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1)

[내가 때때로 뭘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

눈을 내리뜬 사내는 길게 기른 머리를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세상 일에 초월한 듯 차분한 얼굴을 한 채로 사내는 속삭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내게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당신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천천히 위로 든 사내의 눈동자는 평온했다. 사내는 사라지고 여자의 얼굴이 비춰졌다. 낡은 티를 입은 여자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내와는 대조되는 그 얼굴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내가 한 일이라곤 당신을 사랑한 것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뭐라고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헛소리 하지마.]

사내의 말을 단칼에 자른 여자의 대사와 함께 전체 화면이 잡혔다.

평온하게 앉은 사내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고 여자와의 사이로 유리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앉은 사내는 수갑을 차고 있었고 메마른 느낌의 여자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너의 그 말도 안 되는 감정으로 인해 내 부모가 죽었어. 형제가 죽었지. 그래서 지금 네가 감옥 속에 있는 거야. 그런데도 아직도 그런 헛소리야? 넌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 제정신 박혀 있잖아. 그런데 왜 미친 사람인 척하는 건데, 이 개자식아!]

여자는 가방을 집어던졌지만 유리벽에 막혀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화를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미친 듯이 유리벽을 두드렸다.

[원래라면 죽어야 할 놈이야! 사람 셋이나 죽인 놈이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건데?! 미친 척, 돌은 척 하면 그걸로 땡인 거야?! 거기서 몇 년 살다가 모범수되어서 나올 생각이지?! 그 때가 되면 나도 죽일 생각인 거지?! 이 괴물 같은 놈아!]

[지희야. 그런 말 하지마. 내가 어떻게 널 죽일 수 있겠니.]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휘고 입술 꼬리를 양 끝으로 올린 사내는 너무도 순수하고 착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널 사랑하는데.]

웃는 얼굴이 '난 선량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아니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은 다정한 듯 싶으나 그 아래에 깔린 스산함이 있었다. 은은하게 깔린 BGM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했다.

사내의 미소에 질린 얼굴이 된 여자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고개를 숙이고 비명을 질렀다. 괴성으로 여겨지는 비명소리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검게 죽고 현란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제야 수인은 내내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제목처럼 차분한 내용은 아닌 듯 싶었다.

다음 화를 기다리는 동안 수인은 시디 케이스를 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눈을 감고 웃고 있는 영도가 있었다. 이 장면도 드라마를 보는 동안 알게 되었다. 여자의 오빠를 속여서 죽을지도 모르는 소굴로 밀어 넣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이었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참 많고, 드라마 속의 막장이 픽션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TV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건 영도였다.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그 사람과 하나인 듯 신들린 연기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분명 영도지만 그가 하는 연기를 보면 의아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몰입하게 되고 나중에는 생각한다. 신인대상을 받을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말이다.

이렇게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영도가 프로라는 거였다. 실제로는 땡깡쟁이에 시끄럽고 성격 안 좋은 편임에도 드라마 속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면 달리 할 말이 없어진다. 제대로 본인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수인은 재차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영도가 나왔다.

"안 잤어요?"

지금은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잔다고 들어간 사람이 왜 나오는 건가 싶으면서도 수인의 손은 리모컨을 찾고 있었다. TV소리가 커서 자다가 깬 건가 싶었던 거다.

밖으로 나온 영도는 머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있었다. 멍한 얼굴로 있던 그는 중얼거렸다.

"잠이 오지 않아."

"뭐라고 했어요?"

"잠이 오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입을 꾹 다문 영도는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마시고 거실로 나왔다.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던 영도는 수인 너머로 보이는 TV화면을 확인하고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아직도 이 부분이야?"

이제 막 3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원래 편당 시간이 긴 거긴 하지만 지금이라면 결말 부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정신이 이상한 척을 하는, 정말은 제정신인 사내와 그런 사내에게 찍힌 죄없고 불쌍한 여자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칙칙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드라마는 당시 꽤나 화제를 불러 모았다. 유명 배우 하나 없이 신인이나 중견급만을 모아 만든 영화는 의외의 호평을 얻었고 재수가 좋아 평균 시청률 26%를 찍었다. 영도의 황금기를 열어준 작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난히 애착이 가 수인에게 권했던 건데 너무 무거운 주제였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도는 수인을 돌아봤다.

