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1)

왜 꼭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바쁜 척을 하는 걸까 싶었는데, 그건 단순히 바쁜 척이 아니라 정말 바쁘기 때문이었다. 느슨하게 보이는 것 같은 시경도 연말에 마냥 손을 놓고 편하게 있을 수 없어 의자에 앉아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해서 같은 걸 읽고 보고, 간간히 컴퓨터를 두드릴 따름이었다. 워낙에 느린 행동이었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정말 일 하는 거야?'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을 하는 도중에 시경은 인터폰 소리에 그쪽으로 손을 뻗어 붉은 버튼을 눌렀다.

"왜?"

[사장님. 전화 받아 보세요.]

"누군데?"

[친구 분이세요.]

인예가 친구로 말하면서 전화를 바꿔주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녀석인가. 바로 파악을 끝낸 시경은 돌려진 전화를 받았다.

"강이냐."

[그래. 일은 대충 해결이 됐다는 걸 알려주려고 전화 했다.]

"대충이라. 그 녀석 죽이면 안 되는데."

준식이 영도의 스토커이고 그로 인해 수인을 납치한, 정말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물론 그 해프닝은 3시간 45분 만에 정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생판 모르는 남이라면 류강이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을 테지만 준식은 쫌 달랐다. 그래도 지난 몇 년 동안 충실하게 일하는 척이라도 했으니 말이다.

시경은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워 넣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고민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고민하는 척 하지마. 언제나처럼 내 식으로 처리한다.]

"그러면 편하고 좋지. 완전히 질려서 두 번 다시 이쪽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류강에게 당한 놈들은 그날 부로 이민을 준비한다. 더는 한국에서 살 수 없을 만큼 질려버린 것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살고 있다가 재수 없어서 류강과 마주치게 되는 상황 자체를 꺼려하는 걸지도 모르지.

뒤처리에 관해선 도가 튼 류강이었다. 이쪽이 일부러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게 참 편했다.

"바로 찾아내줘서 고맙다. 덕분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었어. 돈은 계좌로 보낼게. 그러면 다음에 보자."

[단순히 돈 계산으로 끝낼 생각인가.]

이것 봐라? 시경의 한쪽 눈섭이 위로 올라갔다.

류강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그 속내를 알 것 같았으나 시경은 모르는 척 말했다.

"이번에 우리 건드린 애들이 꽤나 똥줄 탈거야. 거한 선물 들어오면 그 중에 한 개 정도는 넘길게. 그러면 되나?"

[네가 먼저 보고 나서 골라낸 것들 중에서 변변한 게 남아있을지 모르겠군.]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해. 걱정하지마. 섭섭하지 않게 쳐줄 테니까."

[그러지 말고 나중에 내가 선택하는 거로 하지.]

그 순간 시경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상한 말 하지마. 이번 일이 건수가 좀 되는 거라고 했지만, 그걸 빌미삼아 내 뒤통수치려고 하면 그 때는 서로 재미없어 질 거야."

속삭이듯 하는 목소리 안쪽으로 웃음기가 묻어났다. 별거 아니라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으나 들리는 모든 게 전부가 아님을 류강은 알고 있었다. 상대편이 입을 다물고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었다. 짧지 않은 침묵 후, 류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이번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지. 다음에 또 연락해라.]

"너에게 연락을 취할 만한 일이 터지기 않기를 바라고 있어."

[그러면 좋겠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거지. 그러면 수고하도록 사장님.]

뚜. 하고 전화가 끊긴 음향을 듣고 나서야 시경은 긴 한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더럽게 분위기 잡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이 녀석이 사장님이라 하면 좀 오싹 하단 말이야."

느낌 탓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전화를 끊은 시경은 눈을 내리떴다. 컴퓨터 화면을 봐도 바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의자를 옆으로 물리고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시경은 생각했다.

이번에 인사이동을 들어갈까.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지론이 있어 두었더니 결국 이런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준식같은 경우인 건 아니겠지만, 한 번씩 자리를 바꿔줌으로 인해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드드드. 하고 울리는 소리에 시경은 책상 위를 살폈다.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웬 놈이 무례하게 연락인가 싶어 굳은 얼굴로 있던 그는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액정에 뜬 이름은 돈나무였다. 

"오우. 나의 슈퍼스타님. 지금 어디야?"

