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온 수인은 당장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꾹꾹 눌러서 영도에게 문자를 보낸 수인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봤다. 굳은 얼굴로 있던 그는 눈을 내리떠 지금 신고 있는 하얀 운동화를 확인했다. 매고 있는 가방이나 걸치고 있는 잠바 등을 하나하나 살피던 수인은 긴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비싼 게 아니라 했다. 그런데 비싼 거였던 거다.
아직 영도에게 묻기 전이니 뭐가 정확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게 모르게 감이 왔다. 너무 비싸다고 하면 이쪽이 고르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뒤에 붙어있는 동그라미를 뺀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도대체 얼마 짜리를 입고 있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동안 수인의 미간으로 깊은 주름이 패었다.
"야. 문수인."
부름에 수인은 뒤를 돌아봤다. 화가 난 듯 안색을 굳힌 재도가 다가왔다.
"이렇게 너 혼자 나가버리며 어떻게 하냐."
".....벌써 다 먹고 나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가게에서 나 흔자 앉아서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말도 안 되지."
눈을 흘기는 마재도는 수인이 먼저 나간 걸 타박하는 투였다. 하지만 수인은 마재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먹을 게 나왔으면 다 먹고 나와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는 동안 마재도가 품에서 지갑을 꺼내 만원 짜리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싶었던 수인은 곧 되었다는 듯 한 손을 들었다.
"괜찮아. 계산은 내가-."
"내가 먼저 먹기로 한 거잖아. 싫어하는 녀석 억지로 끌고 나와서 제대로 먹는 것도 못 봤는데 계산까지 시킬 순 없지. 그러면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딱 반반씩 내는 걸로 하자. 그게 더 마음 편하니까."
웃고는 있어도 재도의 얼굴에서 살짝 기분 나빠함이 전해졌다. 그래서 수인은 본인의 실수를 깨달았다.
지금 몸에 두르고 있는 옷이 정말 얼마짜리인지를 알게 되어서 안정치 못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마재도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버린 셈이었다. 재도는 그걸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아도 은연 중에 내비치고 있었고, 그건 그가 취할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수인은 만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미안해.'라고 말했다. 수인의 사과에 뭔 말을 들은 건가 싶었던지 마재도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라고 했어?"
"미안하다고 했어. 혼자 먹고 일어나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사과를 하면서도 수인의 눈은 재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차이가 있어 지금 수인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조금 남아있던 짜증은 사라져 버렸다.
역시나 이상한 녀석. 그런 느낌으로 숨을 죽이고 있으려니 불이 켜졌다. 머뭇거리던 마재도는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건너자."
수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점점 멋쩍어진 재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나도 잘한 짓은 없지.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와서 얼굴 마주하고 같이 밥 먹은 거잖아. 네가 먹는 밥이 편했겠어? 솔직히 말이지 지금까지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편이어서 내가 먼저 다가가 사람을 사귀는 거에는 익숙치가 못 해."
수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재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긴장하지 말라고. 내가 너한테 이상한 마음 먹고 접근을 한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게 그거야. 내 겉모습을 보고 접근을 하는 사람들 투성이지. 그러던 차에 의문이 든 거야. 내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어도 내 곁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찾기로 했어. 돈 같은거 없어도내 친구로 남아줄 것 같은 사람으로."
재도는 손가락으로 수인을 가리켰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슷한 집안사람하고 어울리는 게 첫 번째지."
".....난 부자가 아니야."
"나도 아니야. 그냥 옷 같은 거나 좀 비싸게 사고 차를 끌고 다닐 뿐이지 재벌 같은 건 될 수 없지. 그래서 몰려드는 사람들도 어정쩡한 거야."
다가왔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지 재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잠시 그는 다 털어낸 듯 개운하게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이 달라도 분명 난 너한테 먼저 접근을 했을 거야. 넌 특이하거든. 친구로 지내면 재미있을 것 같아. 너도 그럴걸? 너 아직 서울 생활이 익숙하지 않을 거 아니야. 나처럼 잘 놀던 놈이 옆에 있으면 서울 지리도 금방 익히고 사람들하고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결과적으로 너도 좋고, 나도 좋을 일이 아니겠어?"
가볍게 접근을 하는 것 같으나 그 외에 다른 꿍꿍이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사람을 대함에 있어 미숙한 구석이 있는 수인이 보기에도 재도는 이상한 성격이었다. 시경처럼은 아니라 해도 쉽사리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닌 듯 싶었다.
어느새 횡단보도를 다 건너게 되었다. 학원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수인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난 지금은 공부만 생각하고 싶어."
"공부해. 내가 하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잖아."
"하지만 공부만 해선 이곳 생활에 바로 적응할 수는 없겠지."
그저 공부만 한다고 해서 변화를 바랄 순 없었다. 서울 생활의 적응에는 인간관계도 속해 있었다. 수인 성격상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걸로 봤을 때 마재도는 딱 좋은 타이밍에 나타난 거였다. 리틀 시경 같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친구로 지내자. 대신에 지금처럼 점심 먹는 걸로 너무 사람 들들 볶진 말아줘."
"내가 널 볶았던가?"
재도는 머리에 한 손을 올리고는 위로 눈동자를 들었다. 잠깐 생각을 해보나 싶던 그는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 너를 성가시게 한 것 같기는 하다.'라고 말하는 것에 수인은 살짝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본 재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지금 웃었어? 나 처음 봤어. 의외로 귀여운 놈이었잖아."
재도는 손으로 수인의 뒷머리를 툭툭 쳤다. 그 순간 바로 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재도는 아차 싶은 얼굴로 손을 치웠다.
"미안. 누가 건드리는 건 싫다고 그랬지?"
미안하다고는 해도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쉽게 사람을 건드릴 게 분명했다. 별 다른 대꾸 없이 조용히 있으려니 재도는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 친구하는 거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수업이나 들어가자."
