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31)

차에 올라탄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있는 시경이 보였다. 안절부절 못해하는 용한의 옆에 앉은 시경은 막대사탕을 쪽쪽 빨고 있다가 영도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잘 만나고 왔어?"

"이거나 받아."

영도는 여자에게 받은 서류 봉투를 집어던졌다. 정확히 시경의 얼굴에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아얏.' 하는 소리를 낸 시경은 봉투를 받아들며 영도를 노려봤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난 사장이라고."

"툭하면 나타나시고 시간 더럽게 많으신 모양입니다. 사장님."

한마디 던지는 영도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었다. 그 목소리에도 시경은 태연했지만 말이다.

몸살이라던 용한은 오늘 얼굴을 내밀었을 때 지나치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하게 됐다.'라고 말하는 순간 헤드락을 거는 것으로 하루 농땡이를 친 것에 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걸로 시경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또 얼굴을 내미는지를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영도가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는 동안 시경은 봉투 속을 확인했다. 보는 순간 뭔가 알았는지 바로 휘파람을 불었다.

"굉장하네."

"나 필요 없으니까 너나 가져."

"왜? 너한테 들어온 선물일 텐데?"

"나중에 다시 가지고 갈 거면 애초에 주지를 말라고 해."

"그건 농담으로 하는 말이야. 요즘 누나 시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서 후계자 승계 문제 때문에 탈이 많나봐. 지금까지 일 하면서 비리 좀 끼인 건수는 다 잘라내는 모양이야. 가족들한테 주면 나중에 어떤 약점이 잡힐지 모르니까 너한테 주는 거겠지. 나중에 뺏는다는 말도 농담일거야. 그러니까 그냥 받아."

조근조근하니 설득을 하는 시경이었으나 영도는 콧방귀를 뀌었다.

"시간 지나면 그런 별장보다 더 많이 돈 벌 수 있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정말 고맙습니다.'라면서 냅다 고개를 숙였을 터였다. 그런데 영도는 성가시다는 투였다. 원래 이런 성격이라는 걸 알긴 하지만 동시에 뭘 믿고 이리 뻗대는 건가 싶은 것도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필요 없어. 별장 같은 거 있어봤자 뭐하겠어."

"다 노후 대책이지."

시경은 영도의 옆자리에 봉투를 던져버렸다. 나중에 내릴 때 챙기든지 말든지 하라는 거였다. 영도는 잠시 굳은 눈으로 그걸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받은 것들은 상당한 양이었다. 그런 쪽으로는 무심해서 가만히 있을 뿐이지 정리를 하면 재벌 2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시경에게 묻는다면 지금 원혁이라는 존재에 대한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관심 없었다. 어차피 원혁은 가상의 인물이었다. 그 인물이 다른 방식으로 벌어들인 부분에 대해선 아예 욕심을 내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가 진짜인 듯 여겨져서 그것에 휘둘려 중심을 제대로 잡을 수 없게 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보다 이것 좀 볼래?"

시경이 얇은 봉투를 내밀었다. 갱지로 된 봉투를 보는 순간 영도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네가 엉성하게 프린트한 걸 들고 오면 괜히 불안하더라."

"아하하. 그런가?"

시경은 웃었고 용한은 공포에 떨었다.

간혹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끼어있다 보면 너무너무 무서울 때가 많았다. 공포 대마왕 원, 투가 붙어서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나. 어차피 끼어들어도 잘 모를 일일 터였다.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일 거라며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는 동안 영도는 차분히 프린트 물을 살펴봤다. 눈동자만 움직이는 영도를 보며 시경은 헤죽거리고 웃었다.

"언플 들어가는 모양이더라. 너보다 못한 게 나대면 좀 거시기 하지 않아?"

시경의 말이 한 귀로 들어와 반대쪽으고 흘러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영도는 꼼꼼하게 내용을 살펴보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그리 호감은 품지 않은 젊은 놈의 사진이 있고 그 아래로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최근 뜨기 시작하는 신인 배우와의 인터뷰. 현재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 현장에 대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라는 문구로 시작해서 동료를 이니셜 처리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 톱스타 A의 경우라 하며 이런저런 말들을 해대고 있었다.

웃으면서 말을 하면서도 그 속으로 비난과 부정적인 말이 한 가득이었다. 뒷담화였다. 시작은 이렇게 되었다가 슬슬 인터넷을 이용할 터였다. 소문에 의하면 원혁이 촬영장에서 이렇다더라. 덕분에 여러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분위기도 꽝이더라. 인기가 많아졌다고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라는 식으로 점점 말이 퍼질 터였다.

작은 소문이라도 없는 편이 나았다. 작은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말 성가신 놈이로구나. 이래서 아까 그 여자도 이 놈을 들먹인 것인가.

"눌러버릴 거지?"

"누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영도는 프린트 물을 접어서 시경에게 내밀었다.

"한 방이면 끝나."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영도의 입가에 서린 여유로운 미소를 본 시경 또한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래야 우리 황제님답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은 정말 공포였다.

똑바로 보기가 무섭다면서 용한은 핸들을 잡은 채로 덜덜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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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을 다니는 사람들은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느긋하게 옆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물건을 살피고 있었다. 수인은 그런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득 그들 보기에 이쪽은 어떨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걸까. 수인은 잠자코 있다가 눈을 내리떴다. 본인의 차림을 확인하고 속으로 '괜찮아.'라고 중얼거렸다.

속에 입은 목 폴라를 제외하고 모두 영도가 새롭게 사준 것이었다. 괜찮게 입고 나오려 언제나 노력하니까 크게 이상하진 않을 터였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인은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보던 수인은 곧 목도리를 파는 매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액을 알 수 없어 가장 앞에 있는 것에 손을 댔다.

"목도리 사시게요? 이건 어떠세요?"

손을 대기가 무섭게 옆으로 여자가 달라붙었다. 아직은 어린 인상이었다. 여자는 양 손으로 수인이 건드린 목도리를 가리켰다.

