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7화 (17/31)

[네르시온] 달콤한 불청객 2권

- 2권

쿨럭. 기침을 한 수인은 바로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바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살짝 멍한 상태로 있던 수인은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아직도 영도의 품 안이라는 걸 확인했다.

수인을 꼬옥 안은 영도는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기침을 하며 눈을 뜨게 된 수인과 달리, 영도는 새근거리고 잘 자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얼굴을 본 적 있었지만 지금처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성욕을 만족한 사내는 저런 얼굴인 거로구나.

살짝 핀트가 어긋난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수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영도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그의 뺨에 살짝 댔다. 벌써 수염이 나는 건지 조금은 까끌했다. 그런 턱을 슬슬 문지르면서 수인은 눈을 감았다. 손을 내리고 가슴 앞에 댄 수인은 영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편안하다. 이렇게나 안심이 된 적이 달리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너무 좋고, 좋아서. 평생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고 싶지가 않다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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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빛이 들어왔을 때 영도는 비로소 잠에서 깰 수 있었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품에 포옥 안긴 수인이 보였다. 맹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는 손을 들어 본인의 뺨을 꼬집었다. 아프고 세게 꼬집어도 보이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품 안에 수인이 있는 거였다.

물론 이런 상황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전에도 이런 아침을 맞이했지만, 그 때와 조금 다른 건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어졌다는 거였다.

......그런데 괜찮은 거겠지? 수인의 엉덩이는 작았기 때문에 꽤나 해버린 후, 새삼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할까 싶어 영도는 조심스레 수인의 엉덩이 쪽으로 손을 내렸다.

"더는 못 해요."

엉덩이를 지분거리다가 또 넣으면 큰일이었다. 막으려는 듯 손목을 붙잡는 것에 영도는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더 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괜찮은지 알아보려는 것뿐이야."

여기서 멈추면 더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구는 게 중요하다면서 영도는 수인의 엉덩이를 꾸욱 잡았다. 바로 수인은 안색을 굳히며 '아얏.'하는 소리를 냈다.

"아파요."

아프다는 말에 더 쥐고 있을 수 없었다. 손에 쥔 힘을 뺀 영도이나 은근슬쩍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탱탱하고 동그란 느낌이 그만이었다. 수인이 꼬물거리면서 품으로 더 파고 들어왔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는 수인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에 막 빠져들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에 닿는 미묘한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든다.

영도는 완전히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만 보였기 때문에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그냥 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이상하다니까.'라고 웅얼거린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댄 채로 가만히 있다가 뒤로 물러난다. 몸이 떨어진 후에도 입술은 여전히 닿은 채로 있었다. 그러다가 영도는 조심스레 수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지금이 몇 시일까. 오전에 나가봐야 할 일이 있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그냥 이대로만 있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영도는 수인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향긋한 내음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

"땀 냄새일 뿐이에요."

그런 게 뭐가 좋다고 냄새를 맡는 건지 모르겠다. 수인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영도가 너무 팔에 힘을 주고 있어서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떨어지라는 말을 하면서 가벼운 투닥거림이 있었다. 그 속에 영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섞인다. 뭐라고 작은 목소리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멀리서 노래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소리였다.

한참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누가 방해인지 모르겠다. 멈칫하나 싶던 영도는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들었다. 노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지금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 받지 않을 수 없는 전화인 거겠지.

"인상 풀고 어서 가 봐요."

말과 동시에 수인의 손이 영도의 팔을 잡았다. 눈만 위로 한 채로 수인은 재차 말했다.

"어서 가요. 오늘부터 일 있는 거잖아요."

"귀찮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정말 귀찮아졌다. 세상에서 가장 싫을 일을 앞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만인상을 쓴 채로 영도는 수인을 꼬옥 안았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

"오늘 중요한 일 있는 거잖아요. 그러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하아."

꼭 이럴 때가 되면 수인이 이쪽보다 훨씬 더 성숙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차분하게 조근조근 말하는데 마냥 버티고 있을 순 없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아.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영도는 수인에게서 떨어졌다. 인상을 쓴 채로 있나 싶던 영도는 수인의 허리 부근에 손을 대고 두어번 문질렀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아침에 밥은 해야지요."

"그냥 쉬어. 난 안 먹어도 되니까."

"그래도 밥 먹여서 내보내고 싶은걸요."

영도는 숨을 죽였다. 꼬물거리며 손을 위로 든 수인은 영도의 턱 아래를 간질이듯 만지며 속삭였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오늘은 밥 먹여서 보내고 싶어요."

"그냥 내가 알아서 밥 해놓을게. 넌 몸만 와서 먹도록 해."

말을 하는 동안 영도는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무리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수인을 안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있다가 정말 일을 칠 것 같았던 영도는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찬바람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이불이 올라가는 순간 수인의 몸이 부들거리고 떨리자 영도는 당장 이불을 내려 수인의 목까지 덮어줬다. 그리고 알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근처에 있던 바지를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도 잘 보이도록 문을 활짝 열어뒀다. 덕분에 영도가 어슬렁거리면서 거실로 나가 끊겼다가 두 번째로 울리는 전화를 받는 걸 볼 수 있었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영도는 전화를 받자마자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잘 들리진 않아도 축축 처진 목소리였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전화질이야. 그리 따져 묻고 싶은 듯 싶었다.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이불을 조금 더 끌어 얼굴 부근에 대고는 눈을 내리떴다.

편안하고 나른했다. 몸은 불편해도 한 없이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엉덩이 사이에 이물감이 있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 긴가민가도 했지만 흔적은 몸 여기저기에 남아있었다. 몇 번이나 키스를 했던 입술도 얼얼했다.

영도와 나누었던 사랑의 흔적이 모든 곳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달콤한 동통을 느끼며 이불을 끌어 입술에 누른 채로 눈을 감았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눈을 뜨면 영도가 모든 준비를 해놓고 있을 터였다. 맛있게 차린 상을 앞에 두고 '짜잔.'라고 할 그의 모습을 기대하며 수인은 얇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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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린 게 정말 없다."

