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31)

하아. 하고 한숨을 토해내듯이 내뱉고는 위로 고개를 들었다. 수인의 턱에 입을 맞추다가 고개를 숙였다. 셔츠를 올리자 가슴이 드러났다. 여자의 가슴이 아니었다. 밋밋한 가슴인데 왜 보는 순간 입 안에 침이 고이는지 모르겠다. 꿀꺽. 하고 생침을 삼킨 영도는 혀를 내밀었다. 수인의 유두에 혀 끝이 닿았을 때 힘이 들어갔다. 피하려는 듯 뒤로 물러나는 몸을 단단히 붙잡고는 입을 벌려 유두를 빨아들였다.

처음 입을 대기까지가 어려운 거지 한 번 맛을 보자 더는 주저할 것이 없었다. 입술을 오므려 빨고 혀로 살살 굴려봤다. 이를 세워 깨무는 동안 수인의 가슴이 파르르 떨린다. 수인의 손이 영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왜 거기만......"

중얼거리는 소리에 영도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왜 거기만 건드리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여기에 제일 큰 흥미가 있었다. 쪽쪽 거리면서 다른 손으로 외롭게 옆에 남아있는 가슴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모아 유두를 잡아 살살 돌리자 수인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영도는 그저 가슴에만 매달려 있을 뿐인데도 흥분이 되었다. 영도를 밀쳐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지도 못했다. 어정쩡하게 있는 동안 영도는 이를 세워 유두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아프다는 중얼거림이 있고서야 영도는 간신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인의 가슴 가운데에 입을 맞추고 점점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혀를 내밀어 배꼽을 핥았다

"거기는-."

"괜찮아."

영도가 듣기에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정말은 머리 끝까지 흥분한 주제에 잘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영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인의 오른쪽 옆구리에 입술을 대자 다른 의미로 수인의 몸이 경직되었다.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오른쪽 허리에는 화상 자국이 남아있었다. 어디서 다쳐 이런 자국이 생기게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처를 수인이 신경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영도는 혀를 내밀어 손바닥 만한 화상 자국을 꼼꼼하게 핥아댔다. 그러는 동안 수인은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영도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머리카락이 당겨져서 아팠지만 영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직 중요한 게 남아있었다.

입을 벌리자 하아. 하고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수인이 입고 있는 바지 위로 뭔가가 솟아올라 있었다. 사내라면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영도도 이와 똑같은 걸 몸에 달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남자를 안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유혹이 있을 때마다 정색을 하면서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이라 했었는데. 이러니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며 영도는 수인의 바지 위에 손을 올렸다.

"읍!"

여기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수인은 영도의 어깨를 붙잡아 위로 당겼다. 일어나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엎드려만 있던 영도였으나 계속해서 잡아끄는데 마냥 모르는 척 몸을 숙인 채로 있을 순 없었다. 영도는 고개를 들었고, 수인은 기다렸다는 듯 마구 얼굴을 흔들었다. 

"왜? 무서워?"

가라앉은 영도의 목소리에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유혹을 한 쪽을 굳이 정하라 한다면 그건 수인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려 하고 있었다. 수인이 정말 싫어한다면 억지로 할 순 없었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영도는 수인 쪽으로 몸을 붙였다.

"괜찮아. 나도 너랑 지금 같은 상태이니까."

영도는 수인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흠칫거리던 수인의 손을 사타구니 사이에 대고 꾸욱 눌렀다. 영도의 물건은 뜨겁게 발기되어 있었다. 크기나 단단함이 수인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똑같지?"

똑같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게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 거란 말인가.

오묘하게 변하는 수인의 얼굴에도 영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 눈빛에 수인은 슬그머니 아래로 눈을 내리떴다. 피하고 있었다.

발랑 까진 꼬맹이처럼 사람더러 침대 위로 올라오라고 한 주제에 이제와 발뺌을 할 셈이냐. 하긴. 아직 어리고 순진한 수인에게는 이게 한계였을 지도 모르지. 영도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대로 후회를 하겠다고 밀어붙였다간, 두고두고 땅 치면서 살게 되겠네.

