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에 대해선 영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최신 유행에 관해선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그건 여자의 도움을 받으면 되었다. 여자와 주변 사람들. 그리고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의 조언을 받아 총 여섯 벌을 맞췄다. 한 벌은 혹시 모를 상황 대비분이었다. 금액으로만 따지면 총 1억 가량이었다. 물론 그 금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악세사리였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큰 금액은 들지 않을 터였다. 한 벌에 몇 천을 호가하는 슈트도 있지만 영도는 국내 디자인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신체적인 조건이 좋아 어떤 의상을 입어도 모델보다 훨씬 더 잘 소화를 하는 영도였다. 그걸 알기에 영도가 알아보지 않아도 알아서 의상을 협찬하는 이들이 수두룩 했다. 그런 그들 중에서 선택이 된 작품들을 주욱 확인한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날짜에 맞춰서 완벽하게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올해도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덕분에 좋은 의상을 알아보고 갑니다."
대답을 하는 영도는 빈틈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수인의 앞에서 보였던 모습은 오간데 없었다. 그야말로 일을 하기 위한 모습이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런 영도를 바라보던 여자는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생분이 안 보이시네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이번에는 동생분 옷을 상당히 많이 구입하셨더라고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의상은 나중에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동생분에게 제가 약소한 선물을 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번에 김수아 한정판으로 나온 운동화에요."
먼저 말을 해뒀기 때문에 보조가 알아서 상자를 건넸다. 그걸 받은 여자는 보라는 듯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하얀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끈이나 운동화에 새겨진 줄이 형광색인지라 밋밋하지도 않고 감각적이었다. 영도가 끌리는 눈빛을 던지자 여자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나쁘지 않지요? 착용감도 좋아요. 저한테 선물로 온 거긴 한데 발에 맞지 않아서 처치 곤란했거든요. 어차피 많이 구입을 해주셔서 어떤 걸로 보답을 해야 할까 싶었는데 이게 제일 좋을 것 같더군요."
"고맙습니다. 이건 직접 들고 가지요."
영도가 상자를 받아들자 여자는 양 손을 공손히 마주 잡은 채로 인사를 건넸다.
"연말 때 좋은 소식만 있기를 바래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다는 이 말은 올해로 세 번째였다. 인기를 얻어감에 따라 간신히 입성할 수 있었던 샵이었다. 지금 인기에서 조금 떨어져도 이용할 수 있겠지만 급락을 하게 되면 문턱도 넘지 못할 곳이었다. 직접 구입이 아닌 빌리는 것으로 시상식 의상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도 편리하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면 의레 2층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1층에 걸어진 옷들은 구경만 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구입을 하는 건 한 손에 들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다.
"굉장하군."
명세서를 본 영도는 혀를 내둘렀다. 영도의 뒤를 따르며 용한은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돈을 많이 써? 평소 여자들한테 만원 한 장 쓰길 벌벌 떨던 짠돌이가 말이야."
빈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남들 보기에 안색을 찡그릴 정도로 아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펑펑 쓰는 타입도 아니었다. 여자들이 달라붙이서 살랑거린다 해도 기분상으로 카드를 팍팍 긁는 영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영도가 쓴 금액은 육백에 육박했다. 용한에게 있어선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영도도 명세서를 보곤 살짝 후회를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개인 디자이너뿐만이 아니라 명품들도 섞여있어서 이렇게 금액이 세진 모양이었다. 본인 옷을 살 때나 어머니 선물을 보낼 때에만 이 정도를 긁던 영도였다. 괜한 일을 했나 싶으면서도 그는 태연한 척을 하며 명세서를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쓸 데에는 써야지."
"너 사촌동생 정말 아끼는 모양이구나."
"옷 좀 사주는 걸로 내가 그 녀석을 아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거 아냐?"
"싫으면 그렇게 카드를 긁냐. 시장가서 만원짜리 티나 사주지. 나 이번에 정말 놀랐다. 네가 이렇게 인정 많은 놈일 줄이야. 그 인정 나한테도 좀 쓰면 안 되냐."
"시끄러워. 달라붙지마."
용한과 투닥거리면서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서있는 수상쩍은 무리를 발견했다. 저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있던 이들은 나오는 영도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들었다. 누군가 '나왔다!'라고 큰 소리를 치는 걸 들으며 용한은 당장 영도의 팔을 잡았다.
