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앞으로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손에 핸드폰을 들고는 연락 취하기에 바쁘다. 사무실로 연락을 취하거나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려서 어떻게든 기사화 될만한 건수를 낚으려는 거였다. 개중 몇몇은 상상을 기반으로 한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거짓말로 시작해도 밀어붙이고 지속적으로 내보내면 믿는 게 요즘 사람들이었다.
이유라에 대해선 어느 정도 생각은 해두고 있었다. 드라마가 시작할 테니 언플도 있을 거라고 각오를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나 기분이 안 좋을 줄은 몰랐다.
"인상 좀 풀어. 회식 참석 못해서 그래? 다들 이해할 거야. 실제로 그렇게 기분들 나빠하지도 않았잖아."
타이밍 좋게 터진 스캔들에 알거 다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속사들끼리 말이 오갔나 보군.' 정도로 생각을 하곤 했다. 잠잠해지면 다음에 따로 만나자는 말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영도를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거다.
용한은 1.8리터 짜리 콜라를 들고 벌컥벌컥 마시면서 영도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까처럼 계속 굳은 얼굴이었다. 저러고 있는다 해서 달리 해결 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풀고 있어. 어차피 한달이야. 지나면 잠잠해져."
"누가 터트린 거야."
"낸들 아나. 하지만 짐작 가는 구석은 있는데."
사장 시경이 바로 떠올랐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영도도 충분히 짐작을 할 만한 구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영도가 진지한 얼굴을 함에 따라 마냥 콜라를 탐할 수 없었던 용한은 그걸 옆구리에 끼고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원래 이쪽 바닥이 그렇잖아. 그리고 유라 정도면 괜찮지. 서로 밑지는 장사가 아니야."
"내가 그런 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화를 낸다고 생각해?"
바로 돌아보며 차갑게 내뱉는 말에 용한은 딸꾹질을 했다.
"그러면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됐어. 말 안 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간 영도는 사장실로 향했다. 데스크 쪽에 앉아있는 인예는 양 손에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평소 말 많이 하면 입가 주름 생긴다며 싫어하던 그녀는 지금 완벽한 프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고 계셔서요. 따로 연락처를 알려드리는 건 곤란하고 성함과 연락처 남겨주시면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쎄요. 워낙에 스케줄이 바쁘신 분이라 따로 인터뷰를 하긴 힘드실 것 같은데요. 아니요. 원혁씨에 관해서는 그쪽 팀과 통화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전 단지 비서일 뿐이니까요. 제가 뭘 알겠어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확실하게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아, 네. 그렇지요."
동시에 두 사람과 통화를 하는데도 어색함이 없었다. 매끄러지듯이 전화를 받던 인예는 영도를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사장실 문을 가리켰다. 안에 있으니 들어가 보라는 거였다. 영도는 당장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 왔어?"
물음과 함께 시경은 의자를 뒤로 돌렸다. 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목티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그래봤자 머리는 여전히 금발이고 화려한 귀걸이를 한데다 팔찌에 반지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책상 위에 한 손을 올린 시경은 문 앞에 돌처럼 굳어있는 영도를 확인하고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화났쪄요?"
"미친 거 아니야?"
누가 그런 혀 짧은 소리를 내라고 했어.
엄청 싫은 듯 변하는 영도의 얼굴에 시경은 입을 다물었다. 영도는 시경의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이게 누가 한 짓거리야?"
"난 아니야. 그쪽에서 한 짓이겠지."
"너는 정말로 1g도 개입되어 있지 않은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
집요하게 캐묻는 것에 시경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원래 다 얽혀있는 바닥이야.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 드라마 방송 시작하고 한 중간 즈음부터 종식 되겠지. 그냥 무시하고 말아."
"무시? 무시라고?"
되묻는 목소리는 잔뜩 굳어 있었다. 노골적인 분노와 불쾌함을 드러내는 영도를 앞에 둔 시경은 달래듯 말했다.
"네가 왜 화를 내는지 알아.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난 괜찮다. 연기력 논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나한테 왜 이런 오명을 씌우는 건가 싶은 거겠지? 스캔들 없이도 드라마 시청률 잘 나오게 할 자신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이쪽에서 한 일이 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안 그래?"
입을 다문 시경은 영도를 바라봤다. 어때? 내 말이 맞지? 그리 묻고픈 듯 바라보는 시선에 영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다음 순간 그의 입을 타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말이 그리도 주절거리면서 많은 거야. 헛소리 작작하시지."
내뱉듯 말을 한 영도는 시경의 앞으로 가선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시경을 바라봤다. 설마하니 저 품 안에서 총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영도가 꺼낸 건 프린트 물이었다. 던지듯이 책상에 내려놓으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이에 인쇄된 것들을 확인한 시경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이게 뭐?"
"이게 뭐라고?"
시경이 한 말을 고대로 따라하면서 영도는 사진 한 장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왜 이 사진인 건데?"
