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화보는 4시간 만에 끝났지만 그걸로 일이 끝인 건 아니었다. 촬영장에서 가볍게 김밥과 쫄면으로 배를 채운 후 영도는 곧장 방송국으로 이동을 했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대본을 맞추는 일이 있었다. 이후로 다른 곳으로 한 번 더 이동을 해야만 했다. 개인적인 일을 보려면 중간 이동하는 시간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영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수인에게 '전화 걸어도 괜찮아?'라는 문자를 날렸었다. 서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전에 이런 식으로 문자를 주고 나서 전화를 걸어야 했다. 전에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다가 수업 중에 핸드폰 소리가 울려 곤란한 적이 있었다는 수인의 말에 더 조심을 하게 되었다.
그 때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다. 영도는 당장 액정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쉬는 시간인가 보네?"
[5분 정도 늦게 끝나서 문자를 늦게 확인했어요.]
"괜찮아. 난 이동하려면 앞으로 시간 많이 남았어."
말을 하는 영도는 환한 얼굴이었다. 꼬리가 있다면 흔들 기세이기도 했다.
[전 있다가 다시 교실로 들어가 봐야 해요.]
이쪽보다 더 바쁘구나.
수업 같은 건 째고 조금 더 통화를 하자는 말을 하면서 징징 거리고 싶지만 그러면 수인이 싫어하겠지. 수인이 지금 노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공부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어설프게 징징거리는 건 서로에게 폐였다. 영도는 헛기침을 했다.
"수업 끝나면 곧장 집으로 들어가라."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혹시 고기 먹고 싶으면 말해요. 들어가는 길에 사갈테니까.]
"됐어. 괜히 왔다 갔다 하다가 길 잃어버리지 말고 집으로 들어가."
[집이랑 학원만 왔다 갔다 하면 이 곳 지리 알게 되는 건 몇 년이 걸려도 어림없어요.]
그건 그렇지만 괜히 돌아다녔다가 이상한 놈들에게 걸릴까봐 그게 걱정이 되었다.
공부에 열중하는 수인이지만 조금씩 서울 지리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하는 게 없잖아 있었다. 수업이 끝나도 바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 산책을 겸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싶은 거다. 실제로 학원가 주변에 있는 대형서점이나 슈퍼 정도는 이쪽에 말을 하지 않고 가게 된 것 같았다.
수인에게 뭘 하지 말라고 해서 그게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수인에게는 수인만의 생활이 있는 법이었다. 그런 식으로 영도는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면 늦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다니다가 들어가도록 해. 혹시 무슨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네. 알았어요. 일 잘하세요.]
"너도 공부 열심히 해라."
전화를 끊고 나니 되게 아쉬웠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는 건데.
핸드폰을 쥐고 그걸 바라보는 영도의 눈으로 미련이 가득하다. 운전을 하던 용한은 그런 영도를 확인하곤 대단하다는 듯 말했다.
"사촌동생하고 사이가 정말 애틋하다. 나이 차가 많아서 애처럼 여겨지는 거냐?"
"그런 거 아니야. 그저-."
눈에 안 보이면 보고 싶고, 걱정이 되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하면 신경이 쓰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용한이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영도는 말을 돌렸다.
"어리잖아. 게다가 시골 산골에서 올라왔고. 이상한 놈들 사귀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거지."
"그래. 요즘 세상 참 무섭지. 여자들만 조심해야 할 게 아니라 남자도 조심해야할 시대야. 나중에 딸 낳으면 세상 무서워서 어떻게 키워야 하나 싶다."
용한의 푸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넘겼다.
영도는 핸드폰을 품에 넣고는 팔짱을 끼었다.
수인은 공부를 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바깥 외출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였다. 밖으로 나가서 공부를 하고 사람을 만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준식과 관련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영도는 괜한 걱정이 많았다. 혹여 나갔다가 재수 없는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전전긍긍해하던 그는 결국 시경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수인이 혼자 다니게 하는 게 걱정이 되니 사람을 붙여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당장 비웃음을 받았다.
'그런 일 당해서 몸 사리는 건 이해하지만, 그건 아주 특수한 일이었어. 납치에 협박 같은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건 아니야. 준식이 그 놈한테는 따로 사람을 붙여뒀으니 다시 수인이 앞에 나타나는 일은 생기지 않아. 그리고 네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붙이다 보면 수인이 결국 바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네가 네 생활을 하듯이 수인이도 수인이 생활을 해야지. 마음을 놓아. 누가 수인이한테 해를 가한다고 지레 겁을 먹고 그 쪽에만 신경을 쓰면 너도 결국에는 이쪽에서 일 못해. 집에 틀어박혀서 수인이 손 잡고 세세세만 할래?'