악수를 하지도 않고 그냥 몸을 돌려버린다. 쌩하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에 재도는 앞으로 뻗은 손가락을 옴찔거렸다.
"엄청 쿨하네."
역시나 본대로 재미있는 성격이라면서 재도는 수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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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왔습니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작은 목소리를 내고 집으로 들어갔다.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새벽 1시였다. 연초에는 하는 일 없이 바쁜 것 같았다. 내내 괜찮다가 막상 집으로 들어오자 피로가 몰려온다. 아마도 안심이 되기 때문이겠지. 하품을 하면서 영도는 욕실 앞에서 대충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나오는 뜨거운 물에 헹구는 식으로 몸을 씻은 영도는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른 채로 밖으로 나왔다.
곧장 주방으로 걸어간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캔 맥주를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입 한 번 떼지 않고 끝까지 들이킨 영도는 캬아-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뗐다.
"죽인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그만이었다. 천국이 바로 여기라면서 다시 캔을 꺼내고 주변을 둘러봤다. 조용했다. 수인은 자는 건가. 맥주 캔을 손에 든 채로 영도는 본인의 방과는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수인이 보였다. 똑바로 누워서 곧은 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굉장히 안심이 된다. 영도는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침대 끝에 앉아 수인을 내려다봤다.
거실에 있는 불빛의 도움을 받아 수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영도는 들고 있던 맥주를 옆 책상에 내려놓고 수인의 옆에 누웠다.
이불을 올리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수인이 자다가 깰 것을 염려하고 그의 몸에는 손가락 하나 닿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 있는데 마냥 잠을 잘 순 없었다.
수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인은 옆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영도를 확인한 직후 수인은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영도의 뺨에 손가락을 댔다. 막 씻고 들어와서 그런지 차가웠다. 영도는 수인의 손을 양 손으로 끌어안고는 그 안쪽에 조심스레 입술을 눌렀다.
쪼옥. 하는 소리와 함께 영도가 눈을 뜬다. 눈을 뜬 영도는 조용히 수인을 바라봤다. 진지하다 할 수 있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수인은 잠자코 있다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조금 전에."
"지금 몇 시인데요?"
"1시 반이나 되었을 것 같은데."
"피곤하겠다."
오늘 영도가 좀 일찍 들어오면 할 말이 많았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나 사용하는 운동화와 가방이 정말 얼마가 되는 거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영도의 눈빛은 다정하기는 해도 피로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그런 영도를 두고 뭐라 할 수 없었다. 수인은 조심스레 한 팔을 빼내선 영도의 몸 위에 올렸다. 그의 등을 토닥였다.
"자요."
"그래야지.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아."
"몇 시에 나가는 데요?"
"한 5시 반 되면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건데요?"
"촬영 들어가기로 했어. 일단은 지방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응."
영도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도의 등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꾸욱 누른 채로 수인은 고개를 숙였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영도가 수인의 품에 안기는 느낌이 되었다.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댄 채로 중얼거렸다.
"지금 하는 드라마 재미있어요."
"반응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좋아. 이번에 촬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대본은 전에 것보다 훨씬 좋아."
"그래요? 기대 되네요."
"나도 기대가 커. 모처럼 쟁쟁한 분들하고 같이 하는 거니까."
그 중에서 걸리는 놈이 있긴 했지만 굳이 수인에게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괜히 수인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도는 위로 눈동자를 들었다.
"학원 공부는 어때? 할만 해? 달리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공부는 재미있어요. 그리고 친구가 생긴 것 같아요."
"친구? 누구? 남자야?"
"남자에요."
"......아, 그래."
영도는 잠시 미묘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수인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여자하고 사이가 좋아지는 걸 경계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왜 지금 친구가 된 쪽이 남자라 하니 이리도 복잡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굳은 얼굴이 된 영도를 본 수인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니라며 영도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랑 친하게 지내야지. 남자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방법으로는 술 마시는 것만한 게 없지만, 좀 참아. 서로 재수를 위해서 학원에 다니는 걸 테니까."
이쪽은 공부를 하기 위해 다니는 거지만 재도는 어떨지 모르겠다. 일단 학원에 다니는 척만 하면 집안에서 용돈이 나오니까 그것 때문에 가끔 얼굴을 비친다는 느낌이었다. 수인이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지금의 영도는 그걸 알아차릴 수 없었다. 점점 더 졸려졌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조금 더 수인 쪽으로 달라붙은 영도는 눈을 감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졸리다. 나 먼저 잘게."
"잘 자요."
속삭이며 수인은 재차 영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영도의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기분 좋게 웃던 것도 잠시 영도는 금방 새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푹 잠이 드는 모습을 바라보던 수인은 한 손으로 영도를 꼬옥 끌어안았다.
생각을 해본다. 정말로 그 옷들이 비싼 거라 해도 영도는 능력이 되니까 품에 안겨줬던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비싼 걸 사줘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이쪽이 좋다는 거였다. 그런 영도의 마음을 헤아릴 때, 무조건 비싸다고 해서 뭐라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에는 몰라서 그렇게 많이 샀지만 앞으로 안 그러도록 하면 되는 게 아니겠는가.
영도가 가끔 촬영 중에 얻어온 것들이라 해서 집으로 들고 오는 게 있었다. 광고를 한 업체의 물건일 때도 있고 간단하게는 의류일 수도 있었다. 공짜라면서 웃는 얼굴로 들고 오는 영도였으나 정말은 산 걸지도 몰랐다. 앞으로는 영도가 주는 물건들에 대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받아야 겠다면서 수인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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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건 몇 시간이 못 된 것 같지만 눈을 떴을 때 상당히 개운했다. 잠깐 단잠을 잤다가 일어났다는 느낌이었다. 하품을 하며 누운 채로 기지개를 하던 영도는 반사적으로 옆을 확인했다. 옆자리는 텅 비어져 있었다. 수인은 어디로 간거지? 동시에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설마 싶었던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지금 알몸인 걸 확인하고는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어제 씻고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수인의 옆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때는 졸려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해도 지금은 새벽이었다. 머리가 맑아진 만큼 제대로 된 차림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은 좀 빌리자며 수인의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 쓴 영도는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로 나가기 전에 벽에 달라붙어 바깥을 확인했다. 저기 주방 안쪽에서 움직이는 수인이 보였다.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자 4시 40분이었다. 이렇게 일찍 부지런하기도 하다 싶었다.