"일단 차에 올라타."
"너는?"
"애들이랑 같이 뒤에 차 탈 테니까 일단 타. 미용실에서 만나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영도는 용한이 열어주는 차 안으로 들어갔다. 별 생각 없이 얼굴을 밀어 넣었던 영도는 안쪽에 앉아있는 인물을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다리를 꼰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이는 영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멍청하게 있는 동안 용한이 안타고 뭐하냐면서 등을 밀어댔다. 그 기세에 밀려 올라타자마자 문이 닫혔다. 준식은 바로 시동을 걸면서 '미용실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영도는 조금 전 이쪽이 얼마나 멍청한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뭘 굳어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던 걸까 싶었다. 고작 수인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편안히 있을 수 없는 건 무슨 이유인지를 모르겠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영도는 두어번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입이 근질거렸는지 넌지시 수인을 살펴보며 물었다.
"옷 마음에 드냐."
"너무 비싼 것 같아요."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며 이쪽을 돌아보는 수인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이번만이야. 이번에 사고 10년 입으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야."
"하지만......."
"내가 그만한 걸 못 사줄만한 사람도 아니잖아. 금액 이야기는 그만해."
수인은 60만원 정도가 든 걸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 '0'이 하나 더 붙어야 제대로 된 금액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이 될까. 차라리 말을 말지 그 순간 짐승을 보는 눈으로 이쪽을 대할 게 분명했다.
영도는 팔짱을 끼고는 수인을 바라봤다.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주욱 훝어봤다.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수인이 이상하다는 듯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영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영도가 한마디 했다.
"밥솥 사러 가야겠다."
"......밥솥이요?"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밥 하기 귀찮다며. 그러니까 밥솥 사야지."
예전에 밥솥을 사겠다고 하자 대번에 정색을 하며 무안 주던 사람이 웬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냄비에 밥을 해먹을 순 없었다. 그리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니 영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너 되게 웃긴다. 사내놈이 그런 걸 신경 쓰냐."
밥솥을 사자고 한 건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비웃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수인은 영도를 흘겨봤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해놓으면 냄비 바닥까지 긁어먹는 사람이 누군데요."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어. 말도 안 돼."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원영도. 그쪽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그걸 알기나 하느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입을 꾹 다문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진작 그렇게 차려 입고 있을 걸 그랬다나보다. 보기 나쁘지 않다."
가만히 있던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턱에 손을 괸 영도는 심드렁하다 할 수 있는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문에 조금 전에 한 말이 정말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멍하니 있다가 수인은 지금 입고 있는 옷들과 신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가의 물건. 확실히 이렇게 입으니 자신이 얼마나 달라져 보이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 시선도 색달랐지. 눈동자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알면서도 손가락질을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이쪽만이 지닌 개성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인은 손을 들어 앞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빌려줄까?"
영도가 선글라스를 내밀었다.
수인은 내밀어진 선글라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바로 손을 대지 않고 조용히 있기를 몇 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눈이 보이면 이상한가요?"
"나는 괜찮아."
그 눈동자는 특별하고 보기에 좋은 것 같아.
순간적으로 그리 말을 할 뻔 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분위기만 더 이상해질 것 같았던 영도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준식에게 물었다.
"야. 내 사촌동생 눈 어떠냐?"
준식은 앞 유리를 통해 수인을 확인했다. 눈이 마주칠 때 긴장하는 것 같았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 가볍게 말했다.
"칼라렌즈 말입니까? 특이하긴 해도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렌즈 같은 게 아니라 진짜야."
"네. 진짜..... 진짜라고요?"
준식의 눈이 크게 떠졌다. 렌즈라면 모를까. 진짜라고 하니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그걸 확인한 수인은 영도의 손에서 선글라스를 들고 가 끼었다. 수인은 크게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았지만 영도가 신경 쓰였다.
괜히 준식에게 물었다 싶었던 영도는 수인을 흘깃 거리면서 봤다. 선글라스를 써도 전처럼 우스꽝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그냥 멋을 부리는 것 정도로만 여겨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서 매번 저렇게 선글라스를 쓸 수는 없는 거였다.
