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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고 그대로 얼어붙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걷지 않으면 넘어지기 쉬웠다. 처음 이리로 오는 사람들은 힘들 터였다. 어쩌면 올 엄두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예전에는 억새풀이 길게 자라던 곳이었으나 아래쪽으로 밭을 새로 내면서 예전의 모습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풀도 억새가 아니었다. 그냥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어붙은 풀일 따름이었다.
아래쪽으로 경사가 진 길을 바라보는 수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두터운 잠바와 바지 , 그리고 붉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수인의 작은 얼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때문에 그토록 찾던 수인을 발견하고도 영도는 쉽사리 그리로 가지를 못했다.
멍하니 보고만 있으려니 시선을 감지한 건지 수인이 고개를 든다. 이쪽을 바라보고 바로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올라가는 걸 본 영도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멋쩍어진 영도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리로 걸어갔다.
조용히 다가가려 했지만 중간에 미끄러운 곳을 밟아서 삐끗했다. 짤막한 비명을 지른 영도는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앞으로 양 손을 뻗은, 꽤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수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싶었던 영도는 급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똑바로 서선 헛기침을 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바닥이 꽤나 미끄럽네."
"조심해서 내려와요. 나도 오면서 많이 미끄러웠어요."
"다시 넘어지는 일은 없을........"
말을 하면서 내려오다가 주욱 미끄러졌다. 다리가 길어서 넘어지지 않았지만, 다시금 이상한 포즈를 취하게 되었다. 양 팔을 옆으로 벌리고 다리를 주욱 찢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 자세로 수인의 눈치를 보던 영도는 차분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허리를 주욱 편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을 때,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두 발. 그렇게 조심해서 내려와 수인의 옆에 선 영도는 재차 헛기침을 했다.
"여기 눈이 완전히 꽁꽁 얼어붙었는데? 엄청 위험하다."
"그래서 겨울에는 사람들이 잘 안 찾아와요. 버스 노선도 반대편으로 바뀌어서, 이리로 오는 건 아는 사람들 뿐이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게 되고 용무가 없고는 이리로 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다. 수인이나 종종 이곳을 찾을 따름이었다.
뒷짐을 진 영도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낯설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부분 부분 눈에 익은 부분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여기 많이 변했네."
"예전에 기억하던 장소가 아니지요?"
"그래. 네가 서있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 뻔 했어."
일단 수인을 찾아서 나왔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싶어 멍하니 있다 보니 저절로 다리가 움직였다. 그래서 도착한 게 바로 이곳이었다.
막상 찾던 수인이 옆에 있고 추억의 장소에 도착을 했는데도 뭔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뻘쭘하기도 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몸을 부르르 떨던 영도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뒤를 가리켰다.
"분명 저 즈음에 의자가 있고 버스 정류장 푯말이 세워져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있었어요. 한 7년 전에 뽑혀버렸지만."
"버스는 아예 안 다니는 거야? 저리로 길도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면서 노선을 중간에 틀어버렸어요. 사람들이 많이 반발했는데도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가 꽤나 화를 내셨죠."
"기억하고 있던 모습은 하나도 없는 거로구나."
"세월 이기는 장사가 어디에 있겠어요. 다 변하고 달라지기 마련이에요.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 말이에요."
그래. 그게 당연한 일이겠지. 다 옳은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알게 모르게 수인의 말에 반발하게 된다. 나름 분위기 좋게 지금 상황을 이끌어가고 싶었는데 수인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말을 해대고 있었다.
"때때로 넌 참 늙은이처럼 말을 할 때가 있어."
"그러는 형은 답지 않게 유치하고 어린애처럼 구는 구석이 많아요."
영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것 봐요. 못 참고 한마디 하는 거. 완전히 어린애예요.'라고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꽁하니 그 자리에 주저앉은 영도는 세운 무릎에 팔을 올리고 앞을 빤히 바라봤다.
"술은 좀 깼어요?"
".......안 좋은 기억은 떠올리게 하지 말아줘."
안 좋은 건 기억하지 않는 편이 좋지만 쓸데없는 이놈의 좋은 기억력이 문제였다. 어제 술 먹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다 기억이 나고 있었다.
넥타이를 이마에 매고는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다. 이상한 춤도 추고 노래도 몇 곡이나 연달아 부르고 나중에는 양 팔에 하나씩 여자들을 끼고 이상한 블루스도 췄다. 만약 누군가 그런 장면을 사진으로 찍거나 동영상을 돌렸다면 그간 쌓아둔 시크 쿨가이 원혁의 이미지는 폭삭 무너지는 거였다.
