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배 두드리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거였다. 지금 수인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정리할 게 있다면서 창고 쪽으로 갔다. 금방갔다 온다 한 것 치고는 벌써 10분이 지나 있었다. 몇 되지도 않는 지방 방송을 보면서 뜨끈한 아랫목에서 뒹굴거리던 영도는 수인을 찾아서 나갈까. 말까. 그리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안에 영도 있냐."
할머니 목소리에 영도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저 안에 있어요."
"할미 안으로 들어간다."
"네. 들어오세요."
영도는 바닥에 깔고 있던 이불을 한쪽으로 밀어넣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때에 맞춰서 문을 열고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앉아있는 영도를 본 그녀는 웃었다.
"뭘 그렇게 경직되어 있나. 편하게 앉거라."
"아. 네."
편하게 앉고 싶어도 할머니 앞에서는 괜히 긴장이 되어 이런 자세를 취하게 된다. 무릎을 꿇고 앉는 게 제일 편해요. 같은 멍청한 말은 하지 않았다. 자세를 양반다리로 바꾸고 있으려니 앞으로 온 할머니가 뭔가를 바닥에 내려놨다. 영도 보라는 듯 앞으로 슬쩍 밀었다. 책자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수인의 이름이 적힌 성적표들이었다.
"이건 왜요?"
"혹시 서울에 있으면서 필요할까 싶어 챙겨 놨다. 가지고 가 봐라."
"그래요? 그러면 가지고 가볼게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면서 영도는 성적표를 들춰봤다. 내심 수인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엄청난 수인의 성적에 놀라 숨을 죽였다. 이게 뭔가 싶어 멍하니 있던 영도는 다른 성적표도 들척였다. 그렇게 3~4개를 보고 나서 영도는 중얼거렸다.
"굉장하네요."
정말 굉장했다. 대부분의 성적표는 평균 98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때에는 99인 것도 있었다. 평균이 99라니. 그런 건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는 거지. 늘 벼락치기로 평균 80을 간당간당하게 맞추었던 영도가 볼 때에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이었다. 이건 완전 범생이의 성적표잖아.
"우리 수인이가 공부는 정말 잘했지."
그렇군요. 무언의 긍정을 하며 영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너무 잘했는데.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장학금 받으면서 다닐 수도 있었는데 나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한 마음 뿐이란다."
수인이 진학을 할 즈음 할머니가 편찮으셨다는 걸 떠올린 영도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들고 있던 걸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수인인 원래 그런 놈이잖아요. 할머니를 두고 진학을 했어도 결코 좋아할 만한 놈은 아니에요."
"그래. 나도 안다. 그래서 이제는 더 그 때 일을 두고 후회하거나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단다. 앞으로 그 아이가 잘 되기만을 바래야지."
그녀는 영도의 손을 잡았다. 마르고 작고 주름이 많은 볼품 없는 손으로 영도의 손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다정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우리 영도가 나 대신에 수인이 잘 보살펴줄 거라고 믿는다."
"당연하지요."
"겉으로 보기에 똑 소리 나도 실은 그게 아니야. 마음이 아주 여리고 겁도 많은 아이란다. 그러니까 네가 잘 살펴봐줘라. 혹여라도 이상한 여자들이나 사기꾼들이 달라붙지 않도록 말이야. 저 아이는 순해서 이상한 여자가 달라붙으면 바로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할 거야. 손만 잡아도 일 나는 줄 알 테니까."
문득 영도는 이게 부모와 자식의 차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녀들은 이미 알 거 다 아는데, 부모의 눈에는 그런 자식이 마냥 어리고 어수룩하게만 여겨지는 거다. 그래서 손만 잡아도 무슨 일 운운을 하는 거겠지. 그런 걸로 따지면 수인과 영도는 이미 물릴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사이인데 말이다.
수인을 정말 사랑하고 확실하게 책임을 질 마음으로 안았다고는 해도, 이렇게 할머니를 앞에 두고 있으려니 굉장히 무안하기만 했다. 어설프게 이도저도 아닌 얼굴로 있으려니 할머니가 재차 '나는 영도가 있어서 너무도 안심이 된다.'라고 속삭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신뢰의 눈빛에 보답을 하려는 듯 영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절 믿으세요."
"그래. 난 영도 너만 믿는다. 수인이가 너랑 같이 생활을 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럼요. 다행이지요.
영도는 본인이 이리도 유들거리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말에 일일이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이다니. 나도 참 못 됐구나.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어디까지나 웃는 얼굴을 가장하는 영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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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이즈의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끌어안은 채로 수인은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서자 영도가 엎드린 채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게 뭔가 싶으면서도 일단 들고 있던 걸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리로 기어서 갔다.
"지금 뭐하고 있어요?"
"책 보고 있지."
"책이요?"
여기에 영도가 읽을 만한 책이 있었나?
별 생각 없이 영도의 옆으로 가서 아래를 흘깃 보던 수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영도가 보고 있는 건 수인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이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났어요?"
당황한 수인이 냅다 졸업사진을 빼앗아 가려 하자 영도는 당장 그걸 들고는 데굴 굴러갔다. 방구석으로 굴러가면서도 손에서는 사진집을 놓지 않는 영도였으나 수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닥을 기어선 냅다 영도의 옆으로 가 그가 보고 있는 사진집을 빼앗아 가려 했다.
"이리 내놔요."
수인이 졸업사진집을 가지고 가려 하자 영도는 몸을 비틀었다. 구석에 딱 붙어선 고개를 저어댔다.
"왜 이래? 할머니가 나한테 보라고 주신 거야. 그런데 왜 빼앗아 가려는 건데?"
"내 거니까 보지 말라고요. 나 그런 거 싫어해요."
"뭘 싫어해. 이렇게 귀엽게 나왔는데."
영도는 활짝 펼친 사진집을 수인 앞으로 내밀었다. 정 가운데에 앞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수인이 떡하니 있었다. 그 외에 옆에 붙은 단체 사진에서는 가장 끝부분에 조용히 서있는 수인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수인은 당장 사진집을 빼앗아 뒤로 넘겨버렸다. 재빠른 움직임은 그렇다 쳐도 완전 굳은 얼굴이 된 수인을 본 영도가 위로 얼굴을 들었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건데? 난 보기에 괜찮기만 하구만."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이건 보지 말아요."
