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1)

음모에 휘말리게 된 선량한 사내가 여자의 도움을 받아 하나 하나 기술을 늘려가고, 마지막에는 말도 안 되는 액션을 흩날리며 도전해오는 이들을 하나 하나 무찌르는 고전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액션이 워낙에 화려하고 배우들도 준수한데다 쾅쾅 치고 나오는 부분이 있어 보기에 지루할 새가 없었다.

2시간 30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영화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팝콘을 먹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거의 바닥을 보이는 콜라를 쪽쪽 빨며 영도는 수인이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팝콘을 가리켰다.

"그거 어떻게 할까?"

"많이 남았잖아요. 들고 가요"

"들고 가다가 흘리면 어떻게 해."

"주우면 되지요. 뭐가 문제에요."

이쪽이 별거 아닌 일을 가지고 심각한 척을 한다면 수인은 그것을 태연하게 받아치는 편이었다. 듣고 보면 수인의 말에 일리가 있는 부분이 많았기에 영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산 팝콘이나 버리면 아까웠다. 그러면 달리 어디다 챙겨야 할까 싶어 주변을 기웃거리던 영도는 근처에 서있던 여자 둘이 이쪽을 흘깃거리는 걸 보곤 수인의 어깨를 감쌌다.

"일단 장소를 옮기자."

수인은 영도가 신경 쓰는 쪽을 돌아봤다. 여자 둘이 서있는데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뭐든지 한다. 동영상도 찍고 사진 촬영도 가능했다. 지금 영도가 찍히고 있는 걸까.

영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수인은 에스컬레이터에 오르자 바로 중얼거렸다. 

"유명인은 역시 힘드네요."

"힘든 것도 잠깐이고 달리 생각하면 꽤 즐거워. 그리고 유명하기 때문에 얻는 이득 같은 것도 있으니, 이런 것 정도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해야지."

"헤에. 그래요?"

".......물론 좀 예민하게 반응을 취할 때도 있지만 말이야."

이쪽도 사람인지라 언제나 하하호호하면서 좋게만 넘어갈 수 없는 게 아니겠는가. 가끔은 기자들이 내미는 카메라가 소름끼치게 싫을 때가 있었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인데도 낯선 무엇을 앞에 두고 있는 양 굳은 표정 밖에 나오지 않을 때 '내가 왜 이러는 거야.'싶은 거다.

그렇게 한 번 난리를 치면 다음에는 또 괜찮아진다. 그게 계속 반복되는 거다.

"형이네요."

"응? 뭐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도는 수인이 가리키는 쪽을 확인했다.

벽 쪽으로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원혁 주연의 영화 미로였다. 올 여름에 개봉 되어서 상당히 화제가 된 작품이었다. 화제라고 해봤자 돈과 언플의 승리인 거지만 말이다. 묘하게 시니컬해지는 걸 느끼며 옆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는 동안 수인이 물었다.

"언제 찍은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봤어요?"

"이번 여름에 개봉한 거야. 뭐 서운하지 않게는 관객들을 동원했지."

"영화 많이 찍었어요?"

"6편 정도 찍긴 했는데 그 중 마음에 드는 건 2편이고, 흥행에 성공한 건 3편 정도야."

"나머지 1편은 뭐예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찍은 거지."

작품성이고 뭐고 살펴 볼 여력이 없던 때도 분명 있었다. 그 때에는 500을 당장 통장에 입금해 준다는 조건으로 한달 동안 영화에 매진한 적도 있었다. 돈이 목적이기 때문에 연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산만한 느낌의 영화였다.

클로징이 되었을 때 허망하기까지 했다. 다 엎고 다시 찍자는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지만, 개봉이 되었고 아이러니 하게도 평단의 좋은 평가를 얻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화 좀 본답시고 씨부리는 평론가 놈들의 헛소리를 코웃음으로 받아넘기게 된 게 말이다. 한 때에는 평가 한 줄에도 일희일비했었는데 말이다.

다 옛날 일이었다. 그 때처럼 세상이 무조건 싫지도 않고 그냥 저냥 살아가고 있었다. 지난 몇 년 간에는 크게 감동도 없고 슬픔도 없고 기쁨도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들뜬 적이 지금까지 없었는데........

"배고프지 않아? 뭐 먹고 싶어?"

"그냥 집에 들어가서 먹어요."

"이렇게 일찍 왜 들어가냐. 나 모처럼 나온 거라 더 밖에 있고 싶어."

다른 칸 에스컬레이터로 넘어가면서 영도는 뒤로 몸을 기댔다. 위험하게 그게 뭐냐고 말하고 싶은 눈길로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아래쪽에 서있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좋은 차림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곳과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건 일상의 한부분이겠지만 수인에게 있어선 아니었다. 아직도 이 공간이 낯설기만 했다. 그런 이쪽에게 뭘 먹고 싶으냐 물어도 바로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뭘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닐진데 괜히 눈을 내리뜨게 된다.

입을 다문 채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수인을 확인한 영도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손을 든 그는 수인의 어깨에 올렸다.

"그럼 나만 믿어. 내가 아주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마."

어깨를 쥔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얼굴이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바깥에 나와 있다고 해서 불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곁에 영도가 있으니까.

그만 믿고 의지하는 건 안 되는 거겠지만 지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영도가 하자는 대로 움직이면서 서울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며 수인은 '기대할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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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곳이라 해서 어떤 곳일까 싶었는데 이건 앉아서 밥을 먹기가 황송할 정도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데이트 중에서도 지나치게 힘을 넣을 때에나 찾는 것이 가능할 법한 그런 멋들어진 가게에 이렇게 앉아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어울리지 않는 의자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있는 듯한 기분에 수인은 긴장해서 테이블 중앙에 놓인 가느다란 화병만 노려보고 있었다.

"왜? 내가 주문한 음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영도의 물음에 수인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결정하기엔, 다들 제가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어요."

영도가 고르라며 메뉴판을 줬어도 곤란한 상황이었을 거라며 수인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천이나 빛이 나는 식기. 느낌이 좋은 의자나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소리와 달콤한 냄새를 맡았다. 모든 것이 최고였다. 세세한 모든 부분에 신경을 쓴 장소였다. 그런 곳이니 분명 음식들도 평범하진 않을 터였다.

"많이 비싸요?"

"얼마 안 돼."