"재미없지?"

"재미있어요."

"뭐가 재미있어. 가볍지도 않고 무겁기만 한데."

"연기가 제일 좋다고 추천한 사람은 형이잖아요."

"좀 보다가 지루해하면서 자버릴 줄 알았지."

"그런 일은 없어요. 아주 재미있게 잘 보고 있는 중이거든요."

세운 무릎에 팔을 올린 수인의 시선은 화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영도도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의 인물들이 움직이고 대사가 주고 받아졌다. 그러는 동안 대화는 없었다. 입은 수인이 먼저 열었다.

"잠이 안 와요?"

".......으음."

잘 모르겠다는 듯 영도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뒤로 고개를 젖힌 그는 두어번 눈을 깜박였다. 멍하다 할 수 있는 눈빛을 한 채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영도는 앞으로 고개를 숙이곤 주먹으로 뒷목을 두드렸다.

"이런 일은 이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야. 자꾸만 마음에 걸리네. 솔직히 말해서 짜증도 나고."

자려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이번 일이 터질 걸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으나 막상 닥치게 되자 화가 났다. 내일부터 기자들이 엄청나게 따라붙겠구나 싶어서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며, 이유라 그 계집애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냥 만사 다 귀찮았다.

"내 군번에 이런 스캔들이 웬 말인가 싶기도 하고."

"사장이라는 사람이 꾸민 일이에요?"

'음?'하는 소리를 내며 영도는 수인을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양 다리를 올리고 앉은 수인은 짐짓 진지한 얼굴이었다. 눈에 힘을 주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 영도는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피곤하고 한쪽 머리가 몽롱하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느슨해진다. 영도는 그답지 않게 순순히 웃으며 말했다. 

"재수는 없어도 머리 나쁜 짓은 안해. 이런 일은 결국 내 이미지 손상이야. 그런 걸 염두 하면 쉽게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은 아니지. 뭔가가 있으니까 일이 터진 거겠지. 여자 쪽 소속사도 꽤 힘이 있으니까."

"한쪽에서 터트리면 못 막아요?"

"상황에 따라 다른 거잖아. 진짜라면 아닌 척 입을 막아버리든가. 아닌데도 신경을 돌리려고 일부러 더 크게 부푼다던가. 요즘 세계정세가 안 좋은가."

아닌가. 나는 아직 그럴만한 스케일의 배우가 아니었지.

그러면 어떤 식으로 축소가 되어야 할까.

"국회에서 뭔 일을 하려나. 그래서 내가 방패막이 되는 건가."

남북정상회의 같은 거나, 모 그룹의 탈세나, 아니면 이상한 정책이 결정된 거라든가.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시민들이 반발할 만한 일을 정부에서 할 때 고의적으로 터트리는 스캔들 말이다. 그런 종류로 치기엔 스케일이 좀 작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 말고 영도는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아니다.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이미 터져버린 일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굴 게 뭐야. 터져있으니 막는 일만 남았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 간에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를 하는 것도 필요했다.

영도는 재차 화면에 집중했다. 지금보다 어린 자신이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영도는 필사적이었다. 이 작품에 모든 걸 걸었다. 이게 아니면 더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매달렸고, 성공했다.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 이후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고, 넘어진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고 않고 오로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깨닫는다. 이번 일은 나름 고르지 않았던 코스에 생긴 하나의 돌부리라는 걸 말이다.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는 코를 씰룩거렸다. 킁킁 거리고 주변의 냄새를 맡던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지그시 바라보던 영도는 수인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너 말이야. 향수 같은 거 쓰냐?"

"향수가 뭔데요."

".....말을 말자. 촌닭을 데리고 내 무슨 말을 해."

우습게 보는 듯한 말을 하고 나서 영도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상태로 화면을 주욱 보는가 싶던 영도는 아예 수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솔직히 말해. 뭔가 뿌리고 있지? 그게 아니라면 바르고 있는 거라든가."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가리키면서 묻는 말에 수인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도의 손을 옆으로 밀어냈다.

"아무 것도 안 바르고 뿌리는 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 냄새는 뭔데?"

"냄새요?'

묻는 순간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주춤하나 싶던 수인은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봤다. 오늘 새로 입은 옷이었다. 달리 냄새가 날 리가 없지만 신경 쓰여서 바로 코를 뗄 수 없었다.