빈정거리는 말에 열이 받아도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게 맞는 말이기도 했다. 수인이 걱정이 되고 무슨 일이 생길까 고민을 하다보면 언젠가 수인이 나가지도 못하게 할 게 분명했다. 이쪽도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게 될 테고, 결국 두 사람에게 안 좋을 일이었다.
걱정은 되도 대범해질 필요가 있었다.
서로가 각자 일을 하기엔 그게 맞는 거였다.
......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문제였다.
"걱정이 된단 말이야. 걱정이."
중얼거린 영도는 한쪽 다리를 달달 떨었다. 혼잣말을 하면서 다리를 떨어대는 영도의 상태가 이상하게만 보였던 용한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봐도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차량은 방송국 앞에 도착을 했다.
"가자. 대본 챙겼지?"
영도는 별 대꾸 없이 대본을 집어들었다.
영도가 차에서 내리고 용한이 그 옆으로 건너왔다. 다른 차를 이용해서 뒤를 따랐던 의상담당이 다가오자 용한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희영아 내가 말한 데서 의상 빌려왔냐?"
"퀵으로 부탁했어요. 10분 후에 이리로 온다 했어요."
"잘 받아서 보관하고 있어. 내일 아침에 바로 입어야 하니까."
"시계나 구두 같은 건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오빠가 개인소장으로 하는 거 있으면 그걸로 해도 돼요."
희영의 말에 영도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옷 오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집에서 아무거나 차고 올 순 없잖아. 알아서 준비해줘."
"그러면 아침 의상은 제가 임의대로 준비할 게요."
"혹 모르니까 여분도 준비해둬라."
"네. 오빠. 수고하세요."
고개를 꾸벅인 희영이 가고 난 후 용한은 손을 비비면서 '자, 그러면 들어가볼까.'라며 몸을 돌렸다. 고개를 든 그는 당장 보이는 것에 파들-하고 눈가를 떨었다.
"이유라다."
중얼거린 용한은 영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금 있다가 들어가 보라는 사인이었지만 영도는 그 사인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입구 쪽에 모여있던 이유라측 사람들 중 몇이 영도를 발견하곤 안색을 굳혔다. 그 중에는 이유라도 있었다. 그녀의 눈초리는 그리 곱지가 않았다.
이번 연애설로 영도는 입지를 굳혔지만 이유라는 아니었다. 언론은 잠잠해졌지만 인터넷에서는 소위 말하는 이유라 까대기가 진행 중에 있었다. 인터넷이 무섭도록 파워를 자랑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녀의 인기는 주춤하는 듯 싶었다. 그에 반해 이번에 새롭게 시작된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이 18%로 그리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끝날 때까지 그 상태를 지속하면 대성공인 셈이었다.
날카롭게 노려보는 이유라를 쳐다도 보지 않고 영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영도였으나 옆에서 따르는 용한은 그게 아니었다. 영도의 태도가 대범하게만 여겨졌다.
"넌 정말 인물이야."
"뭐가?"
"난 이유라 볼 때마다 껄끄럽다."
"껄끄러울 게 뭐가 있어. 이미 다 정리가 된 일인데."
기자회견에 있었던 일은 이유라측에서 볼 때 재미없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쪽에서 달리 공격이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잠잠했다. 분명 시경이 뒤에서 손을 쓴 것일 터였다. 어떤 식으로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유라가 조용해지고 그쪽 사무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언론으로 공격이 들어오지 않은 걸 보아하니 어떤 식으로든지 협정을 맺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시경이 그쪽에 협박을 했는지도 모르지.
"영도야. 이쪽으로 가야 해."
용한이 한 발 먼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영도가 먼저 오르자 용한도 뒤를 따랐다. 문을 닫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차. 죄송합니다."
헐떡거리면서 뛰어 들어오는 상대를 흘깃 본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별 관심 없었다. 그런 티를 내고 있었으나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들었던 이는 서있는 영도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우와. 원혁님이다!"
원혁님? 그건 또 무슨 호칭이야?
낯선 만큼 거부감이 강하다.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영도였으나 청년은 그게 아닌 듯 감탄을 하듯 영도의 얼굴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고 당황한 듯 그는 용한을 봤다.