"칼라 렌즈 한번 껴볼래?"
수인이 고개를 든다. 그의 시선을 느끼며 영도는 말을 이었다.
"네가 활동하기에 편하고 주변 시선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팔짱을 낀 영도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뭐, 나는 이제는 익숙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신경을 쓰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일일이 신경 쓰면서 주변 눈치 보면 정말 하고 싶은 건 하나도 못하게 되는 거야."
"눈동자 색을 맞추면 다들 절 이상하게 보진 않겠지요."
"요즘에는 너보다 훨씬 더 튀는 색으로 렌즈 끼는 애들도 있어. 아예 동공을 하얗게 해서 끼고 다니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쏠리는 시선을 즐기는 거지."
하지만 수인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고 조용히 지내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자기 주장이 있고 겁이 없는 수인이지만 튀는 삶을 바라진 않았다. 조용하게 묻어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 성품이니 시경이 건드려도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수인이 이쪽 바닥에 관심을 보인다는 가정을 세웠을 때, 시경이라면 어느 정도 수인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쪽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아주 화려한 게 아니었다. 구질구질하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잡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수인이 몸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지금의 모습대로 있었으면 싶었다.
그 때 어떤 영상이 눈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빨리 머리 속을 지나가버린 기억이었다. 때문에 다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굳어버린 영도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겨난다. 방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려 했던 거지? 그런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물음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면서 영도는 수인을 돌아봤다.
전이라면 당당하게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도둑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흘깃 보다가 수인이 고개를 움직이면 바로 앞으로 눈동자를 돌려버리는 식이었다. 성가신 일이니 아예 안 보면 좋겠는데 저절로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그리고 수인의 머리카락 사이에 묻어있는 짧은 실을 본 영도가 그리로 손을 뻗었다.
"뭐 묻어 있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밀어 넣고 묻어있는 걸 집어냈다. 그 사이로 머리카락 몇 올이 끼어서 잡혔다. 사락거리면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영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선글라스를 낀 수인이 그런 영도를 바라봤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저은 영도는 손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수인이 앉은 반대편으로 손을 축 늘어뜨린 영도는 크게 손을 벌렸다가 주먹을 쥐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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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가 평상시 애용하는 미용실은 달리 있었다. 하지만 스캔들이 터진 마당에 그리로 갈 순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예약을 하고 그리로 애용하던 미용실 원장님을 모셨다. 꽤나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1, 2년 얼굴을 익힌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장은 불편한 내색 없이 차에서 내리는 영도를 보곤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원혁씨. 어서 와요."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웃는 사내는 꽤나 곱상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였다. 실제 나이는 40대 초반이었으나 꾸준한 자기 관리를 통해 10살 정도는 어려보이는 인상이었다. 실력은 확실했지만 사내 치고는 악세사리를 많이 달고 여성스러운 어투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사람이었다. 영도의 경우도 초반에는 그런 그의 스타일을 맞추기가 힘들었지만 워낙에 머리를 잘 만들어주기 때문에 지금은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장소를 이동했기 때문에 늘 가던 미용실의 전경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낯설었던 영도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도 꽤 넓고 괜찮군요."
"아는 동생이 하는 가게에요. 나중에 스캔들 풀리면 홍보 좀 해줘요."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약속이에요? 2층으로 올라가도록 해요. 준비는 다 해왔어요."
"아, 그래야겠지요."
대답을 하면서 영도는 뒤를 돌아봤다.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수인이 보였다. 왜 저렇게 떨어져서 서있는지 모르겠다.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을 하자 주변 눈치를 살피던 수인이 조심스레 영도의 옆에 붙어 섰다.
"불편해도 떨어지지 말고 있어. 일단 2층으로 올라가자."
옆에서 속삭이는 말에 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2층으로 올라가고 난 후, 회의를 할 장소가 있고 그 옆으로 편하게 앉을 만한 소파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자리 중 하나에 앉으라 말을 전한 영도의 옆으로 원장이 붙어섰다.
"그 아이 아니에요? 전에 시경씨가 데리고 온 아이."
"원장님이 저 애 머리 잘랐습니까?"
