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1)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차에 올라탄 용한은 아까부터 계속 저런 소리였다. 시끄러웠기 때문에 영도는 당장 발로 용한이 앉아있는 의자를 걷어찼다.

"됐으니까 운전부터 해."

"장사장을 건드렸으니 모든 게 다 끝이야. 희망이 없어. 일거리가 다 끊길 거라고. 이제 좀 안심하고 대스타를 데리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겠다 싶었는데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만 좀 하라니까!"

영도는 용한의 뒷통수를 퍽 쳤다.

"장사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그건 시경도 마찬가지야. 그 여우같은 놈이 아무 준비도 해두지 않고 그렇게 웃고만 있었겠어? 분명 뭔가가 더 있는 거라고."

이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덫을 이미 쳐둔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노랭이가 어렸을 적에 찍은 이상한 테이프를 장사장이 가지고 있는 게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쯤이면 몰래 빼돌리지 않았을까. 사람 죽이는 일 빼고는 뭐든지 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일단 이쪽은 할 일을 다 했다. 아닌가. 일을 망친 꼴일까나. 하지만 이만한 위치에 오른 입장에서 타의에 의해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이리 되어서 일을 하게 됨에 있어 태클이 걸리는 건 싫지만, 어쩌겠는가.

중얼거린 영도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오늘 기자회견은 생방송이었다. 집에 있을 수인이 그걸 봤을까.

어찌할까 싶은 듯 아래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영도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분 좋게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영도는 길게 울리는 신호음에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이상하다? 집에 있어야 하는데? 아니면 피곤해서 자는 걸까. 하지만 영도는 수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암만 피곤해도 이 시간까지 자는 사람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정확히 뭐라 말을 할 순 없으나 불쾌한 기분이 좌악 들었다. 굳은 얼굴로 있던 영도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시동을 걸고 일단 자리를 피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던 용한은 심각한 얼굴로 전화는 거는 영도를 보곤 '왜 그래?'라고 물었다. 조용히 있으라는 듯 영도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 앞에 댔다. 그 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아, 지용씨. 저 영도입니다. 아니. 원혁이요."

[수고하십니다. 오늘 기자회견 잘 봤습니다.]

"망친 회견인데요 뭘. 그런데 수인이 밖으로 나간 겁니까?"

워낙에 부지런하고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 산책을 나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용이나 최씨 영감과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 함께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류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영도는 지용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

[수인씨는 10시 40분 즈음에 나가셨습니다. 형이 뭔가를 두고 갔나보다고, 그걸 전해준다면서 나갔는데요.]

".......뭐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해주다니. 도대체 뭘?

그런 연락을 수인에게 한 적도 없고 두고 간 물건 같은 것도 있을 리가 없었다. 도대체 뭔 소리인가 싶었던 영도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영도가 조용해지자 이상했던지 지용은 웅얼거렸다.

[분명히 연락을 받고 나가는 거라고 하던데요. 얇은 옷만 입고 나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어 물어봐서 그 대답을 직접 들었습니다.]

"누가 연락을 했는지는 모르는 겁니까."

[거기까지는 묻지를 못했습니다. 문제가 생긴 겁니까? 수인씨 찾아볼까요?]

"일단 집으로 다시 인터폰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혹시 들어왔을 지도 모르니까요."

[오늘 CCTV업체에 연락을 취해서 바깥이랑 안쪽에 걸린 카메라 다 떼서 작업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든 순번들이 나와서 바깥 근무를 하고 있어 제가 수인씨를 못 봤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 오전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차라리 못 봤다는 대답을 듣는 편이 나았다. 이런 식으로 딱 잘라 말을 해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영도는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짐을 느꼈다. 불쾌한 뭔가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알았습니다. 일단 전화부터 끊겠습니다."

[일단 최씨 영감님이랑 같이 맨션 안팍을 뒤져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지금 중요한 분하고 통화중이어서요.]

누군가 말을 거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어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지용이 '윈혁씨! 잠시만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인이 들어온 건가? 영도는 급히 아직 전화 안 끊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용이 '이건 분명 그 사람인데? 잘못 본 건 아니겠지?'라고 중얼거리면서 영도에게 말했다.

[방금 업체 사람이 뭔가를 보여줬는데 이게 확실한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의혹이 있으니 말은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소포 도착했던 거 기억하고 계시지요?]

소포? 소포라고? 영도는 바로 기억해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왜요?"

