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1)

멀리서 동이 트고 있었다. 소파에 똑바로 누운 채로 있는 영도는 뜬 눈으로 긴긴 밤을 지새웠다. 일이 있으니까 눈을 좀 붙여보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점점 정신이 맑아져서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잡혀 있더라. 마지막 촬영이 있기는 한데 단체씬이라 금방은 안 끝날 터였다. 이것저것 맞춰보고 한 장면을 만드는 작업이 원래 가장 어려운 거였다. 혼자서 완벽하게 연기를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니 말이다. 이번에 조연들 몇이 지방에서 올라온다 해서 오후에나 시작할 것 같다고 했는데.......

연락을 취하고 싶어도 핸드폰은 방 안에 있었다. 급한 일정이 있으면 집 전화로 연락이 올 텐데 잠잠한 걸 보아하니 오전은 한가한 모양이었다. 옆으고 몸을 돌린 영도는 저기 멀리로 보이는 방 문을 확인했다.

그 촌닭 지금쯤 눈을 떴을까. 일어난 그 녀석을 도대체 어떤 얼굴로 봐야하는 거지? 눈이 마주치면 뭔 말을 해야하는 거야. 긴장이 되어서 속이 쓰렸다. 아닌가. 배가 고파서 그런 건가.

멍하니 있다가 옆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냥 밥이나 먹을까나. 생각을 하니 실행으로 옮기게 된다. 일어난 영도는 등에서부터 뚜두둑-하고 울리는 소리에 신음을 삼켰다. 아파죽겠네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 영도는 비척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연 영도는 주춤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정리가 잘 된 냉장고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도는 절대로 사서 넣어두지 않을 식재료와 과일. 반찬통들이 그득했다. 맥주와 소주, 간단한 인스턴트 식품이 들어차 있던 예전의 그 냉장고가 아니었다. 계란까지 착실하게 들어가 있는 걸 본 영도는 중얼거렸다.

"대단하다."

우리 집 냉장고가 아니라 다른 집 냉장고가 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믿을 수 없어 눈을 깜박여도 변하는 건 없다. 멍하니 있던 영도는 일단 인에 든 김치통을 꺼냈다. 문을 열고 냄새를 맡자 특유의 쉰 냄새가 확 났다. 아침에 맡기에는 부담스러운 냄새인데도 순간 입 안으로 침이 고인다.

주먹으로 입술을 훔쳐 낸 영도는 그걸 옆구리에 끼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밥은 없나. 그러고 보니 전에 밥통 사달라고 그랬지. 아직 안 산 건가. 주변을 기웃거리던 영도의 눈에 동그랗게 뭉쳐진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뭔가 싶어 끄집어내자 주먹밥이었다.

"이런 것도 있었나."

굉장히 낯설었다. 하지만 일단 내 집 안에 있는 냉장고이니 내 것이 맞다. 그리 생각을 한 영도는 랩핑을 벗겨 그릇에 주먹밥을 두고 전자렌지에 넣고 돌렸다. 한 2분 정도 돌리고 꺼내자 제법 맛있는 냄새가 난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접시를 위로 들어 밥을 한입 먹었다.

"음-."

괜찮군. 입 안 가득이 밥을 문 채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김치통을 열고 김치를 꺼냈다. 길게 자른 김치를 밥 위에 올려서 손으로 집어먹으려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젓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김치로 돌돌 만 밥을 크게 한 입 먹었다.

"으으음-."

입 안에 밥이 들어가 있으니 큰 소리를 낼 순 없지만 이건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새콤하고 짭쪼름하면서 고소했다. 밥을 더 입에 넣으면서 영도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었다.

김치는 이거 한통 밖에 없는 건가? 손에 묻은 김치 양념을 혀로 핥으면서 영도는 의자를 발로 끌어당겼다. 앉으려는데 문이 열리고 수인이 나왔다.

밥과 김치로 인해 뺨따구가 탱탱하게 부푼 채로 영도는 굳어버렸다.

가만히 있는 영도를 흘깃 본 수인은 터덜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수인이 사라지는 순간 영도는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그 순간 목구멍으로 뭔가가 걸렸다.

"쿨럭!"

폭풍 기침이 나왔다. 몸을 흔들면서 미친 듯이 기침을 하던 영도는 바닥을 기어서 냉장고로 가 물을 꺼내 마셨다. 1리터 짜리 물통의 절반을 비우고 나서야 진정이 된다.

"헉헉헉."