"죄송합니다. 저도 올라가야 하는데 여기에 타도 되는 건가요?"
뒷머리에 손을 올린 이는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방송국의 엘리베이터는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영도가 전세를 낸 건 아니었다. 상관없다는 의미로 용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뭐, 모두가 이용하는 거니까. 일부러 그리 묻지 않아도 되네."
용한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을 하곤 곧장 고개를 돌렸다. 영도가 입을 열었다.
"다른 배우분들은 다 도착을 한 거야?"
"장미란 선배님하고 몇몇 배우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데. 늦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그래?"
그러면 다행이었다. 사진 촬영은 일정대로 끝낼 수 있었지만 이동하는 동안 쓸데없이 길이 막혔다. 다른 배우들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이쪽만 늦으면 낭패스러웠을 터였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춘다.
"저도 그 드라마에 출연합니다."
문이 열리면 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도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영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 양 끝을 올렸다. 입매가 쑥 들어가는 게 조커의 웃음과 닳아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청년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쪽을 가리켰다.
"원혁님. 먼저 내리세요."
이상한 놈이었다. 그리 생각을 하는 건 영도 뿐만이 아닌 듯 싶었다. 용한은 버튼을 누른 채로 영도의 팔을 툭툭 쳤다. 영도가 내리고 용한이 뒤를 따르고, 청년도 내렸다. 두 사람이 껄끄럽게 생각을 한다는 걸 모르는지 청년은 양 손을 마주 잡으며 정말 설레인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원혁님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 전에 원혁님께서 찍은 절망의 늪을 보고 엄청난 팬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연기를 잘하십니까. 전 원혁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 촬영이 너무도 기대가 됩니다."
들뜬 듯 말하는 모습은 신인 배우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것하고 속내가 무조건 똑같을 순 없었다. 실제로 순진하고 어리고 풋내 나는 신인들은 이런 식으로 당돌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말을 붙이지 못한다.
청년을 바라보는 영도의 눈빛은 서늘했다.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연기를 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니 롤 모델을 정하고 싶다면, 그 분들 중에서 한 분을 보고 배우는 게 좋아."
"하지만 전 원혁님의 연기가 정말 좋습니다."
청년은 영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키가 큰 편인지 의외로 눈 높이의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도 않았다.
"앞으로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청년이 먼저 복도를 달려간다. 코너를 돌아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용한은 혀를 찼다.
"저 새끼는 뭐야."
"어느 소속사인지 한 번 알아봐."
"왜? 신경 쓰여?"
"눈 못 봤어?"
'천하의 원영도가 저런 신인을 신경 쓰는 거야?' 같은 식으로 우스개 소리를 하려 했으나 앞을 바라보는 영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완전히 날 깔아뭉개는 눈빛이던데? 오랜만에 무시하는 눈빛을 다 받아보네."
".......그게 정말이야?"
밑바닥부터 올라온 영도였기 때문에 원래 그런 쪽으로 알아보는 눈치는 대단했다. 괜히 저러는 건 아닐 터였다. 흘러 넘길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용한은 영도가 들고 있던 대본을 들고 가서 배우 명단을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영도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초반부터 난리도 아니구만."
너무 조용한 건 지루하지만 일부러 이런 식으로 분란이 일어날 낌새는 달갑지 않았다. 뭐, 위기가 있어야 나름의 스릴이 생기는 거겠지.
한 번 해보자며 영도는 앞으로 한 걸음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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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으로 가려고?"
막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던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책상 바로 옆에 서있는 마재도가 보였다. 수업은 조금 전에 끝난 참이었다. 언제 정리를 하고 이리로 온 건지 모르겠다. 수인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묵묵히 주변을 정리했다. 그 모습에 그건 아니라는 듯 마재도가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친구 말 무시하는 게 아니지. 우리 저녁 먹고 가자."
"집에서 먹을 거야."
"집에서 먹을 거라고? 애가 아니잖아? 그러지 말고 먹고 들어가. 그게 어머니한테 효도하는 길이야. 아들 재수시키는 것도 겁나 힘든데 들어올 때마다 저녁 차려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수인은 단어장을 손에 쥐고 마재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인의 눈동자가 빤히 바라볼 때 마재도는 살짝 긴장한 듯 싶었다. 회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살피는 기색을 느끼며 수인은 차분히 말했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어."