"거짓말. 안 비싸면 내가 가격표를 못 보게 했을 리가 없잖아요."

"원래 그런 건 사는 사람만 보면 되는 거라서 안 보여준 거야. 정말 하나도 안 비싸. 여기 오너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 비싸게 받지도 않아."

연예인 생활을 길게 했다더니만 아는 사람들도 많구나. 이런 가게의 오너라 한다면 분명 부자인 거겠지.

수인은 재차 가게를 둘러봤다.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레 주변을 기웃거리는 동안 빠르게도 음식이 나왔다.

"실례합니다. 음식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옆으로 다가온 웨이터가 하나 하나 음식을 내려놓았다. 하나는 해물 오무라이스, 하나는 연어알 크림스파게티, 그리고 최고급 스테이크였다. 3가지나 시키면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양은 적었다. 웨이터가 물러나고 영도는 오무라이스를 수인의 앞으로 내려놨다.

"먹어봐.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

처음이니 너무 느끼한 음식은 권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밥을 시킨 거였다. 수인은 수저를 들고는 앞에 놓인 오무라이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예쁘게 치장이 된 음식을 본 건 처음이에요."

"음식은 겉보기보단 맛이 중요하지."

"그러네요. 잘 먹겠습니다."

끝부분을 조금 잘라서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수인을, 영도는 긴장한 눈으로 바라봤다.

"맛있다."

"그래? 이것도 좀 먹어봐."

수인이 맛있다고 하자 기분이 좋아진 영도는 당장 스테이크를 썰어 수인의 접시 위에 올려줬다. 고기는 포크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덜 익은 듯한 느낌인지라 이상했지만 입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혀 끝에서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놀라서 포크를 문 채로 있으려니 영도가 재차 음식을 권했다.

"괜찮지? 여기 스파게티도 괜찮아. 먹어봐."

수저에 대고 돌돌 만 스파게티를 들어 수인에게 내밀었다. 수저를 통째로 받아 한 입에 넣은 수인은 고소하고 깊은 향에 고개를 끄덕였다.

"독특하기는 한데 맛이 좋네요."

"여기 빵도 맛있어. 마음에 드는 잼을 발라 먹으면 되는 거야. 발라줄까?"

수인이 맛있다 하고 잘 먹으니 영도는 들뜬 모양이었다. 기분 좋게 빵을 뜯어서 크림을 바르는 그는 만면에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요리가 나오고 나서 이쪽만 먹지 영도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만하고 그쪽도 먹으라 하고 싶었지만 영도가 워낙에 기분 좋아 보여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자 싶었던 수인은 잠자코 밥을 먹었다.

모든 것들이 수인에게 있어 낯선 음식들이었다. 그런데도 맛이 좋았다. 향신료 맛도 강하지 않고 음식 재료와 맛을 최대한 살리려 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맛이라면 암만 비싼 값이라 해도 지불할 수 있겠거니 싶었다.

야금거리면서 잘 먹는 수인의 모습에 영도는 흡족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크게 잘라 입에 넣었다. 아래 입술을 혀로 핥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이 좋구나. 눈을 감고 감탄하듯 그리 생각을 한 영도는 다른 것도 맛봤다. 초반에는 수인을 좀 챙겼지 먹기 시작하자 말이 없어졌다.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였다. 그렇게 한 5분 정도를 먹었을까. 웨이터가 조심스레 옆으로 접근을 했다.

"실례합니다. 와인 한잔 드릴까요?"

"와인은 시키지 않은 것 같은데요."

"저 쪽 테이블의 손님께서 보내오신 겁니다."

주스를 마시며 영도는 웨이터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30대 중반 정도의 부유해 보이는 여성이 윙크를 한다. 이런 류의 추파가 처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영도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생각해서 한 잔만 받기로 하지요."

영도가 되었으니 가보라는 말을 하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안도해 하던 것도 잠시 웨이터는 영도가 내민 잔에 와인을 따랐다. 수인도 덩달아 와인을 한 잔 받았다. 웨이터가 물러나고 영도는 당장 수인을 바라봤다.

"너 절대로 마시지마."

매서운 눈길과 손가락까지 동원해서 꼭 집어 하는 말에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생겼다.

"마시라고 해도 안 마셔요."

"그래. 그 태도야. 아주 훌륭하다."

수인이 잔을 내려놓자 영도의 표정이 풀렸다. 흡족해하던 영도는 잔을 두어번 원을 그리듯 돌리고 코를 대고 향을 맡더니 '내가 싫어하는 거잖아.'라면서 그냥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나이프를 드는 폼이 익숙했다. 이런 곳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투였다. 이제와 새삼 그런 걸 궁금해 하는 것도 이상타 싶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매번 이런데서 식사해요?"

"이렇게 비싼데서 매번 어떻게 먹어."

"역시나 비싼 곳이로구나."

아뿔싸 싶었던 영도는 당장 입을 다물었다. 이런 기본적인 수법에 넘어가 순순히 토설해버린 것도 살짝 억울했던 영도는 말을 돌렸다.

"모처럼이니까 뭐 어때. 오늘은 기녈일이야."

"무슨 기념일이요?"

"그......."

도대체 무슨 기념일이라 해야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눈을 굴리던 영도는 가까스로 생각해낸 걸 말했다.

"밥솥 산 기념일이다."

"그게 뭐예요."

정말 그게 뭔가 싶었다. 하고 많은 말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런 찌질한 말이라니.

원영도. 네가 지금껏 찍은 멜로 드라마나 영화가 몇 편이냐. 외운 주옥 같은 대사만도 헤아릴 수 없는데 밥솥이 뭐야. 차라리 미친 척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바로 기념일이라 할 수 있겠지.'라고 말하지 그랬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번 분위기도 꽝이었다. 때문에 이번에는 조급하게 화제를 돌려버렸다.

"입맛에 맞아? 시골 밥만 먹었을 거 아니야."

"괜찮아요. 독특하고 간이 센 것 같기는 한데 맛있어요. 비싼 거라서 더 그런 모양이에요.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겠네요."