[병원인 거 빤히 다 알면서 괜한 건 묻지마.]

나직하게 쉰 목소리에 시경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목소리가 좀 그러네? 많이 피곤해?"

[많이 피곤하진 않아. 내가 너한테 전화를 한 건 월요일까지 어디 좀 다녀올거라는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야.]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 다른 곳에 숨어 있으라는 말은 안 했던 것 같은데."

[그게 그거지. 수인이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하니까 꼭 필요한 일이야.]

수인을 거론하는 순간 시경의 미소가 살짝 어긋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수인은 천하의 시경도 마음이 쓰였다. 아마도 똑바로 사람을 바라보는 수인의 당돌함이 마음에 들기 때문일 터였다.

게다가 이번 일은 그야말로 재수가 없어 휘말린 거라고도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입장인 수인이니 챙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인인 어때?"

[생각보단 나쁘지 않아.]

"친구 녀석한테 들었어. 이번에 수인이 침착하게 잘 대응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일이 수월하게 처리됐다고 하던데."

[뒷마무리는 그 친구라는 사람이 다 하는 거야?]

"돈 받고 하는 일이 그것 외에 달리 있겠어?"

나중에 다른 말 할 수도 있는 뉘앙스라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지금은 괜찮으니 뭐. 그렇게 넘겨버린 시경은 볼펜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펜으로 책상을 꾸욱 누른 그는 입 안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던 말을 간신히 토해냈다.

"이번 일은 내 실수다. 미안하게 됐다. 수인이한테도 그렇게 전해줘."

[일부러 전달할 필요는 없어. 수인인 이번 일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야. 살다 보면 생길 수도 있는 일들 중에서 아주 조금 특수한 경우일 뿐이라고도 말했어.]

"정말로 그런 말을 했어? 대인배네?"

[그래. 대인배야. 나나 너하고는 많이 달라.]

묘하게 뜨끔한 말이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던 시경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아주 긴 한숨과 동시에 뒤로 고개를 젖혔다. 문득 지난 날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경은 중얼거렸다.

"너랑 내가 몇 년간 일했지?"

[그런 건 왜 갑자기 물어.]

"아니. 그냥. 너무 오래 일해서 그간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치게 무례했던 게 아닌가 싶어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지금 영도는 '이 놈이 왜 이래? 약 먹었나?'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영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말든 지금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행동할게. 우린 앞으로도 계속 협력하면서 일을 해나갈 사이잖아. 어디를 갈 건지 지금 당장은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내일 정도에는 문자로 전해줘. 괜히 그쪽으로 사람들 가서 성가시게 굴지 않도록 손 써줄 테니까. 그리고 월요일 전에 올라와. 원래 연말 2주가 가장 빡센 법이잖아. 그 때 네가 빠지면 그건 콩나물밥에 콩나물 대가리가 빠진 격이지."

[넌 비유를 해도 꼭.......]

한마디 더 붙이려는 건가 싶던 영도이나 긴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내가 정말 널 당해낼 수가 없다.'라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영도는 그렇게 알고만 있으라는 말을 전달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영도와 통화를 끝낸 후 시경은 쉽사리 핸드폰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산 세월은 그리 길지 않아도 눈치는 남들 못지 않게 좋은 시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수인이 납치가 되었을 때에는, 그답지 않게 긴장했었던 것 같다. 이번 일이 좋게 해결이 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영도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소소하게 부딪치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별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건 모두 수인 덕분이었다.

지금 영도와 수인은 함께 있었다. 그 때 수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존재가 영도의 진정제 역할을 한 건 분명했다.

알게 모르게 만만치 않구나 싶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이쪽 모르게 영도와 그 맹랑한 꼬맹이가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었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시경은 펜을 내려놓으며 허공으로 긴 한숨을 날렸다.

"나도 연애나 해볼까."

뜬금없는 중얼거림을 내뱉는 순간 시경의 얼굴은 더 칙칙하게 변했다.

말로 한 것을 본인이 들음으로 인해 조금 더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이 나이와 외모와 재력에 애인 하나 없다는 게 말이다.

"또 왜 멍 때리고 계세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경은 고개를 들었다. 깐깐한 인상의 인예가 버티고 서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괜히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다. 실제로 부비적 대볼까 싶었던 시경이었으나 인예는 들고 온 것들을 하나 하나 책상 위에 내려놨다.