죽을 뻔 했다. 가슴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있다가 주먹으로 입술을 훔치냈다. 그러는 영도의 눈은 수인이 들어간 욕실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면 일어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직은 어떤 식으로 행동을 취해야 할 지에 대해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전에 이 널려놓은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치워야 할까? 하지만 배고프다고. 더 먹고 싶었던 영도는 손을 위로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아예 의자에 앉아버렸다. 욕실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주먹밥과 김치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일단은 모르는 척을 해볼 심산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이 눈치를 볼 군번은 아니잖아? 뒤처리 다 해줬다고. .....물론 새벽에 멜롱한 일이 있긴 했지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영도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해도 그의 머리는 복잡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수인이 무슨 말을 꺼낼까. 그때 나는 어떤 식으로 반응을 취해야만 하는 걸까.

긴장으로 목이 탄다. 목구멍 안쪽이 바싹 타는 걸 느끼며 영도는 밥을 젓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런 영도의 옆을 지나쳐 간 수인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두어모금 마신 후 수인은 영도를 봤다. 눈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저절로 움찔하게 된다.

눈으로 봤음에도 바로 뭐라 하진 않는다. 차분한 눈길을 보내나 싶더니 옆으로 와 의자를 끌고 앉았다.

".......뭐야."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던져도 반응이 없다. 기운이 다 한 사람마냥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있던 수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위로 머리를 올린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잘하는 짓이다."

뱀술 같은 것 좀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다가 꼴 좋다. 이놈아.

주먹을 들었다가 내렸다. 조금 전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그 순간 수인의 입술 감촉이 떠올랐던 것이다. 영도는 손을 내리고 우물거리고 밥을 먹었다. 옆에 엎드려 있는 건 그냥 돌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려 했는데 부피가 있다 보니 자꾸만 시선이 간다. 머리를 댄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 못내 신경 쓰였다.

먼저 입술을 부딪쳐온 것은 바로 수인이었다. 이쪽은 가만히 있다가 당한 일이었다. 그런 걸로 없었던 일이 되거나 면죄부를 얻는 건 아니겠지만 아주 조금은 반발을 할 수 있는 건덕지를 손에 넣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영도는 모르는 척 물었다.

"머리 많이 아프냐."

"깨질 것 같아요."

"그래서 나더러 뭐 해주라고? 라면 하나 끓여서 해장이라도 하든가."

이번에는 대답이 없다. 이쪽이 라면 끓여서 턱하니 바칠 줄 알았냐? 어림도 없다면서 영도는 크게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수인이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것에 영도는 씹는 걸 중단했다.

입 안에 밥을 넣은 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수인이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비척거리며 걸어간다. 주방이 아니라 거실 쪽이었다. 조금 전까지 영도가 누워있어서 베개와 얇은 이불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눕는다.

말은 안 해도 다시 잘 생각인 거다. 자고 일어나면 속 쓰린 게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저 놈이 뭘 하든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술버릇이 어지간히 나쁜 놈이었다. 그런 식으로 주사를 부리다니. 거지처럼 마시고 개처럼 구는 것들하고는 놀지를 말아야 한다며 입 안에 담긴 밥알을 꼭꼭 씹어 먹던 영도는 이상하게 뒷머리가 당겼다. 혹시나 싶어서 뒤를 휙 돌아보자 수인은 아까와 같은 자세였다. 뒷통수로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지금 노려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뒷머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가만히 있던 영도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없었다.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영도는 긴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내가 정말 미치겠네. 어쩌자고 저런 애물단지가 굴러들어온 거야.

미치고 팔짝 뛰겠다면서 그는 테이블 위에 양 손을 올리고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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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시중에서 파는 술하고는 조금 다른 것들을 입에 대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는 지인들이 많은 지라 때때로 마을에서 어른들이 놀러 오셨고 그럴 때마다 알아서 술상이 차려지고는 했고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그들이 부르면 얼굴을 내밀곤 했었다.

할머니와 함게 지내면서 이런저런 걸 다 하는 어린 수인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있어 술 한잔 정도는 가볍게 내릴 수 있는 상 같은 거였다. 원래 어른이 권하면 먹지 않을 수 없는 거고, 옆에는 할머니도 있는 데다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수인이 처음 술을 입에 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처음에 마실 때에는 이상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딸꾹질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그것도 두 번이 되고 열 번이 되는 동안 점점 익숙해졌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에는 술상이 차려지는 순간부터 파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던 적도 있었다.