순간 마재도가 굳어버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마냥 집요하게 굴 것 같았다. 일일이 사람 상대하는 건 정말 성가시구나.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어깨에 걸쳐진 손을 치워냈다. 그리고 지나쳐가려는 순간 마재도가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성가셨기 때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재도는 그런 수인 앞으로 이동했다.
"미안해. 알고 그런 식으로 말한 건 아니야."
내내 유들거리는 표정을 전면에 앞세우던 마재도이나 지금은 정말 당황한 듯 싶었다. 침착하게 들으라는 듯 그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전부터 널 관심 있게 봐왔어.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밥 먹고 들어가. 내가 맛있는 집을 알거든."
이쪽을 바라보는 마재도는 진지한 눈빛이었다. 뭔가 달리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수인도 마냥 학원에서 혼자 행동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영도의 이런저런 영향으로 간신히 눈을 내놓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이상하다는 듯 사람들이 쳐다보면 위축이 되곤 했다. 덧붙어 준식의 일도 있었다. 영도가 집에만 붙잡아 두려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완전히 그 일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건 껄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긴장을 하는 마재도를 딱 자르기도 뭐했다. 사내 둘이 나란히 서있는 걸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수인은 나름 최선의 대안에 대해 말을 꺼냈다.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서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야. 집에 들어가서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청소도 해야 해. 그리고 난 낯선 사람하고 밥 먹으면 소화가 안 되는 편이야. 따로 식사를 할 거라면 차라리 점심 때가 나을 것 같다."
말을 하면서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점심 정도라면 괜찮을 듯 싶었다. 근처에 밥집도 많고 학원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종종 이용하곤 했다. 이상한 곳으로 가려하면 수업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수인은 본인이 한 말에 만족해하며 재차 말했다.
"내일 점심시간에 가까운 곳으로 가서 끼니나 때우자."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로 흔들림이 없었다. 차분하기만 한 그 눈빛에 마재도는 더 수인의 손목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천천히 손이 떨어지고 수인은 몸을 돌렸다.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멀어지는 수인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수인이 가버리고 난 후 기다렸다는 듯 마재도의 곁으로 여자들이 달라붙었다.
"왜 그냥 보내? 같이 밥 먹는 거 아니야?"
"우리가 퇴짜 맞은 거야? 부자라고 되게 거들먹거리네?"
어느새 수인은 수상하고 이상한 놈에서 재벌 2세 정도로 격상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부자인 것 같으니 같이 놀면서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여자들은 쉽사리 팀으로 오지 않는 수인에 짜증이 난 건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봤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걸."
중얼거림에 마재도 옆에 서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때와 달리 눈빛을 반짝거리는 마재도를 보곤 놀라 숨을 죽였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재도는 여전히 수인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생긴 것도 참 오랜 만이었다. 여자라면 모르겠지만 남자를 상대로는 처음이었다. 튕기면 튕길수록 더 알고 싶었다. 내일 오면 반드시 같이 점심을 먹고야 말겠다며 그는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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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이 넘어가고 이제는 2011년이었다. 날은 여전히 쌀쌀하지만 맨션 안은 언제나 늘 적정 온도를 맞춰둬야 했기 때문에 안에만 있으면 지금이 가을인지 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부자들만 사는 맨션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애첩, 숨겨둔 자식, 벼락부자, 땅부자, 사기꾼, 단순한 투자의 목적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을 하는 장소이다 보니 하루 종일 로비에 서있어도 다니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설령 누가 지나가도 눈을 마주칠 순 없었다. 그들은 도도하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괜히 눈이 마주쳤다가 험한 일 당할 수 있었다. 적당히 보조를 맞추면서 비굴하게 굴어야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다.
이런 곳의 경비 따위 오래 일해 봤자 경력이 붙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고 거의 1년 가까이 있는 것은 보수가 세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알바비가 짭짤했기 때문에 그만둘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때때로 지루하고 무료하다는 게 장애물이 될 따름이었다.
멍하니 로비 가운데에 서서 속으로 숫자를 한 4356번까지 세고 있던 지용은 자동문이 열리자 언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늘씬하고 얼굴이 작은데다 스타일 좋게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피부가 연한 갈색이고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은 찰랑거렸다. 보면 평범한 듯 싶으나 다가오면 그게 또 아니었다. 사내의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보게 되는 순간, 그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진다. 뭐라 딱 집을 수 없지만 묘했다. 애로과인 최씨 영감이 '수인이한테 빠지면 헤어 나오길 힘들 걸.'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최근 들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된 지용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별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들릴 수도 있는 억양의 말이었다. 하지만 지용은 이 청년은 실상 얼마나 다정하고 주변 사람들을 많이 신경쓰는지 알고 있었다.