다시 생각을 해도 땀난다면서 이마에 난 땀을 훔치는 영도의 모습에 수인이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풋. 하고 울리는 웃음소리에 영도는 이마에 주먹을 댄 채로 그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눈을 가늘게 휜 채로 수인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준식이 일을 칠 때에는, 어쩌면 저 얼굴을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너무 춥고 황량하고 볼 거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옆에 수인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하게 여겨졌다. 영도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여기 마음에 들어."
"좋은 곳이에요. 정말로, 아주 많이 좋아요."
"여기에 계속 있고 싶어?"
물음에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너무나 좋지만 그렇다고 여기서만 있고 싶진 않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닌, 더 멀리로 나가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여기에 있고 싶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그리고 난 형하고 조금 더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염두하고 말을 하는 사람 같으네."
"그런 건 아니에요."
수인은 웃었다.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 같던 수인이 손으로 팔을 문지른다. 평온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보던 영도는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너 나랑 같이 가자."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눈이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뜬금없이 그 무슨 말? 그런 느낌의 시선이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나랑 같이 가서 살자. 내가 책임질 테니까. 라고 그 때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진지하고 신뢰가 가는 모습으로 그 때의 기억을 재생하려 했다. 하지만 끝에 가서 자신감 부족으로 살짝 미스가 나버렸다. 덕분에 상당히 무안해진 영도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수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떤 식으로 다시 말을 시작할까. 입술을 앙 다문 채로 다른 쪽을 바라보던 영도는 수인을 흘깃 봤다. 수인은 오른쪽 팔뚝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수인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저절로 손이 올라가 그런 수인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머리카락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걸 느끼며 손을 주먹 쥔 영도는 천천히 뒤로 물리며 입을 열었다.
"그 때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 하나 정도는 데리고 살 수 있어."
내려간 손은 수인의 뺨에 닿았다. 차게 식은 뺨이 안쓰러워 두어번 문질렀다. 그리 한다 해서 온기가 돌아오는 건 아닐텐데. 그래서 재차 말했다.
"너 하나쯤은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입을 다문 영도는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 행복은 내가 결정해요. 형이 만들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도 다정했기 때문에 영도는 수인이 하는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다는 걸 인식한 건, 수인이 재차 입을 열었을 때였다.
"꼭 나를 책임지고 뭘 해줘야 겠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꼭 행복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은 이렇게 서로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좋지만, 언젠가는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해요."
"나는-."
"지금은 형하고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해요."
손을 든 수인은 뺨에 닿은 영도의 손을 양 손으로 감쌌다. 힘을 줘서 꼬옥 쥐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리할 필요가 없고, 일부러 만들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는 지금 이 상태로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온기가 담긴 수인의 눈동자를 봤을 때, 영도는 지금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본인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일부러 힘주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수인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멋쩍어진 영도는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전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중얼거린 수인은 영도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을 잡고 까치발을 섰다. 얼굴을 위로 드는 수인에 맞추어 영도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수인의 입술이 귀에 닿고 따스한 호흡이 귓속으로 스며든다. 간지러웠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수인이 말을 마치고 떨어졌을 때 영도는 눈을 떠 수인을 내려다봤다.
붉은 털모자 아래로 보이는 작은 얼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색이 다른, 너무도 신비로운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나이보다 훨씬 더 침착해보이는 느낌과 그로 인해 드는 안도감에 영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티끌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눈은 시리지만 심장은 뜨거웠다. 뭔가가 벅차오르는 걸 느낀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드디어 찾았다. 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좀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매일 매일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때때로 느껴졌던 공허함과 허무함은 앞으로 바이바이였다. 수인과 함께라면 그런 걸 느낄 여력도 없을 터였다. 칭얼거리면 촌닭 수인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수저나 들어요.'라고 할 게 분명했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영도는 한 팔로 수인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털모자 위로 한쪽 뺨을 눌렀다.
품에 안기는 몸에 의지한 채로 영도는 눈을 감았다.
풋풋한 내음이 났다. 숲의 향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건 그간 영도가 애타게 찾던 과거의 향수였다. 잃어버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동안 하나 씩 빠져나갔던 영도의 어떤 것이었다.