"최근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이랍니다. 손님께 아주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점원의 태도에 솔직히 좀 당황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뭐가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점원에게 추천을 받는 것도 크게 나쁠 일은 아닐 터였다.

"아니요. 제가 할 게 아니라서요."

"그러면 누구한테 선물하시게요? 여자 친구 분이신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형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로 29살입니다."

"29살이라. 그러면 이쪽 라인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여자는 옆으로 수인을 데리고 갔다. 앞에 걸린 것보다 조금 더 색이 차분하고 비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자는 수인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접근을 하자 가운데에 있던 걸 끄집어냈다.

"요새 30대인 분들이 가장 선호하는 거예요. 예쁘지 않나요?"

수인은 점원이 건네는 목도리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가볍고 따스했다. 이 정도라면 영도도 좋아할 것 같긴 했다.

이런 물건을 사러 나온 건 거의 처음이었다. 친절한 백화점 직원의 설명에도 어떤 식으로 응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인이 망설이는 듯 싶자 직원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홍보를 했다. 그 말만 들으면 당장 이걸 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목도리를 잡고 위를 쓰다듬던 수인은 '이건 얼마인가요?'라고 물었다.

"이번에 저렴하게 나왔어요. 24만원입니다."

"24만원이요?"

"네."

놀라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간 수인이었지만 백화점 직원은 왜 그러냐는 듯 되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그 정도 하는 거예요.' 그리 말을 하는 얼굴이었다.

수인은 말문이 막혔다. 목도리라 해서 많이 잡아도 3, 4만원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24만원이라니.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일단 영도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입장에 있었다. 영도는 월 100만원을 주겠다 했지만 수인이 기겁을 하는 통에 40 정도로 조정에 들어갔다. 그것도 많다고 했지만 영도는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걸로 기본 차비와 식대를 해결하고, 문제집이나 살림에 들어가는 돈은 영도가 준 카드로 해결을 하고 있었다. 핸드폰이나 기타 다른 건 모두 영도가 부담을 하는 편이었다. 이번 1월에 한 번 용돈을 받았으니 아직 많이 남아있긴 했다. 하지만 그 돈으로 목도리를 살 순 없었다.

"너무 비싸네요?"

"하지만 이 재질로 그 금액이면 정말 싼 거예요. 30대시면 그 정도는 두르고 다녀야 주변에서도 알아주시지요."

"어차피 겨울도 거의 다 끝나 가는데......"

"그러지 마시고 이번에 장만해 주세요. 형님께서 좋아하실 거예요."

점원의 사근사근한 말도 수인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따름이었다.

아무리 계산을 맞춰 봐도 목도리 하나에 24만원은 무리였다. 그런 데에 쓸 돈은 없었다. 수인은 목도리를 다시 자리에 걸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고개를 꾸벅인 수인은 몸을 돌렸다.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물건을 만졌으면 사야 할 거 아니야."

다른 쪽에도 목도리가 있을까 싶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수인은 흠칫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던 수인은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점원은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뭐예요?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손님."

비웃듯 바라보는 시선에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차분히 말했다.

"제가 그걸 꼭 사야 하는 건가요?"

그 말에 점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냥 지나쳐야 하는지 아니면.......

그리고 그 때 여점원의 옆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여점원은 흠칫했고 수인도 놀랐다. 위를 올려다보는 점원을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지용이였다.

"물건을 만지고 시착 한다고 해서 무조건 구매로 이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고가의 물건을 고름에 있어 그 정도는 손님인 우리가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까. 그런데 돌아서는 손님의 뒤에 대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옳은 태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나 늘 맨션 로비에서 만나던 지용이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전에 그가 하는 말을 멍하니 듣고만 있었던 수인은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했다. 하지만 점원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니. 저, 저는-."

"점원 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백화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아니면 당신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은 걸 수도 있고요. 여러모로 오늘 참 안 좋은 경우를 봐서 실망스럽기 그지없군요."

"아니요. 저는....."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렸다.

차분한 목소리로 질타를 하는 지용 덕분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정장을 입은 중년 사내가 달려왔다. 무슨 일인지를 묻는 사내에게 지용은 재차 입을 열었다.

"이 점원이 손님께 큰 실례를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싶은데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당신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점원이 저 분께 사과를 하면 됩니다."

지용의 손이 수인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지적에 사람들의 시선이 재차 수인에게 몰린다. 수인은 당혹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다.

"수인씨. 이리로 오십시오."

"아니요. 괜찮아요."

수인은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지용이 그런 수인의 곁으로 다가가 굳은 안색을 취한 채로 말했다.

"보는 제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갈 생각이십니까?"

"괜찮아요. 사과 같은 건 받을 필요 없어요. 그냥 가요."

점점 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흥미진진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수인은 지용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서요. 그냥 가요."

수인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보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얼굴을 보이고 다닌다 해도 원래 눈동자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던 수인이었다. 그게 익숙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다녔다는 걸 떠올린 지용은 한숨을 쉬었다. 몸을 돌려 점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다음부터 조심하십시오."

결국 점원은 눈물을 보였다. 그런 점원에게 중년 남자가 날카로운 질책을 한다. 그걸 확인한 지용은 수인과 함께 그 자리를 떴다.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면서 지용은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은 점원이었습니다. 불쾌하기 짝이 없네요. 저는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고객을 대한 적이 없습니다."

고급 맨션에서 오랜 시간 경비 및 보완 쪽으로 일을 하던 지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같은 계열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태도가 어이없기만 했다. '다음에 걸리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다.'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에서 뒷끝 작열을 하는 일면이 엿보였다.

"죄송합니다. 수인씨는 조용한데 괜히 제가 더 흥분을 했군요."

"아니요. 덕분에 속이 조금 시원해졌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금액으로 목도리를 살 순 없었다. 그래서 물건을 내려놓고 나섰을 뿐이었다. 고작 그런 일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나 서울은 무서운 곳이었네요."

