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혀있지 않네요."
한참동안 화면을 살피던 지용은 애석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1층 로비 데스크 앞으로 수인과 영도가 나란히 서있었다. 어정쩡한 오후 시간인지라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영도는 일부러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었다.
한참을 살피나 싶던 지용이 전하는 실망스러운 대답에 영도는 데스크 위로 한쪽 팔을 올렸다.
"누가 넣었는지 알 수 없는 겁니까?"
"12시에서 1시로 넘어가는 딱 2분 동안 시디가 알아서 교체됩니다. 그 간격을 아는 누군가 몰래 들어와 택배를 넣고 간 겁니다."
그 2분을 도대체 누가 알고 물건을 집어넣고 갔단 말인가.
영도의 얼굴은 진지하게 변했고 그건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턱 아래에 손을 댄 채로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는 걸 본 지용이 물었다.
"어제 들어오실 때 확인을 하셨다고요?"
"네. 들어가 있으니까 당연히 형한테 온 거라고 생각했어요."
원래 이런 곳에서 택배는 함에 넣어지지 않고 경비인 지용에 의해 직접 전달이 된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다.
지용 모르게 저런 이상한 택배를 넣은 사람이라니. 도대체 누구인 걸까.
수인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든 수인은 묘하다는 듯 바라보는 지용의 눈빛에 아차 싶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선글라스나 모자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위로 올라간다 해봤자 더 이상해질 터였다. 어쩌나 싶어 눈만 굴리고 있는데 영도가 수인의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바깥 CCTV로도 확인이 안 되는 겁니까?"
물음에 수인을 보고 있던 지용은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서부터 이리로 서두르면 2분 안에 물건을 넣고 나가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어쩌면 이 맨션 안에 거주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안면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지요."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안면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이런 행동을 취한단 말인가. 혹시 스토커인가. 아닌데. 그런 놈들이 어찌 알고 여기까지 들어온단 말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공안 지용이 택배를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은 열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었다가 이상한 게 나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까지 별 문제가 없었다면 폭발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뭔지나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혹, 원혁씨의 팬이 선물한 건강주스 같은 게 터진걸 수도 있겠고요."
"그러면 한 번 맛 좀 봐주십시오."
"아니. 그건 좀......"
사양하겠다는 듯 고개를 살레살레 젓는 지용은 어색한 얼굴이었다. 맛도 보지 못할 거면서 왜 열어보라는 거야. 그리 따져 묻고 싶은 듯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려니 수인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내가 열어볼게요."
말과 동시에 수인은 택배 봉지를 뜯어버렸다. 놀란 영도와 지용이 뭘 하는거냐고 한 목소리로 외쳐도 수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포장지 한 장을 찢자 바로 상자가 나온다. 그 상자를 열어버린 수인은 안에 담긴 것이, 검붉은 피로 응고가 된 이상한 덩어리인 걸 확인하고는 숨을 죽였다. 영도와 지용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들 마냥 고개를 돌리며 난리를 부려댔다.
"으아아악! 저게 뭐야!"
끔찍하다는 듯 물러나는 두 사람들과 달리 수인은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상자 뚜껑을 연 채로 안에 담긴 것을 유심히 살피던 수인은 허리를 굽혔다. 상자에 코를 대고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영도가 당장 수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기다려!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이건 소간이에요."
고개를 든 수인은 벙찐 원혁과 지용을 두고 보다 확실하게 말했다.
"분명해요. 소간이에요. 할머니가 이런 걸 종종 날로 썰어서 드시곤 했어요."
"......할머니가 그런 걸 왜 드셔."
싱싱한 소고기는 회로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반사적으로 '소간을 드시는 우리 할머니는 이상한 분인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냄새만으로 이것이 소간이라는 걸 파악하는 수인이 이상했던 영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걸 확인한 수인은 조금 더 확신에 차 말했다.
"분명히 소간이에요."
"넌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할머니가 잘 드시던 거라니까요."
잘 드시던 거라 해도 이렇게 뭉텅이로 있는 걸, 어떻게 단박에 알아보는 건데. 영도는 다시 보는 것도 끔찍했지만 수인은 아닌 듯 자꾸만 그쪽으로 관심을 보였다. 상자 속으로 손가락을 넣으려 했다.
