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에서 내리자 8시였다. 시경하고 도무지 같이 다닐 수가 없어 데려다 주겠다는 말에 됐다고 퇴짜를 놓고는 바로 택시를 잡아탄 거였다. 몇 번이나 뒷자리를 흘깃 거리고 보는 택시기사에게 사인을 해주고 내린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으리으리한 맨션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영도 그가 사는 장소였다.
여기서 산 게 몇 년이더라. 아직 3년은 못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월세에서 시작하다가 언제 집을 사보나 싶었는데 지금은 몇 십억 하는 맨션에서 지내고 있었다. 예전 가수해서 말아먹고 긴 무명시절을 보냈을 때 '얼굴값 못하네.'라면서 비웃던 놈들은 연락도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쪽이 대단해진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맨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도는 고개를 숙이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별 생각 없이 경비실을 확인했다. 건물로 올라가는 길목 사이에 있는 작은 경비실은 최씨 영감의 일터였다. 최씨 영감이 있으면 눈인사나 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도는 그 안에 떡하니 앉아있는 수인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건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문제집을 풀고 있던 모습 그대로 굳어선 가만히 있나 싶더니 작은 창을 열고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와요. 오늘은 일찍 왔네요?"
바깥을 내다보며 말하는 수인은 위화감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식이었기 때문에 순간 영도는 어떤 식으로 반응을 취해야 하나 싶었다.
영도는 창 쪽으로 고개를 숙여 수인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왜 여기에 있어?"
"할아버지가 배가 갑자기 아프다고 해서 잠시 앉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화장실 가신 거야?"
"가신지 30분 정도 되었으니 내려오지 않을까요? 요새 변비시래요."
저런 말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정말 친해진 거로구나. 근 시일 내에 정말 날 잡아서 식사 대접이라도 해야 겠는 걸.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수인이 손을 까닥였다.
"들어올래요?"
"거기로 들어오라고?"
"뭐 어때요. 따뜻해요."
따뜻하다는 말보다는 수인이 앉아있다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다. 영도는 문을 열고 경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치면서 볼 때에도 좁을 것 같다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정말 좁았다.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어차 있고 의자가 2개씩이나 있으니 더 좁은 것 같았다. 수인의 옆에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던 영도는 웅얼거렸다.
"되게 좁네."
"키가 커서 좁게 느껴지나 보네요. 할아버지하고 둘이 있을 때에는 괜찮았는데."
할머니하고 살아서 노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수인이었다. 영도라면 최씨 영감과 함께 있으라면 그리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수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잘 보냈겠지. 종종 먹을 것도 좀 드리고 말이다.
영도의 추측이 맞다는 듯 앞에 많이 익숙한 주먹밥이 눈에 들어왔다. 영도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확인한 수인이 물었다.
"배고프면 좀 먹을래요?"
"된장 주먹밥이야?"
"할아버지는 이걸 특히 좋아하시거든요."
"하나만 줘봐."
앞에 있는 주먹밥의 랩핑을 벗겨서 영도에게 건넸다. 주먹밥을 받은 영도는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우물거렸다. 아직 입 안에 밥이 남아있는 채로 웅얼거렸다.
"맛있다. 나, 김치도 먹고 싶어."
"김치는 여기에 있어요."
수인은 뒤로 손을 뻗어선 작은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가 들어간 통을 끄집어냈다. 그걸 영도 앞에 두고는 아래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내 두 개로 쪼개서 건넸다. 무척이나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치 이 안에서 오래 살아본 적 있는 사람 같았다.
"뭔가 좀 숙달된 사람의 느낌이 나는 걸?"
"가끔 이리로 와서 할아버지하고 상담 같은 걸 하니까요."
"상담이라니? 뭘?"
영도는 김치를 꺼내 하나 입에 넣었다. 별 생각 없이 우물거리던 영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건 뭐야? 그리 말하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린 영도는 김치를 빤히 보더니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켰다.
"이거 우리 집 김치인데?"
"드시라고 한 포기 드렸어요."
"한 포기씩이나 드렸다고? 우리 먹을 것도 없는 걸 왜 남을 줘."
"우리 먹을 정도는 있어요. 이번에 할머니가 넉넉히 챙겨주셨잖아요."
"아닌데. 얼마 없는데......."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면서 영도는 인상을 썼다. 남에게 주는 게 아까워 죽겠다는 식이었다. 인상을 쓰는 얼굴이 정말 싫어하는 투였기 때문에 수인은 생각했다. 다음에는 몰래 주고, 그 티를 내지 말아야 겠다고 말이다.
"맨션 주변 정리해주는 분이시잖아요. 고마운 분한테 김치 한 포기 정도 못 드려서야 되겠어요."
"차라리 내가 선물을 드리는 편이 낫지. 이 김치는 안 돼. 이건 내가 다 먹어야 한다고."
젓가락으로 김치를 가리키는 영도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그걸 본 수인은 그저 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욕심 부리지 말아요. 어린애도 아니면서."
왠지 영도가 귀엽게 느껴졌다. 수인은 손을 들어 영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도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수인이 머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너무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절로 눈이 감기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좁고 불편하다고만 여겨졌던 경비실이 나름 나쁘지 않은 공간으로 인식이 변한다. 영도는 노곤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뭔가 굉장히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다."
"부려도 상관없어요. 일 다 끝내고 온 거잖아요. 뭐하면 엉덩이라도 두드려줄까요?"
"엉덩이라......"
거기까지 가면 이쪽이 참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건 그냥 말자고 하려던 찰나 수인의 손이 엉덩이에 닿았다. 툭툭. 두 번 두드리더니 영도를 보곤 살짝 웃는다.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인의 눈빛이었다. 그걸 본 순간 영도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비록 지금 된장 주먹밥과 김치를 함께 먹었다 해도 하고 싶은 건, 해야만 하는 거였다.
"수인아."
수인이 고개를 들었다. 왜 불러요. 같은 센스 없는 대꾸는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영도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가까이 붙였다.
"어? 손님이 와 있었네?"
그렇게 얼굴이 가깝게 달라붙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쳐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헛숨을 삼킨 영도는 뒤를 돌아봤고 수인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 앞에 서있는 최씨 영감이 보였다.
"수인아. 미안하다. 배가 아프긴 하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힘 주느라 혈관 터질 뻔 했다. 나이 먹으면서 변비만 걸리는 것 같아."
허리를 주먹으로 두어번 두드리는 최씨 영감을 벙찐 채로 바라봤다.