"오는 길에 맛있을 것 같아서 좀 사왔어요. 휴게실에서 드세요."
수인이 내민 건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였다.
이곳에서 1년 동안 일 하면서 고구마는 커녕 커피 한 잔 얻어 마신 적 없는 지용이었다. 접근을 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지용의 번드르르한 겉모습만을 원할 따름이었다. 하룻밤 자면 주머니에 적당한 용돈이 생기는 감각에 익숙해져 있는 만큼, 이런 사심 없는 소박한 선물은 지용으로 하여금 묘한 기분이 들게끔 했다.
"일부러 이런 건 사오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어쩌다 보니 많이 사게 되었어요. 최씨 영감님 건 따로 챙겨드렸으니까 일부러 바깥에 나가실 필요는 없으세요."
"그 영감탱이가 뭘 먹든 전혀 관심 없습니다. 일부러 나가서 이런 귀한 걸 줄 마음도 없고요."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은 아니시잖아요."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본인의 눈동자 색이 다른 걸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어색함이 많은 수인이었다. 상당히 낯을 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수인이 이쪽이나 최씨 영감에 한해선 상당히 살갑게 굴고 있었다. 그만큼 수인이 신뢰를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지용은 거듭 맹세하게 된다. 정신 똑바로 차려서 수인을 살펴보자고 말이다.
영도나 수인은 쉬쉬하고 있지만 12월 중순 즈음 수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던 것 같다. 이쪽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라 해도 조금 더 신중하게 살펴봤으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확하게 뭔 일이 생긴 지 몰라도 그냥 후회의 마음이 한 가득이었다.
"이만 들어가 볼게요."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수인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걸 확인한 지용은 품에 들려 있는 고구마를 확인했다. 따스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너무 오래 들고 있으면 로비로 냄새가 풍길 터였다. 좋은 냄새였지만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기피하고 싶은 냄새겠지. 휴게실로 가지고 가자면서 지용은 몸을 돌렸다. 휴게실로 향하는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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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자 안심이 되었다.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에 돌아왔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나.
수인은 일단 거실과 주방 사이를 지나기 전에 식탁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안쪽 복도로 들어갔다. 그쪽은 원래 영도의 옷장과 악세사리 보관함, 그리고 창고로 사용하던 쪽이었다. 그 창고의 짐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지금은 수인의 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베란다와 연결이 되어 커다란 창이 있다는 것과 안쪽이 조용하다는 것이 장점인 장소였다. 영도가 신경을 써서 침대와 책상, 책장, 옷장 외에 컴퓨터와 오디오 풀 옵션으로 깔아준 방이었다. 책장은 아직 덜 채워져 있지만 여기서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 하나 짐이 늘어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방을 책상 위에 올리고 공부한 것들을 꺼냈다. 가방을 책상 아래에 둔 수인은 옷을 갈아입고 그걸 들고는 세탁실로 갔다. 벗은 옷을 바구니 안에 넣고는 욕실로 이동해서 세수와 앙치를 했다. 발도 깨끗하게 씻은 후 밖으로 나온 수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밥을 올리는 것이었다. 혼자 밥을 먹을 테니 달리 더 준비할 건 없었다. 사들고 온 고구마 하나를 꺼내 싱크대 앞에서 껍질을 까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밤고구마라 맛있었다. 강원도 고구마의 맛은 안나도 달달하니 괜찮았다. 그걸 입에 문 채로 수인은 거실로 가 TV를 켰다. 몇 번 돌리지 않아 재방송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제목은 연애시대, 주연은 원혁이었다.
초반 이유라와의 스캔들도 있고 원로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수인도 첫방송 때 본방사수를 했었다. 알고 있는 사람이 다른 인물이 되어 TV 속에서 움직이는 걸 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계속 봐도 질리지 않았다.
지금 나오는 것도 이미 생방으로 본 건데도 재미가 있었다. 손에 들린 고구마를 다ㅣ 먹었는데도 수인은 TV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7시 30분이었다. 영도는 밥을 먹었을까. 주머니에 손을 대는데 핸드폰이 만져지지 않았다. 어디에 뒀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수인은 방으로 갔다.
책상 아래쪽에 넣은 가방을 꺼내 안을 살피자 핸드폰이 보였다.
"여기에 있었네."