묘하게 개운해지는 걸 느끼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 그만할게."

'어라?'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였던 수인이 당장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라봐온다. 그것과 마주한 영도는 입술 양끝을 위로 올렸다.

"그걸 또 믿냐?"

".......무슨."

화사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에 수인은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더 크게 떴다. 수인이 방심한 순간을 놓칠 영도가 아니었다. 당장 수인을 쓰러뜨리고 바지와 속옷을 함께 벗겨버렸다.

"뭘 하는 거예요!"

"기다려 봐. 좀 보자."

촌닭 고추는 어떻게 생겼는지. 나하고 얼마나 다른지. 이걸 보고도 내가 계속 욕정을 하는지 사그라지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버둥거리는 수인을 억누르고 영도는 눈 앞에 훤히 드러난 수인의 성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기본 모양은 분명 영도의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크기나 모양, 색이 달랐다. 조금 더 어리고 귀여운 느낌이었다. 고환이나 음모 등도 확실하게 자라 있었다. 수인은 명명백백한 사내였다. 그런데 왜 더 흥분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바지를 벗겨놓고 발기가 된 성기를 뚫어져라 보는 영도 때문에 수인은 미칠 것 같은 상태였다. 이 사람이 정말 왜 이러나 싶었던 수인은 다리를 오므리며 손을 내렸다.

"보지 말아요!"

"볼 거야."

수인의 외침이 허탈하게 영도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숙인 영도는 수인이 막기도 전에 성기를 물어버렸다. 입 안에 담는다. 오럴을 해버렸다.

"하윽!"

지금 영도가 하는 행위 자체를 믿을 수 없었던 수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영도는 수인의 성기를 입 안 가득이 넣었다가 혀로 자극을 했다. 사내의 성기를 입에 무는 건 처음이었지만 의외로 괜찮았다. 그냥 사탕을 빠는 감각으로 애무를 하는 동안 머리나 어깨로 수인의 주먹이 떨어졌다.

"그만 둬요! 왜 이러는 건데요!"

두드려도 너무 힘을 줘 구타할 수도 없었다. 암만 뭐라 해도 영도는 떨어지지 않고 처음보다 현란해진 혀 놀림으로 수인의 걸 자극했다. 직접적으로 오는 자극을 당해낼 수 없었던 수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중에는 침대 위에 팔을 올린 채로 영도가 주는 쾌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피부가 붉게 물들고 콧잔등과 이마로 땀이 촉촉이 맺힌다. 눈을 깜박이며 헐떡거리는 동안 수인은 지금 이게 현실인지 뭔지 싶었다. 그러다가 곧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려면 이게 자연스러운 거였다. 애초에 영도를 끌어들였다가 갑자기 하기 싫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영도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터였다. 갑자기 요조숙녀인 척 하는 거 아니야? 그리 생각을 해도 할 말 없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수인이 생각하던 것과 너무도 달랐다.

흥분을 한 영도는 완연한 사내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그의 성기는 너무 크고 뜨거웠다. 영도만이 아니라 그의 양물을 접하게 되는 순간, 막연하기만 했던 관계가 현실이 되었고 그건 수인으로 하여금 미지의 경험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결정적인 순간 몸을 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도 몰랐다. 

"읏-."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현실도피를 하는 동안 뭔가가 하반신으로 몰렸다. 피가 몰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뒤를 이어서 찾아오는 소변과는 다른 배출감에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도 부족해 주먹을 들어 입을 막는 순간 사정을 해버렸다. 아직 영도의 입 안에 성기를 담은 채로 말이다.

사정을 하는 동안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는 동안 영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을 들어 입술 부근을 닦아낸 그는 인상을 썼다.

".......이상한 맛이야."

그게 당연하지.

얼굴을 붉힌 수인은 당장 몸을 일으키려 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따져물으려던 찰나 팔에 힘이 풀려 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게 되었다. 풀썩. 하고 누워버리는 수인을 본 영도가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겨우 이거에 힘 풀렸냐?"