굳은 얼굴로 킁킁거리는 수인을 본 영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악취가 아니고 좋은 냄새가 나서 묻는 것 뿐이었다.

숲의 향기라고 해야 하나. 전혀 오염이 되지 않는 청정한 향이었다. 처음에는 미묘하게 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정말은 집 안에 들어설 때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말았다. 수인이 지금처럼 이상하다는 듯 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너는 뭔 소리를 하는 건데? 그리 묻는 눈빛이었다. 영도는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아니면 됐어."

옆에 놓인 쿠션을 무릎 위에 올리고는 꼬옥 끌어안는다. 그 위에 턱을 올린 영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답지 않게 귀여운 얼굴이었다.

영도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수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첫사랑은 누구에요?"

"또 무슨 말을 묻는 거야."

"고모랑 전화할 때 그렇게 말했잖아요. 신경 쓰여서 그래요. 형의 첫사랑에 대해서 말이에요."

"왜 궁금해? 너 나한테 관심 있냐?"

"네."

"......"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당혹스러운 듯 쳐다보는 영도를 앞에 두고 수인은 차분히 답했다.

"형이잖아요. 형처럼 잘난 사람의 첫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요."

뭐야. 그런 거야.

첫사랑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 듣게 되자 괜히 김이 빠진다. 고작 그런 이유라면 묻지를 말라고. 그리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영도는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별 거 아니야. 특별할 거 하나 없는 평범한 일이야."

"첫사랑하고는 아직도 만나고 있어요?"

"첫사랑이라고 했잖아. 그건 만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애틋한 추억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거야."

그냥 여기까지 라는 느낌이었다. 이쪽 첫사랑에 대해서 수인에게까지 일일이 말을 할 필요가 뭐 있나 싶었던 거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건 참 이상해서, 수인이 집요하게 물어보면 말하기가 싫을 텐데 저렇게 입 다물고 있으니 입이 근질거린다. 결국 영도가 먼저 말을 꺼내게 되었다.

"내가 중학생 때였지 아마? 할머니 생신이라고 해서 내려갔다가 한 여자애를 만났지."

"여자애요?"

옆에서 날아오는 의문에 영도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간신히 말을 할 기분이 들었는데 중간에 웬 잡음인가 싶었던 그는 수인을 흘겨봤다. 

"내가 말 할 때마다 그렇게 태클 걸 거냐? 그러면 나 더 말 안 한다?"

"이제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

수인은 입을 다물었고 영도는 영 미덥다는 시선을 보냈다. 말을 또 할까 말까. 그리 생각하는 듯 눈을 흘기던 영도는 팔짱을 끼었다. 조금씩 흐릿했던 예전 기억이 선명해졌다.

"하여튼 만났어. 하얗고 작고 귀엽고, 정말 너무너무 사랑스러웠지. 지금은 흐릿하게만 기억에 남아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이미지였어. 혼자서 울면서 외롭게 있는데 순간적으로 보호해주고 싶은 거야. 상황만 된다면 당장 데리고 오고 싶었지. 하지만 결국 추억으로만 남았어."

영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새삼 그때 일이 떠오르면서 씁쓸해졌다.

"다 찾아봤는데도 어른들은 여자애는 없다는 똑같은 말만 하는 거야. 누군 내가 헛걸 봤다고 하는데 그 앞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누굴 좋아해본 적 없던 내가 처음으로 결혼까지 생각을 했던 여자애였는데. 결국 그렇게 끝나버렸지. 아쉽게도 말이야. 제대로 컸다면 분명 대단한 미인이 되었을 텐데."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싶었다. 그때 느꼈던 풋풋한 감정은 지금으로선 다시 느끼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지금은 어떻게 자랐을까. 주변 사람들이 암만 아니라고 해도 영도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 잡았던 아이의 손은 너무도 따스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훈훈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있던 영도는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옆을 돌아봤다. 수인은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음 상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영도의 한쪽 눈썹이 당장 위로 올라갔다.

"너 사람한테 물어놓고는 왜 들은 채도 안 하는 건데?"

"듣고 있었어요."

"TV만 보고 있는 주제에 윌 들었다는 건데?!"

"이것저것 알아서 잘 들었어요."