[딱 그 즈음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에 수상한 사내가 하나 맨션으로 들어오는 영상이 걸렸습니다. 지금 줌으로 확인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 사람......]

지용은 뒷말을 흐렸다.

물론 어떤 새끼가 소간을 남의 사물함에 넣었는 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알아보고 싶은 건 지금 수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거였다. 이런 식으로 바로 말을 하지 않을 거라면 일단 전화부터 끊으라 하려는데 지용이 말했다.

"뭐라고요?"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영도는 순간적으로 벙쪄버렸다.

그건 지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전 원래 눈썰미가 좋습니다. 한번 본 사람은 쉽게 잊지 않습니다. 지금 줌을 한 화면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 분은 분명 그 사람입니다. 아침에 영도씨를 차를 태우던 사람 말입니다.]

아침에 이쪽을 태우는 사람이라 한다면 정해져 있었다.

전화 통화가 길어지자 막대 사탕을 꺼내 입에 무는 용한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새 막대사탕을 내밀며 '먹을래?'라고 권했다.

"체격이 어떻게 됩니까?"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격입니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귀엽게 생긴 분 말입니다.]

".......준식 말입니까?"

[그 분의 성함까진 모르겠지만 전에도 뵌 적 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꾸벅이고는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지요.]

원래 낯을 가리는 준식이다보니 눈이 마주쳤을 때 차 안으로 바로 들어가 버리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그가 CCTV에 걸렸다는 것에 있었다. 도대체 왜? 그 녀석이 왜 소포를 가지고 들어왔던 건데?

아직은 확실치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은 뛰어난 감각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지금 영도가 그런 상태였다. 그는 바로 통화를 끊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전화를 그렇게 오래, 진지하게 하는 거란 말인가. 설마하니 사장인 건 아니겠지? 묻고 싶은 듯 바라보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도는 물었다.

"오늘 준식이 어디서 일 해?"

"감기 몸살 걸렸다고 집에서 쉰다고 했어."

"정말이야?"

"본인이 그렇게 말을 하는데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갑자기 준식이는 왜 들먹이는 건데?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자 영도의 표정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진지했다.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영 심상치 않았다. 용한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요즘 일 하기 싫어하는 것 같더라고. 그걸 알면서도 휴가를 주지 않은 건 나도 바빠서 그랬어. 내가 그간 네 옆에 안 붙어 있었던 것도 나름 다 이유가 있었어. 연말이잖아. 돌아야 할 곳이 많단 말이야. 내가 너 대신해서 직접 얼굴 도장 찍으면서 일일이 새해 인사드리고 내년도 잘 부탁드린다고 한 거란 말이야. 나 그렇게 놀고 먹기만 하는 남자 아니야. 너 잘 되라고 노력하고 있단 말이지. 실상 사장님보다 내가 더 너를 생각할 걸?"

"준식이 집 어디야?"

"응? 그 녀석 집은 왜?"

"됐으니까 일단 그 녀석 집으로 가!"

소리를 치는 영도에 용한은 놀라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사람 귀도 안 먹었는데 왜 소리부터 지르는지 모르겠다. 살살 말해도 될 것을 말이다. 그러면 사람 마음 상하지. 같은 농담을 건네지 못한 건 영도의 얼굴이 지나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한이 시동을 걸자 영도는 전화를 걸었다. 준식에게 걸자 먼저 전원이 꺼져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혀를 찬 영도는 다음으로 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번 정도 갔을까.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시경이 아니라 인예였다. 당장 시경을 바꿔 달라 말하자 인예는 순순히 알았다 했다. 아마도 목소리 톤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기 때문일 터였다. 주변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간간히 '영도라고?'라고 묻는 시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벌써 내가 그리워졌어.]

"준식이 놈 어떤 녀석인지 잘 알아?"

[음?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 녀석 뭐하는 놈인지 아느냐고."

[네 로드 매니저잖아. 둔하긴 해도 꾀는 부리지 않는 착한 녀석이고. 그 뿐인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몇 년 전부터 꾸준하게 이상한 편지나 물건 보내온 스토커 기억나?"

[기억나지. 붙잡으려 하는데도 잘 잡히지 않아서 애 먹은 녀석 말하는 거야? 게다가넌 은근히 스토커 많아. 한, 둘이 아닌데 솔직히 다 잡기는 무리지. 눈에 띠게 범죄를 저지르는 거면 차라리 잡기가 수월할 거다.]

"시끄럽고. 아무래도 준식이 그 스토커였던 것 같아."