느긋한 영도의 모습에서 경험 많은 성인 남성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스며 나왔다. 조각 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치한 행동을 일삼는 영도였기 때문에 반나체로 색기를 풀풀 풍기는 모습은, 아직은 경험 없고 어린 수인에게 부담스럽기만 한 거였다.

단지 영도가 몸 위에 올라타 있을 뿐인데도 크게 숨을 내쉴 수 없어 옆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은근슬쩍 시선을 피해버리는 수인의 모습에 영도는 손을 들었다.

머리카락을 만지자 수인의 눈가가 파들거리고 떨린다. 뭔가를 결심한 사람 마냥 아래 입술을 깨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도의 눈이 가늘게 접혀졌다.

"나 너 잡아먹으려는 거 아니다."

웃음이 서린 중얼거림에 수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영도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는 수인의 팔뚝을 붙잡았다.

"아프지 않게 할 테니까 엎드려봐. 나도 아직은 어떻게 하는 게 잘 하는지 몰라서 삽입까지는 자신 없다."

너무 긴장해서 영도가 하는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도가 이끄는 대로 엎드리게 된 수인은 등 뒤에 닿는 영도를 느끼곤 숨을 죽였다. 손등 위에 입술을 댄 채로 다음을 기다렸다. 그러자 영도는 수인이 옆으로 누울 수 있도록 하고 허벅지를 맞물렸다. 수인의 귀로 영도의 입술이 닿았다.

"괜찮아. 긴장 풀어. 하지만 허벅지에는 힘 단단히 주고 있어."

왜 그런지 이유는 묻지도 않고 하라는 대로 허벅지에 힘을 줬다. 그리고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으로 닿는 뜨거운 물건을 느낄 수 있었다. 수인은 숨을 죽였다.

수인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긴장한 수인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영도는 맞물린 허벅지 안쪽으로 깊숙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밀착된 살 사이로 성기를 집어넣고 두어번 마찰을 한 영도는 오싹한 쾌감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좋아."

이 정도라면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그리고 수인의 티 없이 깨끗하고 동그란 엉덩이는 보기에도 좋아 조금 더 흥분하게 되었다.

두어번 문지르자 수인이 흠칫거린다. 순진한 듯 보이는 반응에 영도는 더 흥분했다.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밀어 넣으며 마찰을 하는 동안 만족감이 채워졌다. 수인의 엉덩이 한 쪽을 쥐면서 살 사이로 깊이 성기를 밀어 넣자 수인이 짤막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더 고양되었다.

"이거 정말 괜찮은데......."

입 안이 마르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허리를 움직이면서 수인의 귓불과 뺨 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쪽만 기분좋은 건 아닌 듯 눈을 질끈 감은 수인은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다 간간히 시트를 잡고 아래로 손을 내리려 한다. 중간 즈음에서 멈칫거리는 걸 본 영도가 수인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그의 성기를 쥐었다.

커다란 손바닥에 쥐어진 성기는 조금 발기가 되어 있었다. 아직은 젊어서 회복이 빠른 모양이었다. 당황한 듯 수인이 뒤를 돌아보자 이번에는 가슴에도 손을 댔다. 당장 어깨를 움츠리며 피하려 하자 영도가 속삭였다.

"피하지마. 만지고 싶으니까."

쉰 목소리가 직격으로 온다.

성기와 유두가 잡혀서 만져지는 동안 영도의 성기가 계속해서 비벼졌다. 허벅지 안쪽이 뜨거웠다. 묵직한 것이 흔들면서 비벼올 때마다 하반신으로 힘이 들어갔다. 수인은 헐떡거리며 앞으로 넘어온 영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형. 형."

"하악. 헉. 수인아."

정말 좋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그동안 왜 참는다고-.

거기까지 생각을 한 영도는 더 세게 허리를 놀렸다. 수인의 허벅지 위에 손을 대고 아래로 꾸욱 눌러 압박감을 세게 한 후 몇 번을 더 비벼대던 영도는 그대로 사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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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디디딕-.

