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31)

잠에서 깨어날 때 바닥에 뺨을 비볐다. 푹신했다. 바닥에 그냥 누워서 잠들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건 뭔가 싶었던 수인은 당장 눈을 떴다. 그리고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걸 확인하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설마 싶어서 내려와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소파에 누워서 자는 영도가 눈에 들어왔다.

걸어서 침대로 온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났다는 건 분명 옮겨준 거라는 거겠지. 중간에 잠깐 일어나서 그랬던 걸까. 그러면 소파에서 마냥 자지 말고 같이 침대에서 자면 좋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수인은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안색을 굳혔다. 혹시라도 영도가 잠에서 깰까봐서 당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다행이다. 집에 있었던 거구나.]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시경이었다.

전에도 불편하고 껄끄러운 게 없잖아 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더했다. 절로 경계심이 드는 걸 느끼며 수인은 '무슨 일이세요.'라고 물었다.

[무슨 일이라 해봤자 오늘 일정에 대해 의논할 게 있는데 영도 핸드폰이 안 터지잖아.]

그제야 수인은 어제 영도가 핸드폰과 약을 분리해놨다는 걸 떠올렸다. 연락이 안 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려니 시경이 재차 말했다.

[영도 집에 있지? 괜찮으면 좀 바꿔줄래?]

"아직 자고 있어요. 피곤한 것 같아요. 괜찮으시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전달해 줄게요."

[그렇게 할까? 중요한 말은 아니야. 있다 10시 정도에 준식이 보낼 거야. 시상식 준비 들어가야 하니까 그 때까지 알아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해.]

수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6시 50분이었다. 괜찮을 것 같아서 '알았아요.'라고 짤막한 대답을 했다.

[수인이 목소리가 굳어있네? 내가 싫어졌어?]

싫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 걸까.

수인은 눈을 내리뜬 채로 말했다.

"그 때의 일은 저도 잘못이 있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잘못이요. 꼭 사장님이 나쁘다고만 할 순 없겠지요.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삶의 방식도 다른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이해할 수 없는 거니 그것만으로도 단순히 화를 낼 순 없어요. 원망도 하지 않아요. 그런 일방적인 건 말도 안 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이번 형의 일은 좀 실망이네요."

[내가 한 거 아니야. 괜히 뭐라하지마.]

"하지만 사전에 말은 해줄 수 있었던 거잖아요. 형이 연예인이고 사장님의 상품이라는 건 알아도 이번 일은 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유가 어떻든 수습하지 못하고 일 터지게 한 것에는 사장님 탓도 있어요. 그러니-."

수인은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수습도 알아서 해주실 거라 믿어요."

수화기 반대편이 조용했다. 이 정도로 말했는데 왜 반응이 없는지 모르겠다. 의문이 생겨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영도는 아닌 척 해도 이번 일을 꽤나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이쪽이 나선다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수인은 시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싶었던 수인은 뒤를 돌아봤고 영도가 수인의 손에 들린 전화기를 가지고 가버렸다. 언제 영도가 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황했기 때문에 굳은 채로 있는 수인의 등을 가볍게 토닥인 영도가 '나야.'라고 말했다.

전화기를 든 채로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수인을 두고 방으로 들어간 영도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전화질이야."

[무섭네.]

"뭐가?"

왜 전화를 건 거냐고 물은 것뿐인데 뭐가 무섭다는 거란 말인가.

그런 영도의 생각을 정정하듯 시경이 말했다.

[수인이 말이야. 방금 전화 통화 하는데 서늘한 게 오한이 들던데? 무서운 아이였구나. 그냥 귀여운 시골쥐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할 말은 그것 뿐이야? 그러면 지금 바로 끊어도 되겠네?"

[어허. 그러면 섭하지. 난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단 말이야. 내 친구가 나서서 이번 일 해결해 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참도록 해.]

"조금이 얼마나인데? 이러다 올 한 해 아주 최악으로 마무리 짓게 생겼어."

영도는 서랍장에서 담배를 꺼냈다. 웬만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이상 입에 대는 일 없던 담배였다. 평소에는 잘 생각도 나지 않던 것이 지금은 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담배를 손에 쥔 채로 돌리려니 시경이 '아무래도 그쪽에서 뭔가를 계획하는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그쪽 뭐?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아?"

[탈세 같은 거 말이야. 이유라 소속사는 비대하잖아. 뒷세계랑 손잡고 구린 짓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지. 뒷돈을 마련하는 동안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으니 이런 걸 터트리는 거야.]

"그런다고 검찰들이 눈치를 못 채겠어?"

[노이즈 마케팅이야. 이쪽 바닥에서 일 터트리면 대중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쏠리게 되지. 그러는 동안 저기 국회 쪽이나 거대 기업체에서도 일을 터트리는 거야. 영도 네가 대중들 눈을 가려주는 동안 놈들도 적지 않은 일을 저질러서 막대한 이윤을 손에 넣겠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던 바잖아? 그렇지?]

여러 가지 것들을 추측하긴 했지만 막상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영도의 입술꼬리가 비웃듯 올라갔다.

"나도 꽤나 거물이 되었네."

[너만 모르지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야. 한국에서 원영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그런다고 해서 풀리는 게 아니니까."

영도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해도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차분해지는 걸 느낀다.

복잡한 상황이지만 이쪽에서만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영도는 담배를 문 채로 중얼거렸다.

"평소처럼만 행동할 거다."

[그래. 여기서 더 네 성질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럼 됐어. 끊는다."

[영도야.]