"그럼요. 누가 데리고 온 건데요. 정성들여 잘랐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시경이 데리고 온 아이인데 다른 사람 손을 타게 할 순 없었다. 다음 날부터 시경이 찾아오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원장은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있는 수인을 주욱 바라보다 물었다.
"전하고 이미지가 다른데요? 세련되어 졌어요."
"아아, 뭐 그렇지요."
"전에는 몰랐는데 몸도 예쁘네? 팔, 다리도 가늘고. 얼굴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같은 직종에 종사해보려고요?"
"그런 건 아닙니다. 착실한 녀석이에요."
"나랑은 다르게 착실하니까 이쪽 바닥 일은 시키지 않겠다-인가요?"
"아니요. 일단은 학생이라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해서요."
"학생이요? 몇 살인데요?"
"지금은 제 일 때문에 찾아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내 일에 관련해서만 말을 해도 충분할 텐데 왜 이렇게 자꾸만 수인에 대해서 캐묻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한마디 하자 원장은 입을 다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영도의 시선은 차분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기 때문에 약간의 장난스러움도 서려 있었다. 하지만 수인에 대해 집요하게 물으면 저 눈빛이 날카롭게 변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던 원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요. 오늘은 일 때문에 찾아오신 거였지요. 그러면 그쪽에 집중하도록 할까요?"
그리 말을 한 원장은 당장 사람을 불러들였다.
안쪽으로 스타일리스트와 미용실 측 사람들이 모이는 걸 확인한 직후 영도는 수인을 돌아봤다.
편안하게 앉아도 될 텐데도 허리를 주욱 편 채로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수인다웠기 때문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한쪽 입술꼬리를 위로 올린 채로 영도는 사람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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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원하는 스타일이 있고 최근에 유행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회의는 쉽게 끝나는 편이었다. 여자와 다르게 남자는 더 수월하게 머리 스타일을 정할 수 있었다. 그 외에 곁가지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2시간이 금방 지나버렸다.
사람이 많고 연말 시상식 준비이므로 소홀함이 있어선 안 되었기 때문에 한마디씩 말이 추가되는 동안 이렇게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의 일이었기 때문에 영도는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수인에 대해 신경이 미치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영도는 소파에 수인이 앉아있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움찔했다.
"왜 그러세요?"
묻는 말에 당장 수인이 앉아있던 곳을 가리켰다.
"제 동생이 어디로 갔나 해서요."
"심심해 보여서 옥상 정원으로 안내해 드렸어요. 그쪽이 훨씬 더 편하실 것 같아서요."
"아, 그러십니까."
갈 거면 말을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속으로는 그리 생각해도 겉으로 볼 때에는 어디까지나 웃는 인상의 영도였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 일차적인 마무리 멘트를 했다.
"일단 기본은 이렇게 잡도록 할까요. 20분 쉬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원혁씨 괜찮으시겠지요?"
"그러면 전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용한이 '어디를 갔다 올 건데?'라고 묻기에 영도는 대충 화장실 간다는 사인을 보냈다. 이층에서 나온 영도는 자동문을 통과해서 비상구 쪽으로 갔다.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3층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외로 잘 꾸며진 정원이 나타났다. 천장과 벽도 있어서 안쪽은 많이 춥지도 않았다. 여기에 그 녀석이 있는 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영도는 주변을 살펴봤다. 그런 영도의 눈에 구석 쪽에 서있는 수인이 보였다. 정원에 왔으면서도 벽에 달라붙어 아래를 살펴보고 있었다. 뭘 저렇게 열중해서 보는지 모르겠다.
"거기서 뭐 하냐?"
구석 쪽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수인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수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영도는 괜히 설레는 걸 느꼈다. 그걸 내색하지 않고 옆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물어온다.
"일은 다 끝났어요?"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뭘 보고 있는 건데?"
"그냥 구경하고 있었어요."
수인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쪽으로 눈을 내리떴다.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조금 위로 올렸다.
좁고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거리들. 그 사이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과 차량. 딱딱 붙어있는 건물과 그 건물을 알리는 화려한 간판과 벽지들. 색색으로 자기를 어필하는 거리를 바라보는 수인은 차분한 눈길이었다.
"참 답답한 곳이구나 싶네요."
영도는 수인의 옆에 서선 아래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그가 보던 특별할 거 없는 거리의 모습이었다. 새삼 지금에 와서 봐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익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그런 느낌이 강했다.
