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31)

바쁘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도 충실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일은 다른 때와 별다름이 없었다. 찍는 드라마가 달라지고 새롭게 체결한 CF 시안 회의를 가야 하는 일이 더 추가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식으로 이어가다 보면 지칠 만도 하건만 영도는 여유 그 자체였다. 실제로 대본을 확인하는 동안 영도는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 싶어 운전석에 앉아있던 용한이 뒤를 돌아봤다.

"너 요새 기분이 굉장히 좋다."

"그런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를 하며 대본을 넘기는 영도였으나 용한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다른 때라면 묻기가 조심스러웠을 테지만 지금은 기회였다.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용한은 아예 영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 솔직하게 말해봐. 연애하는 거 아니냐?"

영도는 대본을 덮었다. 탁. 소리가 나게 덮고는 용한을 바라본다. 응시하는 눈빛이 깊었다. 쓸데없는 건 묻지 마시지요. 그리 말하고픈 얼굴을 하는 영도였으나 용한은 물러나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 것도 그렇고 통화를 하던 중에 밖으로 나가는 것도 수상쩍고, 요즘 이상하게 잘 웃는단 말이야. 다른 때라면 이렇게 돌리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해야 할 녀석이 잠자코 따라주니까 그것도 수상하고 말이지."

"일 많이 돌려도 불평하지 않고 잘 따라와 주는 게 네 평소 소원 아니었어? 그렇게 하고 있는 것뿐이잖아. 뭐가 불만인데?"

"아니. 이상하잖아. 지금 네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원영도가 아니란 말이지."

"네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와 봤냐. 나를 뭘 그렇게 잘 안다고 그려."

"에이. 그건 또 아니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섭섭할 거 하나 없어. 그냥 요새 일이 잘 풀리고 여전히 인기를 실감하는 나날이 너무도 충실해서 기분이 좋을 뿐이야."

가슴에 손을 올린 영도는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용한의 의구심을 해소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랜 기간 매니저 일을 했기 때문에 이쪽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용한이었다. 그렇다 해서 순순히 불 수만은 없는 거였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영도는 대본을 내려놓고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용한은 '저건 완전히 대화를 회피하려고 자리를 뜨는 느낌이잖아.'라고 중얼거렸다.

팔짱을 낀 용한은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암만 생각해도 요즘 영도는 이상했다. 밤을 새거나 몇 시간씩 이동하는 일에도 불만이 없었다. 조용하니까 더 불안하다. 어쩔까 싶었던 용한은 핸드폰을 꺼냈다. 영도가 이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시경에게 보고를 해야만 했다. 시경이라면 어떻게든 개입을 해서 영도가 왜 저렇게 이상해진 건지에 대해 알아봐줄 테니 말이다.

용한이 시경에게 연락을 취하는 동안 영도도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5시 가량이었다. 수인은 이쯤부터 저녁을 준비해서 먹는다. 몸은 좀 괜찮은지. 정 힘들면 일부러 차려먹지 말고 시켜 먹으라는 말을 해줄 참이었다.

"원혁님."

낯선 호칭에 거부감이 생겨났다. '뭐야?' 싶은 마음에 영도는 고개를 돌렸고, 그런 그의 옆으로 한 사내가 공손하게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방송국에 아직 남아계셨나 봐요."

"아아. 다음 일까지 조금 시간이 있어서."

영도는 짧게 대꾸를 했다. 알게 모르게 상대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내색이 비춰졌다. 그걸 모르는지 상대는 방긋거리고 웃으면서 '그러시군요.'라고 말했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꽤나 부담스러웠다. 대단한 우상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영도는 이 눈빛이 진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대사를 간단히 주고 받는 작업 중이었다. 이 녀석은 신인이었지만 웬일로 비중이 커서 초반부터 영도와 일대일로 하는 대사가 있었다. 그리고 몇 번 말을 섞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이 놈이 연기 욕심이 있고, 연기로 이쪽을 누를 마음이라는 걸 말이다.

아무래도 대사 맞추는 시간이다 보니 다들 50%의 힘만 사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목소리 톤 하나 하나에 힘을 줘서 대사를 쳤다. 그런 걸 보고 원로 배우 분들은 '이런 것도 열심히 하는 착실한 아이네.'라는 인상을 가지게 된 듯 싶었다. 그런 칭찬에 쑥스러운 듯 웃던 녀석은 영도를 흘깃 봤다. 그리고 올라가는 한쪽 입술 꼬리에는 감추어지지 않는 우월함이 서려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놈은 어떻게든지 그 실체가 드러나기 나름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유치한 방식을 사용하는 놈이라면 그릇이 뻔했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놈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있다가 뒷통수 맞는 일은 사양이었다.

"이번 드라마가 첫 배역이던가?"