왜 또 부르는지 모르겠다.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린 영도가 '왜?'라고 묻지는 않아도 그 뉘앙스가 전달된 것인지 잠시 뜸을 들인 후, 시경이 말했다.

[미안하다. 장난 좀 친다고 대응이 늦었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이 녀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그래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이번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해결은 해주지.'라고 말하는 게 훨씬 더 어울렸다. 그래야 나도 당황하지 않을 게 아닌가. 영도는 쓰게 웃었다.

"높은 분들이 꾸미는 일이잖아. 너도 그들하고 샤바샤바해야 할 부분이 있었던 거겠지. 나라고 해도 무턱대고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을거 아니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야."

영도가 화가 났던 이유는 달리 있었다.

이유라와의 스캔들은 신경 쓰였다. 지금까지 힘겹게 쌓아올린 것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닌지 큰 두려움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영도의 성질을 건드리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수인의 존재였다.

왜 이렇게 그 촌닭이 신경 쓰이는 걸까. 처음에는 안 그랬다. 단순히 귀찮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쓰였다. 그게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오늘 하루에 시상식하고 행사에 입을 의상들 다 정리해둬. 그리고 3일 동안은 쉬도록 해.]

가까스로 뭔가가 떠오르려던 참이었다. 때에 맞춘 시경의 말 때문에 다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영도는 지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3일의 휴가라고? 이런 시기에?

"무슨 꿍꿍이야. 뭔 놈의 휴가를 준다는 건데?"

[어차피 어디를 가든지 기자들이 따라붙을 거야. 태연하게 일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일부러 언론에 노출이 될 필요도 없어. 적당히 기사를 풀어낼 테니까 겸사겸사 좀 쉬도록 해. 나쁠 일은 아니잖아? 네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 사촌동생 데리고 서울 구경이라도 시켜주던가.]

영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왜 또 수인일 걸고 넘어가는 건가 싶었다.

[솔직히 하는 말이지만 수인이 차림 꽤 심하다. 그냥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해주고 싶었는데 싫다고 해서 못했던 거야. 내 말은 아니더라도 네 말은 들을 거 아니야. 데리고 가서 꾸미고 좀 그래라. 그러면 장담하건데 지금보다 30배는 훨씬 더 나아질 거다.]

시경의 말에서 수인에 대한 미련이 느껴졌다. 집요한 놈.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한 영도는 바로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수인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다. 수인이 TV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한 데로 모아서 정리를 하던 수인은 다가오는 영도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에 들린 시디를 만지작거리던 수인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형네 사장님인데 너무 함부로 말한 것 같아요."

"아무렴 어때. 욕 먹어도 싼 놈이야."

영도는 수인의 머리에 손을 대고는 두어번 토닥였다. 전화기를 집어넣고 베란다 쪽으로 나가는 영도를 확인한 수인은 조금 전 그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이상한 느낌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동안 영도는 베란다에 서선 아래를 내려다봤다.

새벽의 찬 기운이 뼛속으로 저며 온다. 몸이 으실으실했다. 이래서 나이 먹은 건 못 속인다는 말이 나오는 거라며 팔짱을 낀 채로 있던 영도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던 그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좋구만."

새벽 아침의 활력이 고스란히 몸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새벽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나. 고개를 위로 든 채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의 입이 찢어져라 크게 벌어졌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는 는물 맺힌 눈으로 재차 아래를 살펴봤다.

"아침 먹을 거예요?"

"조금 있다가 먹을래."

"뭐 먹고 싶어요?"

베란다에 매달려서 흔들거리는 영도는 마치 백수 같은 느낌이었다. 모처럼의 겨울의 찬공기를 만끽하던 영도는 수인의 거듭되는 물음에 뒤를 돌아봤다.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는 거냐?"

"아니요. 된장찌개랑 김치찌개. 둘 중에 하나만 골라요."

딱 두 가지만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리 말하는 듯 똑바로 응시하는 눈빛은 이제는 적응이 된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 가슴 한쪽이 설레는 걸 느끼며 영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그러면 김치찌개. 매콤한 걸로. 땀 좀 빼고 샤워하면 딱 좋겠다."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너무도 먹고 싶어졌다. 괜히 입맛을 다시면서 쩝쩝거리려니 앞에서 알짱거리는 수인이 신경 쓰였다. 조용히 소파 바닥 정리를 하고 있었다. 하여튼 깔끔하기는.

"야. 촌닭."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으며 수인은 영도를 쳐다봤다.

"문수인이라는 이름이 있는데요?"

"오늘 나랑 같이 나갈래?"

"......어딜요?"

"바깥으로."

잠시 수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윽고 눈을 내리뜨고는 대답을 회피했다.

"일 하러 나가는 거잖아요"

"의상이랑 헤어 회의를 할 거야. 내 쪽 사람들만 모이는 자리라 크게 불편할 것도 없어. 그리고 옷도 좀 사고 그러자."

"제 옷은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여. 겉모습만 보고 널 무시 하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

저도 모르게 본심이 말에 실리게 되었다. 인샬라에서 별 거 아닌 놈들이 수인에게 보였던 태도가 떠오르면서 정말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다. 영도는 헛기침을 했다.

"비싼 거 안 사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두 번 거절을 하면 그 때에는 목청을 높였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인은 별 말을 하지 않고 마저 정리를 할 따름었다. 그것에서 수인이 잠자코 따라오기로 마음을 먹었음을 깨달았다.

평소에도 말대꾸 안 하고 저렇게 조용하면 오죽 좋아.