"밥 하는 거야?"
반은 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눈을 반만 뜨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면서 다가와 주방 벽에 달라붙는 영도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수인은 말했다.
"씻고 옷 입고 와요. 밥 차릴게요."
"대단하다. 어떻게 이 시간에 일어나서 밥을 할 생각을 하냐."
웅얼거린 영도는 크게 입을 찢었다. 눈을 감은 채로 걸음을 옮기는 영도는 비틀비틀 불안했다. 결국 주방 앞을 지나갈 때 이불 끝을 밟아서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놀라 잠에서 깬 영도는 바로 고개를 들고는 '우와. 놀랐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영도를 보고 덩달아 놀랐던 수인은 바로 한마디 했다.
"이불 치우고 가요. 그러다 넘어지면 큰일나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 알몸이거든."
마음 같아서야 바바리맨 흉내라도 내고 싶지만 그럼 분명 수인이 질색을 할 터였다. 되는 대로 살짝 한쪽 다리를 내보이며 각선미를 뽐내려니 그러지 말라는 듯 수인이 손을 저었다.
"어서 가서 씻고 옷 입어요."
"네. 엄마."
왠지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꾸를 하는 영도의 얼굴이 장난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잤는지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있어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려보이는 인상이었다. 저렇게 해맑게 웃으면 수인도 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영도가 하는 걸 보다가 웃음이 나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려니 그걸 본 영도가 기분 좋게 방으로 들어간다.
옷 입고 씻는 건 금방인 영도였다. 바로 나올 게 분명했다. 수인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청바지에 목티를 입은 영도가 뒷목을 주무르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물소리가 나나 싶었을 때 바로 밖으로 나왔다. 양 팔을 앞, 뒤로 흔들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던 영도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눈물이 찔끔 나온다. 그 상태로 의자를 뒤로 빼 자리에 앉은 영도는 턱을 괸 채로 수인을 바라봤다.
츄리닝 위에 앞치마를 했을 뿐인데도 상당히 어울렸다. 밥을 푼다고 주걱과 밥그릇을 한 손씩 들고 있는 걸 확인한 영도가 바깥쪽으로 허벅지를 내밀어 안쪽을 두드렸다.
"잠깐 여기에 앉으면 안 될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요."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단순한 남자의 로망을 실현하고 싶을 뿐이야."
"뭐가 남자의 로망이에요."
수인은 그득 푼 밥을 영도의 앞에 내려왔다. 뒤를 이어서 작은 찜 그릇이 가운데에 놓여졌다. 행주로 뜨거운 뚜껑을 열자 안에 수북이 담긴 갈비가 탐스러운 자태를 나타냈다.
"우와. 달콤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갈비 했던 거야?"
"어제 시간 맞춰서 오면 그때 먹으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 맛있겠다."
당장 젓가락을 들어 갈비의 살점을 들어 맛을 봤다. 두어번 우물거리던 영도는 씹어 삼키지도 않고 감탄을 하며 엄지를 위로 세웠다.
"정말 맛있다. 원래 난 이런 건 처음 했을 때 보다 여러 번 익혔을 때가 더 좋더라고."
빈말이 아닌 듯 갈비를 먹는 영도의 손길은 분주해졌다. 갈비찜 같은 건 처음으로 만들어보는 거였다. 원래 이런 건 할머니가 하는 쪽이었으니 말이다. 맛을 봤을 때 괜찮았다 해도 영도에게 직접 맛있다는 말을 들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긴장을 했는데 지금은 안심이었다.
수인은 김치도 영도 앞으로 밀어 넣었다.
"나가면 제대로 끼니 못 챙겨먹으니까 많이 먹어요."
"앉아. 같이 먹자."
"그래야지요."
수인도 밥을 떠서 영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갈비 한 점을 밥 위에 올리고 맛을 봤다. 부드럽고 쫄깃했다. 양념이 적당히 잘 베인 것 같았다. 먹는 동안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이른 시간이라 너무 거하게 먹으면 속이 불편하진 알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괜찮을 지도 모르겠다. 우물거리며 먹는 동안 영도가 갈비찜 안에 있던 당근과 감자도 꺼내 맛을 봤다. 그 외에도 감자와는 색이 다른 걸 꺼내 맛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고구마네?"
"넣어봤어요. 단맛이 생기는 것 같아서."
"맛있다. 최곤데?"
"처음 먹어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자꾸 그래요."
"하지만 지금까지 먹어봤던 것 중에서 제일 맛있는 걸."
합-하고 고구마를 맛 본 영도는 행복한 얼굴로 오물거리고 있었다. 맛이 어떨까 싶어 걱정했는데 잘 먹어주니 안심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수인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렸다.
"어제 전화 할 때 목소리 별로던데 술 많이 마셨던 거예요?"
"뭐, 다른 사람들 먹을 만큼만 먹었지. 엄청 취할 정도는 아니었어. 다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뻗어서 집에 들어갈 때까지 옆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지."
"상대가 누군데요?"
"방송국 우두머리하고 몇몇 기업체 사장들."
"그런 사람들하고 술도 마셔요?"
"가끔은 마시지. 그들 입장에서는 지금 돈을 벌어다주는 이쪽과 잘 지내볼 필요가 있고, 나는 일거리를 주는 쪽에 비빌 필요가 있고 말이야."