"인터뷰 요청 건이에요. 하시려면 하고 말려면 마세요. 그리고 이건 방송국 인터뷰 요청자료들이고요."

금방 책상 위로 일거리가 쌓이기 시작한다. 싫은 얼굴을 하는 시경을 압박하듯 인예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 일로 원혁씨 CF와 관련해 계약해지요청이 2건 들어왔고, 5곳에서는 새로 계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어요. 이번 기자회견이 젊은 층들에게 어필한 것 같아요."

자극적인 일들이 많이 터지는 세상이다 보니 일반적인 스캔들 가지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하지만 생방송 회견에서 보여준 영도의 살짝 꼬이고 빈정대는 모습은 젊은 층에 크게 어필을 했다. '원혁이 그런 느낌의 배우인 줄은 몰랐다.'라는 게 대부분의 평가였다. 이유라 측의 입김이 작용한 CF는 끊겼지만, 그보다 더 많은 계약 문의가 들어왔으니 타격을 입을 요소도 못 되었다.

여기까지 말하면 뻐기듯이 '감히 우리 애들을 잘라? 놈들이 미쳤구만.' 같은 말을 해야 할 시경이 묘하게 조용했다. 턱을 괸 그는 먼 허공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정말 왜 이러나 싶었던 인예의 잘 정리된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사장님. 앞으로 돈 들어온다는 말하고 있잖아요. 왜 그렇게 심드렁하세요."

"인예씨. 나랑 사귈까."

"싫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거절은 시경의 자신감을 박탈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평소 본인의 행동은 생각지도 않고 거절을 하는 인예가 너무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던 시경은 '에이~'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드렸다.

"왜 나랑 사귀기가 싫은 건데?"

"사장님 같은 사람하고 사귀면 반나절 만에 복장 터져서 죽을 것 같거든요."

알듯 말듯 한 대답은 시경의 입을 막아버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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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여행 중의 백미라 한다면 주저 없이 기차를 뽑을거다. 버스와 다르게 막히는 거 없이 레일을 주욱 달리는 기차에 있다 보면 이런저런 보기 좋은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고 동행한 사람과 다정하니 대화를 주고 받을 수도 있었다. 집에서는 몰랐던 삶은 계란의 특별한 맛도 경험할 수 있고, 오징어와 과자 그리고 도시락이 얼마나 맛있는 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라서 입으로 맛있는 게 들어가고 배가 부르면 만사 다 오케이인 상태가 되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옆 자리에 마음을 준 사람이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계기가 별로였다곤 해도 막상 기차에 몸을 싣게 되자 두 사람은 느슨해져서는 남들 보기엔 알콩달콩하게 잘 놀고 있었다.

"이것도 좀 먹어봐."

영도는 수인의 입 앞으로 버터를 바른 야들야들한 오징어 다리를 내밀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긴 해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배불러요."

"이런 건 배불러도 들어가는 거잖아."

영도는 수인에게 권했던 오징어 다리를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면서 무척이나 맛있게 먹어댔다. 지금까지 꽤 먹은 것 같은데도 계속 뱃 속으로 들어가니 신기하기도 했다.

영도는 아까부터 들뜬 모습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하나 하나에 반응을 보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어린애 같은 반응이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당연히 좋지. 이런 식으로 기차 타고 여행하는 건 스무살 때 이후로 처음이야. 그래서 되게 신선하고 재미있어."

별 거 아닌 일인데도 묘하게 들뜨고 기분이 좋았다. 실제로 지금 영도는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점잖치 못한 모습이었으나 들떠선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게 되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뵈러 가는 거야. 어떤 모습이실지 궁금하네."

"여전히 정정하세요. 아마 이렇게 형이랑 둘이 나타나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괜히 심장발작으로 넘어가시는 거 아니야?"

"담담한 모습이실 지도 몰라요."

문간에 서서 '영도 왔냐.'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실 수도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금방 지은 밥을 먹이고 나서 잘 익은 대봉을 꺼내주시겠지. 고구마를 내놓고는 밤이 샐 때까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실 수도 있었다.

할머니 곁을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묘하게 설레는 느낌이 든다. 서울과는 다른 공기 때문에 유독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공기가 맑아지는 것 같아요."

"그게 느껴져?"