문득 드는 생각을 내리누르며 영도는 재차 베란다 쪽으로 매달려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길게 숨을 토해냈다. 하얀 김이 서린다. 몸은 차갑게 식어 가슴까지 떨렸지만 춥지는 않았다. 어느새 영도는 수인이 해주는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을 생각으로 기대에 차 눈을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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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신나게 고개를 까닥이고 있던 준식은 감은 눈을 떴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차 위로 올라타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벤은 원혁 전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올라타는 놈은 대체 뭔가 싶었다.

"야, 너!"

한마디 하려는 순간 상대방이 고개를 들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풍기는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일단 목청을 높이긴 했으나 순간적으로 사그라지고 만다. 입을 꾹 다문 채로 머뭇거리는 동안 낯선 인물 뒤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원혁이었다.

"시끄러워. 음악이나 꺼."

차 속을 가득 채우는 음악 너머로 들리는 차가운 이 목소리는 분명 원혁의 것이었다.

아아, 이 시대의 차도남 원혁. 어찌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준식은 급히 음악의 볼륨을 낮추곤 굽실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놓고 난리야."

"아니. 그게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요......"

말을 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나중에는 기어들어가도록 중얼거린 준식은 수인을 흘깃흘깃 봤다.

"누구십니까?"

"문수인."

"그게 누군데요?"

"내 사촌동생. 알아서 잘 신경 써."

"아, 그러십니까. 안녕하세요? 전 박준식이라고 합니다. 사촌형님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는......"

인사를 하려면 제대로 된 상태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준식은 그만 무릎이 미끄러져서 의자 앞으로 넘어갈 뻔 했다. 황급히 옆 의자를 불잡아 몸을 지탱할 수 있었지만 준식도 놀라고 수인도 놀랐다. 그러는 동안 영도만이 태연히 한마디 했다.

"오두방정 떨지 말고 그냥 앉아. 용한이는 어디에 있는 건데?"

미끄러지면서 부딪친 무릎이 너무 아팠다. 그렇다고 내색을 할 수도 없어 끙끙 거리며 자세를 바로 한 준식은 어물거렸다.

"매, 매니저님은 지금 최태란 숍에 가 있으세요. 다들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알았어."

다시 인사를 할 만한 분위기는 아닌 듯 하여 준식은 운전석에 제대로 앉았다. 그걸 확인한 영도는 옆에 앉은 수인을 확인했다. 등을 곧게 펴고는 허벅지 위에 양 손을 올리고 있었다. 등을 기댄 채로 앉아도 될 것을 왜 저리 앉는 건가 싶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하게 앉아."

"그렇게 하려고요."

수인이 대답을 하는 동안 시동이 걸렸다. 부르릉 하는 소리에 수인의 고개가 바깥으로 향해진다. 그 옆 얼굴이 한없이 평온했다. 수인을 바라보던 영도는 의자에 뒷머리를 기댔다.

"혹시라도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들이 있으면 바로 무시해. 신경쓸 필요 없으니까. 알았지."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수 있어요."

잘도 그러시겠다. 너는 그렇게 말해도 나는 쉽사리 안심할 수 없다고. 바깥은 안하고 달라. 집 안에만 있던 너 같은 건 금방 사람들 말에 속아서 홀랑 넘어가 버릴 거다. 그러니 시경 같은 놈에게도 당하는 거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 바로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지만 하진 않았다. 너무 과보호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인은 21살이었다. 이쪽의 간섭이 필요치 않는 나이 대였다. 그러니 마음을 편안하게 하자. 오버를 하면 사람 이상하게 보일 테니. 그리 생각을 하며 팔짱을 끼는 영도였지만 그는 수인이 조금 움직일 때마다 그쪽을 흘깃거리면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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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최태란이라는 이름을 내건 샵을 지닌 여자는 이쪽 바닥에서 꽤나 유명했다.

본인이 디자인한 의상도 있겠지만 그녀는 대부분을 해외나 국내의 유명 브랜드를 남들보다 먼저 입수해 그걸 판매하고 있었다. 워낙에 발이 넓고 화술이 좋아서 상대가 원하는 물건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막대한 중간 수수료를 챙기고 있었다.

단가가 세긴 해도 실패 확률이 가장 낮기 때문에 찾게 된 거였다. 그걸 알기에 여자도 영도도 서로에게 예의바를 수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올해도 찾아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2층으로 올라가면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하는 여자에 덩달아 영도도 편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나온 라인이 괜찮은 것 같더군요."

"언제나 늘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해외에서 얻어온 아이들도 많아요. 모두 다른 사람들 손도 못 대게 숨겨놨어요. 일단은 원혁씨 눈에 보여드리고 나서 넘기려고요. 이리로 오세요."

영도에게 말을 하면서 여자는 뒤로 손짓을 했다. 어서 주변 정리하고 옷가지고 와. 그리고 차 준비해. 빠르게 신호를 주고 받지만 소란스럽진 않았다. 이미 VVIP들 대접에 익숙한 만큼 여자는 화사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영도를 대접했다. 그 뒤로 용한이 따라 붙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전 옷 보는 눈이 없으니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원혁씨가 알아서 잘 하실 텐데요, 뭐. 워낙에 안목이 좋으시니까요."

여자의 말에 영도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금방 2층으로 올라갔다. 영도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이미 기본 세팅이 되어 있었다. 앞 쪽으로 걸린 양복들을 주욱 살피던 영도가 어느 한 벌에서 발을 멈추었다. 영도의 옆에 다가선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마음에 드세요?"