눈을 내리뜨는 수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오드아이에 대한 콤플렉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학창시절 놀림 받는 게 싫어서 머리카락을 길게 길어 눈을 가리고 다녔던 거다. 그걸 이쪽이 알아차리는 게 싫은 거겠지.
방바닥에 반쯤 누운 채로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그러다 물었다.
"너 학교 다닐 때 공부만 했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
"친구도 많지 않고 수업 시간에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들한테 물어보고 그랬지? 선생들이 시키는 성가신 일거리 맡아서 학교 수업 끝나고도 남아서 도와주기도 하고 말이야. 교실 청소도 하다 보면 혼자 남고 그러지 않았어?"
"......."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듯 수인은 아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다고 이쪽이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수인이 입을 다물면 더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댔다.
"너 놀리려고 이런 거 묻는 거 아니야.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 걸로 뭘 알고 싶은 건데요?"
영도는 가볍게 말하고 넘기면 그만인 일이겠지만 수인에게 있어선 아니었다.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런 걸 왜 그리도 가볍게 말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가만히 있으려니 영도가 수인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두어번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영도가 지금은 이래도 갑자기 움직여서 사진집을 빼앗아 가는 건 아닐까 싶었던 수인은 방심하는 일 없이 뒤로 손을 돌린 채로 그를 바라봤다. 빤히 바라보는 눈꼬리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놀린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구는 것에 영도의 미소가 진해졌다.
"눈 삔 것들이 저들 멋대로 생각을 하면서 너를 무시했을 때 내가 옆에 있어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수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는지 미간으로 살짝 주름이 잡힌다.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것에 영도가 한쪽 무릎을 세워 그곳에 팔을 올렸다.
"모르는 거 있으면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건데. 학교에 남아서 혼자 일하고 있으면 도와주기도 하는 건데.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하니까 괜히 기분이 그렇다. 그리고 말이야. 너 사진으로 남아있는 뚱한 얼굴, 의외로 귀여워."
어느새 수인은 영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동그랗고 끝이 조금 올라가서 고양이처럼 느껴지는 눈동자가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중한 채로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정말 고양이 같았기 때문에 영도의 웃음이 한결 짙어졌다.
"내가 아는 문수인이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뚱한 얼굴로 어색하게 서있는 게 귀여워 보여."
그러는 영도야 말로 지금 느긋해 보이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나른하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살살 웃는 모습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영도의 품에 안겼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꾹 참으며 수인은 뒤로 돌린 졸업사진집을 앞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찍힌 부분을 확인했다.
다들 모여서 신난 포즈를 취하고 있으나 수인만 동떨어진 곳에 일자로 서있었다. 마치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허리를 숙여봤으면 좋았을 텐데. 새삼스럽게 후회의 마음이 드는 걸 느끼며 수인은 중얼거렸다.
"하나도 안 귀여운데........"
"내가 보기에 귀여우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수인은 영도처럼 속 편하게 중얼거릴 수 없었다. 영도가 모르는 학창시절의 일들을 수인은 잔뜩 알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떠올리면 아주 먼 기억의 일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끔 그 때 있었던 일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여겨져 괜히 심각해질 때가 있었다.
"딱히 재미있는 일은 없었어요. 학교에서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애들한테는 친한 친구들이 달리 있었던 거였죠. 중요한 일이 생기면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을 뿐이에요."
"네가 너무 잘나고 똑똑해서 사람들이 우습게 보지 못하니까 쉽사리 접근을 하지 못했던 거뿐이야."
눈을 내리뜨고 있었던 수인은 영도의 말에 그를 올려다봤다.
"너무 예뻐서 쉽게 말도 못 붙이는 거지."
영도는 웃고 있었다. 농담으로 이런 말들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기에 부끄러움이 많았던 수인은 괜히 뚱하니 중얼거렸다.
"말이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말로 내가 기분이 좋아질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그런 거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 그냥 난 솔직하게 말을할 따름이야."
퍽도 그러시겠군. 말자며 수인은 졸업사진집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영도가 조금 전에 엎드려있던 자리 위에 있는 성적표를 확인했다. 그리로 가서 그걸 집어들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난 거예요?"
"할머니가 가져다 주셨어. 서울에서 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여기에 있어서 없었던 거구나. 이것도 찾아봤었는데....."
중얼거리면서 수인은 성적표를 열어봤다.
영도가 보기에 대단하기만 했던 성적표였다. 수인이 볼 때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내가 이렇게 공부를 잘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회에 젖어있는 듯한 모습에 영도가 은근슬쩍 수인의 뒤로 접근을 했다.
"너 공부 정말 잘했더라."
수인은 성적표를 접어서 한쪽에 내려놨다.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기는 했죠."
"할머니는 공부 잘하는 네가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게 본인 탓인가-하고 생각하시 던데."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은 무슨 말씀을 드려도 쉽사리 그 마음이 바뀌진 않으시겠지요. 대학 진학을 하게 되면 그 때에는 안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할머니가 죄책감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으니까 대학에 들어가려는 거야?"
"아니요."
단호히 대답을 한 수인은 옆에 앉은 영도를 바라봤다.
"공부해서 성공하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는 수인은 똑 부러지는 면이 있었다. 이걸 보면 영도는 걱정이 없었다. 수인이라면 나중에 뭘 해도 성공할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쪽보다 훨씬 더 성공한 삶을 살게 될 지 몰랐다. 머리를 써서 높은 곳에 올라가는 사람처럼 대단한 게 없는 법이었다. 영도는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 나중에 돈 되게 많이 벌 것 같다. 그 때가 되면 나 먹여 살려야 된다?"
갑자기 달라붙는다 싶더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단순히 장난을 치고 싶은 건지 농담 따먹기를 하려는 지를 모르겠다.
"뭐라는 거예요. 암만 내가 벌어봤자 형을 어떻게 이겨요. 형은 큰 맨션도 가지고 있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영도는 수인의 몸을 양 손으로 끌어안았다. 한 손이 은근슬쩍 내려가서는 가슴을 건드렸다. 처음에는 느낌 탓인가 싶어 숨을 죽이던 수인이나 영도의 손이 살짝살짝 유두 부근에 닿자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수인은 놀라 영도를 밀어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 이래요. 여기서 이러지 말아요."