"쉬운 일이 없네요."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영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해도 수인은 그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닌 척 해도 꽤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영도에게 딱히 도움을 줄 수 없으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저 이렇게라도 한끼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고작이었다. 수인은 영도의 밥그릇 위에 고기를 올렸다. 그걸 순순히 받아먹은 영도는 김치를 가리켰다.
"김치."
"......."
잠깐 든 생각은 '이 사람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챙겨줘야 겠다는 마음이 강했던 수인은 영도의 수저 위에 김치를 올려줬다. 그걸 먹으면서 입술 부근에 묻은 밥알을 떼서 혀로 핥은 영도가 수저로 갈비를 가리켰다.
말은 않고 그냥 행동만 취했을 뿐이지만 그 의미를 모를 수인이 아니었다. 지금 영도가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장난이 아니라 응석인가. 뭐, 아무려면 어때.
무시하고 안 챙겨줘도 상관은 없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집에 잠깐 있는 동안 편안히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이게 부모의 마음하고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면서 수인은 고기와 당근을 같이 집어서 영도의 수저 위에 올려줬다. 먼저 그걸 먹고 밥을 크게 떠서 입에 넣은 영도는 웃으면서 우물거렸다.
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동안 수인은 점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영도는 지나치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지만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수인은 영도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여러 가지 반찬을 집어줬다.
1월도 중순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시간은 후딱가는 느낌이었다. 곧 봄이 되는 걸까. 물론 그런 감상에 젖어있기엔 지나치게 추운 날이었다.
"그렇게 얇게 입고 나가도 괜찮아요?"
"응?"
막 맨션을 나서던 영도는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을 확인했다.
청바지에 목 티. 그리고 양털로 된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많이 안 챙겨 입은 것 같아도 꽤 따뜻한 상태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에는 못마땅함이 한가득이었다. 그걸 본 영도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의외로 이 차림이 따뜻해."
"그러다가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목도리라도 하고 다녀요."
"그럴까? 그런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마음에 들고 아닌 게 어디에 있어요. 추우면 그냥 두르고 다니는 거지."
수인의 쿨한 대사에 영도는 웃었다. 그런가. 하고 웃으면서 내려가는 영도의 걸음은 가벼웠다. 수인은 잠자코 그 옆을 따랐다.
다른 때 같으면 현관 앞에서 바이바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나기도 해서 바깥까지 배웅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영도는 춥고 번거로우니까 나오지 말라 했지만 수인이 고집을 부렸다. 확실하게 차에 타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들어갈 터였다. 누구는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쪽은 마냥 따스한 집 안에만 있을 순 없었다. 그렇다해서 수인이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수입이 있고와 없고의 차이는, 상당히 수인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차있다. 난 이만 가볼게."
영도는 손을 흔들며 수인을 바라봤다. 영도가 차를 타는 걸 보고 싶었던 수인은 그가 바로 움직이지 않자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설마하니 이 사람도 이쪽이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 차에 타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기다려도 움직이지 않는 걸 보아하니 설마가 맞는 모양이었다.
"왜요. 타는 것도 볼게요."
"아니야. 그냥 들어가. 너 도로변에 두고 출발하고 싶지 않아."
"전처럼 납치 같은 걸 또 당하진 않아요."
그 일로 인해 맨션 앞 도로 쪽에도 CCTV를 달지 않았던가. 모두 영도가 밀어붙인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수인도 알아서 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서 가보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영도와 눈이 마주쳤을 때 수인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씁쓸하면서도 진중한 눈으로 수인을 바라봤다.
"내가 걱정이 되니까 안 되겠어. 극성 맞는다 해도 어쩌겠어."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그리 말하는 영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수인은 맨션 앞에서 발을 멈추어야 했다. 서선 팔짱을 끼고 있는 수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추위 때문에 저렇게 된 거였다. 수인의 뺨을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은 영도는 '다녀올게.'라고 말했고 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도는 종종 걸음을 옮겨 저기 앞에 세워져 있는 벤으로 걸어갔다. 앞만 보고 가려 했으나 괜히 뒤에 선 수인이 신경 쓰였다.
한 번 돌아보자 수인이 어서 가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젓는다. 그걸 본 영도는 코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쳐내고는 바로 차에 올라탔다. 안쪽 의자에 앉은 영도는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리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일찍 나오느라 피곤하긴 해도 기분은 괜찮았다. 새벽부터 맛있는 걸 잔뜩 먹은 데다 수인의 배웅까지 받았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하루도 잘 해보자며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입술 양 끝을 위로 올렸다.
"기분 되게 좋아 보인다?"
"......."
눈을 감고 웃는 채로 굳어버렸다. 그 상태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확인을 하고 싶지 않는다는 게 더 옳은 걸지도 모르겠다.
영도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이 목소리를 착각할 순 없음이었다. 그러면 진짜라는 거야?
영도는 천천히 한쪽 눈을 떴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시경을 확인하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 몸서리를 쳤다.
"왜, 왜 네가 거기에 앉아있는 거야?!"
"내가 앉아있으면 안 될 거라도 있어?"
"당연히 안 되지! 용한인 지금 어디에 있어!"
용한이 시경이 되다니. 말도 안 되었다. 아니. 시경이 그 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시경이 있는 것만으로도 조용하던 일상에 사고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색이 된 영도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용한이 숨어 있다가 짜잔-하고 나타나는 건 아닐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용한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둘러보지마. 그래봤자 용한은 나타나지 않아. 오늘 네 매니저는 나야."
"뭐라고?"
앞으로 고개를 돌린 영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잔뜩 성질이 난 얼굴을 하는 걸 본 시경이 웃었다. 기분 좋아보였다.
"네가 싫어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난 보람을 느낀다. 야."