"입으면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러면 입어보세요. 셔츠는 이대로 할까요?"

"아니요.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일단 벽에 걸어진 것들 중에선 영도의 눈에 드는 게 없었다. 영도가 흥미를 보이지 않자 여자가 손짓을 했고 사인을 받은 이들이 급히 앞으로 나왔다.

"셔츠는 여기에 있습니다."

미끄러지듯이 나타난 행거가 영도의 앞에서 멈추었다. 그쪽으로 몸을 돌린 영도는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걸린 셔츠를 확인했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도 라인과 단추가 달린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예리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눈빛으로 영도의 손이 오른쪽 셔츠를 가리키자, 그걸 확인한 여자가 검은 판을 들어 올려 영도에게 보였다.

"넥타이는 이게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마음에 드는 색이로군."

검은 판 위에 올려진 넥타이를 확인하는 영도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걸 확인한 여자도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역시나 정확하고 시원시원한 안목이세요. 이래서 제가 원혁씨를 좋아한다니까요. 제 미적 감각에 딱 맞춰주시니까요."

"덕분에 저도 좋은 옷 입고 좋은 평판을 받아서 좋습니다. 언제나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하고요."

"신세라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원래 우리들 하는 일이 그런 건데. 원혁씨가 입고 나가면 다음 날 바로 팔려요. 이건 세트로 맞추면 500도 넘는 건데. 하루에 30벌도 팔리지요. 물량이 없어서 팔지 못할 때도 있어요."

워낙에 고가의 것이었기 때문에 많이 뽑아도 50벌 내외였다. 적게는 10벌만 한정으로 팔기도 했다. 그럴 경우에 금액은 더 높아진다. 크게 한 장에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여자는 영도가 고른 것을 챙기며 의상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 들어가서 시착해 보세요. 구두는 안쪽에서 준비해 드릴게요."

"시계나 간단한 핀 같은 것도 준비 된 겁니까."

"물론이지요. 워낙에 고가라 지금 데리고 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지만 그런 건 책자로 가지고 왔으니까 한번 살펴보세요."

"그래야 겠군요."

영도는 겉옷을 벗어 옆에 서있는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가 공손하게 받아드는 걸 확인한 후 주변을 둘러봤다. 목 주변에 손을 대고 있었던 영도는 멀찍이 서있는 수인을 발견하고는 당장 그 쪽으로 손을 들었다.

"문수인."

수인이 고개를 들자 영도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로 와."

영도가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그런 식이었다는 듯 영도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바깥에 나왔기 때문에 혼자만의 뜻대로 움직일 순 없었다. 수인은 어기적거리며 영도 앞으로 걸어왔다.

세련된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과 모양새의 수인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여자는 상냥한 태도로 물었다.

"어머나. 이 귀여운 분은 누구시죠?"

"제 사촌동생입니다. 애한테도 옷 좀 골라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영도의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수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입은 옷만으로도 충분해요."

나오는 목소리가 곧고 발성도 좋았다. 수인의 말에 여자는 턱에 손을 댄 채로 영도를 올려다봤다. '이리 말하는데 어쩔래?' 라는 눈빛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웃는 얼굴로 여자에게 말을 한 영도는 수인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들어갔다.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로 수인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래. 나 창피주고 싶어?"

"형 창피주지 않으려면 몇 백이나 되는 옷을 입어야 하는 건가요? 전 그런 거 싫어요."

입을 다물고 이쪽을 올려다보는 수인은 단호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수인이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 지를 알게 되었다. 워낙에 비싸서 옷 고르기가 겁나는 거였다.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영도도 매일 이런 고가의 슈트를 걸치는 건 아니었다. 이건 연말 행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찍힌 사진들은 국내 뿐만이 아니라 해외 언론에도 흘러나가게 된다.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건데 만원, 십만원 하는 기성정장을 입을 순 없는 거였다. 그런 걸 설명하면 수인이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수인이 본인 옷을 고르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방식으로 수인의 마음이 동하게 해야만 했다.

"여기 그렇게 비싼 데 아니야."

"거짓말 하지 말아요. 엄청나게 비싼 곳이잖아요."

"아니야. 여긴 수입 명품관이라서 그래. 아래도 봤지? 한 쪽에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것들도 더러 있어. 그건 하나도 안 비싼 것들 뿐이야. 4~5만원이면 살 수 있어."

"거짓말. 그런 말에 내가 속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이야. 내가 확인시켜 줄까?"

영도는 손을 들었다. 영도와 수인을 주시하고 있었던 여자는 한달음에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제 사촌동생이 어지간히 불신이 깊네요. 여기 옷이 비싸다고 난리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나. 그러셨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명품관이라 비싼 거고 아래층에는 저렴한 것들도 많아요. 끽해야 한......"

영도는 여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눈치 백단인 여자는 영도의 뜻을 단박에 파악을 해버리곤 양 손을 모아 얼굴 옆에 댔다.

"만원에서 10만원 사이의 옷들도 수두룩 해요."

웃는 여자의 얼굴에선 조금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만을 말하는 듯 방긋거리고 웃는 얼굴에 수인은 영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정말인가요?"

"물론이지요. 비싸기만 한 걸 걸어서 어떻게 장사를 해요. 여기는 특별한 분들만 찾는 자리라서 그런 거지, 아래는 안 그래요. 괜히 부담 갖지 마세요."