말을 하는 영도는 당당한 얼굴이지만 알게 모르게 무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밥솥의 힘인지 밥은 괜찮았다. 반찬도 나름 괜찮았다. 전에 먹고 남은 것들을 데우고 다시 볶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먹었던 걸 고스란히 깔아놓고 새로 한 건 계란 후라이일 뿐이었다.

영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한식은 잘 못해. 양식은 좀 하는데. 아침부터 준비를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

"이것도 괜찮은데요. 뭐. 맛있을 것 같아요."

수인은 뚝배기의 절반도 채 남지 않은 된장국의 맛을 보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짜지만 맛있어요. 밥에 넣고 비벼먹으면 될 것 같아요."

"네가 한 거잖아. 난 그냥 다시 데우기만 했다고. 그거 말고 이거 먹어봐."

영도는 계란 프라이를 수인 앞으로 주욱 내밀었다.

"이건 내가 한 거니까."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요즘 초등학생들도 다 한다는 음식을 내밀고는 저렇게 뿌듯해하는 얼굴이라니. 정말 어린애라면서 수인은 계란 후라이의 끝을 조금 뜯어서 맛을 봤다. 입 안에 계란을 넣는 순간 수인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 맛을 뭐라 표현해야 하나. 그리 말하고픈 얼굴을 하는 걸 본 영도는 '에이~'라는 소리를 내며 눈을 흘겼다.

"맛없다고 하려고? 그러지 마라. 연기 너무 어설프잖아. 그리고 내 앞에서 연기 같은 걸 해선 안 되지. 나 원혁이야."

"아니. 이건 좀."

"어허. 정말 왜 이러셔. 계란 프라이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말을 하면서 수인이 먹던 앞 부분을 뜯어 입에 넣었던 영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오른쪽으로 한 번 씹고, 왼쪽으로 다시 씹어도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입 안으로 넘기고 난 영도는 당장 혀를 내밀었다.

"우웩."

"먹을 걸 두고 그런 표현하지 말아요. 벌 받아요."

"왜 이렇게 짠 거야."

수인의 타박에도 영도는 태도를 달리하지 않았다. 입 안에 넣는 순간 이게 소태인지 계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분명히 적당히 소금을 뿌렸다 생각했는데 이 맛은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르겠다.

이걸 어쩌나 싶었던 영도는 칙칙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보던 수인은 계란 후라이를 잘라 재차 입 안에 넣었다. 놀란 영도가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먹지마. 짜잖아."

"괜찮아요. 먹을 만해요."

"그러다 속 버린다."

"밥 많이 먹으면 되잖아요. 모처럼 형이 해준 건데 버릴 순 없잖아요."

별 거 아닌 말에 그냥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진다. 이도 저도 아닌 얼굴로 수인을 바라보던 영도는 계란 프라이가 올려진 접시를 빼앗듯이 들고 가 구석에 놓았다. 젓가락을 든 채로 수인이 바라보자 영도는 '다음에.'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더 맛있게 해줄 거야. 그러니까 저건 먹지마."

"나름 괜찮았는데."

"안 돼. 저런 소태 같은 걸 먹일 순 없어."

맛있는 걸 먹여도 부족할 판에 말이다.

지나치게 오랜만에 요리를 했던 걸까. 자휘할 때에는 라면이나 계란 프라이는 눈 감고도 하는 요리였는데. 이런 기본적인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사람 얼굴이 어찌 되는 거란 말인가. 마음이 무거워진 영도는 수인을 힐긋 봤다. 수인은 물을 말아 밥을 먹고 있었다.

"왜 그렇게 먹어?"

화들짝 놀라 묻는 말에 수인은 수저를 입에 문 채로 영도를 바라봤다.

"속이 좀 거북해서요."

"이상해?"

어제 그거 때문에?

끝까지 묻진 않아도 의사는 전달이 되었던지 수인은 두어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김치랑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 이렇게 먹는 거 꽤 좋아해요."

그렇게 먹는 게 좋다 말하는 것 치고는 젓가락을 움직이는 게 영 느리기만 했다. 걱정스럽게 수인을 바라보던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지금 수인은 방석을 몇 개나 겹쳐서 깔고 앉아 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진 않는다. 얼굴이 따끈해지는 걸 느끼며 영도는 웅얼거렸다.

"엉덩이는 좀 어때?"

"방석 여러 겹 해서 앉아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정말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영도는 김치 하나를 들어 수인의 수저 위에 올려줬다. 고기를 못 올리고 김치 같은 걸 올리면서 맛있게 먹으라고 해야 하나 싶어 심히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수인은 불만 없이 김치를 올린 밥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잘 먹었다.

피로가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멍했다. 그게 귀여워서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오물오물 거리던 수인이 꿀꺽 먹자 영도는 다른 반찬을 집어 수저 위에 올렸다. 그러자 다시 먹었다. 지금까지 남이 뭘 먹든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수인이 먹는 것 하나 하나가 신경 쓰여서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묘하게 설레는 걸 느끼며 영도는 수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을 입에 넣은 채로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한쪽 뺨이 동그랗게 오른 수인은 턱을 움직였다. 다람쥐 같다. 영도는 뿌듯하게 수인을 바라봤고, 처음에는 영도를 응시할 수 있었던 수인은 점점 부끄러워져선 눈을 내리뜨게 되었다.

애매모호한 분위기였다. 이렇게 간질거리는 느낌은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아 계속 느끼고 싶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인은 재차 입 안에 있는 걸 씹었고, 영도는 수인이 밥 한공기를 다 먹을 때까지 본인의 수저 한 번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괜찮은가 싶더니만 점점 여파가 오는 듯 싶었다. 몸이 나른하니 자꾸만 눈이 감긴다. 지금 영도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서선 하품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전에 가게에서 산 복실거리는 느낌의 하얀 니트를 입고는 팔짱을 끼고 있으려니 웃음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어 눈을 내리뜨자 영도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졸리면 가서 더 자."