영도는 킁킁 거렸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공기가 이 공기지. 그런 느낌으로 오징어 다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살짝 맥이 풀린 상태이기 때문일까. 유난히 영도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런 본인의 상태를 알기나 할까 싶었던 수인은 살짝 웃었다.

"하룻밤만 자보면 바로 느껴질 거예요."

"그래? 그러면 한 번 확인해 봐야지."

영도는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병원에서 수인이 간단한 혈액검사를 할 수 있도록 한 후, 영도와 함께 맨션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움직였기 때문에 지용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어도 뭐라 묻진 않고 잘 다녀왔느냐는 말만 할 따름이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영도와 수인은 같이 목욕을 했다. 왜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따스한 물을 받은 욕조에 들어가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렇다 해서 야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다. 영도는 수인의 몸을 꼼꼼하게 씻겨줬고 수인은 영도에게 한쪽 손을 내민 채로 가만히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인을 깨끗하게 씻겨준 후에, 영도가 직접 밥을 차려 수인에게 먹였다. 무척이나 조용했지만 그래서 좋았다. TV 같은 것도 틀지 않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커피와 녹차를 마시는 간간이 대화를 나누다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짐을 챙겼다.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이라 해도 평소 화려한 영도였기 때문에 큰 가방 2개가 그득 채워졌다. 수인의 경우 작은 손가방이 전부였다. 시골집에 원래 짐과 옷가지가 있었으니 달리 챙겨갈 것들은 필요 없다는 게 수인의 생각이었다.

짐 정리를 한 후, 둘은 다시 세수와 양치를 하고 치료에 들어갔다. 수인이 다친 곳은 군데군데 많았다. 얼굴 치료를 끝내고 나니 손목도 걸리고, 그걸 끝냈더니 무릎과 등에도 자잘한 상처가 있었다. 모두 목욕을 시킬 때 봤던 것들이라 수인이 '그런 곳에도 상처가 있나?' 싶은 곳도 군데군데 있었다.

손목을 잡은 영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 자식. 역시 직접 손을 봤어야 했던 건데.'라고 말하고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수인은 참으라는 듯 영도의 머리를 두어번 쓸어 올렸다. 고개를 들어 수인을 바라보던 영도는 짧은 한숨을 쉬었고, 조심스럽게 수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붙어 있다가 둘은 나란히 침대로 들어갔고, 새벽 일찍 첫 기차를 타고 강원도로 향하고 있었다.

평일이라 해도 연말이고, 방학 시즌이기 때문인지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은 많아도 가장 좋고 구석진 곳에 앉아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영도의 존재를 알아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조심하려고 누가 지나치면 목 티를 위로 올리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기 때문에 더더욱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라는 건 물론 영도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간간이 영도가 신경 쓰이는 몇몇이 흘깃거리는 것 같았다.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명인하고 같이 다니기는 힘들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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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내리고 버스를 한 번 더 타고 나서야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내 춥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으슬으슬하게 올라오는 한기도 그렇고 평균 사이즈에 맞춘 버스에 오래 앉아있었던 것 때문인지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우와. 뻐근하다."

"쉬었다 갈래요?"

기지개를 하던 영도는 옆에서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눈을 내리떴다. 짐을 옆에 둔 수인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보다 더 피곤해해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데.

"넌, 괜찮아?"

"뭐가요."

"아니. 그게....."

그걸 꼭 부끄럽게 말로 해야 한단 말인가.

하고 난 다음 날 험한 일을 당한 수인이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해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으니 피곤해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은 담담한 눈빛이었다.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수인의 앞에 대고 이런저런 말을 길게 할 수 없어진 영도는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점심시간은 좀 지나가긴 했는데 뭐 좀 간단하게 먹을까? 아니면 바로 들어갈까. 택시 타고 가면 몇 시간이나 걸릴까나."

"점심은 먹지 말고 그냥 들어가도록 해요. 그리고 연락 했으니까 금방 오실 거예요."

"무슨 연락?"

영도는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벅였다.

지금 영도와 수인은 읍내의 작은 고속 터미널 앞에 서있었다. 지나치는 건 대부분이 지역 사람들이었다. 순박한 차림을 한 이들 사이에 서있는 영도나 수인, 둘 다 눈에 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추웠던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종종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수인도 그들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도 이쪽이 하는 말을 잘 모르겠다는 듯 귀엽게 구는 영도를 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터미널 안쪽으로 작은 트럭이 들어왔다. 인위적으로 개조를 한 건지 뒷면 짐 트렁크의 양 옆과 천장으로 엉성한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수인은 그 트럭을 가리켰다.