"선글라스 벗고 다시 봐봐. 그렇게 답답하지 않을 거야."
가만히 있나 싶던 수인은 순순히 선글라스를 벗고는 아래를 살펴봤다. 하지만 그리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한 거리에 사람들의 모습들. 수인은 선글라스의 끝을 잡은 채로 빙글빙글 돌렸다.
"여전한 데요?"
말을 하면서 수인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영도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두근. 하는 소리를 들으며 영도는 당황했지만 그런 내색하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어차피 지내다보면 익숙해지게 될 거야. 어디를 가든지 저런 모습 투성이니까. 전에 살던 시골 산골하고는 달라. 괜히 피곤해지고 싶지 않으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해 ."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요."
여기서 계속 지내려면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익숙해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수인은 위로 올린 손을 깍지 끼고는 그곳에 턱을 올렸다.
"차는 좀 마셨나?"
"마시다가 말았어요. 맛이 별로였거든요."
"여기서 나오는 차는 대부분이 티백이야. 너처럼 물로 우려서 내주진 않아."
"알아요. 있다가 집에 들어가면 물로 우린 차 마시게 해줄게요."
딱히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인이 저렇게 말을 하니까 왠지 기뻐진다. '그렇게 할까?'라고 말을 하면서 웃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입술 꼬리가 살짝 떨렸을 뿐으로, 영도는 정말 웃진 않았다. 그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자꾸만 헛기침을 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살았어요?"
수인의 물음에 영도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간단한 것 같아도 은근히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보다 수인이 왜 이런 걸 묻는 건가 싶어 곰곰이 생각을 하던 영도는 수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상한 질문이야. 왜 그런 걸 묻지?"
"그냥 궁금해서요."
"그러면 나도 똑같이 물을 수 있어. 어떻게 시골에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데?"
"할머니하고 같이 살았으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아무래도 혼자라면 시골에서 살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사람 좋고 현명한 할머니와 함께 있으니 어린 수인도 적응을 하면서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일 터였다. 수인이 대답을 했으니 이번에는 영도 차례였다. 아무래도 연장자이다 보니 들으면 바로 '아하.' 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답변을 해주고 싶었으나 암만 머리를 굴려도 좋은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보편적인 대답을 해버렸다.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던 곳이고 일을 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었던 거야. 네 눈에는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난 만족해. 이 생활에 대해서 말이야."
"지금도 만족하고 있어요?"
스캔들이 터져서 머리 복잡한 상황인데 말이다.
수인이 묻고자하는 부분에 대해 모를 턱이 없었던 영도의 입가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도 곧 지나가리라. 원래 다 그런 거야."
원래 다 그런 걸까.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다.
영도의 대답에도 잘 모르겠다는 듯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수인의 얼굴이 가려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머리카락 한 올이 수인의 눈을 찌를 것 같아 절로 그쪽으로 손이 간다.
"머리카락이 눈 찌르겠다."
뻗어진 손이 수인의 뺨을 감싸듯이 닿게 되었다. 영도의 손 때문에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찌르는 일은 없어도 손의 위치가 참으로 애매모호 했다. 막상 수인의 얼굴에 손을 대고 난 후, 영도는 아차 싶었다. 당황한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그냥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것 같으니까."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 영도의 손이 떨어졌다. 떨어질 때 일말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하지만 곧 그런 건 아니라 애써 생각을 하며 영도는 수인을 힐긋 거렸다.
비단 옷차림 때문에 사람이 달라보이는 건 아닐 터였다. 전하고 확실히 뭔가가 달랐다. 그게 뭘까. 잠시 생각을 해보던 영도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수인을 가리켰다.
"피부가 좀 하얗게 된 것 같다. 너?"
"원래 이런 피부는 아니었어요. 햇빛에 나가서 여러 가지 일들을 도와줬더니 타버린 거지요."
"원래 하얀 피부였어?"
"그랬던 것 같으네요."
수인은 원래 좀 그을린 피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시골 생활을 하다보면 피부가 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좀 의외였다. 수인은 처음부터 저런 모습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영도는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으음.하는 소리를 냈다.
"네가 몇 살 때부터 할머니랑 같이 살았더라."
