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31)

두어번 벨을 눌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나 조용한 걸 보면 답은 하나 뿐이었다. 사내는 고개를 돌렸고 팔짱을 낀 채로 있는 영도를 올려다봤다. 연예인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 사내는 잔뜩 기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사람이 없는 모양이네요."

"그러면 여십시오."

"......."

사람이 없는 집을 열어도 되는 건가.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용한이 웃으면서 손을 비볐다.

"제 동생 집입니다. 이 녀석이 오늘 촬영에 필요한 소품을 안 가지고 와서요. 지금 녀석은 현장에 나와 있는데 근처에 있던 저희들이 물건을 가지고 가기로 했거든요. 여기에 없는 놈한테 열쇠를 던져 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원래 이런 일은 집주인이신 분과 전화 통화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전화해도 상관은 없지만 안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장에서 뛰는 놈인지라 바쁘거든요. 게다가 보십시오. 원혁씨가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유명한 스타 원혁. 얼굴 자체로 신뢰가 가지 않으십니까? 문 따는 일 때문에 절대로 선생님께 피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촬영에 크나 큰 도움을 주신 걸로 저희들이 소정의 선물을 드릴까-하고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걸요."

"아니. 선물까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 따는 게 원래 제 일인걸요."

용한의 매끄러운 혀에 열쇠공은 금방 넘어가 버렸다. 원혁이 워낙 막강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열쇠공은 문 앞에 서선 장비를 내려놨다. 가방을 여는 걸 확인한 용한은 영도를 바라보며 윙크를 했다. 곧 문이 열릴 거야. 그리 말하고픈 사인을 보내도 영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뭘 저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 영도가 쉽사리 건드리기 무서운 상태라는 걸 알기에 용한은 핸드폰을 꺼냈다. 준식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아직도 그는 이번 일이 믿기질 않았다. 실상 준식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가장 많이 내린 사람이 용한이 아니던가. 워낙에 소심해서 스토커 같은 짓은 할 수 없을 놈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계속 통화를 걸어도 역시나 받지 않았다.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미치겠네."

혹시 정말 일 친 건 아니겠지. 스토커 짓도 문제지만 수인이를 건드리는 거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건 범죄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영도가수인에게 옷을 사줄 때에도 옆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별로 안 좋았었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준식을 떠올린 용한은 인상을 썼다.

"다 됐습니다."

열쇠공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도는 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기만 한 움직임에 용한이 '야!'라고 영도를 부르다가 열쇠공의 눈치를 보며 아하하-하고 웃었다. 영도 성격이 좀 급하다는 말에 열쇠공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기구를 집어넣은 가방을 챙겼다.

"열기는 했는데 잠그는 건 어떻게 할까요?"

"안에 여분의 열쇠가 있으니 그걸로 잠그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얼마입니까?"

"4만원만 주시면 됩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용한이 내미는 건 십만원 짜리였다. 열쇠공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거스름돈은 없는데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정말 급한 일 때문에 선생님을 부른 거였는데, 이렇게 빨리 처리를 해주셔서 너무 고마워서 그럽니다. 앞으로 이 근처에서 이런 일 생기면 또 선생님 부르겠습니다. 이 명함으로 연락 드리면 되는 거지요?"

먼저 챙겼던 명함을 지갑에 넣으며 용한은 열쇠공의 손에 수표를 건넸다. 주는 걸 받지 않을 순 없었다. '이렇게 많이 받으면 죄송해서....'라고 중얼거리는 열쇠공이나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뿌듯한 얼굴이 된 그는 가보겠다며 인사를 하곤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열쇠공이 완전히 다 내려가는 걸 확인한 용한은 냅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도 너 너무 급하게 행동하지 말아라."

영도는 신발도 벗지 않고 거침없이 거실을 걸어갔다. 용한은 질겁을 하며 양 손을 저어댔다.

"너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에 신발 신고 들어가는 건 좀 아니다."

만약의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준식이 아니라 한다면 그 때에는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 잔소리를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용한은 안쪽에 열린 방 문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앞에 서있는 영도였다. 용한은 급한 대로 영도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 신부터 벗어. 내가 현관에다 둘 테니까."

말을 하면서 잡아당겨도 영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사람 귀찮게 구는구나.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던 용한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보곤 굳어버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벽과 천장을 모두 도배한 원혁의 사진들이었다. 조금의 틈도 없을 정도로, 사진이 마치 벽지라도 되는 양 벽면을 다 깔아버렸고 그건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네모난 방에 아무것도 없이 그냥 원혁의 사진이 한 가득이었다. 코팅까지 해놓은 사진 위에 지금 올라서 있다는 걸 확인한 용한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방 밖으로 나갔다.

"이, 이게 뭐야."

밖으로 나가자 더 이상했다. 연예인 원혁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진 비상식적인 공간 안에 영도가 떡하니 서있었다. 그것이 너무도 이질적으로 여겨졌다.

"나 지금까지 여러 가지를 봐왔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소름이 끼쳤다. 스토커라 해도 이런 식으로 사진으로 온통 도배를 해 두진 않는다. 영도가 나온 DVD나 테이프, 시디 등을 사서 모은 장도 없이 그저 영도의 얼굴만이 가득한 사진들이 딱딱 붙어 있었다.

엄청난 집착과 광기가 느껴졌다.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몇몇 사진은 정식으로 발매가 된 것도 아니었다. 도촬인 것이 명백한 사진들도 간간히 보였다. 촬영 중 영도가 옷을 벗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자는 모습 등 말이다.

"미치겠네."

일그러진 얼굴로 팔을 문지르던 용한은 일단 영도를 바라봤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순 없어도 많이 화가 날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지나친 흥분은 좋지 않았다.

"영도야. 괜찮냐."

"이 새끼가 범인이야."

이 사진이 자신의 사진이었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영도가 느끼는 불쾌한 느낌을 아주 조금이나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기도 했다. 영도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으려니 그가 몸을 돌렸다.

"다 뒤져봐. 수인일 어디로 데리고 갔을 것 같은지 알아봐야 해."

