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31)

한 번 위협을 해서 쫓아냈지만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 날파리들답게 아직도 바깥에는 적지 않은 수의 기자들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모르겠지만 두 번이나 이쪽이 나설 문제는 아니었다. 괜히 찍히는 것도 싫고 나선다 여겨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거슬린다. 아마도 요 며칠간 수인하고 잘 지내왔기 때문이 아닐까.

"잘 생각해보면 우리 과야."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라 하나 방금 들은 소리가 있었다. 궁금했지만 더 묻고 싶진 않았다. 지용은 보기와 다르게 엉뚱한 구석이 있었으니 말이다.

"슬슬 배고프지 않아? 간단하게 먹을 만한 거라도 없나."

동료의 말에 지용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인이 오늘 영도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만약 집에 있었다면 최씨 영감에게 간식거리를 만들어 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 덕분에 이쪽도 배를 채우는 일이 가능했을 텐데. 사람이 없으니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전에 수인이 해줬던 된장 주먹밥이 참 맛있었는데.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시려니 저 앞으로 자동문이 열렸다.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로 휘감고 멋들어진 선글라스까지 낀 재벌 3세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저런 사람이라면 기억을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누구지?"

"글쎄. 나도 처음 보는데."

차림새를 보아하니 관계자 외는 아닌 것 같고 아는 사람이 있으니 저리도 당당히 들어서는 게 아니겠는가. 수상한 놈이라면 그 애로 할아범이 들여보냈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안으로 침입하려는 기자를 몇이나 무찌른 전적이 있는 최씨 영감이 아니던가.

동료에게 잠시 있어보라는 사인을 보낸 후 지용은 이리로 오는 사람에게 접근했다.

"실례합니다."

"다녀왔어요.

거의 동시에 말이 나왔다. 이쪽을 잘 아는 듯 하는 말에 지용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어라?'싶었던 지용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의 목소리로 누군지를 단박에 파악하는 게 가능했지만, 이렇게나 변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싶었던 지용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상대를 가리켰다.

"혹시 수인씨?"

"네. 저예요."

"믿을 수가 없군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 나왔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지용은 노골적으로 수인을 위 , 아래로 살펴봤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거지요?"

"형한테 신세 좀 졌어요. 잘 어울리나요?"

"어울리고 말고요. 아주 사람이 달라 보여요. 이제야 좀 이 맨션에 사는 사람다워졌-."

말을 하다 말고 지용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수인이 촌스럽다 생각을 해도 착한 성품을 알기에 입에 담지 않았다. 주로 이 안에서 이쪽과 최씨 영감하고 어울리기 때문에 외관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도 했었다. 지용은 어색하게 손을 저었다.

"여튼 전보다는 지금 이 모습이 훨씬 더 보기에 좋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바깥에 최씨 영감님은 뵙고 왔습니까? 뭐라 하시던가요?"

"시골쥐가 서울쥐로 변신했다고 하시더군요."

애로 영감은 이쪽보다 훨씬 더 직설적으로 말했구만.

지용은 애매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정답이긴 하겠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저리 말을 했으면 화가 났을 테지만, 지용이나 최씨 영감이나 수인이 변하기 전의 모습을 아는 이들이었다. 촌스럽다고 밖에 표현할 수 있는 그를 옆에 두고 이런저런 놀이도 함께 한 사이가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에도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담담한 수인의 모습에 지용은 '선글라스도 꽤 폼이 나는군요.'라고 말을 했다가 재차 감탄을 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지금 모습이라야 서울에서 지냄에 있어 큰 불편함이 없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겉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대우가 어찌 달라지는지, 오늘 하루에 다 알아버렸다. 지용도 이렇게 놀라지 않은가.

오늘은 여러모로 정신이 없던 날이었다. 위로 붕 떴다가 내려오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한 하루였다. 그래서 일까.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상당히 피곤했다.

"일단 들어가 볼게요. 다음에 뵈어요."

"들어가서 쉬십시오."