"서울이 무서운 곳인 게 아니라 그 여자가 이상했던 겁니다. 원래는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수인은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면서 위를 올려다봤다. 다음에 다시 여기를 오게 되었을 때에도 그 층으로 가기가 참 꺼려질 것 같았다.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왜 이리도 껄끄러운 기분이 드는 걸까.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수인의 말에 지용은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봤다.

"저도 몰랐습니다. 이런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학원이 근처에 있어요. 수업 하나가 비게 되어서 잠깐 들려봤어요. 목도리를 사야 할 것 같았거든요."

"수인씨가 하려고요?"

"아니요. 형한테 선물을 하고 싶어서요."

선물을 하면 영도가 좋아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목도리를 두르면서 '고마워. 잘 하고 다닐게.'라며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선물이 영도에게 되레 폐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제가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형은 유명한 사람이라 웬만한 건 어울리지도 않잖아요. 분명 고가를 둘러야 사람들 보기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괜한 짓을 한 것 같으네요. 그냥 돌아가 봐야 겠어요."

어설픈 걸 하고 있으면 남들이 뭐라 할 지도 몰랐다. 나중에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을 때, 그 때에나 선물을 해야 할 듯 싶었다.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면 그게 얼마짜리라 해도 받는 사람은 기뻐할 겁니다."

지용의 말에 수인은 입을 다물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눈빛이 '정말 그럴까요?'라고 묻고 있었다. 그런 수인의 눈빛에 꼭 대답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지용은 조금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쪽은 단가가 센 데였어요. 내려가면 저렴하고 좋은 목도리를 살 수 있는 매장이 나옵니다. 그리로 같이 갈까요?"

".....바쁘시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오프라 셔츠 좀 사러 나왔습니다. 이미 살 건 다 샀습니다."

지용은 들고 있는 쇼핑백을 위로 들었다. 그걸 본 수인은 잠시 생각을 했다.

그래도 모처럼 나왔다. 어떻게 할까.

지금은 꼭 사야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한 번은 둘러보고 싶었다. 혹 모르지. 정말 괜찮은 게 있을 지도.

지용의 격려에 아주 조금 용기가 생긴 수인은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면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부탁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대해주십시오. 이리로 오세요."

수인은 지용의 뒤를 따랐다. 1층 매장으로 가자 사람들이 많았다. 어정쩡한 시간인데도 사람이 참 많구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에서 오던 사람과 가볍게 부딪쳤다. 부딪친 수인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상대는 수인을 보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서둘러 그냥 가 버리는 모습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잠시 그쪽을 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손목을 붙잡았다.

"수인씨. 이쪽입니다."

지용은 수인을 잡아끌어 안쪽에서 걸을 수 있게끔 했다. 바깥쪽에 선 지용은 위를 올려다보는 수인에게 설명했다.

"사람이 많지요? 지금이 세일기간이라 그럽니다."

"평일인데도 많네요."

"원래 세상에는 시간 많고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은 법입니다."

지용의 말에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것 같으네요. 같은 긍정의 표현이었다. 지용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도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 옆 매장은 다소 한산했다. 지용은 수인을 그리로 데리고 갔다. 지용은 바로 목도리가 걸린 곳을 찾아냈다.

"여기가 괜찮을 것 같군요."

지용은 우선 가장 가운데에 걸린 목도리의 금액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도 7만원 남짓이군요. 재질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요."

수인은 지용의 옆으로 가서 목도리를 살펴봤다.

봐도 딱히 손길이 가지 않는다. 과연 무엇을 골라야 잘 사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걸까.

목도리를 바라보는 수인의 얼굴은 점점 진지하게 변했다. 턱 아래에 손을 댄 채로 유심히 살피다가 가장 왼쪽에 걸린 것에 손을 댔다.

"손님. 무엇을 찾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다가온 점원에 수인은 목도리를 잡은 손을 바로 떼어냈다. 물건을 훔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구경만 하는 건데 너무 그리 놀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점원과 있었던 일 덕분에 수인은 상냥한 얼굴로 다가선 점원이 불편하기만 했다. 지용이 그걸 알고는 도움을 줬다.

"일단은 저희 쪽에서 골라보겠습니다. 가서 일 보세요."

"다른 물건 찾아보실 때 절 불러주세요."

공손하게 말을 한 점원이 다른 쪽으로 가자 수인은 바로 한숨을 토해냈다.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을 보인 듯 싶어서 좀 민망했다. 수인은 살짝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좋은 데서 물건 고르는 건 처음이라 긴장이 되네요."

"편하게 고르십시오. 여기서도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렇게 할까요."

수인은 일단 오른쪽에 걸린 것부터 신중하게 골라봤다. 하지만 바로 이거다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목도리 같은 건 처음으로 골라보는 거였다. 몇 번 헛손질을 하다가 그냥 손을 내리게 된다. 지용이 왜 그러냐고 묻자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뭘 좋아할지 전혀 모르겠네요."

그리고 어떤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무작정 손에 집이는 걸 들고 갔다가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쩐단 말인가.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가운데에 걸린 녹색과 붉은색이 들어간 걸 빼내서 지용에게 권했다.

"한 번 해보실래요?"

"......제가요?"

"어울리나 안 어울리나 한 번 보고 싶어서요."

"전 원혁씨처럼 잘난 얼굴이 아닌데요."

"지용씨도 충분히 멋진 분이세요. 처음 봤을 때에도 생각했는 걸요. 굉장히 단정하게 생긴 사람이로구나. 하고요."

그래서 초반에 지용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당신이 찾는 분은 여기에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했을 때, 완전히 기가 죽었었다. 그것도 다 옛날 일이었다. 지금은 아니니 괜히 들먹일 필요가 없겠지.

지용은 목도리를 들고 있는 수인을 내려다봤다. 그러던 그는 머뭇거리며 그걸 받아들였다.