이 사람은 왜 지금 나타나서 난리인 거야.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려니 영도의 시선을 느낀 최씨 영감이 민망한 듯 웃었다.
"미안합니다. 그려. 보자마자 더러운 이야기를 해서리."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앉으셔야 하는데 제가 방해가 되었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영도 앞에 놓인 김치 그룻이 있었다. 그의 한쪽 손에는 먹다 남은 어정쩡한 된장주먹밥이 있었다.
참 이상한 상황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허락도 받지 않고 밥을 먹은 느낌이었다. 이 모든 건 수인이 해준 것이니 아주 남의 밥이라 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적극적으로 막 뭐라 할 수 없어서 난감한 얼굴로 있으려니 최씨 영감이 호탕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뭐하면 더 앉아있던가요. 주변 좀 돌고 오지요. 뭐."
"아닙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영도는 수인을 돌아봤다. '난 들어갈 건데 넌 어떻게 할래?'라는 눈빛이었다. 수인은 별 다른 말없이 책과 펜을 챙겨들었다.
"할아버지 저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아. 그래. 오늘 참 고마웠다. 덕분에 홈런 크게 날렸다."
"축하드려요."
웃는 수인은 최씨 영감을 흉보는 투가 아니었다. 고개를 꾸벅인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최씨 영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이가 참 좋으네."
친형제간도 저리 지내기 어려울 텐데.
보기가 참 훈훈해지는 사이가 아니냐면서 최씨 영감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최씨 영감의 다정한 눈길을 받으며 두 사람은 맨션 쪽으로 올라갔다. 가면서 영도는 수인이 들고 있는 문제집을 가지고 갔다. 페이지를 펼쳐서 내용을 흩어보던 영도의 얼굴이 금방 진지하게 변한다.
"이건 뭐야. 내용 되게 어렵네."
물리였다. 학교 다닐 때에는 문제를 푸는 흉내 정도는 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이런 단어를 정말 배웠던가 싶었다. 이것이 바로 주입식 교육의 폐해인가 싶어 영도는 인상을 쓴 채로 중얼거렸다.
"내가 학생 때 정말 이런 걸 배웠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배웠을 거예요. 하지만 잠만 자느라 머리 속에 담기지 않은 것뿐이지요."
"뭐라고? 지금 그 말은 그냥 흘러들을 수 없는데?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이쪽 바닥 일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학교 다닐 때에는 나름 열심히 했어."
"그래요. 그렇게 믿어줄게요."
"너 지금 내 말 안 믿는 거지?"
완전 억울하다는 듯 영도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막 뭐라 할 수 없는 건 수인의 성적표를 본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성적이었다. 그대로만 주욱 갔으면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학도 들어갈 만했다. 수인이라면 정말 그리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자부심과 뿌듯함이 가슴 속을 가득 채웠다. 영도는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수인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뒤로 고개를 살짝 빼기까지 했다.
"왜 그런 뜬금없는 말을 해요."
"뜬금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네가 정말로 자랑스러워."
영도는 이를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대기업 들어가라. 내 노후는 네가 책임져야 해."
엄지로 수인의 뺨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수인은 싫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나보다 돈도 많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해요.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 먹어요."
수인의 직설적이고도 현실적인 말에 영도는 입을 반쯤 벌렸다. '너 어쩌면 그리도 심한 말을-!'라고 하고 싶어 하는 얼굴로 있던 것도 잠시 영도는 수인의 목을 팔로 감으며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비벼댔다. 영도에게 완전히 푹 파묻힌 수인이었으나 그 얼굴로 싫은 기색은 없었다. 되레 수인의 한 팔은 자연스럽게 영도의 허리에 감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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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이 새롭게 차려준 밥을 먹고 정리는 같이 했다. 수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영도는 차를 끓였다. 차가 완성이 되어 먼저 소파 쪽으로 가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봤다. 뒷정리는 다 되었는데도 주방에서 바로 나오지 않는 수인의 모습에 영도가 손짓을 했다.
"그만 하고 이리로 와."
"행주만 널고요."
대답을 하면서 행주를 꾸욱 짠다. 그 능숙하고도 익숙한 모습에 영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행주를 밥솥 위에 널고 손등을 토닥이며 나오는 걸 보며 영도는 중얼거렸다.
"넌 점점 주부가 되어간다?"
"내가 안 하면 누가 해요. 행주 저대로 두면 냄새 난단 말이에요."
수인은 손등을 토닥이면서 소파에 앉았다. 등을 붙이기가 무섭게 영도가 허벅지 위로 다리를 척하니 올렸다.
"무거워요."
무겁다 해도 영도의 다리를 밀쳐내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는 동안 영도는 아예 두 다리를 올리곤 수인 쪽으로 몸을 돌려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한쪽 다리 만이 아니라 양 다리를 올리다니. 자기가 어린애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꽤나 무거웠기 때문에 수인은 재차 말을 하려 영도를 돌아봤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로 편안한 얼굴을 하는 영도를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수인은 앞으로 몸을 내밀어서 영도가 끓인 차를 들었다. 양 손으로 감싸자 뜨끈했다. 그걸 쓰다듬으면서 후후-바람을 불었다. 천천히 차를 마신 수인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렇게 식후의 차 한 잔이 맛있었다. 편안한 얼굴을 한 수인은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영도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묘했다.
"왜요?"
"그냥 좋아서."
"그냥 좋아서 쳐다보는 눈빛은 아닌데요?"
"정말이라니까."
말을 하면서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수인을 집중해서 바라보던 영도가 위로 손을 들어 수인의 턱을 툭툭 쳤다.
"바깥에 나가있으면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야.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뭘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지금 영도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 보고 싶어서 일찍 오고 싶은 거예요?' 같은 말을 하면서 응석을 부렸으면 싶은 거겠지. 하지만 수인 성격 상 그런 말은 절대로 먼저 할 수 없었다.
그냥 입 다물고 있겠다는 듯 무덤덤하게 있으려니 영도가 손가락으로 수인의 뺨을 눌렀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찌른다. 가만히 있으려 했던 수인이나 더는 힘들었다. 결국 안색을 굳힌 채로 영도를 돌아봤다.
"왜 이래요?"
"뭐라고 말 좀 해봐라. 내가 왜 일찍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어?"
"집에 빨리 오고 싶은 모양이지요."