이유라와 스캔들이 났으면 그 여자하고 이쪽 사진이 찍혀야 했다. 하지만 기사가 되어 나온 건 이유라가 아니었다. 어제 저녁 수인을 업고 있는 장면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수인을 업고 맨션까지 들어가는 사진들. 멀리서 찍은 데다 수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뒤쪽인지라 남자인지 알 수 없었다. 기자들이야 정확한 건 알바 아니었다. 대충 비슷해서 그림이 나올만한 거면 그걸로 땡인거다. 그래서 찍힌 게 이 사진이었다.
며칠 동안 잠복해 있다가 나온 작품인 거겠지. 하지만 놈들은 분명 수인이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을 터였다. 들키면 비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것임을 아는데도 시도를 한 것에는 급하게 사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이나 며칠 안에 스캔들이 터질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아니면 미리 사주를 받던가 말이다.
"버스 타게 한 건 일부러 그런 거냐."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일부러 시키겠어. 오해야."
"오해? 오해라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시경에게 있어 오해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게 계획이고 고의일 터였다.
그래. 지금 이상할 정도로 정색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이쪽 바닥에선 그저 흔하디 흔한 일로, 이러다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질 만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짜증이 나고 쉽사리 안정을 찾을 수 없는 건 이 사진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촌닭이라니. 촌닭 사진이 걸려서 무슨 이득이 생긴다고. 그 전에 이번 일로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너 진짜. 죽는다?"
목을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음산했다. 그걸 시경이라 해서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금은 놀란 듯 숨을 죽인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 건드리지마."
입을 다문 영도에게서 완고함이 풍겼다. 다른 때하고는 다르구나.
그제야 그걸 깨달은 시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수인이한테 좋을 일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은 하고 싶어서 난리인 일이야. 명성도 얻고 돈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그 녀석의 의사는 아닐 거 아니야. 사람들 머리 꼭대기에서 서서 조종하는 게 네 특기인 건 알지만 그 녀석은 안 돼. 촌닭 건드리지마. 앞으로 이 일이든 다른 일이든 그 녀석하고 관련 된 문제가 생기면 너랑은 정말 끝이야. 나 다신 너 안 본다."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눈으로 점점 더 힘이 들어간다. 주먹을 휘두르지만 않았지 정말은 열대 정도는 후려갈긴 이의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살벌했다. 영도가 한 번 돌면 못 말리는 부분이 있다는 걸 잘 아는 시경이었다.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시경은 진정하라는 듯 양 손을 위로 들었다.
"더럽게 무섭게 구네. 알았어. 안 건드릴게. 그러면 되잖아."
안 건드린다는 말을 하는데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 인간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건성으로 말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정말 알았어?"
"알았다니까 나도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이야. 이런 일 안 생기도록 할게."
미소가 사라진 시경은 말간 눈으로 영도를 바라봤다. 내 눈동자를 바라봐. 난 진실만을 말하고 있어. 그런 어필을 하려는 듯 싶지만 넘어갈 영도가 아니었다.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안 그런 척 하다가 뒷통수 치는 것도 가능한 인간이니 말이다.
쉽사리 눈에서 힘을 빼지 못하는 영도를 본 시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소재 발굴도 좋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너야. 그러니 날 믿고 안심하도록 해. 그보다 우리는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시경은 한쪽에 둔 서류철을 영도 앞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아직 대화가 정리가 되지 않은 마당이었다. 그런데 또 뭘 내미는 건가 싶었던 영도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이건 또 뭐야?"
"연말 시상식 스케줄."
넘겨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말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영도는 차트를 받아들였다. 남의 일이 아니고 이쪽 일이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기도 했기 때문에 차트를 살피는 눈길이 꼼꼼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영도는 이상한 부분을 감지해냈다.
"다 참석하라고?"
"조금씩 가서 얼굴 도장 찍으면 돼. 그리고 이건 시상이 확실시 되는 쪽이야. 이건 예비 리스트인데 보고 몇 개는 탈 수 있도록 로비를 넣을 거야.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수야."
시경은 차트를 넘겨 영도가 보기에 좋도록 했다. 내밀어진 면을 확인한 영도의 얼굴로 의혹이 서렸다.
"대상? 이번에도 또 공동 수상 아니야?"
"단독으로 상 탈 수 있어."
공동수상이라면 줘도 안 받는다며 시니컬한 웃음을 짓던 영도이나 그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뭔 말인가 싶었던 영도는 시경을 봤다.
"우리가 내세우는 작품은 상반기 쪽이라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당시에 평판이 좋았어. 젊은 애들이나 노년층까지 두루두루 인기를 끌었다. 각종 프로그램 등에 네가 출연한 드라마 장면을 조금씩 내보내도록 하고 패러디 같은 걸 만들어서 인터넷에 뿌리면 곧 관심을 모을 수 있을 거야. 2주 안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받아서 그걸 대상으로 바꿔치기 할 거야."
영도의 입장 상 흘러 넘길 수 없는 말들이었다. 지나치듯 하는 말이지만 시경이라면 이미 진행을 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걸 알기에 대화에 동조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은데......."
"솔직히 대답해.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이 대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영도는 입을 다물었다. 알게 모르게 긍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 보라는 듯 시경은 야유를 하는 눈빛을 던졌다.
