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31)

뒤에서 짐을 내리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내 쪽으로 갔다. 유리창을 내린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길이 좁아서 차가 못 들어가.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신 게 어딘가 싶습니다. 게다가 이제 다 왔는 걸요."

저기 저 멀리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장관이었다. 동그랗게 둘러싸여진 숲 사이로 대가집이 한 채 커다랗게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택의 주변을 둘러싼 돌담이 마치 공간을 분리해 놓은 것 같았다. 그 돌 벽을 넘으면 다른 시대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참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 푹 빠져서 바라보던 영도는 사내 쪽으로 몸을 돌려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싸인은 나중에 전달해 드릴게요."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네. 나도 있다가 그쪽으로 갈 예정이야."

사내의 말은 영도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쪽으로 갈 예정이라니? 어디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되묻진 않았다. 중요한 말로서 사내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영도는 다음에 뵙겠다며 고개를 꾸벅였고 사내는 수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수인아. 조심해서 가라. 있다 보자."

"네."

사내가 트럭을 몰고 왔던 길을 되집어 가버린다. 영도는 그걸 보고 있는 수인을 바라봤다.

"있다 보자니. 그게 무슨 말이야?"

"글쎄요."

알 듯 말듯한 표정을 지으며 수인은 가방을 들었다. 영도도 큰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작은 걸 한 손에 들었다. 그걸 위, 아래로 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너는 왜 이렇게 짐이 적냐. 내가 사준 옷 다 들고 오면 좋았잖아."

"할머니 집에도 제 옷 많아요."

"그러니까 그런 옷들은 말고."

내가 사준 옷을 입으면 보기 좋을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보고 '대단해.' 같은 말을 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인이 깔끔한 모습을 선보였으면 하는 게 영도의 마음이었다. 지금 영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수인이 아니었다. 때문에 괜찮다고 재차 말을 한 수인은 먼저 몸을 돌렸다. 그냥 가버리는 수인의 뒤를 따르며 영도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눈이 덜 녹아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발로 밟을 때마다 뽀드득-하는 소리가 울렸다. 발바닥에 닿는 얼은 땅의 느낌도 참 오랜만이었다. 점점 옛기억이 되살아난다. 영도는 괜히 기분이 들뜨는 걸 느꼈다.

"공기가 맑아."

"이제 좀 느껴져요?"

"확실히 다른 것 같아."

고개를 든 영도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정면 쪽으로는 변한 게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할머니댁 뒤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 본 기억 그대로이네. 아닌가. 여기 길이 새로 났구나."

"연결하는 길이 부족해서 이동하기에 불편하다고 하니까 구청에서 봉사자들이랑 같이 와서 만들어줬어요."

"여기 구청 직원들은 그런 일도 해주나? 친절하네."

"할머니가 대대로 이 지역 유지시잖아요."

"아, 그렇지. 우리 할머니 대단한 분이시지."

수인이나 영도에게 있어선 그냥 좋은 할머니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니었다. 할머니나 그 전부터 영도 집안은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유력인사였다.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하려 할 때에는 꼭 사람들이 와서 의논을 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늘 최고의 웃어른으로 챙기는 할머니가 아니던가. 여전히 정정하신 거겠지.

영도는 주변을 기웃거렸다. 예전 수인과 처음 만났던 곳이 어디였더라.

그리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기웃거려도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그렇군. 집 뒤로 있는 길이었지. 여기서는 암만 둘러봐도 보일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영도는 주변을 둘러보는 걸 그만 두고 대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지금은 정리가 잘 되어있지만 예전에도 그랬던 건 아닐 터였다. 게다가 읍내에서 안으로 들어오는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중간에 이렇다 할 마을도 없었다. 수인은 이런데서 어떻게 학교를 다녔던 건가 싶었다.

"학교는 어디에 있었어?"

"아침에 아까 그 아저씨 차 타고 나가야 했어요. 덕분에 편하게 다녔지요."

"그 트럭 타고 다녔다고? 그러면 왕복이 몇 시간이야?"

"왕복으로 따지면 한 3시간 정도 되겠네요."

"......징그럽다. 그걸 어떻게 다니냐."

"다들 그렇게 다니는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힘들 것도 없었어요. 가끔은 트럭이 없어서 2시간 기다려 버스도 타고 오고 그랬는 걸요. 아니면 걸어오거나."

"걸어온다고? 그 거리를? 말도 안 돼-."

"그러다가 중간에 아는 사람 오면 얻어 타기도 하는 거지요."

얻어 타지 못하면 끝까지 걷는 거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했다면 '아아. 그렇구나.'라면서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지금 말을 하는 건 수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만도 용하다 싶었다.

"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야?"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할머니 건강이 안 좋으셨어요. 알고 있지요? 그 때 병원비 형이 다 대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분명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두어달 간 집안 분위기가 칙칙했지. 어머니는 거의 매일 전화를 하면서 울어댔고 말이다. 너무 심각하게 반응을 보이니까 영도도 한 번쯤은 내려가 봐야 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 때 해외로 나가는 일이 많아서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았었다. 그런 죄송한 마음에 할머니 병원비를 모두 영도가 냈었다. 한 2천 정도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에도 형이 참 부러웠지요. 그만한 돈을 척척 내주니까요. 하나님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어요."