수인을 만나지 않고 계속 앞만 보고 달렸다면 계속 이상한 상태였다.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소중한 것을 두고 온 것도 모르면서도 겉보기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척을 해대는 것이다. 그만큼 허무하고 어리석은 게 달리 또 있을까. 하지만 앞으로는 아닐 터였다.
"네가 해준 된장국이 먹고 싶어."
아이가 엄마에게 바라 듯 칭얼거리는 웅얼거림에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풋. 하고 웃어버렸다.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해주지 않았지만 영도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 댁으로 들어가면 곧장 된장국을 해줄 거라는 걸 말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먹게 될 된장국 생각을 하기만 했는데도 입안으로 침이 고인다. 배가 출출해져선 꼬르륵. 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영도는 재차 춥다면서 칭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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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끌어안고 있으면 무척이나 따스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신뢰감이 생기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아군을 품에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이 세상에 적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최근 이런 저런 일이 있었던 만큼 방심을 하면서 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마냥 안고 있으려는 영도를 다독이며 수인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오자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을 먹으라 했다. 수인은 아침을 먹었을 텐데 같이 먹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태연히 '지금은 점심시간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영도는 그가 정말 오랫동안 잠을 잤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무안함과 민망함이 드는 걸 느끼며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평상 위로 올라갔다.
날이 좋을 때 평상에서 먹는 것도 나름 괜찮지만 추워서 방으로 들어가자는 말에 영도는 두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곳의 칼바람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거다. 영도의 반응에 고목환 여사는 영 귀엽다는 투였다.
여든이 넘어도 자세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할머니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영도와 수인이 뒤를 따랐다. 방 안에는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때쯤이면 들어오지 않을까 싶어서 미리 준비를 해뒀다. 앉자."
미리 준비를 해놨다는 말이 왜 이렇게 황송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이런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이쪽인데 말이다. 얻어먹기만 하니 영 죄송하다면서 무릎을 꿇고 앉은 영도는 긴장한 채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어설프게 웃은 후 상 위를 확인했다. 꽤나 종류가 많은 음식들이 가득이 차려져 있었다. 보고 있자니 감탄만 나왔다.
"맛있겠네요."
"어제 잔치 하다 남은 음식이랑 오늘 한 동태지개다. 먹어라."
"잘 먹겠습니다."
말은 해도 할머니가 먼저 수저 들기를 기다렸다. 할머니가 수저를 들고 밥을 한 수저 뜨는 걸 확인한 직후 영도도 동태찌개 국물 맛을 봤다. 혀 안에 닿는 맛을 느끼며 영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어요. 수인이 한 요리랑 맛이 비슷해."
"요리를 가르쳐준 분이 할머니니까 맛이 비슷한 게 당연하지요."
"아. 그런가."
웅얼거리며 영도는 다시 찌개의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술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잘만 넘어갔다. 이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면서 두어번 고개를 끄덕인 영도가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는 걸 본 수인도 수저를 들었다. 하얀 밥을 뜨고는 전을 물었다.
영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만큼 수인이 한 것과 비슷한 음식의 맛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다름이 있었다. 음식을 먹음으로 인해 정말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근하고 나른해지는 걸 느끼며 수인은 동태살을 발라 그걸 영도의 밥 위에 올렸다. 수인이 하는 걸 흘깃 본 영도는 아무 말없이 받아먹었다. 그걸 보고 있던 수인은 곧 실수를 깨달았다. 원래 이런 건 할머니부터 챙겼어야 하는 건데. 수인은 다시 살을 크게 발라 할머니 밥 위에 올렸다.
"많이 드세요."
"난 괜찮으니까 형이나 좀 챙겨라. 마치 며칠 굶은 사람 마냥 먹는구나."
할머니의 지적에 영도는 수저를 문 채로 눈만 위로 들었다.
사수를 하듯 한 손으로 밥공기를 꼬옥 쥐고 허겁지겁 먹기는 했다. 그런 모습이 며칠 굶은 사람처럼 여겨질 줄은 몰랐다. 살짝 민망했던 영도는 '너무 맛이 좋아서요.'라고 웅얼거렸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주신 된장이나 김치 같은 거 냉장고에 넣지도 못하게 했어요."
"야. 문수인.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케케묵은 옛날 옛적의 일은 아니라 해도 지금 이런 타이밍에 할 말은 아닌 듯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할머니가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냔 말이야. 크게 당황한 모습이 된 영도와 달리 수인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많이 화가 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된장 주는 게 아까운지 아껴 먹으라고 그래요. 김치 같은 것도 잘 먹고, 매실 장아찌도 입맛에 맞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러면 이번에 올라갈 때 조금 더 챙겨가도록 해라."