"뭐라고?"

운전을 하는 내내 귀를 열고 있었던 용한은 놀라 뒤를 돌아본다. 통화 중인 상태 그대로 영도는 눈을 치켜 떠 용한을 바라봤다.

이쪽 통화는 신경쓰지 말고 넌 운전이나 해. 그리 말하는 눈빛에 입을 다문 용한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그 얼굴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으로 인해 굳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경의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이쪽이 하는 말이 믿기지 않은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아는 준식은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위인 자체가 못 된다는 게 정답일 터였다. 둔하고 눈치를 보고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편이었지만 영도가 데리고 있었던 건 단순히 착하고 사람이 악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경이 '영도 같이 까칠한 놈하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다.'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로드 매니저로 일한지 벌써 4년 차인 준식이었다. 그 정도면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자를 수도 없었다. 그냥 저냥 익숙하기 때문에 곁에 두고 있었다 치지만, 그런 걸로 이쪽이 그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본인이 아닌 이상, 그 사람의 모든 걸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보고 있었던 준식의 모습은 그의 다양한 면모 중 하나였을 뿐일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방심했던 거다.

"그 놈이야. 그 놈이 분명해. 지금 수인이 어떤 놈이 불러서 밖으로 나갔데. 내가 잃어버린 것을 챙겨주러 간다면서 말이야. 내 측근들 중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수인이가 불려서 나갔다고?]

"핸드폰도 없는 놈이야. 분명 전화로 걸었겠지. 네가 특수한 경우지 아무나 부른다고 나갈 녀석은 아니야. 웬만한 걸로는 낚이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아는 사람이 부르는 거라면 다르지. 나를 들먹이면서 말을 꺼내면 100% 걸려들게 되어있어."

평상시에는 똑 부러지게 행동을 하면서 의외인 모습에서 허당인 수인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아는 사람들 많지? 좀 풀어봐. 그리고 준식이 그 녀석 집 주소 좀 찾아서 불러봐. 그쪽으로 가볼 거야."

[지금 집에 수인이 없는 거 분명해?]

"확인은 다 해봤어!"

갑작스럽게 터지는 호통에 용한이 딸꾹질을 했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놀란 듯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며 영도는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미안해. 지금 예민해져서 기분이 안 좋아. 그러니까 긴 말 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지금 수습해야 할 일들이 많은 건 알아. 그래도 수인이부터 찾아줬으면 좋겠어. 만약에 수인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하아-하고 한숨을 쉰 영도는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순식간에 초췌한 얼굴이 된 영도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운전대를 잡은 용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 영도는 진심이었다. 이번 일은 가능한 빨리 해결을 보는 게 좋았다. 부디 사장인 시경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영도를 자극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며 느리게 차를 몰았다.

시경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영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잠시 후 문자가 왔다는 소리가 들리고 영도는 그걸 용한에게 내밀었다. 

"문자로 준식이 집 주소 보내준다고 했어. 일단 거기로 가자."

고개를 끄덕인 용한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문자를 확인했다. 주소를 한 번 확인하곤 핸드폰을 다시 영도에게 넘긴 용한은 정면을 바라봤다. 운전만 하나 싶던 그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침착하게 행동해. 알았지?"

지금 이쪽이 하는 말이 영도의 귀에 들어가기나 할까 싶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겨도 듣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겠냐면서 용한은 뒤를 흘깃 바라봤다.

"살인은 안 되는 거야."

"입 다물고 밟기나 해."

"나는 그냥 걱정이 돼서 그러지."

그리고 너 지금 상태 너무 안 좋다. 그걸 알기나 하냐.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한 소리 더 듣게 될 것 같아 그냥 말기로 했다. 대신 운전하는 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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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안쪽 책상을 열자 대본이 나왔다. 얼마나 봤는지 표지가 너덜너덜한 게 대부분이었다. 안을 열자 빼백하게 뭔가가 적혀 있었다. 대사 앞에 지문 외에도 영도가 달리 적은 것들의 양은 상당했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뒤로 이렇게나 노력을 하고 있었던 거다. 대단하구나 싶어서 한장 한장 넘기다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의식하고는 대본을 챙겨 넣었다. 봉투에 상대가 알려준 대본을 잘 집어넣고 잠바를 걸친 후에 밖으로 나갔다.