"연기만 잘하면 뭐해. 흥행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화제가 되기를 해, 해외판권이 많이 나가길 해. 거기서 보면 단연 네가 일등이야. 네가 탑이라고. 너 말고 다른 사름이 대상을 타다니. 그건 말도 안 돼지."
시경은 영도의 손목을 잡았다. 부드러운 것 같으나 마치 끊을 수 없는 족쇄처럼 영도를 붙잡고는 꿀처럼 달콤하게 들리는 유혹을 늘어놓았다. 덫에 걸려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말이다.
"내년에는 도약하자. 더 큰물에서 놀자고. 지금 이건 그 발판이라고 생각해. 어디까지나 대상을 위해서 꾸미는 모든 일들의 초석일 뿐이야."
이유라 일도 그저 스캔들로 이용을 해버리겠다는 건가. 저쪽의 의도처럼 말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저쪽이 꾸민 것 같아도 실상은 시경이 뒤에서 손을 쓴 걸지도 몰랐다. 저들은 모르는 동안 이용을 당하는 입장인 거다. 시경이라면 그리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애초에 속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상을 바라지?"
속삭이는 목소리 안쪽으로 미소가 서린다.
이쪽의 속을 다 읽고 있다는 듯 구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입에 담고 싶진 않았다. 이쪽에 있는 이상 한 번쯤은 바라게 되는 상이었다. 그걸 서른이 되기 전에 손에 쥘 수 있는 거였다. 더 큰 도약으로 인해 어떤 일들이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컸다.
할 수 있을까보다는 나는 뭘 하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연예인이라는 것이 하나의 직업이라 인식하고 있었던 만큼 시경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묵묵히 있던 영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은 해보는 걸로 하자."
"좋았어."
시경은 정말 기쁜 듯 양 손을 주먹 쥐었다.
"그리고 촌닭을 이용해 먹을 생각하지마."
시경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음 상한 듯 굳은 얼굴이 된 시경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너무 집요하게 군다. 나도 한 번 말 하면 알아듣는 사람이야. 날 그렇게 못 믿어?"
"다른 사람 다 믿어도 넌 아니야."
"그렇게 과보호를 할 만큼 수인이가 중요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되지도 않는 말을 한다는 듯 영도는 당장 인상을 쓴 채로 시경을 바라봤다. 굳은 그 얼굴을 확인한 시경은 '그냥 말해봤어.'라며 웃었다.
그 미소를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묘할 정도로 속이 꼬이는 걸 느끼며 영도는 차트를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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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션 앞에 모인 기자들은 장기전으로 들어갈 생각인지 아예 텐트를 치기도 했다. 한쪽에 차량을 세워두고 거기서 끼니를 해결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번갈아 가면서 휴식을 취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취재를 하는 이들도 더러있었다. 그들 중 몇은 영도의 사진이 찍힌 자리를 탐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네 주민인 듯한 사람하고 취재를 하지만 그런다 해서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영도를 본 적이 있다는 사람 찾기도 힘들었다.
"원혁 안 들어오는 거 아니야?"
누군가의 말에 다들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벌써 4시간 째 기다리고 있어봤지만 원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진을 치고 있는 걸 알고는 맨션 근처로 얼씬도 하지 않는 걸까 싶었던 기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진을 친다고 오겠어? 이런 미개한 방법은 통하질 않아."
"하지만 이런 게 정공법이지. 혹시 알아? 중요한 정보를 줄만한 사람이 나타날지도 말이야."
"중요한 정보를 줄만한 사람? 어디 보자. 그런 사람이 있나?"
사내는 일부러 이마에 손을 대고는 주변을 살피는 듯 기웃거렸다. 그러던 차에 여기자가 등 뒤로 달라붙었다.
"아. 저기, 저기."
어깨를 치면서 오두방정을 떠는 동료의 행동에 기자는 인상을 쓰며 옆을 돌아봤다. '뭐?'라는 얼굴을 하고 있던 이는 가리키는 쪽에 서있는 인물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준수한 사네가 맨션 입구 쪽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걸 보아하니 맨션 관리인인 모양이었다.
맨션을 지키고 있으면 오가는 원혁을 여러 번 보지 않겠는가. 덧붙여 원혁이 집으로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의 정보도 파악할 수도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눈을 빛낸 기자들은 모두 경비 지용에게 달려들었다.
"실례합니다! 질문 좀 하겠습니다! 원혁씨가 사시는 맨션이 이곳이 맞지요?!"
한 사람이 말을 꺼내자 다들 경쟁적으로 녹음기를 내밀었다.
"혹시 맨션을 지키는 동안 원혁씨가 여자를 데리고 오는 걸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 여자가 이유라씨인 것 같진 않던가요?"
"아침 언제 나가서 저녁에는 몇 시에 들어오시는 겁니까?!"
"이유라씨하고는 주로 집에서 데이트를 하셨던 겁니까?!"
"오가는 여자들을 보고 묵인하는 동안 보는 이득 같은 건 없으십니까?"
아예 이유라와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이제는 데이트 장소를 맨션으로 확정짓는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기자들이 아니었다. 찌라시를 양상 하는 놈들이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있던 지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차금지 구역입니다."