그런데도 영도가 연예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나님이라니. 그건 좀 오바다, 야."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야. 라면서 손을 저으며 웃어야 할 것 같지만 못하겠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할머니의 병환. 그걸 옆에서 보살핀 게 바로 수인이었다. 원래라면 수인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했어야 할 일이었을 텐데.

"할머니 간병 때문에 진학하지 않기로 한 거야?"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요. 작은 할머니나 마을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할머니도 울면서 말렸지만 그 때에는 저 나름대로 단호했어요. 아픈 할머니를 두고 어딜 가서 뭘 하겠어요. 부모님보다 훨씬 더 극진하게 절 키워주셨는 걸요. 지금도 그 때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요. 만약 할머니를 두고 대학을 다녔다면, 그래서 할머니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평생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거예요."

수인의 얼굴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모든 게 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감탄했다.

"넌 정말 어른스러운 것 같아."

"안 그래요. 다들 그런 입장이라면 저 같은 선택을 내렸을 거예요."

"아니야. 안 그래. 그래서 때때로 난 네가 존경스러워."

나이는 어려도 이쪽보다 속이 깊다. 생각을 하는 방향이 다른 건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수인이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던 것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고개를 든 영도는 긴 한숨을 쉬었다.

"너무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렸던 걸지도 모르지. 딱 며칠 뿐이라 해도 다 잊고 푹 쉬어도 되는 시간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데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 그럴 때마다 너하고 대화를 나누면 편안해져. 네가 딱히 해답을 주는 건 아닌데, 그냥 마음이 편안해져. 그래서 참 좋다."

말로 표현을 하니 더 좋았다.

영도의 얼굴이 서울하고는 다르게 편안하게 풀려갔다.

"여기로 오길 잘 한 것 같아. 할머니 얼굴 못 뵌 지 오래 되기도 했고 말이야."

웃는 영도의 얼굴은 순순했다. 본인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려보이는 인상이었다. 영도를 지그시 바라보던 수인은 '우선.'이라며 운을 띄웠다.

"사과부터 할 게요."

"음? 그게 무슨 말이야?"

사과라니? 수인이 이쪽에게 사과를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영도의 얼굴을 확인한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의미가 모호한 얼굴이 된 수인은 '곧 있으면 알게 되요.'라고 중얼거렸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아까 그 사내도 그렇고, 지금 수인도 그렇고 뭔가 좀 찝찝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싶었던 영도는 수인 쪽으로 몸을 붙였다.

"왜 그러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거의 다 왔네요."

수인의 말에 영도는 고개를 돌렸다. 코앞으로 커다란 나무 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인은 먼저 돌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섰다. 보란 듯이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여기 기억나요?"

"너 그런 식으로 말 돌리려고 하는 거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말 좀 해봐. 아무래도 느낌이 싸하단 말이야."

말을 하면서 영도는 돌계단을 올랐다. 커다란 나무 문 앞에 선 수인이 양 손으로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게 갑자기 무겁게만 보였다. 처음부터 이쪽이 커다란 걸 두 개 들을 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재차 추궁을 하려던 차에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니 . 이건 이상한 냄새가 아니었다. 기름 냄새와 고기 냄새였다. 알게 모르게 칼칼한 냄새도 솔솔 풍기는 것 같았다.

기차 안에서 많이 먹었다 해도 점심을 거르고 벌써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출출했기 때문에 더 개코가 되는 것 같다면서 코를 씰룩거리던 영도는 '형.'하는 부름에 수인을 바라봤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

"각오 단단히 하세요."

"뭔 각오를 하라는 거야?"

대답을 하는 대신에 수인은 문을 슬쩍 눌렀다. 그러자 문이 양 쪽으로 서서히 열렸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알게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지? 이 느낌은? 영도는 숨을 죽인 채로 열리는 문을 바라봤고 거의 동시에 안에서 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왔다!!"

움찔한 영도는 들고 있던 가방을 놓칠 뻔 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앞마당의 풍경이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대문 앞으로 펼쳐진 마당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대로 크고 으리으리했다. 문제는 그 마당의 절반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에 있었다. 이 추운 날, 왜 상을 깔고 그 앞에 오순도순 앉아있는 거란 말인가. 그리고 그들은 왜 이쪽을 보며 손가락질을 하면서 반가워하는 건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영도가 멍하니 있는 동안 작달만한 아이들이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왔다! 왔다!!"

"대장 할머니! 왔어요!"

대장 할머니? 그건 또 뭐야?

그리고 영도가 궁금해 하는 대장 할머니는 바로 정체를 드러냈다.

잔치상을 앞에 둔 사람들 뒤로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백발을 곱게 넘긴 단아한 인상의 한복 입은 노인이 서있었다. 인자한 얼굴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영도를 바라보며 그녀는 다정히 말했다.

"우리 영도. 왔냐."

기억 속의 할머니 모습 그대로였다. 큰 목소리가 아닌데도 서있는 곳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영도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웅얼거렸다.

"일단 오기는 왔는데 말이지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부터......"

영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려온 아이들은 그가 들고 있던 걸 빼앗아갔다. 채가듯이 가지고 가는 가방에 영도는 당황해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 기다려. 그건 내거야. 어디로 가지고 가려는 건데? 그리 물으려던 찰나 양 팔이 잡혀 앞으로 질질 끌려갔다. 가면서도 전신에 달라붙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 흥미진진한 얼굴들이었다.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영도였다. 뒤에서 그걸 바라보던 수인은 말없이 등을 툭 쳤다. 그 손길에 밀려 영도는 어어어-하는 사이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 중년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자, 오랜만에 우리 잔치를 시작합세."