빈말이 아닌 듯 수인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맛있게도 먹고 있었다. 그걸 보자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뿌듯하기만 했다. 영도도 원래 이곳을 자주 찾진 않았다. 미팅이나 다른 사람이 산다고 하면 모를까. 식사 한 끼에 몇 십씩 쓰는 건 그의 성격과 맞지 않는 부분이었다. 오늘은 돈을 쓰러 온 건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실상 아무것도 몰라 어린애 같은 수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보여주는 재미가 이렇게나 클 줄은 몰랐다. 수인이 좋아하면 할수록 이쪽도 더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그런 감각이었다. 마치 예전 어렸을 적에 첫사랑의 천사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감정이었다.

"저녁에는 분위기 좋은 곳으로 산책이나 갈까."

수저를 문 채로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내일부터 일 나가야 하잖아요. 안 피곤해요?"

"피곤하진 않아. 오늘 무척 재미있어."

영도는 헛기침을 하며 망설이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너랑 있어서 그런가 보다."

"........"

수저를 문 채로 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그건 경직된 거였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은 듯 수인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어울리게 느끼한 말은 하지 말아요."

"너 정말-."

이 좋은 분위기 망치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그래서 수인다웠다. 다른 사람들과는 좀 많이 다른 게 수인만의 개성이 아니겠는가. 상당히 너그럽게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영도는 칼질을 해서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런 영도의 모습게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오무라이스에 스파게티 면을 올리고 가볍게 비벼서 같이 먹었다. 이것도 나름 괜찮았다. 오물거리면서 음식을 씹는 동안 점점 수인의 입술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일부러 웃고자 하는 건 아닌데 그냥 웃음이 나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영도가 무심결에 한 말이라 해도 기뻤다. 이렇게나 기분이 좋아질 수 있구나 싶어 놀랍기조차 할 정도였다.

다음에도 또 둘이 나와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표현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수인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그리고 그 때 접시 안쪽으로 스테이크 조각이 내려왔다. 고개를 들자 영도가 아닌 척 스파게티를 말아 입에 넣는다. 우적거리면서 다른 쪽을 살펴보는 그의 미간으로 주름이 생겨 있었다. 나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어린애처럼 여겨졌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으나 두 사람 사이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얄딱구리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다 먹고 슬슬 일어날 즈음 누군가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이리로 오고 있었으나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 영도의 노력에도 불구, 상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실례합니다. 혹시 원혁씨 아니십니까?"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목소리였다. 때문에 지뢰를 밟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영도는 허리를 세워 다가온 상대를 바라봤다. 단신에 눈매가 위로 찢어져 비열한 느낌의 사내였다.

누군가 했더니 이유라의 매니저였다. 원래 매니저가 많은 이유라다. 그 중에서도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나서는 이로 유명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이런 타이밍에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바쁘실 시기에 여유가 있으시군요. 연말 행사 준비는 잘 되고 있으십니까."

"수월하게 잘 진행이 되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우리 유라도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애가 요새 뭐가 그리도 좋은지 하루 내내 방글거리고 잘 웃어서 보는 쪽 마음이 다 흡족합니다."

"그러십니까. 잘 되었군요."

이유라가 웃으면서 지내든 말든 이쪽은 전혀 관심 없다. 그런 뉘앙스로 영도는 사내를 흘겨봤다. 서늘한 그 시선에도 사내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괜찮으시다면 안쪽으로 가서 대화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사내의 말에 영도의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우습기 그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해선 따로 자리를 가지자 하면 이쪽이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일 거라 생각했던가. 영도는 사내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곤 고개를 숙였다.

"기자를 데리고 와서 이렇게 선 채로 대화를 나누는 사진을 찍게 하는 저의가 뭡니까."

"기자가 있었습니까? 전 몰랐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사내는 어디에 기자가 있느냐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보여주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짓는 것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가소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도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서로 만나게 될 테니 대화는 거기서 하도록 하지요."

"원혁씨. 서로 좋을 일 합시다."

나직한 속삭임에도 영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빙빙 돌리며 말하길 그만두기로 한 것인지 사내는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결혼까지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유라가 아주 귀해요. 그러니까 딱 3달만 서로 협력합시다. 윈윈전략. 아시지 않습니까."

"윈윈전략이라."

중얼거린 영도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위로 눈동자를 들었다. 그러다가 이건 좀 아니다 싶었던지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내의 귀에 입술을 대곤 나직이 속삭였다.

"애인을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붙여주면서도 꽤나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아니면 속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데 겉으로만 괜찮은 척을 하시는 겁니까?"

사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영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몸을 돌렸다. 수인에게 따라오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으나 분위기를 읽고 있었던 수인은 잠자코 영도의 뒤를 쫓았다.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수인은 기분 나쁜 사내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원한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당장 덤벼드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영도의 일이기 때문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뒷통수에 구멍 뚫리는 거 아니에요?"

"벌써 뚫린 게 아닐까?"

뒷머리를 건드리며 영도는 웃었다. 조금 전 사내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풀린 얼굴을 하는 영도였으나 그게 지금 그의 현 감정상태인 건 아닐 터였다. 복잡한 속내를 애써 숨기려 하고 있었다. 그건 이쪽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일까.

차 앞으로 걸어가며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걱정돼? 걱정하지마. 괜찮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늘 괜찮다고 할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해서 이쪽을 안심시켜 주려는 거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답답하긴 매 한가지였다.

"난 형처럼 못 살 것 같아요."

"안 살아도 돼. 이런 삶은 칙칙하거든. 돈은 많이 들어와도."

손가락으로 금전을 표현한 영도는 차 위에 한쪽 팔을 올렸다.

"일단은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해 저물려면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안 좋은 일을 가지고 수인과 마냥 거북한 상태로 있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걸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진 않아도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수인은 잠자코 차에 올라탔다. 그걸 확인한 영도도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똑바르게 앉은 수인은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곤 양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차에 타는 것도 처음일 터였다. 수인이 하는 처음인 일들을 돕는 게 이쪽이라는 게 좋았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수인에 대해 그리 생각을 하며 영도는 기분 좋게 핸들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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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이라 하나 시원하게 깔린 호수를 앞에 뒀을 때 수인은 입을 반쯤 연 채로 굳어버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는 듯 한참을 서있는 수인의 옆에서 영도는 코를 훌쩍거렸다. 추웠지만 따뜻한 곳으로 가자며 수인을 닦달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만월이라 호수에 비치는 달빛이 환상적이었다.

일이나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 위해 몇 번이나 찾은 곳이었지만, 오늘처럼 예쁘게 보였던 적이 달리 없었던 것 같다.