수인이 복도로 들어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지용은 고개를 저었다. 안쪽 데스크로 가 몸을 기댄 지용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람은 옷만 바뀌면 저렇게 달라지는 구나."

"누군데 그래?"

"촌닭."

"그게 누구야?"

"그런 게 있어."

이번에도 제대로 말을 해주지 않는 건가. 하지만 이번에는 저런 지용의 태도가 서운했던 동료는 '너 요즘 왜 이렇게 비밀이 많냐.'라며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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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올라가기 전 엘리베이터 옆에 놓인 고급스러운 우편함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수인은 안에 뭔가가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하고는 그리로 갔다. 함을 열자 꽤나 두둑한 게 들어가 있다. 표지에는 [한국 방송연맹]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도의 우편이구나 싶어 옆구리에 낀 채로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이 꽤나 묵직했다. 도대체 뭐가 들어가 있는지를 모르겠다면서 그걸 들고 가볍게 흔들던 수인은 문이 열리자 층으로 내렸다.

품에서 열쇠를 꺼내 방으로 들어서자 훈훈한 기운이 뺨을 스친다. 절로 안심이 되었다. 나직한 한숨을 쉬며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서기가 무섭게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지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일단 전화가 왔으니 받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수인은 움직였다. 빠르게 내달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름 급하게 뛰어서 받은 건데 조용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가 싶었던 수인이 재차 물었다.

"전화 하셨으면 말씀하세요."

묻기가 무섭게 전화가 끊기고 뚜-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인은 수화기에서 귀를 떼곤 이상하다는 듯 그걸 살펴봤다. 혹시 영도가 아는 사람인데 그가 받지 않아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 걸까. 그래도 용건을 남기면 이쪽이 말을 전달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리 생각을 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문득 스쳐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최근 통 할머니와 통화를 하지 못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면서도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거다. 한 번 전화나 걸어볼까 싶었던 수인은 소파에 앉았다. 번호를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댄 후 숨을 죽였다. 얼마간의 기다림 후, 전화기 반대편에서 너무도 그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할머니. 저 수인이에요."

[아이고. 우리 수인이. 오랜만에 전화를 다 하네.]

"죄송해요. 마음은 늘 연락을 드리고 싶었는데........"

마땅히 낸 성과가 없어 주저하는 동안 벌써 시간이 꽤 흐르게 되었다.

[연락이 안 와서 걱정도 되지만, 그만큼 네가 생활을 잘하는 것 같아서 안심도 되고 그랬단다. 그래. 영도랑 잘 지내고 있지?]

"잘 지내요. 오늘은 옷도 사줬어요."

[그래? 친형도 아닌데 참 잘 해주는 모양이로구나.]

"여기서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1년 동안 공부하는 비용도 대주겠다고 했어요."

[그래?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나중에 돈 벌면 차근차근 갚아 갈 생각이에요."

[그래. 그렇게 해라. 친형이라고 해도 빌린 돈은 다 갚아야 하는 거란다.]

꼭 그렇게 할 거라며 수인은 두어번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분옥이가 있잖아. 걔도 나이를 먹어서 힘들 텐데도 나한테 아주 잘 한단다. 그보다 이번에 가지고 간 김치랑 된장은 다 먹었어?]

"아니요. 좀 남았어요. 형이 하루에 한끼만 집에서 먹거든요."

[그렇구나. 너는 잘 챙겨먹고?]

"전 밥 안 먹으면 안 돼요. 끼니마다 잘 챙겨먹고 있어요."

[그래. 그래야지.]

흐뭇해하시던 것도 잠시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긴 한숨을 토해냈다.

[공부도 다 하고, 좋은 짝지 만나 결혼해서 아기도 보고 그래야 하는데. 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 있으려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당연히 살아있으시지요."

[그래. 그렇지. 내가 다른 손주들은 몰라도 우리 수인이 장가가고 아기 낳는 건 봐야지. 서울서 열심히 해서 남들 부럽지 않게 잘 살아. 내 소원은 달리 없다. 그것 밖에는 말이야.]