"저기 오네요."

"뭐가 온다는 건데?"

영도는 수인이 가리키는 걸 바라봤다. 처음엔 트럭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가 온다면 좀 근사한 차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레 그런 것들만 타고 다녔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건 트럭 하나 뿐이었고, 이윽고 수인이 말하는 게 저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앉을 자리라 해봤자 조수석 한 자리 뿐이었다. 그러면 두 사람 중 하나는 어디에 앉아야 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수인을 내려다봤다.

"저걸 타고 가자고?"

"나름 재미있어요."

어깨를 으쓱인 수인은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대고 더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트럭은 두 사람 앞에 멈췄고 곧장 문이 열리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50대 중반의 사내가 내려왔다. 사내가 손을 크게 들며 '수인아!'라고 외치자 수인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냐. 내가 너희들 데려 가려고 왔다."

너희들? 영도는 사내가 수인 뿐만이 아니라 이쪽도 지칭하는 것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분명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할머니 댁으로 가기로 했던 거 아니야? 그것에 대해 묻고 싶어도 수인은 아저씨라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따름이었다. 수인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던 사내가 영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환하게 웃는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는 짐에 손을 댔다.

"가지고 온 건 이것들 뿐인가?"

"아, 예. 그렇습니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먼저 손대는 사람이 옮기면 되지. 됐네. 가만히 있게."

가만히 있으라 해서 정말 그리 할 순 없었다. 영도는 다른 짐들을 모두 들어서 트럭 뒤쪽에 집어넣었다. 나무판자로 엉성하게 오른쪽, 왼쪽, 그리고 천장을 살짝 고정해 논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보다는 깔끔하긴 했다. 이런 식으로 개조를 하는 건 불법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영도는 안쪽으로 짐을 주욱 밀어냈다. 그러자 사내가 당장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럼 바로 달려볼까. 타게나."

"아니. 타라고 해봤자........"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요.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어색하게 서있으려니 사내는 신경 쓰지 않고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이쪽에게 타라는 말도 없었다. 저렇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당황스러웠던 영도는 수인을 찾았다. 그런데 수인이 서있던 곳이 텅 비어져 있었다. 어디로 간 거야?

"뭐하고 있어요."

수인이 사라졌다면서 당황해하던 영도는 수인의 목소리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트럭에 이미 올라탄 채로 수인이 영도에게 손짓을 했다.

"어서 올라와요."

영도는 수인이 서있는 곳을 확인했다. 지금 수인은 차 안쪽이 아니라 짐칸에 서있었다. 거기에는 짐 같은 것만 넣어두는 게 아니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물었다.

"올라오라고? 우리 거기에 타고 가는 거야?"

"물론이지요. 달리 앉을 데도 없잖아요."

"한 자리 있잖아. 네가 가서 앉아. 여기는 너무 추워."

"의외로 안 추워요. 그러니까 빨리 올라와요. 성질 급한 아저씨라 바로 시동걸 거 예요."

수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르릉. 하는 소리가 울렸다. 트럭이 덜덜 떨리는 걸 본 영도는 급히 짐칸에 올라탔다. 이리로 오라는 수인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자 수인이 어디서 꺼내온 건지 알 수 없는 신문지와 돌돌만 천을 바닥에 깔고 앉았다.

말은 안 해도 눈빛이 뜻하고 있었다.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영도는 수인의 옆으로 가서 앉고는 세운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동안 차가 움직였다. 달리 잡을 것도 없어서 몸에 힘을 딱 준 채로 뒤로 몸을 기댔다. 그러는 동안 옆에 엉성하게 세워진 가방들이 달칵거린다.