돌처럼 굳은 얼굴로 하는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용한은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워낙에 작은 평수다 보니 얼마 움직이지도 않아 금방 내부를 뒤질 수 있었다. 준식은 커녕, 수인의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동안 용한은 이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유라와의 스캔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급이었다. 만약에 준식이 수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한다면. 그로 인해 영도가 빡도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난 죽었다."

영도의 몰락이 곧 자신의 끝처럼 여겨졌다. 사색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동안 영도가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놀란 용한은 급히 뒤를 따랐다.

"영도야! 기다려! 같이 가자!"

괜히 신을 벗었나 싶었다. 구르듯이 밖으로 나와 대충 구두를 구겨 신은 용한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영도의 뒤를 쫓았다. 주먹을 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영도가 무섭게만 보였다. 그의 옆을 따르며 용한은 영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흥분하지마. 이번 일은 사장님께 맡기자. 사장님이 아는 사람들 중에는 조폭들도 있어. 그 사람들에게 의뢰를 하자."

"그러는 동안 수인에게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영도는 용한의 손을 뿌리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중간에 멈춘 그가 전화를 거는 걸 본 용한은 뒷목을 잡았다. 순간적으로 혈압이 화악 올라갔다. 이대로 쓰러져도 하나 이상하지 않았다.

잔뜩 굳은 얼굴로 영도를 바라보는 동안 그가 입을 열었다.

"나야. 지금 준식이 집에 왔어. 안에 아무도 없어."

날이 선 날카로운 목소리에 영도가 전화를 건 상대인 시경이 차분하게 말했다.

[원래 범인은 본인이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 숨어들기 마련이야. 집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 있겠네. 그쪽으로 이미 사람을 보냈어.]

"거기가 어디야."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로 사람을 보냈어.]

"네가 생각하는 가장 정확한 곳 한 군데만 말해봐."

[거기에 꼬맹이가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시끄럽고. 말이나 해."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려 하고 있었다. 시경은 지금 영도가 머리 끝까지 싸하게 식은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침착한 것은 좋지만, 너무 냉정한 상태는 옳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넌 이번 일에서 빠져. 내가 알아서 찾아줄게.]

"내가 직접 경찰서 가서 신고접수 넣을까? 기자들 불러야 내가 한 번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해줄 거냐?"

걸음을 멈춘 영도는 시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단순한 협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시경의 입에서 NO 사인이 떨어지면 더 두고 볼 거 없었다. 당장 경찰서로 갈 거다. 기자들이 모여들거나 기사화되는 것쯤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 가장 두려운 건 수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만약, 정말로 수인에게 해가 갔다면.......

핸드폰을 쥔 영도의 손으로 힘이 들어갔고, 동시에 시경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알았어. 말할게. 그 녀석 아버지 창고가 포천 쪽에 있어. 여러 군데를 알아보고 있는데 그쪽이 가장 유력해. 그쪽으로 통화를 한 기록도 잡아냈어.]

"알았어. 위치는 문자로 보내."

전화를 끊고 아파트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문자가 도착했다. 먼저 그걸 확인한 후 영도는 운전석에 앉는 용한에게 내밀었다.

"이리로 가자."

핸드폰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용한은 '경기도로 가는 거냐.'라고 중얼거렸다.

가는 거야 문제가 안 되었다. 문제는 막상 도착했을 때, 어떤 현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냐는 거였다. 그로 인해 영도가 미쳐 날뛰진 않겠지. 꽤 오랜 시간을 영도와 함께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모습은 생소했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목숨 걸고 매달려야 할 지도 몰랐다. 이미지로 먹고 사는 영도였다. 어떻게든 영도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이번 기자 회견에도 많은 신경을 썼던 용한이었다. 실상 가장 피곤한 것도 그였다. 운전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건가.

"안전벨트 매라. 완전 밟을 테니까."

이 사태를 영도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용한도 그 보조를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시동을 걸면서 가야 할 위치를 입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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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시간이 조금 밖에 흐르지 않았겠지만 혼자서 가만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길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 초조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 남게 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 괜히 난리를 칠 필요가 없었다. 

어찌어찌 일어나 앉는 것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수인은 등 뒤로 양 손을 돌린 채로 똑바로 앉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진지했다. 지금은 허리와 하반신 통증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이 일을 어찌 해결을 하나 싶어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 속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 당장 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누구라도 나타날 거라 믿고 있었다. 영도 아니면 준식이라는 사람. 그도 아니라면 제 3의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두둑하게 먹어둘 것을. 속이 불편해서 아침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었다. 평소에도 그런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게 유독 후회가 된다.

덜컹. 하는 소리에 수인은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했기 때문에 바람이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도 크게 들린다.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던 수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람 같은 게 문을 흔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문이 크게 움직이더니 이윽고 활짝 열리고 거기서 준식이 나타났다.

뭔가를 손에 쥔 준식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꾹 다물린 입매나 예리한 눈매 등에서 그의 분노가 전해졌다. 왜 저런 모습인가 싶어 수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까워지는 준식을 바라봤다. 그런 수인의 앞에 멈춰선 준식은 당장 주먹을 들어 수인의 턱을 후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꽤나 세게 맞았는데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한 번 더 치려다가 손을 내린 준식은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수인은 입 안을 훝어냈다. 맞을 때 대비를 하고 있었던 탓에 큰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상했다. 자연스럽게 목소리 톤이 가라앉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요. 묶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어째서 나한테 원혁씨의 전화가 온 건데! 이런 어정쩡한 시간에! 오늘 난 감기몸살로 하루 쉬는 거였다고! 그러면 절대로 나한테 연락 같은 거 취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전화를 한 걸 보면 분명 네가 뭔 짓을 한 거야!"

단정적으로 말한 준식은 수인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두어번 세게 흔들리자 머리가 울린다. 통증에 인상을 쓴 채로 수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준식을 바라봤다.

"난 계속 묶여 있었어요. 게다가 핸드폰도 없어요. 형한테 달리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시끄러워! 입 다물어!"