"여기서 이러지 말면 어디서 뭘 할까. 다른 곳으로 나가볼까?"
속삭이며 영도는 수인의 귓불에 입을 맞추었다.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는 순간 수인은 화들짝 놀랐다. 영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수인을 쓰러뜨렸다. 몸 위로 올라타는 영도에 수인은 당황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정말 왜 이래요? 간지러워요."
밀어내는 수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도는 그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킁킁 거렸다. 개처럼 냄새를 맡으면서 웅얼거렸다.
"조용히 해. 할머니 듣겠다."
"그런 걸 걱정하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영도의 손이 수인의 옷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일에 수인의 얼굴이 헬쓱하게 질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도의 손이 수인의 유두를 잡아 살살 문질렀다. 소름이 돋는다. 수인은 버둥거렸다.
"하, 하지 말라니까요."
"조금만 만져보자. 조금만......"
웅얼거리던 영도는 수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입술이 닿는 순간 수인은 숨을 죽였다. 입술을 조금 떨어뜨린 채로 영도는 수인을 내려다봤다. 수인도 누운 채로 영도를 올려다봤다. 수인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당황한 듯 입술 부근에 손가락을 댄 채로 숨을 죽이는 모습에 영도는 속삭였다.
"더한 건 안 해. 그냥 이렇게만 입을 맞추고 싶어서 그래."
처음에는 수인이 당황해 하니까 재미있어서 수위를 높인 것 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계신 곳에서 끝까지 할 순 없음이었다. 영도는 수인의 가슴에 넣은 손을 빼내고는 대신 수인의 얼굴을 감쌌다. 수인의 위에 올라탄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하지만 다시 내려왔을 때에는 진하게 혀를 얽혔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느끼며 수인은 눈을 감았다.
아까처럼 거부를 하거나 밀어내는 건 없었다. 알게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면서 고개를 돌리는 걸 느끼며 영도는 조금 더 혀를 밀어 넣었다.
수인이 정말 귀여웠다. 지금의 수인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걸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그 일도 가볍게 즐겁게 떠들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웃으면서 넘겨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격이 없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시작 단계인지라 아직은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꼭-.
그리 생각을 하며 영도는 수인의 뺨을 감싼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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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건 없어도 영도는 감으로 어디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그리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어린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곳에 얼굴을 묻은 채로 어깨를 떨며 울고 있다. 그 모습에 영도의 입가로 미소가 서렸다. 아이는 울고 있는데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반가운 마음이 컸다.
영도는 손을 내려 아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울지 않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앙 다물린 입매. 고집이 엿보이는 얼굴로 서서히 미소가 떠오른다. 아이는 일어났고 어느새 많이 자라있었다. 양 손을 앞으로 잡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나 싶던 아이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뭐하고 있어요?'
영도가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가만히 있던 영도도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이상한 대꾸였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자꾸만 나오는 웃음이 주체가 되질 않는다. 웃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 순간 수인이 영도의 손을 잡았다. 영도가 다른 쪽 손을 내밀자 그것도 잡아왔다.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꼬옥 쥐는 느낌에 영도는 더 웃음이 흘러나왔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자꾸만 웃게 된다. 실없게도 여겨지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걸 봤다면 '저건 뭐야?'라며 손가락 질을 할 수도 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그런 사람들의 손가락 질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수인과 이리 있는 게 마냥 좋았다. 마음 같아선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드는 한기에 영도는 지금 이 장면이 곧 사라지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왜냐하면 눈을 떴을 때에도 수인이 눈 앞에 있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엉성하지만 행복한 느낌이 들었던 꿈꾸던 순간이 사라지고 영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건 이쪽으로 몸을 돌린 채로 자는 수인이었다.
"......추워."
중얼거린 영도는 위로 고개를 들었다.
막 잠에서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인 그는 오래된 옛날 문을 확인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이불을 조금 더 끌어 얼굴 아래까지 덮었다가 수인이 신경쓰여서 그 쪽 이불을 위로 올려줬다. 그러자 으응. 하는 소리를 낸 수인이 조금 더 영도 쪽으로 파고들어왔다. 영도는 팔을 위로 들었고 수인이 그 안으로 안착했다. 아이처럼 품에 안긴 수인을 보는 영도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수인의 몸을 끌어안고 머리에 뺨을 댔다. 다리를 들어선 수인의 허리 위에 올리고 꼬옥 안았다. 수인이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곧 고른 숨을 토해낸다.
솔직히 영도는 이곳의 잠자리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수인은 오랫동안 생활을 했던 장소여서 그런지 몰라도 꽤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잘 자는데 맨션에서는 아니었구나 싶기도 했다. 종종 새벽 즈음에 일어나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적응을 아직 못한 걸지도 모르지.
문득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으면 미안한 마음이 많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영도는 조용히 수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건드리면 수인이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손이 간다. 꽤 만지작거리는데도 수인은 잠잠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아이처럼 여겨졌다.
정말 귀엽네.
수인을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을 하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드러나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던가. 그리 생각을 하며 영도는 수인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수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영도의 얼굴이 흐물거리고 녹아내린다. 헤죽거리고 웃는 얼굴이 되어선 수인의 뺨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꾹 찔러봤다. 말랑말랑한 피부가 꽤나 기분 좋았다. 귀엽다니까. 몇 번째일지 모르는 생각을 하며 영도는 꼬물거리며 수인 쪽으로 몸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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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절대로 입지 않을 두텁고 단조로운 디자인의 오리털 잠바를 걸친 채로 영도는 집 바깥쪽으로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문득 이 집이 오래된 만큼 보수를 해야 할 부분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수인과 함께 서울로 가버리면 이곳은 다시 할머니만 계시게 되는 거였다. 혼자서 생활을 하는 동안 편안하게 계셨으면 하는 게 영도의 마음이었다. 돌담을 손으로 슬슬 문지르면서 영도는 위로 고개를 들었다.