묘하게 다정하단 말이야. 다른 때보다 배는 더 다정하고 상냥해진 것 같다면서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프면 알아서 챙겨먹고. 오늘은 늦게 들어올지도 몰라."

"네. 알았어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도 돼. 급하면 로비의 지용씨한테 연락을 취하든가."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말이야. 혹시라도, 그... 거기가 안 좋은 거라면 아는 의사가 있으니까 진찰을 받게 해줄게."

제대로 된 단어를 사용하진 않더라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수인은 담담히 말했다.

"엉덩이 안쪽은 괜찮아요. 형이 그렇게 뚫어져라 봤잖아요."

"그, 그건!"

그렇게 해댔는데 정말 괜찮을까 싶어 싫어하는 수인의 발목을 잡고 억지로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을 보긴 했지만 수인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거론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던 영도는 어버버 거렸다. 그러다 말고 헛기침을 한 그는 애써 태연히 말했다.

"정 이상한 것 같으면 전문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이만 가 봐요. 이러다가 오늘 일 하나도 못하겠는데요?"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수인에게서 여유로움이 넘쳐 흘렀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얼굴을 보여도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는 것에서 뭔가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다녀올게."

마음이 편안해진 영도는 수인의 팔을 감싸고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간지러운 인사법에도 둘은 스스럼이 없었다. 가만히 있던 수인은 영도가 떨어지자 미소를 지으며 '조심해서 다녀와요.'라고 말했다. 대답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인 영도는 바로 몸을 돌렸다. 더 머뭇거리면 집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 영도는 벽에 등을 기대곤 긴 한숨을 쉬었다. 만족스럽다. 뭔가가 가득 채워진 듯한 포만감이 있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있던 영도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나 벌써 20분 째 기다리는 거야.]

매니저 용한이었다. 요새 집 앞에서 픽업할 때에는 준식을 보내더니 오늘은 날이 날이다 보니 직접 온 모양이었다.

"20분 가지고 뭘 그래. 지금 엘리베이터 탔어."

[얼른 와라. 미용실이랑 의상실 들려야 하거든? 너 읽어볼 것도 많아.]

"회견이라고 하더니만 각본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야?"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 일단 얼른 나와. 뛰라고.]

"그러지 뭐."

다른 때와 달리 지금의 영도는 지나치게 고분고분 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던 만큼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너 오늘 기분이 꽤 좋다?]

일이 일이다보니 아침부터 시어머니 우거지상은 아닐까 싶었는데 말이다.

용한의 말에 영도는 어깨를 으쓱이며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내가 언제 기분 안 좋을 때가 있었나?"

이건 또 지나치게 오바를 하는 것 같은 형색이었다. 기자회견이 있는 당일, 험악하게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지금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던 용한은 일단 오기나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지용에게 인사를 하고 난 후 맨션 밖으로 나온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겨울 하늘이 두 눈 가득이 들어왔다.

"하늘 참 좋다."

한껏 올라간 입술 끝에서 생생함이 느껴졌다.

양 손을 주먹 쥐어서 위로 주욱 뻗은 영도는 일이나 하러 가자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영도가 나가고 난 후 혼자 남게 되었지만 쓸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파에 쿠션을 몇 개 올리고 천천히 자리에 앉은 후에 뒤로 몸을 기댔다. 챙겨온 담요를 덮고 있으려니 한없이 나른하고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평온한 적이 달리 있을가 싶을 정도였다.

오늘 기자 회견이 생방송이라고 했던가. 분명 12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 줄은 모르겠지만 부디 영도에게 별 탈이 없었으면 싶을 따름이었다. 조용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모두가 웃고 넘어가 버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쉽게만 풀릴 리가 없겠지.

수인은 눈을 감았다. 잠깐 눈이나 붙이자 싶었다. 그에 맞춰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막 잠에 취해 있던 참인지라 바로 눈을 뜨긴 해도 몸이 움직이진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앞으로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아든 수인은 나른한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물었다. 물음에 대답이 없다. 조용하기만 한 수화기 반대편에 수인은 재차 물었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실례합니다. 거기 원혁씨 댁이지요.]

"그런데요?"

누가 영도를 찾아 전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바로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목소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 수인의 걱정을 덜어내듯이 상대가 조금 들뜬 어조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접니다. 모르시겠어요?]

넌 나를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뉘앙스로 묻는 말에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아.'하는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어요. 형은 방금 나갔어요."

[아아, 실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실은 원혁씨가 두고 온 게 있어서요.]

이후로 상대가 무슨 말을 더 하자 수인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다 인상을 썼다. 오늘 아침부터 들뜬 상태로 있더니만 결국 뭐 하나 두고 가버린 거로구나. 수인은 알았다고 대답을 했다.

"그걸 전해드리기만 하면 되나요?"

[네. 있다 11시 즈음에 갈 테니까 꼭 좀 챙겨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11시요? 알았어요. 그 때까지 준비해 둘 게요."

대답을 하고 난 후, 수인은 전화를 끊었다.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그때까지만 쉬고 있자며 수인은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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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몇 번째의 기자회견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생각을 하려 해도 머리 속이 몽롱하기만 할 따름으로 성가시기도 했다. 집에서 막 나설 때의 기분 좋았던 상태는 정리가 되어 지금 영도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신경 쓰이기 때문일 터였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시경이 빙글거리고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다른 때의 요란한 차림이 아닌 검은 수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으니 좀 사장다웠다. 머리도 블루블랙으로 새로 염색을 해 인상도 한결 차분해졌다. 오늘의 기자회견을 노리고 일시적인 변신을 꾀한 것일 터였다.