맨션을 나설 때 지용과 마주쳤다. 어디를 가느냐는 물음에 순순히 대답을 했다. 영도가 뭔가를 두고 가서 그걸 전해주러 간다 말이다. 대답을 하는 동안 안으로 사내 둘이 들어왔다. 손에 낯선 기계들을 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카메라를 쥐고 있기도 했다. 뭔가 싶어 그쪽을 보고 있으려니 지용이 말해줬다. CCTV 확인을 하러 온 업자들이라고 말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스토커 일로 카메라를 확인해 볼 생각인 듯 싶었다. 수인도 알고 싶은 부분이었기 때문에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약속이 떠올라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내려갈 때 최씨 영감님은 안 계신지 경비실을 살펴봤다. 아무도 없었다. 웬일로 자리를 비우셨나 싶어서 그쪽을 빤히 보던 수인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부지런히 다녀오자 싶었던 거다. 맨션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땅히 눈에 드는 게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인지라 도로변으로 나왔다.

한 1분 정도를 서있었을까. 중형차가 수인의 앞에서 멈췄다.

조수석 쪽으로 몸을 내밀어서 이쪽을 보는 건 수인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먼저 인사를 건네자 수인도 고개를 꾸벅이며 들고 온 것을 보였다. 이것만 전해주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는 차에 타라 했다. 영도가 데리고 오라 했다 한다.

오늘은 푹 쉬라고 했던 영도가 왜 오라 한 건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으려니 '좋은 구경 시켜주고 싶으시데요.'라고 말했다. 거절 당하면 어쩌나 싶었는지 무척이나 조심스레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하는 것에 수인은 잠시 생각을 하다 봉투만 내밀었다.

일단 영도에게 확인 전화를 해보겠다는 말을 하려 할 생각이었다. 등 뒤로 누군가 접근을 해서 입을 틀어막지만 않았다면 그리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상한 냄새가 맡아졌다.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를 상상도 해본 적 없었던 수인이니 만큼 숨을 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의식이 빠르게 멀어졌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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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인이 서울 올라가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차를 타기 전 할머니는 수인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수인은 고등학교 졸업을 한 21살의 튼튼한 대한민국의 사내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언제나 어린애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게 바로 서울이라는 곳이란다. 사람을 의심하면 안 되는 거지만 무턱대고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단다. 혹시라도 이상한 걸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그건 서로 불편해지는 것 밖에 안 되는 일이란다. 절대로 돈 거래는 하지 말아라. 영도한테 너무 피해 주지 말고.'

'네. 잘 알겠어요.'

시간만 된다면 2박 3일 동안 계속해서 말을 해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근조근하니 서울로 올라가서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할머니의 모습에 수인의 입가로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온화한 얼굴로 웃는 수인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래. 우리 수인이는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아이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어깨에서부터 팔로 조물거리면서 기운을 나눠주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인의 손을 꼬옥 쥐었다.

'내 걱정일랑 하지 말고 네 생각만 하렴. 앞으로 넌 살날이 아주 길단다. 그걸 위해서 충분한 준비를 해야만 할 거야. 시간을 헛되이 하지 말아라. 나중에 뒤돌아보면 남는 건 후회뿐일 테니까.'

'잘 알고 있어요. 하루를 잘게 쪼개서 후회 없이 잘 지내도록 할게요.'

'그래. 그러면 됐다. 이만 가보렴.'

간신히 손을 놓아주는 할머니에게서 여전한 걱정이 느껴졌다.

지금 어떤 말과 행동을 취해야 할머니를 안심시켜드릴 수 있는 걸까.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할머니를 바라보던 수인은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앉아서 창문 밖을 내다보자 할머니도 고개를 숙여 수인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던 그녀는 이윽고 운전석에 앉은 이에게 걸어갔다.

'우리 수인이 터미널까지 잘 데려다 주게. 자네만 믿네.'

'걱정을 하지 마세요. 그러면 출발합니다.'

동네에서 차가 있는 아저씨한테 부탁을 해서 얻어 타는 거였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차가 출발을 하고 수인은 뒤를 돌아봤다. 유리로 할머니가 보였다. 느린 걸음으로 따라오다가 손을 들어 크게 흔든다. 잘 다녀오라고 입모양으로 말하는 걸 보며 수인은 눈을 깜박였다.

멀어지는 할머니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너무도 익숙한 길과 풍경이었다.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할머니에게 갔을 때, 앞으로는 계속 여기서 생활을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리게 눈을 깜박인 수인은 앞으로 몸을 돌렸다. 운전을 하던 아저씨가 웃었다.