잃어버린 줄 알고 놀랐다. 핸드폰 사용은 최근 들어서였기 때문에 아직도 낯설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식으로 챙기는 걸 잊을 때가 있었다.
화면을 누르자 문자가 왔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굳이 확인 해볼 필요 없이 누가 보낸 건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이라 확인했다.
[집에 도착했어?]
어김없는 확인 문자였다. 이거일 거라고 100% 확신을 하고 있었다 해도 확인을 해야지만 안심이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문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양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도착해서 밥 먹으려고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책상 위에 있던 책들을 챙겼다. 영도가 늦게 온다 했으니 오늘은 거실에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액정에 찍힌 [황제영도]라는 이름을 확인한 수인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집이야?]
"네. 지금 들어왔어요. 이제 밥도 먹으려고요."
[김치에다가만 먹지 말고 이것저것 챙겨서 먹어. 오늘도 공부 잘 했어?]
"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요."
남들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수인 본인이 생각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공부를 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영도가 '잘했어.'라고 말했다. 이쪽을 상대로 말하는 목소리 안쪽으로 온기가 스며든다. 다정하기만 한 말을 듣는 동안 수인은 심장의 박동이 점점 빨라짐을 느꼈다.
[난 여기 아직도 마무리가 안 됐어. 언제 들어갈지 모르겠네. 너무 늦으면 열쇠로 열고 들어갈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자.]
"형은 끼니 제대로 챙겨먹고 있어요?"
[물론이지. 잘 챙겨먹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바깥에 좀 있다가 들어와서 한 끼라도 집 밥을 먹게 되면 게걸스럽게 그릇을 비우는 영도가 아니던가. 그렇게 먹는 모습을 보면 '며칠을 굶은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걱정스러워지는 거다.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걸 알기나 하는지 영도는 어디까지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이만 끊는다. 있다가 보자.]
"그래요. 열심히 하고 들어와요."
전화는 끊겼지만 수인은 계속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영도는 꽤나 활기가 넘쳤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본인이 원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이쪽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공부를 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잘 하고 싶었다. 마음을 다지며 수인은 책과 노트, 펜과 단어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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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고 내용을 살피면서 중요한 부분에 줄을 긁는다. 외우기 위함인지 손가락을 문 채로 중얼거리는 수인의 얼굴은 진지했다.
수인이 공부를 하는 중일 것 같아 최대한 소리를 내려 하지 않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알아차리지 못할 줄은몰랐다. 살금살금 움직여서 소파 가운데에 앉아도 수인은 무반응이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정말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먼다. 그러다가 모르는 걸 발견했는지 위에 놓인 사전에 손을 대면서 고개를 들던 수인이 움찔했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수인은 옆을 돌아봤다. 그리고 소파 가운데에 떡하니 앉아 있는 영도를 발견하고는 벙 찐 얼굴로 물었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영도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리고는 축 늘어진 상태가 되었다.
영도는 아침 나간 모습 그대로 앉아있었다.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푹 뉘이고 있는 모습을 앞에 두고 뭐라 하는 건 마음 쓰이는 일이나 눈에 보이는 게 있는데 마냥 입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때문에 수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씻고 쉬어요."
"그래야겠지. 그린데 너무 졸리다."
웅얼거린 영도는 소파 위로 쓰러졌다. 몸을 뉘인 채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가 눈을 감자 걱정스러운 마음이 강했다. 수인은 영도 쪽으로 가서 그의 이마에 손을 집었다. 수인의 손길에 영도는 웃음부터 나왔다.
"괜찮아. 열 같은 건 안나."
"그런 것 같으네요."
열은 안 나도 계속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슬슬 비빈다. 부드러운 손길에 영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안쓰러워?"
"힘들어 보여서요. 고생이네요."
"그래도 노는 것보다야 낫지. 새로 시작하는 역할이 재미있는 거라 흥미로워."
"어떤 역할."
"양아치에서 거대사업체의 회장이 된다는 꿈의 스토리."
"굉장하네요."
"배우 분들도 다들 좋고 감독분도 완벽주의자라 나하고 잘 맞아."
하지만 꼭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늘 엘리베이터 앞에서 알짱거렸던 놈이 눈에 밟힌다. 잠시 굳은 얼굴로 있던 영도이나 수인은 눈치가 빨랐다. 그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할 수 없다면서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씻고 온다."
수인은 옷 안으로 손을 넣어서 배를 긁적이는 영도를 보면서 물었다.
"밥은 어떻게 해요?"