"꽤 좋은 거예요. 색도 그렇고 촉감도 그렇고."
"만지지 마!"
냅다 수인의 손을 붙잡아 위로 올렸다. 그런데도 수인은 굴하지 않고 상자 속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곤 뭔가를 발견하고는 턱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여기 편지가 있는데요?"
"어디에?"
"여기요."
수인은 영도가 미처 보지 못했던 쪽지를 안쪽에서 끄집어냈다. 그걸 내밀자 영도가 냅다 채가서는 안에 들어가 있던 종이를 끄집어냈다. 타이핑으로 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 곁에 데리고 있는 사람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를 선택하지 않으실 거라면 차라리 혼자 사십시오. 그게 모두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미친놈."
딱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런 걸 썼는지 모르겠다. 감히 누구더러 이래라 저래라야. 무엇보다 수인에 대해서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을 하는 영도를 본 수인이 물었다.
"뭐예요?"
"말했잖아. 미친놈이야. 신경 쓸게 못 돼."
"표정은 그게 아니라고 하고 있는데요.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인가요?"
차분한 물음에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편지 내용을 보여줄까도 싶었지만 이내 말기로 했다. 이런 불쾌한 편지 따위 수인에게 보여줘 봤자 였다. 이쪽만 기분 나쁘면 될 일을, 두 사람이 불쾌하게 되는 거였다.
"이쪽 바닥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 흔해. 그러니까 괜히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걱정하지 말고 이건 그냥 치우도록 하자."
"어떻게 치우려고요?"
"버리면 돼지. 지용씨. 이것 좀 처분해-."
"아이고 추워라."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인이 몸을 돌렸다. 팔짱을 낀 채로 안으로 들어서는 최씨 영감이 보였다. 길 정리를 하다가 너무 추워서 몸 좀 녹일까 싶어 건물 안으로 들어왔던 최씨 영감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걸 보고는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모여 있었구만. 인기스타 원혁씨.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최씨 영감의 인사에 영도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늙은이가 하는 일이 없으니 언제나 늘 정정할 수밖에요."
최씨 영감의 농담 섞인 말에 영도는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이도 저도 아닌 얼굴을 한 채로 있으려니 최씨 영감은 카운터 위에 올려진 상자와 그 안에 담긴 것에 욕심을 냈다.
"오호라. 이건 웬 거야? 몸에 좋은 소간이잖아."
최씨 영감의 묘한 뉘앙스에 불길한 예감이 든 지용은 곧장 제지를 가했다.
"침 흘리지 마십시오. 버릴 겁니다."
"이 좋은 걸 왜 버려? 버릴 거면 나 줘."
역시나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두 사람만 있었으면 당장 무식하다 구박을 했을 테지만 지금 옆에는 영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수상한 겁니다. 먹었다가는 1분 일찍 염라대왕 만나게 될 겁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나야. 이왕이면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죽을 테다."
최씨 영감은 입을 꾹 다물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보냈다. 반드시 소간을 먹겠다는 투였다. 이 영감이 그간 굶은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사람 창피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그냥 두지 못하겠느냐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수인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하루 정도 바깥에 뒀던 건데 괜찮은 것 같아요."
"내 보기에도 그런 것 같구나. 가만. 이걸 어떻게 먹어야 잘 먹었다는 말을 듣게 될까나. 이것 참. 의도치 않게 이 좋은 걸 얻게 되네. 내 두 다리가 효자라니까."
최씨 영감의 만면으로 만족의 웃음이 서렸다. '입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있으려니 최씨 영감이 지용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늘 저녁에 이걸로 한잔 할까?"
"혼자 많이 잡수십시오. 전 오래 살고 싶습니다."
"너무 삶에 연연하면 안 돼. 원래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놈들은 단명하게 되어 있어."
"아, 그렇습니까."
대답을 하기는 해도 그쪽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오늘 만은 봐주자 싶었던 최씨 영감은 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얼굴 다 드러내니 인물 참 훤해서 보기 좋구만."
그 순간 수인은 눈을 깜박이다 뺨 부근에 손가락을 댔다.
"실은 제 눈이......."
"눈이 뭐 어때서? 예쁘기만 하구만."