겨울 하늘은 참으로 맑고 높았다. 이렇게 그냥 올려다 보는 것 뿐인데도 눈이 시리다는 느낌이 강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영도는 앞으로 고개를 내렸다.
오늘 하루 더 있고 내일이 되면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쉬는 동안에는 가능하면 서울 생각은 안 하려 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 때때로 생각을 하게 된다. 서울로 올라가면 전쟁터가 펼쳐지는 거겠지. 아. 싫다. 그리 생각을 하며 영도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저기 멀리로 기웃거리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문 앞에 서서 집 안쪽을 흘깃 거리고 보고 있었다. 동네 사람인가. 그리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그리로 향했다.
영도가 가까이 접근을 하는데도 사내는 모르는 것 같았다. 묘하게 집중을 해서는 집 안을 살피는 모습이 암만 봐도 수상쩍기만 했다. 정말 뭔가 싶었기 때문에 영도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이봐요."
"헉?!"
부르는 순간 헛숨을 삼킨 사내가 옆을 돌아봤다.
멀리서 볼 때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어린 얼굴이었다. 촌스럽고 지저분한 느낌의 사내는 영도를 보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뒷걸음질을 치나 싶더니 갑자기 몸을 돌리고 도망을 친다.
"이봐! 당신 뭐야?!"
수상한 놈이었다. 설마하니 서울에서 이상한 또 다른 스토커가 따라붙은 건 아니겠지? 막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영도는 다급해졌다.
"무슨 일이에요?"
사내를 붙잡으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도는 수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짧은 빗자루를 옆구리에 낀 채로 나온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두어번 눈을 깜박이며 '왜요?'라고 묻는 투에 영도는 아직 보이는 사내를 가리켰다.
"이상한 놈이 염탐을 하고 있었어."
"이상한 놈이 아니라 경재에요."
"경재? 그게 누군데?"
"옆 동네에 사는 녀석이에요. 일단은 초중고를 같이 나왔으니 친구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안으로 들어올 것이지 왜 바깥에서 기웃거리는 건데? 기분 나쁘잖아."
"예전부터 자주 그랬어요. 바깥에서 그러지 말고 들어와요."
수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몸을 돌렸다. 쿨하기만 한 수인이었으나 영도는 그렇지 못했다. 신경 쓰이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수인의 뒤를 쫓으면서 집요하게 물어댔다.
"왜 예전부터 바깥에서 기웃거렸던 건데? 친구라면 그럴 필요가 없는거 아니야?"
"낸들 아나요. 학교에서는 애들 선동해서 사람 바보취급을 하다가도 집으로 오면 꼭 저렇게 바깥을 서성이곤 하더라고요."
".....그게 뭐야."
그건 전형적인 '좋아하는 아이 괴롭히기.' 잖아. 그걸 수인이 정말 몰라서 이리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영도의 얼굴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일그러지는 그 얼굴을 두고도 수인은 태연히 구석에 쌓인 나뭇가지를 쓸어댈 따름이었다. 영도는 그런 수인의 손을 붙잡았다.
"저 놈이 그 외에 다른 이상한 짓을 한 건 없고?"
"다른 이상한 짓 뭐요?"
"그러니까. 그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단순히 속 좁은 남자가 질투를 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싶진 않았다. 이래저래 생각을 해봐도 답이 딱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영도는 직설적으로 말을 토해냈다.
"저 놈은 분명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그렇겠지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하는 말에 영도는 이건 또 뭔가 싶었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어도 뭐요. 난 관심 없어요."
수인은 빗자루 질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이미 조금 전 일은 다 잊은 듯한 그 모습에 영도는 혀를 내둘렀다.
"너 의외로 독하구나."
"내가 독한가요?"
빗자루를 세우고 그 위에 한쪽 손을 올린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수인을 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저런 이상한 놈이 집적거려도 흔들리지 않은, 아니지.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 저 이상한 놈의 자식. 다음에 걸리면 그 때에는 주먹부터 날릴 거라며 영도는 수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런 놈들에게는 독하게 굴어야 하는 법이야. 잘 하고 있는 거야."
어깨에 손을 올린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그런 영도를 빤히 바라보던 수인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내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겠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수인과 영도는 투닥거렸다. 영도가 자꾸만 뒷덜미를 잡으면서 말을 걸려하자 수인도 가만히 있다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둘렀다. 뒤로 물러나면서 몸을 피한 영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그렇지. 빗자루를 흔드는 건 좀 아닌거 아니야? 그런 느낌으로 영도는 이리 와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수인은 빗자루를 든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표정은 아니지만 장난을 치려는 거였다. 그걸 모를 영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 맞춰주기 위해서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그리고 막 수인에게 몸을 날리려던 순간 수인이 빗자루를 위로 올렸고, 동시에 할머니가 둘을 불렀다.
"애들아. 이리로 와라. 고구마 먹자."
막 수인에게 몸을 날릴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영도는 움찔했다.
고개를 들자 평상 쪽에 서서 손짓을 하는 할머니가 보였다.
장난을 치는 모습을 봤을까 싶었던 영도는 수인을 쳐다봤다. 수인은 모르는 척 빗자루를 세워두고는 마당 한 쪽에 있던 수돗가로 가 손을 씻었다. 물이 찬지 몇 번 손을 문대더니 금방 털어내고 평상으로 간다. 영도도 손을 씻고 수인의 뒤를 쫓았다.
평상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가 나무바구니 안에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잘 익은 총각김치가 세트로 놓여 있었다. 엄청 호화로운 간식이었다. 보기만 해도 입 안으로 침이 고이는 걸 느끼며 영도는 허벅지에 손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맛있겠네요."
"너희들 주려고 화로불에서 익힌 거다. 먹어봐라."
수인이 맨손으로 고구마를 잘 집어서 영도도 따라할 셈으로 고구마를 붙잡았다가 바로 소리를 질렀다.
"뜨거-!"
놀라 손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도 수인은 능숙하게 고구마 껍질을 까댔고, 그건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끝을 다 깐 고구마를 영도에게 내밀었다. 양 쪽에서 내밀어지는 고구마에 영도도, 수인도 움찔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웃으면서 '녀석들 사이좋기는.'라고 말하면서 본인이 깐 고구마를 먼저 한 입 베어 물었다. 덕분에 어색함이 사라졌다.