시경은 영도를 바라봤다.

"준비한 건 읽어봤어?"

"읽어봤지."

"그래도 따라갈 거야?"

"일단 상황 보고."

시경의 옆에 서있었던 용한은 놀라 영도를 바라봤다. 상황을 볼 것 없이 일단은 그대로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였다.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데. 라는 시선을 보내도 영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당돌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눈빛을 던지는 영도를 확인한 용한은 초조해져선 시경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리 묻는 시선에 시경은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사장님. 그랬다가 일이 커지면 어떻게 해요."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드는 용한과 달리 시경은 느긋했다.

"일이 커지면 커지는 대로 두는 거지.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을 거야."

이 사람은 지금 일을 재미로 하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경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쪽도 다 때려쳐 버린다?

용한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나마나 시경은 넥타이의 안쪽에 손가락을 넣어 두어번 흔들었다.

"그래. 그쪽 관계자들은 다 도착했고?"

"이유라 소속사 사장도 왔습니다."

"그래? 그 늙은 두꺼비가 웬일이래? 사람들 사이에 두꺼비 한 마리가 앉아있으면 우리가 긴장이라도 할 거라 생각한 건가."

빈정거리는 시경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게 진짜 시경의 상태인지, 단순히 연극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라보는 시선에 시경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괜찮아. 말했잖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영도의 앞에 선 시경은 웃었다. 입가는 웃지만 눈은 전혀 아니었다. 그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영도도 조금은 머리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한결 차분해진 영도의 얼굴을 본 시경이 옆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은 입장 표명부터 하고 나중에 이유라가 나오면 그 때 영도 내보내. 우리가 먼저 나설 것도 없고 서두를 필요도 없어. 열애설에 대해선 그냥 입 꾹 다물어. 그에 대한 대답은 영도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시경이 안쪽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지켜보는 동안 영도는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조금은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수인에 대해서 조금씩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다.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영도의 옆으로 아름다운 여자가 다가왔다.

"일단 자리에 앉아있어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인예도 밖으로 나왔다. 워낙에 화려한 미모에 차림이다 보니 회견장에 나온 기자들 중 몇은 인예를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도한 모습으로 있던 인예는 자리에 앉는 영도에게 커피를 권했다.

"고마워."

커피의 맛을 본 영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폼으로 비서노릇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정말 어떻게 할 거예요?"

"뭐가?"

"이유라랑 연인 사이라고 할 거예요?"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쪽은 어떻게 할 건데?"

"미쳤냐고 턱이라도 걷어차 줘야지요."

커피를 입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부는 인예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유라쪽 질이 나쁘긴 해도 우리가 크게 꿀리는 입장은 아니잖아요. 상황이 좀 꼬이긴 했어도 마음 먹으면 해결 못할 것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버려요. 오늘 사장님 보니까 뭔가 마음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말에 영도는 시경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시경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턱 끝에 손가락을 댄 채로 말을 듣는 모습은 진지해 보여, 그러고만 있으면 진짜 사장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헐랭이고 노랭이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할 일은 해야만 하는 거겠지. 하지만 사전에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쪽에서 준비한 각본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대처법들이 적혀 있었다.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는 이유라와의 열애설을 인정하는 뉘앙스의 발언도 적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가면 저쪽과 아귀가 맞아떨어져 보다 수월한 기자회견이 될 터였다. 끝나고 나서 2달 동안 이유라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 언론에 몇 장 흘리다가 어느 순간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 한다 해서 정말 사귀는 건 아니고 그저 연기를 하면 될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연기를 할 마음은 들지 않고 거북하고 불쾌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원혁씨. 슬슬 준비하시죠."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영도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인예를 비롯해 소속사 사람들이 긴장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잘 하고 와요."

모두의 대표로 인예가 한마디 하는 순간 영도는 안내를 하러 들어온 사내를 따라 나섰다. 마지막 순간 시경과 눈이 마주쳤다. 내내 싱글거리고 웃던 그가 지금은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위로 세워진 엄지가 아래로 내려간다. 시경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뭉개버리고 와.'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여튼 저 사람은 사장이 될만한 그릇이 못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뭉개버리라니. 말이 되는 거야. 정말 그렇게 해버릴까 보다. 그러는 동안 영도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앞장을 서던 사내가 옆으로 물러나고 영도는 바로 앞으로 보이는 회견 무대를 확인했다.

바깥에는 기자들도 많고 방송국 카메라도 여러 대 보였다. 어느 방송사에는 지금 생방송을 실시하고 있다던데, 정말 할 일 없구나 싶었다. 이런 걸 생방송으로 내보낼 예산으로 차라리 다른 걸 할 생각을 하든가.

한숨을 쉬며 영도는 칸막이 안에서 바깥 상황을 살펴봤다. 이유라가 즐겁게 기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히 이유라의 미모에 대해 칭찬을 하는 기자도 있었다. 그러면 이유라는 별 말을 다 한다는 듯 뺨에 손을 대곤 방긋 웃었다. 완전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그러면 원혁씨와의 열애설을 인정하신다는 건가요?"

[인정 한다기 보다는 그냥 친한 동료일 뿐이에요. 같은 작품을 하면서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식사나 외출도 하게 되었을 뿐이에요.]

"아직 젊은 남녀이고 두 분 다 미남미녀가 아니십니까.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시다보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요. 지금으로선 확실하게 해드릴 말이 없답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말은 여자분 보다 남자분이 하는 게 낫다 이건가요?"

[그런 게 아니에요. 왜 자꾸 그런 쪽으로 몰고 가세요.]