뱀술이나 아카시아술, 복분자술, 솔잎술 등등 다양한 자연의 술을 입에 대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세상의 술은 그런 것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시고 나서 이렇게나 괴롭고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픈 술이 있을 줄은 몰랐다. 고통스러웠지만 공부 한 번 제대로 한 거였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술은 입에 대지도 않을 거야. 그리 생각을 하는 수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인의 모든 오감은 바깥으로 쏠려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밥을 먹나 싶던 영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를 다니는 것 같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뒤를 이어서 뭔가를 끓이는 소리가 난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수인은 눈을 뜨고 살펴볼까도 싶었지만 눈이 마주치면 또 뭐라 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지금은 영도가 시끄럽게 굴 때에 맞춰서 대들 수도 없었다.

아, 속 쓰리고 머리 아파. 토하고 싶은데 나오는 건 위액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배를 감싼 수인의 미간으로 점점 짙은 주름이 만들어진다. 안색을 굳힌 채로 시체처럼 늘어져 있으려니 뭔가가 다가왔다. 수인을 툭툭 친다.

"안 자는 거 다 아니까 눈 떠봐."

그 말에 수인은 한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 기운 없이 쳐다보는 수인에게 영도는 들고 온 것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이거나 마셔봐."

"......그게 뭔데요?"

"마시고 죽을 건 아니니까 얼른 일어나."

말을 하는 영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걱정 때문에 저러는지 단순히 짜증이 나기에 저런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영도가 내민 걸 받아들였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냄새를 킁킁 맞자 영도가 마시기나 하라며 한마디 했다. 수인은 잔에 담긴 걸 홀짝거리며 목구멍으로 넘겼다.

냄새가 나는 것 치고는 쉽게 넘어간다. 꼴깍 거리면서 액체를 마시던 수인은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영도를 확인했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서있던 영도는 수인이 쳐다보자 한 쪽 눈썹을 위로 올리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면서 팔짱을 낀다. 그걸 확인한 직 후 수인은 잔을 다 비웠다.

뜨끈한 게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지 몰라도 편안해진다. 입맛을 다시는 수인을 확인한 영도는 짧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치울게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수인의 잔을 가지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도는 머쓱해져선 손을 오므렸다. 뭔가 좀 불편해 보이는 거동을 하던 영도는 수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이불을 몸에 두르고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던 수인은 그런 영도를 보다가 옆으로 이동했다.

"왜 피해?"

이불을 잡아 안쪽으로 당기던 수인은 갑작스러운 지적에 그쪽을 쳐다봤다. 

"이불 걸치적 거릴까봐 안으로 당기는 것뿐이에요."

그걸 가지고 웬 시비냐. 그런 투로 묻는 것에 영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팔짱을 낀 영도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만들어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을 하던 영도는 지나치듯 말했다.

"너 술버릇 왜 이렇게 안 좋냐."

"제가 뭘요."

"뭘요? 뭘요라고? 너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안나?"

"하나도 안 나는데요."

"........."

너무도 태연히 내뱉는 말에 영도의 입이 반쯤 열렸다.

이건 아니잖아. 그 생각부터 들었다. 어제 한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분명 네가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 그 때 맡았던 향이 아직도 생생한데-.

영도는 손을 들어 수인을 가리켰다. 너 괜한 거짓말 같은 건 하지마.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수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 얼굴은 그저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이쪽이 큰소리를 치면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응을 보일 게 분명했다.

"나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토해내며 그리 말을 한 영도지만 길게 따질 수 없었다.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수인을 앞에 두고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쩐지 잠도 못 자고 전전긍긍해 했던 이쪽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술 취해서 뻗은 놈 뭐가 예쁘다고 저런 걸 타줬는지 모르겠다.

혀를 찬 영도는 당장 몸을 일으켰다. 주방 쪽으로 걸어가서 남은 밥을 모아 입 안에 밀어 넣은 영도는 그릇을 정리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영도가 보이지 않게 되고 수인은 양 손으로 잡은 잔을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분명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점점 얼굴이 붉어진다. 건강해 보이는 갈색 피부가 묻어질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이 된 수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꼼지락 거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얼굴로 있을 순 없었다. 빨리 정리를 해야만 했다. 영도가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말이다. 어색하니 헛기침을 한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렸다. 아직 술이 덜 깼다. 기침을 한 수인은 비척거리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주방 안으로 들어간 수인은 냄비에 담긴 차를 확인하고는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뭔가를 끓여준답시고 이것저것을 꺼내놔서 주방 안쪽은 엉망이었다. 요리를 한다 치면 이보다 훨씬 더 엉망이 될 터였다.