"정말 그것 밖에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나 보고 싶어서 일찍 들어오고 싶은 거잖아요.' 정답은 바로 그거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 지도 모르지. 지금은 아니었다.
이렇게 영도가 허벅지를 베고 누워선 다정다감하게 바라보는데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뛴다. 실상 태연한 얼굴을 하는 것도 꽤 노력을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인은 다른 말을 해버렸다.
"나가서 꾀 부리지 말고 일 열심히 해요. 보는 눈이 몇 개에요. 집에 빨리 오고 싶어서 느슨하게 있으면 그게 다 사람들 눈에 보이기 마련이에요."
"그런 말은 하지마. 나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알아요. 형은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존경스러워요."
"그거 단순히 말 뿐인 것 같은데?"
영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더 많은, 대단한 칭찬을 듣고 싶어. 더 말해봐.'라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이쪽보다 나이는 7살이나 더 많으면서 왜 이렇게 유치한지 모르겠다. 됐다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또 꽁해져서 괜히 사람 건드릴 터였다. 지금도 완전 달라붙어서 어떻게 하면 이쪽을 잘 건드렸다는 말을 들을까-라는 느낌인데 말이다.
"이번에 촬영한 화보집 봤어요. 그것도 참 멋있었어요."
"어? 그래? 그거 괜찮지? 이번에 옷이 참 괜찮게 나왔더라."
눈을 동그랗게 뜬 영도는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곧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그거 화보집 아직 안 나왔을 텐데 어떻게 봤어?"
"아는 사람의 사람이 거기서 일한데요. 아는 사람이 조르니까 하나 몰래 가져다 줬다고 하더라고요."
"아는 사람하고 넌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데?"
"같은 학원에 다녀요."
"......그래?"
물으면서 이쪽을 바라보는 영도의 표정이 상당히 껄쩍지근했다. 뭔가를 의심스러워하는 눈빛. 마치 의처증이 있는 남편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건가 싶었던 수인은 영도를 흘겨봤다.
"지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지요?"
"이상한 생각? 그런 건 안 해."
정말이라는 듯 영도는 수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건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흔들림도 없고 동요도 없다. 그저 똑바르게 바라보는 시선에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영도 쪽이었다. 소파에 팔을 올린 영도는 다른 쪽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문제야."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이상하게 말이지. 그러니까....."
말을 하려다 만 영도는 꽤 복잡한 얼굴이었다.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채로 먼 곳을 바라보나 싶던 그는 곧 긴 한숨을 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을 비우기로 했어. 이것저것 신경을 쓰면 너나 나나 둘 다 지치게 되겠지. 생각해보면 우습잖아? 네가 바깥에서 다니는 게 싫고, 너랑 어울리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짜증이 난다고 그러면. 그건 완전히 네가 아무데도 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 말하는 거하고 똑같은 거잖아."
"그러네요."
"그런 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요. 정말 말도 안 되지요."
"......."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인이 이렇게 쉽게 긍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면 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있나 싶으면서도 다리에 올려진 영도의 두 발이 간간히 까닥거린다. 소파에 양 팔을 올리고 그쪽에 얼굴을 묻은 영도는 뚱한 얼굴이었다. 나 지금 토라졌으니까 네가 먼저 말 걸고 신경을 좀 써봐. 그리 말하는 느낌이었다.
어린애도 이런 어린애가 없었다.
"난 집에만 있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말했지만, 나가면서 여기저기를 알아볼 거예요. 그러는 편이 나에게 훨씬 더 나을 일이라는 걸 아니까요."
"그렇게 해. 누가 뭐라고 했-."
"하지만 바깥에 나가는 사람들 모두하고 친해질 순 없어요."
의도를 하고 중간에 말을 자른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수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원래 성격이 그렇잖아요? 지금은 괜찮은 척 하면서 다니지만 정말은 사람들이 내 눈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잔뜩 긴장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매번 눈을 가리거나 할 순 없는 거예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눈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도 그만 두기로 했어요. 남들 보기에 얼마나 재미없고 재수 없는 성격이겠어요. 그런데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내가 아닌 타인이기 때문에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순 없지만 그냥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어요. 친구로 생각하면서 잘 지내볼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형하고 있는 게 더 좋아요. 형하고 이렇게 붙어 있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정도지요. 하지만 그렇게만 지낼 순 없는 거잖아요. 형의 생활이 있고 시간이 있듯이 나도 그걸 만들고 싶어요."
영도가 정말 좋았다. 너무너무 좋아서 이리로 온 초반의 목적은 서울 생활이 아닌, 영도를 보는 것 뿐이었다.
지금은 영도랑 꿈같은 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영도가 정말 싫어한다는 걸 가정 하에, 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를 기다리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충실하게 보내고 싶었다. 영도가 발전을 하는 게 눈으로 보이는데 이쪽만 퇴보된 채로 있을 순 없었다.
"사람을 믿지 않고 살 순 없잖아요. 예전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간간히 생각이 나긴 하지만 그걸로 움츠려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정말 화가 나는 일이니까요. 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그런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어떠한 영향을 받는 건 결코 원하지 않아요."
입을 다문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그윽한 듯 싶으나 강한 느낌이 드는 눈빛이었다.
그래. 수인은 이런 사람이었지.
언제나 늘 알고 있던 바였지만 갑작스럽게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수인을 두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말을 못한다면 행동이라도 취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수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입술을 누르는 부드러운 감촉에, 영도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몽글몽글하고 단 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냥 계속 이렇게 입술을 대고 싶었다. 아니다. 정말은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천천히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수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아주 몸까지 떨어뜨린 건 아니었다. 코 앞에 있는 수인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영도는 실제로 수인의 뒷목을 감싸고는 끌어당겼다.
재차 입술이 닿았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입을 벌린 수인은 살짝 혀를 내밀었다. 영도의 혀를 감고는 고개를 돌린다. 할짝거리는 소리와 함께 젖은 음향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수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든다.
수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영도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수인의 목에 닿았던 손이 조금 더 내려가 가슴에 안착해서는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렀다. 다른 손도 내려가선 옷 속으로 들어가자 수인이 움찔거렸다. 몸을 움츠리자 영도가 입술을 떨어뜨리며 물었다.
"내 손이 차가워?"
".....아니요."
따뜻했지만 피부에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들게 된다. 그렇다고 그게 싫은 의미로 그리 되는 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아도 영도는 알지 않을까. 그런 느낌으로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눈을 내리뜨고 있는 수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멍하다 할 수 있는 느낌으로 수인을 바라보며 영도는 중얼거렸다.