"이것저것 집어먹어서 생각이 없네.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괜찮다는 의미로 영도는 위로 손을 흔들었다. 욕실로 터덜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많이 지쳐 보인다. 재미는 있어도 힘들기는 한 모양이었다. 영도가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직후 수인은 영도 방으로 들어갔다. 속옷과 츄리닝 옷을 챙겨선 욕실 앞에 내려놨다.
"갈아입을 옷 바깥에 있어요."
"응. 고마워."
대답을 듣고 나서 수인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피로에 좋은 차가 뭐가 있더라. 생각을 하는 동안 수인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다가 냉동고도 열었다. 그러자 안쪽에 돌돌 말아진 봉투 같은 게 보였다. 뭔가 싶어 그걸 끄집어낸 수인은 안을 확인하곤 '이런 게 있었네.'라고 중얼거렸다.
이름은 뭔지 몰라도 이쪽이 피곤해할 때 할머니가 이걸로 차를 우려냈던 것 같다. 킁. 하고 냄새를 맡은 수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맞아.
봉투를 챙겨서 가스렌지 위에다 물이 든 주전자를 올린 후 불을 켰다.
"수인아. 비누가 없어."
욕실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수인은 그쪽을 쳐다봤다.
"기다려요. 금방 가져다 줄게요."
창고 쪽으로 가서 비누 하나를 챙겨 곧장 욕실 문을 열었다.
"여기에 있어요."
"응. 고마워."
머리에 거품이 덜 빠진 채로 영도는 수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샤워를 하던 중이라 알몸인 영도를 수인은 위, 아래로 주욱 살펴보게 되었다. 원래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리 보게 된 거였다. 비누를 받아드는 영도는 모르는 것 같지만 수인은 느꼈다. 그래서 왜 그러나 싶은 생각에 얼굴을 붉힌 채로 문을 닫았다.
재차 물소리가 나는 걸 확인한 수인은 붉어진 뺨을 토닥이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끓는 동안 수인은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쪽보다 몸이 좋았다. 운동 같은 건 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복근도 제대로 잡혀있고 팔과 허벅지 쪽의 근육도 상당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러움 그 자체의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수인은 손을 들었다. 손끝은 투박하고 두꺼웠지만 손목 부분은 가는 것 같았다. 그냥 보통 체격이 아닐까 싶었지만 서울은 보기보다 체격 좋고 키가 큰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 말을 건 그 마재도라는 녀석도 그렇고.
"물 끓는다."
등 뒤에서 들리는 말에 수인은 헛숨을 삼켰다. 아래를 살피자 말대로 물이 끓고 있었다. 불을 끄는 것과 동시에 영도가 수건으로 한쪽 머리를 대충 탈탈 털어내며 주방 안쪽을 기웃거렸다.
"뭐해? 커피 끓이려고?"
"피로 풀어주는 차 좀 줄려고요. 커피로 줘요?"
"입맛은 커피가 더 당기는데."
"그냥 잎 우려 줄 테니까 그거 마셔요."
"그러지 뭐."
처음에는 무조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하는 영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쪽이 이런저런 말을 하면 알아서 누그러들곤 했다. 그런 소소한 것에서 이쪽과 그가 조금씩 맞추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인은 끓는 물 속에 찻잎을 넣었다.
차를 준비하는 동안 영도가 식탁 앞에 앉으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나 다음 주 목요일에 쉬는데."
"쉬는 날도 있었어요?"
"그러면 일만 하는 사람인가. 한 달에 한, 두번 정도는 쉬게 해준다는데."
그 외에도 오전 또는 오후에만 일을 잡는 것도 있었다. 그러면 빈 시간은 쉬면 되는 거였지만 일단 나간다는 것에서부터 그건 이미 쉬는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쉬어도 안 피곤해요?"
"반년 동안 딱 이틀 쉰 적도 있었어. 한 달에 한 번 온전히 쉬는 게 어디야."
"그렇구나."
영도는 저렇게 말하지만 수인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쉬는 게 무작정 좋다는 건 아니지만 영도처럼 일찍 나가서 늦게까지 들어오고,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한 사람이 한 달에 하루 이틀을 쉰다면 금방 병이 날 터였다. 젊은 나이에 몸만 축나는 거다.
그렇다고 영도에게 무작정 하지 말라 할 수도 없고. 그가 일을 재미있어 하니 건드리기도 미묘한 부분이었다.
"차 드세요."
영도의 옆으로 간 수인은 찻잔을 내밀었다.