"......응?"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기대한 대답이 아닌,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지용을 앞에 둔 기자들은 눈을 댕그랗게 뜬 채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 지용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주차금지 구역에 차를 대시고 텐트까지 치는데다 야외에서 음식을 해 드시다니. 모두 불법입니다. 10분 전에 시청과 경찰서에 전화를 해뒀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지용은 손목시계를 위로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도착하겠군요."
"......"
지용을 바라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벙 찐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마냥 멍청한 얼굴로 있을 수 없었다. 누군가 '주차 단속반이다!'라고 외치자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머리 위에 엉성한 사이렌을 달고 접근을 하는 하얀 미니 차량 앞에는 공무수행중이라는 검은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이런 젠장!"
이렇게 외근으로 나와도 추가적으로 월급 받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딱지 떼면 어마어마한 손해였다. 놀란 이들은 황급히 차로 달려갔다. 텐트를 치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둥지둥거리면서 좌악 빠지는 십 여명의 기자들을 확인한 지용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맨션 입구로 들어서자 바로 옆에 붙어있던 경비처소에서 최씨 영감이 얼굴을 내밀었다.
"해결했어?"
"피라미들 처리는 껌이지요."
"그래. 잘 했어. 그보다 한 게임 더 할까?"
"아니요. 이제부터 근무 시간이라서요. 다음에 오겠습니다."
손을 위로 든 지용은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최씨 영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면 나도 슬슬 일이나 해볼까.'라면서 창문을 닫았다. 모자를 새롭게 쓰고 팔짱을 끼는 최씨 영감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금 모습만 보면 오두방정을 뜨는 애로 영감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직 후 지용은 위로 올라갔다.
지금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뒤로 오는 것들은 아닐 수도 있었다. 인맥을 사용해서 로비까지 들어오는 이들의 경우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해야하나 싶었던 지용은 진지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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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스타 원혁씨가 촬영하고 있는 연애시대의 첫방송 일이 잡힌 가운데 동일 드라마에 여주인공역으로 나오는 이유라씨와의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촬영하는 동안 핑크빛 무드인 두 사람이었던 만큼 지인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인데요-.]
[선남선녀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나 각자 팬들이 많은 만큼 인터넷 상으로 올라오는 글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이유라씨의 과거 아이돌 활동 시절의 사진이 나돌면서 인신공격성 댓들이 달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다른 사진인데요. 이 사진으로 보면 두 사람이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물론 옆으로 다른 일행인 것으로 보이는 인물도 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스타 커플이 없었던 만큼 원혁과 이유라의 결합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지닌 셈이지요. 지금까지 열애설이 거의 없었던 원혁이다 보니 화제성은 충분하고 일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시청률을 노린 계약 커플이다-라는 설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찍힌 사진에 대한 의견들도 분분한데요. 최근 인터넷상을 떠도는 사진을 두고 합성이다. 이유라 본인이 아니다. 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조금 더 할 말이 남아있는 듯 싶지만 수인은 TV를 꺼버렸다. 기운 없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인은 고개를 숙였다.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은 후 가만히 있던 수인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짜증나.
문득 드는 생각이 수인의 속을 더 시끄럽게 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연예인이니 이런 열애설 하나가 특별한 건 없었다. 평범하게 터질 수 있는 사건이라 치부를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영도와 이쪽은 사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벽. 셔츠를 잡아 가슴 위까지 올린 영도의 굳은 눈빛이 떠올랐다. 가슴을 확인한 그는 잠이 깬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아래에 누워있는 게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아닌 이쪽은 그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일까. 그래서 바로 셔츠를 내려버린 것일까. 당장 위에서 떨어져 밖으로 나가버린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열애설이라니.
원래 사람이 가벼웠던 걸까? 정말로 이유라라는 여자와 사귀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모종의 계약 관계인 걸까. 그렇게나 잘난 사람이었다. 여자 하나, 둘 정도는 있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소파에 앉아있던 수인의 몸이 옆으로 스르륵 넘어갔다. 푹신한 소파에 누운 수인은 멍하니 있다가 눈을 감았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 마냥 짜증스러웠다. 왜 이렇게 속이 시끄럽고 안 좋은지 모르겠다며 수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겨났다.
"팔자 좋구나."
움찔하고 몸이 흔들렸다. 바로 반쯤 몸을 일으킨 수인은 소파 뒤를 돌아봤다. 소파 위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서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영도였다.
"언제 왔어요?"
"방금 들어왔잖아. 소리 못 들었어?"
못 들었다는 듯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순순히 고개를 젓고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영도는 누그러진 얼굴이 되었다. 그는 수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 아침에 나올 때 눈을 감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이리 보니 괜찮은 듯 싶었다. 영도는 수인의 이마에 손을 집었다.
"이제는 열이 안 나나?"
"........"
별 생각 없이 움직였던 영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수인을 확인하는 순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내가 왜 이놈의 이마에 손을 대었던 거지?
적잖이 당황한 영도는 급히 손을 놓았다.
"여, 열이 나나 안 나나 확인해보려는 것뿐이야."
"알아요. 고마워요."