설명을 하면서 여자는 화사하게 웃었다. 어차피 모든 옷들의 금액은 각 라인의 매니저들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택 같은 게 없으니 금액이 들통날 일도 없었다. 그저 아래층 매니저에게 금액 설명을 할 때 뒤에 '0'하나 씩 지우라고 말만 전달하면 되었다.

눈치가 빠른 여자 덕분에 영도도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들었지? 그러니까 내려가서 옷 좀 골라봐. 저기 준식이랑 같이."

반대편에 서있던 준식은 영도의 손짓에 허리를 주욱 폈다. 그를 확인한 직 후 수인은 중얼거렸다.

"일부러 옷 안 사줘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들을 나쁘게 말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로 올라왔으면 그에 걸맞는 차림새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냐? 실제로 나는 이렇게 화려하게 다니는데 네가 발란스에 맞지 않게 다니면 내 평판이 어떻게 되겠어?"

그런 거지같은 차림으로 다니면 사람들 다 널 밥으로 알 거다.

직설적으로 말을 해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동안 수인의 입꼬리로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설마 또 싫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런 말을 하면 당장 그 입술을 잡아 흔들어버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 벌만 볼게요."

"당연하지. 나 두벌은 안 사준다."

틱틱거리듯 말을 하지만 내심으로는 안도했다.

드디어 사줄 수 있는 거로구나. 다른 사람들은 옷 사준다 하면 옳다구나 할 텐데 왜 이 녀석은 이렇게나 깐깐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문수인인거겠지만 말이다.

수인이 계단 쪽으로 걸어가는 걸 확인한 영도는 가슴에 한 손을 올린 채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구나. 그리 생각을 하며 인상을 쓰려니 옆에 선 여자가 웃음을 참으며 속삭였다.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것뿐이지요."

아닌 척 말을 하려 해도 영도는 신경 쓰이는 듯 수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영도의 모습에 여자는 웃음을 꾹 참듯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영도는 손짓으로 준식을 불렀다. 준식이 다가오자 수인을 가리켰다.

"내 동생이랑 같이 내려가서 옷 좀 골라봐."

"몇 벌 고를까요?"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게 해. 괜히 참견하지 말고. 나중에 내가 내려가 볼 테니까. 그리고 옷 가격에 대해선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말고."

"네. 알았습니다."

정확한 옷 금액을 알진 못해도 어느 정도 한다는 걸 아는 준식이었다. 혹여 말을 흘렸다가 수인이 안 고르면 낭패니까 미리 단속을 해두는 거였다. 알았다며 재차 고개를 끄덕인 준식이 수인 쪽으로 갔다. 말을 주고 받더니 수인이 뒤를 돌아본다. 별 말은 하지 않는다. 수인이 고개를 돌리고 준식을 따라 내려가는 걸 확인한 영도는 눈을 깜박였다.

신경 쓰인다. 같이 내려가서 옷을 골라주고 싶지만, 이쪽도 할 일이 있었다. 영도는 대충 걸치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의상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

"요즘 젊은 분들은 이런 걸 좋아하세요."

벽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꾸며진 옷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수인은 딱히 끌리지 않았다. 별 반응이 없는 수인의 눈치에 여자는 재빨리 옆으로 넘어갔다.

"이건 어떠세요?"

"요란한 것 같은데요."

"전혀 안 그래요. 그리고 요즘은 이 정도는 입어줘야 해요."

여자는 검은 티지만 앞으로 반짝거리는 스와로브스키로 장식이 된 것을 양 손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수인은 무덤덤했다. 이 상의 한 벌만 해도 기백이 넘는 것이었다. 모처럼 좋은 걸 추천하는 건데 왜 저런 심드렁한 태도인가 싶었던 여자는 손을 내렸다. 그러자 수인이 좀 수수해 보이는 옆 의상을 가리켰다.

"이건 얼마 정도 하나요?"

"많이 안 비싸요. 위 아래로 한 10만원 정도? 여기에 있는 악세사리는 바로 판매할 순 없고 주문을 넣으면 이틀 안에 들어와요. 숄이나 가방, 신발 같은 걸 포함하면 금액은 2배 가량 더 뛰지요."

"많이 비싸네요."

"싼 거예요."

이래뵈도 뒤에 '0'하나 지운 금액이었다. 물론 그건 비밀로 하고 안내를 해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수인이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여자는 다른 쪽으로 그를 데리고 가려 했다.

"다른 걸 보여드릴까요?"

"천천히 구경을 해볼게요."

"그렇게 하세요. 제가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당장 달려갈게요."

여자의 말에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안쪽 데스크 쪽으로 가는 걸 확인한 후 수인은 옷 사이를 다녔다. 대량으로 똑같은 옷이 걸려있는 게 아니라 세트로 맞추거나 한 벌씩 개성적인 장식을 해서 걸어두는 게 대부분이었다. 지금껏 수인이 본 적 없는 옷들이었기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일단 여자에게 '많이 비싸지 않아요~' 같은 말을 듣긴 했지만 신뢰가 가지 않았다. 정말 싼 걸까.

수인은 옷을 잡아 안쪽과 바깥쪽을 살폈다. 금액이 걸려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임의적으로 금액을 알 도리가 없었다. 두어번 뒤적거리다가 손을 놓은 수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옷 사이를 천천히 걸어갔다.

"위에 원혁이 왔다며?"

일부러 들으려 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귀로 들어왔다.

수인은 걸음을 멈추었고 그런 그의 귀로 여자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여전히 멋지더라. 그런 사람이 왜 이유라 같은 거랑 사귄데?"

"내가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진짜가 아니래."