"귀엽네."
수인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간혹 영도는 이런 식으로 사람이 무안함을 느낄 만한 말을 종종 한다. 이런 분위기가 아닐 때에는 '네. 그렇지요.'라고 쿨하게 받아 넘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수인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간다.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영도는 풋. 하고 웃으면서 수인의 윗옷을 잡았다.
"만세 해 봐."
"네?"
"어서."
갑자기 무슨 만세인지 모르겠다. 의아한 얼굴이 되는 수인을 빤히 바라보며 영도는 재차 말했다. 어서 만세를 해 봐. 그리 말하고픈 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수인은 엉거주춤하게 양 팔을 위로 올렸다.
영도는 수인이 입고 있는 옷의 아래 부분을 잡아 위로 주욱 올렸다. 한 번에 탈의 시키는 것에 성공한 영도는 상반신 누드가 되어선 몸을 움츠리는 수인을 끌어안았다.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으면서 수인의 귓불을 깨물었다.
"음."
나직하게 울리는 수인의 신음소리에 영도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수인을 안은 영도의 바지 사이는 이미 뭔가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수인의 몸에 무리가 갈 것 같으니까 웬만하면 하지 않고 간단한 애무 정도로 끝내려 했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수인을 안으면 안을수록 더 원하게 된다.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미 육체적으로는 수인과 맺어졌는데 말이다.
고개를 떨구고는 수인의 목과 얼굴 부근에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쪽쪽쪽. 하고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에 수인은 영도의 팔뚝을 붙잡았다. 손바닥 안에 느껴지는 영도의 근육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수인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래서 영도의 얼굴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고는 이마에 입술을 댔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면서 입을 맞추는 수인의 행동을 영도는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어느새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대게 된 영도는 품에 안겨서 가슴과 쇄골 부근에 입을 맞추어대는 수인을 바라봤다. 움직이는 수인의 작은 머리통이 사랑스러웠다. 마치 작은 고양이가 몸 위에 올라타 있는 것 같았다.
쇄골을 따라 입을 맞추던 수인의 시선이 영도의 가슴 부근에 머물렀다. 이쪽과는 다른 가슴팍과 유두의 모양이었다. 조금 더 성인의 느낌이 난다고나 할까나. 이런 부분에서 조차도 차이점이 느껴지게 되는 건가 싶었던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눈가가 붉어졌다.
"팔 올려 봐요."
웅얼거리는 말에 영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왜?"
"그냥요."
애써 태연히 말하지만 지금 수인이 꽤나 긴장해 있는 상태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영도는 순순히 팔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옷 아래를 잡고는 위로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는 아니라 해도 금방 옷이 벗겨졌다. 상반신이 벗겨진 영도는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이 따라쟁이."
"그런 거 아니에요."
웅얼거리듯 말한 수인은 재차 영도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슴과 어깨, 그리고 목으로 계속해서 입을 맞춘다. 수인의 애무를 받는 동안 영도는 어느덧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귀여운 느낌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마냥 이 상태로 있을 순 없었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고픈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영도는 손을 내려 수인의 등을 쓰다듬었다. 손이 닿았을 때, 흠칫하고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걸 느끼며 영도는 점점 더 손을 내렸다. 앞으로 몸을 구부리자 조금 더 손이 내려갈 수 있게끔 된다. 그의 손은 수인의 엉덩이 부근에 닿았다.
영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수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어리고 순진한 수인이었다.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 영도가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앞으로 있을 모든 일들이 말이다.
"나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중얼거리는 말에 대답은 없지만 지금 수인이 귀를 모두 열어두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숨을 죽인 채로 이쪽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느끼며 영도는 재차 말했다.
"입으로 해볼 수 있겠어?"
"......."
입으로 해본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았다.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있던 수인은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영도의 성기가 감추어진 츄리닝 아래 부분이 볼록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입으로 담아서 애무를 하는 방법을 모르진 않았다. 영도가 몇 번이나 이쪽에 해주었던 것처럼, 그대로만 하면 되는 게 아니겠는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따라만 하면 되었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쉽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른침을 삼킨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본 영도가 '착하다.'라면서 엉덩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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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물건은 크고 단단했다. 휘어지는 형태도 자신의 것과는 다르다 여겨졌다. 처음 보는 게 아니고 몇 번이나 본 적 있고 손을 댄 적도 있었다.
수인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차분히 하려 노력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몇 번이나 생각을 했다. 영도가 이쪽 성기를 애무할 때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던가. 침착하게 조금의 껄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 감각으로 수인의 성기를 정성껏 애무했다. 그걸 상기하며 수인은 양 손으로 영도의 성기를 붙잡고 위, 아래로 쓸어올렸다. 단단해져 뜨거울 정도인 성기를 붙잡고 재차 입을 벌렸다.
힘겹게 귀두 부분을 물고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이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해. 그런 어드바이스를 받으면서 가능한 많은 부분을 입에 담으려 노력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꺼운 성기를 입에 문 수인의 얼굴이 붉어지고 그의 눈가로 눈물이 맺힌다. 열심히 노력을 하는 만큼 그걸 내려다보는 영도는 흐뭇하기만 했다.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열심히 애무를 하는 수인을 보다가 손을 내려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힘들어?"
가만히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젓는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눈물을 한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괜찮다니. 애써 태연한 척을 하려는 모습이 귀엽기만 해서 웃음이 나온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생각을 하지만, 좋아하는 상대가 눈물을 보이면 왜 짓궂은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더 힘들게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이런 걸 수인이 알면 분명 화를 낼 테지만 말이다.
수인의 손이 서투르게 귀두의 아래 부분을 주물거리면서 천천히 입을 연다. 성기를 빼낸 수인이 침을 삼키고는 혀를 내밀어 아래에서부터 위로 살살 성기를 핥아냈다. 가만히 보면 모두 이쪽이 해주던 걸 성실히 따라하고 있었다.
눈물이 맺혀있으나 표정 자체는 차분했다. 저 얼굴로 수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애무를 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머리 속이 가득 차 있는 게 아닐까. 그리 생각을 하자 갑자기 쾌감이 올라온다.
"하아."
한숨을 쉬면서 소파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대로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한 자극은 없어도 지금 수인이 입으로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정말은 그 얼굴을 붙잡고 깊숙이 성기를 밀어 넣고 싶지만 그러면 분명 힘들어하겠지. 그리고 그런 것보다는 수인의 아래쪽을 사용해서 가고 싶었다.