중얼거린 수인은 영도의 손이 닿았던 이마에 손가락을 댔다. 눈을 내리뜬 수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재수 없다 생각하는 걸까. 영도는 조심스레 수인의 옆으로 가선 끝부분에 앉았다.
다리를 올린 채로 있던 수인은 옆에 앉은 영도를 쳐다봤다. 입을 다문 채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는 굳은 얼굴이었다. 원래 일정대로 회식을 하지 않고 일찍 온 것만 봐도 지금 어떤 상황인지 대략이나마 알 것 같았다.
"괜찮아요?"
한마디 하고 난 후 수인은 아차 싶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곧이 곧바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틱틱 거릴 게 분명한데 괜히 말 걸었다 싶었던 수인은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리떴다.
"괜찮아."
움찔하고 눈가가 떨린다.
수인은 당장 고개를 들어 영도를 바라봤다. 턱 부근에 손을 댄 채로 영도는 웅얼거렸다.
"이런 건 의레 있는 일이야. 특별할 거 하나 없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하기는 하나 얼굴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그의 미간으로 선명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속이 복잡한 거다.
"밥 먹었어요?"
"대충 먹었어."
"차려줘요?"
"지금은 생각 없어."
대답을 하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바깥에서 상당히 볶인 모양이었다. 걱정이 된다. 실제로는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로 사귀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냐?"
이번 말은 정말 듣기 싫었는지 영도의 얼굴에 노골적인 짜증이 서렸다. 하지만 빤히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영도는 아차 싶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 내가 왜 그런 여자하고 만나야 하는 건데."
그 순간 알게 모르게 수인의 얼굴로 안도감이 서린다. 마음이 놓이는 듯 눈꼬리에 들어간 힘이 풀어진 수인은 재차 물었다.
"TV에서 나오는 대로 언플인 거예요?"
"그런 말도 나왔어?"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보니까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꽤 예리하게 분석을 들어가는 곳도 있네. 무작정 연애설로 몰아넣지 않고 말이야."
"곧 드라마가 시작하니까 시청률을 노린 계약 연인 사이가 될 수도 있다고도 하던데요. 그런 식으로 해야만 하는 거예요?"
"뭐, 드라마가 재미있다 암만 말이 많아도 시청률이 안 나오면 말짱 꽝이니까. 광고 수익도 안 나고."
중얼거린 영도는 지금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무엇보다 이쪽 관련으로 수인과 이 정도로 대화가 통할 줄은 몰랐던 영도는 외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수인에게 내밀었다.
"이거나 받아."
던져서 받기는 하는데 이건 뭔가 싶었다. 손바닥 반 만한 길이에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튜프형의 약이었다. 겉면이 영어로 적혀 있어서 하나도 모르겠다. 수인은 그걸 만지작거렸다.
"이건 뭐예요?"
"주부습진에 좋은 거야."
"......주부습진이요?"
"네 손 말이야."
"......."
생소한 단어다 싶어서 가만히 있었던 수인은 영도의 지적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오므렸다. 주먹을 쥐어서 피하려 했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영도의 진지한 눈빛을 보는 순간 숨길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영도의 관리가 잘 된 손과 달리 수인의 손가락 끝은 트고 갈라지고 엉띵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안 일을 도왔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와 살고 있을 때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던 일이었으나 그게 영도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마낭 손을 뒤로 해서 숨길 순 없기 때문에 수인은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꾸벅였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래도 이런 걸 준비할 줄도 알고. 참 의외였다.
수인은 연고를 만지작거리면서 겉면에 적힌 걸 확인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진 않았다. 자세히 연고를 살피는 모습에 알게 모르게 안도가 됨을 느끼며 영도는 소파 한쪽에 다리를 올렸다.
"넌 집에서 하루 종일 뭐하냐? 안 지겨워?"
"아직은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요. 무턱대고 나갔다가 누가 또 쌍심지 켜면서 성질부리면 어떻게 해요."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하냐. 정말 재수 없겠다."
"네. 간간이 너무너무 재수 없을 때가 많아요."
그냥 모르는 척 말을 했던 영도는 수인의 대답에 구겨진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거나 성질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왜일까. 지금 수인과 대화를 나누는 게 참 재미있게 여겨졌다. 소파 뒤로 목을 기댄 영도는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노랭이한테는 말해뒀으니까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다."
수인의 시선을 느꼈다. 지금 하는 말을 수인이 어떻게 생각할 지는 신경 쓰지 않기로했다. 그저 수인에게 시경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뱀술이니 뭐니 하는 걸 마신 건 자랑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시는 그런 놈 쫓아가서 낭패 보지 말아라."
"솔직히 말해서-."
가만히 있던 영도의 고개가 수인 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이쪽을 바라보자 수인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따라가면 형 얼굴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여기저기를 다닐 줄은 몰랐어요. 한 번 당했으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내 얼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따라간 거라고? 왜?"
수인이 한 말 중에서 가장 귀에 들어오는 말이었다.
수인 쪽으로 몸을 돌린 영도는 굳은 얼굴이었다. 일견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영도를 앞에 둔 수인은 당황했다.
"잘 모르겠어요."
"......"