흥분하는 사람이 지는 거였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영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애써 좋게 말했다.
"그래. 지금 장난치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용한인 어디에 있어?"
"감기몸살로 다운됐어."
"한 게 뭐가 있다고 감기 몸살이 걸려?!"
"너무 그러지마.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거 아니야."
"운전 안 할 때에는 코 골면서 잠자기 바빴는데, 뭔 헛소리야."
"지금 내가 헛소리를 하는 걸로 보여?"
헤실거리고 웃을 때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정색을 하며 이쪽을 바라보면 영도도 입을 다물게 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시경의 표정이 풀렸다. 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갑작스럽게 용한이 못 나가게 되었으니 수가 없지. 내가 나설 수 밖에 말이야."
"사장님께서 일부러 운전수 노릇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 데요. 장난은 그만 치시고 진짜로 운전할 사람을 불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정말로 나 밖에는 없어. 그러니까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 하지마."
아까부터 전혀 달라지지 않는 시경의 얼굴을 보던 영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뒷모습에서 절망. 이라는 두 글자가 진하게 찍혀 있었다.
이런 반응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싫어하니까 정말 재미있었다. 시경은 숙인 영도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오늘 하루만이야. 그러니까 기분 좋게 같이 다니자고. 나도 오랜만에 방송국 들어가서 우리 신인들 홍보도 좀 하고 말이야. 겸사겸사 서로 좋을 일 하는 거지."
이쪽은 하나도 좋지 않았다. 시경하고 같이 어디를 다니는 시점에서 사고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시끄러운 일들이 생기게 되는 거 아니냐면서 암담해하고 있으려니 시경이 콧노래를 부르며 시동을 걸었다. 운전대를 붙잡나 싶던 시경은 옆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불현듯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부터 어디로 가면 돼?"
".....정말 미치겠네."
이런 패턴으로 일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도 너무 하잖아. 긴 한숨을 쉰 영도는 긴 말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석에 앉은 시경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옆으로 가."
"아이고. 도와주러 온 건데 되레 폐만 되네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괜찮다는 거절의 말 한 번 없이 시경은 냅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때문에 영도는 괜히 나섰나 싶기도 했다. 어차피 이렇게 해야 할 일이라면서 스스로를 다독인 영도는 운전석으로 넘어가 안전벨트를 맸다.
"그런데 수인이하고 분위기 묘하더라?"
벨트를 잡은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영도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시경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아서 보기에 좋다고."
팔짱을 낀 시경의 입술 꼬리가 완만하게 올라간다. 웃는 얼굴은 다른 때 늘 보던 것이었다. 그래서 기분 나빴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마."
시경이 끼어들면 잘 풀릴 것 같은 일들도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영도는 더 길게 말하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세상에 스케줄이 잡힌 날에 직접 운전을 하게 되다니. 그래도 국내에서는 인기도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인데 말이다.
참자고 생각을 해도 자꾸만 투덜거리게 되는 건 어쩐 이유인지 모르겠다. 혀를 차면서 후진을 하더니 자연스럽게 도로로 빠지는 영도의 운전솜씨는 꽤나 매끈했다. 편안히 옆자리에 앉아있던 시경은 안전벨트를 맸다.
"최근에 일 하는 건 어때?"
"평소랑 같아."
"성가시게 구는 놈은 없어?"
"그런 거 없어."
"정말로?"
뭔가를 알고 있어서 자꾸만 캐묻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지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일 가지고 시경에게 우는 소리를 낼 순 없었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겠다면서 영도는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잔챙이들 가지고 성가시다고 생각하진 않지."
운전을 하려 정면을 바라보는 영도의 얼굴은 느긋하기만 했다. 그저 빈말을 하는 게 아님을 느낀 시경은 '제법이네.'라고 중얼거리며 피식.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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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원혁의 스타일은 최고야."
주욱 이어진 수업 도중에도 간간히 쉬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때에도 화장실 가는 일이 아니라면 계속 공부를 하는 수인이었다. 일단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흔들림이 없는 수인이나 이번만큼은 그리 할 수 없었다. 옆자리에 앉아 잡지책을 들척이는 마재도 때문이었다.
다른 때라면 맨 뒷자리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어야 할 재도가 오늘은 수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덕분에 맨 앞의 두 자리를 혼자서 사용했던 수인은 한쪽을 재도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불편한 건 둘째 치더라도 수업 중에도 종종 옆구리를 찌르면서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라고 묻는 통에 영 성가셨다. 물론 실없는 질문에 관해선 무시로 일관하는 덕분에 뒤로 갈수록 쓸데없이 옆구리를 찌르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이상한 질문이나 말을 건네면 그냥 무시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중얼거리는 어떤 단어는 수인의 관심을 끌었다. 잡지를 보면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재도는 수인의 고개가 이쪽으로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는 눈을 꿈벅였다.
"어? 뭔 일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신경도 쓰지 않더니만. 너도 원혁한테 관심 있어?"
재도가 내민 것은 이번에 나온 모 의류업체의 화보집이었다.
수인이 그것에 시선을 고정하자 재도는 신이 난 듯 화보집을 넘겼다.
"깔쌈하게 잘 빠졌지? 이번 봄하고 여름에는 이렇게 입으면 분명 여자들에게 인기 끌 거야."
'아.'하는 소리를 낸 재도는 펼쳐진 부분을 수인에게 보여줬다.
"이 자켓 죽이지 않아? 좀 비싸긴 한데 이번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장만을 해야 겠어. 이것만 걸치고 클럽에 나가면 분명 인기 최고일 거야."
턱에 손가락을 댄 재도는 야심만만한 얼굴이었다. 클럽에 나가서 모든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말거라는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물론 재도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태도를 취하는지는 수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원혁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 화보집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수인이 말은 하지 않았어도 재도는 입이 근질근질 했던 것인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했다.