핸드폰을 쥔 손으로 재차 수인의 머리를 후려친 준식은 손을 놓았다.

팔짱을 낀 그는 초조한 듯 수인의 앞을 왔다 갔다 했다. 핸드폰을 몇 번이나 확인하던 그는 '알아챘나? 아니면 일 때문일까? 도대체 왜 전화를 한 거지? 용한 그 뚱땡이는 왜 또 전화를 건 거야?'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는 정신이 좀 없어보였다.

수인은 목구멍 안으로 넘어오는 피를 침착하게 삼켰다. 그 때 준식이 고개를 들어 수인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수인의 머리를 잡아 옆으로 눌렀다. 다시 소파에 쓰러지게 된 수인은 괜히 몸에 힘을 주고 버티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뒤로 손을 넣은 준식은 소파와 수인의 손목을 고정한 끈을 풀어냈다. 그리고 수인을 걷어차 소파 아래로 떨어뜨렸다.

"일어나!"

잠자코 있던 수인은 위로 고개를 들었다. 엎드린 채로 얼굴만 드는 것에 준식은 재차 호통을 쳤다.

"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거야!"

"어디로 갈 생각인데요?"

"시끄러워! 넌 지금 내가 하는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험악한 얼굴에 불안해졌다. 지금 준식이 생각하는 게 불안한 게 아니라 그의 이상한 상태 자체가 미덥지 못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즉흥적으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일 치는 건 아니겠지.

수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손이 묶여 있어서 꽤 힘들었다. 게다가 하반신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몇 번 비틀거리긴 했지만 간신히 똑바로 일어서는 것에 성공했다.

준식은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날이 선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건 나이프였다. 나이프로 수인을 위협하며 준식은 턱짓을 했다.

"걸어가. 이상한 짓 하기만 해봐. 널 찌를 테니까."

수인은 준식의 얼굴과 그가 들고 있는 나이프를 번갈아서 봤다. 그러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재차 앞으로 턱짓을 했다. 일단 걸으라는 거였다. 수인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 준식은 지나치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일부러 문제 사항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 두라는 말을 해도 듣지 않을 터였다. 수인이 걸어가는 동안에도 준식은 초조한 듯 '도대체 왜 전화를 건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수인은 준식에게 집중했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르나 바깥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바깥은 훤했다.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열린 문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것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낡은 건물 밖으로 나온 수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 그리고 숲이 눈에 들어왔다. 숲 너머로 차 소리가 들렸다. 도로변 안쪽에 자리를 한 폐공장인 모양이었다. 수인이 잠시 멈춰 서자 준식이 나이프로 팔을 툭툭 쳤다.

"왜 멈추는 거야. 어서 움직여."

"지금이 몇 시지요?"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움직여."

"지금이면 기자회견도 끝났겠네요."

걸으면서 수인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준식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수인이 수작을 부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투였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요?"

"우리의 원혁님이 현명하게 잘 대처를 했지. 이유라 같은 거한테 원혁님은 아까운 분이야. 감히 넘봐서는 안 되는 걸 건드린 대가로 이유라 그년은 앞으로 천벌을 받게 될 거야."

이제는 무려 원혁님이라고 부르는 건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로구나.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공터 가운데에 주차된 차 앞에 섰다. 맨션 앞에서 본 바로 그 소형차였다. 준식은 뒷문을 열고 턱짓을 했다.

"차에 타."

"어디로 가려고요?"

"그런 거 묻지마."

"날 죽이지 않는다면 이번 일은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뭐라고?"

수인은 줄을 붙잡고 있는 준식을 바라봤다.

"날 죽일 생각이 없다면 이쯤에서 그만둬요. 안 그러면 당신만 손해에요. 여기까지는 그냥 장난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더 진행이 되면 그 때는 아니에요. 그 때부터는 범죄가 될 거예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준식을 자극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마냥 준식에게 끌려 다닐 순 없었다.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수인의 당돌한 말에 준식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애송이네. 넌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없어."

"그렇겠네요."

수인은 고개를 끄덕이다 열린 차의 뒷좌석을 확인했다.

"이 차에 타면 되는 건가요?"

"그래. 이제부터는 정말 조용히 해. 안 그러면 그 때에는 정말로-."

준식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잡고 있던 줄이 느슨해진다 생각 되었을 때 갑자기 수인의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멱살이 잡히고 손목을 가격 당했다.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준식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엎드리듯이 누운 준식의 위에 올라탄 수인은 뒤로 돌려진 그의 양 팔을 무릎으로 단단히 누르면서 자세를 낮췄다.

"연결된 고리를 풀면 줄은 느슨해지게 되어 있어요. 하는 일이 어설프네요."

줄 같은 걸로 단단히 고정하는 방식은 그쪽보단 이쪽이 전문가였다. 때가 되면 매년 볏짚으로 바구니 같은 걸 만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눈을 깜박이는 동안 땅바닥에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흙에 닿은 부위에서 올라오는 통증도 그렇지만 지금 일어난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준식은 성질을 부렸다.

"이, 이 애송이 놈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준식은 험악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고개만 간신히 돌아갈 뿐이고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리를 버둥거려도 팔이나 몸 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격이 크지 않던 수인인데 지금은 커다란 돌덩이가 몸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색이 된 준식은 끙끙거렸다.

"왜,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미안하네요. 난 의외로 손힘이 세요."

준식은 보기보다 힘이 약했다. 처음 준식에게 돈을 받고 물러나던 사내만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끌려오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준식의 손목을 한 손으로 잡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줄을 집었다. 그 줄로 준식의 손목을 두어번 감았다. 손목을 감싸는 느낌에 준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뭘 하는 거야!"

"못 움직이게 해야지요."

못 움직이게 한다는 말에 준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찌할까 싶었던지 입을 벙긋거리는 동안 수인은 완벽하게 그의 손목을 묶고 남은 것으로 발목까지 꼼꼼하게 묶어버렀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반으로 접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이건 내가 가지고 갈게요. 위험한 거니까."