수인의 대답에 영도는 실망하게 되었다. 그게 뭐야. 그리 생각을 하다 말고 왜 굳이 실망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던 그는 어색하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재차 앞으로 몸을 돌리고는 리모컨을 들었다.
TV를 키려다 말았다. 지금 틀어봤자 나오는 방송은 빤했다. 정말 성가시구나. 그리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소파에 축 늘어져 버렸다. 마치 시체 같았다. 완전히 지친 샐러리맨의 모습 같기도 했다.
지쳤으니 쉬고 싶을 터였다. 하지만 왜일까. 지금의 영도에게라면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수인은 말했다.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요."
"공부? 대학 진학하려고?"
예상대로 바로 반응을 보이는 영도를 확인한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 다 하는 거고, 그리고 공부는 싫지 않았으니까."
"나쁘지 않네. 아니. 괜찮네."
시경이 데리고 다닌 것 때문에 헛꿈에 부풀어서 이쪽으로 들어오겠다 하면 어쩌나 싶었던 영도에게 있어 반갑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그래. 아직 21살이었다. 이쪽은 특차로 들어가서 어영부영 대학 졸업증을 따긴 했지만 수인은 경우가 달랐다. 짹짹거리긴 해도 성실한 것 같으니 공부를 한다 하면 잘 할 것 같았다.
"사이버 대학 같은 걸로 갈 거야?"
"아니요. 지금은 늦었으니까 안 되겠지만 내년에 수능 봐서 제대로 진학하고 싶어요."
"나이 먹어서 가면 적응하기 힘들 텐데. 그냥 사이버 대학가는 편이 괜찮지 않겠어? 그 편이 졸업장 따기도 훨씬 더 쉬워."
"제대로 코스 밟아서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요."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똑바로 바라보는 수인에게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지금은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응시하는 순간 영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심장 한 구석으로 뭔가가 깊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 숨이 막혔다가 조금씩 토해낼 수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영도는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겠다. 나쁘진 않아."
"만약에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면......."
"학원이나 알아봐야겠지. 재수 시작하는 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 해. 나라도 너 공부 정도는 시킬 수 있으니까."
영도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의외로 순순히 영도가 수긍을 하고 있었다. 혹여라도 '혼자서 잘 해봐라.'같은 말을 한다면 더는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을 터였다. 가족이라 해도 돈 이야기는 민감해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영도의 순순한 반응에 수인은 안도를 했다.
"고마워요. 나중에 졸업하면 다 갚을게요."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사촌 형으로서 동생 대학 정도는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일하면서 버는 돈이 도대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으나 곧 사라졌다. 예전에 살림비용 때문에 수인에게 치사하게 굴었던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지금은 이래도 그 때는 그랬지. 지금 생각해도 영 창피한 기억이었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이던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눈을 내리뜬 채로 있었다. 사내 둘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어지간히 칙칙했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영도는 수인의 얼굴에서 쉬이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음 푹 놓고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렴풋이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지금 말고 예전에 수인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혹시 말이야. 전에 우리 만난 적 있었나?"
수인은 영도를 돌아봤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놀람을 담은 그 눈빛에 영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어디서 봤겠어. 내가 착각을 한 거겠지."
그 순간 수인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입이 일자로 다물려지고 미간으로 미미한 주름이 생겨났다. 실망한 그 눈빛에 뜨끔해진다. 본의 아니게 수인을 실망하게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수인과 마주하는 게 불편해진 영도는 아예 소파 뒤로 돌아갔다.
"나 씻고 나온다."
수인을 보지도 않고 영도는 당장 욕실로 들어갔다. 물 트는 소리가 나자 수인은 한숨을 쉬며 다시 소파에 누웠다. 아가까지 영도가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그 자리가 뜨끈뜨끈했다.
'전에 우리 만난 적 있었나?'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영도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직후 나오는 말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역시나 이쪽은 기억하지 못하는 거로구나. 그럴 것 같았다.
수인은 아래로 눈을 내리뜨고는 중얼거렸다. '치사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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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다 하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영도는 거울 속을 확인했다. 막 샤워를 마친 사내는 섹시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지그시 거울 속을 바라보던 사내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몸을 좌우로 돌렸다.
요즘 운동을 안 하고 있는데도 불구, 복근은 여전했다. 하긴 오랫동안 운동을 한 몸인데 며칠 못했다고 그 사이에 풀어질 리도 없고 말이다. 팔을 들어 근육을 확인한 후 영도는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잘생겼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젖은 머리를 잡아 뒤로 넘긴 영도는 턱을 위로 들었다.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래. 괜찮아.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이 일견 왕자병으로도 여겨질 수 있을 만 했지만 어디까지나 영도는 진지했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얼굴을 보고 있는데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 왔어요."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영도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며 물었다.
"누군데?"
"모르겠어요. 안 살펴봤어요. 안 끊어지고 계속 울리고 있어요."
설마 기자 같은 건 아니겠지. 암묵적으로 기사와 관련이 된 전화는 하지 않기로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화를 하는 놈이 있을까 싶었던 영도는 핸드폰을 뒤집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영도는 당장 싫은 소리를 냈다.
"켁. 엄마잖아."
"고모에요?"
수인이 앞으로 얼굴을 내민다.