"그러면 뭔데? 일부러 터트린 스캔들이라는 거야?"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이유라 그 여시 같은 게 자꾸만 원혁한테 꼬리를 친다네. 스캔들 빌미를 대서 일부러 더 접근을 하려 한다는 거야. 잠깐 사귀어보고 싶다는 거지."

"말도 안 돼. 그 계집애 소문 진짜 더럽던데."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데. 사장하고도 사귀고 모 그룹 회장하고도 했다던데? 나이가 많아서 다들 기피하는 그 영감이 부를 때마다 속옷 내린다잖아."

"아으. 끔찍해.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을까."

"어떻게 보면 대단한 거지. 몸 팔았다고 해도 덕분에 이런 거, 저런 거 다 가지는 거잖아. 솔직히 손가락질만도 못 해. 다들 그렇게 살고 싶은 거 능력이 안 되니까 못하는 거 아니야. 이유라 걔가 얼굴은 좀 고쳤지만 색기가 보통이 아니라고 하더라. 아이돌로 활동을 했을 때에도 오퍼 장난 아니었데. 다른 애들은 백만원이면 끝나는 걸 걔는 거의 5배 넘게도 받았다잖아."

"몸 팔아서 잘 나간다고는 해도 나는 좀 싫다."

웅얼거린 여자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정말 싫어하는 듯한 동료의 모습에 옆에 서있던 이가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고. 이 순진한 것.'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던져도 여자는 잠자코 있을 따름이었다.

수인은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이번 스캔들이 진짜가 아닐 거라고 말을 하는 구나.

조용한 눈빛을 하고 있던 수인은 잡지가 놓인 곳에 도착을 했다. 표지 위를 장식하는 영도를 볼 수 있었다. 셔츠 없이 상의 정장 하나만 입은 그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말은 없어도 눈빛으로 모든 것이 표현되고 있었다.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굉장히 끌린다.

표지를 보던 수인은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보이는 건 영도의 패션 화보였다. 배우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원혁의 특별 부록-이라는 안내와 함께 다양한 사진들이 찍혀 있었다. 얼굴이 작고 팔, 다리가 긴데다 몸이 좋으니까 어떻게 찍어도 좋은 사진이 나왔다. 점프를 하듯이 위로 몸을 날린 채로 정지된 사진이 멋있었다. 그 부분에서 쉽사리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나랑은 많이 다른 사람이로구나.

수인은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낡은 옷을 입은 사내는 칙칙한 느낌이었다. 이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친절한 것뿐이지 바깥의 모두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자신을 영도가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손을 들어 모자 속으로 넣었다. 코와 눈 주변을 더듬었다.

"옷은 좀 고르셨어요?"

뒤로 다가온 여자를 확인한 후 수인은 손을 내렸다. 여자는 수인이 앞에 두고 있던 잡지를 확인하고는 상냥하게 웃었다.

"잡지 보고 계셨어요? 사촌형이 나온 잡지네요?"

수인만 있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테지만 원혁이 사촌이었다. 여기로 데리고 와 옷을 사줄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닌 셈이었다. 여자는 노골적으로 부러움을 내비쳤다.

"정말 부러워요. 이런 사람이 사촌형이라니. 잘 대해주세요? 필요한 거 있다고 조르면 사주기도 하고 그러나요?"

"친절한 사람이에요."

"역시나 그렇지요? 여기 올 때엔 꼭 간식 같은 걸 따로 챙겨서 보내주시더라고요. 진짜 멋진 것 같아요."

뺨에 양 손을 댄 여자는 행복해하는 얼굴이었다. 영도의 그런 배려에 푹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듯 옆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로 생글거리는 여자를 확인한 후, 수인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처음 권해주셨던 옷으로 구입할게요."

"어머나. 정하셨어요? 그러면 일단 입어보세요. 절 따라오세요."

친절한 샵 매니저는 냉큼 안쪽을 가리켰다. 그 뒤를 쫓으면서 수인은 재차 거울 속을 확인했다. 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본인을 주욱 응시하던 수인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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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 정도 올라간 하얀 원 위에 선 채로 영도는 기장을 맞췄다. 양 손을 위로 들거나 겨드랑이 쪽을 확인하던 영도는 마지막으로 전신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리가 길어 보이는 군요."

"그게 아니라 원혁씨 다리가 원래 긴 거예요."

여자의 말은 아부 같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 다른 남자들보다 다리가 긴 편이었기 때문에 이런 슈트가 더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챙겨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도의 얼굴로 알게 모르게 만족감이 서렸다.

"발목은 좀 어떠세요?"

"괜찮군요. 셔츠도 그렇고요."

"넥타이는 여분으로 두고 나비넥타이로 다실 거지요? 알아서 준비해 둘게요."

"그렇게 해주십시오."

영도는 거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똑바로 선 채로 유심히 모습을 살피던 영도는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킵 해두고 다른 걸로 또 봐야 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단박에 결정을 내리는 것 같아도 지금 입고 있는 게 베스트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러 벌 갈아입지 않고 단박에 이런 걸 골라내는 영도의 재주에 용한은 감탄을 했다. 옆에서 열심히 전신사진을 찍는 헤어담당을 툭툭 치면서 영도를 가리켰다.

"잘 봐라. 저렇게 멋진 남자 본 적 있냐?"

"본 적 없지요."

"넌 저런 남자친구 언제 만날래?"

"매니저님이 저렇게 변신하면 만나게 되겠지요."