최씨 영감은 흐뭇한 얼굴로 수인을 바라봤다.
"왜 자꾸 얼굴을 가리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물론 본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겠지만 내 보기엔 안 그래. 왜 그렇게 예쁘고 특이한 눈을 가리고 있었나 싶어 안타깝기까지 하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요즘 사람들은 개성적이고 특이한 걸 좋아해. 뭐 하나라도 더 튀려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세상에서 그 눈동자는 큰 복이야. 부모님께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최씨 영감이 하는 말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지금 이쪽 듣고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던 수인은 묘한 얼굴이 되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상한 기분이 듦을 느끼며 그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웅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이는 수인의 모습에 최씨 영감은 더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고마우면 다음에 된장 주먹밥 한 번 더 싸와. 배가 출출할 때가 되면 그거랑 소주 한잔 생각이 아주 간절해."
"다음에 제가 술 한 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술대접은 수인이 아닌 영도가 꺼낸 말이었다.
흐뭇하게 수인을 보고 있었던 지용과 영도는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영도를 바라봤다. 영도는 공손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두 분이서 수인이랑 잘 지내주시는 것 같아서 한 번 인사를 드려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인이가 우리 이야기를 하던가? 이것 참 쑥스럽네."
"말은 안 해도 오늘 두 분이 수인이 대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안면이 익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괜히 바쁜 척을 하느라 수인이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못 다녔습니다. 그래서 애가 아직 서울 무서운 걸 모르지요. 제가 없을 때에는 저 대신에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웬일로 이렇게 깍듯하게 구는 건가 싶었다. 워낙에 유명한 영도이다 보니 그가 이리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최씨 영감과 지용은 괜히 멋쩍어졌다. 이런 인사를 받을 정도로 수인에게 잘 해준 게 있나 싶기도 했기 때문에 최씨 영감이 먼저 헛기침을 했다.
"지도 편달이라고 할 게 뭐가 있겠어. 워낙에 알아서 잘 하는데."
"수인씨라면 어디서든 잘 지낼 만한 사람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받아주는 사람 나름이지요. 이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까닥 잘못하면 적 만들기 쉬워서요."
머리로 영도의 손이 올라갔다. 턱-하니 올려지는 손길에 수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왜 이러는 거야.' 그런 느낌으로 쳐다보려니 영도가 웃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살갑게 지용과 최씨 영감을 대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쪽을 염려하기 때문에 잘 대해주십사 아부를 하는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대해주시는 분들인데. 하지만 영도가 이쪽을 챙겨주는 거라 생각을 하자 못내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낮에 낯 뜨거운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결 영도와 사이가 좁혀진 것 같았다. 물론 상식적으로 봤을 때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영도가 다정하게 대해주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접촉을 하는 건 수인에게 있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면 이건 이 영감님한테 넘기기로 하고, 먹고 죽는지 아닌지로 독이 들어간 유무를 확인하도록 하지요."
지용의 말에 최씨 영감의 눈썹이 위로 확 올라갔다.
"아니. 이 놈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했잖아. 그냥은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을 말이야."
"아. 제가 그랬습니까."
손가락으로 귀를 막으며 대답을 하는 지용은 건성인 태도였다. 영도 앞이었기 때문에 체면을 차리려 했던 최씨 영감이었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냅다 다리로 지용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용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엉덩이를 가격 당할 줄은 몰랐던 지용의 안색이 굳어졌다. 허리 부근에 손을 댄 채로 최씨 영감을 노려보자 최씨 영감은 턱을 위로 올렸다. '왜 이 놈아?' 그리 도발하는 태도였다.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만담 콤비로 상황을 진행시킬 모양인 듯 싶었다. 사이에 껴있어 봤자 이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쯤에서 뒤로 빠져줘야 할 것 같았던 수인은 영도의 팔을 옆으로 밀었다.
"저희들은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수인의 말에 지용은 영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작정하고 들어온 놈을 무슨 수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바깥 CCTV도 돌려봐 주세요."
"이번에 업자가 오면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십시오."
인사를 한 영도는 수인을 데리고 몸을 돌렸다. 안쪽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은 엘리베이터 앞에 선 영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한숨부터 쉬는 영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지용들 앞에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역시나 신경 쓰였던 거다. 수인은 영도의 팔을 잡았다.