하는 소리에 영도의 눈이 바로 떠졌다. 푹 잔 것 같은데도 멍했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던 영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가 묵직한 것이 몸을 누르고 있는 걸 느끼곤 행동을 멈추었다. '이건 뭐야.'라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품에 안겨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수인이었으니 말이다.

영도는 천천히 손을 들어 본인의 이마에 올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날짜 관념도 확실하지 않는 와중에 있었던 일들이 진짜인 걸까. 품에 안긴 수인의 피부가 직격으로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무의미한 짓이었다.

영도는 눈을 내리떠 수인을 확인했다. 눈을 감은 수인은 색색거리는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기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참 잘도 자는구나 싶었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수인의 뺨을 쓰다듬은 영도는 조금 더 용기를 내봤다. 팔을 내려선 수인의 허리 부근에 대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다가 손으로 수인의 통통한 엉덩이를 슬슬 문질렀다.

어제는 그쯤에서 끝낸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남자는 처음일 게 분명한 수인이 아니던가. 이쪽도 그 쪽 지식은 한 개도 없었다. 무턱대고 했다가 수인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스터베이션이나 수인의 체취를 맡으면서 허벅지 안쪽으로 비비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몇 번이나 해버렸지. 그래서 지금은 성적으로나 기타등등의 것들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운 상태였다. 편안한 얼굴을 한 채로 수인을 조금 더 앞으로 끌어당긴 영도는 그의 목덜미 부근에 코를 댔다.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았다.

"땀 냄새 나요."

품에서 울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영도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꾸물거리며 수인이 고개를 들었다.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반쯤 감겨 있었다. 아직 졸음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이쪽을 보는 것조차도 귀여웠다. 그 뺨을 잡아 흔들고 싶은 걸 참으며 영도는 어색하니 웃었다.

"잘 잤어?"

"잘 잤어요."

대답을 한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그러더니 꼬물거리며 영도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가슴팍에 이마를 댄 수인이 재차 눈을 감는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듯 싶지만 실상 꽤나 긴장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먹 쥔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숨을 죽이고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영도는 수인의 엉덩이 부근에 손을 대고 앞으로 끌면서 다리를 들어 수인의 허벅지에 올렸다. 가만히 있나 싶던 수인이 웅얼거렸다.

"무거워요."

"조금만 참아."

기분 좋으니까.

그 말을 하지 않은 채로 영도는 조금 더 수인 쪽으로 달라붙었다.

헤실거리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입술 꼬리가 올라가는 지 모르겠다. 남들 보면 이상하다 손가락질 해댈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떻겠는가. 좋은 것을. 영도는 수인의 머리카락 쪽으로 코를 묻었다. 비벼대면서 간간이 킁킁 거리고 냄새를 맡으려는 것에 수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겼다.

"왜 자꾸 냄새를 맡아요. 개띠도 아니면서."

"돼지띠라서 그런다."

".....그게 뭐야."

웅얼거려도 수인은 싫은 얼굴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던 수인의 입술 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간다. 미소 짓는 그 모습에 영도는 가슴 한 쪽이 근질거렸다. 기습적으로 수인의 몸을 끌어안고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어?'하는 사이에 영도의 위에 올라가게 된 수인은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왜 이래요?"

"무드 없이 그러지 말고 잠깐 가만히 있어봐. 금방 내려줄 테니까."

"이러지 말아요.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좋은 거잖아."

뭐가 좋단 말인가. 다 큰 사내가 다른 사내의 위에 엎드려 누워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알몸이었다. 수인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어서 내려놔줘요. 그게 닿아서 이상하단 말이에요."

내내 헤실거리고 웃던 영도지만 그 순간 바로 정신이 돌아왔다.

그게 닿다니? 뭐가? 같은 멍청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다만 반쯤 발기가 된 이쪽 성기가 수인의 배를 쿡쿡 찔러대고 있음을 느꼈을 따름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이러고 있긴 해도 원래는 틱틱거리던 수인과 영도가 아니던가. 그런 여러 가지 일들과 갭들이 적용을 해서 영도를 무척이나 민망하게 만들었다. 좋다고 수인을 끌어당겨서 위로 올린 게 언제냐는 듯 슬쩍 팔을 풀고 만다. 데굴 굴러서 영도의 위에서 내려온 수인은 당장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려다 이불이 내려가서 가슴이 드러나자 놀라 바로 팔로 몸을 가린다.