어디 선가 꽹과리 소리가 들리고 장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장구와 꽹과리 그리고 피리가 나와 흥겨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연주를 시작하자 안쪽에 마련이 된 음식 장만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흥겹게 팔을 흔들었다.

"자! 음식 나갑니다! 이제부터 잔치 시작이요!"

"우와아아아!"

주걱을 흔들며 외치는 말에 바로 호응이 날아온다. 영도는 아이들에게 붙잡혀 어느새 그들 사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좋다면서 손뼉을 치는 이들 사이로 끌려간 영도의 손에는 어느새 커다란 사발이 들려졌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많아도 이 사발을 왜 주는지 물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도와줄 마음이 없는 듯 싶었다. 부처의 얼굴을 한 할머니가 커다란 호리병을 들더니 그대로 영도가 든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부었다. 거의 넘칠 정도로 말이다.

당황한 영도가 사발 끝에 입을 대고 홀짝여서 흘러넘치지 않도록 하자 누군가 주먹을 쥐고 높이 들었다.

"원샷! 다 마셔라!"

"뭐, 뭐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샷?

영도는 눈을 댕그랗게 떴지만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은 더 흥겨워 소리를 높였다.

"마셔라! 마셔라!"

"주욱 다 들이켜! 이게 바로 신고식이야!"

"서울서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었제? 다아 마셔부러! 그러면 피로가 다 풀려!"

사방에서 소리를 치는 사람들 사이로 전이며 고기며 떡과 국 등을 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술과 음식을 마시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영도가 쉽사리 막걸리를 마시지 않자 사람들의 함성이 더 커진다. 영도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라면 하나 밖에 없었다. 매달리듯 할머니를 바라보자 그녀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다 들이켜."

"......."

아군이 아니라 적이로구나.

오랜만에 뵙는 할머니는 지나칠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런 할머니가 다 들이키라는 걸 무시할 수 없었다. 이건 거부권이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마셔야 하는 거겠지 . 긴장을 한 듯 마른침을 삼킨 영도는 혀로 아래 입술을 사악 핥았다. 그리고 눈 딱 감고 주욱 들이켰다.

"오오오옷!"

함성을 들으면서 영도는 마지막 한 모금을 힘겹게 넘기고는 들고 있던 빈 사발을 들어 머리 위에서 뒤집었다. 두어번 터는 듯한 흉내를 낸 영도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기분 좋게 웃었다.

"아주 시원한데요?"

안 그래도 추웠는데 덕분에 속 내장이 다 얼어버릴 것 같았다.

애써 웃기는 해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걸 모르는 이들은 손뼉을 치며 영도의 행동을 응원했다. 이걸로 끝인 건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자! 이번에는 자리를 잡고 마시자고!"

"에? 자리를 잡아요?"

뭔 놈의 자리 말이여?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동안 영도는 사람들에게 질질 끌려 안쪽으로 가게 되었다. 어영부영 자리에 앉게 된 영도의 손에는 막걸리가 가득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어른이 그런 영도에게 손짓을 하며 '주욱 들이켜.'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년 여인이 김치를 좌악 찢어 보쌈에 돌돌 말더니 그걸 얼굴 옆으로 내민다.

"이건 안주야. 걱정하지 말고 일단 마셔."

안주를 준비해 뒀으니 일단 들이키라는 건가. 하지만 조금 전에 분명......

당황한 영도는 주변을 둘러봤다. 수인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쪽을 이런 데에 밀어놓고 이 녀석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영도의 눈으로 할머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양 손을 마주잡은 채로 그녀는 너무도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우실까. 이런 잔치를 준비할 정도로 뿌듯한 거겠지.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싶었다. 마냥 튕기고 있을 수 없었던 영도는 잔에 든 막걸리를 주욱 들이켰다. 재차 사람들의 탄성이 터지고 입으로 김치로 돌돌 싸인 보쌈이 밀어 넣어졌다. 너무 커서 입을 크게 벌려도 입술 주변으로 빨간 물이 들었다. 그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웃어도 영도는 화가 나지 않았다. 맛있다는 듯 고개를 꾸벅였다.

*****************************************************************

일단 짐을 방에 밀어 넣고 편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영도가 사준 옷은 따뜻하긴 해도 그걸 입고 밖으로 나갈 순 없었다. 뭐라도 묻거나 망가지면 무척이나 속상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뜨뜻한 아랫목에 앉아있으려니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영도가 걱정을 할까봐 괜찮은 척을 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 상당히 피곤했다. 정말은 누워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 나타나지 않으면 어른들이 찾으실 터였다. 나가봐야 하는 거겠지. 수인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수인은 마루 앞에 서있는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건강한 모습만 봐도 좋았다. 수인은 그리로 걸어갔다.

"할머니. 형 옆에 있지 않고 왜 이리로 오셨어요."

"네가 나오는 게 늦어서 걱정이 되서 와봤다."

"짐만 두고 바로 나올 작정이었어요. 뭘 걱정을 하세요."

"얼굴에 그런 커다란 걸 붙이고 걱정하지 말라고?"

"아."

그제야 수인은 한 쪽 뺨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걸 만지작거리려니 할머니가 말없이 옆을 가리킨다. 와보라는 사인에 수인은 순순히 그리로 가 할머니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무릎에 턱을 올린 채로 있으려니 할머니가 수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이 때렸냐?"