"미친놈이 누구예요?"
"응? 뭐가?"
묻는 순간 지금 수인이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수인이 신경써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기 때문에 영도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손을 저었다.
"아, 그거? 별 거 아니야. 신경쓰지마."
"신경이 쓰여요. 그러니까 말해줘요."
입을 다문 수인은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쉽사리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영도가 수인의 성격을 모르겠는가. 지금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 타이밍 봐서 재차 물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듣고 싶은 거겠지.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대충이나마 말을 해주자면서 영도는 곤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이 바닥에서 일하면 정말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 제대로 된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아. 다들 어딘가 결핍되어 있거나 결여되어 있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과 다른 공기를 지닌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그와는 반대인 의미로 그 다른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망상에 빠지는 이들도 있어. 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상태가 좀 이상한 놈들은 스토커라고도 부르지. 아마도 그런 부류인 것 같아."
"스토커가 형의 팬인 건가요?"
"팬인 감정을 넘어선 거지. 내가 마치 본인의 소유물인양 구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아주 잘 아는 누군가라고 착각을 하는 거지. 옆집에 아는 사람 같은 감각으로 말이야. 이해하겠어?"
"아니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걸리면 재수 없다고 해야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래. 그거야. 거기까지 알면 됐어."
정답이라는 듯 손가락을 튕기던 영도는 수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혹시라도 말이야. 집에 혼자 있을 때 이상한 사람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절대로 열어주면 안 된다."
"안 그래요. 나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전에 노랭이가 문 열어달라고 했을 때 열어줬다면서."
"형네 사장님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뭐가 어쩔 수 없어. 모르는 척 문 잠그고 있었어야지. 앞으로는 그렇게 해. 알았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면 이쪽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말은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고 무섭지도 않은데 말이다. 물론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던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래. 착하다."
영도는 수인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두어번 쓰다듬었다. 쓰담쓰담. 그렇게 몇 번 문지르다가 손을 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다려도 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러나 싶어 눈을 들자 영도가 꽤나 집중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런 눈길인가 싶었던 수인은 '뭐해요?'라고 물었고 그 순간 영도는 정신이 돌아온 듯 '응?'하고 당황한 소리를 냈다. 그는 바로 손을 떨어뜨렸다.
"아무 것도 아니야. 이런 엘리베이터도 안 누르고 있었네."
이제야 엘리베이터를 누르게 된다. 문이 열리자 영도는 안쪽을 가리켰다.
"타자."
수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영도가 뒤를 따랐다. 층을 누르고 수인의 옆에 선 영도는 지나치듯 말했다.
"내일은 바깥에 같이 나가볼까?"
"일 나가는 거 아니에요?"
"당분간은 자숙하라는 엄명이야. 그래봤자 쉬는 날도 내일까지지만."
"형이 왜 자숙을 해요. 그건 형의 잘못도 아닌데."
수인의 날이 선 반문에 영도가 피식-하고 웃으며 수인의 등을 툭 쳤다.
"원래 그런 거야."
뭐가 원래 그렇다는 걸까. 무슨 말을 해도 계속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생각인 걸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싫었다. 그리 말해주고 싶지만 영도가 껄끄러워하는 화제라는 걸 알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들어가면 다시 영도하고 단둘이 되는 거로구나.
낮 동안 계속해서 잠만 잤기 때문에 졸리려면 꽤 늦은 시간이 되어야 할 터였다. 그러는 동안 영도하고 뭘 하면서 지내야 하는 걸까. 묘한 긴장에 수인은 숨을 죽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영도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했다.
"우와. 피곤하다."
입 찢어져라 하품을 한 영도는 시선을 느끼곤 눈을 내리떴다. 수인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피곤하다고 했어요?"
"응. 피곤하고 졸려."
"낮까지 계속 잤잖아요."
"그걸 가지고 뭘. 난 원래 하루 종일도 자는 사람이야. 이쪽 일이 원래 그렇잖아. 일 많을 때는 하루에 1시간만 자도 감지덕지. 아닐 때에는 48시간 동안 주욱 자기만 하는 거지."
".......그러면 또 잘 거예요?"
"있다 한 10시부터 자면 되지 않을까?"