수인이 몸을 가리자 영도도 마냥 알몸으로 누워있을 수 없었다. 천천히 옆으로 몸을 돌려선 침대 끝에 앉아 다른 이불로 하반신을 가렸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싼다.

입 꾹 다물고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잊은 척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이 되는 듯 인상을 쓰던 영도의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요?"

"아, 응."

묻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인의 지금 입장에서는 그 편이 나았다. 이불로 몸을 돌돌 만 수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인이 나가고 문이 닫힌다. 그제야 영도는 뒤를 돌아봤다. 텅 빈 침대와 닫힌 문. 때문에 일시적으로 '아직도 꿈 속인건가?'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영도는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수인의 냄새가 났다.

가만히 있나 싶던 영도는 아예 침대 쪽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러자 수인의 향이 더 짙게 나는 것 같았다.

지금 대체 뭔 짓을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바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수인의 체취가 너무 좋아서 마냥 이렇게 있고 싶었다. 지금 누군가 변태라고 한다면 그걸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이 모습은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변태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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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로 들어온 수인은 이불을 좌우로 벌렸다. 거울 안으로 수인의 상반신이 비춰졌다. 가슴, 유두 부근으로 알록달록한 자국이 한 가득이었다. 그 자국을 손으로 더듬던 수인은 주먹을 쥐었다. 눈을 감자 바로 한숨이 나왔다.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건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몸에 남은 자국들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영도와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라고 말이다.

눈을 감고 차분하게 있나 싶던 수인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익어간다.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얼굴을 감싸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믿을 수 없어."

영도와 그런 일을 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다. 현실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뛰다 못해서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이제 더는 영도와 있었던 일에 대해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수인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그답지 않게 꽤나 멍청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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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고추 한 개를 넣은 된장찌개가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고기가 익고, 반대편으로 다 끓여진 김치찌개가 담긴 냄비가 있었다. 이렇게만 해도 충분히 훌륭했다. 그런데 계란말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아직 그건 잘 만들 수 없는데. 괜히 간이 짜게 되거나 잘못 말아서 타버리면 어떻게 하지. 차라리 만들지 말자면서 수인은 마음을 비웠다. 그 때 욕실 문을 열고 영도가 나왔다.

"시원하다."

조용히 나와도 되겠지만 민망해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가 나왔다.

말을 하고 난 영도는 수인을 흘깃 봤다. 수인은 주방 안쪽에 등을 보인 채로 서있어서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다면서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았다.

"기다려요. 금방 되니까."

수인이 보지도 않는데 영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턱을 괸 영도는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요리를 하는 수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대로라면 여자가 서있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수인이 서있어도 참 잘 어울렸다. 게다가 뿌듯하기까지 했다. 영도는 지금 본인의 입술 양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올라간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수인은 가능한 어색하게 움직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밥상을 차렸다. 밥을 풀 때에는 영도가 도왔다. 수저와 젓가락. 물도 미리 떠놓고 자리에 앉자 그럴싸했다. 뚝배기 된장찌개와 김치 볶음. 그리고 구운 고기가 있었다. 아침 치고는 꽤나 준비된 게 많았다.

"거창하네. 맛있겠는 걸."

"된장찌개랑 김치볶음은 자신 있지만 고기는 아니에요."

"고기는 굽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래도 자신 없어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는 게 마치 맛을 보라 하는 것 같았다. 일단 먹고 맛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라는 거다.

그냥 평범하게 먹어야 하는 걸까나. 수인이 차분하게 옆자리에 앉는 걸 본 영도는 눈을 데굴 굴렸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선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몇 번 씹나 싶던 영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웁!"

"왜 그래요?"