"저는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사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 마음을 왜 모르겠니.]

수인의 입술 꼬리가 차분히 올라갔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있던 수인은 '이만 끊을게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끊고 나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수인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시야가 밝아진다. 자신을 가리고 있던 게 한 꺼풀 벗겨지자 확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결 개운해졌다. 그리고 배가 고파졌다.

'밥은 집에서 먹을 거야.'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속삭임을 들으면서 수인은 양 손을 마주 잡았다.

심장이 뜨거워진다. 얼굴로 열이 올랐다. 기분 좋은 설레임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몇 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영도가 집에 들어을 터였다. 그 때 바로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다. 바깥 음식하고는 다른, 영도 그가 좋아하는 집 밥을 해서 먹이고 싶었다.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일단은 영도가 사준 이 좋은 옷을 벗고 난 후에, 바로 음식 준비를 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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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시청자 여러분들. 겨울이라 여전히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햇빛이 아주 따사로운 날입니다. 바람도 불지 않고 훈훈한 겨울인 주말에 가족 여러분들이 함께 나들이를 가시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쁘장한 앵커가 웃는 얼굴로 안내 멘트를 하는 동안 수인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았다 떴고, 피로함을 느끼며 손가락 아래로 눈 아래를 비볐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간밤에 잠시 눈을 감은 시간은 대략 3시간 남짓. 그리고 지금은 6시 20분이었고 영도는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저녁에는 들어올 거라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 벌써 다음 날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머리는 몽롱하고 눈꺼풀은 무겁기만 했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옆으로 누운 수인은 챙겨온 담요를 몸에 덮었다. 눈을 감자 TV화면의 시끄러운 소리가 듣기에 거슬렸다. 그대로 꺼버릴까 싶었던 수인은 '다음은 원혁씨에 대한 기사입니다.'라는 멘트에 동작을 멈추었다.

화면 속에서 여자, 남자 MC가 주거니 받거니 말을 했다.

[오는 22일 이유라씨 측에서 기자회견을 가진다고 했는데요. 그 이유에 대해선 아직 알 수 없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번 이유라씨와 소속사 측에서 원혁씨와의 스캔들에 대한 공식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해 화제입니다. 다양한 매체에서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번 기자회견은 소동을 잠재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공식적으로 연인사이라는 걸 공표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겠군요.]

[소속사측과 두 분이 워낙에 입을 무겁게 다물고 계셔서 정확한 말씀을 하긴 어렵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두 분이 진짜로 연인사이라면 대단한 화제가 되겠는데요. 이번에 드라마도 곧 방영에 들어갈 텐데 말이지요.]

[이번에 두 배우가 찍은 연애시대의 방영날짜가 잡혔습니다. 오는 2011년 1월 4일입니다.]

[지금 분위기를 보면 아주 시기적절한 방영날짜로군요.]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 겠지요.]

초반의 진지했던 분위기는 두 MC의 사담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별로 듣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다. 수인의 손은 리모컨을 들었고 TV화면을 꺼버렸다. 거실 안이 조용해지자 수인은 당장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소파에 똑바로 누운 채로 배 위에 양 손을 올렸다. 그렇게 잠시 잠이 든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7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부스스한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난 수인은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그런 수인의 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선 수인의 눈이 뒤를 돌아본다. 보이는 건 지친 모습으로 하품을 하는 영도였다. 

"왔어요?"

입을 크게 찢던 모습 그대로 멈춘 영도는 천천히 턱을 다물면서 수인을 확인하곤 눈을 꿈벅였다.

"안자고 거기서 뭐 하냐?"

"여기서 좀 자다 일어났어요."

"그러다가 감기 걸린다 너."