영도는 수인이 준 고구마를 양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었다. 여전히 뜨거웠지만 이번에는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란스럽게 굴지 않았다.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문 영도는 풀어진 얼굴이 되었다. 안 그래도 추웠기 때문에 이렇게 한 입 먹는 고구마는 정말 꿀맛이었다. 목구멍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넘어가는 걸 느끼며 오물거리면서 할머니를 바라봤다.
"이렇게 먹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처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렇겠지. 서울 사는 사람이 이런 걸 어떻게 먹어보겠어. 먹고 또 먹어라."
"고맙습니다."
영도는 총각김치를 손으로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재차 고구마를 입에 물고 입을 벌리자 하얀 입김이 나온다. 입맛을 다시면서 부지런히 턱을 움직이는 영도는 정말 맛있는 걸 먹는다는 식이었다.
그건 수인이나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간식을 먹는 건 수인과 할머니 뿐이었는데 오늘은 영도까지 끼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전하고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더 고구마가 단 것 같았다. 수인은 영도를 흘깃 봤다. 영도는 편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평상에 앉아있었다. 누빔으로 된 낡은 오리털 잠바가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이 입으면 허름했을 텐데, 영도 씩이나 되니 이만큼 소화를 해내는 것일 터였다.
고구마 하나를 다 먹은 영도는 손을 비비면서 할머니를 돌아봤다.
"할머니. 오늘 바깥쪽에 좀 나가보시겠어요?"
"왜? 할미 옷 사주고 싶은 거냐."
태연히 정곡을 찌르는 말에 영도는 어물거렸다.
"아니. 그게 뭐....."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아라. 너 말고도 내 자식들이 매년 좋은 한복 지어서 보내주고 있단다. 솔직히 그 많은 걸 다 언제 입고 갈까 싶을 정도야. 그러니까 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푹 쉬었다 갈 생각이나 하거라. 벌써 내일이면 가야 할 날이잖니. 시간은 그렇게나 빠른 거란다."
실제로도 벌써 내일 올라가봐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옷이라도 한 벌 맞춰드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속내를 간파한 할머니가 먼저 말을 꺼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도는 눈을 굴리다 수인을 바라봤다. 수인이 웃고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그 모습에 영도도 마음이 나른해진다.
오늘만 날인 건 아니었다. 한 번 와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음에도 또 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종종 와서 여기서 쉬어야 겠어요."
"나야 그러면 좋지. 하지만 첫 째날에는 어김없이 마을 잔치가 열릴 거다."
"......아니. 그건 좀."
그런 식으로 요란한 건 좀 그랬다. 초반부터 막걸리나 소주를 마셔서 주체가 되지 않아 이상하게 날뛰기도 하지 않았던가. 추태라고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건 한 번만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재탕 삼탕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니 좀 봐달라는 식으로 바라봐도 할머니는 태연하기만 했다.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니까. 어떻게든 말을 붙여서 신나게 놀고 싶은 거지. 오려면 그런 것도 각오하고 와야 할 거다."
그런 걸 각오해야만 하는 걸까나.
여름에도 이곳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도는 금방 낙담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할머니와 수인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고 말았다.
그런 수인의 눈가로 차가운 게 떨어졌다.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내리는 구나."
할머니의 말에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나풀거리면서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던 영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고개를 내린 채로 있던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그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는 순간 영도는 생각했다.
행복하구나.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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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말한 대로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어영부영 보낸 것도 아니고 있으면서 고쳐야 할 것들을 손보고 전등 같은 것도 걸고 흔들거리는 문에 못을 박기도 했다. 할 일은 나름대로 있었고 그러는 동안 일요일 오후 1시가 되어버렸다. 바깥에서는 영도가 부른 용한이 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물론 불을 붙이진 않았다. 언제 출발하나 싶었던 용한은 나서는 수인과 영도, 그리고 고목환 여사를 보고는 잽싸게 담배를 치워버렸다.
영도의 외할머니인 고목환 여사는 올해 84세시지만 여전히 정정하셨다. 옛날 조선시대에 나올 법한 한복차림에 곱게 머리를 모아 비녀로 꽂은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연세가 있으셔도 곱기만 한 얼굴은 영도가 누구의 미모를 물려받은 건지를 깨닫게끔 했다.
고목환 여사는 수인과 영도를 하나씩 바라봤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가봐야지. 조심해서 가봐라."
"내년에 또 오겠습니다."
"너 바쁜 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안다.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단다."
"저 그렇게 바쁜 사람아닙니다. 여름 즈음에 수인이랑 같이 찾아뵐게요."
영도의 말에 용한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여름에는 해외로케로 이어지는 영화 촬영이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아니요. 영도는 스케줄이 꽉 차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하면서 중간에 끼어들 순 없었다. 그렇게나 눈치가 없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곤 있지만 입 근처가 근질거리는지 씰룩대고 있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수인을 끌어안았다. 수인도 할머니의 등에 양 손을 두르곤 '건강하세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풀어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놓은 수인은 영도의 옆으로 가서 섰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추운 날 바깥에 마냥 서있을 필요도 없었다. 가자는 말은 영도가 먼저 꺼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영도는 수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인이 공부 잘 시켜서 서울대 보낼 겁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서울대 선언은 농담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영도로선 수인이 무척이나 공부를 잘 하니까 그 정도를 노려봐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별 의미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슬슬 떠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 문을 열자 수인이 들어가고 영도도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나선 문을 닫자 그걸로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 출발하고 수인과 영도는 각자 창문에 붙어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가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서있었다. 할머니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쉽게 떠날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한 10분 정도 운전을 했을 때 영도와 수인 둘 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앞을 바라봤다. 흔들림이 거의 없는 벤이라 하나 좁은 시골길을 가기란 어려움이 있었다. 최대한 잘 운전을 하려 노력하며 용한은 말했다.
"할머니가 되게 미인이네."
"우리 집안사람들은 원래 다 인물이 좋아."
"그래. 잘났다."