얼굴 옆에 손을 댄 이유라는 '어머나.'라는 느낌으로 웃었다. 오해를 받으면 싫은 내색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였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화기애애했다. 오해를 받는 게 하나도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긍정을 하는 것 같은 뉘앙스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의 손은 바빠지고 타자를 치는 손놀림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서 영도가 나타나 열애설에 대해 입만 다물고 있는다면 그건 굳히기로 들어가는 거였다. 나름 유명한 커플의 탄생이 되는 셈이었다. 결혼 적령기인 두 사람이니 이런저런 말로 엮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원혁씨. 슬슬 준비를 해주십시오."

스텝의 말에 영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있다는 사인을 받은 스텝이 손을 들자 회견을 진행하던 이가 마이크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원혁씨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기자 여러분들은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 주시고 사전에 배포한 용지를 참고하셔서 질문을 하심에 있어 수위를 조절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안내 방송을 하는 동안 원혁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가 등장을 하자 다른 의미로 회견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불빛이 터지고 카메라들도 줌으로 잡기에 급급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주변 관심에도 불구하고 영도는 차분한 얼굴로 이동해 자리로 가 똑바로 섰다.

영도는 주변을 둘러보곤 마이크 상태를 확인했다. 옆으로 다가온 여자가 마이크 위치를 바로 잡고 스타일리스트가 셔츠의 모양을 바로 잡아줬다. 그녀들이 물러난 후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환하게 터지는 플래쉬 때문에 눈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영도는 우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난 후 자리에 앉았다. 몸을 앞으로 내민 영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이미 다들 아시다시피 원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 겠습니다.]

원혁의 장난스러운 자기소개에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듯 앞을 주욱 둘러보던 영도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입을 일자로 다문 그는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인해 보이는 그 모습게 매혹될 것 같았다. 실제로 몇몇 여기자들은 영도에게 홀라당 빠져버린 모습이었다. 영도의 분위기에 눌리고 있었다. 그걸 저어하기 위함인지 한 기자가 용감하게 질문을 던졌다.

"원혁씨 질문 하나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십시오. 그러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까.]

"12월 초에 이유라씨와의 열애설이 기사화되긴 했지만 그 이전부터 많은 의혹이 있었습니다. 혹시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두 분 사이에 다른 사람들 모르는 일들이 있었던 게 아닙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그 때 전 영화 촬영을 막 끝내던 참이었고 해외로 화보 촬영도 나가 있던 참이었습니다. 당시 이유라씨는 연극 무대에서 활동 중이었고요. 어떻게 봐도 접점은 없지요. 이번 드라마 촬영이 잡히고 배우들이 모여 처음 인사를 하던 자리가 사실상 이유라씨와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된 시점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드라마 촬영 전에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건가요?"

[요 몇 년간 제가 지나칠 정도로 일중독에 빠져 있었다는 건 알만한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영도는 웃었다. 아직까지는 열애설을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초반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지 기자들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건 이유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그녀는 때때로 다정한 눈길로 영도를 바라보곤 했다. 그 모습만 보면 두 사람은 영락없는 커플의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찍는 도중에 사이의 진전이 왔던 겁니까?"

[무슨 진전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동료애라면 적당한 선에서 잘 쌓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걸 두고 묻고 있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유라씨를 동료 배우가 아닌, 여자로서 보시게 된 게 언제인지를 여쭙는 겁니다."

[이유라씨는 원래 여성분이십니다. 전 그녀를 남자로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전 그렇게 머리 나쁜 사람 아닙니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날린 말에 회견장으로 웃음이 퍼져나갔다.

원활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다들 이유라와 원혁은 사귀는 게 맞구나-라고 생각들 하는 것 같았다. 그건 이유라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다물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은 자심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원혁이 대답을 하고 행동을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한 여기자가 앞으로 녹음기를 내밀며 물었다.

"전에 맨션 앞에서 찍힌 사진에 대해서 해명하실 건 없으십니까?"

[어떤 해명을 말입니까.]

"굳이 묻지 않아도 아실 텐데요. 그만한 관계시라면 굳이 기자회견을 하지 않고 인정을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렇게 일을 벌이는 건 앞으로 시작될 드라마 홍보의 일환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걸 아는 네티즌들은 눈에 너무 빤히 보이는 수라며 여러 가지 댓글들을 달고 있는데요. 아직 모르셨습니까."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두고 드라마 홍보라 생각들을 하시다니. 참 유감입니다.]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뜸을 들이며 영도는 이유라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을 때, 이유라의 뺨으로 홍조가 서렸다. '그래. 이거야.' 그리 말하는 듯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걸 확인한 영도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애초에 그 사진에 찍힌 사람은 이유라씨도 아닌데 말이지요.]

작은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지금까지 있었던 카메라 통신과 다르게 그 사진은 이번 열애설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그걸 두고 이유라가 아니라 함에 기자들이나 방송국에서 나온 이들 모두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라는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지금 영도가 이상한 말을 할 것을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미쳤냐고 말하는 시선을 무시하듯이 영도는 옆에서 건네어지는 파일을 열어 종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제가 업고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남자인 걸요.]

종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순간 플래쉬 불빛이 더 세게 터져 나왔다.

요란한 소리와 불빛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영도는 앞으로 나온 기자에게 사진을 건네었고 그건 기자들 손으로 넘어갔다.

이유라는 물론이거니와 그쪽 사무실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뒤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쪽이 내민 사진을 빼앗고 싶겠지만 그러면 기자들의 원성을 살 게 분명했다. 그들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다른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이유라씨가 아니라 남자였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분은 어떤 관계이신 겁니까."

[며칠간 제 집에서 얹혀 지내는 사촌동생입니다. 서울 상경 축하해준다고 술 좀 먹였다가 애가 일어나질 않아서 제가 힘들게 업고 데려왔습니다. 애가 왜소하기는 해도 작은 키는 아닌데 설마하니 여자로 오인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사촌동생이 이번 사건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어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저는 재미있었지요. 이런 해프닝은 좀체 없는 일이 아닙니까. 남자를 업고 있는 걸 두고 이유라씨와 열애설에 대해 말씀하시는 기자 분들이나, 또 그걸 두고 진짜인 양 밀어붙이는 상대 기획사들의 움직임 같은 것들도 말이지요.]