"잠깐만 조용히 있어봐."
손가락 하나를 세운 영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같은 핏줄인 어머니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영도는 처음부터 핸드폰에 귀를 대지 않고 멀찍이 떨어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반대편으로 엄청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듣기 싫은 듯 한쪽 눈을 감은 영도는 지금 츄리닝 바지만 입고 있었다. 상반신은 탈의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근육질 몸이 다 드러났다. 그걸 보던 수인은 고개를 돌리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던 수인은 손을 들어 본인의 배를 더듬었다.
밋밋하다. 영도하고는 달랐다. 도대체 얼마나 운동을 하면 저런 복근이 생기게 되는 걸까. 분명 1년 넘게 운동을 해야만 하는 거겠지.
손가락으로 배를 만지작거리던 수인은 잔에 물을 따랐다. 그러는 동안 영도는 멀찍이 핸드폰을 떨어뜨려놓고 있다가 '야! 원영도!'라는 외침에 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가까이 했다.
"네. 죄송해요. 무조건 제가 잘못 했어요."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긴 하는 거니?! 왜 이렇게 대답이 무성의해!]
"어머니.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그건 다 가짜에요. 애초에 전 사귀는 여자도 없단 말이에요."
[가짜면 왜 이렇게 난리인데. 주변에서 자꾸만 물어봐서 성가셔 죽을 것 같잖아!]
아들 열애설 보단 단순히 성가셔서 싫은 건가. 하긴 주변에서 난리인 거겠지. 평판을신경 쓰는 어머니이니 만큼 또래 친구들이 '어머나. 네 아들 이번에 스캔들 터졌더라.' 같은 말들을 해대는 게 싫었던 거다.
[너희 회사 사장은 뭐하는 사람이래? 왜 이런 거 하나 잡지 못하는 건데?]
"다 나름의 생각이 있는 거겠지요."
[여자랑 묶어서 화제를 만들어야지만 주목을 받을 만큼 내 아들이 한심했던 거니?]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됐어. 너랑은 말하고 싶지 않아. 수인이나 바꿔. 너 애 잘 보살피고 있는 거지? 여자 만나느라 뒷전으로 두면 알아서 해.]
"엄한 소리 하지 좀 마세요. 수인이 바꿀게요."
영도는 주방으로 걸어가 잔에 수저를 넣고 빙글빙글 돌리는 수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말은 안 해도 뾰루퉁한 얼굴로 '받아.'라고 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받으면서 수인은 수저를 빼낸 잔을 영도에게 내밀었다.
"마셔요."
"......뭔데?"
물으면서도 영도는 수인이 내민 잔을 받았다. 핸드폰을 쥐고 전화를 받는 수인을 한 눈으로 확인하면서 영도는 잔 안에 담긴 액체의 맛을 봤다. 시원하고 달큼하면서 새콤하다. 매실이었다. 할머니한테서 가지고 온 건가.
시원하고 맛있는 게 뱃속으로 들어가니까 괜히 기분 좋아진다. 영도는 의자를 끌어내곤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는 수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니요. 괜찮아요."
차분하게 전화를 받으면서 수인의 입술 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영도의 눈에는 무척이나 잘 보였다.
수인이 웃는 순간 영도는 마시던 것을 멈추었다. 정지된 채로 수인의 얼굴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정말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리고 형, 제대로 잘 생활하고 있어요. 방탕하거나 문란하지 않아요. 이번 일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네. 그럼요."
수인의 조근조근한 말에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영도로서도 수인이 저렇게 좋게 말을 해주는 게 의외였기 때문에 빤히 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어번 더 대화를 나눈 수인이 핸드폰을 돌려줬다.
"다시 바꾸래요."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폰을 받아들자마자 묻는 말에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수인이 하는 말이 있으니까 안심은 된다만 정말 성가시구나.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데. 스캔들은 좋을 게 없어. 그리고 너 일하는 데서 만나는 여자랑 사귀는 건 엄만 절대 반대다. 나중에 결혼할 마음이 들면 말만 하라고 했잖아. 알아서 참한 아가씨 찾아봐준다니까.]
또 이런 말인가.
아들이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수인이 한 말에 홀랑 넘어가는 게 괘씸하고 어떻게든 중매를 서서 장가 보내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어울리는 지인이라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복부인이나 사모님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성가셨다.
양가집 규수나 있는 집 여자라면서 도도하게 구는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봤자 결국 이쪽만 손해볼 터였다. 대충 넘기는 게 제일이었다.
"알았어요. 수인이 잘 보살피고 이번 일은 알아서 잘 해결할게요. 선이라니요. 그런 거 생각 없다니까요."
[네가 만년 이팔청춘인 줄 알아? 지금이니까 내가 안 나서도 선자리가 들어오는 거지 시간 지나봐. 인기는 물거품이야. 자꾸 뻗대지 말고 정신 차려 이것아.]
"그러지 말아요. 나도 결혼 상대는 신중하게 생각해서 고르고 싶다고요."
[누구로 고르려고? 달리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야 해요?"
[아들이 엄마한테 비밀이 어디에 있어. 당장 말하지 못하니?]