"할머니가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수인의 중얼거림에 영도는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그는 지금 이런 상황이 낮설기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이동하는 게 과연 잘 하는 일인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거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영도는 멍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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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럭저럭 버틸만 했지만 속력이 붙자 안쪽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강원도 시골 산골의 무르익은 칼바람이었다. 서울의 꽃샘추위는 저리 가라는 수준이었다. 정말로 바람에 피부가 베일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아래 입술을 깨문 채로 몸에 힘을 딱 주고 있던 영도이나 점점 힘겨워진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어떻게든 바람이 덜 들어오게 하고 있었지만 힘들었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찔끔 나온다. 완전 추웠다. 너무너무 추워서 입 돌아가도 모를 것 같았다. 영도는 어금니를 악문 채로 힘겹게 중얼거렸다.

"퍽이나 재미있는 걸."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이쪽과 전혀 다른 태연한 목소리에 영도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수인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다리를 세우고 있었다. 이쪽보다 덜 몸을 움츠리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유가 넘쳐 흘렀다. 두어번 깜박이는 눈이 말하는 것 같다. 고작 이런 추위로 우는 소리 내지 말라고 말이다.

겨울바람 가지고 징징대는 건 싫지만 추운 건 추운 거였다. 난 곱게 자라서 이런 추위가 익숙하지 않다고. 촬영 갈 때에도 사방이 막힌 차가 맨션 입구에서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고. 야외 촬영을 나가면 이동 스토브나 전자난로와 담요 같은 건 옵션이었다고. 나 나름 귀한 사람이야.

여러 가지 항변들이 머리 속을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다 쓸데없는 거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딱 한마디만 했다.

"나 얼어 죽을 것 같아."

영도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영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선 아래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말로 표현을 하기에 앞서 그 모습만 봐도 춥다는 게 느껴졌다. 영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인은 손을 들어 영도의 뺨에 댔다. 손이 닿았을 때 영도는 움찔했지만 피하진 않았다.

이렇게 만져줘도 따스함은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인이 느끼기에도 영도의 뺨은 정말 찼다. 어쩌면 강원도의 추위가 안 맞는 걸지도 몰랐다. 수인은 영도 쪽으로 몸을 붙이고 그의 몸을 양 팔로 끌어안았다.

"이러면 좀 나아요?"

영도는 수인 쪽으로 고개를 숙이곤 눈을 감았다.

"......괜찮아졌다고 말해야 하는 타이밍인 건 알겠지만 미안. 그래도 추워."

"그러면 이거라도 덥고 있어요."

이번에 수인은 한쪽에 있던 봉지에서 진녹색의 담요를 끄집어냈다. 그걸 내밀자 영도가 고개를 든다.

"지저분하지 않아요. 아저씨 차 타고 이동할 때 몇 번 꺼내서 사용한 적 있던 거예요. 동네 사람들도 사용하는 거예요."

지금이라면 지저분한 거라도 상관없었다. 영도는 담요를 펼쳐서 뒤집어썼다. 혼자는 덮지 않았다. 수인의 몸에도 둘러줬다. 처음에는 괜찮다 말하면서 몸을 뒤로 빼던 수인이나 영도가 고집스레 걸쳐주자 가만히 있게 되었다.

둘이서 담요를 덥고 있으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추웠다. 자꾸만 춥다는 말만 하면 무드가 없는 것 같으나 정말 궁금한 부분에 대해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넌 안 추워?"

"추워도 익숙하니까요."

눈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오고 엄청난 추위가 급습을 해도 그저 '예전에 있었던 일' 중에 하나인 게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그 일로 새삼스레 당황을 하거나 놀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영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요. 우리들은 익숙하니 괜찮은데 아닌 사람들한테는 힘들 거예요."

"응. 그래서 내가 지금 힘들어."

크게 고개를 끄덕인 영도는 부리부리하게 눈을 떴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도착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영도가 쓰러지거나 하는 건 아닐까 싶어 괜히 걱정이 되었던 수인은 몸을 뒤로 돌렸다.

"여기에 앉아서 이동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에요. 그래서 형한테도 알려주고 싶었는데 무리인 것 같네요. 이 추위는 서울 사람들에겐 힘들거예요."

슬슬 수인은 본인이 욕심을 부렸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뒤에서 유리창을 두어번 두드리자 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 틈을 타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짐칸 쪽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고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냐?"

"앞으로 가서 앉아도 될까요? 좀 춥네요."

"오늘은 좀 풀린 날이야. 그런데도 추워? 수인이 너 서울 다녀왔다고 약골 다 됐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수인이 추운 게 아니라 이쪽 때문이었다. 하지만 솔직해질 수 없었다. 가만히 있는 동안 수인이 영도를 돌아보며 내리라 말했다. 하지만 거기는 분명 한 사람이 앉을 자리였는데. 그런 생각이 전해진 건지 수인이 차분히 말했다.