이후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수인은 준식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놀란 준식이 당장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만둬!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는 거야!"

"이런 때에 그런 말을 하다니. 대단히 우습네요."

사람을 납치까지 했던 준식이 말이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준식을 두고 수인은 켜진 핸드폰 화면을 살펴봤다. 준식이 흥분을 하며 이리로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의 20초 단위로 전화가 찍혀 있었다. 원혁님과 뚱땡이. 그리고 귀신이라는 이름이 연달아 보였다. 뚱땡이는 알겠는데, 귀신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그리고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받지마!"

준식의 외침에 수인은 그를 흘깃 보고는 전화를 받았다. 화면에 뚱땡이라고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전화를 받는 거야!'라는 준식의 외침과 '왜 이제서 전화를 받는 거냐! 이 자식아!'라는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엄청난 목소리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용한의 분노의 외침은 계속 되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우리 다 죽일 일 있냐! 당장 이리로 안 나와?! 수인이 어디에 있어?! 지금이라도 알아서 자수하면 없었던 일로 해줄테니-. 어허! 영도야!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용한이 영도의 이름을 거론하는 순간 수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수인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댔다. 하아. 하고 수화기 반대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이어 나직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말 할 때 수인이 내놔. 내 인내심은 딱 여기까지야. 인내심 바닥 나면 나도 내가 뭘 어떻게 할지 몰라.]

어금니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절제를 하며 말하고 있었다. 간간이 아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어디에 있는지만 말하면 돼. 수인이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면 나도 더 손을 쓰진 않겠어. 하지만 만약 수인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요?"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5초 뒤에 '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분노를 하던 사람치고는 꽤나 귀여운 소리였다.

"사람 죽일 기세네요."

[......수인이?]

조용히 이름을 부르던 영도는 다음 순간 '왜 네가 받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종종 영도가 고모와 통화를 할 때 수화기를 멀리 하고는 고개를 물리는 행동을 왜 하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막으로 상당한 무리가 가기 때문이었다. 소리를 치던 영도는 다음에 미친 듯이 수인의 이름을 불러댔다. 애가 왜 대답이 없느냐고 난리를 치는 것에 수인은 폰을 가까이 했다.

"나 귀 안 멀었어요. 그러니까 작게 말해요."

[......너 정말 수인이야?]

"그러면 아닌 것 같아요?"

[틱틱대는 말투만 보면 분명 수인이긴 한데......]

그런데 왜 준식의 핸드폰에서 수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가 싶은 거겠지.

수인의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상도 하지. 영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 때 영도가 다급히 물었다.

[준식이는 그 자식은 지금 어디에 있어?]

"근처에 있어요."

[근처에 있다고? 지금 협박 받고 있는 거냐? 그런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만, 잘 모르겠어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옆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요."

수인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자세히 살펴봤다. 본다고 이쪽 지명을 바로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곳에 지금 댕그라니 놓여있었다. 정말로 준식은 혼자인 걸까. 일을 도왔던 그 이상한 사내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겠지. 그래도 아직은 모든 것이 확실치 않았다.

"조금 무서운 것 같은데요."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핸드폰 계속 들고 있어. 나랑 통화하면서 가자.]

"알았어요."

수인은 재차 주변을 둘러봤다. 무턱 대고 도로변으로 혼자 나갈 순 없는 거였다. 그렇다고 다시 저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어찌할까 싶었던 수인의 눈에 차가 들어왔다.

지그시 차를 보다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에 올라탄 수인은 바깥을 쳐다봤다. 엎드린 채로 준식이 미친 듯이 버둥대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벗어날 순 없을 터였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수인은 뒤로 몸을 돌려선 차 문의 4방향을 다 손으로 눌러 잠가버렸다. 그리고 의자를 뒤로 해서는 몸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다. 핸드폰을 쥔 채로 영도의 이름을 불렀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이쪽이 이름을 부르자 이상했던지 당장 캐묻듯이 묻는다.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 어떻게 찾아올 거예요?"

[지금 시경이한테 문자 보냈어. 핸드폰 켰으니까 위치추적 들어간다. 내가 먼저 도착을 하거나, 아니면 시경이 보낸 사람이 도착을 하든지 하겠지.]

"위치 추적이라고요?"

그건 또 뭐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을 듣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영도도 긴 설명을 할 마음이 없는지 다급히 물어왔다.

[아무 일도 안 당한 거지? 괜찮은 거지? 너 지금 몸 상태 안 좋잖아.]

평소의 몸상태가 100이라 한다면 지금은 65정도였다.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한다고 더 떨어졌을 지도 몰랐다. 바로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동안 수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따끔한 통증이 퍼졌다. 준식에게 호되게 맞은 부위가 부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멍이 들 텐데. 손으로 뺨을 만지작 거리면서 수인은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저 이상한 냄새를 맡고 기절했다가 눈을 떴을 땐, 몸이 이상하긴 했어요."

[몸이 이상했다니? 그 자식이 너한테 이상한 약을 썼구나.]

"약인지 뭔지는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처음에는 앞도 잘 안 보이고 몸도 제대로 안 움직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점점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몸 안쪽의 은밀한 부위로 쓰라린 통증이 퍼졌다.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반쯤 감으려니 영도가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참 한숨을 많이 쉬는구나 싶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저도 몰랐어요."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작정하고 일을 벌인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인데, 그게 왜 형 잘못이에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으네요."

[그래. 이런 상황에서도 넌 침착하구나. 다른 때에는 그게 애늙은이 같았는데 지금은 안심이 되니 참 이상하네.]

"침착한 게 아니라, 애써 그런 척 하는 것뿐이에요. 정말은 무섭고 불안해요."

수인은 눈을내리떴다.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이 아주 조금씩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또래에 비해 성숙할진 몰라도 이번 일은 수인에게 있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그러다가 사고 나면 안 되니까 천천히 알아서 오도록 해요. 여기서 안 움직이고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말을 하면서도 수인은 바깥을 살펴봤다. 이렇게 통화를 하고 있는 도중에 영도가 짜잔하고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다.