"아니요. 영화도 찍었습니다. 원혁님처럼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요."

"그냥 원혁으로도 괜찮아. 일부러 님자를 붙일 필요는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제가 얼마나 존경하는 분이신데요."

"말로만 존경하다고 할 필요는 없고, 정말로 날 위한다면 대선배님들 앞에서 님자라는 호칭을 빼도록 해. 내 보기엔 일부러 날 곤란하게 하려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으니까."

영도의 말에 사내는 당장 안색을 굳혔다.

"제가 기분 상하게 해드렸나요?"

"아니. 기분 상하게 할 게 뭐가 있어. 난 새파랗게 어린 신인을 상대로 그런 소모적인 감정을 발산하진 않아. 다만, 성가신 게 싫을 뿐이지."

그 순간 상대의 눈빛이 변했다. 은연중 무시하는 말투를 사용했더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금방 사라졌고 그는 양 손을 마주 잡았다.

"역시나 원혁님은 대인배세요. 저 같은 건 발톱의 때만도 못해요."

"그렇게 자기 비하를 할 필요는 없어. 너 신인치고는 꽤 연기 잘하더군."

"정말입니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아주 좋으네요."

"그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도록 해. 이름이-."

"신주엽이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군. 다음부터는 낯간지럽게 님자 붙이지 말고 앞으로는 그냥 선배님 정도로 끝내."

"제가 워낙에 존경하는 마음이 커서 쉽게 변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의외로 쉽게 호칭을 바꿀 수 있을 거야."

말을 하는 동안 영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간다. 눈이 웃고는 있으나 좋은 느낌이 드는 시선은 아닐 터였다. 그걸 느꼈는지 상대는 더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은 이쪽이 재수 털리다 생각하고 있을 거면서 꽤나 무리를 해서 웃는구나 싶었다. 저것도 다 나름의 사는 방식이지 않겠느냐면서 영도는 몸을 돌렸다.

안쪽에 준비된 화장실로 들어간 영도는 가장 구석 쪽으로 갔다. 뚜껑을 닫은 변기에 앉은 후, 바로 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암만 기다려도 전활 받지 않는다.

"음?"

이상했다. 느낌이 묘했다. 설마 이 녀석 학원에 간 건 아니겠지?

공부에 대한 욕심이 큰 수인이긴 해도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쉬겠다고 했었다. 이쪽에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데 그냥 나가버렸을 리는 없고-.

잠깐 생각을 하나 싶던 영도는 재차 전화를 걸려했다.

"으아, 피곤하다."

바깥에서 들리는 말에 영도는 전화를 걸려다 말고 통화를 끝내버렸다.

그냥 조용히 앉아있는 동안 소변 누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만 들어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남 눈치 보면서 전화를 걸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용한 상태일 때 수인과 통화를 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손 안에 굴리면서 '얼른 나가라. 이놈들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요새 기를 못 펴는 것 같아.'라는 말이 들렸다.

"전에 이유라 사건이 불발이 돼서 그런가."

"쉿. 그런 말은 바깥에서 하지 말라고 했잖아."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나도 이유라 일은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어. 그 계집애가 야들야들하니 색기가 넘쳐 흐르잖아. 그만하면 웬만한 사내가 다 넘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원혁, 그 자식 가드가 높더구만."

"어쩌면 이미 애인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애인이 있는데 아직까지 꼬리가 밟히지 않은 걸 보면 신중하다는 거겠지?"

"겉으로 보기에도 완벽하잖아. 스캔들 같은 걸로 명성에 흠집을 만들어낼 놈으로 보이냐? 그래도 이번 일은 의외였어. 장사장이 워낙에 난리라 원혁 쪽 다 발라버릴 줄 알았는데 그 반대잖아. 원혁 소속사 사장이 연예인 뺨치게 생기고 살살 잘 웃는 상이라 우습게 보는 게 없잖아 있었는데 배후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야. 그러니까 이번 일에 장사장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지?"

"이번에 우리쪽 후원하던 정치인 몇도 떨어졌다면서? 그건 왜 그런지 알아?"

"낸들 아나. 원래 정치인들이라는 건 철새 같은 거야. 장사장이 자리 준비하고 예쁜 애들 데리고 가면 금방 또 이쪽으로 붙게 되어있어."

"난 여기서 일하면서 정치인에 대한 환상이 다 깨졌어."

"미친놈. 어린애도 아니면서 그런 걸로 환상을 가지냐. 그냥 플레이보이를 보다가 눈 감고 여자들 상상하면서 딸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다."

"그건 그렇지."

키득거리고 웃던 사내는 '그런데 주엽이 지나치게 힘 들어가 있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뭐가?"