"여기가 어디라고 했지요?"

한참을 호수만 바라보던 수인이 묻는 말에 영도는 냅다 말했다.

"일산 호수공원."

"맞아. 호수공원이라고 했지요."

수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 가득이 호수를 담은 수인은 만족한 듯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사람들 좋으라고 만든 장소야.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대단하지."

영도의 생각에 동조하듯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한 호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차분해지는 걸 느끼며 수인은 영도를 돌아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마음에 들어요."

두근. 하고 심장이 크게 뛴다. 그걸 내리누른 채로 영도는 가만히 서 있다가 손을 들었다. 손등으로 수인의 뺨에 가볍게 댔다.

"뺨이 차갑다."

"겨울이잖아요."

"어디 가서 따뜻한 커피라도 마실래?"

"아니요. 그냥 이 근처를 돌고 싶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먼저 가라는 듯 손으로 옆을 가리키자 수인이 움직이고 영도가 그 뒤를 따랐다. 수인은 팔짱을 끼었다. 추운 걸까. 따뜻한 코트를 입었는데.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신경쓰여서 자꾸만 흘긋거리고 보게 된다. 그런 영도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수인은 간간이 보이는 커플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많네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데이트 코스니까."

"여기가 데이트 코스였어요?"

"그래. 젊은 커플들이 많이 찾는 명소지."

간혹 중년부부인 것 같은 사람들이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추운 날에 운동이라니. 정말 건강한 사람들 많다면서 영도는 하품을 했다. 산책을 하러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걷기만 하려니 자연스럽게 졸려진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으려니 수인이 영도의 팔을 잡아당겼다.

"저기로 가봐요."

수인이 먼저 움직이고 영도가 뒤를 따랐다.

수인은 나무로 막아진 난간에 매달린 채로 호수를 내려다봤다. 검게만 보였다. 이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두렵기도 했다.

"깊을까요?"

"얼마나 깊은지 알아볼래? 한 번 들어가 봐."

"싫어요. 차가워서 심장마비로 죽을 걸요."

담담히 대답한 수인의 눈은 여전히 호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처럼 들뜬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았다. 영도도 본인이 이상한 상태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수인도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수인의 옆에 선 영도는 양 팔을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축 처진 사람마냥 어깨를 늘어뜨린 영도는 입을 반쯤 열고 숨을 토해냈다. 하얀 김이 토해져 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쓸데없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멍하니 넋이 나간 사람마냥 있던 영도는 수인 쪽으로 몸을 붙였다. 몸이 닿아도 수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붙어있으니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문수인."

"왜 불러요."

하여튼 애교 없는 녀석. 이렇게 딱딱하게 대답할 건 뭐야.

애써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며 마음의 긴장을 덜려 노력했다. 몇 번 호흡을 가다듬던 영도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우리 예전에 본 적 있지 않았냐."

수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이라 할 수 있는 얼굴로 영도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오래 전에 우리 만나지 않았냐."

묻는 순간 불안해진다. 아닐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괜히 말을 꺼낸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수인이 이쪽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괜히 초조해진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걸지도 몰라. 그냥 웃음으로 이 어색한 분위기를 넘겨버릴까.

"그걸 이제야 기억해 냈어요?"

어색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 모면해야 할까 싶어 풀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마당에 들린 말에 영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이 녀석이 뭐라고 한 거야.

고개를 든 영도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있는 수인을 확인하는 순간 당장 목청을 키웠다.

"역시나 그런 거였어!"

너무 큰 소리였다. 한적한 공원 내에 있던 사람들이 시끄럽게 구는 영도를 노려봤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아차 싶었던 영도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모습에 수인은 한심하다는 듯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한테 나 원혁이라고 광고할 셈이에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이건 너무 당황해서-."

정말 너무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온 것 뿐이었다.

아니. 맞으면 맞다고 처음부터 반응을 보일 것이지 그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굴면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목이 마르고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내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첫사랑 천사가 지금 코앞에 있었다. 천사의 정체가 수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걸 확신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되자 머리가 멍멍했다. 지금 이 상황이 진짜인가 긴가민가 하기도 했고 말이다.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날 알아봤던 거냐고."

"처음부터 알아보고 그 때 이후로 한 번도 형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면 어쩔래요?"

"......어쩌기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뭐야? 애초에 짝사랑이 아니었던 거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처음 봤을 때 내가 그 애였다고 말하면 믿었을 것 같아요? 초면에 사람 촌닭이라고 무시했으면서."

정말 그랬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첫 날밤 주방에서 자고 있던 수인을 발로 툭툭 쳐서 깨웠던 일이 떠올랐다. 이미 지난 일을 왜 들먹이는 거냐고 말할 수도 없었다. 무안하고 민망했던 영도는 수인을 흘깃 봤다.

난간에 한 팔을 올린 수인은 비스듬히 서있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런 말을 꺼내기까지 이쪽이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를 모르는 걸까. 확신을 하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그 복잡한 심정을 수인도 알아야 했다.

영도는 얼떨떨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네가 정말 내 천사란 말이야."

"오글거리는 말 좀 그만해요. 천사 같은 게 어디에 있다고."

"내 천사가 타락했어."

"헛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사랑이라 한다면 늘 천사라는 걸로 회상을 하고는 했단 말이다. 겉으로는 차도남. 실상은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할 수 있는 영도였다. 처음에는 멍청하게 있다 해도 점점 감동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첫사랑의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에 영도는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그랬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거지?"

"그건 형 잘못도 어느 정도 있어요."

"무슨 잘못? 난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할머니 댁으로 가서 널 찾았다고."

"올 때마다 여자애 타령을 했지요."

앞으로 양 팔을 내밀고 있던 영도가 움찔했다. 눈꼬리를 파들거리고 떠는 걸 확인하며 수인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혹시나 싶어서 남자애라면 있다고 했지만 아니라면서 끝끝내 여자애라고 우겼지요. 신부로 삼고 말거라며 흥분해서 집 안이고 밭이고 할 것 없이 다 뒤지고 다니는 형 앞에 나타났으면 옳다구나 했을 것 같아요? 당장 실망했겠지요. 사람을 여자로 멋대로 착각하고 혼자 실망하고 침울해 할 꼴이 뻔 하니까 일부러 나타나지 않았던 거예요."