"할머니 드셔야지요. 그걸 어떻게 챙겨가요."
"나 혼자 먹기는 턱 없이 많은 양이야. 텃밭이나 창고로 가서 알아서 가지고 가라."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고맙습니다."
수인이 고개를 꾸벅이는 걸 본 영도도 가만히 있다가 고맙다고 한마디했다.
그렇게 다시 식사가 시작되는 것 같았으나 영도는 입 다물고 조용히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좀 전, 수인이 한 말을 할머니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 영 걱정이 되었다.
"저기 할머니. 그 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요. 혼자 생활을 하다 보니 갑자기 나타난 수인이의 존재가 달갑지만은 않았어요. 그래서 좀 틱틱거리긴 했지만, 그 짐을 못 가지고 들어오게 한 것은........"
"지금은 잘 먹는다고 했으니 괜찮다. 요즘 젊은 사람들 음식을 집에서 안 해먹고 거의 사먹는다 그러더라. 그러면 지금은 좋을지 몰라도 나중에 네 몸만 버리는 거다. 내가 수인이 있는 동안에는 종종 된장이나 고추장, 김치같은 걸 보낼 테니까 되도록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렴. 그게 네 건강 챙기는 거다."
"네. 알았습니다."
백번, 천번 옳은 말씀이셨다. 그걸 앞에 두고 달리 토를 달 필요가 없었다. 당장 고개를 꾸벅이며 '귀 담아 듣겠습니다.'라는 반응인 영도를 두고 수인의 입술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러 말이 없어도 다 통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챙기면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야금거리면서 먹다가 밥그룻이 바닥을 보일 즈음 할머니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 주말 다 보내고 올라간다고?"
"아, 저기 그게......"
영도가 뒷말을 흐리는 소리에 두 사람이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느낌인 수인의 시선에 영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이 있어서 일요일 점심 때는 가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면 앞으로 이틀 더 있다 가는 거로구나. 많이 아쉽구나."
오늘이 금요일이니 그리 되는 셈이었다. 영도로선 월요일 당일 뜨고 싶었으나 그 때부터 일이 있었다. 시경하고 적당히 타협을 본 부분이었기도 하고 이 쪽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시간은 준수하는 게 옳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안색들을 살피는데 생각처럼 나쁘진 않았다. 차분하게 식사를 하는 분위기를 느끼며 영도는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그릇이 다 비워졌다. 이걸 어쩔까싶어 가만히 있으려니 수인이 더 먹을 거냐고 물어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은 안으로 가더니 구석 쪽에 쌓여진 이불을 들고 거기서 그릇을 끄집어냈다. 쇠로 된 밥공기였다. 그걸 영도의 앞에 내려놨다.
"먹어요."
"이게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 떠두면 따뜻하고 먹기에 괜찮아요."
뚜껑을 열자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밥이 나타났다. 수저를 들어 밥의 맛을 본 영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네?"
"일부러 아랫목에 두는 거니까요."
"되게 신기하네."
영도는 난생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아니다. 드라마를 찍는 동안 이런 걸 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냥 소품의 일종이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걸 막상 이리 손 위에 올리고 있으려니 마냥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오. 굉장하다.'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멍하니 있으려니 수인이 영도의 밥그릇에서 한 수저를 떠서 가지고 갔다. 영도는 그런 수인에게 조금 더 밥을 권했다.
"더 먹어."
"아니에요. 이거면 됐어요."
"그게 뭐가 되냐. 넌 더 먹고 살 좀 쪄야해."
영도는 수인이 뭐라 하기 전에 밥을 크게 떠서 그의 밥그릇 안에 넣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나 싶던 수인은 그 밥을 다시 떠서 영도의 밥그릇 안에 넣었다. 영도가 '어?'하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쓰자 수인은 그를 흘깃 봤다.
"괜찮다고요."
뭔가 좀 무뚝뚝했다. '자기야.'라면서 엉겨 붙는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 아니잖아. 영도는 수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너 사람 그렇게 보는 거 아니다? 나름 생각해서 주는 건데 지금 기분 확 상하려고 하잖아."
"이만큼만 먹어야 속이 편해요. 전 형처럼 위가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사람아니에요."