평소에도 늘 따스한 온도를 유지한 집안이었다. 소파에서 잔다고 해서 감기걸릴 일은 없었다. 강원도에서는 늘 긴팔에 얇은 잠바도 입고 있어야 했다는 걸 영도에게 말한다면 믿을까 싶기도 했다. 수인은 소파 위로 한쪽 다리를 올리며 물었다.

"아침은 먹었어요?"

"아니. 어제 너 보내고 계속 굶었어."

"그럼 지금 밥 먹을래요?"

"일단 좀 씻고."

말을 하는 내내 영도는 몇 번이나 하품을 했다. 피곤하다는 걸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웅얼거린 영도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수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서 씻어요. 속옷이랑 옷 가져다 줄게요."

"응? 그럴래?"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아도 싫다는 말은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영도는 그리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욕실로 들어갔다. 그걸 확인한 수인이 당장 방으로 들어갔다.

영도 방 정리를 해두었기 때문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많이 뒤질 것도 없이 속옷과 츄리닝 바지에 티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와 욕실 앞에 내려놨다.

"옷은 바깥에 있어요."

"응. 고마워."

웅얼거리며 대답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수인은 허리를 세웠다.

뭘 하고 왔기에 잠을 한숨도 못잔 얼굴인 걸까. 혹, TV에서 떠들어대는 저 일 때문에 바빴던 걸까. 생각을 하는 수인의 얼굴은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있던 수인은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오면 해주고 싶은 것들이 이것저것 있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면 죽이나 좀 해줘야 할 듯 싶었다. 죽이라고 해서 금방 되는 건 아니지만, 계란 죽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전에 영도가 해줬던 북어죽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만드는 법을 모르는데.

평소 만들었던 건 잘해도 아닌 것에 대해선 어떤 맛이 나올지 걱정이 되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결정을 내렸다.

쉬운 누룽지탕을 끓이는 걸로 말이다.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움직일 일만 남은 거다.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간 수인은 냄비를 올리고 누룽지로 만들어뒀던 것을 끄집어냈다. 여기에 물만 붓고 끓이면 되었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해가는 동안 수인은 어느덧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연예인이라는 건 화려해도 참 힘든 일인 것 같았다. 행동을 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또 그게 화제가 된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인 양 말이다. 그런 만큼 그들이 보는 득도 있겠으나 수인에게 그리 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수인은 못한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 자체가 싫으니 말이다.

"거기 서서 뭐 하냐?"

뒤를 돌아본 수인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영도를 발견했다.

"벌써 나왔어요?"

"물만 끼얹고 나왔어. 뭐하게. 밥 하려고?"

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제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다면서요. 뭐라도 먹어야 속도 편하지요."

"그렇긴 하겠지만......."

중얼거린 영도는 재차 하품을 했다. 너무 크게 입을 벌리고 눈물마저 찔끔 흘리는 그 모습이 마치 괴수 같았다. 잘생긴 괴수 말이다. 몽롱한 얼굴로 있던 것도 잠시 영도는 목을 좌우로 까닥였다.

"지금은 잠을 더 자고 싶어."

"나중에 속 쓰려져서 안 돼요."

"괜찮아. 가서 좀 잘래."

그냥 무조건 눕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몸을 돌렸던 영도는 잠시 멈추고는 뒤를 돌아봤다.

"넌 좀 잤냐?"

수인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형 기다리느라 솔직히 많이 못 잤어요."

"그러면 들어가서 같이 자고 일어나자. 그 때 밥 먹어도 되잖아."

웬일로 저런 말을 할까 싶었다. 제정신인 영도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진짜 졸리긴 한 모양이라며 수인은 가스렌지의 불을 끄고 주방 밖으로 나왔다. 수인이 앞으로 나온 걸 본 영도는 재차 하품을 하면서 먼저 몸을 돌렸다.

방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몇 번이나 비틀거리던 영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가만히 앉아있던 영도는 꼼지락거리며 안쪽으로 이동했다. 다리를 오므리고 베개를 한 팔로 끌어 안은, 궁상맞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있는 걸 확인한 수인이 아래쪽에 구겨져 있던 이불을 끌고 와 위에 덮어줬다.