"눌러 타면 3명까지는 앉아요."

대체 어떤 식으로 눌러 타면 되는 건데.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영도는 담요를 자리에 두고 뽈뽈뽈 걸어 나왔다.

일단 운전석에 사내가 앉고 그 옆에 보조석을 내리고 수인이 앉은 후, 영도가 끼워 탔다. 처음에는 엉덩이 한 쪽만 올라가면 끝이라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누르자 셋이 다 탈 수 있게 되었다.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수인은 영도 쪽으로 다리를 붙이고 있었다. 다른 놈이 이런 식으로 밀착을 했으면 당장 주먹부터 날렸을 터였다. 하지만 수인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수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싶은 영도였다.

"좁아도 참게나. 금방 도착할 테니까."

수인의 자리가 불편해 보여서 그쪽을 보고 있었던 영도는 사내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도는 이미 얼굴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준수한 영도와 머리가 많이 짧아진 수인을 번갈아 본 사내는 '이리 보니 닳았네.'라고 중얼거리며 시동을 걸었다.

한 3분 정도 갔을까.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인이 서울 생활 이야기 좀 해봐라. 재미있는 일 있드냐."

"낯설어서 바깥으로 많이 다니지 못했어요. 집에서 있던 적이 많아요."

"하긴 서울 내려간 지 이제 한 달도 안 됐지. 다들 내색은 안 해도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단다. 할머님도 마찬가지야."

익숙하고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사라지면 처음에는 몰라도 점점 빈자리를 실감하게 되는 법이었다.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또래 중에선 가장 구김살이 없고 착실하고 할머니에게 잘하는 수인에게 모두가 호감을 품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게 수인에게 있어 잘 된 일이라 생각은 해도 그 빈자리가 점점 커지자 보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그와는 다른 의미로 영도의 존재도 사내가 보고 싶어 하던 존재였다.

"거기 총각은 서울에서 유명한 배우지?"

서울에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 굳이 정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영도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나중에 싸인 좀 해주면 안 되겠나? 우리 손녀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원하시면 해드리겠습니다."

"원하시면 해주겠다니. 역시 서울 사람이라 다르네. 말투에서 기품이 느껴져."

진심으로 감탄을 하는 걸 보아하니 일부러 빈정거리는 건 아니었다.

영도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사내는 차선을 바꾸며 물었다.

"이번에 큰일이 있었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다들 하는 말을 들어보니 좋게 끝났다고 하는 것 같던데 정말 그런가? 원래 자네들 사람들하고 우리들은 사는 세계가 다른 거잖아."

"아닙니다.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정말 큰 차이가 없는 건가?"

아주 큰 차이가 없다곤 할 수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불편한 화제였다. 그냥 조용히 차를 타고 갔으면 싶은 게 영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내 조용히 있던 수인이나 이제 슬슬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았는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누렁이 어떻게 됐어요? 새끼 낳았나요?"

"오. 낳았지. 건강한 놈들이 무려 다섯 마리다."

"정말이요? 기분 좋으시겠네요."

사내는 입이 귀에 걸려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고말고. 너무 너무 좋다. 고놈들이 엉켜서 누워있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니까."

다른 쪽으로 관심이 돌려져 새롭게 기운이 난 건지 사내는 운전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자. 씽씽 달려볼까나. 앞으고 30분이면 도착이야."

30분이라고? 바깥에서 추위에 떤 게 30분이고, 안으로 들어와서 10분 가까이 흐른 것 같았다. 늘 하는 말은 금방 도착한다는 거였는데 앞으로 30분이라면. 어쩌면 저 30분이라는 말도 신용할 수 없는 걸지도 몰랐다. 이거 지나치게 흔들리고 좁아서 속이 안 좋아지려고 하는데.

영도는 묵묵히 위쪽에 붙은 손잡이를 잡았다. 무표정을 한 채로 있으려니 얼굴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눈을 내리뜨자 수인이 이쪽을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수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영도도 괜히 마음이 놓인다.

왜 이럴까. 수인이 바라보고 웃기만 해도 좋았다. 그래서 영도도 멋쩍은 듯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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