"7살인가.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 그래? 의외로 어렸을 때부터 있었네."
그리고 할머니 댁 근처에서 봤던 첫사랑 여자 아이도 그 또래쯤 되었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영도는 숨을 죽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어. 그리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재차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 말이야."
"뭐가요?"
물으면서 수인은 영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수인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눈을 내리뜬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생기고 그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에게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요염함이 스며 나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영도는 당황했다. 수인에게서 요염함이라니. 그런 걸 느끼는 이쪽이 미쳤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하는 영도를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었다. 직시하는 시선이 심장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숨을 죽인 채로 있던 영도는 손을 주먹 쥐었다. 긴장이 된다. 머리 속이 혼미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시에 그간 잊고 있었던 어떤 감각이 일깨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숨죽인 채로 있던 영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인데........"
"원혁씨."
누군가의 부름에 영도는 눈을 깜박였다. 보이는 건 수인이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에 이해할 수 없는 압력을 느끼며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옥상 앞에 서있던 준식이 계단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래층에서 매니저님이 찾으세요."
"기다려. 금방 내려갈게."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한 영도는 수인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수인의 눈 앞에서 몸을 숨겼으면 하는 기분이 들 따름이었다. 서둘러 몸을 돌린 영도는 정원을 다 빠져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아직 날씨 쌀쌀하니까 안에 들어와 있어. 감기 걸리면 이번에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언제나처럼 틱틱 거리는 말을 하면서도 독기가 상당히 빠진 느낌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가 점점 수그러드는 걸 느끼며 영도는 당장 계단쪽으로 몸을 날렸다. 영도가 도망치듯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난 후 수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나오는 한숨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시 바깥쪽으로 몸을 돌린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그 눈동자가 짐짓 우울해 보이는 듯도 싶었다. 멍하니 서있던 수인은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아직 준식이 서있었다. 로드 매니저라고 했던가. 순하고 준수하게 생긴 사내는 수인이 돌아보자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윈혁씨가 한 말도 있는데 이만 들어오세요. 날씨도 춥잖아요."
안에 들어가 있어봤자 심심하기만 할 뿐이었다. 강원도 날씨에 비하면 지금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준식은 영도가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순순히 난간에서 떨어졌다.
정원을 지나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보는 사람들 마음이 좋게 하는 예쁘게만 꾸민 정원이었다. 이런 걸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렇게 한 거겠지. 하지만 수인은 이런 것들이 싫었다.
조금 더 풍성하고, 푸르고, 꽃들이 자유롭게 여기저기 피어있는 게 좋았다.
마지막까지 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이동하던 수인은 준식의 옆을 지나쳐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한 쪽 발을 내딛기 전에 준식도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직 날씨가 추운데 감기에 걸리지 않으셨을까 걱정이네요."
말을 건네면서 옆으로 붙은 준식의 몸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수인은 벽으로 손을 디뎠고 앞으로 내린 다리가 주욱 미끄러졌다. 상체가 기우는 걸 느끼며 수인은 그대로 계단 위쪽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수인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고 준식은 당황해 손을 뻗었다.
"괜찮으세요?"
수인의 겨드랑이 쪽을 부축한 준식은 급히 계단 아래쪽으로 내려가 그를 올려다봤다.
"죄송합니다. 옆으로 간다는 게 그만-."
"괜찮아요."
지나치게 당황해하고 있었다. 위험할 뻔 했지만 넘어지지 않고 엉덩방아를 찧은 것 뿐이었다.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와 허리 부분을 털었다. 그러다가 오른쪽 손목 부근이 따끔한 걸 느끼곤 팔을 들었다. 새끼 손가락 옆에서부터 벌겋게 까진 상처가 생겨버렸다. 그걸 손으로 문지르며 수인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준식에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니까 이만 일어나세요."
"죄송합니다. 평소에도 덜렁거린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인데."
웅얼거린 준식은 참담한 듯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놀라긴 했어도 정말 괜찮았다. 그러니 준식이 이렇게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재차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데 준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절대로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이만 내려가 볼게요. 오늘 일은 신경쓰지 마세요."
"......바로 잊기는 힘들 것 같으네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기운 없이 중얼거리는 준식을 확인한 수인은 재차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위험해지지 않도록 난간을 착실하게 붙잡았다.