"위를 자유자재로 늘이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해? 나 괴물 아니야."
"형이 괴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고 그렇게 말을 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면 딱 그런 투잖아."
"아니라니까요."
수인과 영도는 틱틱거렸다. 너무 편안한 모습이었다. 친하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웃는 소리에 영도와 수인은 앞을 봤다. 할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 모습게 영도는 비로소 지금 뭔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고작 밥 한 수저 가지고 수인하고 왜 이렇게 투닥 거린 건지 모르겠다. 이런 모습을 본 할머니가뭐라 생각할 것인가. 창피해서 얼굴이 달아오른 영도는 '밥상 앞에서 시끄럽게 굴어서 죄송합니다.'라며 웅얼거렸다.
"너희들 같이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말 친해졌구나."
할머니의 말에 영도와 수인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잘 자란 두 손자를 앞에 둔 고목환 여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도가 잘 해주는 모양이다. 덕분에 안심했어."
"잘 해줘요. 아닌 척 하면서도 챙길 건 다 챙겨줘요. 좋은 사람이에요."
수인이 직접적으로 말하는 좋은 사람 운운에 영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아닌데 .'라고 말은 해도 조금 더 칭찬을 해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한마디 더 했다.
"옷도 많이 사주고 그랬어요."
"그랬어. 영도 네가 착실하게 형 노릇을 하는구나."
"아. 뭐.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영도는 웅얼거렸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게 되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저 착실하게 형 노릇만을 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뒷머리에 손을 댄 채로 두어번 긁적이는 동안 영도의 시선은 아래 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에 수인은 말없이 밥을 떠 입에 넣었다.
"그래. 수인이 넌 앞으로 어떻게 하기로 했니."
수저를 문 채로 수인이 바라보자 할머니가 재차 물었다.
"영도하고 지내면서 나름 결정을 내렸을 게 아니니."
"진학을 하기로 했어요."
"정말로?"
"네. 1년 동안 공부해서 수능 다시 볼 거예요."
"세상에....."
할머니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순간적으로 말이 없으셨다. 정말 놀랍고도 기쁜 듯 그 얼굴로 오만가지 표정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내자 영도는 뻘쭘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를 모르겠다. 울지 말라고 하는 말은 너무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것 같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하는 게 좋은 걸까. 그러는 동안 수인이 방 한쪽에 있던 휴지를 들어 할머니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든 할머니가 휴지를 돌돌 말아 눈 아래를 훔쳐내는 걸 본 영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먼저 휴지를 드리는 건데.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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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고 해서 마당에 나뭇잎이 안 쌓이는 건 아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아주 조금씩 남아있던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다. 많이 떨어지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조금씩 떨어지는 게 원래 더 신경쓰이고 지저분하게 여겨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도가 빗자루를 들게 되었다.
어설픈 빗자루 질에 수인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관둬요.'라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도는 부지런히 빗자루 질을 했다. 엉거주춤하게 서선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폼이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진지한 영도와 달리 그를 보는 수인은 시트콤의 한 장면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영도가 열심히 하니 말리진 않았다.
수인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에 영도는 더 열심히 했다. 적은 나뭇잎을 치우는데 반해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 덕분에 영도는 마당의 절반을 쓸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세운 빗자루에 한쪽 팔을 올린 영도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힘들어 죽겠네."
"벌써 포기에요?"
영도는 고개만 돌려 수인을 바라봤다. 양 손으로 빗자루를 잡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이 직접적으로 비난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눈빛과 마주하려니 기분 되게 이상했다. 영도는 빗자루를 고쳐 쥐었다.
"여기 내가 다 쓸어버릴 거야."
"그래봤자 금방 또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뒤를 돌아봐요."
영도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쓴 곳에 떨어진 2개의 나뭇잎을 보는 순간 '아악!'하는 소리를 질렀다.
"뭐야?! 내가 분명 치웠는데!"
"형이 빗자루질 하는 동안 바람이 멈춰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옳은 말이었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에 힘이 들었다. 아래 입술을 앙 다문 영도의 얼굴로 반항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틀에 박힌 말 따위에 귀 기울이지 않겠어. 그리 말하고픈 듯 구는 얼굴에 수인은 손을 털면서 일어섰다.
"그건 나중에 하고 일단 따라와요."
"어디를 가려고?"
"좋은 거 보여줄게요. 어서 와요."