수인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 알고 있다. 그냥 농담 삼아 해본 말이다."

수인의 머리를 만지작 거리던 주름 많은 손이 뒤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을 잘랐구나. 참 보기에 좋다."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나 싶던 수인은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사람들하고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어요. 이상한 듯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빤히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뿐이었어요. 기본적으로 그들은 제게 무심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보고 말 사람인 거잖아요."

이쪽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그들은 가야 할 길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괜히 눈이 마주쳤다가 시비가 생기면 큰일이라는 듯, 대부분이 바닥을 보거나 몽롱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때문에 수인이 생각하고 염려했던 그런 일들은 생기지 않았다.

"세상은 원래 그렇고, 사람들 또한 그런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무서웠어요. 그래서 자꾸만 감추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그냥 보이고 살아도 괜찮겠구나 싶었어요."

수인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말로 표현을 하니 속이 참 편안했다. 개운하기까지 한 수인의 얼굴에 할머니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도 옆에 있으면서 많이 변했구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그러게요. 이상하지요."

아직도 사람을 똑바로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영도가 옆에 있으면 달라진다.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해져선 사람을 똑바로 보거나 대함에 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담담해지는 스스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만 보더라도 이쪽이 얼마나 영도에게 의지를 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많이 믿음직스럽지도 않은데."

때때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사내의 얼굴이 되는 영도였지만 기본으로는 느슨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갭이 참 좋았다.

무릎 위에 턱을 올린 수인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수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인이가 이제는 내 곁을 떠날 때가 된 것 같구나."

수인은 할머니를 바라봤다.

"사내는 모름지기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야. 네가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면 난 정말 힘들었을 거다. 기회는 많지 않은 것이니 잠시만 쉬었다가 다시 형 따라 올라가거라. 가서 하고 싶은 거 해라. 영도는 그 정도는 네게 해줄 수 있는 아이란다."

그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12월 말부터 학원 다니라고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수인이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는 동안 영도는 지원을 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두려움도 적었다. 지금 수인이 염려하는 것은 딱 하나 뿐이었다.

"할머니가 걱정이 되요."

"너 떠난다고 그 다음날 심장발작으로 갑자기 가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나이도 어린 놈이 왜 걱정은 노친네처럼 하고 있어. 그러면 못 쓴다."

할머니의 타박에 수인은 웃었다. 하하하. 하고 웃는 얼굴이 순하고 사랑스러웠다. 수인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허리를 숙여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메마른 손으로 수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느낌에 수인은 가만히 있었다.

"네가 내 걱정을 하듯이 나도 네 걱정을 한단다. 괜찮을까 싶어 언제나 늘 마음을 졸이지. 때로는 네가 손자가 아니라 내가 낳은 아들처럼 여겨진단다. 너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애틋함은, 나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지."

".......제가 걱정을 많이 끼쳐드려서 그런 모양이네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다."

할머니는 수인의 등을 토닥였다.

영도가 사준 옷을 챙겨입은 수인을 위, 아래로 살펴봤다.

"안 본 사이에 많이 잘나졌구나. 보기가 아주 좋다. 다음에 볼 때에는 더 멋져진 모습이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그러면 우리들도 가보자. 영도가 혼자 애쓰겠다."

그제야 수인은 '맞다.'라고 중얼거렸다. 바로 마루 아래로 다리를 내려 운동화를 신는다. 묘하게 조급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런 수인을 보며 할머니는 물었다.

"잔치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미리 말은 안 해뒀던 거냐?"

"그러면 이리로 안 오겠다는 말을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한 번쯤 이렇게 노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이것 또한 수인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크고 작든 축하할 일이 있으면 산 건너 마을의 사람들 모두가 모여 즐겁게 놀고 술을 마셨다. 함께 어울림으로 인해 슬픔은 절반이 되고 기쁨은 배가 되는 법이었다. 연예인이라는 일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꽁꽁 숨기는 게 많은 영도였다. 이런 식으로 내려놓고 편하게 사람들과 즐기는 걸 경험하게 해보고 싶었다. 예전 시경이 데리고 간 그 이상한 인샬라라는 곳 비슷한 장소에서 술을 마셨을 게 분명한 영도이니 말이다.

"우리도 이만 슬슬 일어나야지. 네 형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구나."

"많이 마셨어요?"

"글쎄. 내가 이리로 오기 전에도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키더구나."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될 텐데."

빈속인 영도였다. 막걸리를 마시면 주변 어른들이 안주도 잘 챙겨주시겠지만 신경이 쓰였다.

수인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는 바닥을 직직 끌고 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방 안과 다르게 바깥은 상당히 추웠다. 몸을 움츠리며 가볍게 몸을 떤 수인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고 앞쪽으로 넘어갔다.

잔치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암만 추워도 술이 들어간 사람들은 지치지 않는다. 음식은 계속해서 나왔고 그건 막걸리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저물고도 한참을 더 즐길 게 분명했다. 원체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 투성이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그는 이미 반쯤 맛이 간 것 같았다. 누가 건넸는지 알 수 없는 넥타이를 이마 가운데에 두른 영도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환성이 커진다. 그러자 영도는 거들먹 거리듯이 양 손을 들어 보였다. 누군가 '영조를 연기해봐!'라고 외쳤고, 그 순간 영도가 딸꾹질을 했다.