2층으로 돌아왔을 때 향긋한 내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여자 미용사가 상냥하게 웃으며 접시를 내밀었다.
"조각 케이크 좀 드실래요? 차도 안쪽에 준비되어 있어요."
아기자기한 것이 굉장히 귀여웠다. 이런 케이크도 있구나. 그리 생각을 하며 접시를 받아든 수인은 재차 회의에 들어간 영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오래 걸릴까요?"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말을 하는 내내 여자는 싱글벙글인 얼굴이었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을 하는 여자의 모습은 참 낯설었다. 그래서 새삼 수인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덧붙어 외관을 꾸밀 필요가 없다 생각을 했었던 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알다. 서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싫어도 이리 할 필요가 있었던 거다.
"고맙습니다."
수인은 한쪽자리로 가서 앉았다. 접시를 바로 잡고 포크를 들어 케이크 한 쪽을 잘라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한 입 넣은 케이크에서 달콤한 맛이 화악 퍼진다. 낯선 느낌과 맛이었다. 조용히 있던 수인은 재차 케이크의 한 부분을 잘라내 입 안에 넣은 채로 영도를 바라봤다. 사람들 사이에 서서 주도적으로 말을 하는 그가 멋있게 보였다. 느슨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성격 나쁜 사람처럼 겔겔 거릴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안에서와는 다르게 바깥에서는 확실하게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런 사람이로구나.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수인이 얌전히 앉아있는 걸 확인한 영도는 헛기침을 하며 책상 위를 살폈다. 지금까지 의논을 거쳐서 결정을 내린 스타일들이 집약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걸 양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면 일단 이걸 하는 걸로 된 건가요?"
물음에 영도 대신에 용한이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만족스레 으음-하는 소리를 냈다.
"제대로 되면 멋있을 것 같은데. 뭐, 우리 영도는 원체 본판이 좋으니까."
말을 하는 용한에게선 자부심이 가득했다. 동시에 품에서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한 용한은 전화를 받았다.
"네. 원혁 매니저 용한입니다."
편안한 얼굴로 전화를 받던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이고, 사장님. 네. 물론이지요. 잘 하고 있습니다."
별 문제 없이 모든 게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어가고 있음을 자랑하듯 떠벌리고 싶었는데 다음 순간 용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각한 말을 들은 듯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그는 작아진 목소리로 '네. 네. 아,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용한은 금방 웃는 얼굴이 되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이다.
그러는 동안 영도 쪽은 대충 일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면 일단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대의 말에 용한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마주 잡으며 입술 양 끝을 길게 올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이제 다 끝났으니 맛있는 밥이라도 먹으러 가야겠네. 다들 짐 챙기고 내려가자.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용한의 말에 다들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어려운 일은 대충 정리가 되었구나.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해도 대충은 정리가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바깥쪽으로 가는 걸 확인한 후 영도는 용한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전화를 할 때 그 표정이 영 이상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사장님이 잠깐 들리래."
"무슨 일인데?"
"몰라. 그런데 안 좋은 것 같아. 웃고는 있는데 목소리가 영 아니야."
입술 옆에 손을 댄 용한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원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시경과 함께 있었던 만큼 그의 목소리 하나로 모든 걸 파악하는 게 가능한 용한이었다. 보아하니 사무실로 들려야 할 모양이었다.
일 하느라 제대로 된 끼니 한 번 챙겨먹지 못했다. 수인도 지금껏 쫄쫄 굶고 있었고 말이다. 바깥에서 뭐라도 좀 사 먹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만큼 영도의 표정은 달갑지가 않았다.
"일단 움직이자. 동생은 집으로 보낼까?"
"아니. 내가 말할게."
손을 든 영도는 수인 쪽으로 걸어갔다. 파장 분위기였으나 용한과 선 영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수인은 접시를 무릎 위로 내려놨다.
"무슨 일이에요?"
"일이 있어서 사무실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러면 난 집에 들어가 볼게요."
눈치가 참 빨랐다. 무턱대고 같이 사무실로 갈래요. 같은 말을 할 수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리 말을 듣게 되자 안심이 된다. 수인이 먼저 말을 해주니 마음은 편안하지만 달리 걸리는 게 있었던 영도는 조심스레 물었다.