"그 신인 말이야. 얼굴 좀 반반해선 장사장한테 완전 찰싹 달라붙어 있더만. 신인 주제에 그렇게나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큰 놈은 본 적이 없어. 여기저기에 다 붙고 완전 얼굴에 철판 깔고 웃고 다니더만. 이번 원혁에게도 그렇고."

"그 녀석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이쪽 바닥이 만만치 만은 않은 곳인데......"

"말로는 연기로 원혁을 눌러버릴 거라고 하더구만. 일단 드라마 촬영 시작하면 원혁의 콧대를 눌러버려서 사장님 복수를 해주겠다며 설레발 치고 다니는 모양이야."

"에고. 완전 충견 똥개 나셨구만. 그래서 얼마나 갈까."

"혹 모르지. 오래 갈지도. 요새 장사장 남자애들한테도 손을 대는 모양이야."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그냥 듣고 넘기기가 거시기한 이야기인데."

"나도 건너건너로 들은 거니까. 그냥 한 귀로 듣고 넘겨."

"그런 말을 어떻게 듣고 넘기냐."

"쉿. 이만 나가자."

저도 모르게 너무 입을 가볍게 놀린 모양이었다. 정말 놀랐다는 듯한 뉘앙스로 '정말 뭐야? 어디서 들은 말인데?' 라며 집요하게 캐묻는 동료를 다독이며 사내가 밖으로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후 혼자 남게 된 영도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사내놈들이 더럽게 말 많네. 놈들이 저러는데 이쪽 소속사에 있는 사람들도 저런 식으로 입 가볍게 놀리는 건 아니겠지. 시경이한테 말해서 한 번 단속을 할 필요가 있을 듯 싶었다. 그러던 차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영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수인이냐."

[네. 전화했어요?]

태연히 묻는 목소리에 영도는 안심이 되어선 긴 한숨이 나왔다.

수인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이 나면서 바깥에서 사내들이 흥미로운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넘기는 상태였다.

"너 왜 바로 전화를 안 받는 건데?"

[진동으로 하고 바닥에 뒀더니 몰랐어요. 지금 막 설거지하고 나오다가 혹시나 싶어서 확인하니까 형 전화가 와 있더라고요.]

"그래? 그런 거였어?"

설거지 하느라고 못 받았다는 말에 영도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 정도라면 이쪽에서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지. 그런 느낌으로 영도는 앞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겼다.

"저녁은 잘 챙겨 먹었어? 오늘 밖에 안 나갔지?"

[주먹밥 좀 해서 영감님이랑 지용씨하고 같이 먹었어요.]

"그래? 그 외에는?"

[집에서 이불 빨래 하고 공부도 좀 하고 그랬지요.]

"이불을 왜 빨아. 아직 깨끗한데. 그러지마. 힘들잖아."

[안 힘들게 살살 했으니까 괜찮아요.]

대답을 하는 목소리 안쪽으로 웃음기가 묻어났다. 이불 좀 빨았다고 너무 대단한 사고를 친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는 뉘앙스였다. 수인의 웃음에 영도는 살짝 무안해졌다. 신체 건강한 사내가 이불 좀 널었다 해서 당장 뭔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 예민한 반응을 취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만 그리 생각을 해도 걱정이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있다 한 10시 되면 들어갈 거야."

[오늘은 밤 안 새나 보네요. 좋네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사서 들고 갈 테니까."

[괜찮아요. 뭐 산다고 괜히 돌지 말고 바로 들어와요. 얼굴 보고 싶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할까?"

대답을 하는 영도의 얼굴로 미미하게 홍조가 서렸다.

수인은 언제나 늘 애교를 떠는 사람이 아니었다. 수인의 애교는 산삼보다 귀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 살짝 속내를 드러냈다.

내내 보이면서 '좋아해. 좋아해.'라고 난리를 치는 것보다 이렇게 가끔씩 숨겨진 마음을 보여주는 것에 더 끌리기 마련이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영도는 오늘 일 끝나면 바로 들어가겠다 말했다.

[감기 조심하고 열심히 해요.]

"아아. 물론이지."

[이만 끊을게요. 수고하세요.]

마지막 말로 통화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통화가 끝난 후에도 영도는 달콤한 여운에 젖어있었다. 핸드폰을 양 손으로 쥔 채로 눈을 감은 영도는 '정말 좋은 걸?'라고 말하고픈 얼굴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그는 눈을 뜨고는 기합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 완전히 열심히 한다. 그리 결심을 하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

학원에 가는 시간은 대부분이 8시 반까지였다. 그러다가 수업 일정에 따라 일주일에 한, 두 번은 11시 정도에 시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에는 일찍 와서 독서실로 들어가 공부를 하는 편이었다. 오늘도 수업이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일찍 나와서 독서실에 앉아있었다. 아직도 조금은 엉덩이 안쪽이 아팠기 때문에 쿠션을 미리 준비를 해 와서 앉으니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쉬는 도중에 바깥에 나와 우유를 마시던 수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딱 1시간 정도를 집중해서 공부한 모양이었다. 30분 후에 수업이니 그 때까지 단어나 외우고 있을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 눈을 굴리려니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다. 뭔가 싶었던 수인은 뒤를 확인했다.