"........고마워."

웅얼거리듯 말을 한 영도는 금방 고른 숨을 토해냈다. 색색 거리는 폼이 바로 곯아떨어진 거다. 영도를 지그시 바라보던 수인은 그의 옆에 앉아 몸을 뉘였다. 가만히 있던 수인은 영도의 등 쪽으로 달라붙어 그의 넓은 등판에 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며 수인도 덩달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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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억새풀 사이로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풋풋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 가득이 눈물을 담고 있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영도는 다가가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아이가 밀어내거나 하면 어쩌나 싶어 멍하니 있는 동안 아이의 모습은 점점 아련해 진다.

그리고 그 때 아이가 영도를 바라봤다.

지금은 희미해서 그저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아이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진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심통이 난 듯,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는 수인이었다.

"......헉."

짤막한 소리를 내며 영도는 눈을 떴다.

이상한 자세로 누운 채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멍하니 있던 영도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천천히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보이는 건 수인이었다.

내가 지금 헛것이 보이나. 멍청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얼굴로 있던 영도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일부러라도 수인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정면으로 고개를 고정한 채로 있는 동안 영도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건 바로 심장소리였다.

깊은 숨을 들이켠 영도는 침대에서 내려가자 싶었다. 그냥 내려가서 방 밖으로 나가 찬물이나 마시자. 그러면 이상한 기분도 가라앉게 되겠지. 영도는 침대 바깥으로 두 다리를 내렸다. 그대로 미련 없이 바로 일어나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뒷꽁댕이를 잡아끌었다.

당혹스러운 감각에 영도는 숨을 삼켰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뭐지? 이건?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멍멍해진 느낌은 마치 물 속에서 둥둥 떠 다니는 느낌과 비슷했다. 대체 왜 이러나 싶어 손을 놓고 있는 동안 갑자기 시야가 돌아왔다. 보이는 게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수인의 얼굴인가 싶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영도는 수인의 위에 엎드린 채로 있었다. 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로 다소곳이 잠이 든 수인은 마치 어린 양과 같았다. 그런 수인의 위에 올라탄 영도는 스스로가 짐승처럼 느껴졌다. 왜 이런 상태로 있게 되어, 왜 이런 느낌이 들어야 하는 거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하나도 모를 상황이었다.

이건 분명 꿈 속인거야. 뺨을 꼬집으면 금방 깨어날 수 있는 그런 꿈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꿈이라면 살짝만 건드려도 되지 않을까?

갑작스레 드는 생각에 영도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면을 쓴 듯이 무표정이 된 영도는 수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뚫어질 듯이.

꿀꺽. 생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영도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수인의 뺨에 닿았다. 따스한 온기. 피부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생생한 촉감으로 인해 점점 더 기분이 묘해진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며 영도는 입을 반쯤 열었다.

하아. 하는 소리와 함께 긴 숨이 토해져 나왔다. 그 숨소리가 떨려서 나오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영도의 입술은 수인의 이마에 닿아 있었다.

만약 지금 수인이 눈을 뜨게 된다면, 이쪽은 완전 변태로 몰리는 상황인데.

그런 생각과 달리 영도의 입술은 점점 내려가 수인의 입술에 닿았다. 입술이 아주 조금 닿았다. 그 감촉이 너무도 기분 좋았다. 더 눌러도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을 하며 입술을 꾸욱 누르는 순간 이제는 익숙하다 할 수 있는 체취가 콧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왠지 이제 느낌이 왔다. 

어쩌면 수인이........

"뭐하고 있어요?"

취한 듯 멍하니 있던 영도는 정신이 돌아왔다. 찬물을 확 끼얹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도 당황스러워서 미처 방비를 하지 못하는 동안 눈을 반쯤 뜬 수인이 재차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뭐해요?"