사내가 검은 뽑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법이었다. 일단 앞마당을 다 정리하기로 했었다. 빗자루를 들기 전에 할머니께 '수인은 가을이 되면 꼭 하루에 2번 씩 빗자루질을 했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번 쓸고 학교에 돌아와서 쓰는 거다. 가을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나뭇잎이 있었을 터였다. 수인이 그렇게 했는데 이쪽이라고 똑같이 못할 이유가 없다 생각을 한 거였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어떻게 할까 싶어 고민을 하는 동안 수인은 건물 뒤로 돌아가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뭘 보여주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따라가자며 영도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뒤에 세워두고는 종종 걸음으로 수인을 따라갔다.
뒤로 넘어가도 수인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나 싶어 기웃거리는 동안 작은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수인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수인이 뒤를 돌아보곤 손을 흔든다. 말은 하지 않고 그냥 따라오라고만 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인상을 쓴 영도는 수인을 따라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쪽으로 작은 텃밭이 나타났다. 담이 처진 곳이어서 큰 규모는 아니지만 확실하게 구분이 지어진 공간이었다. 겨울이라 싹이 나거나 하는 건 아니나, 아기자기 하다는 느낌이었다. 한쪽에 잔뜩 깔린 커다란 항아리를 봤을 때 영도는 신기하기만 했다. 저런 건 영화소품으로만 봤던 건데. 그리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그쪽으로 종종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수인이 바로 영도의 팔을 붙잡는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요."
수인에게 잡혀 영도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돌담이 있는 곳에서 멈춘 수인은 말했다.
"여기요."
"뭐? 아무것도 없는데."
"당연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지겠지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수인을 바라보는 영도는 맹한 얼굴이었다. '지금 나랑 수수께끼를 하자는 거야?' 그리 묻고픈 듯한 눈동자를 확인한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소리 내 웃어버리면 분명 토라질 영도였다. 때문에 수인은 별 말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흙에 손을 댔다.
"흙을 파는 거야?"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흙을 파낸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추운 겨울 날 맨손으로 흙을 파는 수인이 보기에 안 좋았다. 주부습진인가 뭐 때문에 고생하는 수인이 아니었던가. 안 그래도 손끝이 거칠어져서 보기에 안 좋은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한숨을 쉰 영도는 수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선 흙을 파는 걸 도왔다.
"어기까지 파려는 건데?"
"다 파냈어요. 이제 끝났어요."
수인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제일이었다. 두어번 더 손질을 하려니 손끝으로 딱딱한 뭔가가 만져졌다. 흙을 좌우로 털어내자 보이는 건 항아리 뚜껑이었다.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기다 김치항아리를 묻어둔 거야?"
"이 안에 보물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잠깐 손 좀 들어봐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영도가 양 손을 위로 든 채로 잠자코 있었다. 수인은 흙을 다 털어내고 항아리 뚜껑을 열어 옆으로 내려놨다. 그러자 김장봉지가 칭칭 동여매어져 있는 게 보였다. 묶은 끈을 풀고 비닐을 좌우로 열자 안에 그득히 담긴 김치가 나타났다. 확실하게 익은 게 분명한 쉰내가 확 났다. 입안으로 침이 고이는 걸 느끼며 영도는 숨을 죽였다.
"입 안에 침 고이지요?"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영도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에서 시선이 박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수인은 뒤로 손을 뻗더니 그릇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리고 봉지 안쪽에 넣어두었던 집개를 꺼내 김치 2포기를 들어 그릇에 올렸다. 빨갛고 싱싱하게 보이는 김치에 영도는 손으로 턱 아래를 훔쳤다.
"굉장하다."
"서울에는 이런 게 없을 거예요."
김치를 담은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집개를 안쪽에 잘 넣어두고 봉지도 돌돌 말아 끈으로 묶었다. 항아리 뚜껑을 닫은 수인이 다시 흙을 덮는 걸 확인한 영도도 흙을 항아리 뚜껑 위로 덮었다. 그리고 손으로 툭툭 두드리자 수인이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그걸로 뭐 하려고?"
"김치찜 할 거예요. 형네 집에서는 김치를 아껴 먹어야 해서 그런 건 못했잖아요. 여기는 김치가 많으니까 많이 넣고 흐물해질 정도로 푹 찔 거예요. 거기다가 밥 먹으면 맛있을 거예요."
"환상이다."