꽤나 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걸 중간에 끊는 이들은 없었다. 모두가 귀를 열어 영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쪽을 보는 시선들에 대해선 충분할 정도로 의식하고 즐기는 영도였다. 의자에 몸을 붙인 영도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 이해가 안 갔습니다. 열애설 같은 건 터트려봐야 여자분 쪽이 더 손해가 되는 일일텐데, 왜 굳이 이렇게 질질 끌고 가나 싶어서요. 그래서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남자인 제 쪽이 움직이기 보다는 여자분 쪽에서 알아서 정리를 해주셨으면 했지요. 저희 쪽에서 혹 말실수를 했다가 이유라씨께 누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런 기자 회견까지 하게 되고. 정말 유감입니다. 그렇죠? 이유라씨?]

마지막은 이유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에 반해 영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표정의 대조가 극명한 두 사람을 사진으로 찍기에 바쁜 기자들 사이로 한 여자가 손을 들었다.

"그 말씀은 이번 열애설이 진짜가 아니라는 겁니까."

[왜 진짜라고 생각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라마 홍보를 위한 열애 조작설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건 또 아니죠. 왜냐하면 이건 저나 이유라씨나 둘 다 의도하지 않은 사고이니까요.]

"하지만 그 사진은 이유라씨 측에서 나온 겁니다."

누군가 금기가 되는 말을 꺼냈다. 워낙에 열기를 띄고 있고 기자들이 몰려 있어서 누가 말을 꺼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걸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번 열애설은 이유라씨 측에서 흘린 가짜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원혁씨나 소속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라는 겁니까?"

"원혁씨는 피해자인 입장이 되는 겁니까? 말씀을 해주십시오!"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이유라는 대형 기획사 소속이기 때문에 쉽사리 건들일 순 없으나 지금 이 기자회견은 생방송이었다. 영도가 깔아둔 곳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지금껏 무서워서 쉬쉬하던 기획사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불만이 있어도 눈치가 보여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기자들은 이번이 기회라는 듯 시끄럽게 떠들어 댔고 선을 넘어 영도가 앉아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오는 기자들도 더러 있었다. 보디가드들과 기자회견을 주최한 이유라 소속사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어떻게든 정리를 하려 하고 있었다. 일단 기자회견을 파장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뒤에서 '회견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들 질문을 삼가 주십시오!'라고 떠들어 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막으려는 이들과 그걸 밀치고 하나라도 더 얻으려는 이들이 필사적으로 부딪쳤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영도가 마이크를 잡자 순간적으로 고요함이 감돌았다. 아니. 그건 적막감이라 할 수도 있었다.

[꼭 피해자라고는 할 수 없지요. 아름다운 여성분과 사귀고 있다는 오해를 받은 건데요. 기분 좋은 해프닝이었습니다.]

이유라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모습이 모두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그와 반면에 영도는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다음 번에 진짜로 열애를 할 것 같다 한다면 제가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의외로 가볍지 않은 남자라 아무하고나 막 사귀진 않습니다.]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라는 반쯤 몸을 일으키며 '원혁 너-!'라고 소리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 기자들이 많은 곳 앞에서 실수를 했다 싶은 모양이었다.

영도는 그런 이유라를 내려다보곤 한족 입술 꼬리를 살짝 올렸다. 비웃음은 금방 지워졌으나 짧은 순간 영도가 보낸 눈빛은 이유라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나. 너 같은 게 넘볼만한 남자는 아니다.

이유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는 동안 영도는 그 옆을 스쳐지나갔다.

이미 이유라측 사람들이 나서서 회견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도가 일어나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유유히 빠져나가는 동안 날카로운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옆을 돌아보자 60대 중반의 머리가 다 벗겨진 기름기 좔좔 흐르는 중년 사내가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이유라 소속사 사장이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상황을 말아 먹었으니 분노를 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난 네 뜻대로 움직여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비웃듯이 한쪽 입술 꼬리를 올린 영도는 당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영도 너!"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선 목청부터 높이는 건 용한이었다.

설마하니 영도가 이런 식으로 행동을 취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버버버 거리는 동안 용한의 옆에 선 인예가 손을 들었다. 영도도 손을 들어 두 사람은 공중에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엄지를 세워 영도 쪽으로 내민 인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 했어요."

"고마워."

"지금 무슨 말들을 하는 거야!"

개운한 영도와 고소해하는 인예 사이에 선 용한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장사장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이건 완전히 대형 사고를 친 것 밖에 안 되는 일이야! 너 이러다 이 바닥에서 일 못 한다?!"

"그러면 안 하면 그만이지."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용한은 입을 크게 벌렸다.

지금 그게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어린애냐.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미쳤어? 그리 따져 묻고 싶은 듯 바라보는 눈길에도 영도는 태연했다.

"나 돈 벌만큼 벌었어. 꼭 여기 아니더라도 장사하면서 살 수도 있는 거고, 지금 돈 굴려서 세 받아먹고 살아도 되는 거야. 뭐 하면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지어도 되는 일이고."

마지막 말은 별 생각 없이 한 것인데 가장 끌린다.

수인하고 같이 강원도로 내려가서 할머니하고 같이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영도는 홀가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난 지금 아주 개운한 상태야."

"너 정말."

용한은 아연한 얼굴이었다. 영도가 지금 이렇게 팔자 좋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드라마가 방영이 될 거고, 다음 일거리는 시작도 하기 전이었다. 계약까지 마쳤다지만 열 받은 장사장 입김이면 뒤집어질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냥 앉아서 웃기만 하면 되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를 시원하게 하이킥 날리면 기분 좋은 걸까?