"배고프지 않냐."
"괜찮아요. 집에서 먹으면 돼요."
집까지 가는 동안 배고프면 어쩌자는 건가.
영도가 왜 인상을 쓰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던지 수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신경 쓰지 말아요. 오늘 재미있었어요. 좋은 옷 사줘서 고마워요."
"그 정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뭐........"
웅얼거린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고 해야 할 것 같은 말들도 생각나지 않고. 조용히 있던 영도는 '일어나라. 차 타는 것 까지는 봐줄게.'라고 말했다.
"버스 타고 가면 되나요?"
"무슨 버스?"
일어나면서 묻는 말에 영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여기 지리도 모르면서 무슨 버스야. 택시 타고 가야지."
"하지만 비싸잖아요. 대충 위치는 아니까-."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택시 잡아 타고 들어가."
택도 없는 말이라는 듯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지금 그는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취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영도를 확인한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아직은 나도 버스 타고 여기 다닐 만큼 잘 몰라요. 겁도 나고요."
수인이 한 발 물러서자 그제야 영도의 표정도 풀렸다. 언제 위협적인 얼굴을 했느냐는 듯 그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건데 서울은 위험한 곳이야.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세상이기도 하고."
"알고 있어요. 신경쓰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의외로 순순히 말을 하는 수인 덕분에 이상한 기분이 든다.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영도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짐을 챙기는 분위기였다. 이쪽도 바로 벤을 타고 이동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영도는 수인의 팔을 슬쩍 잡았다.
"내려가자. 택시까지는 잡아줄게."
수인은 영도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 있던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둘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수상쩍은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성거리던 이들은 영도가 나로자마자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기자들이었다. 어설프게도 있는군. 그리 생각을 하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영도의 옆에 서있던 수인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자인 것 같은데요."
"신경쓰지마."
영도는 수인의 머리를 잡아 옆으로 가게끔 했다.
운 좋게도 금방 이리로 오는 택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을 들자 바로 코 앞에서 멈춘다. 뒷문을 열어 수인이 올라탈 수 있게 한 영도는 반쯤 허리를 굽혔다.
"들어가 있어."
"몇 시에 들어올 것 같아요?"
이쪽을 알아본 택시기사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때라면 그런 게 신경쓰여서 바로 택시 문을 닫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아쉽고 미련이 생기는지 모르겠다면서 영도는 수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야."
"그러면 고기 구워놓을 게요. 일찍 들어와요.
".......아아."
엉성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영도는 허리를 세우고 바로 택시 문을 닫았다. 수인을 태운 택시가 점점 멀어진다.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멀찍이 떨어져 서있던 기자들이 접근을 하는 듯한 기척이 느껴진 영도는 바로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함부로 혼자서 나가지 말라니까."
"동생 보내고 왔어. 일단 사무실 가자."
"그래. 저희들 이만 가봅니다. 연말 행사 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용한은 영도의 팔을 잡아끌었다. 미용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용한은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다 년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기자인지 일반인인지 금방 간파해낼 수 있었다. 질린 듯 용한은 얼굴을 찡그렸다.
"벌써 바깥에 다 깔렸네."
"앞으로는 더 심해지겠지. 뭐라도 해야지 정리가 될 것 같은데."
"이유라는 어떻게 하고 있데?"
원혁이 기분 나빠할까봐 용한은 쉬쉬하던 부분이었다. 그걸 먼저 거론하자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어떤 식으로 말해줘야 하는 건가 싶어 조용히 있던 용한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조용하기는 해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던데......."
"나와 있었던 열애설을 두고 말이야?"
"그렇지. 솔직히 좋은 건수 아니겠어? 네 이미지는 좋잖아. 좀 이용해 먹고 헤어져도 괜찮다 싶은 거겠지."
영도의 얼굴로 노골적인 불쾌함이 서리자 참으라는 듯 용한은 손을 까닥였다.
"기분 나빠하지마. 다 네 인기가 높아서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될텐데 이상하게 불쾌해서 그래."
눈치도 보이고 말이다. 그 눈치가 보이는 상대에서 왜 수인의 얼굴이 생각나는 지 모르겠다.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영도는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