"아는 누나가 여기서 일 해. 그래서 몰래 한 부 빼서 보내줬지. 관심 있으면 좀 볼래?"
수인은 바로 재도의 손에서 화보집을 들고 갔다. 그답지 않게 적극적인 반응이었기 때문에 재도는 의외다 싶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인은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하나 같이 잘 나온 사진들 뿐이었다. 보정이라는 게 들어간 건지 어떤 건 영도처럼 안 보이는 것들도 더러 있긴 했다. 화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팔색조. 어떤 의상을 입혀놔도 본인의 것으로 소화를 하고 그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껴지게 하고 있었다. 대단했다.
"멋있긴 하네."
"단순히 멋있기만 한 게 아니야. 연기도 완전 잘 하고 화면 빨도 잘 받지. 이만한 남자 배우는 우리나라에 없어. 내가 볼 때, 원혁이 지금 국내에서는 탑이야."
재도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다. 솔직한 본인의 생각을 말한다는 느낌이었다. 그게 전해진 탓일까. 수인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원혁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을 하고 그 스타일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말하면서 나도 곧 이걸 구입할 거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려 했던 재도는 원혁을 바라보는 수인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굉장히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저 일반 연예인을 대할 때 생기는 눈빛이 아니었다. 때문에 재도는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이는 동안 재도와 수인의 옆으로 여학생들이 다가왔다.
"재도야. 뭐하고 있어? 우리 나갔다 오자."
수인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재도는 여자들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으며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미안. 난 지금부터 공부를 할 참이라."
"공부? 무슨 공부? 이상한 말 하지마."
"이상한 말이 아니야. 난 공부를 하러 학원에 온 거지. 놀러 온 게 아니란 말이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면서 잘난 척하듯 하는 말에 여자들은 식겁한 얼굴이 되었다. 이 녀석이 왜 이래. 뭐를 좀 잘못 먹었나? 그런 느낌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라보거나 말거나 재도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인은 원혁이 나온 잡지를 확인했다. 얼마 전 얻어왔다면서 들고 온 자켓을 입고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금액을 확인했다.
자켓 가격은 무려 128만원이었다. 진짜 가죽인지 아니면 단추가 금으로 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금액이 나올 리가 없잖은가. 얻어온 옷이 너무 피트 된 것이라 입을 수 없으니 수인 입으라며 건네줬던 게 지금 장 속에 있었다. 그냥 옷이다 싶어서 넣어놨는데 이런 가격이라니. 받아야 하는 걸까. 돌려준다 해도 영도가 그걸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뭔가를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런 금액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만 했다. 그걸 영도에게 확실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나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한 여자가 수인이 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싫은 소리를 냈다.
"뭐야. 원혁이잖아."
야유를 하는 뉘앙스에 수인은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수인이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었던 만큼 말을 꺼냈던 여자는 당황한 듯 싶었으나 곧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 원혁 싫어. 재수 없어."
옆에 서있던 여자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왜? 난 괜찮던데."
"그냥 좀 재수 없더라고. 자신만만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얼마 전에 있었던 이유라하고의 스캔들도 그렇고. 이상한 꿍꿍이를 꾸미는 듯한 느낌이 나."
"그거 이유라 측에서 제멋대로 꾸민 일이라고 밝혀졌잖아."
"언론에서 흘리는 말을 어떻게 다 믿어. 나 그런 거 안 믿어."
"네가 믿든 안 믿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너희들이 안 되는 거야. 그게 사실이 아닌데도 언론에서 뭐라 하는 걸 진실로 알고 있는 거. 그게 바로 잘못 된 거야. 누가 알아? 실은 원혁이 다 꾸민 일이고 이유라가 이용 당한 걸지도."
"소속사로 따지면 이유라가 속한 데가 더 크잖아."
"그쪽은 그런 걸로 일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니까."
이정도 말을 하면 대충 맞장구를 쳐주는 맛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대는 친구의 모습에 여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앞에는 재도도 있고 수인도 있었다. 그런데 받아주지 않으면 이쪽이 무슨 꼴이 되는 거란 말인가.
더 험담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결국 여자는 대충 마무리 짓자는 느낌으로 혀를 찼다.
"연기도 못하면서 얼굴 좀 반반하다고 나대는 꼴이라니-."
"연기 잘하잖아요."
이번에 태클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여자는 눈을 내리떴고 앉아있던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연기 잘해요. 얼마 전에 연기 대상도 탔어요. 다른 방송국에서도 하나씩 다 상 타고. 모두 연기를 잘하기 때문에 받은 거지요. 그걸 두고 왜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아니, 그게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는-."
"처음부터 원혁이라는 배우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눈으로 보는 걸로 그가 연기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거지요? 애초에 그가 잘하는 것에 대해선 관심 없는 거 아닙니까? 단순히 싫으니까 뭘 해도 눈에 가시인 게 아닙니까."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존대까지 해가면서 수인은 여자의 말에 반박을 했다.
"연예인이든 뭐든 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닙니다. 근거도 없는 말을 옮기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질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뭐, 뭐, 뭐라는 거야."
사람의 질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여자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망신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본인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본인이 당한 일이 억울한 듯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하는 여자의 모습에 재도가 턱을 괸 채로 한마디 했다.
"나도 수인이랑 같은 생각이야."
다른 사람보다 재도가 한 말이 더 충격이었다. 얼굴이 헬쓱하게 질린 채로 바라보는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재도는 말을 이었다.
"원혁 연기 잘해. 이만한 얼굴에 그만한 연기를 하는 배우는 국내에서 드물어. 그래서 내가 원혁을 좋아하지. 수인이가 뭐라 하지 않았으면 내가 한소리 했을 거야. 너 내가 원혁이 입었던 옷들 참고해서 스타일 매치하는 거 알면서도 그런 소리야? 나랑 친구하는 거 그만두고 싶어?"