중얼거리는 목소리 안쪽으로 감탄이 묻어난다.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나 싶던 영도는 수인의 손에 들린 김치를 가지고 가 킁킁 거리고 냄새를 맡아봤다. 푹 쉰 김치 특유의 냄새로 인해 아까부터 입 안이 난리도 아니었다.
"하나만 먹어보자."
"지금 손에 흙 묻어서 안 돼요."
"괜찮아. 그러니까 하나만 찢어서 줘봐."
"절대로 안 돼요."
"왜 그래. 괜찮다니까-."
"형한테 흙 묻은 음식을 먹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뭔 말을 들은 건가 싶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진다. 얼굴이 온통 붉어진 영도는 '그런 거라면 참아야 겠지.'라고 웅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람 참 단순한 게 귀엽다니까. 그리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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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녀석 둘이서 무슨 음식을 만든다고 그래."
할머니의 말에 영도는 그건 또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모르시는 말씀이세요. 괜한 걱정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 쉬세요. 어서요."
그래도 부엌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시는 할머니의 모습에 영도는 아예 앞으로 나가 등을 쑥쑥 밀어냈다. 밀치는 손길에 마냥 서있을 수 없게 된 고목환 여사는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수인이도 매번 자기가 요리를 한다고 해서 내 염치없게 얻어먹기만 했는데......"
"당연한 일을 한 건데 왜 얻어먹기만 하셨다 그러세요. 괜히 마음 쓰지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금방 만들어서 올라갈게요."
영도는 방긋거리고 잘도 웃었다. 상당히 귀엽게 웃는 그 얼굴에 더는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었던 고목환 여사는 '그러면 알아서 잘 만들어라.'라는 말을 남기곤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영도는 기다렸다는 듯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뭘 할까?"
허리에 양 손을 올리는 영도는 의욕만만인 모습이었다. 정말 할 마음인건가 싶어 수인은 영도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에 있을 거예요?"
"물론이지. 넌 너대로 만들고 난 나대로 만드는 거지."
"뭘 만들 건데요?"
"글쎄. 그건 정하지 않았는데......."
중얼거린 영도는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예전에 숙취로 힘겨워 했을 때 영도가 북어죽을 끓인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일로 영도가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나 그렇다 해서 딱히 신뢰가 가는건 아니었다. 괜히 두사람이 이곳에 달라붙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수인은 간단하게 김치찜을 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영도에게 옆에서 생선이나 구우라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다 태워먹으면 곤란했다. 수인은 영도의 배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나가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왜 나가 있으라는 건데? 나도 요리할 줄 알아."
"그건 알지만 괜히 힘쓰지 말아요. 어차피 서울 올라가면 여기저기 다녀야 할 사람이잖아요."
나름 이쪽을 걱정하고 생각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에 영도는 가만히 있다가 옆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할까. 그리 생각을 하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나도 요리를 한다. 난 고추장찌개를 만들게."
"고추장찌개요? 그걸 만들 줄 알아요?"
"물론이지. 예전에 종종 어머니가 해준 적이 있으시니까."
메뉴를 정했으니 이제 만드는 일만 남은 거였다. 영도는 커다란 솥을 꺼내고는 안쪽에 준비를 해둔 재료를 뒤척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 고추장이 제일 중요한 건데.'라고 중얼거렸다. 감자나 양파 등을 꺼내며 콧노래를 부르는 영도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수인이 중얼거렸다.
"나도 우리 아빠가 해주시던 건데."
"그랬어? 그거 맛있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수인의 아버지였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여기서 주춤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면 상황은 더 어색하게 돌아갈 터였다. 때문에 영도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물으며 수인을 바라봤다. 영도의 시선을 받은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라 매워서 잘 먹지 못했어요."
"그러면 내가 만드는 건 많이 먹어."
양파와 감자를 든 채로 영도는 수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라보는 눈빛이 온화하고 미소 짓는 입술 꼬리가 상큼하게 올라가 있었다. 물끄러미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확인하고 영도는 다시 몸을 돌렸다. 콧노래를 부르며 영도가 요리를 만들 준비를 하는 것에 수인도 따라 움직였다.
널찍한 냄비를 찾고 뒷밭에서 가지고 온 김치를 꺼냈다. 국물 맛을 내기 위한 용도로 쓸 돼지고기도 덩어리 채로 올렸다. 이것만 있으면 되었다. 다른 걸 넣으면 맛이 변할 터였다. 쉰 김치의 끝 부분을 잘라 맛을 본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바로 이 맛이야.' 그리 말하는 듯한 얼굴로 있는 수인을 확인한 영도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크게 입을 벌렸다.