"안녕?"

마재도였다. 반가운 듯 손을 흔들며 웃는 마재도이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수인은 어디까지나 담담한 얼굴이었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수인을 앞에 둔 마재도는 섭섭하다는 듯 바로 한마디 했다.

"왜 그렇게 남 보듯이 봐? 우린 친구잖아."

"그랬던가."

무심한 중얼거림에 마재도는 '우와.' 하는 소리를 내며 수인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너 굉장하다. 친구라고 밀어붙이면 그렇게까지 말하는 놈들이 거의 없었는데."

너처럼 무심하게 구는 놈은 또 처음이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러는 거냐. 그런 느낌으로 빤히 바라보는 것에도 수인은 무반응이었다. 들고 있는 우유를 다 마셔버리고 빈 걸 접었다. 그런 수인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던 마재도가 손을 들었다.

"입술 부근에 우유 묻었다."

말과 동시에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수인이 주먹으로 입술을 스윽 닦아냈다. 그리고는 똑바로 바라본다. '이러면 더는 안 묻어있는 거지?' 그리 묻는 눈빛에 마재도는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못 당하겠네. 뭘 이렇게까지 사람을 경계해?"

"일부러 경계를 할 생각은 없었어. 다만 누가 만지는 게 싫을 뿐이야."

"그래? 난 사람 만지는 거 아주 좋아하는데. 사람의 체온이 기분 좋거든."

"그러면 타인의 손길을 좋아하는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누가 건드리는 걸 싫어하는 문수인에게 괜히 집적거리지 말고?"

"........"

수인은 입 꾹 다물고 마재도를 바라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애초에 말을 붙인 의도 자체를 모르겠다. 별 생각 없는데 이쪽이 너무 휘둘리는 걸 수도 있겠지. 그냥 태연하게 받아쳐 볼까. 그런 느낌으로 수인은 입을 열었다.

"그냥 장난을 치고 싶은 거라면 다른 상대를 찾는 게 어떨까?"

"장난이 아니야. 말했잖아. 너하고 친해지고 싶다고."

"지금까지 근처에 없던 타입이라 신기하니 곁에 두면서 관찰하고 싶은 게 아니고?"

"뭐-. 음. 아주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쓸데없는 짓이야. 가볼게."

어떻게 보나 마재도와 이쪽은 맞는 구석이 없었다. 괜히 붙어 있으면 서로만 피곤해질 따름이었다. 수인은 다시 독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는 순간 머릿 속에서 마재도에 관한 것은 다 지워져 버렸다. 22분 동안 영어 단어 50개 가까이 외우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입으로 반복을 하던 수인은 주변 정리를 했다.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가던 중에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들자 익숙한 이름이 액정에 뜬다. 막 독서실을 나서던 참이었기 때문에 수인은 바로 핸드폰을 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학원이야?]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감기에 걸린 건가 싶으면서도 수인의 입은 다른 걸 묻고 있었다.

"어제는 많이 바빴나 봐요?"

[빠질 수 없는 모임이 갑자기 생겨버려서.......]

뒷말을 흐리는 게 영 수상쩍었다.

"술 마셨나 봐요?"

[아주 조금 밖에 마시지 않았어.]

그게 그거지. 술을 마셨다는 것에서 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분명히 10시가 되면 온다 했던 영도이나 결국 그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갑자기 일이 생겨버렸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는 문자를 받았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늦는 건지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아주 유명한 연예인인 영도였다. 전에 매니저 용한의 다이어리에서 영도의 일정에 관한 스케줄 표를 보게 되었다. 여름까지 거의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빼백한 일정이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런 기분이 들어 질려있으려니 수인의 얼굴을 본 용한이 웃으며 말했다. '많지? 그래도 다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건 용한이나 영도, 두 사람은 익숙한 듯 싶었다. 하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마저 그들의 스케줄에 바로 적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늦게 들어온 이유가 술 때문이라니. 목소리가 이렇게 될 정도로 마셨다는 건가. 이쪽한테는 술 같은 건 절대로 마시지 말라던 사람이.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정말 3절까지 쉬지 않고 다다다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영도가 노느라고 술을 마신 건 아니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수인은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괜히 시끄럽게 굴면 서로가 피곤해질 따름이었다.

"목이 쉰 것 같으네요. 감기 증세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병원에 가요."

[아니. 괜찮아.]