[앞으로 너랑 떨어지지 못할 것 같아.]

다른 쪽으로 눈길을 주던 수인은 중얼거림에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말은 하지 말아요. 이번 일이 예외적이었을 뿐이에요. 언제나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영도는 뒷말을 흐리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이 모두 본인의 탓인양 자책을 하고 있는 걸까.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불리하고 불안한 건 수인 쪽이었지만, 침울해진 영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편치 않았다.

"형은 나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어요?"

어렵사리 꺼낸 말에 영도는 숨을 죽였다.

조용히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도 재촉은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영도는 중얼거렸다.

[내 천사였지. 첫사랑으로 기억하고 언제나 잊지 않으려 했어. .....물론 널 다시 보고 기억해내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야.]

"세월엔 장사 없다잖아요. 그리고 내가 봐도 지금의 난 어렸을 때랑 많이 달라요."

수인은 손을 꼼지락 거렸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말을 해볼까 싶어 용기를 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내 눈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듬직하게 곁을 지켜주고 있어서 세상의 손가락 질이나 이상하다는 시선들을 다 막아줬었거든요. 그러다가 시골로 오게 되었고 첫날 만난 동네 꼬마들에게 놀림을 당했어요. 당황스러웠지요. 그 때까지만 해도 전 제 눈이 이상하다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애들하고 어울리지 않게 되었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지요."

입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목 안쪽이 칼칼했다. 손등으로 턱 아래를 문지르면서 수인은 말을 이었다.

"할머니 생신날 친척들이 많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른들은 모두 다정한 분이시라 절 보고 뭐라 하진 않으시겠지만 같이 올 또래 아이들이 걱정되었어요. 혹여 그 애들도 내 눈을 가지고 뭐라 하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숨어 있다가 형을 만나게 된 거지요."

처음에는 그저 조용히 시간을 보내려 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문득 스스로가 처량 맞게 여겨지고 괜히 동네 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기억이 떠올라 서러워졌다. 그래서 훌쩍거리는 동안 영도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꾹 참으려 했다가 영도의 다정한 말들에 경계심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함께 있던 건 단 몇 시간 뿐이었지만 그게 전부가 되었다. 영도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영도가 잊지 못했듯,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영도의 이름을 거론했을 때 망설임은 짧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던 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되길 바랬던 걸지도 몰라요."

이 말을 할까 말까. 괜히 건드렸다가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내심으로 생각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 언제까지 입 다물고 조용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그래서 수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중얼거렸다.

"형하고 사촌사이가 아니게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요."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형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았거든요."

수인은 입을 다물고 영도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나 바로 무슨 말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이런 말이 갑작스럽다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멍청한 짓을 했다며 수인은 쓰게 웃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한 귀로 듣고 말아요."

[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간깐한 인간이야.]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생각 없이 너랑 이렇게 된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하고 라면 잘될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즉흥적인 감정으로는, 이렇게까지 움직이지 않아.]

연예인이고 사생활 노출에 관해선 남들보다 배는 더 예민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알면 사회적 매장도 당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선 쳐다도 보지 않는 영도였다. 그런 영도가 수인과 이어지게 된 것에 일말의 망설임이나 고민이 없었던 건, 상대가 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달리 더 긴말이 필요치 않았다.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수인은 잠자코 있었고 영도는 짤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일단은 가만히 있어. 금방 도착할 테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만히 있던 수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준식이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아주 조금은 우습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런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낯선 차 안에서 문이란 문은 다 잠가 놓고 영도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가슴을 졸이고 있으나 영도와 통화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이 두렵거나 무섭진 않았다.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형."

[왜?]

"그냥 불러봤어요."

처음에는 조용히 있던 영도이나 곧 '실없기는.'라고 중얼거린다.

수인이 편안함을 느끼듯 영도도 어느 정도 풀리게 된 모양이었다. 처음 말을 했을 때보다 한결 목소리 톤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지금 이렇게 통화를 하는 것 하나는 마음에 드네요."

이 전화가 두 사람의 유일한 연결고리라도 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절박함이 섞여서 계속 말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게끔 하는 분위기도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편안한 얼굴로 있던 수인은 차 소리를 들었다. 산 너머에서 들리는 작은 음향이 아니었다. 뭔가가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수인은 몸을 일으켜 바깥을 살펴봤다. 비포장 도로를 타고 검은 차량이 몇 개나 안쪽 공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 번에 딱딱 멈추는 차량들을 본 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인의 긴장이 수화기를 통해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영도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직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잘 모르겠어요. 잠깐 있어 봐요."

저 차량들은 대체 뭔가 싶었다. 아직은 정확하게 뭐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성급하게 굴 수 없었다. 굳은 얼굴로 바깥을 살펴보고 있으려니 가장 앞에서 멈춘 차에서 한 사내가 내렸다. 

검은 수트를 차려입은 사내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내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차에 타고 있는 수인 쪽으로 걸어왔다. 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이곤 차 옆에 멈춰 섰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로 차를 주욱 훝어보던 이는 운전석 쪽으로 넘어가 허리를 굽혔다. 안에 앉아있던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사내의 준수한 얼굴은 가려지지 않는다. 사내는 손가락을 들어 유리창을 두 번 두드리고는 아래로 까닥였다. 창문을 내리라는 거였다. 이 사내가누군지 알고 창문을 내린단 말인가. 보아하니 준식 같은 애송이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것 같은데.

[왜 그러는데? 왜 말이 없어?]

"형. 그 노랭이 사장님이 사람 풀어서 나 찾아본다고 했어요?"

[왜? 누가 왔어?]

"조직 폭력배 같은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러면 맞을 거야.]

".......그 사람 조직 폭력배하고도 아는 사이였어요?"

[이쪽 바닥하고는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야. 그나저나 어떻게 생겼는데?]

물음에 수인은 재차 사내를 바라봤다.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을 한 채로 사내는 담배만 피워댈 따름이었다.