간혹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이쪽이 짐승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수인도 비슷한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가는 건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느 한쪽이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서로가 통하는 입장에 있으니 말이다. 영도는 고개를 들고 수인의 팔을 붙잡았다.
"이만 됐어."
귀두의 끝부분에 혀를 대고 애무를 하던 수인은 눈동자만 위로 들었다. 입을 다물고 침을 삼킨 수인은 중얼거렸다.
"아직 조금 더 해야만 하는 거잖아요."
"아니. 괜찮아. 그냥 네 안에서 하고 싶어."
수인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바라봤다.
그 반응이 귀엽고 재미있었다. 영도는 수인의 팔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곤 그의 허리 뒤로 손을 감았다. 무릎을 세운 수인을 다리 위에 앉을 수 있게끔 하고는 그의 귓불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그런 말은."
"왜? 부끄러워 하지마. 우리는 그런 말을 주고 받아도 이상할 거 없어."
연인 사이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담아 바라보자 수인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진다.
평소에는 무표정을 한 채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수인이나 이럴 때에는 이렇게 수줍어한다. 그 차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끌어 오르게 한다. 더는 망설일 게 없다. 지금 당장 수인을 안고 싶었다.
"허리를 들어봐."
허리를 감싸고는 위로 드는 영도의 손길에서 숨겨지지 않는 초조함이 전해진다. 영도처럼 수인도 몸이 달아있었다. 때문에 허리를 드는 그 몸짓에 망설임이 없었다.
본인의 성기를 붙잡은 영도는 끝을 수인의 엉덩이 사이에 댔다. 몇 번 비비는 동안 수인이 짤막한 한숨을 토해낸다. 긴장한 듯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아직 이런 걸로 긴장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귀두의 끝이 수인의 주름에 닿는다. 그걸 느낀 영도는 긴장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지금 들어간다."
"......."
반쯤 열린 수인의 입술이 귀에 닿았다. 살짝 떨리는 호흡 사이로 '넣어요.'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너무 듣고 싶어서 이쪽이 환청을 들은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영도는 수인의 엉덩이 볼기를 한 쪽씩 잡고는 그대로 아래로 내려버렸다.
"아윽-!"
깊이 들어오는 영도를 느끼며 수인은 뒤로 고개를 젖혔다.
반쯤 연 입술을 타고 침이 흘러나왔다. 한 번에 수인의 안에 들어가는 것에 성공한 영도는 경직된 내벽을 느끼며 한쪽 눈을 감았다.
"너무, 조여."
너무 세게 조여서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수인도 그런 것 같았다.
몸이 긴장으로 힘이 들어가고 가슴이 파들거리고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를 살피자 아직 성기는 생생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영도는 수인의 어깨 부근을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움직인다?"
이번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았다. 당장은 흔들고픈 마음 뿐이었다.
수인의 허리를 붙잡고 몸을 흔들었다. 빡빡한 내벽을 가르며 성기가 규칙적인 마찰을 일으킨다. 아래로 내려질 때마다 엉덩이가 허벅지에 닿아서 찰싹거리는 마찰음이 울렸다. 솔직히 그런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영도는 성기를 감싸는 너무도 뜨겁고 쫄깃한 내벽의 살에 푹 빠져버렸다.
미칠 것 같았다. 이런 쾌감이라니. 소름이 돋아서 피부 위로 닭살이 올랐다. 식은땀이 맺힌다. 흐릿해지는 눈동자를 가늘게 뜬 채로 영도는 수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래 입술을 깨문 채로 있던 수인은 영도가 끌어안자 기다렸다는 듯 그쪽으로 몸을 붙여왔다. 딱 붙은 채로 허리를 돌리자 안에 파고 든 성기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저릿하게 올라오는 통증과 쾌감에 수인은 움찔거렸다.
"아, 아음."
"아프지, 않지?"
아프진 않아도 내벽은 아직은 좀 뻑뻑했다. 그런 곳 안쪽을 두터운 성기가 이렇게 저렇게 날뛰어대고 있었다. 힘을 빼라는 주문에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힘을 빼는 편이 관계를 맺기가 훨씬 더 수월함을 알고 있으나 지금은 힘들었다.
커다란 게 안쪽 점막을 마찰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이상했다. 다른 때하고는 달랐다. 왜 그럴까. 잠시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영도의 다리 사이에 아이처럼 안긴 채로 하는 건 익숙치 않다는 걸 말이다.
안으로 파고드는 것도 문제지만 몸이 밀착되어 있어 성기가 영도의 배에 비벼지고 가슴이 닿아서 쓸리는 통에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수인은 울먹거리며 웅얼거렸다.
"자세가 이상해서-."
"더 깊이 느껴지지 않아?"
허리 쪽을 붙잡고 안쪽으로 당겼다. 배가 맞닿으면서 이미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게 눌려지는 느낌이었다. 배 안쪽이 튀어나오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질겁을 하며 수인이 뒤로 몸을 물리자 영도가 슬쩍 허리를 움직였다.
안을 비비면서 다른 쪽으로 쿡쿡 찔러댄다. 이상했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걸 느끼며 수인은 어떻게든 허리를 떼어내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부들거리고 떨리는 수인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영도는 반쯤 빼낸 성기를 느리게 밀어넣었다.
"이쪽은 어때?"
"시, 싫어. 그쪽은-."
"좋다는 말로 밖에 안 들리는 걸?"
수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래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숙인다. 그런 수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은근슬쩍 받아들이는 주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여기는 어때? 아. 더 조여든다."
".....그만!"
아래가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보다 지금 영도가 하는 말이 더 부끄럽기만 했다. 수인은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그러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는 듯 영도가 수인의 엉덩이를 잡아 위로 끝까지 올리곤 그대로 푸욱 내려버렸다.
"흐윽-!"
울음을 참는 듯한 울음소리에 영도는 점점 흥분이 되었다.
수인이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동안에 영도의 눈빛도 혼탁해졌다.