"괜찮다고 하지 말고 바빠도 시간 좀 내서 병원에 가요. 그렇다고 초반부터 바로 독한 약 달라고 하지 말고, 주사도 함부로 맞지 말고요. 진찰만 받아 봐요. 집에 들어오면 생강차 준비해 놓을게요."

[그래? 알았어. 오늘은 어떻게든 일찍 들어갈게.]

"일 있는데 너무 급하게 들어오지 말아요. 사람들이 안 좋게 볼 테니까."

[걱정하지마.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바로 믿음이 가지 않는 걸까. 영도라는 사람에 대해서 불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걱정이 되었다. 이중적인 마음이 드는 걸 느끼며 수인은 잠자코 있었다. 영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축축 늘어졌는데 네 목소리 들으니까 기운이 좀 난다. 이 기세로 열심히 일해야지.]

"힘내요."

[물론이지.]

영도가 대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서 '원혁씨.'라고 이름을 불렀다. 알았다고 대답을 한 영도는 다음에 다시 통화를 하겠다는 말과 동시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영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핸드폰을 귀에서 뗀 수인은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엄지로 액정을 쓰다듬던 수인은 가방을 추스르고 양 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건강에 유의하고 옷 좀 따뜻하게 입으라는 문자라도 보낼 생각이었다.

"뭐하고 있어?"

양 손으로 문자를 누르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수인은 고개를 들었고 마재도는 흥미로운 눈길로 수인의 핸드폰 화면을 살펴봤다.

"누구랑 통화했던 건데? 네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녀석일 줄은 몰랐다."

마재도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수인은 그제야 마재도가 누구와 비슷한 지에 대해서 깨달았다. 시경이었다. 그 사람도 웃으면서 속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접근을 해서는 저 하고 싶은대로 했다. 마재도는 그런 시경보다 조금은 약한 버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함에 있어 크게 불편할 건 없었다. 시경에게 잘 단련이 되어서 이 정도는 애송이처럼 여겨진다고나 할까나. 수인은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야?"

"응? 뭐. 아는 사람들이 보여서 이야기 좀 하다 보니 시간이 가더라고. 그리고 네가 나왔지. 좀 놀랬다.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마재도는 웃었다. 남들은 보기에 상큼하다 생각할지 몰라도 수인은 아니었다.

빤히 바라보자 그는 '왜?'라고 물으면서 입술 양 끝을 위로 올렸다. 그렇게 웃는 게 본인을 더 돋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 싶었다. 그래서 수인은 한마디 했다.

"여기에 공부를 하러 온 거야? 아니면 놀러 온 거야?"

언뜻 들으면 기분 상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재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를 다녀야지 아버지가 용돈을 주시거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용돈 때문에 학원을 다니는 거라고?"

"열심히 하는 척을 하면 나오는 게 있거든."

"그러면 대학 진학은 안 하고 계속 학원을 다니는 척만 할 셈이야?"

"그런 건 아니지. 얼마 전에 테스트 못 봤어? 나 성적 좋아."

"그런 성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정말 중요한 한 번의 시험에서 좋은 점수가 나와야 하는 거잖아. 그 점수가 모든 걸 대변하는 것일 테니까."

테스트 같은 거 백날 잘 봐도 수능에서 망치면 그만이었다.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력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아닌 사람도 있을 터였다. 눈 앞에 있는 재도처럼 말이다.

언제나 늘 바른 말을 하는 수인의 패턴은 익숙해진 듯 재도는 태연하게 그의 등을 툭툭 쳤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우리 점심 한 끼만 같이 먹자. 그러면 다시는 귀찮게 안 굴게. 이번 수업 끝나고 같이 나가자. 너 시간 손해 안 보게 가까운 데서 가볍게만 먹고 나면 그 때에는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 어때? 나쁘지 않지?"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인은 마재도를 뚫어져라 바라봤고 그는 웃었다.

왜 저렇게 웃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시경도 그렇고 이 마재도라는 녀석도 그렇고 이상한 타입이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그런 사람.

학원을 다니는 건 그저 공부만 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공부도 하면서 사람들과 사귀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강원도라는 좁은 곳 말고 서울이라는 넓은 물에 나와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친구라는 것도 사귈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다보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뿐이지, 곧 필요할 때가 있을 터였다.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는 건 이상한 존재일 테니 말이다.

계속해서 점심에 대해서 말을 꺼내고 있으니 같이 간단하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정말이야? 아싸. 기분 완전 좋은 걸? 완전 공들인 공대 퀸카하고 1박 2일 코스로 여행 갔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아."

주먹을 불끈 쥔 마재도는 정말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굳은 얼굴이 되는 수인이었으나 마재도는 수인이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면서 웃기만 하는 걸 본 수인은 속으로 한숨을 죽이며 그를 지나쳐 갔다.

"수업 들어갈게."