"무섭게 생겼는데요."

[그러면 맞을 거야.]

"단순히 맞을 거라는 말로는 믿음이 안 가는데요. 누군지 정확하게 알아야 나도 상황에 맞는 반응을 취할 게 아니겠어요."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다른 차에서 내린 이들이 준식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조폭 같은 놈들에 준식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굳어있으려니 그들이 준식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는 그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 깜짝 할 사이에 차에 준식을 태웠다. 그쪽을 살피는 동안 재차 툭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이번에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창 가운데를 눌렀다.

"유리창 깨기 전에 알아서 내려라."

조용했기 때문일까. 상대의 목소리나 하는 말이 정확하게 들렸다.

그래. 목소리 톤도 딱 조직 폭력배 느낌이었다.

이런 류의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반응을 취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 재차 사내가 말했다.

"시경이가 보내서 왔다. 그러니까 얼른 나와라."

시경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수인은 잠금쇠를 풀었다. 아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내 앞에 서선 그를 올려다봤다.

차 안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인상이 강했다. 키가 영도보다 훨씬 더 체격이 좋은 듯 싶었다. 그는 분명 조직폭력배인 거겠지.

"시경 사장님하고 친구사이세요?"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단순히 돈을 주면 움직이는 거라고 볼 수 있겠지."

사내는 수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입술이 터지고 뺨이 붓고 멍들긴 했어도 다른 데는 멀쩡한 것 같았다. 납치가 되었다 해서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해두고 있었지만 수인이 태연한 모습으로 있을 줄은 또 몰랐다. 게다가 눈동자 색이 다르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던 류강은 손을 들었다.

"그래. 혼자서도 잘 한다 이건가. 나름 머리가 좋은 녀석인 것 같기는 한데."

수인의 입술 부근에 손가락을 댔다. 쓰라린지 안색을 굳히는 걸 본 류강은 손을 뗐다.

"이 정도는 알아서 아물 테지만 그 녀석이 시끄럽게 구는 건 싫으니 가까운 병원이라도 가야겠군. 지금 누구하고 통화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알려줘."

수인은 아래로 내린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걸 위로 들며 물었다.

"저희 형도 아는 병원인가요?"

"일이 있을 때 몇 번 위장 입원을 한 적이 있을 테니까 잘 알거야."

"위장 입원이라......."

위장 입원은 또 뭔가 싶었다. 수인은 핸드폰에 귀를 대고 영도를 불렀다.

"형. 아직 전화 안 끊었나요?"

[그래. 지금 누구랑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저는 잘 모르는데 형이라면 알 것 같네요. 받아보세요."

일단 류강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류강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끝으로 비벼 끄면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류강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해도 사람들 눈을 피할 순 없을 테니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반나절 동안 입원하셨던 병원 알고 계시지요. 동생분 모시고 그리로 가겠습니다. 시경이한테도 말을 해뒀으니 병원에 도착하시면 조용히 403호로 오시면 됩니다. 동생분이요?"

류강은 수인을 흘깃 봤다.

"겉보기는 괜찮은 것 같은데 왼쪽 뺨이 멍들고 입술이 터졌군요."

그 순간 엄청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류강은 바로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렸지만, 그 얼굴은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영도가 한참을 시끄럽게 굴었다. 그가 잠잠해질 즈음 류강은 다시 핸드폰에 귀를 댔다.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저 귀 안 먹었으니 살살 말씀하십시오."

그래도 영도는 시끄러웠다. 뭐라 해대는 것 같은데 수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진정하라는 듯 류강은 영도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말했다.

"일단 병원으로 갑니다. 그쪽으로 오십시오. 최대한 사람들 눈 피해서 움직일 예정이긴 하지만 혹여 걸리게 된다 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입단속은 책임지겠습니다."

거기까지였다. 류강은 통화를 끝내버리고 핸드폰을 수인에게 던졌다. 양 손으로 받아들자 그는 턱짓을 했다.

"일단 가자."

사내는 수인의 등을 가볍게 쳤다. 맡은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챙겨주는 거지. 아닌 경우라면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을 사내였다. 몇 분밖에 같이 있지 않았지만 사는 세계가 많이 다름이 느껴졌다.

수인은 사내가 내렸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건 사각 얼굴을 지닌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옆자리로 류강이 올라타자 운전석의 사내가 '출발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하며 시동을 걸었다. 의자에 몸을 기댄 수인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일도 있군요."

"뭐가."

"납치를 당한 후에 조직 폭력배분들에게 구출이 될 줄은 몰랐어요."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무슨 지적을 하려고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가 싶어 수인은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류강은 창문을 조금 내리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네 스스로 탈출을 한 거라고 말이야."

".......따지고 보면 그렇겠네요."

어쩌면 칭찬을 받은 걸지도 몰랐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류강에게서 저런 말을 들어도 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할머니 말씀대로 만만치 않은 곳이아."

이번 건 혼잣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대꾸가 없었다.

움직이는 차 속에서 수인은 잠자코 창 밖을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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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강은 수인을 403호실로 데리고 갔다. 도심 외곽 쪽에 자리를 한 병원은 그리 크진 않아도 건물 자체가 깔끔하고 사람들이 친절했다. 친절한 사람들도 겉보기에 딱 조폭 포스를 풍기는 류강을 보고는 알아서들 시선을 내리떴지만 말이다.

암만 봐도 고급 1인실인 것 같은 403호 내부를 둘러보던 수인은 뒤따라 들어온 류강에게 물었다.

"정말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진찰을 받길 원하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아니요. 아......"

진찰 같은 건 받지 않아도 된다 말을 하려던 찰나 어떤 게 떠올랐다. 이상한 냄새를 맡고 기절했던 일 말이다. 그 약품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으니 한 번쯤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기절한 게 조금 걸리는데요."

"간호사한테 말해서 혈액검사 좀 해달라고 그러지. 그 외에는 달리 없나?"