"너, 너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영도에 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뭔 일인가 싶어 긴장된 눈길로 바라보자 영도가 목을 한 손으로 잡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것을 입에 담고있다는 듯 인상을 쓰던 것도 잠시, 확 풀린 얼굴로 말했다.

"너무 맛있어."

이런 식으로 말을 했을 경우 대체적으로 상대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보일 것인지 예상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미간의 주름을 만드는 수인을 확인했을 때, 영도는 본인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수인은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말했다.

"왜 그래요. 사람 오글거리게."

순식간에 영도의 얼굴이 짜게 식어버렸다.

그래. 곧 죽어도 문수인이다. 그 성격과 말발이 어디로 가겠냐면서 영도는 재차 고기를 집어 입 안에 구겨 넣었다. 밥을 퍼서 입에 넣더니 된장찌개의 맛도 본다. '앗, 뜨거.'라고 말을 하더니 국물을 후후 불어서 입에 넣는다. 오물거리면서도 맛나게 먹는 모습에 수인도 수저를 들었다.

내내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을 듯 싶던 수인이었으나 아니었다. 점점 얼굴표정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생기는지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밥을 떠서 입에 넣은 수인의 입가로 아주 조금의 미소가 그려졌다.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짓을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내색하는 일 없이 수인은 야금야금 식사를 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영도는 벌써 밥 한공기를 다 비워버렸다. 더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수인이 일어나서 밥을 수북이 쌓아서 권한다.

그걸 한 손으로 받아든 영도는 일단 김치볶음을 한가득 들어 밥 위에 올리더니 두어번 문지르고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매콤하고 뜨거워서 얼굴을 위로 들어 하-하고 숨을 토해내더니 빠르게 턱을 움직인다. 된장찌개의 맛을 보면서 으음-하면서 몸을 부르르 떤 영도는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켰다.

"이건 진짜 맛있는 것 같아."

"3년 묵은 된장이에요."

"이거 얼마나 남았어?"

"꽤 남은 것 같은데요. 그래도 2달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에요."

"다 먹으면 할머니 댁에 찾아가봐야 되겠다."

"왜요? 된장 훔쳐오려고요?"

대답은 하지 않고 열심히 밥을 씹었다. 무언의 긍정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바깥에 있을 때나 막 안에 들어왔을 때에는 배고픈지 몰랐다. 그런데 막상 밥에 입을 대자 터지는 식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떨어진 밥알까지 집어서 입에 넣던 영도는 수인을 돌아봤다.

"부지런히 먹어."

"먹고 있어요."

먹고 있다고는 해도 수인이 젓가락이나 수저를 놀리는 폼이 마음에 들지않았다. 이 맛있는 것들을 앞에 두고 꼭 저렇게 먹어야 하는 건가 싶었던 영도가 지적에 들어갔다.

"팍팍 좀 먹어라. 그렇게 적게 먹으니까 사내놈 팔이 이런 거잖아."

먹으면서 영도는 수인의 팔뚝을 잡았다. 영도의 것과 다르게 가느다랗지만 그래도 뼈대가 튼튼하고 근육이 있는 팔이었다. 별 생각 없이 수인을 잡았던 영도는 그가 고개를 들자 어색한 느낌이 들었던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좀 열심히 먹으란 말이야."

"전 원래 빨리 못 먹어요. 급하게 먹으면 체하거든요."

"사내 놈이 왜 그렇게 예민해."

예민하다고 하니 재차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디를 건드릴 때마다 달콤한 소리를 내던 수인. 그 모습이 참으로 깜찍했었지. 당시에 실컷 수인의 몸을 탐했는데 막상 그 장면들을 떠올리자 오묘한 기분이 든다. 밥 먹고 있는 중에 뭔 생각인가 싶어 헛기침을 하며 영도는 괜히 시간을 확인했다. 4시였다. 

새벽은 아니고 오후 4시였다. 어차피 오늘은 할 일이 없었다. 그건 내일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동안 푹 쉬라고 했으니 몇 시에 자고 일어나는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하지만 낮 동안에 그렇게 자버렸으니 있다 밤에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싶었다. 