놀려줄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가 되레 당해버렸다. 입을 다문 용한을 본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리고 숨죽여 웃었다. 영도도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양복 상의 쪽에 달리 치장을 할 것인지 아니면 브로치를 달 것인가에 대해 의논을 하면서 영도는 아래로 내려왔다. 도움을 받아 상의를 받으면서 영도는 밖으로 나왔다.

총 다섯벌 정도를 골라야 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카달로그를 보고 결정을 하면 되었다. 이 상태로 가면 3시 안쪽으로 끝날 수도 있겠다면서 목을 좌우로 까닥이려니 저기 앞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처음 영도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사람이 이쪽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깨달았다.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서 말이다. 영도는 숨 쉬는 걸 멈추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연한 갈색의 피부, 그 아래로 자리를 잡은 색이 다른 눈동자.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와 다물린 입술. 부드러운 턱 선에 이어 그 아래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즐겨 입지만 훨씬 더 고급스러운 니트와 다리 핏이 잘 빠진 스키니 비슷한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워커에 손목에는 띠 밴드를 한 것 외에는 꾸민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화려함이 있었다. 지금의 수인은 말이다.

"저게 누구야?"

용한의 얼빠진 말에 모두가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보이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누군가 '눈동자 색이 달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영도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 상대는 천천히 걸어 와 영도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12만 5천원."

그게 뭔데? 저도 모르게 그리 물을 뻔 했다.

여전히 멍청하다 할 수 있는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는 수인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영도는 귀를 기울였다.

"전체적으로 다 맞추면 그 정도 한데요. 너무 비싼 건 아는데 이렇게 한 벌이 아니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맞춰 입을 수가 없을 것 같으네요."

나중에 돈 벌어서 갚을게요.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일단 주변 사람들 보는 눈들도 있고 모두가 당연히 영도가 사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마당에 계산 운운을 하는 건 영도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말을 해도 아주 나중에 단 둘이 있을 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수인은 영도의 반응을 기다렸다. 멍하니 있던 영도는 헛숨을 들이켰고, 옆에 선 여자를 흘겨보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영도의 손은 수인의 팔을 붙잡았다. 수인을 데리고 안쪽으로 이동을 했다. 구석에 서게 된 수인은 긴장한 듯 굳은 얼굴이 된 영도를 보곤 안색을 굳혔다.

"왜요? 역시나 너무 비싼 건가요?"

"아니.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말을 하려다 말고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재차 새삼스럽다는 듯 수인을 위, 아래로 보던 영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옷이 사람을 달라보이게 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지금까지 계속 바라보던 수인의 눈동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상했다. 옷 하나 바꿔 입는다고 수인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텐데. 그런데 왜.......

입을 다문 영도의 눈으로 힘이 들어갔다. 뭐라 해야 하나.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때문에 수인은 당황했다.

역시 너무 비쌌나? 10만원 넘으면 안 되는 거였나.

수인은 영도의 팔을 떨어뜨리려 옆으로 물러났다.

"역시 그냥 두는 편이........"

"이거 말고 다른 옷은 안 봤어?"

"뭐가요?"

"다른 옷도 더 입어봐. 이봐요."

영도가 손을 들자 멀찍이 있던 여자가 당장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일단 이 옷 그대로 입고 갈 테니까 계산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옷도 좀 볼게요."

다른 옷을 본다는 건 영도의 게 아닌, 수인의 것을 말하는 듯 싶었다. 한창 분위기 좋게 양복을 맞춰보고 있었는데 어디를 간다는지 모르겠다. 일단 용한의 눈치를 보던 여자가 만류를 했다.

"지금 양복을 맞추시려는 게-."

"그건 나중에 한 번에 할게요. 일단 이 녀석 옷부터 보고요."

말을 하면서도 영도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영도가 수인을 잡고 아래층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자 당황한 여자가 용한을 돌아봤다.

"어떻게 해요?"

영도가 말하는 대로 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위로 데리고 와야 할지 결정을 내리냐는 투였다. 진행속도가 빨라서 오늘 일 처리가 잘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용한은 난데없는 사고에 당황해 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일단 양복부터 꺼내주세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거구의 용한이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걸 확인한 직 후, 여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옆에 서있던 보조역이 조금 전 영도가 고른 옷과 구두, 악세사리를 정리한 차트를 내밀었다.

"이건 일단 1번으로 할게요."

"그렇게 해."

건성으로 대답을 한 여자는 조금 전 영도 옆에 서있던 수인을 떠올리며 잘 다듬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런데 방금 그 아이가 정말 그 촌스러운 애와 동일인물이야?"

".......저도 그걸 믿을 수가 없네요."

중얼거린 이는 차트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로 인상을 썼다.

원혁과 처음 함께 들어왔던 수인과 지금의 수인은 도무지 동일인으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눈에 확 튀는 용모는 아니지만, 사람 시선을 끄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원혁이 왜 저런 애와 함께 오는 건가 싶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역시나 친척은 친척이지 싶었다.

조금 전에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는 동안 아래층에는 매니저 용한과 원혁이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쩔까 싶었던 이는 샵 주인인 여자의 안색을 살피다가 종종 걸음으로 달려갔다. 일층 데스크 앞으로 각 라인의 매니저들이 달라붙어 서있었다. 그들은 수인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원혁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수인은 당황한 얼굴이지만 원혁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벽에 걸린 티를 내려 수인의 앞에 대보거나 청바지 같은 것들도 하나하나 살펴봤다. 결국 총괄 매니저가 그들에게 걸어갔다.

"도와드릴까요?"

"일단 이것부터 들고 있어보십쇼."