"나도 먹을래."
"여기요."
김치 속을 잘라서 영도의 입 안에 넣어줬다. 오랫동안 푹 익힌 것이기 때문에 한 입 넣자마자 특유의 쉰 맛이 화악 퍼진다. 침이 고이면서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끼며 영도는 우물거렸다.
"이건 정말 굉장한 맛이네."
"맛있겠지요? 빨리 만들고 밥 먹어요."
"그래야겠다."
엄지에 묻은 걸 혀로 핥아내며 수인은 다시 김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김치의 맛을 봤기 때문에 손놀림이 한결 빨라졌다. 슬슬 출출해질 시간이었다.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다 같이 모여 먹었으면 싶은 거였다. 밥도 올리고 생선도 튀기면서 냄비 안에 넣은 김치 가운데에 토막 낸 돼지고기를 넣었다. 이제 뚜껑을 닫고 푹푹 찌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한 가지를 끝낸 수인은 영도가 하는 걸 살펴봤다. 빨간 국물 안쪽으로 엉성하게 잘려진 양파와 감자, 파 등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수인은 그쪽으로 가 국자로 국물을 숙숙 휘저었다. 영도는 바로 그런 수인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휘젓지 않고 그냥 익는 대로 두는 게 포인트야. 손대지 말고 있어."
"이 양파는 왜 이래요?"
영도의 말을 들으면서 수인은 국자를 위로 들었다. 국자 안에는 엄청 큰 양파가 흐물해진 채로 달라붙어 있었다. 이렇게 큰 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보기 좋게 좀 자르지. 말은 안 해도 그런 뉘앙스가 표정에서 전해진 건지 영도는 고개를 저었다.
"뭘 모르는 소리. 원래 음식은 이런 식으로 만드는 거야."
양파가 부족할 것 같아서 두 어개를 더 깐 영도는 칼로 그걸 대충 잘라내고는 거의 통째다 싶은 모습으로 찌개 속으로 투하를 했다. 그걸 본 수인은 입을 반쯤 열었다. 수인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방식이었으나 영도는 그게 아니었다. 이리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찌개 속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국물 맛을 본 그는 '캬아.' 하는 소리를 내며 감탄을 했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맛도 죽이는 구만. 먹어볼래?"
영도는 국물을 떠서 후후 불고는 수인에게 권했다. 수인은 조심스레 국자에 입술을 댔다. 후룩거리면서 국물을 삼킨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은 괜찮지만......."
"왜? 안에 들어간 것들이 너무 큰 것 같아? 괜찮아. 베어 먹으면 되지."
영도는 다시 국자를 넣고 안의 걸 위로 떠보였다. 그 속에 아이 주먹 만한 감자가 튀어나왔다. 이건 깎은 걸 그냥 통째로 넣어버린 듯 싶었다. 저걸 보고 뭐라 해야 할까 싶어 가만히 있으려니 영도가 괜찮다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수인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형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참 남자 같아요."
"난 원래 남자야."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잖아요."
이런 식으로 대충 토막 낸 것들을 넣고 끓였는데도 맛은 괜찮았다.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요리를 하지 않을까.
수인이 잠자코 있는 동안 영도는 대파를 들고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넣었다. 그렇게 하면 대파 특유의 모양을 낼 수 없지 않느냐고 하려던 수인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각자 요리를 하는 스타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영도가 하는 요리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을 하면 그도 기분이 안 좋을 터였다. 말자면서 수인은 기름 튀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생선 쪽으로 이동을 했다.
"수인아."
"네?"
부름에 수인은 고개를 들었고 영도는 바로 입을 맞추었다.
예상치 못한 뜬금없는 입맞춤이었다. 왜 이러나 싶었던 수인은 반사적으로 부엌 문 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걸 확인한 직후 수인은 주먹으로 영도의 가슴을 툭 쳤다. 왜 이런 갑작스러운 일을 하는 거냐는 타박이 묻어나는 손길에 영도의 눈빛이 부드러워진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단순히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그런 영도의 분위기에 휘말린 수인도 웃음이 나왔다.
"나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은 그래도 웃음기가 가득 나는 중얼거림을 들은 영도가 가스렌지 앞으로 몸을 돌렸다.
각자 맡은 요리를 하는 두 사람 사이로 깨소금을 살살 볶는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