"그러면 잠깐 둘러보기만 하겠습니다."

지용은 받아든 목도리를 조심스레 목에 둘렀다. 다 두르고 나서 손을 내린 그는 수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이상하게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어찌할까 싶어 가만히 있는 동안 수인이 그런 지용을 지그시 바라봤다. 바로 한마디 했다.

"무척 잘 어울려요."

원체 깔끔하게 생기다 보니 색이 잘 받았다. 그걸 보자 수인은 용기가 났다. 다른 색의 목도리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한 번 해보실래요?"

"그러면 그것도 둘러만 보지요."

목에 두르고 있던 걸 빼내고는 새롭게 건네는 걸 받아들였다. 멋들어지게 목도리의 모양을 잡은 후 수인을 바라본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런 지용을 바라보던 수인은 정말 어렵다는 듯 짤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안되겠는 걸요. 뭐든지 잘 어울리셔서 어느 걸 사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문득 여기에 있는 모든 걸 해봐도 지용은 분명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수인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양 손에 들린 목도리를 살펴봤다.

"수인씨가 생각하기에 어느 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습니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민이 되는 듯 그 표정이 진지하기만 했다.

"보면 알 겁니다. 원혁씨에게 어울리는 것을요. 결국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 전해주면 분명 원혁씨도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럴까요."

수인은 다시 손에 들린 것들을 살펴봤다. 오른쪽 것과 왼쪽 것. 어느 것이 영도에게 더 잘 어울릴까. 무엇을 선물해야 기뻐할까.

선물한 목도리를 목에 두르는 영도를 상상해 봤다. 그걸 받고는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정말 고마워. 이거 멋진데.' 같은 대사를 하는 장면도 떠올려봤다. 그러자 점점 윤곽이 잡혔다.

"그러면 이걸로 할래요."

왼쪽에 들린 걸 그대로 두고 오른쪽 것은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뒤에 택이 붙어있어 그걸 뒤집어봤다. 삼만 팔천원이었다. 이것도 수인에게 있어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자비로 살 수 있는 선에 있었다. 양 손으로 목도리를 쥔 수인은 지용을 올려다봤다.

"아까 본 것보다 싸기는 해도 선물에 금액이 중요한 건 아니겠지요?"

"물론이지요.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요."

긍정의 대답을 들은 수인은 조금 더 용기가 났다. 이제 이걸 영도에게 전하는 일만 남은 거다. 부디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목도리를 들고 계산대 쪽으로 갔다.

계산을 하는 것도 지용이 옆에 있어 한결 안심이 되었다. 마음이 편안하니 점원이 하는 말이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예쁘게 포장까지 해준 점원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쇼핑 하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는 걸 들으며 수인은 매장에서 나왔다.

무겁지는 않아도 손에 들린 목도리는 묘한 묵직함이 있었다. 이제 이걸 영도에게 전달하는 일만 남은 거였다. 원하는 걸 손에 넣었기 때문인지 수인의 얼굴은 편안해져 있었다. 그걸 살피며 지용은 입을 열었다.

"윈하는 걸 사서 잘 되었군요."

"모두 지용씨 덕분이에요. 아니었으면 그냥 허탕치고 나올 뻔 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더 쇼핑을 하실 겁니까?"

"아니요. 이만 집으로 들어가 봐야지요."

"그러면 같이 가도록 하지요. 저 차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쉬는 날이라고 하셨잖아요."

맨션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같이 가기가 미안하지 않겠는가.

수인의 마음을 느꼈는지 지용은 웃었다.

"어차피 가는 길목입니다. 중간에 내려 주는 건 문제도 아닙니다."

지용은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먼저 호의를 표현하는 건데 그걸 거절하기도 뭐했다. 지용이 차를 태워주면 보다 수월하게 귀가할 수 있게 되는 거였다.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주차장 쪽으로 가지요."

지용이 먼저 가고 수인이 뒤를 따랐다. 주차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걱정은 없었다. 지용이 안내를 잘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그 뒤를 졸졸 따르면서 수인은 품에 안긴 봉투를 살폈다.

마음에 들어 할까. 이왕이면 좋아해 줬으면 싶었다.

괜히 뿌듯해진다. 봉투를 꼬옥 안은 채로 수인은 걸음을 서둘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둘은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은 거의 만원이었다.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는 수인을 확인한 지용이 물었다.

"사람이 정말 많지요?"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울에 몰려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습니까?"

지용이 이쪽 말을 듣고 웃는 것 같았다. 우습겠지. 하지만 수인은 정말 그리 느꼈다.

"시골집은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잔치나 열려야 사람이 모이지 하루 종일 할머니 한 분만 보고 지나가는 날도 많았어요. 그런데 서울은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신기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오는 건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네요."

지용에게 있어 익숙한 풍경이지만 수인에게는 모든 게 새롭겠지. 그렇기 때문일까. 조금 더 이런 저런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때 빵-하고 울리는 클렉션 소리에 수인과 지용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뭔가 싶은 두 사람 앞으로 검은 벤츠가 천천히 다가왔다. 수인의 옆에 멈춘 차문이 내려가고 거기서 얼굴을 내민 건 시경이었다.

"귀여운 수인이. 오랜만인데?"

전하고 달리 청색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된 시경을 본 수인은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머리카락을 멋지게 염색하셨네요."

"괜찮지? 마음에 들어서 당분간 이걸고 가려고. 그런데 지금 뭐하는 중?"

뭐하는 중이라니. 왜 그렇게 묻는 건가 싶었던 수인은 시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시경은 수인이 아닌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용을 살피는 기색을 눈치 챈 수인은 설마 싶었다.

연예 기회사 사장인 시경이었다. 전에 이쪽 머리카락을 정리할 때에도 '너 연예인 되 볼 생각 없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용은 준수한 사람이니 그를 보고 괜한 생각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걸 막고자 수인은 은근슬쩍 그 앞을 가렸다.