"말도 안 돼. 내가 널 찾는 것도 다 보고 있었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말에 수인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옆 방으로 가면 난 그 건너편에서 형을 보고 있었지요."

"말도 안 돼."

"밭으로 가면 멀찍이 떨어져서 쫓아가고. 그랬어요. 내가."

그 때를 회상하듯 수인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만류하는 어른들을 뿌리치며 바깥으로 나가 주변을 샅샅이 살피는 영도는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첫사랑의 '여자애'를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두 눈 가득이 담고 있었다. 영도가 뛰어다니는 모습에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입고 있는 바지와 낡은 운동화를 확인한 수인은 한숨을 쉬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런 모습으로는 영도 앞에 나갈 수 없겠다고 생각을 한 거다.

"무슨 내색이라도 했다면......"

"내색을 어떻게 하겠어요. 난 화려한 형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데."

물론 영도가 시골에 나타나지 않는 순간 후회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얼굴이라도 내밀 것을. 그리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수인도 시골 생활에 막 적응을 하던 참이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간간이 영도의 편지가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 안부를 묻고 상당한 금액의 용돈을 통장으로 입금해주곤 했다. 그리고 편지에 동봉이 된 영도의 일상 사진들은 어린 수인이 보기에도 멋진 것이었다. 오랜 산골 생활로 검게 그을린 얼굴이 된 촌스러운 이쪽과는 도무지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영도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정말은 무서웠어요. 날 보고 형이 실망할까봐서. 그렇게 다정하게 날 보듬어 주던 사람이 안색이 달라져선 밀쳐내는 게 너무너무 무섭고 끔찍했어요. 그래서 숨어있었던 거예요. 정말은 나, 겁쟁이니까."

수인은 눈을 내리떴고, 그 얼굴 위로 씁쓸함이 서렸다.

영도는 말없이 수인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지금껏 살면서 너처럼 개김 정신 투철하고 막나가는 놈은 본 적이 없다."

수인의 눈꼬리가 파들거리고 떨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로를 하고 다정한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남 험담을 하는 건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예요?"

"너처럼 예쁜 사람도 처음 봤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던 수인은 그 순간 숨을 죽였다.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수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영도는 말을 이었다.

"너처럼 귀엽고, 같이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도 없었어. 네가 처음이야. 나는, 나는-."

긴장이 되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촬영을 하고 생방송을 했을 때에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긴장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촉촉하게 차오르는 걸 느끼며 영도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네가 내 천사라서 정말 너무나 기분이 좋아. 너는 또 오글거리겠다 하겠지만 지금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이야. 내 인생에서 넌 아주 중요하고 귀해. 그래서 난......"

난간에 올려진 영도의 손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긴 한숨을 쉰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달빛이 수인의 얼굴을 비춘다. 그걸 보고나서야 영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굳이 확인을 해볼 필요도 없었다. 저 눈과 코와 입술과 얼굴 자체가 천사와 너무도 똑같았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을 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난 네가 정말로 좋고, 좋아서. 그러니까."

더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 걸까. 이래서 암기식으로 외운 대사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거다. 주옥 같은 명대사를 머리통 터져라 외우면 뭐해. 실전에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을.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든 것을 수인은 숨을 죽인 채로 바라봤다.

처음에는 차분하니 있던 수인이지만 곧 그 입가로 미소가 서린다.

"여기가 왜 집 안이 아닐까요."

'응?'하고 반문을 하며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수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예쁜 수인의 눈동자가 반달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집이었으면 당장 형을 덮쳤을 거예요."

수인의 말이 영도의 한계점을 무너뜨렸다.

아. 더는 못 참겠다. 사람들 시선은 알바 아니었다. 당장 수인의 턱을 붙잡고 진하게 입을 맞추고만 싶었다. 영도는 수인의 팔을 붙잡았다. 세게 힘이 들어간다. 뜨거운 열망이 서린 눈빛으로 수인을 바라보며 영도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에 가자.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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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혼자만의 공간인 집 안에 들어온 것은 수인이 처음이었다. 물론 잠깐 들렀다가 나간 사람들은 몇 있었다. 하지만 수인처럼 몇 날 며칠을 산 사람은 없었다. 그런 것을 불편하다 생각하지 않은 것도 수인이 유일했다. 아마도 그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침대 위에 영도와 수인이 앉아있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양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린 수인과 다르게 영도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리 하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걸 본인도 느끼는지 영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색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 시선을 피해요?"

움찔하고 어깨를 떤 영도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수인이 재차 물었다.

"지금 부끄러워요?"

"아니."

수인이 던진 말을 듣고 답을 하는 동안 영도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할나위 없이 차분해지는 걸 느끼며 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보다 확실하게 말했다.

"부끄럽지 않아."

"나도 그래요."

수인이 웃는다. 그리 여겨졌다. 그 순간 영도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수인의 동그란 어깨를 쥐고는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았을 때 수인은 눈을 감았다. 맞닿은 입술에서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영도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곤 수인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기다렸다는 듯 그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수인은 마다하지 않았다. 서투르게 감아오려 한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반응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수인의 적극적인 태도에 자신감이 붙는다. 지금 이리하는 것이 이쪽만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 행동을 취함에 있어 주저할 것이 없어진다.

지금은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상대가 남자라던가. 수인이 사촌 동생이라는 것도 말이다.

지금은 그저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을 안고 싶을 따름이었다.

수인의 어깨를 잡은 손으로 힘이 들어가고 입맞춤이 열기를 띄어갈 즈음 수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아직은 미숙하기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든지 코로 센 숨을 토해낸다. 그러면서 손을 들어 어깨 부근을 잡아왔다. 그 손길을 즐기면서 영도는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눈을 내리뜬 채로 수인은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손을 들어 입술 부근에 묻은 타액을 닦아낸다.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영도는 수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수인이 고개를 들었다. 영도가 웃고 있었다. 여유롭게 보이는 듯도 한 모습이었다.

"......바람둥이."

"내가 왜?"

수인의 모습에 생글거리고 웃던 영도가 바로 정색을 한다.

수인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잘 하잖아요."

영도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설마하니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멍하니 있던 그는 곧 헤죽. 하고 웃었다.

"그래? 잘 하는 것 같았어? 그건 즉 기분 좋았다는 거네?"

