎드렸다.

"설마 그거 가지고 아직도 뚱해있는 건 아니겠지?"

찬장을 하나하나 열어보고 빈 곳이나 다 쓴 것들을 눈으로 재차 체크하면서 수인은 태연히 답했다.

"촌닭이라고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겠어요. 나 살면서 그렇게 독특하고 창의적인 별명이 붙은 건 한 손에 들 정도 밖에 없다고요."

이 화제만으로도 수인은 2박 3일 동안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초반에 영도는 수인에게 너무했었다. 그 때의 일을 기억에서 지울 수도 없고 떠올릴 때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겠는 영도는 두 손을 싹싹 비벼댔다.

"미안하다고오오오-."

"늘어져 있지 말고 씻고 와요."

수인은 그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영도가 식탁 위에 찰싹 달라붙어서 스트립쇼를 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투였다. 지금은 정리를 하는 도중이니까 너무 귀찮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을 하며 영도는 웅얼거렸다.

"너도 씻어야 하잖아."

"난 이거 정리 다 하고나면요."

"나도 도울게."

"내가 형을 몰라요? 정리하면 귀찮다고 바로 소파로 갈 거면서. 안 돼요. 얼른 들어가요."

"......잔소리 9단이야. 아주."

하지만 그 잔소리가 듣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다만 이쪽이 툴툴 거리는 걸 알아줬으면 싶은 거다.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영도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내내 그쪽을 보지 않았던 수인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비로소 눈을 들었다. 영도는 안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가만히 있던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귀엽기는. 그리 생각을 하고나서 정리를 위해 바쁘게 손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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