"지금 집으로 가려는 거예요."

"그래. 보면 알 것 같아. 난 그저 지용씨가 누구랑 같이 있는 게 참 낯설어서 물어본 것뿐이야."

"......지용씨를 알아요?"

"잘 알지. 우리 대스타님이 사는 맨션 경비시잖아. 언제나 늘 흐트러짐 없는 수트 차림으로 인사를 하곤 했지. 그게 참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복 차림은 느낌이 평소랑 많이 다르네? 귀여운 것 같아."

귀엽다니. 지용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그런 표정 변화에 시경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하지만 마냥 관심을 그에게만 두지 않았다. 시경은 수인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만 들어가 봐야 겠네. 두 사람 다 조심해서 들어가. 그럼 이만."

본인 할 말만을 하고는 유리창을 올린 시경은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나타나나 싶더니 본인 할 말만 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저게 뭔가 싶었던 수인은 짤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언제나 늘 생각하는 건데 바람 같아요."

"그러게요. 일단 우리도 움직이죠."

지용은 수인을 데리고 차로 이동했다. 아주 예전에 나온 중중형 차였다. 아까 시경이 타고 왔던 차하고는 차이가 많이 났다. 차에 대해 아는 지용의 눈에는 차이가 극명했기 때문에 괜히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낡은 차라서......"

"멋있는데요."

지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인은 솔직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봤다. 빤히 응시하는 눈동자가 맑기만 했다. 그 눈빛에 지용은 '그렇게 봐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차문을 열고 올라탔다. 수인도 뒤따라 타고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지용이 시동을 거는 동안 수인은 찬찬히 차 안을 살펴보게 되었다.

단출하고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수인은 지용이 애인이 없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용은 성실하고 차분하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애인이 없다는 게 참 아깝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서 이쪽이 여자를 소개시켜 줄만한 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수인도 본인 앞가림 하기에 바쁜 시기였다.

그런 수인의 눈에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시디를 넣는 곳 바로 위에 작게 붙은 스티커 사진. 그 사진에는 지용과 어린 소년 둘이 함께 찍혀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닮은 두 소년에 수인은 흥미가 생겼다.

"동생들이에요?"

차를 후진하면서 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들입니다. 귀엽지요?"

"어려보이네요. 몇 살이에요?"

"수인씨 또래는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유학, 이라는 건가요?"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는 이혼을 하고 난 후, 어머니가 데리고 가 버 린 거지요."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기 때문에 그냥 흘러 넘길 뻔 했다. 하지만 3초가 지난 후 그냥 들을 말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말을 해야 하나 싶어 숨을 죽였다. 운전을 하는 중에도 수인의 동요가 느껴졌던 것일까. 지용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애초에 이복동생이었습니다. 재혼을 하고 3년 만에 이혼. 그런 느낌이지요. 아버지께서 꽤나 자유로운 분이셨거든요."

"그렇군요."

태연한 대답을 들으면서 수인은 굳은 얼굴이 되었다. 설마하니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남들 보기에 수인도 평범한 가정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에게서 저런 말을 들으면 괜히 속이 불편해진다. 상대는 숨기고 싶고 말하길 원치 않았던 부분을 괜히 건드린 건가 싶기도 한 것이다.

차는 천천히 백화점 안에서 빠져나왔다. 도로변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직후 수인은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왠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으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편하게 말을 하는 게 저도 편하답니다. 딱히 숨기고 싶은 일도 아니고, 요새도 종종 애들하고는 연락을 취합니다. 전화를 할 때마다 목소리가 아저씨 같아져서 놀랄 때도 있지요."

지용은 웃었다. 지금까지 본 것과는 다르게 온화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분명 가족을 생각하기에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저도 사과를 해야 할 게 있군요. 처음 수인씨를 만났을 때 문전박대를 해서 미안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에 수인은 당황해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지용씨 일인걸요. 그리고 전에도 미안하다 사과하셨잖아요."

"그래도 정중하게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도 종종 왜 그랬을까 싶은 거지요."

"전 이제 그 때 일은 생각나지도 않아요."

지용보다는 맨션을 나설 때 '저건 뭐야?'라며 싫은 듯 바라보던 여자의 얼굴이 더 생생했다. 만나고 싶지 않다 생각을 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 일도 조만간 잊혀질 일이었다. 그러니 지용이 괜히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며 수인은 열심히 손을 저어댔다.

"그런 데서 일하다보면 다 똑같아지는 모양입니다. 사람의 본질을 보려하지 않고 그냥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만 판단을 내리는 거지요. 처음 여기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런 사람들을 보고 경멸의 시선을 보내던 저였는데, 어느 샌가 이렇게 변해버리네요."

"안 그래요. 지용씨는 좋은 사람인 걸요."

"제가 수인씨에게 잘 대해주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시는 겁니다. 솔직히 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다정하지 않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지요."

솔직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 해도 이런 식으로 차에 태워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인을 옆자리에 앉혀 두면서도 낯선 것은 지금껏 해본 적 없는 일이기 때문일 터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수인씨를 볼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건 아마도 예전 기억이 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인은 지용을 바라봤다. 능숙하게 옆 차선으로 끼어들면서 지용은 말을 이었다.

"아주 예전에, 동생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이 수인씨를 보면 조금씩 후회의 감정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 때는 이렇게, 저 때는 그렇게 했으면 보다 상황이 나아졌을 텐데. 어쩌면 가족들이 이렇게 뿔뿔이 흩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라는 생각 말이죠. 그래서 전 수인씨가 참 귀엽습니다."

귀엽다는 부분에서 수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내가 귀엽다고? 그건 좀 아닌데.' 그리 말하고픈 듯 미묘한 얼굴을 하는 걸 본 지용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어른들 대하는 게 능숙하고 잘 하니까요. 다른 건 모르겠지만 수인씨가 앞으로도 계속 그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변하지 마십시오. 만약 수인씨가 다른 사람들처럼 변하게 된 모습을 본다면 그 때는 정말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습니다."