'서울 가는 게 무섭냐.'

'아니요. 형도 있는 걸요.'

'그래. 무섭게 생각하지 말거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네가 잘 하면 잘 풀리는 거다. 걱정을 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있어라. 그게 네 할머니한테 효도하는 거다. 알았지?'

아저씨의 말에 수인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로 올라가면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도와 함께 살게 될 터였다.

잘 지낼 수 있겠지. 별 문제는 없을 거라며 수인은 손을 마주 잡았다.

실상 수인이 걱정하는 건 서울 생활에 적응을 하는 것과 영도를 만나는 일 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건 걱정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외 부분에 대해 신경을 쓸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설마하니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멍하니 있던 수인은 재차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은 몇 분 전부터 뜰 수 있었다. 그런데 머리 속이 몽롱해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보이는 게 뭔지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그런 수인의 눈 앞으로 누군가 손바닥을 펼쳐서 두어번 흔들었다. 그래도 수인의 눈동자는 풀린 채로 있었다.

"완전히 맛이 갔는 걸? 조절이 잘못 된 거 아니야? 위험할지도 몰라."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들리기 때문에 듣는 것일 뿐,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조용히 있는 동안 '상관없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꽤나 차갑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런 녀석. 죽어도 알 바 아니야."

"그런 말은 하지마. 그건 살인이라고."

"시끄러워. 이제 가버려. 여기까지만 도와주면 돼."

딱딱한 목소리에 맞춰 하아-하고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희 아버지 생각해서 이쯤으로 해둬라. 너 이상한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사람까지 납치할 줄은 몰랐다."

"시끄럽다고 했지? 돈 여기에 있으니까. 넌 그냥 꺼져."

"그래. 알았다. 고맙다. 안그래도 술값 떨어지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잘 해봐라."

누군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낡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닫힌다. 잠시 빛이 들어온다 생각 되었지만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는 동안 수인은 여전히 같은 상태로 있기만 했다.

두 사람이 이 공간 안에 있다가 한 사람이 나가 버렸다.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즈음 누군가 움직였다. 천천히 걸어와서는 수인의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을 가까이 했다. 물감이 번진 것처럼 상대가 보였다. 또렷하게 확인이 되지 않아서 숨을 죽인 채로 가만히 있던 수인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상대의 얼굴이 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그건 준식이었다.

그래. 이 목소리였다. 이 사람이 말을 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뭐가?"

아주 조금 입술을 달싹여 묻는 말에 당장 날이 선 반응이 돌아온다.

입을 앙다문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살기가 감돌았다고도 볼 수 있는 눈빛을 하고 있던 준식은 입술을 달싹였다.

"너. 마음에 안 들어."

"......왜 이러는 거지요?"

"시끄러워. 입 다물어. 넌 지금 안 좋은 상황이야.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이런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조용히 있으란 말인가. 하지만 생각과 달리 더는 입을 벙긋할 기운도 없었다. 조용해져선 색꺽 거리는 호흡만 토해내는 수인의 모습에 준식은 비로소 만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창고 같은 곳 안으로 잡다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지금 수인은 먼지가 쌓인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눕혀져 있었다. 등 뒤로 손이 묶여진 채로 한 시간 넘게 있었기 때문에 몸의 감각이 돌아오면 꽤나 아플 터였다. 하지만 지금 수인의 상태에 대해선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준식은 간간히 발로 수인이 누워있는 소파를 퍽퍽 치고는 했다. 소파를 칠 때마다 수인의 몸이 흔들렸다. 그걸 보다가 몸을 돌려 왔다 간다, 그걸 반복했다. 엄지를 세워 손톱을 깨물었다. 좀 멀어지나 싶으면 다시 다가와서는 소파를 발로 퍽 쳤다. 그러다가 재차 노려본다.

수인으로서는 자세히 알순 없으나 지금 준식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머리 속이 말끔해진다. 그러자 수인은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대체 준식이 무엇을 노리고 이러는 걸까. 돈일까. 부자인 영도에게 돈을 뜯을 생각인 걸까.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중얼거렸다.

"형이 날 위해서 돈을 내진 않을 거예요."

뭔가를 집중해서 생각하고 있던 준식은 그 순간 발을 멈추었다. 뭔 소리를 들은 건가 싶은 얼굴로 수인을 내려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어?"

"돈을 위해서 날 납치한 거라면 어리석은 일이에요. 형은 날 위해서 돈을 내지 않을 거예요."