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한다는 듯 등 안쪽으로 손을 넣으며 긁적거리는 영도의 뒤에 선 수인의 미간으로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앞서 걸어가던 영도는 뒤를 돌아봤다.
"커피 물 다시 올릴까?"
"알아서 하세요."
대답을 들은 영도는 뒤를 돌아봤다. 동시에 수인이 옆을 스쳐지나갔다.
아까 수인의 목소리가 좀 까칠한 것 같았는데 느낌 탓인 걸까?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갸웃하던 영도는 수인이 소파 쪽으로 가서는 하얀 천으로 테이블 위를 닦는 걸 보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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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한 쪽에 앉은 채로 영도는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이는 건 검은 창에 비춰지는 본인의 모습과 위쪽으로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달이었다.
1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건만 잠이 오지 않았다. 10시부터 자야겠다고 말을 했던 영도는 하나도 졸리지 않았는데 되레 수인이 피곤해하며 지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물론 수인의 옆에 영도도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수인이 자는 걸 확인하곤 밖으로 몰래 나온 거였다.
지금에 와서 깨닫게 된 건데 아무래도 수인이 옛날에 봤던 그 아이인 것 같았다. 정확한 건 하나도 없지만 느낌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수인이 그토록 찾던 그 아이라고 말이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 그걸 입에 담지 않은 것은 수인은 이쪽을 기억하고 있을까 싶어서였다.
만약 수인이 기억을 하나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쪽이 그런 말을 꺼낸다면 분명 당황해할 터였다. 그렇다고 마냥 입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시기가 어떻든 일단은 말을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수인아. 네가 그 아이인 거냐. 만약에 그렇다면 왜 나한테 말을 하지 않은 거냐. 너도 날 못 알아봤던 거냐.
........그럴 리가 없겠지. 일단 이 얼굴은 중학교 때와 많이 달라지지도 않았고. 아니다. 당시 아이는 어렸지. 사람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진지해져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수인은 방에 있으니 소리가 크게 들릴 턱도 없는데 괜한 걱정에 급히 전화를 받았다. 굳이 액정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만한 사람이라면 하나 밖에 없었다.
"왜 이 늦은 시간에 전화질이야."
[지금이라면 일어나 있을 것 같아서.]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늘어지는 억양을 감지한 영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술 마셨어?"
[오랜만에 아는 사람들 만나서 재미있었거든.]
"아는 사람들 누구? 목소리 톤을 들어 보아하니 그런 게 아닌데?"
정말 신나서 마신 날과 싫은 걸 억지로 마신 날의 목소리 차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또 생긴 건가. 이 녀석이 이럴 때에는 괜히 더 불안해진다면서 영도는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내일 기자회견 날이야. 어떻게 할 거야?]
내일이라고 해서 정말 놀랐다. 그러다가 지금 12시가 넘어서 내일이라고 해봤자 앞으로 24시간 가까이 남아있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자연스럽게 영도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게 되었다.
"뭘 어떻게 해?"
[일단 협박까지 들었는데 들어줄지, 말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어?]
"협박이라."
협박이라 한다면 이것저것 많이 들었지. 최악인 건 앞으로 연예계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버리겠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물론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바로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아니었다. 되지도 않는 허풍을 떤다는 느낌도 적잖이 들었다.
실상 그런 협박보다 훨씬 더 신경 쓰이는 건, 놈들이 저리 떠들어대는데 이쪽은 뭘 하느냐는 거였다.
"우리가 그렇게 힘이 없나?"
[중소기업 같은 느낌이지. 대기업은 아니잖아.]
"내가 묻고자 하는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네 힘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나고 묻는 거야."
[낸들 어떻게 하겠어? 철없을 때 찍었던 게이 포르노 원본 테이프를 떡하니 가지고 있는 걸. 설마하니 그게 아직도 남아있을 줄은 몰랐징~.]
"넌 정말 가지가지 하는 사람이야."
시경답지 않게 대처가 미적지근하다 싶었더니만 이런저런 것들이 연결이 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같은 소속사인 아직은 어리고 전도유망한 어린 놈이 어렸을 적에 저질렀던 실수나 이런저런 약점들을 끌어 모아서 시경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던 거다.