없다는 의미로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 13시 안까지 조용히 나가면 될 거다. 그 동안 병실 이용하는 대금은 미리 지불을 했으니 곧 올 네 사촌형한테도 말을 해둬. 근처에 애들 풀어둘테니까 혼자 있어도 불안해하진 말아라."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 사람은 준식을 일컫는 것이었다. 단박에 이해를 한 류강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적당히 손 봐줘서 고향이든 어디든 내려가라고 해야겠지. 개인적으로 그 놈과 풀 게 있는 거라면 말해. 주먹질 좀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지."

"아니요. 그런 건 괜찮아요."

"그러면 이제 그 녀석에 관해선 신경 쓰지 말아라. 나와 시경이 알아서 처리를 할 문제니까. 그러면 푹 쉬어라. 네 형 오기 전까진 얼음팩이라도 꺼내서 얼굴에 대고 있던가. 간다."

류강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완전히 가버린 걸 터였다. 무서운 사람인 듯 싶어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수인은 두 다리를 까닥였다.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침대에서 내려와 냉동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쪽에 있는 작은 주머니가 보였다. 손을 넣자 딱딱하고 차가운 게 만져진다. 얼음이었다. 이게 얼음팩인가. 아니라 해도 비슷한 것 같으니 사용해도 되는 거겠지. 손에 잡히는 걸 꺼내들고 다시 침대로 간 수인은 그걸 뺨에 댔다.

"차가워."

추운 겨울 날 차가운 걸 얼굴에 대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말고 싶지만 이런 거라도 문질러두지 않으면 더 시퍼렇게 멍이 들 터였다. 참고 뺨을 슬슬 문지르던 수인은 손목을 보게 되었다. 오랫 동안 묶여 있었던 손목에는 검붉은 자국이 생겨 있었다. 몰랐는데 안쪽은 살이 벗겨진 곳도 있었다. 눈으로 확인을 하게 되니 다친 부위가 괜히 더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손으로 그 곳을 슬슬 문지르던 수인은 덜컹. 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류강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류강이 아닌 영도였다. 이렇게 빨리 그가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많이 놀랐다.

"어......"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그냥 형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을 해봐도 별 쓸모가 없는 걸 하며 멍하니 있는 동안 영도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양 팔을 벌려 수인을 세게 끌어안았다.

영도의 품에 안긴 수인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얼굴에 대고 있던 얼음팩은 진즉 침대 위로 떨어져버렸다. 그걸 집어 들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도에게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끌어안긴 수인은 '수인아. 수인아.'라고 연거푸 이쪽의 이름을 부르는 영도의 속삭임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수성이 예민한 편도 아니고 고작 이런 일로 눈물을 보이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생각과 다르게 영도에게 안겨있는 동안 점점 마음이 약해진다. 그간 지나치게 영도에게 의지를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일에 마음이 약해져 버리는 게 아니던가. 수인은 서투르게 영도의 등에 손을 둘렀다.

"아이고. 힘들어. 너는 왜 그렇게 빠르냐."

문을 잡고 헐떡거리며 용한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미 감동적인 상봉의 재회를 하고 있는 영도와 수인을 보곤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찾았구나. 정말 다행이다."

이제 안심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용한은 필사적으로 수인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영도의 모습을 보곤 멋쩍어졌다.

촌닭이니 뭐니 하면서 틱틱 거려도 사이는 좋은 거로구나. 영도는 외동이기 때문에 사촌동생이 더 마음쓰이고 귀여웠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고가의 옷들도 척척 사주는 게 아니겠는가.

수인이 무사해서 다행이고,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나게 되어 안심이었다. 잘 되었다며 용한은 이쪽을 보는 수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들어보였다. '둘이서 대화 나눠봐.'라고 입모양으로 말을 한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줬다.

용한이 왔다 간 것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수인은 그저 영도의 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토닥거리며 만지는 손길에 영도는 천천히 수인에게서 떨어졌다. 수인의 어깨에 이마를 올리는 영도에게서 낙담이 전해졌다.

"이제 괜찮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 내 잘못이야."

중얼거린 영도는 수인의 양 어깨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줬다.

"내가 진즉 알아봐야 했는데......."

"그런 말은 안 하기로 했던 거 아니었어요?"

전화를 통해서 다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런 말인가 싶어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런 말은 하지 말자는 말을 하려는데 영도가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는 수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돌처럼 굳어지는 눈빛에 수인은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를 깨달았다.

"아. 이건-."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얼굴이 좀 요란한 것 같아도 별거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영도가 당장 양 뺨을 감쌌다. 세게 잡아 위로 얼굴을 드는 듯한 동작에 수인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수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영도는 재차 목청을 높였다.

"그 개자식이 네 얼굴을 이 꼴로 만든 거야?!"

"괜찮아. 별 거 아니에요."

"별 게 아니긴! 입술이 터졌는데! 뺨에 멍이 들었는데!"

엄지로 수인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아픔에 수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 하는 짤막한 소리를 내자 영도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그는 주먹을 쥐며 몸을 돌렸다.

"내 이 자식을 그냥!"

수인은 바로 영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으니까 차분히 좀 있어 봐요."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얼굴로 흥분이 가득했다. 지금 영도와 준식이 만나면 뭔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일로 영도가 폭행죄로 끌려가게 할 순 없었다. 일단은 영도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 조직 폭력배가 끌고 갔어요. 앞으로 무슨 일 당할지 저는 상상도 못하겠네요. 형이 나서지 않아도 그 쪽에서 다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그건 분명, 형이 직접 손을 대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예요."

"남이 손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내가 직접 나서야-."

"그러지 말아요. 다들 조용히 일을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형이 나서면 시끄러워져요. 알면서 그래요."

영도는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보다 상태는 나아진 것 같아도 여전히 화가 남아있었다. 수인은 애써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난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아요. 형이 자꾸만 이러니까 내 머리가 더 아픈 것 같아요."

이제는 다른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게 수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자꾸만 튀어 나가려 하는 영도를 붙잡는 것도 힘들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수인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기에 살짝 엄살을 부려봤다.

"말 많이 해서 턱도 아픈 것 같고......."