수인하고 어른의 놀이를 즐겨볼까.

"크흠! 험! 켁!"

혼자 생각을 하다가 민망함에 사래가 들어버렸다. 손으로 입을 막아도 나오는 기침을 멈출 수 없었다. 수인이 물을 권했다.

"천천히 좀 먹어요. 걸신들린 사람처럼 이게 뭐예요."

"미, 미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지레 놀라 기침을 하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흠흠 거리던 영도는 재차 수저를 들었다. 된장국을 떠서 입에 넣는 그의 밥그릇은 어느새 다 비워져 있었다. 체해서 기침을 하는 것 같았는데 또 밥을 줘도 되는 건가 싶었던 수인은 밥을 동그랗게 떠서 입에 넣으며 물었다.

"밥 더 먹을래요?"

"아니. 이걸로 됐어."

됐다고 말을 하면서 영도는 바닥에 붙은 밥알을 삭삭 긁어 입 안에 넣었다. 눈을 감은 영도는 맛을 음미하듯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다가 밥그릇을 내려놓고는 배를 두드렸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도는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좀 쉬고 치워."

"커피 물이나 올리려고요."

"있다가 하라니까. 뭐가 급해서 그래."

'넌 무드도 없냐?' 그리 따져 묻고 싶은 듯 올려다보는 시선에 수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의자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일단 수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아둔 것이 만족스러웠으나 막상 이리 앉고 나니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상당히 어색한 기분이 듦을 느끼며 영도는 눈을 굴렸다.

TV 앞이었으면 리모컨이라도 들었지, 밥상 앞에선 들 게 수저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김치볶음을 더 먹어, 된장국을 떠먹어. 상당히 뻘쭘한 상태였다.

눈만 굴려대고 있으려니 영도의 심리를 꿰뚫은 수인이 말했다.

"여기 말고 장소를 옮기는 게 훨씬 더 분위기가 날 것 같은데요."

뜨끔한 얼굴이 된 영도였지만 입은 꾹 다물었다. 본인의 실수를 인정치 않겠다는 투였다. 결국 이번에도 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릇들 물에 담가놓기만 하고 소파 쪽으로 가서 앉을까요?"

"그럴까? 커피물은 내가 올릴게. 넌 티백 녹차지?"

기다렸다는 듯 일어선 영도는 앞에 있던 그릇들을 정리했다. 그 움직임이 어린애 저리가라 였다. 유치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에 수인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난 티백은 싫어요."

"티백 밖에 없으니까 참고 마셔. 다음에 고급 녹차 사올 테니까."

싱크대 안쪽 통 안에 그릇들을 넣고 물을 틀었다. 그걸 본 수인이 한마디 던졌다.

"절반만 받아요."

"푹 담가놔야 불 거 아니야. 그래야 나중에 설거지 하기도 편해."

"마치 설거지를 많이 해본 사람처럼 말하네요."

"당연하지. 내가 혼자 자취했을 때에는 지겹도록 한 게 설거지지."

그래서 나중에는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는 컵라면으로 갈아탔었다. 그것도 한달 정도 먹고는 물려서 지금은 쳐다도 보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예전 고생담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영도는 뚝배기 그릇을 치우면서 행주로 식탁 위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지금까지 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지, 하려고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다 닦은 행주를 펴서 네모로 접더니 다른 곳도 두어번 슥슥 문지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 바닥에 내려놓기 전에 가볍게 행구는 걸 본 수인이 눈을 꿈벅였다.

"정말 잘 하네요."

"응? 뭐가?"

"살림이요."

수인의 말에 영도는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는 턱 아래에 손가락을 대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못하는 게 어디에 있어. 나 원영도야."

"그래요. 잘났어요."

쌀쌀맞다 싶을 정도로 짤막하게 말하면서도 수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런 모습이 보이기 때문일까. 영도는 못내 기뻤다.

참 이상했다. 수인은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도 이쪽이 괜히 들떠서 난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좋았다. 수인의 옆에서 같이 움직이면서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농담을 하는 동안 내내 붕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는 잊고 살았던 풋풋한 감정이 재차 마음 속을 가득 채운다.