잘났다 말을 하는 속에는 알게 모르게 부러움도 섞여 있었다. 영도 뿐만이 아니라 수인도 나름 잘난 얼굴이었다. 거기다 고상한 할머니까지. 분명 다른 가족들도 한 미모를 할 게 분명했다. 새삼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린 용한은 칙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그걸 무마하고자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데 뭔 짐이 그렇게 많아. 내려갈 때도 그만큼 가지고 내려간 거야? 차도 없이?"
"아니. 할머니한테 받은 김치랑 된장이랑 고추장, 나물 같은 게 좀 있어."
"된장이랑 나물? 너 그런 거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냐."
"뭐래. 시끄러. 운전이나 해."
운전석에 앉은 용한의 자리를 발로 툭툭 쳤다. 그래봤자 흔들림은 거의 없었다. 용한은 운전을 하면서 개운한 얼굴이 되었다.
"아아. 이제부터 톱스타 원혁의 일상이 시작되겠구나."
영도가 쉬러 간다 했을 때 잠적을 해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돌아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며칠 자리를 비웠으니 폭풍으로 일들이 몰아닥치겠지만 그것도 다 인기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영도가 아직은 잘 팔리는 입장인 거였다. 그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자며 용한은 콧노래를 불렀다.
용한이 운전에 집중하고 조용해지자 영도는 옆자리를 확인했다. 수인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좀 그랬다. 어떻게 할까 싶어 눈을 굴리던 영도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마음이 불편해?"
"아니요. 괜찮아요."
수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영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는 아흔이 되셔도 정정하실 분이세요."
"당연하지. 내 볼 때에는 백 살까지도 끄덕 없으셔."
영도의 말에 수인의 입가로 살며시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에서 쉽사리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개운하면서도 묘하게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영도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돌아가는구만. 우리들 집으로."
단순한 맨션이라 하지 않고 우리들 집이라 표현하는 순간 수인은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마주잡았다.
처음 혼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는 꽤나 불안하고 겁도 났었다. 정말 괜찮을까 싶은 마음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잘 지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처음 상경할 때와는 기분 자체가 다르다면서 수인은 편하게 앉은 채로 빠르게 변하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봤다.
눈 쌓인 익숙한 정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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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열고 카드키를 꺼내 체크판에 댔다. 찍힌 걸 확인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2, 3층은 학원이고 4, 5층은 도서관으로 이용을 하는 기업체처럼 운영이 되는 학원이었다. 저녁 시간에는 중, 고교생들이 많이 다니지만 오전 오후반에는 주로 재수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이용을 했다.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고 강사진들도 짱짱했기 때문에 강습료와 이용료가 다른 데보다 배는 비싸도 언제나 늘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너무 사람이 많이 몰리니까 한 달에 한 번씩 테스트를 봐서 성적이 떨어지면 탈락시키는 시스템도 있었다. 그런 게 어디에 있느냐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성적이 오르고 나태해지면 떨어지는 거였다. 탈락을 하면 다시 들어오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니 어떻게 생각해보면 테스트는 경쟁을 부축이기 위한 좋은 시스템이라 생각들을 하는 것도 같았다.
수인은 아직 그런 사람들의 인식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이용을 하고 있지만 성적이 떨어져 이곳을 더는 이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수업 전까진 여유가 있어 휴게실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수인은 손바닥 만한 영단어집을 꺼냈다. 그러다가 가방 한 쪽에 대충 넣어뒀던 핸드폰이 반짝거리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끄집어냈다.
억지로 영도가 사서 손에 쥐어준 휴대폰이었다. 영도와 점원에게 친절한 설명을 들었지만 손에 익지 않았기 때문에 다루는 손길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문자 같이 간단한 건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학원에 도착했냐? 열심히 해. 있다 저녁에 좀 늦을 것 같다.]
영도의 문자였다.
한 눈에 내용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쉬이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수인은 영어 단어집을 내려놓고 양 손으로 핸드폰을 쥐었다. 영도가 알려준 대로 차근차근 글자를 작성해서 문자를 보냈다.
[공부 열심히 할 거예요. 형도 힘내세요.]
몇 번이나 틀린 글자가 없는지를 확인했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괜찮다는 느낌이 들어 발송을 누르고 난 후 수인은 짤막한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벽에 머리를 기댄 수인은 '좋아.'라고 중얼거리곤 다시 영어 단어집을 펼쳤다. 처음부터 바로 외워야 할 단어를 눈에 기억하고 머리에 집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순간 집중력이 좋은 수인이었다. 금방 단어 외우기에 돌입을 하는 그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오늘은 일찍 왔네?"
수인은 고개를 들어 옆에 선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벽에 한 손을 대고 있는 사내는 보라색 다운점퍼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스러움을 줄줄 달고 다니는 이는 재차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영어 외우고 있었어? 우리 30단어 씩 누가 먼저 외우나 시합 같은 거 해볼까."
"아니요. 전 천천히 외우고 싶어요."
"무슨 존대말을 하고 그래. 어차피 같이 재수하는 입장이잖아. 편하게 말 놓도록 해."
분명 이쪽보다 1살 가량 많은 걸로 알고 있었다. 함께 듣는 수업이 있는 건 사실이나 이렇게 스스럼없이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눌 만큼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어울리는 부류도 달랐다. 독서실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담당자와 조금 대화를 트는 수인과 다르게 이 사내는 지나치게 화려한 스타일과 언변으로 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있었다.
공부 시간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쉬는 시간만 되면 이 사내 근처로 몰리는 사람의 수가 장난 아니었다. 그런 것만 보면 놀러온 건지,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점수는 좋았다. 수인은 12월 말에 들어와서 참가를 하지 않았지만 당시 있었던 테스트에서 이 사내가 5등 안에 들었던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말을 듣고 알게된 것으로, 수인이 관심이 있어 찾아본 건 아니었다.
이렇게 옆에 와서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건다 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마음은 없었다. 그쪽은 그쪽대로, 이쪽은 이쪽대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직접 말을 하진 않아도 단어집을 넘기면서 그런 분위기를 풍기자 상대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문수인."
정확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에 책장을 넘기던 수인의 손이 멈추었다.
"난 마재도야."
본인의 이름을 소개한 사내는 수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부담스러운 거였다. 이 사람이 정말 왜 이러나 싶었던 수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내려다봤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성가셔. 라는 사인이 전해진 건지 마재도의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너 정말 흥미로운 녀석이야. 그 눈 진짜야?"