결정적으로 어제 저녁에 불려간 것은 시경의 테이프 때문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귀를 의심했지. 물론 시경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으니 남자와 한다고 해서 그를 경멸한다거나 싫어하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 걸로 따지면 이쪽도 더는 할 말이 없는 입장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것과 별개로 '이런저런 일들이 생겨버려서 어떻게 할까 생각중이야.'라며 혀를 내밀며 웃는 시경을 보는 순간 영도는 주먹이 올라갔다. 때려주려던 순간 멈춘 것은 시경이 웃고는 있으나 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로 이만큼이나 소속사를 키운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일들도 많고 영도가 예전에 저지른 일들도 몇 번이나 덮어준 바가 있었다. 그저 소속사 사장과 연예인의 입장 이상의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 계속 생각 중이었다.
"내일이 회견이라."
지금이 1시니까 아직 23시간이 남은 거였다.
그 시간동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 달리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까.
[안 나타나도 상관없어.]
"그러면 그쪽이 제멋대로 떠들어대겠지."
[장기전이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일단은 놈들이 원래 목적으로 했던 뒷돈 만들기는 성공한 것 같으니 말이야. 이번 일로 이유라를 띄우면 돈도 톡톡히 들어오겠지.]
이유라 측과 연계된 쪽에서 이번 혼란을 기회로 두둑한 자금을 마련한 걸까나. 대체 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영도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정말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냐."
[마음대로 해. 다만 널 망치는 일만은 하지마.]
"내가 왜 나를 망치는 일을 하겠어."
[지금 나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니야. 나 너 좋아.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조금 더 키워보고 싶어. 그러니까 괜히 일 만들어서 은퇴하는 상황 같은 건 만들지 마. 알았냐?]
"글쎄. 어떨까나."
아무리 진지한 말이라 해도 혀 꼬부라진 것으로 하면 설득력이 없기 마련이었다. 멋진 말은 제정신에서 해야지.
소속사 사장이 이런 식으로 굴면 불안해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영도는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본인의 일인데도 말이다. 그만큼 시경과 오랜 시간을 보내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다는 거겠지.
"내가 여기에 있는 것도 벌써 10년이 넘었어. 참 긴 시간이었었는데 눈 감았다 뜨니 벌써 이 자리네. 내가 이렇게 뜨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어."
[이 시경님이 알았잖아. 그래서 너한테 접근했던 거고 말이야.]
"그 때부터 나의 개고생이 시작된 거였지."
[너무 암담해하지마. 결과적으로 서로 좋았잖아~.]
"그래. 좋았지."
이런저런 일이나 탈도 많은 나날들이었다. 그런 복잡한 걸 모두 뛰어넘어 지금의 원혁이라는 캐릭터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원영도와 하나이지만 동시에 다른 인물. 그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내일의 기자회견에 달려 있었다. 타협을 보면서 적당히 박자를 맞추어주면서 가늘고 길게 나갈 건가. 그게 아니라면.......
영도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진지하게 생각을 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결정했어. 내일 회견장에 나간다."
[달리 생각하는 거라도 있어?]
"없어. 그냥 나간다."
[그러다가 사고 치면 넌 나한테 죽어.]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시경의 목소리가 한결 음침해졌다.
[농담 아니야. 정말로 죽일 거야. 나는 내 상품에 흠 생기는 거 싫어해.]
"그런 대단한 분이 왜 스캔들 터지게 놔두셨어요."
비꼬는 말에 시경은 긴 한숨을 쉬며 '나도 사람이야. 실수 한, 두 가지는 있는 법이라고.'라고 징징거렸다. 그 말을 들으며 영도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시간이 약인 모양이었다. 미칠 듯이 불쾌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렇게 간단한 일처럼 여겨지게 되다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는 이만 됐다. 이제 슬슬 다른 화제를 꺼내봐야 할 듯 싶었다.
"그보다 내 스토커 하나가 일을 친 것 같아."
[스토커? 누구? 넌 은근히 그런 놈들이 꼬이는 타입이라 한 둘이 아니잖아.]
"요즘 좀 열렬하게 구애를 하던 미친놈 있잖아. 맨션 안으로 들어와서 우편함 안에 이상한 걸 넣었어."
[이상한 거 뭐?]
"소간."