여자의 얼굴이 울긋불긋 해졌다. 화가 난 듯 아래 입술을 깨문 여자는 '나 가볼래.'라는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주먹을 쥐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 보아하니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영도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뭘 잘난 듯 저리 말하는 거란 말인가.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선 싫은 소리 한 적 없고 그런 티도 내지 않았던 수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영도에 대해 이상한 말을 옮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한마디 해줄 거라며 눈을 내리떴다.
수인의 어깨로 손이 턱하니 올라왔다.
"너 대단한데? 원혁 팬이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담담하게 말을 한 수인은 화보집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의 일로 새삼 깨달았다. 연예인이라는 건 힘든 거로구나. 라고 말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진실인 양 말을 해도 모르는 거였다. 그것이 뿌리가 되어 이런저런 소문과 말들이 만들어져도 바로 그 자리에서 수정을 할 수 없고, 그러는 동안 그 말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할 터였다. 나중에 그 말을 전해들은 당사자는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속이 상할까.
"그거 가지고 싶어?"
수인은 재도를 봤다. 손에 턱을 괸 재도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말했다.
"화보집에 구멍 뚫릴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팬이긴 해."
원혁의 사촌동생이라 순순히 말하기는 껄끄러웠다. 조금 전 여자에게 대했던 태도나 지금의 모습을 봤을 때 팬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싶기도 했던 수인은 화보집을 재도에게 내밀었다.
"응? 가져도 되는 건데?"
"아니. 괜찮아."
어차피 영도가 가져다 줄 테니 말이다.
영도는 잡지 촬영이나 화보 촬영 같은 게 있으면 모두 수인에게 건네주고는 했다. 본인이 한 부 소장을 하고 나면 나머지는 네가 보라는 느낌이었지만, 수인은 받은 것을 소홀히 굴리지 않았다. 한 번 본 것들은 비닐로 랩핑을 해서 책장에 잘 끼워 넣었다. 그러다가 서점에 가서 영도가 나온 잡지를 돈 주고 산 적도 있었다. 그건 집에 있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어도 돈을 주고 사게 되는 건 어찌된 이유인지 모르겠다. 스스로의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을 하면서도 그리 하게 되었다.
이리 하는 걸 영도가 알면 분명 좋아할 텐데.
"아아. 또 강사가 들어온다."
턱을 괸 재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재수를 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든 장소였다. 시간이 되면 강사가 들어오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왜 이리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단순히 공부가 싫은 걸지도 몰랐다. 세상이 다 끝난 사람마냥 칙칙한 얼굴을 해도 성적 같은 건 좋으니 그게 신기하기도 했다.
앞으로 해야 할 공부 때문에 싫은 얼굴을 하는 재도와 달리 수인은 차분하게 책을 펼쳤다. 이미 공부를 하기 위한 자세를 바로 잡는 수인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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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사를 지내는 건 당연한 절차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K방송국에서 야심차게 준비를 하는 드라마이니 만큼 고사를 하는 자리로 꽤 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한 번 개별적으로 인터뷰를 하고 나서 지금은 모든 배우들과 스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행되는 고사를 바라봤다. 그 중에는 영도도 있었다.
주연 배우이니 만큼 감독 옆자리에 서있었다. 양 손을 앞으로 모은 채로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영도는 앞으로 나가 돼지 입에 돈을 물리고 큰절을 하는 감독 다음으로 나섰다. 주연 여배우와 나란히 선 영도는 일단 큰절을 하고 난 후, 돼지 콧구멍에 돌돌 만 만원짜리를 밀어 넣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두툼했다. 주변에서 잘 한다는 듯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손을 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댔다. 동영상도 물론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그냥 조용히 하는 일만 하고 물러나고 싶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이린 적당한 쇼맨쉽이 드라마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방향도 돌아보면서 윙크를 하던 영도는 여배우와 함께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제는 사람들이 하는 걸 보기만 하면 되었다. 1월 중순이라 하나 아직 좀 추웠다. 찬바람이 몸을 두드릴 때마다 긴 한숨이 나온다. 조금 전에 먹은 따뜻한 차는 이미 몸 속에서 다 식어버린 모양이었다.
"날씨가 춥네요."
상대 여배우 이미란의 중얼거림에 영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짓만 하는 것에 이미란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남자가 왜 그렇게 조심스러워요. 편하게 말 걸어요. 난 누구처럼 일부러 스캔들 같은 건 안 터트려요"
"너무 티 났습니까?"
"정말 티나요. 당신이 원한 일이 아니라 해도 이유라와 얽힌 게 있으니까 어차피 나하고도 한 번은 얽히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경직된 모습으로 있으면 기자들은 더 이상한 기사를 써댈 거예요."
백번 천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이미란과 화기애애하게 굴 순 없었다. 스캔들이 터지고 아니고를 떠나 애초에 여자 배우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아니었다. 뭘 하든지 할 일만 하고 인간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이쪽 사람들도 저번 스캔들이 이유라 때문에 생긴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였다. 괜히 그 일 때문에 이상한 말을 듣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괜한 소문에 휘말리지 않게 된 것 하나는 안심이지 않으면서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 앞으로 한 사내가 큰절을 올리는 게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돼지 입에 만원짜리를 넣고는 양 손을 모아서 크게 허리를 숙인다. 다분히 오버를 하고 있었다. 배우들 사이로 적은 웃음만 흘러나올 뿐 기자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관심이 폭발하길 바랬을 터인데 말이다.
영도는 차분한 눈길로 청년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재차 앞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중요한 자리라는 걸 알긴 하지만 그래도 추웠다. 언제 끝나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양 손을 마주 잡았다.
**********************
"수고 했어."