눈 이야기가 나오면 급격하게 말 수가 줄어들게 된다. 그냥 입을 다물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수인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재차 물어왔다.
"다들 말이 많더라고. 칼라렌즈다 뭐다 하고 말이야."
"선천적으로 이런 거야. 왜? 이상해 보여?"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수인을 앞에 둔 이는 놀란 듯 굳은 얼굴이었다. 왜 저런 눈빛으로 이쪽을 보는 건가 싶었으나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네가 알아서 먼저 말을 꺼내라.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려니 마재도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갑자기 말 놔서 놀랐어."
"어차피 같이 재수하는 입장에서는 말 놓아도 상관없는 거 아니었나?"
조금 전에 마재도가 이쪽을 두고 한 말이었다.
수인의 두 번째 공격에 놀란 건지 마재도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이건 정말 흥미로운데.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바라보거나 말거나 반대편 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확인한 수인은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시간이야. 먼저 가볼게."
가방과 단어집을 챙긴 수인은 마재도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냥 가버리는 수인을 붙잡을 수 없었던 마재도는 그냥 앉아만 있을 따름이었다.
수인이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 마재도의 근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이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곱상한 용모의 여자들이었다.
"뭐래? 오늘 끝나면 같이 놀 수 있데?"
"뭐 하러 저런 답답해 보이는 녀석을 끌어들이려 하는 건데? 그냥 우리끼리 놀자니까."
마재도의 양 옆에 붙어있던 여자들이 한마디씩 하고 그 앞에 서있던 또 다른 여자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너 모르는 소리 하지마. 재 지금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 그리고 가방 못 봤어?"
"뭐? 조금 특이하긴 해도 별로던데-."
"국내에서 안 들어오는 브랜드 투성이라니까. 내가 강남 유명매장에서 일한 적 있었는데, 합법적으로 수입된 브랜드 말고도 외국에서 유명한 명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 중에서도 이태리 물 먹은 거야. 틀림없어. 저기 저 니트 하나만 해도 무려 45만원 짜리라고."
수인이 입고 있는 옷이 특이하고 고급스러워 보이긴 했으나 그 정도씩이나 할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이쪽이 뭘 모른다는 듯 가르치려 드는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자는 투덜대듯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렇게 비싼 걸 저런 애가 어떻게 입어?"
"정말이라니까. 가방도 틀림없어. 저것도 한 200 가까이 되는 걸 거야. 신발도 한정품이야. 저 녀석 엄청난 부자인 게 틀림없어. 같이 어울려 놀면 우리가 득이야. 옷 사는데 몇 십씩 쓰는 사람이 밥 먹고 나서 우리들한테 계산하라고 하겠니?"
들으면 들을수록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쉽사리 수긍을 할 수 없었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면박을 당하는 입장이 마음에 들 리 없었던 여자는 마재도의 팔에 매달리며 응석을 부리듯 물었다.
"애가 이상한 말만 하고 그래. 넌 안 믿지?"
"나도 저 브랜드는 알고 있어. 직수입은 아니고 뒤로 샤바샤바해서 들여오는 물품들이야."
"......정말?"
"우리 작은 누나도 저런 일 하거든. 분명해. 나도 저 브랜드 쪽에서 옷 산 적 있으니까."
마재도의 말에 앞에 선 여자가 팔짱을 끼며 눈을 내리떴다. '거 봐. 내 뭐랬어.'라고 말하고픈 듯 이쪽을 내리깔듯이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발심만 들었던 여자는 아래 입술을 툭 내민 채로 뚱한 얼굴이 되었다.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이 잔뜩 있었지만 마재도는 전혀 신경 쓰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들이 떠들어 대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치 않다는 얼굴이었다. 턱에 손가락을 댄 마재도는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던 수인을 떠올렸다.
평범한 얼굴이라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꽤 선이 화려했다. 눈매도 위로 올라간 게 고양이 같은 인상이었다. 저런 독특한 얼굴인데 왜 아직까지 몰랐나 싶었다. 아닌가. 빨리 알아차린 건가. 수인이 여기에 온지 아직 2주도 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중얼거린 마재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강습실로 들어간 수인은 가장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수업을 하기 전에 복습을 해둘 생각으로 책을 꺼내는데 건너편 책상에 앉은 사람이 뭔가를 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음향으로 해두고 있었지만 거의 다 들렸다. 다른 때라면 이어폰도 있을 텐데 왜 다 들리도록 해둔 거냐고 생각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오는 소리 사이로 원혁의 이름이 들려왔다.
[2010년 연말 모 방송국에서 연기대상을 받고 그 외에도 인기상과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원혁씨. 전에도 그렇지만 지금은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인기입니다. 뛰어난 용모와 신체적인 조건으로 인해 의류화보 쪽과 광고업계측의 러브콜이 끊이질 않고 들어오고 있다 합니다. 올해로 29살이 되는 원혁씨이나 나이를 먹을수록 드러나는 원숙함과 늘어나는 연기로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악재를 현명하게 대처한 원혁씨는 그 때 있었던 회견으로 인해 10대 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인데요. 이 상태라면 앞으로 4, 5년 간은 끄덕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중화권과 일본 쪽에서도 대단한 인기라 합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일단 원혁을 모셔가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가운데 원혁측 소속사는 올해 중순까지 잡힌 일정에만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말이 올해 중순이지 정말은 2년 간의 계약이 다 채워졌다 하던데요.]
[그렇지요. 현재 찍고 있는 CF도 연장계약을 위해서 몇 억을 더 올려 부르고 있지만 시간이 나지 않는 이유로 원혁측은 고심하고 있다 합니다.]
[행복한 고민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잡담으로 이어지려던 찰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들고 있던 걸 집어넣은 사내가 문제집을 펴는 걸 확인한 수인도 눈을 내리떴다.
짧지만 충실했던 며칠 간의 휴식을 뒤로 하고 수인과 영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영도가 내색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때부터 12월 31일까지 영도는 정말 쉼 없이 달렸다. 며칠이고 집에 못 들어오는 일도 허다했다. 여기서 부르고 저기서 부르는 통에 잠을 잘 틈도 없어 이동하는 사이에 잠시 눈을 감는 게 고작이었다. 저러다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영도는 태연했다.