"내가 중학교 때 만난 내 첫사랑이랑 결혼할 거예요. 됐어요?"
너무 집요하게 구니까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아뿔싸 싶어서 입을 다물었지만 늦어버렸다. 침묵하나 싶던 수화기 반대편으로 폭발하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호호홋!'라고 밖에 표기할 수 없는 요란한 웃음소리에 영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나 죽겠네. 그런 얼굴이 된 영도는 혀를 차며 말했다.
"됐어요. 끊어요."
[어머나~. 아들. 너 정말 귀엽다. 어떻게 아직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데?]
"그래요. 실컷 놀려먹으세요. 일단 전화 끊겠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영도는 아예 핸드폰 약을 분리시켜서 식탁 앞으로 주욱 밀어냈다.
완전 자존심 상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잘못이긴 했지만 그렇게 비웃을 필요는 없잖아. 난 진지하단 말이야.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추억이란 말이다.
뚱한 얼굴로 있던 영도는 고개를 돌렸다. 수인이 차분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과 마주한 순간 영도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긴다.
"뭐?"
"첫사랑이 누군데요?"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입을 다무는 영도와 달리 수인은 재차 물었다.
"중학생 때 첫사랑이 있었어요?"
묻는 수인은 진지한 눈빛이었다. 수인의 독특한 눈빛은 그렇다 치고 이렇게 빤히 바라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마주 바라볼 수 없었던 영도는 어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게 있었어. 나 들어가서 쉰다."
영도는 등 뒤쪽을 긁적이면서 방 쪽으로 향했다.
"형."
"왜 불러?"
대답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영도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일말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는 완벽한 무표정. 즉, 연기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형 방에 있는 비디오랑 DVD 꺼내서 봐도 되요?"
"......내 작품들을 보겠다고?"
"혼자 집에만 있으면 심심해서 그래요. 조금만 보면 안 될까요?"
"상관없겠지. 꺼내서 봐."
쿨하게 대답을 하고 난 영도는 방으로 들어갔다. 수인이 뒤를 따라 들어와 작품들을 모아둔 장 앞에 서서 유심히 살펴봤다. 신경 쓰지 않고 난 옷이나 갈아입을 란다. 그런 느낌으로 바지에 손을 대던 영도는 수인이 뭔가를 끄집어내자 그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수인의 손에 들린 걸 본 그는 당장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건 안 돼!"
마치 매처럼 날아서 수인에게서 테이프를 빼앗아들었다. 양 손으로 잡은 테이프를 머리 위로 올린 채로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수인이 의아한 듯 바라봐온다. 영도는 어설픈 표정을 지었다.
"이건 데뷔 영상이라 안 돼. 엉망이거든."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니까 다른 거 골라."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생겨난다. 치사해. 흔히 내뱉는 말을 할 줄 알았으나 고개를 숙이곤 다시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수인의 손가락이 뭔가에 닿는 순간 영도는 재차 목청을 높였다.
"그것도 안 돼!"
수인이 빼내기 전에 손바닥으로 그걸 눌러버렸다. '이번에는 왜?'라고 묻는 눈빛에 영도는 고개를 저었다.
"찌질하게 나와. 게다가 3편에서 얻어맞아서 죽어."
"......그러면 이걸로."
"그건 안 돼! 엑스트라로 나온다고! 게다가 발음도 엉성하고 연기도 꽝이야!"
이번에는 아예 달라붙어서 막는다.
뭘 고르려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는다면 그게 뭔가 싶었다. 수인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직접 골라주지 그래요?"
"그럴까?"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영도는 장 앞에서 떨어져선 팔짱을 끼고 위, 아래로 곰곰이 살폈다.
뭘 고르려고 하면 다 태클이라 직접 골라보라고 농담 삼아 한 말에 이렇게 바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어서 수인이 물끄러미 보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영도는 시디를 한 장 꺼냈다.
"이걸로 봐. 신인 연기대상 탄 거니까."
신인 연기대상을 탄 것에 대한 자부심을 마구 드러내며 영도는 재차 말했다.
"재미있을 거야. 3부작 짜리라 부담스럽지도 않고."
제목은 '자전거 위의 풍경.'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웃고 있는 영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가 생겨났다.
영도가 아주 연기를 못한 거라고 해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수인은 그런 걸 전문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영도가 굳이 이렇게까지 긴장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꼭 연기를 잘 한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단순히 형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었을 뿐이에요."
달리 수인이 볼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꽂힌 테이프와 시디를 살피던 영도는 굳어버렸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가만히 있던 그는 느리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인은 '이거 볼게요.'라고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넓은 거실을 앞에 둔 수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얼굴의 반을 가렸다.
나름 용기를 내서 영도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가 이 눈동자에 어떤 식으로 반응을보일지 모르기 때문에 눈이 마주칠 때마다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도가 그걸 알아차릴 것인가. 의외로 둔한 사람인지라 모를 수도 있었다. 수인은 들고 있는 시디를 앞, 뒤로 살펴봤다.
어차피 오후까지 푹 자서 잠은 오지도 않았다. 잠이 올 때까지 볼 게 생겨서 좋다면서 수인은 TV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