"같이 가. 이번 수업은 같이 듣는 거잖아."

그런 것 따위 알 리가 없었다.

생각은 해도 말은 하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수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더 많이 달라붙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본인의 일이 아니기에 무심한 사람들도 수인이 학원을 다니는 동안 그의 눈동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직접 봐서 아는 사람도 있고 건너건너로 말을 들어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흥미로워하며 수인의 눈동자를 보러 돌아서 오기도 했었다. 시간이 좀 흐른 지금은 일부러 그런 식으로 확인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없어도 복도를 지나치면 흘깃거리면서 엿보듯 보곤 했다.

그런 시선이 더 강해진 것은 분명 옆을 따르는 마재도 때문일 터였다. 잘은 몰라도 마재도 그는 여기서 꽤 유명한 측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쪽과 함께 다니는 게 이상하게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왜 저 둘이 함께 있는 거야?'라는 느낌이었다.

점심이라고는 해도 같이 식사를 한다고 한 게 과연 잘한 일일까.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

질문을 받느라 수업은 다른 때보다 늦게 끝났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대답을 하는 사람이나 둘 다 진지했다. 강사인 경우 점심시간이 되면 질문을 해도 건성으로 넘기는 편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말을 주고받는 것이 서로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듯 그 얼굴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말이 길어지자 중간에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수인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지금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는 내용들이었다. 턱 끝에 손을 댄 채로 진지한 얼굴로 말을 듣고 공감을 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수인은 그들의 대화가 끝나서야 책상 위를 정리했다.

"너 진짜 모범생이구나."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짐을 다 챙긴 마재도가 옆에 서있었다.

이쪽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인내심이 다 한 듯 지친 듯한 얼굴이기도 했다. 그는 보란 듯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시야. 다음 수업은 1시 30분에 있는데 언제 밥먹고 들어오려고?"

"아래쪽에 있는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먹으면 되는 거잖아."

"분식? 점심으로 분식을 먹자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는 마재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수인은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 싫으면 다음에 같이 먹든가."

"농담 하냐. 간신히 같이 점심 먹기로 했는데 이번에 못 먹으면 너 절대로 같이 안 가려 할 거 아니야."

알게 모르게 마재도의 얼굴로 짜증이 서린다. 이런 식으로 자꾸만 일이 틀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얼굴을 할 거면 각자 끼니를 해결하자 말하고 싶어도 분위기만 더 안 좋아질 게 분명했다. 일단은 늦게 일어난 이쪽에도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수인은 말했다.

"늦었으니 내가 살게. 가자."

"정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냐."

재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어렵다 느끼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만큼 수인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쉽게 본 것이 잘못이었을지도. 그리 생각을 하며 재도는 짐을 챙겨들고 강의실을 나왔다. 문 앞에 서있던 여자들은 재도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뭐야. 기다리느라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잖아."

"얼른 가자. 빨리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오자. 샤브샤브나 갈까? 점심 특선이면 좀 싸게 먹을 수 있는데."

그 때 마재도의 뒤에서 수인이 나왔다. 재도만 있는 줄 알고 그만 보고 있었던 여자들은 수인이 나타나자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마재도를 흘깃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수인이도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거야?"

"아니. 수인이랑 나만 가서 밥 먹고 올 거야."

"에에-. 그게 뭐야. 우리들은 어쩌고?"

"너희 둘이서 먹고 와. 나는 수인이랑 공부에 대해서 의논할 게 있어."

마재도는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재도는 친한 친구 대하듯 웃는 얼굴이나 수인은 무표정이었다. 상당히 언발란스한 두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재도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이런 거절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던 여자의 미간으로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하나도 재미없어."

"미안해. 다음에 같이 먹자. 그러면 이따가 보자."

여자들이 더 말을 걸면 시간만 잡아먹는 거였다. 재도는 수인을 데리고 복도를 걸었다. 복도를 걸으면서는 수인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렸다. 직후 재도는 수인의 안색을 살폈다. 수인은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누구를 보는지 바로 감이 왔던 재도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같이 먹는 편이 나았으려나?"

"내 이름을 알고 있구나 싶어서."

"왜 모르겠어. 너 유명해.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저런 말을 하면 이쪽이 기분 좋게 생각할 거라고 믿는 건가.

수인은 잠자코 있었고 마재도는 별 말이 없었다. 다만 '분식을 먹으러 가는건가.'라고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귀로 들려도 수인은 모르는 척 말았다.

********************************************************************

학원 건물 바로 옆에 나름 괜찮다는 평판의 분식집이 있었다. 배가 고픈 사람들이 꽤 많이 찾아서 끼니를 해결하기 때문에 장사는 잘 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수인은 그곳을 염두하고 있었지만 막상 밖으로 나가게 되자 마재도는 수인의 팔을 잡았다.