지용의 말에 수인은 잠시 생각을 했다.

그가 하는 말은 칭찬이었다. 지금 이 모습이 지용의 마음에 드는 거였다. 하지만 수인은 지금 이 모습만이라면 굉장히 답답할 것 같았다. 분명 서투르고 못하는 부분도 존재했다. 그걸 그대로 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지용을 실망시킬 만한 말을 입에 담게 되었다.

"전 변할 건데요."

차가 멈춰진 사이에 수인이 내뱉은 말에 지용은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라보는 것에 수인은 보다 또렷한 억양으로 말했다.

"앞으로 변할 거예요. 전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입을 일자로 다문 수인에게서 단호한 결의 같은 게 느껴졌다. 지용이 보기엔 그조차도 귀여웠다. 나쁘진 않겠지. 그리 말하려는 듯 두어번 고개를 끄덕인 지용은 다시 차를 몰면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5분 정도 대화가 없었다. 조용한 채로 있나 싶을 때 지용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게 뭘까요. 그런 건, 애초에 비교를 할 수 없는 부분인 게 아닐까요."

이번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상태가 아니라 크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게 수인의 솔직한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그저 최씨 영감님하고 다툴 때의 모습을 보거나, 인사를 주고 받는 게 고작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지용이 전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까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훈훈해지는데요. 나한테도 이런 구석이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지용의 말에 수인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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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몇 번 수정을 거친 따끈따끈한 대본이 나오자 모든 배우들이 바빠졌다. 새롭게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맞추고 여러 번의 연습을 거쳐서 본 촬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대단한 배우진들과 막강한 시나리오 작가진에 감독, 스폰서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드라마였다. 중박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중박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적어도 대박. 초대박 등을 노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첫 촬영에 임하는 모든 배우들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대본 보시는 중이십니까. 선배님."

대본을 살피던 중년 연기자는 살갑게 말을 거는 영도를 보곤 무척 반가워했다.

"오. 원혁이 왔냐. 곧 촬영 들어가야 할 놈이 여기서 뭐하고 있어."

"선배님도 함께 들어가는 게 아닙니까. 왜 남말 하듯이 하십니까."

"나보다야 네 연기가 더 중요하니까 그러지."

"에이.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저 무안합니다."

영도는 애교스립게 웃었다. 중년 연기자만큼은 아니라 해도 꽤 경력이 쌓인 영도였다. 이 또래에 이만한 인기가 있는 놈들은 중견을 우습게 보는 게 없잖아 있었다. 그에 반해 영도는 변하지 않고 언제나 늘 예의가 발랐다. 영도가 대우를 해주면 다른 곳에 가더라도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중년 배우의 태도는 부드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대사 다 외웠나."

"뭐, 그렇지요."

"대단하구만. 자네를 당해낼 수가 없어. 흉내를 내고 싶어도 대사가 머리 속에 들어와야지."

"그러지 마십시오. 눈빛 하나로 열 마디 대사하는 절 아주 보내버리시는 분께서 말입니다."

"아하하하. 그런 공치사는 하지도 말게나. 난 자네한테 줄 떡고물도 없다네!"

"제가 선배님께 떡고물을 바라겠습니까. 그저 연기지도를 부탁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

"뭔 소리야. 2010년도 연기대상까지 거머쥔 분께서 말이야."

"솔직히 요즘 연기대상은 젊은 사람들 주려고 만든 게 아닙니까. 원래 주인은 제가 아닌 여러 선배님들의 것이라는 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완전 비행기를 띄워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아부가 섞인 말이라는 걸 알아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왜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난 딸도 없어. 무능한 30대 아들만 둘이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연기지도를 부탁드리겠다고요."

점점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중년배우를 앞에 두고 영도는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냈다.

"첫 판이지 않습니까. 선배님. 한 번 화끈하게 해버리자고요."

지금 겉으로 보기에 영도는 단순히 연기에 욕심을 내는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다. 대단하다고 말들이 많은 드라마를 시작부터 기합을 넣고 싶은 거다. 그런 식으로 지금 영도의 상태를 해석한 배우는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

"자네 요즘 정말로 연기에 욕심을 내는 구만."

"연기가 재미있어 죽겠습니다. 더 성장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좋아."

크게 감명 받은 얼굴이 된 배우는 영도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두어번 토닥였다.

"자네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요즘 것들은 인기 좀 얻으면 연기를 너무 쉽게 하려고만 들어. 좋아. 이번에 한 번 해보세."

이를 악문 배우의 두 눈동자 가득이 강렬한 의지가 담겼다. 영도의 열기에 감화된 듯 싶었다. 그런 두 사람 앞으로 스텝이 다가왔다.

"두 분.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가시지요."

"좋았어. 오랜만에 연기혼이 불타는 구만."

주먹을 불끈 쥔 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조물거렸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착착 앵기니 여자가 아니라도 좋았다. '내가 딸내미가 없는 게 아쉽구만. 손녀는 안 되겠나?' 같은 말을 주고 받으며 둘은 훈훈하게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선배님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든 이는 예의 그 청년이었다. 자신감이 가득한 그 얼굴을 본 배우가 흡족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우. 그래. 한 번 해보자고."

팔을 크게 휘저으며 중년 배우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새파랗게 어린 놈은 그 쪽은 보지도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영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영도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사는 잘 외웠나?"

"물론입니다. 모든 대사를 다 외워서 대본은 들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전 원혁님처럼 되고 싶으니까요."

"나처럼 되고 싶다라. 뭐, 나쁘지 않겠지."

영도는 음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대의 말에 흡족해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도 잠시 입가의 미소를 지운 영도는 무표정이 되어 상대를 흘깃 바라봤다.

"될 수만 있다면 말이야."

"......."