[넌 정말 위험한 놈들에게 사랑을 받는 구나.]
"그건 너한테 찍힐 때부터 감안하기로 한 내용이고. 일단 사람 풀어서 알아봐주지 않겠어? 다른 건 몰라도 맨션 안까지 사람 시선 피해서 들어온 게 마음에 걸려."
[그래. 알았어. 그 정도는 확실하게 처리를 해줘야 사장이라 할 수 있겠지.]
이제 슬슬 대화가 마무리가 되는 시점에서 문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열린 문 앞에 서있는 수인이 보였다.
"이만 끊자. 수인이 나왔어."
시경이 뭐라 하는 것 같았으나 듣지 않고 그냥 끊어버렸다.
수인은 곧장 영도의 앞으로 걸어왔다. 다가오는 수인을 바라보며 영도는 물었다.
"왜? 안 자고?"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서요."
수인은 영도가 한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는지 영도는 그것을 소파 위에 내려놨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이다. 그래서 달리 물을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영도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자다 깬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안자고 있었던 거예요?"
"자려고 폼 잡긴 했는데 잠이 와야지."
수인은 영도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앉기만 하는 건데도 괜히 신경 쓰였다. 무슨 말이라도 이쪽이 먼저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손이 뻗어진다. 그 손은 영도의 머리를 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끌려 내려간 영도는 수인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게 되었다.
"자요."
아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로 영도는 눈을 꿈벅였다. 그러다가 위로 고개를 들었다. 수인이 차분한 눈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 이쪽이 수인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 된 듯 싶었다. 멍하니 있던 영도는 똑바로 누워선 수인을 바라봤다. 수인은 영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왜 그렇게 봐요?"
"보면 안 되는 거냐."
"이상하니까 쳐다보지 말아요."
수인은 영도의 눈 앞으로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바로 그 손을 잡아끈 영도의 입술이 손바닥 가운데에 닿았다. 입술이 닿는 순간 수인의 손가락이 움찔거렸으나 피하진 않았다.
천천히 입술을 물린 후 영도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재차 머리 부근에 닿는 수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긴 한숨을 쉬며 영도는 점점 졸려지는 걸 느꼈다.
이상도 하지. 분명 하나도 안 졸렸었는데.
그리 생각을 하는 동안 영도는 어느새 고른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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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정도의 어정쩡한 시간에도 백화점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도심에서도 꽤나 비싼 측에 속하는 백화점이다 보니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도도한 얼굴로 상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일부러 말은 하지 않아도 '난 재벌 3세 정도는 되는 사람이야.'라는 티를 낸다고나 할까나. 물론 그것도 수인의 선입견에서 나온 생각일지도 몰랐다.
"뭘 보고 있냐?"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있는 영도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왜?'라고 묻고 싶은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수인은 앞으로 다리를 주욱 뻗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글쎄. 이제는 뭘 할까나."
백화점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밥솥을 사는 일이었다. 최근 유명한 게 '밥 한 번 먹자.'라는 멘트를 날린 이효린 밥솥이었다. 둘 다 기능 설명을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최근 많이 사간다는 그걸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애초에 뭔가를 사려고 작정하고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 이후로 뭔 일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맹하니 있으려니 영도가 수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돌아다니자. 앉아만 있으면 뭐 해."
"그렇게 할까요."
대답을 하며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도의 옆에 붙어 섰다.
영도는 지금 편안한 차림에 비니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수인도 그와 비슷한 차림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영도 쪽이 훨씬 더 눈에 띄는 편이었다. 연예인 특유의 아우라도 있고 키도 크고 몸도 좋았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종종 '원혁이다.' 같은 말들이 들려오곤 있었다. 그리 말을 하고나서 달려와 싸인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수인이 보기엔 흥미로운 것이었다.
"어디를 갈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봐요?"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오랫동안 TV에 나오다보면 저절로 사람들 눈에 익게 돼.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나를 무척이나 잘 아는 듯 구는 경우가 많지."
"그러면 혼자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편하지. 여러 사람들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보다는 혼자인 편이 눈에 덜 띄어 . 사람들도 '왜 혼자 다니지? 원혁이 아닌가?'하고 생각을 해버리니까."
"그렇구나."