"칼국수 먹으러 가자. 금방 나오는 데를 알고 있어."

"칼국수?"

"바로 저기야. 길 하나만 건너면 돼. 어차피 지금 시간에는 분식집에도 사람 많을 거야. 기다려서 먹는 것 보다는 나을 걸?"

수인은 분식집 쪽을 확인했다. 확실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그쪽을 보고 있으려니 마재도가 재차 팔을 잡아당겼다.

"얼른 와. 불 켜졌잖아."

엉거주춤하게 있는 동안 팔이 잡혀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었다. 그리고 2층 쪽에 있는 칼국수 전문점으로 들어가게 되어선 안쪽 자리를 잡고 재도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건 약간의 사기가 가미된 표현이긴 했지만, 심적으로는 그리 느꼈다. 맞은 편에 앉은 재도는 얼떨떨해하는 수인을 보며 상큼한 미소를 날렸다.

"어때? 괜찮지?"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안쪽 자리에 앉은 수인은 차분한 눈길로 주변을 살펴봤다. 그걸 본 마재도가 웃으면서 '긴장하지마. 이상한 데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딱 봐도 음식점인 곳에 와서 긴장할 일은 없었다. 지금 수인이 쉽사리 어깨에서 힘을 풀지 못하는 건 아직은 낯선 마재도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칼국수 2인분이요."

여자는 주문을 받고는 바로 물러났다. 재도는 잔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바로 나올 거야. 여기 사람 많지? 맛이 좋아서 그래."

"밥도 시킬 수 있나. 난 밀가루 음식만 먹은 적이 없어서......"

"나오면 달라고 할게. 기다리고 있어."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한 마재도는 가방을 내려놓고 거기서 잡지책을 꺼냈다.

식사를 하러 두 사람이 오게 되면 이런저런 곤란한 말들을 잔뜩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그냥 본인이 할 일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일 터였다. 수인도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딱 1시였다. 급하게 먹고 들어가면 어떻게든 수업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영도한테 문자라도 보내 볼까나.

"이런 옷 어떨 것 같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마재도가 잡지책이 잘 보이게끔 이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잡지를 보던 수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보이는 게 다름 아닌 영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봄 신상일 게 분명한 화사한 톤의 복장을 입은 영도는 상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영도가 주머니에 엄지 손가락을 끼워 넣은, 편안한 포즈를 취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일 뿐이지만 정말 영도가 있는 듯 싶어 심장이 뛰었다.

"이 바지 말이야. 괜찮지 않아?"

마재도의 손가락이 영도의 바지를 가리켰다. 그제아 수인은 상대가 묻는 질문 쪽으로 시선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색이 예쁜것 같기는 한데 그외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옷이 좋은 건지, 어떤 지를 모르겠다. 때문에 길게 생각하지 않고 수인은 대충인 감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은데."

"그렇지? 가격도 적당하고 말이야."

가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잡지의 하단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영도가 입고 있는 의상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금액이 명시되어 있었다. 청바지 가격은 무려 35만원이었다. 이건 뭔가 싶어 수인은 잠자코 있다가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비싸."

"응? 뭐가? 이 정도면 딱 적당한 것 같은데."

지금 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었다. 단순히 이쪽을 놀리려는 게 아닐까. 그런 기분이 들었던 수인은 고개를 들어 마재도를 바라봤다. 그는 되레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냐는 식이었다. 그러는 동안 김치와 접시가 먼저 내려왔다. 가운데에 있는 가스렌지 위로 칼국수가 내려놔진다. 점원이 불을 켜고 '끓으면 드세요.'라고 말하자 마재도가 고맙다고 짤막하게 대꾸를 했다.

"금액은 이 정도면 괜찮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이거나 사버릴 까나."

저렇게 비싼데 너무 간단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같았다. 하는 투를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 듯 싶었다. 그제야 수인은 조금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 같은 건 입어보고 사야 하지 않을까. 그냥 사진만 보고 고르기에는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지금 영도가 입고 있기 때문에 멋져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막상 마재도가 입어보면 이상할 수도 있는 거였다. 완전히 마재도가 영도보다 못하다는 식으로 가정하고 말하고 있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 싶지만 말이다.

"뭐 어때. 너도 지금 비슷한 브랜드 청바지 입고 있잖아."

"......뭐?"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바라보자 마재도는 잡지를 옆 자리에 내려놨다.

"그것도 여기 브랜드 한정품이잖아. 거의 50 가까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 이건-."

분명 5만원 정도로 알고 구입한 거였다.

영도가 시상식을 위해 양복을 맞출 당시 1층 매장에서 점원의 도움을 받아 고른 옷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 중에는 영도가 골라준 것들도 꽤 있었다. 운동화나 가방 같은 것도 영도가 골라준 것이었다. 때문에 자세한 금액은 몰라도 비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믿고 있었지만 문득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너무 비싸면 안 살게 분명하니까 중간에 영도가 손을 쓴 걸지도......