"왕은 아무데서나 연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게 뭐야. 한 번 보여줘도 되잖아."

"안 돼요.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사극 연기를 보여드려요. 그러면 이미지만 망치는 꼴이에요. 그보다 전에 제가 개봉한 영화 있는데, 그 주인공이나 연기해 볼까요?"

"난 영조 밖에 모르는데......."

"아저씨. 사람 섭하게 하시네. 제 연기를 보고 싶으시다면 영화도 보고 다른 드라마도 보고 그러셔야지요."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아저씨가 바닥에 납죽 엎드리자 사람들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도도 배를 붙잡고 웃었다. 누군가 그런 영도의 팔을 잡아당겼고 영도는 순순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건네는 술을 받았다.

마시라는 외침에 망설임 없이 바로 입 안에 술을 털어 넣는다. 착하다며 옆에 앉은 이가 김치를 주욱 찢어 입에 넣어주자 맛있게도 받아먹는다. 그리고는 다 식은 게 분명한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제 정신이라면 저렇게 못 놀지.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모르겠다. 아직 이리로 온 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혼자서 정말 많이 마신 것 같으네요."

"술 한 독은 다 마신 것 같더구나."

"그렇게 많이요? 안 말리셨어요?"

"본인이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걸 어떻게 말리누."

수인도 지금 영도가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에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런 식으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가만히 있던 수인이나 영도가 재차 술을 넘기는 걸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영도에게 가보겠다는 말을 하곤 그 쪽으로 걸어갔다.

"여전하네. 여전해. 너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었지. 그 때에도 잘 생겼고, 지금은 더 해."

"이 집안이 원래 인물 하나는 최고였지. 예전에 자네 할아버지도 대단한 분이셨어. 할머니 한 분만 바라보는 강직한 분이셨는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시선 한 번 받겠다고 문간 바깥 십리까지 여자들이 줄을 섰었지. 처녀들 뿐만이 아니라 과부에 남편 있는 여편네들까지 대단했어."

"예전 식민지 때에는 일본 고위관직의 여식이 자네 집안 어른에게 한 눈에 반해서 난리도 아니었지. 나도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죽이네 살리네 말도 아니었어."

"보아하니 자네도 여자 꽤나 있을 것 같구만."

술이 들어가다 보면 거한 말도 주고받게 된다. 그게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이었다. 다른 놈들이 저런 식으로 물으면 영도는 주먹부터 날렸을 터였다. 시끄럽다며 면박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웃을 따름이었다.

"전 여자 같은 거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게나. 얼굴만 보면 여자가 한 열명은 있을 것 같아."

"정말 없습니다. 여자 생기면 난리 납니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일은 뭐야. 그 야하게 생긴 처자와는 정말 무슨 관계인건가?"

시골이라 해도 TV가 있는 법이니 지금 연예계에서 가장 떠들썩한 일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다른 경우라면 불편해하며 대답하기 꺼려할 영도이나 지금은 헤실거리고 웃었다.

"별 관계 아니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난리가 나는 게 이쪽 바닥입니다."

"그런 거로구만. 아무 사이가 아닌 게 참 다행이구만. 실은 전에 자네 스캔들인가 뭔가 났을 때, 자네 할머니 앞에서 말했다가 무서워서 죽을 뻔 했다네.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시끄럽다 하시는데 기백이 보통 아니시더군. 도저히 여든이 넘은 분으로는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어."

"우리 고목환 여사님은 아직도 정정하시지. 괜한 말 하지 말게나."

"그래. 험담 같은 것도 하지 말게. 고목환 여사야 말로 백리 바깥의 험담마저 다 듣는 분이시니까."

고목환은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강한 느낌이 풍기는 이름처럼, 실제로도 대장부의 기질이 많은 분이었다. 할머니의 대단함에 대해서 재차 말을 꺼내는 이들을 두고 영도는 국물을 떠 입 안으로 넘겼다. 차가운 고기 국물에서 비린 맛이 나는 것 같았지만 괜찮았다. 이렇게 취한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발목을 잡은 채로 앞, 뒤로 몸을 흔들고 있으려니 누군가 등을 툭 친다. 그 느낌에 영도는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이게 누구야?"

고개를 숙인 영도는 옆에 앉는 이를 빤히 바라봤다. 지나치게 얼굴이 가까이 접근을 했지만 수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차분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 영도가 헤실거리고 웃었다.

"우리 수인이잖아."

빙구 같은 웃음이었다.

이렇게 영구처럼 웃다니. 지금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면서 수인은 묵묵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자 영도가 당장 수인의 손목을 불잡았다.

"어린놈이 어디서 감히 술을 마시려 들어."

'떽. 그러면 못 쓰지.'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며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수인이 옆으로 올 때부터 그를 보고 있었던 이들은 영도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나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영도는 얼큰하게 취한 것 같으나 다른 마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워낙에 이런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쉽게 취하는 분들이 아니었다. 형제 싸움이구나 싶어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수인은 한숨을 쉬었다.

"나 21살이에요."

"아니. 넌 21살이 아니야. 넌 꼬맹이야. 촌닭이라고. 촌닭은 술 같은 거 마시면 안 돼. 실수해서 또 못 일어나면 어쩌자는 거야."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며 영도는 재차 강한 눈빛을 던졌다. 그렇게 쳐다보면 이쪽이 '아이. 무서워.' 같은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어림도 없다면서 수인은 코웃음을 날렸다.