영도는 숨을 멈춘 채로 옆으로 몸을 돌렸다. 피하려고만 생각했는데 옆으로 몸을 물리던 반동 그대로 데굴데굴 구르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불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영도는 부딪친 아픔보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싶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것 치고 지금 그는 팔로 머리를 괴고 한쪽 무릎을 세운, 꽤나 여유로운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수인이 알아서 밖으로 나가버렸으면 좋겠다. 그냥 자다가 이상한 일 당했거니 싶은 정도로만 생각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서로가 기억나지 않는 척 굴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 때 위에서 꾸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뭔가 싶어 그리로 눈동자를 움직이자 수인이 침대 끝에 매달린 채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손으로 침대를 붙잡고 얼굴을 살짝 내민 수인은 두어번 눈을 깜박였다.

꽤 깜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지금 뭐하고 있어요?"

"신경쓰지마. 운동 중이야."

"남의 몸 위에 올라타서 운동하는 사람도 있나. 변탠가."

"........"

내가 변태일 리가 없잖아!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오는 말을 꾹 누르며 영도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툭툭 건드리는 말에도 영도가 반응을 취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에 수인은 재차 물었다.

"거기서 계속 있을 거예요?"

"난 여기가 편해."

"전처럼 담에 걸려도 난 몰라요."

"괜찮아. 담 같은 거 걸릴 리가 없어."

애써 태연한 척 영도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헤헹-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문득 영도는 자신이 너무 유치하구나 싶었다. 왜 이래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차라리 말자 싶었던 영도는 에씨-하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끌어안고 바닥에 머리를 댔다.

"그러지 말고 위로 올라와요."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영도의 몸이 움찔거리고 떨렸다.

지금 뭔 말을 들은 거지?

긴가민가 했던 영도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침대 끝자락에 앉아있는 수인이었다.

"올라와서 자요."

특수효과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라이트가 비춰지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수인의 모습만 도드라져 보이는지 모르겠다. 망막 가득이 채워지는 수인 때문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영도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 그냥 소파에서 잘게."

"그러지 말고 올라와요. 추워요.'

수인은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영도는 아니었다.

이상하게 유혹을 하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 생각을 하는 이쪽이 미쳤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 상태로만 있는 것도 능사가 아니었다. 피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영도는 눈 질끈 감고 내뱉었다.

"내가 아까 뭘 했는지 알 거 아니야."

"싫지 않았어요."

나름 단호한 마음을 먹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대해 수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순 없으나, 영도는 이미 본인이 할 행동을 결정해 두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게 올바른 선택지였다.

하지만 수인의 말은 그런 영도의 행동 자체를 묶어버렸다.

"더 하고 싶어요."

영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의 멍청한 얼굴을 보였던 그이나, 지금처럼 이상한 얼굴은 또 처음이었다. 마치 혼이 나가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입이 서서히 벌려진다.

삽으로 귓구멍을 파서, 조금 전 들은 말이 진짜인지 확인이라도 해봐야 겠다는 식이었다. 그도 잠시, 화가 난 사람처럼 영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미친 거 아니야?"

그냥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어서면 그걸로 끝이라는 생각이 영도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 이 상황을 흐지부지하게 넘기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정말 미친 거야."

수인이 아닌, 이쪽이 미친 거다.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영도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올라갔다. 수인의 몸을 끌어안고 바로 입술을 겹쳤다.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건 수인의 높은 체온과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예전에 한 번 입을 맛춘 적이 있었지만 그 때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의 감각만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입술만 대고 있는데도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이런 식으로 애송이처럼 굴 순번은 애저녁에 지났는데도 말이다.

입술을 문대듯이 비비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혀를 내밀어 수인의 입술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수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자 기다렸다는듯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수인의 안으로 혀를 넣고 쪽쪽 빨아들였다. 미칠 듯이 달콤했다. 왜 그럴까. 수인의 타액에 맛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정신없이 수인의 입 안을 탐닉하는 동안 영도도 체온이 올라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수인에게 입을 맞추는 동안 손을 놓고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그러자 수인이 팔을 잡아왔다. 더듬거리면서 붙잡는 손길이 어설펐다. 지금 이리 하는 것이 익숙치 않은 느낌이었다. 그 조차도 사랑스러웠다.