그 순간 사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다 보였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구나. 이미 검은 속내를 다 드러냈다 이 말이지? 언플을 들어갔으니 겁 대가리를 상실하게 된 모양이라며 영도는 세트장 밖으로 나갔다. 그의 앞으로 문이 하나 있었다. 이걸 열고 들어가면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영도는 눈을 내리뜬 채로 호흡을 길게 토해냈다. 정신을 한 대로 모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위로 눈을 든 영도는 표정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거칠고 음습하고 차가운 눈을 한 사내가 된 그는 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안쪽에 앉아있던 두 사람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나는 중년 배우, 다른 하나는 젊은 사내였다.

갑자기 나타난 영도를 앞에 둔 그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있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영도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저 돌아왔습니다."

중년 배우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옆에 놓인 화병을 있는 힘껏 던졌다.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화병이 산산조각이 난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집어던지는 통에 처음부터 스텝들은 놀란 듯 숨을 죽였다. 영도는 차분히 그를 바라봤다. 얼굴 근육을 바들바들 떨면서 그는 영도를 가리켰다.

"이 철면피 같은 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전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왜 여기에 들어오면 안 되는 겁니까."

"넌 내 아들이 아니야! 그 여자의 아들이지!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으냐!"

영도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그 여자의 아들 운운할 때 그 입가에 서리는 건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그 여자가 죽고 나서 뭐라도 떨어질 게 있을 줄 알았나 보지?! 어림도 없다! 그건 모두 여기에 있는 내 진짜 아들이 가지고 갈 것들이야!"

중년 배우는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이를 가리켰다. 그 순간 청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영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 아버지 말씀이 맞아. 대성그룹은 모두 내 것이야. 지금 형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형의 손에 떨어질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와 구차하게 굴지 말고 당장 사라져. 그 편이 형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될 거야."

"내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라."

후-하고 웃은 영도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내 마지막 자존심. 그게 뭔지 넌 알기나 하냐."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살기마저 묻어나는 눈동자로 상대를 노려보며 영도는 한쪽 발을 들었다. 영도가 움직이자 중년 사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집어던질 것이 없자 그는 영도의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감히!"

"늙은 영감탱이는 그냥 앉아 계시지요!"

차분하게 말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목소리가 커졌다. 중년 사내의 어깨를 잡아 세게 뒤로 밀치자 그 반동으로 그대로 소파로 떨어지게 되었다. 소파에 주저앉게 된 중년 사내는 목 뒤를 붙잡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어.'하는 소리를 내면서 끙끙 거리는 이를 두고 영도는 앞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는 영도의 눈동자에 서린 강렬한 감정에 휘감기는 걸 느꼈다. 영도는 지금 눈 앞에 정말로 찢어 죽이고 싶은, 증오스러운 사람을 두고 있는 것 같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짓눌린다. 영도의 분위기에 사내는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당신 두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서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지. 하라는 건 다 하고, 온갖 더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고 이 몸뚱이를 던졌어. 당신들의 구두를 핥아대면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나야. 그런 내가 어떤 자존심이 남아있다는 말이야?"

"형. 그만해. 그만하고 여기서 나가."

"못 나가겠다."

나직이 속삭이는 것과 동시에 영도는 사내의 코앞으로 다가서 있었다.

사내의 아주 가까운 곳에 멈춰선 그는 서늘한 눈동자로 상대를 바라봤다.

"당신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로."

목소리에서 감정이 치워진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담긴 음성. 그 목소리와 눈빛으로 영도가 속삭였다.

"나와 어머니를 버렸지. 그로 인해 내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마지막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려있던 내 하나 남은 유일한 자존심은 그거 하나 뿐이야."

진심이 담긴 증오와 분노였다. 그 열기에 데일 것만 같았다. 영도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기가 두렵고 손끝이 얼어붙는다.

원혁이라는 배우 등 뒤로 검고 차가운 무언가가 겹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시린 느낌에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헐떡거리는 이를 노려보며 영도는 스산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을 파괴할 거야. 그것이 바로 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야."

"혀, 형. 이러지 마."

"무엇을? 도대체 뭐가 두려운데?"

두려운 것. 그것은......

사내는 다음 대사를 치려했다. 영도가 분노를 터트리면 그걸 우습게 여기며 코웃음을 치는 게 바로 그의 다음 연기였다. 하지만 지금 꽁꽁 얼어붙었다. 입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얼어붙은 이를 두고 영도가 재차 물었다.

"넌 지금 뭐 때문에 떨고 있는 건데?"

사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대본에 없던 대사였다.

숨을 삼킨 이가 당황해 고개를 드는 순간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카메라를 등지고 있어 그 미소까지는 비춰지지 않는다. 그저 사내만이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길 수 없어. 연기로는 이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

문득 드는 생각이 사내의 진을 다 빼버린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순간 내내 참고 있던 감독이 호통을 쳤다.

"신주엽! 다음 대사 쳐야지!"

신주엽이라 불린 사내는 움찔하고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크게 떠진 그의 눈동자는 텅 비어져 있었다. 이마로 식은땀이 촉촉이 맺혀있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듯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한창 흐름이 좋은 연기를 하고 있었기에 NG를 낸 그가 탐탁치 않았다. 중년 연기자는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거야. 아이고 혈압 올라. 두 번은 못하겠구만."

소파에 축 늘어져서는 긴 한숨을 토해내는 그는 기력이 다한 모습이었다.

초반부터 너무 목청을 높인 걸지도 모른다. 뒷목을 주무르는 그 모습이 정말 안 좋아보였다. 다른 스텝들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가 재미없게 되었다는 듯 사내에게 노골적인 질책의 눈빛을 던졌다.

얼굴이 창백해진 이는 보고 있기가 딱할 정도였다. 그걸 보던 영도는 감독을 돌아봤다.

"이 장면 그대로 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인상을 쓴 채로 팔짱을 끼고 있던 감독은 영도의 말에 그를 바라봤다.

영도는 기다렸다는 듯, 본인의 대사가 아닌 신주엽의 대사를 줄줄줄 읊었다.