갑자기 응큼스러운 얼굴이 되어선 앞으로 얼굴을 내미는 영도의 행동에 수인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기분 좋았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아직 기분 안 좋았다고? 그러면 기분 좋게 해주지."

"지금 뭐 하려는-!"

수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영도는 수인의 어깨를 잡아 아래로 눌렀다. 푹신한 침대에 쓰러지자 그 위로 영도가 올라탄다. 그리고는 허리에서 겨드랑이로 주욱 쓸어올렸다. 방심 상태였던 수인은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그래봤자 영도가 몸 위에 올라타고 있어서 피할 수 없었다.

"하지 말아요!"

있는 힘껏 밀어내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영도는 수인의 가슴이나 배 부근을 손을 대고 마구 간질였다. 수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음 순간 수인의 입을 통해서 자지러지는 웃음이 토해져 나왔다.

"아하하하! 하하하! 하, 하지마! 하하하!"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린다. 이런 수인의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영도는 더 신이 나 수인의 몸을 간지럽혔다. 나중에 수인은 소리를 지르면서 미친 듯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너무 웃어서 얼굴이 벌겋게 익고 눈으로 눈물이 가득 맺히게 되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할딱거리는 동안 영도의 손이 떨어졌다. 침대 위에 양 손을 올린 채로 영도는 고개를 숙여 수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직 웃음이 가시지 않아서 양 손을 가슴 위에 올린 채로 헉헉 거리던 수인은 이마에 닿는 영도의 입술에 당장 인상을 썼다.

"지금 뭘 하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영도의 표정이 상당히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코 앞에 수인을 둔 영도는 웃고 있었다. 너무도 부드럽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눈길로 수인을 바라보며 영도는 속삭였다.

"너 정말 귀여워."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건가 싶었다. 지금 이런 모습들이 그와 어울린다 생각하는 걸까. 이 말도 안 되는 행동과 말은 대체 뭔가 싶었다. 지금은 이래도 갑자기 어떻게 변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명한 배우니까, 분명히-.

재차 영도의 입술이 닿았다. 눈꺼풀과 뺨과 턱 부근에 꾸준히 입을 맞추면서 영도의 손이 수인의 셔츠 속으로 들어간다.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영도의 손길에 수인은 숨을 죽였다. 그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차분하게 손을 움직인 영도는 수인의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가만히 손바닥을 펼쳐서 피부 위를 덮듯이 감쌌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 심장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수인의 심장을 느끼고 있으니 그의 것일게 분명했지만 영도는 자신의 심장도 이와 똑같이 뛰고 있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미칠 것 같았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을 응시하며 영도는 물었다.

"지금 무서워?"

"........."

"무서워하면 하지 않을 거야."

무엇을 하지 않을 거라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인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팔을 벌려 영도의 목을 끌어안았다.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더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수인의 품에 안기게 된 영도는 가만히 있다가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편안한 얼굴이 된 그는 수인의 등 가운데에 손을 대고 꼬옥 눌렀다.

"고마워."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더 강하게 수인을 끌어안았다.

영도의 콧속으로 풋풋한 숲의 냄새가 났다. 이건 수인의 체취였다. 그것에 취한 듯 한참을 가만히 있는 영도를 느끼며 수인은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 지금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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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소리가 나고 누군가 계속해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에 섞여서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모두 누구의 것인 걸까. 생각을 하는 중에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건 지금 자신의 안에서 나오는 소리들이었다.

영도의 손길에 의해서 젖은 소리를 내며 헐떡거리고, 그리고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있는 거였다. 엎드린 채로 있던 수인은 팔에 힘을 줬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엉덩이 뒤에 매달려 있던 영도도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수인과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혀를 내밀어 본인의 입술을 핥아내는 영도는 지나칠 정도로 색스러웠다.

고개를 돌린 수인과 영도의 눈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그래도 둘은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세를 바로 하고는 입을 맞추었다.

똑바로 앉아있는 수인의 사이로 들어간 영도는 진하게 키스를 한 후에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떨어질 때 쪽.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수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댄 영도는 눈을 감았다.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뺨을 맞대기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영도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으려니 은밀한 부위가 따끔거렸다. 아직도 안에 뭔가가 들어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도의 손가락이 들어가기만 했을 뿐인데도 이런데, 진짜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수인은 떨어지는 영도를 바라봤다. 영도는 말없이 수인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려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 처음에는 이상해서 만지지도 못했지만 1시간을 훌쩍 넘는 전희를 거치는 동안 무덤덤하게 영도의 튼실한 물건을 쥘 수 있게 되었다. 한 손에 담기는 성기는 묵직하고 지나치게 딱딱했다. 이렇게 큰 걸 과연 안에 넣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성기를 쥔 손이 조금은 떨리는 것 같았다.

"크지?"

대답은 없지만 영도는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넣고 싶은데......."

수인은 얼굴을 붉힌 채로 눈을 내리떴다.

무언의 허락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 그런 분위기가 되어 수인을 품에 안았을 때, 수인은 겁내 했었다. 그래서 허벅지에 대고 욕구를 해소했다. 그렇다 해서 그게 안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 때도 나름 즐겁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달랐다.

지금 수인과의 관계는 그 때보다 열 걸음 이상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위로 올라온 영도는 수인의 뺨에 입술을 대고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입술을 대고 있다가 천천히 물러나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수인의 아름다운 회빛 눈동자였다. 긴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신비롭기만 했다. 그것을 취한 듯 바라보던 영도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수인의 동그랗고 모양이 좋은 엉덩이 한 쪽을 잡아 옆으로 벌렸다. 살이 늘어나는 감촉과 그 사이에 비벼지는 뜨거운 양물의 느낌에 수인은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두려웠으나 피하진 않았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영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하기엔 이미 많이 늦었음을 알고 있었다.

두어번 더 시선을 주고 받은 후, 귀두의 뭉툭한 부분이 주름을 눌러왔다. 영도가 아프지 않도록 집요하게 애무를 해서 풀어 둔 부분이었다. 그 곳은 여자처럼 젖어있었으나 아직은 여리고 단단해서 영도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몇 번 입구에서 미끄러지기만 하고 삽입이 되지 않아도 영도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수인에게 괜찮다는 듯 몇 번이나 뺨이며 귀에 입을 맞추었다.