차 안에 앉아서 담요를 몸에 두른 시경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걸 본 순간 영도는 들고 있던 차를 그 얼굴에 뿌려버릴까 싶었다. 간신히 그걸 참고는 차에 올라탄 영도는 문을 닫고 시경에게 따스한 커피를 내밀었다.
"마셔."
"고마워요. 원영도씨."
"사람 속 긁지 말고 조용히 마시기나 해. 나도 지금 내가 뭔 짓을 할 지 모르겠으니까."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난 그저 커피를 부탁했을 뿐이야."
바로 그게 문제가 되는 거야. 주변 배우들을 보라고. 누가 직접 커피를 사서 대령을 하냐.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부려도 시원찮을 판에 지금 사장이라고 하나 있는 놈의 시중이나 들고 있으니, 이 무슨 기구한 인생이란 말인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억울했다. 이건 길 가는 사람 모두를 붙잡고 물어봐도 백이면 백, 말도 안 된다 할 게 분명했다.
목구멍 바로 앞까지 넘어오는 억울함을 꿀꺽 삼키며 영도는 커피를 홀짝였다. 복잡한 얼굴이 된 영도를 바라보는 시경은 생글거리고 웃는 얼굴이었다. 그의 기분이 왜 저렇게 착잡해진 건지 알겠다는 식이었다. 살짝 기분을 풀어줄 생각으로 시경은 말했다.
"이번 드라마 분명 성공할 거야."
"당연하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말에 시경은 웃었다. '너는 나보다 훨씬 더 뻔뻔해.' 라면서 영도의 팔을 툭툭 쳤다. 흔들려도 별 반응이 없다. 그저 커피를 홀짝일 따름이었다. 그런 영도를 보는 시경은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같이 일하기로 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되었다. 제대로 잘하고 있는 영도가 고맙기도 했다.
"음반 내볼까."
"됐어."
"웬일이야. 노래 부르고 싶어 했잖아."
"그건 나중에 해도 괜찮아."
안 그래도 바쁜데 음반까지 내면 집에 아예 들어갈 수 없어지잖아. 자연스럽게 수인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드는 거였다.
처음 시작이 가수였던 것만큼 노래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연기도 재미있었다. 하면 할수록 성과가 나오니 정말 재미있어 죽겠다. 일부러 가수를 한답시고 날뛰다가 이미지를 실추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이 페이스로 연극이나 좀 하면서 지내는 게 더 나을 듯 싶었다.
일단 영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경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 반응이 신경쓰여서 옆을 돌아봤다가 오묘한 시선을 던지는 시경을 확인한 영도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왜?"
"너 요즘에 이상하게 집에 빨리 들어가려고 하더라."
"날도 추운데 바깥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요새는 느낌이 좀 이상해. 마치 집 안에 보물단지를 숨겨둔 것 같단 말이지. 혹시 너 말이야."
시경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두근. 하고 심장이 뛴다.
"너, 수인이랑 이상한 관계인 건 아니지?"
시경은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을 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영도는 의외로 동요를 하지 않았다.
"헛소리 하지마."
목소리도 차분하게 나왔다. 네 말은 더 들을 가치가 없다. 그리 말하는 듯 대본을 느리게 넘기는 영도를 빤히 보던 시경은 좀체 변하지 않는 그 표정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아닌데. 분명히 내 촉이 말하고 있는데."
"너 촉 발달한 곤충과인 건 아는데 쓸데없는 말은 하지마. 수인인 사촌동생이야. 그런 네 말이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무슨 파장이 일어날지 정말 몰라서 그래? 나 완전히 이 세계에서 매장시키고 싶은 거야?"
"그런 건 절대로 아니야. 요즘은 너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널 매장하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러면 쓸데없는 말은 하지마."
영도는 당장 고개를 돌리고는 대본을 봤다. 그 모습이 쿨하기 그지없었다.
만약에 표정이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놀려먹기 딱이었을 텐데. 영도가 원하는 대로의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지루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래 입술을 툭 내밀던 시경는 영도의 어깨에 양 손을 턱-하니 올렸다.
"영도야. 시간 좀 내봐라. 사모님들이 널 보고 싶어 하신다."
"그런 건 안 해."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 누나가 보고 싶어 해. 우리 누나. 괜찮았지?"
그래.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서 시경의 누이가 가장 괜찮았던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 해서 그녀를 꼭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했던 영도는 싫은 눈빛을 던졌다.
"내가 꼭 그런 사람들하고 만나야 할 필요가 있어?"
"필요하지 않다고 넌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본 시경이 거 보라는 식으로 말했다.
"인기는 덧없는 거야. 하지만 인간관계는 그게 아니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형성해둘 필요가 있어. 다 너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야. 우리들은 널찍한 벌판에서 선 긋고 평화롭게 농사를 짓는 게 아니야. 누가 더 확실하고 빠르게 땅을 먹느냐가 관건이야. 네 재능을 사랑하는 사람을 단단히 붙잡아두도록 해. 그래야지 나중에는 네가 더 대단해질 수 있는 거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오래 일하고 싶으면 그리 해야 해. 막말로 넌 욕심이 있는 놈이잖아. 앞으로 더 오랫동안 이 곳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연기만 잘 한다고 버틸 수 있는 세계는 아니잖아. 그렇지?"
"......알고 있어."
사근사근하지만 아픈 곳을 쿡쿡 찌르는 시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반발할 순 없었다. 시경이 말하는 모든 말들은, 이미 영도가 알고 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바닥은 너무 더러워."
"안 더러운 바닥이 어디에 있어.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아니. 달랐다. 전이라면 시경이 하는 말에 바로 동조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세상이 모두 오염되고 검게 물든 건 아니었다. 하나쯤은 다른 게 있었다. 그게 바로 수인이었다.
아. 집에 돌아가고 싶어. 가서 수인을 보고 싶었다.
오늘처럼 간절하게 집으로 가고 싶었던 적이 달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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