수인에게 대본 티를 건네며 영도는 옆으로 건너갔다. 행거에 걸린 것들도 착착 넘기면서 보다가 마음에 드는 걸 꺼내 수인의 가슴 앞에 대고 다시 여자에게 건넸다.

"이거랑, 이것도. 그리고 이거는...... 괜찮군."

가죽 재질의 아우터를 두어번 보던 영도가 당장 여자의 품으로 옷을 넘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지 1개와 티 2개. 그리고 가죽 소재의 아우터를 끌어안게된 여자는 당황한 듯 눈을 꿈벅였다. 그건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영도의 손이 기다란 숄 같은 걸 집어 들었다. 놀란 수인은 그걸 붙잡았다.

"이건 아니에요."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려 했던 영도는 숄을 죽죽 당기는 수인의 손길에 그리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수인은 단호히 말했다.

"그런 건 입지도 않아요."

"입는 게 아니라 두르는 용도야. 있으면 코디하기에 편해."

"코디라는 말 자체를 이해 못하겠어요. 그냥 티랑 바지랑 잠바만 있으면 돼요."

"이제부터 입는 건 내가 봐줄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수인의 손에 들린 숄을 빼앗듯이 위로 올렸다. 그러자 수인이 양 손으로 그걸 붙잡았다.

"이런 건 있어도 안 입는다니까요."

쓸데없는 데에 돈을 쓰게 할 순 없었다. 지금 고른 모든 것들은 영도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들일 텐데, 낭비하게 할 순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큰 마음먹고 두른거였다. 영도랑 같이 다니는데 있어 부족하다고 스스로가 느끼면서 비하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바라거나 원하는 건 없었다. 사지 말고 손을 내려놓으라는 의미로 수인은 간절히 영도를 올려다봤다. 그 시선에 영도는 더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아래 입술을 꾹 다문 영도는 부리부리하게 수인을 보고는 옆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알았어."

그 대답에 수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손을 놓았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영도는 냅다 숄도 여자에게 던져버렸다.

"이것도 계산."

"안 산다고 했잖아요!"

당했다며 정색을 하는 수인을 보며 영도는 혀를 내밀었다.

"내가 입을 거야."

거짓말! 당장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옆에 선 여자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 영도는 수인을 붙잡고 안쪽으로 질질 끌고 가면서 옷을 한 벌, 두벌 점점 더 많이 늘려갔다. 결국에는 여자가 다 들 수 없을 정도였다. 낑낑거리고 있으려니 다른 이들이 도움을 줬다. 한 사람이 늘어나서 고를 수 있는 옷이 더 많아질 터였다.

초조해서 죽을 것 같은데 영도에게 붙은 여자가 쓸데없는 세일즈를 시작했다.

"이건 어떠세요? 신상이에요.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 20만, 이 아니라 2만원 밖에 안 해요."

"그것도 넣어주세요."

"이 신발이랑 가방은 어떠세요? 명품관에서 직수입한 거라 가격대가 좀 되기는 해요."

"그건 어울리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다른 걸 가지고 오겠습니다."

지금 영도는 조금만 마음에 들면 모두 사버릴 상태에 있었다. 이만한 거물 손님을 놓칠 순 없는 법이었다. 하나라도 더 물건을 팔기 위해서 샵의 점원들은 걸음을 서둘렀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옷을 고르는 영도는 생생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본인 옷 고르면서도 심드렁하기만 했던 녀석이 왜 저러나 싶기도 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있던 용한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 녀석 왜 그러냐. 촌닭이라고 그렇게 구박하더니. 너도 구박하는 소리 들었잖아. 안 그래?"

준식에게 동의를 구하는 용한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투였다. 질문을 받은 준식은 머뭇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사이가 좋았는가 보지요."

준식의 대답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용한의 옆으로 샵 주인이 다가왔다. 세련된 30대 중반의 미녀가 옆에 붙어 서자 용한은 황송하다는 듯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양복을 골라야 하는데......"

"괜찮아요. 제 입장상 뭘 고르든 일단 물건 사주면 감사할 노릇이니까요."

"아. 그렇겠군요."

양복이든 뭐든, 일단 사주면 감사하다는 거였다. 그게 장사꾼의 공통된 생각일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일을 하러 와서 이런 식으로 중간에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없던 영도였으니 만큼 지금 상황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지금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수인은 계속해서 마다하고 있었다. 욱하는 얼굴이 되어선 목소리를 높이려 해도 주변을 생각해서인지 작게 뭐라고 한다. 그 때마다 영도는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툭툭 내뱉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지만 옆을 따르는 여점원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걸 보아하니 유쾌한 내용인 듯 싶었다.

용한은 턱에 손을 대곤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아는 지인들만 있는 자리에서나 짓는 표정을 지금 보이고 있었다. 원래 남들 앞에선 완벽한 모습을 가장하곤 했었는데 말이다. 저런 영도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조용히 있으려니 여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원혁씨가 저렇게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나 보군요."

"아무래도 사촌 동생이랑 있으니까 긴장이 풀린 모양이네요."

"사촌 동생인데 사이가 정말 좋으네요."

"아무래도 외동이다 보니 동생이 귀여운 게 아니겠습니까."

"매사가 완벽하고 틈이 없는 사람이라 원래 성격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덕분에 오늘 좋은 구경을 하네요."

팔짱을 낀 여자는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 알게 된 영도의 색다른 모습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관리하는 연예인이 좋은 평판을 듣는 건 괜찮은 일이었다. 용한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첨을 하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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