쪽쪽쪽. 하고 연달아 이어지는 입맞춤에 푹 빠지게 되었다. 눈을 감은 수인은 조금 더 영도 쪽으로 얼굴을 붙이려 했다. 그리고 주름 아래를 누르며 귀두의 끝부분이 들어왔다. 아주 적은 일부분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수인은 헛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숙였고, 영도가 그런 수인을 끌어안았다. 왼쪽 손목을 잡아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좁디 좁은 내벽 안으로 파고들어갔을 때 너무도 큰 압박에 영도는 점점 참기가 힘들었다. 끝까지 밀어 넣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필사적인 인내력을 발휘해서 조금씩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어떤 식으로 이물감을 견디고 받아들이면 되는지 대충 학습이 된 수인이었다. 몇 번이나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면서 영도의 굵직한 물건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애초에 뭔가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니 만큼 고통스러웠다. 통증이 훨씬 더 컸다. 수인은 눈을 질끈 감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파?"

귀 옆에서 속삭이는 말에 수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저었다. 아니라며 서투른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수인의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 여기서 멈출수 없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영도는 수인의 뒷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미안."

짤막한 사과를 한 후, 조금 더 밀어넣었다.

좁은 내벽을 벌리고 영도의 성기가 끝까지 넣어졌다.

몇 번이나 중간에 포기를 하고 그만하라는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걸 참으니 간신히 영도를 다 받아낼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영도에게 깔린 수인은 납작 엎드린 개구리 같은 모양새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아래가 어떻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영도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움직이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수인이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영도가 움직이지 않고 이대로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영도가 얼마나 참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닌 척 하면서도 많은 배려를 해주었던 영도였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 안을 가득 채우는 뜨겁고 커다란 물건의 느낌.

수인은 눈을 감았다.

"......움직여요."

영도는 가만히 있었다. 수인은 재차 중얼거렸다.

"괜찮으니까 움직여요."

말하는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려서 나왔다. 그걸 들을 수 있었던 영도는 수인의 어깨에 입술을 댔다. 쪼옥.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깊이 빨아들였다.

"고마워."

무엇에 대한 고마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 아닌데도 수인은 눈가로 눈물이 몰리는 걸 느꼈다. 오늘 참 많이 우는 구나 싶었지만, 지금은 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눈물이었다.

이제 정말로 영도와 하나가 되는 거로구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수인이 긴 한숨을 토해내는 것과 동시에 영도가 느리게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수인의 몸으로 힘이 들어가고 시트를 쥔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콱콱콱. 하고 느리지만 힘 있게 영도가 안으로 들어왔다. 몸에 무리가 갈 것을 걱정한 것인지 절반 정도 빠져나갔던 성기가 깊숙이 파고들어오고 그때마다 수인의 입술을 타고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아픔이 살짝 가미가 된 신음에 영도는 멈추었다가도 다시 움직였다.

불편한 이물감에 수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낯선 곳으로의 침입에 뒤를 이어 아픔이 찾아왔다.

영도가 들어오고 그 때마다 그의 배가 성기를 비비거나 간간히 입을 맞추는 것에서 수인은 필사적으로 쾌감을 이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결국 울음 섞인 신음을 토해내게 되었을 때, 그런 자신의 소리가 듣기 싫어 입을 막으려 했다. 영도가 기다렸다는 듯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숨기지 말고 소리를 들려줘. 듣고 싶어."

"부, 부끄러워요."

"새삼 부끄러울 게 어디에 있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이인데."

나직한 헐떡거림과 함께 영도는 수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직 순진하구나."

놀리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싶지만 영도가 재차 안으로 파고 들어와 나오는 건 신음소리 밖에 없었다. 짤막한 소리를 내는 동안 수인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귀로 듣게 되는 신음이 민망하기만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수인을 내려다보는 영도는, 그와는 반대로 즐거운 얼굴이었다.

귀엽네.

그리 생각을 하는 듯 씨익-웃고서는 아래로 몸을 내렸다가 위로 수욱 올라온다. 성기가 깊게 박혀오고 수인이 '앗.'하는 소리를 내자 이번에는 깊이 넣은 채로 몸을 돌렸다. 내벽에 촘촘히 감싸인 성기가 장난스럽게 움직이자 수인은 허리를 뒤틀었다. 이쪽이 놀자고 하는 사인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안절부절 못해 할 따름이었다. 실상 수인은 모든 게 처음이었다. 앞으로 영도와 하는 모든 것들이 처음이고 최초가 될 터였다. 그것이 영도를 너무도 신나고 즐겁게 만들었다.

어디서 이런 귀한 게 나타난 걸까.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였다.

땀이 촉촉이 맺히고 숨이 거칠어진 영도는 몽롱한 얼굴이었다. 쾌감에 도취가 된 영도는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그런 대사를 날렸다.

"넌 정말 사랑스러워. 넌 분명 나만의 천사야."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끙끙거리면서 영도를 받아들이고 있던 수인은 그 순간 얼어붙었다. 서투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보조를 맞추어보려 하던 수인이 동작을 딱 멈추자 영도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추려 하는 순간 수인이 그를 올려다봤다.

"이럴 때 이상한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뭘?"

그리 물으며 영도는 웃었다.

나른하다 못해 지나치게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한 사내는 너무도 만족한 얼굴이었다. 실상 이쪽이 하는 말 같은 건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이 관계를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건지, 자신과 이어졌기 때문에 저런 얼굴인지를 모르겠다. 아니. 실상은 알고 있었다. 너무도 집중한, 영도의 성숙한 눈동자 속에 비치는 건 오로지 수인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숨을 못 쉬겠다.

아래 입술을 깨문 수인은 팔을 들어 영도의 목을 끌어안았다. 꼬옥 안은 채로 그에게 밀착을 하자 영도는 기다렸다는 듯 수인의 몸을 끌어안고는 그의 귀에 입술을 댔다. 나직이 속삭이는 말에 수인은 눈을 감았다. 닭살 돋는 멘트는 하지 말라던 수인이지만 이번 영도가 하는 말은 만족스러웠는지 그 얼굴이 도취되듯이 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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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니까요!"

이불을 끌어당기며 수인은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이불을 당기는 영도는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수인을 바라봤다.

"확인을 해야 한다니까!"

"무슨 확인이요? 됐어요."

"하나도 안 됐어. 거기가 괜찮은지 내가 직접 봐야 겠어."

"아니. 도대체 왜-!"