어쩌면 그 반대일 지도 모르지. 원혁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지만 워낙에 당당하게 있으니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는 거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거다. 그런 걸로 두고 봤을 때, 이쪽은 행운아라 해야 하는 걸까나.
"허벅지는 안 아프냐?"
"허벅지가 왜요?"
"내내 내가 머리 베고 있었잖아. 근육 뭉치지 않았어?"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고 생각했는데 잠에서 깼을 때에는 3, 4시간이 흐른 후였다. 놀라 바로 일어선 영도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수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런 불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어떻게 자고 있는 건가 싶어 당장 그를 안아들고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 시간이 7시 40분이었다.
수인이 일어나지 않고 아침에 팔팔하게 잘 다녀서 미처 묻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지금에 와서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생각난 김에 말해버리자 싶었다.
"괜찮아. 난 의외로 튼튼해요."
"그러다가 갑자기 담 같은 거 온다."
"안 와요. 형처럼 아저씨도 아니고."
"아저씨이?"
말 뒤꼬리가 올라간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냥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을 들어버렸다.
아니. 아저씨라니. 이렇게 젊고 섹시하고 생생한 아저씨 본 적 있어?
원혁은 당장 엄지로 본인을 가리켰다.
"내가 어딜 어떻게 봐서 아저씨라는 거야?"
"아저씨라고 부르니까 욱하는 것 자체가 이미 아저씨인 거예요."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열 받아서 이러는 거잖아."
"그러세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 말하고 싶은 듯 한쪽 눈썹을 사악 올리는 수인에게서 능청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담담한 태도에 영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어버렸다.
"너 정말-."
"영화를 개봉하는 모양이네요.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수인은 그런 영도를 지나쳐 벽 쪽에 붙여진 수 많은 영화 포스터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정말 많으네요. 이렇게 많이 개봉해도 사람들이 다 보러가는 건가."
어림잡아도 7편이 다 되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경쟁을 붙여놔도 괜찮은 걸까? 보는 건 보고, 아닌 건 아닌 게 아닐까. 영화 포스터를 유심히 살피는 수인은 흥미로운 얼굴이었다. 언제나 늘 애늙은이처럼 뒷짐을 지고 서있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제 또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영화 볼래?"
"영화요?"
반문을 하긴 하나 싫다고는 안 한다.
"보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영도는 포스터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음 편히 아무거나 선택하라는 투였으나 수인은 선뜻 고를 수 없었다. 영화도 본 사람이 본다고, 수인으로선 어떤 영화가 재미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잠자코 있으려니 수인의 상태를 간파한 영도가 '그럼 내가 고를까?'라고 말했다. 그리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영도가 피식. 웃으며 수인의 머리를 툭 쳤다. 아프지 않게 건드리는 수준이었다. 다정함이 느껴지는 손길에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이건 후속편이라 안 되겠고. 연애물은 별로일 테고. 그 외에 볼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혹시 공포나 미스터리물이 좋아? 환타지가 좋아? 액션이 좋아?"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제일 부담되는 거야. 뭐라도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딱 집어서 말을 해달라고."
"잘 몰라처 그래요. 그냥 형이 보고 싶은 걸로 해요. 아무거나 봐도 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건 처음이니까."
"처음이라고? 한 번도 안 가봤어?"
"딱히 갈만한 기회가 없었던 거지요."
담담히 말을 한 수인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 포스터를 바라보는 그 얼굴이 차분하기만 했다.
지금도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려야 바깥을 다닐 수 있는 수인이었다. 강원도에서 살 때에는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겠지. 어디든 자신과 다른 걸 배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인에게 영화관에 함께 갈만큼 사이가 좋은 친구가 없을 거라는 게, 영도의 추측이었다. 또 그게 사실일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걸 볼까?"
영도의 손이 남자, 여자 주인공을 클로즈업한 포스터를 가리켰다.
좋다는 듯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거 봐요."
"있어봐. 시간이 어떻게 되려나. 점심시간이긴 한데 배고파?"
"아직은 괜찮아요. 아침 늦게 먹었잖아요."
"그럼 팝콘 같은 거 사들고 가기로 하고, 일단은 영화관으로 올라가자."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서두르게 된다. 수인을 데리고 영도는 당장 에스컬레이터로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