머리를 감싼 용한은 앞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들로 인해 머리통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두고 영도는 시경 앞으로 걸어갔다. 팔짱을 낀 시경은 웃고 있었다. 일 다 말아먹고 왔는데 왜 저렇게 웃고 있는 건지를 모르겠다. 시경의 앞에 선 영도는 뚱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다녀왔다."

"잘 했어."

인예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녀는 그렇다 쳐도 시경까지 이러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단계에서 보면 이쪽은 시경에게 막대한 손해를 준 상태였다.

"무슨 속셈이야?"

"뭐가?"

"너무도 호락호락하게 나오니까 이상하잖아."

"너 미친 거 아니야? 너 때문에 손해가 얼마인지 알아? 그 손해 채워 넣기 전까지 넌 절대로 못 나가. 앞으로 노예계약이야. 하루에 21시간씩 일하도록 해. 2차도 나가고 알아서 스폰서 물어서 와. 같은 말이라도 할 줄 알았어?"

"......너무 기다렸다는 듯 줄줄 나오니까 기분 좀 거시기 하다."

"거시기 할 게 뭐가 있어."

하지만 정말 거시기했다. 줄줄줄 내뱉을 때 눈이 웃지 않고 있었단 말이다.

그냥 대충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말을 할 때 보면 사장은 사장이었다. 그래서 쉽게 기어오를 수 없는 거였다. 시경이 말도 안 되는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영도는 잠시 회견장에서 했던 말들을 다시 머리 속에서 재생해 봤다.

후폭풍이 불긴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아닌 건 아니야."

"그래. 누가 뭐래? 너답게 잘했어. 이제부턴 어떻게 할래?"

"일단은 집에 들어가 봐야 겠다. 어딜 가든지 기자들이 달라붙을 텐데. 그런 건 성가셔서 싫어."

"그래. 시상식 외에는 그냥 콕 처박혀 있도록 해. 그게 현명한 거야."

의외로 쉽게 넘어가주고 있었다. 이런 건 시경답지 않은데. 지금은 이렇게 있다가 갑자기 펑하고 폭발하는 거 아니야? 의혹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도 시경은 웃을 따름이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으나 막상 일이 터지게 되자 그냥 그러려니 같은 상태가된 모양이었다. 크게 예민하지도 않고 그저 그런 투로 있기만 하는 것에 영도는 겉옷을 벗었다.

"일단 난 들어간다."

"집 안에 꿀단지가 있나 왜 이렇게 서둘러. 그래. 가 봐라."

시경이 손을 휙휙 젓자 영도는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서둘러 나가는 영도의 뒤로 용한이 졸졸 따라붙었다.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건데. 같은 말이 들리는 걸 확인하며 시경은 귓구멍에 새끼 손가락을 넣고 두어번 후비적거렸다. 그런 그의 옆으로 인예가 다가섰다.

"사장님. 장사장 왔어요."

"그래? 일단 다들 나가있게 해."

시경의 말에 인예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설마하니 내가 그런 뚱땡이한테 질 것 같아? 안 그래. 걱정 말고 나가있어."

시경은 웃어도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인예는 아니었다. 영 신경 쓰이는 듯 인상을 쓰고 있던 그녀는 긴 한숨을 쉬며 나가 있겠다 말하며 몸을 돌렸다. 인예가 나가고 주변인들도 하나, 둘 물러났다. 그렇게 모두가 나가고 정리가 되자 문을 열고 장사장이 들어왔다.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오른 장사장은 분노한 모습이었다. 툭 치면 그대로 폭발해버릴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성큼성큼 들어온 장사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시경 앞으로 걸어가 당장 손을 들었다.

"너!"

"한 대 치려고?"

시경은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쳐 봐. 딱 기자들이 먹기 좋은 떡밥이겠네."

말이 왜 이리 짧은지 모르겠다. 그보다 지금 시경의 삐딱한 자세와 불량스러운 태도에 장사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양 손을 비비면서 아부를 떨던 시경은 어디로 가버린 건가 싶었다. 지금까지 그 앞에서 이런 식으로 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만큼 장사장이 받은 충격의 강도는 꽤 큰 것이었다.

"너, 너 지금."

"장사장님. 이러지 맙시다. 내가 댁보다 어리다고 해서, 성질 난다고 무턱대고 손대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예전 깡패질 했을 때에나 먹혔던 일이잖아. 요즘에는 주먹질 같은 건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는 거 알고 계셨던 거 아니었어?"

귀를 후비면서 말을 하는 시경은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손가락을 빼내면서 '귀지는 없는데 더럽게 가렵네.'라고 중얼거리는 시경의 모습에 장사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이 미친 건가 싶었다. 그만큼 시경의 지금 태도는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엄청나게 분노한 듯 장사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너, 나한테 이리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나직한 목소리에 시경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사악 올라갔다.

"무사하지 못한다면?"

"네 놈의 비디오 다 복사해서 뿌려버릴 테다!"

"마음대로 하시던가. 그 전에 그 비디오가 아직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재차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던 시경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파라.'라고 중얼거린 그는 손가락을 빼내고는 손톱 위로 바람을 훅 불었다. 그리고는 두어번 손을 턴 시경은 팔짱을 끼고 장사장을 바라봤다.

뭔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멍청한 얼굴을 하는 장사장을 앞에 두고 시경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었다.

"왜? 내가 뭔 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셨나 보지?"

"......너 설마 도둑질 한 거냐."

"뭐. 안 했다고는 볼 수 없고. 내가 직접한게 아니니 아니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돼지 멱따는 소리 좀 그만 지르라는 거지. 나 귀 아파."

말과 함께 시경은 두터운 종이를 들어 그대로 장사장의 얼굴을 후려쳤다. 방심하고 있던 참에 퍽-하고 정면으로 들어오는 종이뭉치에 당황한 장사장은 입을 다물었고, 다음 순간 통증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 놀랍기만 했다. 지금껏 살면서 이런 취급 받은 적이 없던 장사장이었다. 시경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리 할 순 없었다.