"네가 자꾸만 이러면 나도 재미없어. 사람 풀어 어떻게 해버리기 전에 알아서 물러나도록 해. 여긴 네가 똥칠할 장소가 아니야. 너 같은 벌레가 어디서 잘난 듯 지껄여. 괜한 소란 피워봤자 너만 손해야. 그러니 꺼져. 까지였나? 그런데 그거 다음 복도 씬에서도 비슷하게 말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중복하느니 짤막하게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감독님."

영도는 어디까지나 감독의 양해를 구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가 한 대사는 모두 신주엽의 것이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첫 회는 영도의 대사가 월등히 많았다. 그런데 다른 배우의 대사까지 외운 건가 싶어 주변에서 '굉장하다.'라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신주엽은 멍청한 얼굴이 되어선 영도를 바라봤다.

영도는 감독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차피 결정권은 감독에게 있었다. 영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 번 더 할까요?"

"지금처럼 또 연기가 나올 것 같아?"

"해봐야 알겠지요."

그 순간 중년 연기자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못하겠는데. 혈압이 올라. 분위기 딱 좋았는데 손발이 안 맞는구만."

혀를 차며 그는 신주엽을 흘겨봤다. 첫 씬에서부터 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초반에 잘 나가야 모든 게 잘 풀리기 마련이었다. 제대로 되는 게 없구만. 그런 느낌으로 소파에 몸을 푹 뉘인 채로 있는 이에게 신주엽이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아니. 이대로 가지."

신주엽과 감독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놀란 신주엽은 고개를 들었고 감독은 대본을 쥔 채로 간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 보기에도 지금 연기가 최고였어. 자네가 원혁이한테 눌리는 것도, 진짜 같았고 말이야."

진짜 같았고-가 아니라 진짜였다. 감독이나 다른 모든 이들이 그걸 알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신주엽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멍하니 있는 그를 두고 감독이 크게 팔을 흔들었다.

"다음 씬으로 이동!"

"이동하겠습니다!"

신주엽이 변명의 말을 할 틈도 없이 모든 스텝들이 이동을 시작했고 그건 연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소파에서 일어난 중년 연기자가 원혁을 볼 때의 눈빛은 다정다감하기 그지없었으나 신주엽을 볼 때에는 아니었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고.'라는 눈빛에 신주엽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굳어있으려니 누군가 그런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신주엽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있는 건 영도였다.

"정신 차려야지. 안 그러면 먹힌다?"

신주엽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영도는 그의 양 어깨에 차분히 손을 올렸다. 주무르듯이 두어번 만지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 싫으면 연기로 눌러. 안 그러면 네가 뭐라고 해봤자 다 개 짖는 소리 밖에 안 되는 거야. 일단 우리는 연기자니까 말이야."

"......나는."

"너 절대로 나 못 이겨. 이제 알았지?"

뭐라 말을 하려던 신주엽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영도는 눈빛으로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너 할 일이나 제대로 하고. 나 귀찮게 굴지마. 라고 말이다.

어깨에 닿아있던 영도의 손이 떨어지고 그가 몸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던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버리는 영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는 천천히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내렸다.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소파에 주저앉은 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양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본 사내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혼자 남겨진 신주엽을 본 감독은 영도의 등을 툭 쳤다.

"너무 세게 눌러버린 거 아니야?"

"제가 뭘요?"

고개를 돌리며 웃는 영도는 상큼한 얼굴이었다. '아. 드디어 혼내줬네. 속 시원하다. ' 라고 말하는 얼굴은 맨질맨질하니 광택이 났다. 저런 얼굴로 시치미를 떼다니. 감독은 어이가 없어 그의 등을 재차 두드렸다.

"자라나는 새싹을 짓밟으면 안 되지."

"자라나는 새싹 때문에 우리들의 작품의 질이 떨어져선 더더욱 안 되겠지요."

장난스럽게 대꾸를 해도 그 속에 담긴 건 진심이었다.

영도는 스산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드라마에 승부수를 던졌어요. 이번 건 제 나름의 굳히기 무대라고요.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래. 내 너의 야망을 알지. 그래서 보고만 있는 거야. 그런데 저 놈 계속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계속 이런 식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는 걸."

"그냥 두세요. 쉽게 물러설 놈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나름 근성 있는 것 같습니다."

초반에 이쪽에 부딪쳐 왔던 기세는 웬만한 이들이 하기 어려운 거였다. 겉으로 웃으면서 뒤로 꽁깍지를 까던 술수를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하면 나름 괜찮아질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저런 놈들 하나, 둘 정도는 있어야 이쪽도 연기를 할 마음이 드는 법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일말의 불안을 느끼기 마련인데 영도는 그런 게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평소 영도를 잘 알고 그의 연기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감독은 의아한 듯 물었다.

"자네 분위기가 변한 것 같지 않나?"

"뭐가요?"

"여유가 있는데? 득도를 한 건가?"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신주엽이 은근히 영도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걸 조금도 신경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감독이 뭐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던 영도는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제 삶을 즐기기로 했지요. 요즘은 뭘 해도 재미있거든요."

"혹시 자네 연애하나?"

"그 부분에 대해선 노코멘트입니다."

"뭐야. 있는 거로구만. 축하하네."

입 가벼운 감독이 아니기 때문에 영도는 딱히 부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재차 대본으로 영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젊었을 적에 여러 사람 만나 봐야지. 그게 다 연기에 도움이 되는 거거든. 가만 보자. 그러면 다음에는 멜로물에 도전해 보지 않겠나?"

"참아주십시오. 전 앞으로 액션물에 도전을 해보고 싶으니까요."

주먹을 쥔 영도는 앞으로 죽죽 뻗었다. 장난스러운 모습이었다. 연기대상을 타고 인기가 더 높아져서 사람이 거들먹거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전하고 똑같았다. 그 모습이 기분 좋았던 감독은 호탕하게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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