"기분이다. 설거지는 내가 한다."

"오늘만 하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해요."

"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영도의 눈이 크게 떠지자 왜 그런 반응인가 싶어 수인도 뚱한 얼굴이 되었다.

"요리는 다 내가 하니까 뒷정리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왜 이래? 나 나가서 일하는 사람이야."

"나도 공부하면 할 일 하는 사람이에요. 서로 각자 할 일을 하는 건데 살림은 한 쪽만 하는 건 불공평한 거잖아요."

"그러는 게 어디에 있어. 난 아주 바쁜 사람이야."

"요즘 안 바쁜 사람들이 어디에 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이 바로 나야."

엄지로 스스로를 가리킨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가소롭다는 듯 수인의 입술 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형을 보면 우리나라 남자들의 수준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런 식으로 뻗대니까 맞는 남편들이 늘어나는 거라고요."

"아니. 하늘같은 남편을 누가 때린다는 거야. 네가 지금 이 형님께 손을 대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앙?!"

영도는 당장 수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수인은 당황한 듯 몸을 비틀면서 팔을 붙잡았다. 빠져나가려 저항을 하자 영도는 조금 더 팔에 힘을 주며 수인을 품에 가둬버렸다. '왜 이래요!'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수인은 당황한 투가 역력했다.

떨어져 있을 때에는 밉살맞은 말만 하더니만 지금은 당황해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런 반응이 귀엽기만 했다. 코앞에 있는 귀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영도는 입을 벌렸다. 살짝 귀를 깨물자 수인이 헛숨을 들이켰다.

"왜 그래요! 진짜!"

귀를 손으로 가리며 뒤를 돌아보는 수인의 얼굴이 벌겋게 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영도는 파악했다. 아닌 척 해도 수인 그도 이쪽과 마찬가지였다는 걸 말이다. 심장 떨려 죽겠는데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던 거다. 이 귀여운 녀석.

"뭐가 어때서 그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잖아."

영도는 수인의 엉덩이 쪽으로 하반신을 밀착했다. 이상하게 비벼대는 것에 수인이 기겁을 했다.

"왜 이래요! 하지 말아요!"

"괜찮아. 우리 사이에. 이런 건 아무-문제도 없는 일이야."

"이러지 말라니까요!"

기겁을 하며 몸을 물리려는 것만큼 영도는 더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원래 처음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 막상 뚜껑을 열고 나면 무서울 게 없는 영도였다. 능글맞은 중년 남자처럼 구는 영도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수인은 황급히 주방 밖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깨물린 귀를 붙잡은 채로 영도를 노려봤다.

"미쳤어요?!"

"아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하는 영도는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이었다.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니 마땅히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하는 건가도 싶었다.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동안 영도가 손을 흔들었다.

"가서 앉아있어. 차는 끓여서 가지고 갈 테니까."

그렇게 말을 하고는 수인이 더 무슨 말을 할 것 같았는지 당장 몸을 돌렸다. 등을 보인 채로 가스렌지 앞에 선 영도가 콧노래를 불렀다. 꽤나 기분 좋아보였다. 저러고 있는데 등에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었다. 수인은 몸을 돌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리 말을 하는 수인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웃는 얼굴의 수인은 누가 보더라도 수줍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귀 부근에 올린 수인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심장아. 차분해져라. 그리 말을 하고는 눈을 뜬 수인은 천천히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영도의 말대로 소파에 앉아 그가 끓여올 차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테이블 한쪽에 올려진 택배의 끝부분이 피에 젖어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저게 뭐야."

순간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인은 당장 뒤를 돌아봤다.

"형!"

"왜?"

뒤를 돌아보는 영도는 웃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사람 좋게 대답을 하며 돌아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인은 당장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이것 좀 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경직된 얼굴로 테이블을 가리키는 동안 영도가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웃는 얼굴로 말하던 영도이나 다음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수인이 가리키는 곳에 놓인 수상쩍은 붉은 물이 든 택배를 본 순간 천하의 영도도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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