"만취해서 혀 꼬부라진 사람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으하하하하! 수인이가 한 방 먹이네 그려!"

상을 두드리며 웃은 사내가 영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수인인 우리들이 키운 이 시대 최고의 술꾼이야.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고 자네나 한잔 더 받게나."

사내가 잡아끌자 옆으로 몸이 당겨진다. 그러는 동안 다른 어른들이 수인에게 다가와 잔을 부딪쳤다. 무릎을 꿇고 앉은 수인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잔을 한 번에 비우는 걸 본 영도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야. 문수인. 내가 술 같은 거 마시지 말라 했잖아!"

"시끄럽게 굴지 말고 거기에 있는 부침이나 줘 봐요."

"응? 부침?"

영도는 수인이 가리키는 부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침 같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젓가락을 들어 부침을 든 영도는 수인에게 내밀었다. 입을 벌리고 부침을 받아먹은 수인은 오물거리면서 옆에 앉은 어른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자 술을 받은 어른이 수인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 그간 고생 많았다. 서울 생활이 좀 힘들었지?"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힘들지 않았어요. 형이 잘 보살펴 줬거든요."

"얼굴이 그 모양인데 잘 보살펴 줬다는 말을 하는 거냐."

얼굴을 운운하는 순간 수인은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도 얼굴에 붙은 커다란 거즈와 입술이 터진 걸 보곤 걱정스러워 하셨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인 듯 싶었다. 어쩌면 이들 중 몇은 영도에게 맞아 얼굴이 이리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은 그게 아닌데도 말이다. 수인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정말로......"

"괜찮다. 일단은 마시자."

수인은 반사적으로 잔을 들었다. 워낙 오래 전부터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 거였다. 그것에 괜히 딸꾹질이 나온다. 재미있다 생각을 하면서도 수인은 잔을 부딪쳤고 그와 동시에 영도가 수인의 몸을 뒤에서 부터 끌어안았다. 콰왁 안고는 어깨에 턱을 올린 영도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수인에게 술을 먹이는 이를 바라봤다.

"수인이한테 술 먹이지 마세요. 이 녀석은 아직 어리다구요."

잠시 묘한 침묵이 형성되었다. 이건 뭔가 싶은 그런 분위기였다.

하여튼. 문제라니까. 지금까지 술 취한 영도를 본 적이 없었던 만큼, 지금 이런 모습이 색다르면서도 당혹스러웠던 수인은 몸을 끌어안은 영도의 팔을 잡아 내려버렸다.

힘이 없었던 영도는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너 더 마셔야 겠다.'라면서 영도를 질질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도 영도는 수인 쪽으로 손을 뻗으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수인을 불러댔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수인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형이 술을 좀 많이 마셨네요."

"그러게. 원래 이렇게 귀여운 성격이었던 거냐? 잘 나가는 연예인이라 해서 조금 더 거들먹거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초반에는 수인도 그런 생각을 했다. 워낙에 첫 만남이 강렬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알고 지내니 의외인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허당이라 해야 할까나. 일단 본인이 해야 할 일은 완벽하게 해버리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허점이 좀 많았다. 맥이 풀려 느슨해져선 집 안에서 굴러다니는 영도의 모습은 수인이 보기에도 귀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잔에 입술을 댄 수인의 입가로 자연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의외로 귀여운 성격인 것 같기는 해요."

"응? 뭐라고 했냐?"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저은 수인은 술을 다 마셨다. 몇 년은 묵은 귀한 술이었다. 그래서인지 뒷맛이 개운하면서 독특했다. 인샬라에서 마셨던 독하기만 한 술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수인은 재차 어른에게 술을 따랐다. 그러는 동안 등 뒤에서 쨍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노래나 부르자!"

큰 외침에 수인은 뒤를 돌아봤다. 징과 꽹과리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걸 들고 연주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익숙하게 장단을 맞추는 동안 몇몇은 일어나 덩실거리고 춤을 췄다. 뜬금없다고 할 만한 모습이었으나 수인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보면서 적당히 박자를 맞추고 있는데 영도가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졌다.

"자네도 노래 한 곡 하게나."

"노래요? 전 노래 잘 못 부르는데요......."

"못 불러도 부르라면 불러야지.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노래를 부르게나."

누군가 술병에 수저를 거꾸로 넣어서 내밀었다. 말도 안 되는 엉성한 마이크의 등장에 그걸 쥔 영도는 어정쩡하게 서게 되었다.

영도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가 노래 부르는 걸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다. 괜한 일이 터지는 건 아닌가 싶었던 수인의 몸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말려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영도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는 씩씩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부르겠습니다. 두만강 나갑니다!"

양 손을 위로 든 영도는 씩씩하게 외쳤다. 이마에 넥타이까지 메고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저런 몰골로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겠다 설치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말고 그냥 자리에 앉으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영도가 구성진 노래가락을 시작했다.

평소 모습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듣기 좋은 간드러진 노래가 흘러나왔다. 앞마당을 가득 채우는 노래 소리에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영도를 바라봤다.

영도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별 힘을 들이지도 않고 모두가 영도에게 주목을 하고 황홀한 듯 그의 노래를 들었다. 그 속에 수인도 있었다.