받아들이기가 힘들 만큼 들어찬 뜨거운 육봉의 열기가 뇌로 올라왔다. 허리가 휘어질 때마다 그걸 단단히 붙잡아온다. 맞닿은 하체는 열기와 습기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갔다. 가득 찬 물건이 빠져나가고 뜨거운 열기를 그리워하듯이 급하게 파고든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수인의 흔들림도 격렬해졌다. 얼마 전에 했는데도 너무 오랜만에 수인을 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격렬하게 흔들리자 수인의 몸이 허물어진다. 옆으로 흘러내리려는 수인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영도는 더 강하게 찔러 올렸다. 빠져나갈 때 다물어진 내벽의 살을 끝까지 파고들면서 넣을 때마다 수인은 숨이 부족한 사람마냥 헐떡거렸다. 찔러 올릴 때마다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억지로 밀고 들어와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그를 강하게 느낀다. 앞으로는 이 열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미 지배를 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어느새 수인의 성기는 조금씩 사정을 하고 있었다. 그걸 느낀 것인지 영도가 '기분 좋았어?'라고 묻는다. 말로 희롱을 하는 것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묻는다 한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았다 할 수 없었다. 수인은 흐느껴 울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그 울음소리에 영도가 거칠게 웃었다.
"사람 흥분하게 하지마."
"무슨 말을, 흐윽. 앗."
찔러 넣자 수인의 몸이 비틀어진다. 벗어나려 할 때마다 여지없이 영도의 팔이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무슨 수를 써도 그 단단한 팔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 싶었다.
너무 크고 단단한 영도가 들어올 때마다 엉덩이가 움찔거리면서 떨렸다. 허벅지가 파르르 떨린다. 크게 벌려진 주름을 타고 영도의 성기가 끝까지 밀어 넣어졌다. 연결이 된 곳에서 질척한 음향과 동시에 애액이 흘러나왔다. 몇 백을 호가하는 고급 소파 위로 그 애액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앗!"
수인의 엉덩이를 잡은 영도가 거칠게 박아 올렸다.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수인의 고개가 마구 흔들렸다.
헐떡거리는 동안 몇 번이나 배 안쪽을 두들겨 맞듯이 영도가 들어왔다.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수인은 일어나려 했지만 중심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고 영도가 깊숙이 들어왔다. 입을 벌린 채로 수인은 파들거리고 떨렸다. 견디지 못하고 영도의 어깨로 얼굴을 묻었다.
기다렸다는 듯 수인의 몸을 끌어안은 영도의 손이 수인의 겨드랑이 속으로 들어왔다.
거실 속의 공기 중으로 두 사람의 호흡이 섞여서 울려 퍼졌다. 간간히 어금니를 악물고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려는 음향도 들려왔다. 영도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수인은 더는 저항을 하지 않았다. 하반신을 두드릴 때마다 수인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한 몸으로도 보이는 두 사람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듯 싶었다.
수인의 흔들림이 점점 거세지고 살 소리와 젖은 음향 사이로 나직한 신음이 섞인다. 수인의 몸을 꼬옥 끌어안은 영도는 진저리를 치듯 몸을 떨면서 사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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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있어도 허리가 아팠다. 엉덩이 안쪽이 욱신거리고 배도 아팠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수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옆에서 영도가 왔다 갔다 해도 모르는 척 했다. 그런 수인의 모습에 초조한 건 영도 뿐이었다. 아까부터 황토팩을 뜨겁게 해서 수건으로 돌돌 감싸 수인이 끌어안고 있을 수 있도록 하고, 다른 건 허리 위에 올려주기도 한 영도는 미동이 없는 수인의 어깨 쪽으로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저기, 수인아. 괜찮아?"
"......."
"어디가 안 좋으면 말을 하라니까. 그래야 의사를 부를 거 아니야."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에요. 그러니 의사는 부르지 말아요."
수인이 입을 열자 영도는 그제야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많이 쉬어 있었다. 그게 이쪽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면 괜히 뿌듯해진다. 그러나 그걸 수인에게 내색할 순 없음이었다. 표정 관리를 하자며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한 영도는 침대에 앉아선 슬쩍 수인의 등을 쓰다듬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아?"
"괜찮아요."
"그러면 얼굴 좀 들어봐. 그렇게 푹 숙이고 있으니까 내가 괜히 겁이 나잖아."
영도는 수인을 내려다봤다. 표정을 알 수 없으니 지금 이 말을 해도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잠시의 망설임 후에 영도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그렇게 거칠었나?"
말이 없다. 느낌 탓인지 모르겠으나 주변 공기가 좀 싸해진 것 같았다. 역시나 괜한 말을 꺼낸 걸까나. 영도는 입을 다물었고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흠흠흠. 하고 연속으로 울리는 헛기침은 이쪽 들으라는 투였다. 그게 들리는데도 수인은 가만히 있었다.
지금 영도 때문에 이렇게 있는 게 아니었다. 잘 생각해보니 영도와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영도의 물건을 입에 담고 그 위에 앉아서 얼마나 많이 흔들렸는지 모른다. 흔들리는 동안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취했는지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걸로 된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생각을 하는 걸까도 싶지만 점점 그 일이 머리 속을 빙글빙글 맴돈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이상한 이 얼굴을 절대로 영도에게 보일 수 없었다.
"수인아. 얼굴 좀 들어봐."
못 든다. 이런 얼굴을 보면 영도는 분명 웃을 게 분명했다.
고집을 부리듯이 꼼짝도 하지 않는 수인을 바라보던 영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있어봐. 파스 사올 테니까."
영도는 침대에서 내려왔고 동시에 수인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꼬옥. 붙잡는 느낌에 영도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베개 옆으로 살짝 수인의 옆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수인의 눈동자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평정을 되찾은 수인은 담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까 그냥 여기에 있어요."
영도는 침대 끝에 앉으면서 수인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하지만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야."
"몸이 안 좋아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그저,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베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엎드려 있을 셈인가. 그리 생각을 하는데 수인이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덕분에 끌어안고 있던 황토팩이 옆으로 떨어졌다. 허리 위에 올려뒀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어버려서야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였다. 영도는 그걸 집어 들었고 수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영도는 두 개의 황토팩을 든 채로 수인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하는 편이 몸에 더 좋을 텐데. 그리 말하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수인은 영도가 들고 있는 것들을 바라봤다.
저건 또 어디서 난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상한 걸 사는 데에는 뭐 있다니까.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영도를 바라보기만 했다.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에 영도는 머쓱한 얼굴이 되어선 눈을 내리떴다.
쑥스러워 하기는. 하는 도중에는 엄한 말을 잘도 하는 주제에.
속으로 그리 생각을 해도 입으로 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도의 이상한 부분의 스위치를 눌러버리면 이차전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조금씩이나마 영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지구력이나 체력이 좋다는 것.
하는 도중에는 집요하고 야한 말을 해서 흥분 시키는 걸 좋아하는 것.