"돈? 지금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우습지도 않다는 듯 준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준식에 수인은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물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준식은 수인 쪽으로 얼굴을 붙이곤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돈 같은 것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도대체 뭘......."

"너 같은게 원혁의 곁에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게 완벽한 사람의 옆에 너 같이 촌스러운 게 가당키나 해? 말도 안 돼."

악의가 가득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준식은 이쪽이 영도의 곁에 있는 게 말이 안된다 했지만, 수인의 입장 상 이런 짓을 하는 준식이 더 말도 안 되었다. 고작 그런 일로 사람을 납치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자 준식은 수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확 당기는 것에 통증을 느낀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이 이상한 눈으로 그 사람의 흥미를 끈 것 같은데, 그것도 잠시일 뿐이야. 그는 금방 너한테 질리게 될 거야. 넌 버려지게 될 거라고."

이상한 눈. 지적을 받게 되는 순간 수인은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어졌다.

입을 다물고 경직된 눈동자로 준식을 바라보자 그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 눈동자 가득히 불쾌함이 차오른다. 처음 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이미 많이 봐온 눈빛이었다. 각기 다른 눈동자색. 회빛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수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은 겉모습만으로 판단을 내리곤 했고, 일부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수인을 괴롭히고는 했다. 지금의 준식은 그런 이들과 똑같은 눈빛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겪어 본 일들은 트라우마가 되어 수인으로 하여금 용기를 앗아갔다. 하지만 마음을 다독였다. 애써 강한 마음을 먹으며 수인은 말했다.

"난 형하고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어제 영도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걸 이런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수인은 준식을 똑바로 바라봤다.

"난 그저 사촌동생일 뿐이에요."

"그런 건 묻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잡은 수인의 머리카락을 놓은 준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네가 곁에 있으니까 그 사람이 점점 이상해지는 거야. 난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혁의 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야. 난 그들의 바람을 대신해서 들어주는 것뿐이야. 모두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대표같은 거지."

준식이 무슨 권리로 그런 걸 한단 말인가.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준식은 어디까지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너나 이유라나. 원혁의 옆에 달라붙어 단물만 죽죽 빨아대는 모기 같은 해충일 뿐이야. 그러니까 넌 여기에 있어. 혹시 모르지. 지난 반년 동안 사람이 찾지 않았던 이 장소에 운이 좋아 누군가 발길을 할지도. 그래서 발견이 되면 그게 바로 천운이지."

이쪽을 바라보는 준식의 얼굴은 점점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짐승도 뭐도 아닌 사람이란다.

할머니의 말을 머리 속으로 떠올리며 수인은 조용히 있었다. 여기에 방치가 되 버리는 걸까. 수인은 조금 몸을 움직여봤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잘 모르겠지만 뒤로 묶인 손은 어딘가에 고정이 되어있는 것도 같았다. 준식은 수인을 두고 몸을 돌렸다. 그가 가 버리면 이 알 수 없는 곳에 혼자 남게 되는 거였다. 수인은 다급히 '기다려요.'라고 말했다. 성가시다는 듯 준식이 뒤를 돌아봤다.

"이건 범죄에요. 이런다고 형이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런 것 따위 알게 뭐야. 입 다물어. 이 새끼야."

갑작스러운 욕설에 수인은 굳어버렸다.

이런 상황 자체가 욕설보다 심한 거였지만, 준식이 던진 말 한마디에 더 충격을 받는 게 우스웠다. 조용히 있는 동안 준식은 그런 수인에게 코웃음을 날리며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문이 열리고 닫힌다.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리는 걸 마지막으로 수인은 바로 팔에 힘을 줬다.

처음에는 팔을 당겨도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는 동안 통증이 느껴졌다. 손목 뿐만이 아니라, 팔 전체로 아픔이 올라왔다. 결국 움직이길 멈춘 수인은 지금 있는 곳을 찬찬히 둘러봤다. 낡은 기계와 먼지가 쌓인 물건들. 엉성하게 짜인 천장에는 여기저기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공포 영화 촬영이나 하면 딱일 듯한 장소였다.

".......어떻게 하지."

지금으로선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영도는 알고 있을까.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신경을 쓰면 저녁 늦게에나 이쪽의 부재를 눈치 챌 수도 있었다. 설령 알아차린다고 해도 바로 발견을 해낼 수 있을까.

무섭다. 문득 드는 생각에 수인은 숨을 죽인 채로 재차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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