노래 자체는 영도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노래인 양 2분 40초 동안 노래를 부른 영도가 입을 다물고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그 때에는 술에 취한 모습 같은 건 없었다. 도도한 톱스타의 눈길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마지막으로 수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얼굴로 장난스러움이 퍼져나갔다.

이가 드러내면서 안쪽의 조금 뾰족한 이가 보였다.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은 영도가 무대에 선 연극배우처럼 근사한 인사를 하는 순간 모두가 양 손을 위로 들고 박수를 쳤다.

"우와와아아아! 굉장하다!"

"이런 건 처음이야! 나 정말 감동 받았어!"

"젊은이 이리로 오게! 내 용돈을 주겠네!"

"나도! 나도! 이리로 오게! 오천원 여기에 있네!"

"난 만원이네!"

엄청난 환호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인도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다니는 동안 영도의 바지 주머니와 손으로 만원과 천원, 오천원 짜리가 쥐어졌다. 그걸 위로 든 채로 흔드는 영도는 완전 뿌듯한 얼굴이었다. 그걸 보자니 복잡한 기분이 든다.

정말 완전 취했구나. 지금은 신이 나서 저러고 다니는데 나중에 술 깨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싶었다. 지금 있었던 일을 다 기억이나 할까나. 나중에 이 일을 떠올리면서 공중에 하이킥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가 좋았던 수인은 계속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한 판 놀이가 시작되었다. 신나게 징을 치는 사람에 맞추어 모두가 일어나 춤을 추는 분위기가 형성 되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수인과 주거니 받거니 했던 어른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입이 짭짤하네."

"그러게 말이에요."

원래는 한 번에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벌 수 있는 사람인데. 어쩌면 원영도의 노래는 이런 곳에선 쉽사리 들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노래를 듣게 된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굉장히 운이 좋은사람들이 아닐까.

사람들과 어울려서 춤을 추는 영도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건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숨을 죽인 채로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영도가 이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걸 본 수인도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일세. 고목환 여사님은 좋으시겠네. 참 부러워."

옆에서 들리는 중얼거림에 수인은 그쪽을 쳐다봤다.

술잔을 기울이던 이는 뭔가 실수를 했다는 듯 급히 손을 흔들었다.

"그렇다고 네가 못하다는 건 아니다. 넌 네 나름대로 좋은 녀석이야."

"알고 있어요. 딱히 형하고 절 비교하면서 우울해하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영도를 너무 치켜세워서 이쪽이 듣기에 거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도 않은데. 실상 영도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이리도 기분이 좋은데 말이다.

그리고 그 때 영도가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양 팔을 벌리고는 할머니를 끌어안는다. 예상치 못한 포옹에 놀란 듯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싫은 투는 아니었다. 환하게 웃은 그녀가 영도의 등을 토닥였다. '왜 이렇게 응석이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로 행복함이 가득이었다.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수인도 마음이 편안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영도가 이곳으로 온 건 거의 15년 만이었다. 그런데도 바로 어제 온 사람마냥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특유의 친화력 때문인지, 아니면 넉살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적극적인 모습이나 술을 권유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영도가 잘 어울리고 즐거워 보이니 수인은 좋았다. 참 기분이 좋았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깔끔하지만 낡은 벽지가 발라진 천장. 그리고 벽에 걸린 짚으로 만들어진 바구니와 짚신들. 그 아래로 있는 고풍스러운 나무장. 그 옆에 있는 건 낮은 상이었다. 모든 것들이 조선시대에서 넘어 온 오래된 소품 같은 인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도는 지금 자신이 촬영을 하다 말고 깜박 잠이 들었던 건가 싶었다.

".....나 사극 안 한지 2년인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칼칼하고 동시에 술 냄새가 화악 올라왔다. 

입을 열자마자 나는 냄새를 당해낼 수 없었다. 역함이 너무도 강했던 영도는 헛구역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머리를 치는 엄청난 통증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반쯤 몸을 일으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이불 위로 쓰러진 채로 부들거리면서 몸을 떨었다. 마치 걷어 채인 개새끼마냥 옴찔거리던 영도는 닫혀있던 문이 열리자 힘겹게 그쪽을 바라봤다.

보이는 건 흰머리를 단정하게 다 넘긴 할머니였다. 방 안쪽에 깊이 파묻힌 사진 속에나 있어야 할 할머니가 왜 이렇게 생생한 건지 모르겠다. 최첨단 3D인 건가?

"아직도 술에서 안 깬 얼굴이구나."

차분한 목소리에 영도는 지금 이게 꿈도 착각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할머니도 뵐 작정으로 강원도로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있었던 엄청난 일들이 떠올랐다.

"아."

짤막한 소리를 내고는 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영도를 본 할머니는 웃으며 아래로 손을 내렸다. 다시 위로 올라온 그녀의 손에는 소박한 그릇이 들려있었다.

"이거나 마시거라."

힘들어도 간신히 무릎을 꿇고 앉는 것에 성공한 영도는 양 손으로 그릇을 받았다. 찰랑거리는 미지근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달짝지근한 냄새를 맡고는 이게 뭔지 알 수 있었다.

"꿀물인가요?"

"주욱 들이키거라."

"......면목 없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었다. 술 먹고 뻗어버린 손주가 뭐가 예쁘다고 꿀물이란 말인가. 이런 건 되레 이쪽이 챙겨서 드려야 하는 건데. 이걸 어머니가 아신다면 분명 난리가 나겠지. 마른침을 삼킨 영도는 그릇에 입술을 대고는 천천히 액체를 마셨다.