수인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마재도는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듯 국물을 떠 마셨다.

"시원하다. 여기 대충 익혀서 나오는 거니까 국물은 먹어도 돼. 김치도 맛있다."

마재도는 항아리에 담긴 김치에 젓가락을 집어넣었다. 분명 덜어먹는 용으로 그릇이 같이 나온 것 같은데 말이다. 수인은 집개를 들어선 항아리에 담긴 김치와 깍두기를 집어냈다. 그리고 가위를 사용해서 잘라내자 마재도가 감탄을 했다.

"꽤 손끝이 야물구나. 그냥 먹어도 되는데."

"다 먹을 음식이 아니라면 일부러 다 침을 묻힐 필요는 없잖아."

"헤에. 의외로 꼼꼼하네."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있지만 정말 그리 생각을 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탕 속에서 야채를 집어 먹었다. 우물거리는 걸 본 재도도 젓가락을 들었다.

"먹자. 익은 것 같다."

마재도는 칼국수 면을 덜어서 후루룩 거리면서 먹었다. 뜨거운 듯 입을 벌려도 그냥 먹고 있었다. 그걸 본 수인도 칼국수 면을 덜어서 맛을 봤다. 아직 좀 덜 익었다. 이걸 정말 맛있다 생각하고 먹는 걸까나.

수인은 마재도를 흘깃 봤다. 눈이 마주치자 마재도는 왜 그러냐는 느낌으로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수인은 잠자코 손을 들었다. 점원이 오자 밥을 달라는 말을 했다.

"맞다. 밥도 먹는다고 그랬지."

조금 전에 밥을 시켜준다 말을 한 사람치고는 상당히 대충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는 이런 느낌일 터였다. 이쪽은 할머니랑 같이 살면서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챙기는 일이 익숙하지만, 모두가 그런 느낌인 건 아니었다. 여자와 데이트를 하러 온 게 아닌 이상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건 무리일 터였다.

"지금 나이가 21살이라고 했던가?"

"곧 22살이야."

"군대는 아직 안 다녀온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가려면 신경 쓰이겠다. 난 안 갈 거야."

사지 멀쩡한 대한민국의 사내라면 누구나 다 가야만 하는 군대였다. 그런데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안 가겠다 하는 말에 수인은 그를 바라봤다.

"면제 받을 가능성이 높아. 아버지가 힘 좀 쓰고 있으니까."

"그래?"

대답을 해도 크게 흥미가 있는 투가 아니었다. 그런 수인의 뚱한 반응에 마재도는 웃었다.

"정말 쿨하네? 다른 놈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엄청 부러워하던데."

"부러워할게 뭐가 있겠어."

대답을 하는 수인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젓가락질을 멈춘 재도는 턱에 손을 대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감탄을 했다.

"너 진짜 묘하다. 지금까지 내 곁에 없던 타입이야. 그래서 신선해."

수인은 대답이 없었다. 점원이 밥을 건네주자 그걸 받아서 바로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고 먹으면서 김치도 입에 넣는다. 먹기는 하는데 정말 맛있어서 먹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수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마재도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너네 집 좀 사는 편이지?"

또 무슨 말을 할 셈인지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수인의 미간으로 하나의 주름이 만들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재도는 본인의 말만 할 따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꽤나 고가들인데? 지금 네가 신은 운동화. 내가 구하고 싶었는데 팔지 않는다고 해서 손에 못 넣었어. 그걸 어떻게 구입한 거야? 디자이너하고 친분이 있었던 거야? 아니면 가족이라도 되는 거야?"

묻는 말에 대답 없이 수인은 밥을 먹었다. 공기밥에 들어가는 밥의 양은 의외로 적기에 크게 떠서 입에 넣는 동안 금방 바닥이 보이게 되었다. 덜어낸 칼국수의 면을 다 먹은 수인은 물을 마시고 휴지로 입을 닦아냈다. 수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마재도는 수인이 가방을 집어 들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벌써 다 먹었어? 가려고?"

"갑자기 할 일이 생각이 나서 이만 가볼게."

"그러는 게 어디에 있어? 난 아직 안 먹었어."

"천천히 먹고 와. 계산은 내가 할 게."

더 말을 걸지 말라는 듯 수인은 계산서를 들고 가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린다. 지금 당한 일을 믿을 수 없고, 어이가 없기도 했던 마재도는 허탈한 듯 웃어버렸다.

"내가 지금 계산 때문에 이러냐."

중얼거리는 마재도는 망연한 얼굴이었다. '이런 취급은 처음이야.'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점점 멀어지는 수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