따지듯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암만 수인이라 해도 민망해서 도무지 그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아니. 왜 꼭 한 부위를 확인해 보겠다는 거야.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서 다리를 버둥거려도 아파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끙끙거리는 동안 발목이 잡힌 수인은 결국 다리를 벌려야 했고 엎드린 채로 그곳이 적나라하게 영도 눈 앞에 까발려졌다. 물론 까발려 진다는 표현은 조금 이상할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수인이 느끼기엔 그런 기분이 강했다.

아니. 왜 그런 곳을 보는 거야.

시트를 강하게 쥔 수인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러는 동안 영도는 엎드린 수인의 엉덩이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다물어진 주름이 부어있고 그 부근이 젖어있었다.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 살이 붉게 달아오른 걸 본 영도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흠칫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수인의 몸 상태를 확인해보는 거지 보고 침 흘려야 하는 순간은 아니었다. 진정하자면서 주먹으로 턱 아래를 훔쳐내도 설레이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긴장한 채로 있던 영도는 엉덩이 살을 잡아 옆으로 벌리고 그 안으로 은근슬쩍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헛숨을 삼킨 수인이 뒤를 돌아봤다.

당황한 수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도는 어색하게 웃었다.

"다치지 않았나 싶어서."

말을 하다가 입 안에 침이 고여서 재차 삼켰다. 목젖이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걸 수인은 똑똑히 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로 굳어있었다. 지금 이 어색하고 이상한 상황은 뭔가 싶기만 했던 수인은 숨을 죽였고 그건 영도도 마찬가지였다. 민망하고 무안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리 사이의 성기가 발기가 되는 걸 느꼈다. 아니. 원래 발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했는데 또 하고 싶어진거다. 아직 수인은 이런 행위가 익숙하지 않았다. 무리를 시킬 순 없었다. 그러니까 참아야 하는데도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 영도는 수인의 엉덩이 살을 잡았다. 탱글탱글하고 부드러운 피부였다. 그 감촉을 느끼게 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수인아."

"왜, 왜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게 불안하기만 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던 수인은 몸을 웅크렸다. 영도는 수인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수인은 엉덩이 골에 닿는 영도의 성기를 느끼곤 숨을 죽였다.

이게 뭐야. 그리 말하고픈 얼굴이 되어 창백하게 질려 있으려니 영도가 긴장한 눈빛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딱 한 번만 더 하자."

"벌써 2번이나 했잖아요!"

"이번에는 천천히 할게. 절대로 아프지 않을 거야."

그런 물건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아프단 말이야.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오는 말을 차마 토해내지 못하고 수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있었다. 그러는 동안 영도가 성급하게 수인의 엉덩이 살을 가르고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젖어있었기 때문에 삽입이 수월했다. 바로 고개를 숙이며 짤막한 신음을 흘리는 수인의 귀와 목 뒤에 입을 맞추면서 영도는 두어번 더 허리를 움직였다. 성기가 끝까지 들어가고 꽉 차는 살의 느낌에 영도는 황홀한 듯 눈을 감았다.

"정말 최고야."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면서 영도는 수인의 배 아래쪽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침대에 딱 붙어 있는 수인이 엎드릴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게 했다. 결국에는 영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두던 수인은 무릎을 세우고 양 손을 침대에 디디는, 엎드린 자세가 되자 당황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영도가 바깥으로 나가고 다시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살을 벌리고 가득이 들어차는 느낌에 수인의 아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뜨거운 한숨이 토해져 나온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영도가 많이 참아서 거칠게 움직이지 않아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영도가 움직이는 대로 수인의 몸이 흔들렸다. 달라붙은 몸은 하나인 것처럼 여겨지게 했다. 아래로 내려온 영도의 손이 성기를 잡아 슬슬 문지르는 동안 쾌감이 피어오른다. 헐떡거리면서 수인은 쾌감을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부위로 모든 것을 집중했다. 헐떡거리는 동안 영도의 움직임이 점점 속력을 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의 흔들림이 조금 더 강해졌을 때 수인은 머리 속으로 이상한 것이 퍼지는 걸 느꼈다. 하얀 빛이 뭉쳤다가 흩어진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했다가 두 번째에 몸을 경직시켰다. 뭔가가 반짝반짝 거렸다. 영도가 안으로 들어와 어느 부분을 자극할 때마다 자신의 성기가 더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뭐지? 이 느낌은?

"안이 더 조여들어."

중얼거림에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말은 부끄러우니까 하지 말았으면 싶었다.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듯 고개를 젓자 영도가 수인의 가슴에 손을 대고 슬슬 문질렀다.

"안쪽 살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거 알고 있어?"

"그런 말은-."

"듣기 싫어도 어쩔 수 없잖아. 정말인데."

중얼거리며 영도는 깊이 성기를 넣은 채로 두어번 허리를 놀렸다. 깊숙이 들어와서 안쪽을 비비고 마찰하는 감각에 수인은 헐떡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해서 이상한 느낌이 몸 안쪽에서 피어올랐다. 따끔따끔 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전기가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느낌에 절로 몸이 부들거리면서 떨린다. 참아 보려 해도 그리 할 수 없었다. 어느덧 수인은 영도의 손바닥 안쪽에 사정을 해버리면서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허리 아래는 영도가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여전히 위로 올라가 있었지만 말이다.

시트에 얼굴을 댄 수인은 반쯤 눈을 뜬 채로 헐떡거렸다. 호흡이 가쁘기만 했다. 이제 좀 쉬고 싶은데 영도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수인이 사정하기 전부터 그의 몸이 이상하게 반응을 보이는 걸 알고는 더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왼쪽으로 조금 휘어서 찔러 넣었을 때 수인의 허리가 흔들리고 달콤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들은 영도는 눈을 빛냈다.

"지금 느꼈지?"

"흐으. 읏."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느끼는지 아닌지 그런 것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지금 이상해서 싫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찌르는 대로 나직한 신음을 토해내는 수인을 보며 영도는 신이 났다. 아파하기만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제 슬슬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수인의 신음소리가 달콤하게 젖어감에 따라 영도의 자신감은 커졌다. 덧불어 수인을 보고 사랑스럽다 여기는 마음 또한 강해졌다. 조금 더 수인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 열망을 마음 가득이 품으며 영도는 더 씩씩하게 허리를 놀렸다.

- 2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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