미지근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목구멍으로 잘 넘어갔다. 시원하게 마지막 한 방울을 다 넘긴 영도는 긴 한숨을 쉬었다.

"맛있다."

"자연산 꿀이다. 귀한 거야. 내 특별히 부탁을 해서 좀 얻어 놨다. 나중에 서울 갈 때 좀 챙겨주마."

"아니에요. 귀한 건 할머니가 드셔야지요."

"살 날 얼마 안 남은 나 같은 노인보다는 앞으로 갈 길이 창창한 너희들이 먹는 게 더 낫지. 또 그게 옳은 거기도 하고 말이야."

"아이고. 할머니.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완전 황송해 죽겠다. 무릎을 꿇고 앉아선 바닥에 양 손을 올린 영도는 연신 굽실거릴 따름이었다. 그런 영도의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고목환 여사는 손주의 등을 두어번 토닥였다.

"아직은 좀 힘들테니 쉬었다가 나오거라. 출출해지면 밥상 차려주마."

"죄송합니다. 금방 추스르고 나갈게요."

"천천히 나와도 된다. 어차피 쉬러온 걸 테니 말이야."

할머니는 그릇을 들고 마루에서 일어났다. 영도는 갑자기 떠오르는 것에 황급히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할머니. 수인이는요?"

"아침에 밥 먹고 마당 좀 쓸더니 밖으로 나갔다. 산책을 하러 간 것 같았어."

"산책이요?"

도대체 몇 시부터 일어났던 거지? 분명 영도의 기억으로 수인은 이쪽보다 더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아있었다. 술을 마시지 말라고 말려도 간간히 어른들의 술을 모두 받던 수인이 아니던가. 마신 걸로 따지면 이쪽하고 비슷비슷하게 마셨을 텐데.......

"난 가본다."

할머니의 말에 영도는 재차 고개를 꾸벅였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된 영도는 이불 위에 앉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누군가 보면 넋 놓은 모습이라고 말을 할 만한 얼굴이기도 했다. 실제로 반쯤 풀린 눈을 하고 있던 영도는 다시 누웠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고는 눈을 감았다.

온돌방이라서 그런 걸까. 뜨끈뜨끈한 열기가 직격으로 올라와서 참 좋았다. 온 몸이 노곤해지는 걸 느끼며 긴 한숨을 토해내며 영도는 중얼거렸다.

"좋다."

머리가 아프고 속은 울렁거리지만 이렇게 누워있으니 아무래도 좋기만 했다.

다소 영감탱이 같지만 마냥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눈을 반쯤 감은 영도는 가물가물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수인이 이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를 갈 거면 이쪽도 깨워야 할 거 아니야. 마냥 자게 놔두면 어쩌자는 건데. 여기는 수인이 계속 살았던 장소여서 안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혼자 다닐 수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신경이 쓰인다. 마냥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던 영도는 바로 일어났다.

"아이고 속이야."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착착 이불을 접어 장 안쪽에 넣고 그 앞에 있던 가방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세수를 할 때 필요한 것들을 챙겨들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도 없었다. 문을 다 열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피부에 닿는 찬 기운은 상상을 초월했다. 방심 상태로 나왔던 영도는 당장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우와. 추워."

정말 완전 추웠다.

몸을 움츠린 채로 영도는 어렸을 적의 기억에 의지한 채로 종종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욕실을 찾아야 했다.

그건 분명 이 거대한 저택을 빙글 돌아서-.

"워매. 영도 일어났냐."

구수한 감탄사에 영도는 그대로 굳어선 고개만 뒤로 돌렸다.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노인이 양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 기억 나냐. 니 작은 고모할미다."

"물론 기억하지요. 오랜만에 뵈어요."

거짓말이었다. 고모할머니라 해도 가물가물하기만 하지 바로 이렇다 할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고모할머니라는 분이 한없이 낯설고 이상하게만 여겨졌지만 애써 그걸 감춘 채로 있으려니 그녀가 영도의 허리를 토닥였다.

"어제는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술 진짜 잘 마시더만. 노래도 잘 하고. 마을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더라. 내 어찌나 어깨로 힘이 들어가든지. 내 친구들도 다 부러워한다니까. 부러워하려면 하라지. 그런다고 해서 너같이 잘난 놈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너 참말로 잘 생겼다. 어렸을 적에도 인물이 훤하드만 지금은 완전히 꽃이 폈네. 사내 대장부는 서른부터라는 말이 있제. 너도 앞으로 더 인물이 훤해질 거다. 그러면 예전 느그 할아버지처럼 여자들이 엉덩이 뒤를졸졸 따르게 되겠지. 그 때가 제일 중요한 거다. 얼굴만 반반하다고 해서 다 좋은 여자가 아니어. 일단은 차분하고 인내심이 있고 엉덩이가 탱탱한 여자가 최고여. 그래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당게. 딱 너 닮은 고추 열 개만 낳아라. 그게 바로 느그 할머니한테 효도하는 거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다. 알겠지? 아이고. 어쩌면 이렇게 보면 볼수록 잘 생겼냐."

어찌 된 것이 말이 끝나질 않았다. 중간에 추임새를 넣어주려 해도 그 틈이 없었다. 세수를 하러 가는 도중에 붙잡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고모할머니의 '그러니께-.'라며 이차적인 공격이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