결국 이런 도움 밖에는 줄 수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도는 수인이 우린 찻물이 든 잔을 양 손으로 들었다.
"따뜻하네."
따뜻한 게 마치 수인이 이쪽을 걱정하고 생각하는 마음인 듯 싶어 괜히 훈훈해진다. 영도는 후룩. 하고 차를 마셨다. 당장 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풀 맛이야."
"약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마셔요."
수인도 컵에 찻물을 담아 맛을 봤다. 뜨거워서 그럭저럭 마실 만 했지만 이건 식으면 비린 맛이 나겠구나 싶었다. 그런 쪽으로는 쥐약인 영도기에 뜨거울 때 다 마시라고 한마디 했다. 절반 정도 마시고 말려고 했던 영도이나 수인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고 바라보자 다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목까지 찬 한숨을 토해낸 영도는 홀짝거리며 차를 마시다가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소파로 가서 마시자."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영도는 한 손에는 잔을, 다른 손은 수인을 붙잡고 거실로 이동했다. 소파에 앉은 영도는 뒤로 몸을 젖히며 눈을 감았다.
"아이고. 좋다."
이렇게 집에 돌아오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비록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건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 여물 맛이 나는 차라 해도 말이다. 이것도 다 수인이 이쪽 걱정이 되어 끓여내는 거니 더는 투덜대지 말고 다 마셔야겠지만 말이다.
수인은 테이블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문제집을 들척였다. 그 앞으로 교과서가 몇 개나 놓여 있었다. 원래 공부가 싫었던 영도였다. 때문에 저렇게 찾아내서 공부를 하는 수인이 솔직히 좀 신기했다.
"그런 게 재미있어?"
"글쎄요. 재미는 모르겠고 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가요."
실제로 밥 먹고 씻고 8시 반부터 시작해서 11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달리지 않았던가. 어느 정도 재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려운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영도는 수인의 옆으로 내려와 앉았다.
잔을 테이블 앞에 둔 영도는 차가운 유리에 한쪽 뺨을 댄 채로 수인의 옆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차라리 무슨 말을 하는 게 더 낫다. 이런 식으로 보기만 하면 어떤 반응을 취하면 될 지, 알 수가 없잖은가.
수인은 그런 영도를 내려다봤다.
"왜요?"
"나 내일은 좀 늦게 나가. 그래서 오늘은 늦게 자도 괜찮은데."
영도는 펜을 잡고 있는 수인의 손을 위에서 잡았다. 손가락을 깍지 끼듯이 잡고는 수인을 바라봤다. 그 진지한 눈빛에 수인은 가만히 있었다. 영도는 재촉을 하거나 더 긴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양 손으로 수인의 손을 감싸곤 앞으로 당겨,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쪽.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촉감에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숨을 죽인 채로 가만히 있던 수인이나 옆으로 달라붙어 어깨에 턱을 올린 채로 빤히 바라보는 영도를 두고 더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피곤하다면서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12월에 한 번 한 후로 가볍게 손장난을 한 적은 있지만 삽입까지 간 적이 없었다. 영도가 지나치게 바쁘기도 했고 그럴 만한 타이밍이 만들어지지 않기도 했었다. 어영부영 있는 동안 벌써 1월이 되어 버렸다.
1월 새해 때에도 수인의 곁에 있지 못했다. 제주도에서 일이 있어 그날 수인 혼자 보내게 했어야 했던 거다. 미안한 마음이 자꾸 전화를 하기만 했지, 그 외에 달리 챙겨주지도 못했다.
수인의 몸을 양 팔로 끌어안은 채로 영도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느낌에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알게 모르게 그 뺨으로 홍조가 서린다. 수인의 눈 바로 아래에 입술을 누른 채로 영도는 '방으로 들어갈까.'라고 속삭였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흥분이 되는 건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내리뜬 채로 수인은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리고 테이블 한쪽에 놓인 잔을 발견했다.
"저거 다 마시고 들어가요."
수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도는 잔 안에 담긴 차를 원샷으로 다 마셔버렸다.
아직 좀 뜨거웠다. 하지만 할 마음 만땅이었던 영도는 그런 것도 잘 느껴지지 않는 듯 싶었다. 마치 소주를 다 비운 사람마냥 빈 컵을 거꾸로 들고 머리 위에서 탈탈 턴 영도는 '됐지?'라고 물었다.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오묘하고 야릇한 분위기가 깔려야 하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수인은 별다른 말없이 영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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