"이게 정말-."

사람을 농락하는 거냐. 이제는 아주 가지고 노는 구만.

그냥 한 대 때려줬으면 좋겠다. 실제로도 그리 해볼까 하는 마음에 주먹을 쥐지만 그걸로 수인을 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나 싶던 영도는 코를 씰룩거렸다. 어디선가 묘한 숲 냄새가 났다.

"역시나 너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

재차 시작된 이상한 냄새 타령에 수인은 반사적으로 셔츠를 잡아 앞으로 당기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매끄럽게 이어진 뒷목의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영도는 흠칫하고 놀라며 수인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밀어냈다.

"옆으로 좀 가봐."

영도는 다리를 주욱 뻗으려 했고 앞으로 몸이 밀렸던 수인은 버티려 했다. 하지만 틈새를 노리고 발가락을 밀어 넣는 영도의 공격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몸을 물리면서 수인은 반쯤 몸을 눕히고 있는 영도를 쳐다봤다.

"자리 많잖아요. 왜 이래요."

"시끄러워. 이거 내 돈 주고 산 내 소파거든? 싫으면 바닥에 앉던가."

이렇게 치사할 수가. 어린애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거라며 수인은 굳은 눈으로 영도를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뜰 따름이었다. 결국 수인은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주욱 뻗은 영도는 소파에 누웠고 만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게 길게 가진 못했다. 눈을 가늘게 뜬 영도는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수인을 확인했다. 

너무 했나? 이미 소파 위에서 쫓아내고서 하는 후회 치고는 늦은 감이 있었다.

똑바로 누워서 배 위에 양 손을 올린 영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자꾸만 수인을 흘깃거리고 보게 된다. 그 너머로 자신의 얼굴이 크게 보이고 있었다.

내리는 빗 속에서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시끄럽네. 영도는 재차 눈을 내리떴다. 수인의 뒷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있나 싶던 영도는 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수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 했지만 직전에 멈추었다.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영도는 손을 주먹 쥐었다.

웅크린 그는 눈을 감고 킁킁 거렸다. 냄새가 났다. 수인의 냄새였다.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날 수 있는 거지. 점점 편안한 얼굴이 된 영도는 이윽고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TV에 집중하는 척을 하고 있던 수인은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소파 위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영도가 곯아떨어져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잠을 자도 이렇게 지친 모습으로 자는지 모르겠다.

영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굴러다니던 이불을 안아들고 와선 영도의 위에 덮어줬다.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영도가 이불 쪽으로 고개를 숙여온다. 그리고는 재차 고른 숨을 토해내는 걸 확인한 수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도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던 수인은 손을 들었다. 조심스레 영도의 얼굴을 더듬었다. 머리카락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넣고 위로 들자 사락거리며 가느다란 머릿결이 떨어진다. 안쪽으로 조금 더 손을 넣은 채로 영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얼굴을 내밀었다. 영도의 뺨 부근에 입을 맞추고는 바로 고개를 떼어낸 수인은 그를 내려다봤다.

'한 여자애를 만났지.'

역시나 여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수인은 어렸을 적의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시골 산골에서 생활을 하느라 피부도 많이 탔고 남자 느낌이 확실하지만 어렸을 땐 아니었다. 바지를 입고 가도 여자애로 오인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예쁘장하게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왼쪽 눈이 조금 엷은 색이었기 때문에 오드아이라는 것도 잘 모르던 때였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색의 대비가 점점 또렷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울고 있었다. 그 때의 모습은 영도에게 아련한 첫사랑 정도로 기억되어 있었다. 이쪽과는 비슷한 것 같아도 다른 점이 있었다.

영도가 할머니와 어른들 앞에서 '여자애를 봤다니까요!'라고 시끄럽게 굴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수이은 숨어있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때에도 알았던 거다. 이쪽을 여자애로 생각하는 영도에게 모든 걸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의지할 곳 없는 어린 남자애 같은 걸 누가 좋아할까 싶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도 들지만 그 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한없이 자신감이 결여되고 스스로가 부족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단단한 껍질을 만들고는 그 속에 틀어박히려고만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한 일이었다 싶었다. 적어도 영도의 안에서 그 때의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짤막한 한숨을 쉰 후, 수인은 소파로 등을 기댔다. 재차 드라마에 집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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