'원래 이런 거야.'
그리 말하며 웃는 얼굴을 앞에 두고는 아연해졌다.
그제야 영도가 편하게만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때에 맞춰 영도가 달리 사람을 시켜 수인이 다닐만한 곳을 알아봐줬고 12월 말부터 수인은 이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틀이 잡혀있는 학원에 거부감도 강했으나 지금은 그럭저럭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수업을 한 번 들어보고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변변한 학원 한 번 다니지 못하고 공부를 한 수인이니 만큼 지금 이 생활이 신선하기만 했다.
마음 놓고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영도의 배려로 인한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하려 노력 중이었다. 결코 영도의 돈을 헛되게 쓸 수 없었다.
강사가 안으로 들어오자 수인은 주변을 정리했다. 수업을 잘 듣기 위해서 진지한 얼굴을 하는 수인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무시를 하려 했으나 계속 건드려서 그리 할 수 없었다. 뭔가 싶어 수인은 옆을 돌아봤다. 쪽지를 든 손이 보였다. 그 손의 주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뭐야?'라는 눈빛을 보내자 상대가 인상을 쓰며 계속 쪽지를 흔들었다. 일단 받아보라는 거였다.
쪽지를 받아든 수인은 그걸 펴서 내용을 확인해 봤다.
[오늘 끝나고 밥 먹자. 맛있는 거 사줄게.]
누가 보냈는지 바로 알아버렸다.
쓸데없는 짓을.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당장 쪽지를 반으로 접어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잊은 듯 마이크를 드는 강사에게로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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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열심히 할 거예요. 형도 힘내세요.]
벌써 몇 번째 보는 문자인지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실제로 메이크업을 받는 도중 몇 번이나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등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힘들었다. 지금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마음 편히 핸드폰을 보며 헤실거리고 웃을 수 있었다.
귀엽기도 하지. 힘내라니. 그래. 힘내야 겠지.
영도는 핸드폰을 가방 속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간단한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물론 그걸로 이번 일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1월 말부터 시작하는 새 드라마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이번에는 12부작이라 초반에 한 번에 몰아서 찍어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시트콤 예정이었기 때문에 크게 불안은 없었다. 여름에는 영화. 그리고 가을에서 겨울까지는 퓨전 시대극이라는느낌이었다. 중간에 연극 무대에 관한 말이 나오고 있지만 어쩌면 패스를 하게 될 지도 몰랐다. 연극을 선택하면 화보나 CF촬영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매니저나 소속사에서 결정을 할 문제였다. 그 중에서 영도가 특히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있으면 그걸 선택하면 되었다.
"준비 다 되셨나요?"
메이크업과 헤어가 다 끝나서 여유롭게 오늘 촬영해야 할 의류 사진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스텝인 여자가 얼굴을 집어넣고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것에 영도는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를 따라 바깥으로 나오자 근처에 서있던 용한이 당장 손짓을 해왔다.
"영도야. 이리로 와 봐라."
용한이 부르자 영도는 그리로 갔다.
연말에는 용한이 달리 비벼야 할 구석이 많아 바빴지만 2011년이 되자 그는 영도의 옆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스케줄은 스케줄대로 잡아야 하면서 영도와 같이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용한은 힘들어 했지만 준식의 일이 있는데다 사장의 엄명이 있어 꽤나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다가온 영도의 팔을 붙잡은 용한은 촬영장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여기 의류업체 사장이야."
처음 왔을 때 인사를 주고 받았던 카메라맨의 옆에 서있는 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촬영장소를 두고 뭐라 하는 걸 확인하며 영도는 중얼거렸다.
"젊은 여자로군."
"그래. 원래 이런 촬영장에 나온 적이 없다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나왔단다. 가서 인사 좀 해라."
"내가 얼굴 도장 찍으면서 세일즈를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인사 좀 하고 그래. 주변 사람들 평판도 좋고 나중에 협찬도 수월하게 받을 수 있을 거 아니야. 네가 한 번만 웃으면 아래 애들 일하기 수월해지잖아. 어서 움직여. 어서."
원혁이라는 연예인에 대한 호감은 소속사에 속한 다른 연예인들에게도 퍼질 가능성이 높았다. 신인인 경우 협찬을 받기에 어려움이 있으나 영도가 활로를 뚫어두면 의상 협찬도 수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걸 위해 조금만 움직이라는 거였다.
영도도 그리 빡빡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웃는 것 정도는 어려울 게 없었다. 용한을 옆에 두고 영도는 사장이라는 여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카메라맨과 대화를 나누던 여자는 영도가 다가오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십니까?"
영도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여자는 당황해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어요. 저는 김민희라고 해요."
"원혁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절 모델로 선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야 말로 수락을 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업체에서도 러브콜이 많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제가 이쪽 옷을 좋아하거든요. 평소에도 즐겨 입는 편입니다."
"어머나."
여자의 말 끝에 하트가 붙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곳의 옷을 입는지, 안 입는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은 이렇게 말을 함으로 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푸는 게 중요했다.
영도의 익숙한 회화에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걸 본 용한이 뒤에서 주먹을 쥐며 '잘한다.'라며 눈을 반짝거렸다. 여자와 두 어마디 더 대화를 나눈 영도는 앞으로 나갔다.
봄, 여름 신상 의류 화보였다.
셔츠 하나에 면바지 하나만 입고 서있어도 폼이 났다. 셔츠 깃을 잡아 위로 올린 영도는 일단 팔짱을 낀 기본자세를 잡았다. 촬영 감독과 화보 촬영 담당자가 영도의 앞으로 가 이런저런 컨셉 설명을 했다. 사전에 들은 부분도 있고 새롭게 추가가 된 것들도 있었다. 업계 용어나 길 설명도 오랜 경력으로 인해 쉽사리 외우는 게 가능했던 영도는 피곤한 티 하나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도 오픈이 된 태도로 임하는 영도의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언제나 그렇듯 편안한 분위기에서 촬영이 시작되는 걸 본 용한은 흐뭇하기만 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관리를 한다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