"정말? 어디가 아픈 건데."

영도는 당장 수인의 옆에 앉아선 조심스레 턱에 손을 댔다. 안색을 굳힌 채로 수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그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이걸 어쩌면 좋아.' 그리 말하는 눈빛이었다.

실제로 턱이 아프고 얼얼했지만 이런 영도를 앞에 두고 마냥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고작 한 대 맞은 걸로 아프다는 시늉을 내면서까지 영도를 붙잡아둬야 하는 지금 상황이 재미있기도 했다. 때문에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상한 얼굴 하지 말아요. 어찌 된 게 형이 맞은 사람 같네요."

수인이 웃자 영도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 뿐이었다. 수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영도는 이마에 손을 집은 채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번에 진짜 놀랐어. 이렇게나 화가 난 적은 달리 없었어."

이마를 문지르는 영도의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너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왜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요. 날 찾으려고 여러 군데 연락을 취하고 난리를 쳤을 게 분명한데. 빨리 알아채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수인아."

수인과 말과 표정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역시나 어른스럽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영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분명히 이상한 사람 쫓아가지 말라고 했지?"

이건 또 뭔 말이란 말인가. 저런 거 말고 달리 할 말은 없는 건가 싶었던 수인은 억울하다는 듯 표정이 굳어졌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분명 형하고 일하는 사람이었다고요."

"그래도 쫓아가지마. 전에는 시경이더니만, 이번에는 준식이냐. 그 자식 내 스토커였어."

"......설마 소간을 보낸 사람?"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널 찾느라고 놈의 집에도 들어가 봤어. 거기서 이상한 걸 봤지."

그렇게나 많은 사진으로 도배를 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완전 싫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영도는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오만상을 쓴 영도는 분명 날이 선 모습이었다. 편안해 보이지만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걸 보자니 비로소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영도와 재회를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먼저 나선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잽싸게 움직여준 스스로가 대견하고,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이쪽을 찾느라 동분서주 하느라 바빴을 영도가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수인은 영도의 팔을 붙잡고 그쪽으로 몸을 붙였다.

몸을 붙여오는 수인을 본 영도는 숨을 죽였다. 갑작스러운 접촉이라고 생각을 할 지도 몰랐다. 수인은 영도의 어깨로 이마를 비볐다. 서투른 투정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영도는 가만히 있었다.

영도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은 수인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려니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지금 영도와 함께 있는 상태라는 걸 말이다. 아주 무섭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보이는 게 창고의 낡은 천장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말이다.

"역시 안심이 되네요."

중얼거림을 들은 영도가 수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형의 목소리만 들어도 안심이 돼요."

"난 아니야."

다소 굳은 목소리에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어깨에 얼굴을 댄 채로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나는 네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집 안에서 나가지 않고 그냥 가만히만 있어줬으면 좋겠어."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그건 분명 이번 일 때문일 터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답지 않게 겁쟁이가 되어버린 거다. 그걸로 수인을 구속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겠지만........

"어른이 되고 아는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중얼거린 후 입을 다문 영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수인이나 영도에게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이쪽은 납치를 당했고 영도는 열애설에 관한 회견을 가졌다. 그것도 생방송으로. 어떤 식으로 할까 싶어 내심 긴장했던 수인이었다. 생방인 그걸 봐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리게 되었다.

"오늘 기자회견 어떻게 됐어요?"

"다 뒤집어 엎었어. 놈들 원하는 대로는 해주고 싶지 않더라고."

덕분에 앞으로 언론에서 어떻게 떠들어댈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뭐, 애초에 평판을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느낌이 강했다.

어차피 지금 영도의 상태에서는 엄청난 대박을 터트려서 특급 배우가 되지 않는 이상, 현상유지 및 하향선만 남은 상태였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대중에게 원혁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달리 심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긴 하지만........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 할 것 같아."

턱을 긁적이며 영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일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영도와 관련이 된 다른 일 때문에 저러는 걸까. 연말이었다. 해야 할 일과 갈 곳도 많기 때문에 미리 의상 및 헤어 준비를 했었던 게 아니었던가.

"연말 행사가 많다면서요."

"주말 지나서 다음 주부터 바빠지겠지. 그 전까지는 조용히 지내라는 사장님의 엄명이 있으셨지."

영도는 침대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수인을 바라봤다.

처음 이리로 달려올 때에는 나름 필사적이었다. 준식이 보이면 당장 그 목을 졸라서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 따위가 어떻게 수인을 건드릴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도 적잖이 있었다. 그래서 준식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있었다면 이쪽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취했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수인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나이 치고는 꽤나 침착했다. 어쩌면 단순히 그리 보이는 것뿐일지도 모르지.

영도는 수인의 손을 잡았다. 별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잡기만 하는 느낌에 수인은 눈을 깜박였다.

"무서웠지? 이젠 괜찮아."

영도는 스스로에게 결의를 하듯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거야."

"......점점 괜찮아지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쉽사리 잊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수인이 괜찮다 말을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인이나 놀란 이쪽, 둘 다에게 잠시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 일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을 만한 시간이 말이다.

잠시 생각을 하던 영도는 중얼거렸다.

"쉬고 싶다. 너랑 같이 어딘가로 가버리고 싶어."

"그러면 안 돼요. 할 일 많잖아요."

"그냥 집으로 가서 당장 짐 챙기자. 우리 여행이나 가버리자."

입을 다문 영도는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 얼굴 전체로 '진심이야.'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수인은 쉽사리 동조할 수 없었다.

"바쁘잖아요. 잘은 모르지만 이것저것 해야 하는 게 있지 않아요?"

"알 게 뭐야.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라는 사장의 엄명도 있으니 그걸 충실히 따르면 그만이야. 그러니 여행이나 가자. 어디로 갈까?"

영도와의 여행이라.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시경의 허락도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정말은 안 괜찮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영도라면 자기 일을 잘 해결할 만한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수인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영도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해 지낼 수 있고, 지금 가고 싶은 곳이라 한다면 한 군데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수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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