하지만 이쪽이 아직은 익숙치 않아서 좀 많이 참고 있다는 것.
하고 난 후에도 더 하고 싶어 하고, 그게 안 되면 여기저기를 만져댄다는 것.
평상시에도 달라붙어서 사람 건드리는 걸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이건 그가 마음을 준 사람 한정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정말로 이쪽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 건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생각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영도만큼 수인도 그가 좋기도 했고 말이다.
"왜 그렇게 보기만 하는 건데.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쑥스러운데."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부끄러운 모습은 수인으로 하여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하다보면 익숙해 지는 거네요."
".....응?"
"섹스 말이에요."
"......"
가만히 있던 영도의 눈이 점점 크게 떠진다. 설마하니 이쪽에서 그런 단어를 입에 담을 줄은 몰랐다는 듯 경악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왜? 할 때에는 당신이 먼저 말을 하는 거잖아.
놀리듯 바라보는 시선에 영도의 얼굴이 더 붉어진다. 지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반쯤 연 영도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더듬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게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건 맞겠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안절부절 못해한다. '그래.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거지. 기분은 더 좋아지게 되는 거고. 하면서 서로가 더 잘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잖아. 그래. 그렇지.'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횡설수설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우습다. 지금 영도의 저런 모습이 귀엽게만 여겨졌다.
수인은 마냥 웃으면서 바라봤고 결국 영도는 수인의 위로 엎드렸다. 그의 몸을 끌어안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길. 너 어른 놀리는 거 아니야."
"스물 넘으면 다 어른이에요. 거기다 형하고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요."
"얼마 안 나다니. 무려 7살 차이야. 내가 너보다 더 먹은 밥 그릇이 도대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 일일이 계산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여유로운 듯 대꾸를 하는 동안 영도는 더 안절부절 못해졌다. 수인을 세게 끌어안다가도 지금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는지 팔에 들어간 힘을 뺀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을 하는 동안 입으로는 연속으로 '제길, 젠장.' 같은 말을 토해냈다.
너무 좋아서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영도가 보여주는 이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여겨진다. 결국 수인도 양 팔을 들어 영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등을 부드럽게 꼬옥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정말 좋아해요."
입술을 타고 말이 흘러나온다.
누군가가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나오는 말이었다.
지금의 감정 상태가 솔직하게 단어를 통해 입 밖으로 나왔고, 그 말은 울림이 되어 분명 전하고 싶은 사람의 귀로 들어가게 될 터였다. 말이 의미가 되고 감정의 형태로 전환이 되어, 서로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 터였다.
"사랑해요."
거의 들리지 않을 속삭임에 몸 위에 엎드린 사람은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팔로 힘이 들어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끌어안기는 것으로,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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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앞에서 감상을 하는 사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누구보다 우월한 포스를 뽐내고 있었다. 눈에 확 틔는 화려한 차림이 아니라 할지라도 특유의 분위기와 제스처는 가히 군계일학이라 할만 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는 아까부터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도 유심히 보는 건가 싶었는지 곁으로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는 사내가 보는 그림을 살펴봤다.
18세 정도의 평범한 느낌을 주는 소년의 그림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깨문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 안쪽으로 미묘한 교태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묘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그림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을 작품이었다.
그림을 바라보는 영도는 꽤나 집중한 얼굴이었다. 원래 그림에 흥미가 없다 생각을 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이리도 집중한 얼굴을 한 그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들면 선물하도록 할게요."
"이건 얼마 짜린데요?"
"한 550 정도 할 것 같은데요."
"그러면 필요 없습니다."
"왜요? 원하면 말해요. 안 그래도 당신에게 뭐라도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요. 이번에 연기대상을 타기도 했으니까요."
550 정도의 그림은 쉽게 선물을 할 수 있다는 뉘앙스였다. 영도는 그 말에 가만히 있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긴 하지만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금액 선이었으면 자비로 샀을 겁니다. 하지만 금액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으니 사지 않겠습니다. 그만큼을 지불하면서까지 가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도 영도의 눈빛이 보이는 듯 싶었다. 괜한 걸로 돈 쓰지 마시지요. 그리 말하는 의사가 전달 되었다.
보통 여자라면 얼굴을 붉혔을 터였다. 하지만 여자는 시경의 누이였다. 예전에 한 번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을 때 느낌이 괜찮아서 2번째의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가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직접 찾아왔다. 이런 데라면 사진이 찍혀도 대충 무마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림을 보던 영도의 진지한 눈빛을 쉬이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있는 거였다.
"이 그림이 당신에게 다른 어떤 의미라도 되는 건가요?"
여자의 손이 그림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미묘한 터치였다. 그걸 보던 영도는 몸을 돌렸다.
"제 애인이랑 닳은 것 같아서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영도는 여자를 지나쳐갔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가만히 있던 여자였으나 곧 영도의 뒤를 따랐다. 영도는 그림을 감상하는 듯 유심히 벽면을 살펴봤다. 정말 그림을 보고자 한다면 저 선글라스부터 벗어야 할 텐데 말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여자는 조용히 물었다.
"애인이 있었나요? 그건 또 몰랐네요."
"아무도 모를 겁니다. 당신한테만 말을 한 거예요."
"그것 참 영광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요?"
"그냥 재미있구나 싶은 감각으로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영도는 발을 멈추고 조각상 앞에서 멈추었고 여자는 그 옆에 붙어 섰다.
"더는 접근하지 말라?"
"이렇게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식사를 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곤란하다 이거지요."
"왜요? 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애인이 있다고요."
여자는 조각상을 바라보는 영도의 옆 얼굴을 바라봤다.
"숨기면 되잖아요."
그 순간 영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긍정의 의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웃음의 의미 파악은 영도가 입에 담는 말로 인해 명확해졌다.
"다른 여자들하고 똑같은 분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무표정을 하고 있으니 확실히 시경하고 닮은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이쪽도 때때로 수인과 이런 식으로 비슷한 부분이 보이곤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감추며 영도는 속삭였다.
"애초에 이럴 마음이 있으셨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유감스럽게도 전 남편과 사이가 너무 좋거든요."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원혁에게는 애인이 있었군. 이런 타이밍에 성급하게 말을 꺼낼 정도로 사이가 좋은 애인이 말이야.'라고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곧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문득 이 상황이 재미있게 여겨졌다.
"의외네요. 당신한테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나한테 이렇게 말을 할 줄도 몰랐고요."