괜찮다는 듯 수인의 옆구리를 한 번 쓰다듬고 나서 본인의 셔츠에 손을 댔다. 위로 올리는 동안 벗으려면 입술을 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입술을 떨어뜨리고 싶진 않지만 거추장스러운 걸 벗겨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입술을 떨어뜨리고 당장 셔츠를 벗은 후 다시 수인을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입술이 아니라 뺨과 턱 부근에 입을 맞췄다. 쪽쪽 거리는 동안 어디선가 풋풋한 내음이 났다.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이건 수인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이리도 짙고 유혹적인 색향은 난생 처음이었다. 수인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키며 영도는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야."

중얼거리며 수인의 몸을 끌어안고 그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당장 셔츠를 잡아 위로 올렸다. 예전에 본 적 있는 가슴과 왼쪽 옆구리에 남은 손바닥만한 화상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상처 자국에 입술을 댔다. 그러자 흠칫하고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괜찮다는 듯 혀를 내밀어 화상 자국을 핥은 후에 점점 위로 올라갔다.

쪽쪽 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최종적으로 수인의 가슴에 입술을 대고는 깊이 빨아들였다. 말랑말랑하고 작은 살이었다. 손으로 쥐어도 한 줌도 되지 않는 작은 가슴이었다. 사내이기 때문에 애초에 만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빨아들이게 된다.

쪽쪽 거리면서 빠는 동안에 다른 손으로는 유두를 잡아 빙글거리고 돌렸다. 그러자 수인의 손이 올라와 영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주저하는 것 같으나 영도가 집요하게 빨아대자 손목을 잡은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밀쳐내고 싶은 듯 자꾸만 아래로 잡아끄는 감각을 모를 수 없었다.

영도는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토해져 나왔다.

"왜?"

물으면서 지금 뭔 짓을 하는 건가 싶었다. 수인이 손목을 잡고 흔드는 이유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묻는 꼴이라니. 미친 건가 싶었다.

수인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붉게 상기가 된 눈동자 안쪽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갑작스럽다 할 수 있는 지금 상황을 당황스럽게 생각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이리 된 것에는 수인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이쪽을 유혹하지 않았던가.

영도는 수인의 위로 올라갔다. 엄지로 수인의 턱 부근을 문지르면서 물었다.

"무서워? 그만 둘까?"

바라보는 눈빛은 진지했다. 이쪽에서 한마디만 하면 당장 떨어져 주겠다는 식으로 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두지 않을 거면서........"

"그래. 그만 두지 않을 거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 나왔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멈추지 않아. 멈출 수 없어."

영도는 수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둠 속에서도 수인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색이 다른 눈동자. 그것을 바라보며 영도는 말했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수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란 듯,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변하는 걸 보며 영도는 더 들으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예쁜 눈으로 날 보지마. 미칠 것 같으니까."

바로 나오는 말에 수인의 표정이 변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수인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싶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내 옆으로 오지마.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수인을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영도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있자 점점 더 인내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참지 않을거야. 이게 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금은 수인을 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면 차라리 하고 후회를 하는 편이 나았다.

수인을 끌어안은 손으로 점점 힘이 들어간다. 안긴 수인은 아픔을 느낄 정도였지만 영도를 밀어내지 않았다. 침대에 머리를 댄 채로 누운 수인은 영도가 한 말을 머리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았을 때,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조용히 손을 든 수인이 영도의 등을 끌어안는다. 엉성하게 등을 끌어안는 손길을 느꼈을 때, 영도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어미의 품에 안긴 것과도 비견이 될 만한 느낌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와는 반대로 욕망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영도는 고개를 돌려 수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쪼듯이 내려앉는 입맞춤이 점점 진해지고, 덩달아 수인이 토해내는 호흡은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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