비디오고 뭐고 일단 이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자 싶어 쌍심지를 키며 고개를 드는 장사장 앞으로 시경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뭐야!"

신경질을 내며 장사장은 종이를 빼앗듯이 채가 버렸다.

구겨서 버리려 했던 그의 눈이 빠르게도 종이 위를 훝어냈고, 자잘하게 적힌 숫자와 글자를 본 그 얼굴이 눈에 띠게 창백해졌다.

"많이 익숙한 장부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장사장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흩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구겨지고 찢겨진 종이가 한 가득 그 품안으로 모여들었다. 

종이를 줍기 위해 꾸물거리는 장사장의 모습이 마치 벌레 같았다. 하지만 진자 벌레는 한 번에 밟아 죽일 수나 있지. 이건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그 외에도 다른 것도 많아. 난 이유라를 비롯해 댁이 관리하는 어여쁜 아가씨들의 모든 비디오를 가지고 있지. 남성분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지금 내가 한마디만 하면 그 모든 게 다 인터넷에 유포될 거야. 난 약점을 잡으면 바로 이용해 먹는 시원시원한 사람이니까."

마지막으로 주운 종이를 품에 안은 채로 장사장은 시경을 올려다봤다.

애써 태연한 척 느긋한 표정을 가장했다.

"거, 거짓말 하지마. 그런 게 너한테 있을 리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그러다가 피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그럴 리가 없다 말을 하려는 순간 목구멍 앞에서 말이 턱하니 막혔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일의 1%의 가능성이 있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입을 반쯤 연 채로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장사장을 바라보면서 시경이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저씨. 주제넘게 굴지마. 지금 네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지? 그런데 안 그래. 실제로 네가 하늘처럼 모시는 대주주 다섯 분들 중에서 세 명은 다 나랑 잤던 인간들이야."

"......."

"내가 한마디만 하면 아저씨 주식은 폭락이야. 그냥 폭락도 아니지. 대폭락. 휴지조각. 그건 즉 파산을 의미하는 거지. 여기저기 일 많이 키워뒀잖아. 하나 무너지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 이번에 사람들 눈 피해서 모 의원님과 인맥도 텄는데 망해버리면 다 끝이야. 그 사람이 파산한 아저씨를 봐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제일 먼저 버려질 거야."

장사장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다녔다. 지금 시경이 하는 말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귀담아 들어야 하는 건가 싶은 얼굴이었다.

어느새 장사장의 등 뒤로 식은땀이 촉촉이 맺히게 되었다. 두터운 살집이 잡힌 턱 끝에 달린 땀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장사장 최대의 위기사항이었다. 하지만 시경의 패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경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끄집어냈다.

"난 이런 사진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

시경의 손에서 펄렁거리는 사진은 반나체로 여자들과 얽혀있는 모의원들과 장사장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눈을 크게 뜬 장사장은 빛과 같은 속도로 시경이 들고 있던 사진을 빼앗아 가선 양쪽으로 찢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갈가리 찢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동그랗게 모아선 입 안에 넣어버렸다. 간신히 삼켜버린 장사장은 사례에 들려 미친듯이 기침을 해댔다. 기침이 잦아들기도 전에 장사장은 시경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

"당신이 의원들 약점 잡으려고 사진 찍을 때, 나도 뒤에서 살짝 찍은 거지. 그런 사진은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유리한 거잖아?"

말과 함께 시경은 다시 사진을 꺼내들었다. 아까와 구도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사진이었다. 기겁을 하며 장사장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시경은 사진을 높이 올렸다. 가까스로 사진을 채가는 것에 실패한 장사장은 아연한 얼굴로 시경을 바라봤다.

시경은 웃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휘며 웃는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뭘까.

눈 앞에 있는 시경이 정말로 전부터 알고 있던 녀석이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별 볼일 없는 놈이 갑자기 나타나 기획사를 하나 차리더니 그 기회사가 점점 세력을 넓혀 나갔다. 얼마나 하려나 싶어 반은 재미로 보고만 있었더니 나중에는 이쪽보다 훨씬 더 잘 나가는 연예인을 키우는 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무슨 말을 해대는지 회유를 해도 시경에게 박힌 연예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소속 연예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시경과 안면을 트게 된 방송국 관계자나 위쪽 인사들은 쉽사리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이쪽이 먼저 활로를 틀었다 싶으면 반발자국 떨어진 곳에 시경이 있었다-라는 식이었다.

그런 것들이 하나 하나 늘어나면서 초반의 단순한 재미는 사라지고, 초조함과 짜증스러움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시경에게 경고를 한다는 의미로 이번 일을 획책한 거였다. 생각보다 쉽게 걸려들고 변변찮은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거봐라. 아무것도 아니지.'라며 우월감에 젖어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 녀석은 더 큰 것을 바라고 일부러 조용히 있었던 거다.

"일단은 흠집을 낸 우리 귀하디 귀한 원혁에 대한 피해보상에 대해서 살짝 대화를 나눠봐야 겠고-."

시경은 양 손을 모아 비비면서 입술 양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고양이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나를 두고 감히 협박을 하려 한 것에 대한 징계도 받으셔야 겠고.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 너한테 넘겨야 할 지도 궁리해야 겠고."

시경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접혔다.

"앞으로 할 일이 정말 많아서, 짜증 밖에 안 나는 걸?"

'이걸 어쩌나.' 같은 뉘앙스로 말을 하는 시경을 보는 순간 장사장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은 장사장의 어깨에 한쪽 발을 올린 시경은 팔짱을 끼었다. 눈을 내리뜬 그의 입가로 어느새 미소가 다 지워져 있었다.

"자, 그럼. 일단은 용서해 달라는 구걸부터 들어볼까?"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내던져지는 말을 들은 장사장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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