"뭐,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혼자 지낼 수 없는 거지요. 그리고 처음에는 안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묘하게 저한테 욕심을 내더라고요. 사람들이."
"그건 왜 그럴까요?"
"제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영도의 미소가 짙어졌다. 장난스럽다 할 수 있는 미소를 지은 채로 이쪽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농담을 위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 함께 있다 보면 그 누구라도 자신에게 빠져들게 할 수 있다. 그런 오만함을 풍기는 미소였다.
"재미있네요. 시경이가 당신을 유독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그 노랭이가 저를요? 이상한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영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정말 싫어하는 투였다. 확 일그러진 투로 있는 것에 여자는 소리 내 웃어버렸다.
확실히 영도는 지금껏 여자가 상대를 했던 그 누구하고도 다름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했다. 이런 재미있는 사람을 달리 어느 곳에서 또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여자는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영도의 어깨를 토닥였다.
"됐어요. 안쪽으로 가도록 해요. 차가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여자를 따라 안쪽에 준비가 된 아담한 공간으로 들어가도 그림은 어김없이 걸려 있었다.
아까 벽에 걸린 그 작은 그림 한 점이 550이었다. 그렇다면 이 넓은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그림을 다 합하면 도대체 얼마나 한다는 거란 말인가. 남의 재산 같은 것에 흥미는 없지만 그림들의 총 가격은 궁금했다.
여자가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후, 영도도 따라 앉았다. 여자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손길로 차를 따라선 잔을 건넸다. 한 모금 차를 마시고 바로 내려놓은 영도는 손을 깍지 낀 채로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여자에게 크게 흥미가 없다는 모습이었다. 그걸 느낄 수 있었던 여자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정말 흥미로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자는 차를 마셨다. 그러는 동안에는 말이 없었다. 이렇게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면 되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여자가 테이블 아래쪽으로 손을 넣더니 뭔가를 끄집어냈다. 얇은 서류 봉투였다. 여자는 그걸 영도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괜찮습니다."
"말했잖아요.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전 당신의 팬이니까,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그걸 꼭 축하해주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방식이라. 영도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껄끄러운 눈빛이었다.
보자마자 선물이 뭔지 바로 짐작이 되는 형태가 좋았다. 이런 식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걸 내밀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손을 대지 않고 마냥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정말 사람 곤란하게 하는군. 그리 생각을 하며 영도는 봉투에 손을 댔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안을 살펴봤다.
종이가 몇 개 들어가 있고 사진 같은 것도 나왔다. 정경이 환상적인 곳에 우뚝 세워진 별장이었다. 참 으리으리하구나. 이렇게 멋진 별장이라니. 위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사진을 다시 봉투에 넣은 영도는 이번에 서류를 살펴봤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이나 서류를 절반 즈음 확인했을 때 그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적으로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이 반쯤 열렸다. '이건.'라고 중얼거린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엄청난 선물이라니.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규모였다.
쉽게 말해 서류는 이 으리으리한 별장을 영도에게 넘기는 모든 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자가 진심인지 그저 이쪽을 떠보기 위함인지 알 수 없어졌다.
"이건 받기가 좀......"
"괜찮아요. 가져요. 그리고 만약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비자금이 필요하게 되면 그 때 돌려주면 돼요. 그 전까지는 자유롭게 마음껏 사용하고요."
그 순간 영도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뭐야.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얼떨떨해져 있던 영도이나 다음 순간 그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절 비자금을 빼돌리는 루트로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런 거창한 목적은 없어요. 단지, 내가 가장 아끼는 장소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고 싶을 뿐이지요."
"필요에 의해서 빼앗아 갈 예정이라면 그건 선물이라 할 수 없는 게 아닙니까?"
"그런 별장은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없는 거예요. 한 20년 가량 마음껏 사용하다가 다시 돌려주는 건 당신에게 그리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 아니겠어요?"
"20년 정도 사용하면 완전히 내 것 같을 텐데 그 때가 되서 돌려주려면 꽤나 배가 아플 것 같아서 이럽니다."
"어머나. 꽤나 귀여운 말씀을 하시네요."
여자는 입술 부근에 손을 댄 채로 웃었다.
서류에 대해 말을 하면 분위기는 더 경직될 터였다. 그걸 아는 눈치 빠른 여자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번 드라마 잘 될 거예요. 제가 나름 후원을 하도록 할게요."
"그건 제 사장님하고 의논하면 될 겁니다."
그리고 방송국하고 직접 말을 하라고. 드라마에 깔리는 협찬 같은 걸 두고 나랑 논의하려 하지 말란 말이야. 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가 아니야.
영도는 찻잔을 들었다. 미간으로 살짝 주름이 잡혀있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본 여자의 눈빛이 가늘게 휘어졌다.
"촬영장 분위기는 어떤가요?"
"그저 그렇습니다."
"귀찮은 아이는 없던가요?"
영도는 찻잔을 든 채로 여자를 바라봤다.
"그런 것도 알아보고 다니십니까?"
"이쪽은 말을 전달해주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당신 성질 건드리는 것 같은 아이가 하나 있다는 말은 진작 접수를 받았던 부분이지요."
"별 일 아닙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영도는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로 내려놨다. 그걸 살피며 여자는 재차 영도 쪽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정말로 별 일이 아닌가요?"
"애초에."
여자의 말을 중간에 자르듯이 말한 영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가 될 수도 없는 잔챙이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입을 다문 채로 바라보는 영도의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여유로움이 넘쳐 흐른다. 남들 보기엔 재수 없다 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걸 본 여자는 감탄하듯이 중얼거렸다.
"당신한테 손 대지 않기로 했던 게 아깝게 느껴지네요."
"그래도 넘보지 마십시오. 전 품절남이니까요."
"어머나. 정말로 배가 아파지려고 하네요. 당신을 가지고 간 그 이름 모를 분이 너무도 부러워지네요."
여자의 말에 영도는 별 다른 내색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내리뜬 채로 지금 수인은 뭘 하고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따름이었다.
여자를 만나고 또 드라마 촬영이다. 중간에 인터뷰가 있고 다시 저녁 촬영이 있었다. 드라마 들어가면 미칠 듯이 바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짜증이 났다.
수인이하고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
배부른 투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서로가 각자의 일에 충살한 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는 있어도 어쩌겠는가. 한참 뜨겁게 달아오르는 시기이니 만큼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을 말이다. 그리 생각을 하는 동안 영도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