수인은 아직 뜨거운 냄비에 손가락을 올린 채로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입술 부근에 누른 수인은 눈을 감았다. 하아. 하고 무거운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한숨 속에서 알콜 냄새가 확 났다. 그 순간 수인은 속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황급히 배를 끌어안고 욕실로 달려갔다.

신을 신을 여력도 없이 당장 변기를 붙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바로 묽은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큰 소리가 난 건 아니지만 이쪽이 달려가고 문을 세게 닫는 소리가 들린 건지 문 밖으로 영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니긴. 당장 문 열어."

손잡이가 마구 돌아간다. 그쪽이 신경 쓰여서 더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수인은 일단 변기 물을 내리고 입술 주변을 닦아낸 후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무섭도록 굳은 얼굴을 한 영도가 서있었다.

"지금 토했냐?"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바라보는 눈빛이 꽤나 진지했다. 어떻게 할까 싶었던 수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영도의 얼굴이 참으로 희귀하게 일그러졌다.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 "

질린 투가 역력했다. 수인은 급격하게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도대체 어떤 얼굴로 영도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묵묵히 서있는 동안 머리에 꽂히는 영도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불편하다. 주방으로 들어가야 겠다며 영도를 지나쳐 걸어가려는데 그 순간 영도가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리로 와."

왜 이러는 건가 싶으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다.

영도는 수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수인을 앉힌 영도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기운 하나 없었기 때문에 얌전히 침대 위로 쓰러지게 되었다. 옆으로 누운 채로 위를 쳐다보는 수인에게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영도는 근엄하게 말했다.

"꼼짝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약 사올 테니까."

"아니요. 괜찮은데요."

영도에게 그런 것까지 시킬 순 없었다. 수인은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영도가 손으로 수인의 머리를 잡아 아래로 내렸다. 베개에 다시 머리를 올리게 된 수인은 눈을 꿈벅이며 영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영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얌전히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얌전히 있겠다 하지 않으면 당장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동안 영도는 이불을 끌어 수인의 목 위까지 올려줬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나가버린다.

나가면서 영도는 문을 닫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문을 닫았다면 정말 답답했을 텐데. 처음에는 영도가 나가면 바로 일어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가 힘겨웠다. 멍하니 있던 수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속이 많이 울렁거렸다.

아. 속 쓰려. 몇 번째일지 모르는 생각을 하며 가슴에 한 손을 올린 수인은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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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손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열이 올라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따스했다. 왜냐하면 지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이쪽에 품은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들 많이 아픈가 보네.'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에 수인의 얼굴이 풀어졌다. 헤헤. 하고 웃자 당장 양 뺨으로 커다란 손이 내려와서 부드럽게 감싼다.

'내 귀여운 강아지. 아파도 잘 웃네.'

아파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계속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서 눈을 뜨려 하는데 잘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아빠의 모습이 보고 싶어 힘겹게 눈을 뜨자 그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가서 약 사올 테니까.'

'가지 말고 그냥 옆에 있어주면 안 돼요?'

'그러면 계속 아프기만 할 거 아니야. 아픈 널 보는 아빠 마음이 더 아프니까 빨리 낫게 해주고 싶어. 약국은 요 앞이니까 금방 다녀올게.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귤이 먹고 싶어.'

추운 겨울이 되면 의레 나오는 새콤달콤한 귤을 먹고 싶었다. 아빠가 하나씩 까서 입 안에 넣어주면 무척이나 맛있을 것 같았다. 정말은 입맛은 하나도 없고 몸은 따끈따끈해서 머리로 열이 오르고 있지만 귤을 생각하자 너무 먹고 싶어졌다. 그게 전해졌던 건지 아버지는 수인의 뺨을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사가지고 올 테니까.'

'응. 아빠.'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져 웃고 있었다. 수인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부친은 잠바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고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오래오래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열이 오른 머리나 축 처지는 몸은 시간 관념을 잃어버려서 며칠이 지나 친척들이 오고 나서야 수인도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가까스로 폐렴이 되기 직전에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병원에서 수인은 차가운 몸이 된 아버지와 만나야 했다.

약을 사고 귤까지 산 후,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참이라고 했다. 기다리고 있을 아들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일까. 다른 때라면 신호등을 보고 건넜을 그가 빨간불이 되었을 때 발이 나간 것이다. 코 앞에 있는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린 아들을 생각하던 그는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트럭을 미처 볼 수 없었고,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던 운전수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즉사였다.

옆구리를 가격당해 쓰러진 후 시멘트 노면에 머리가 세게 떨어졌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죽었고,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큰 고통을 느끼지 않은 것에 아주 조금의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수인은 아니었다. 

왜 아버지가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지. 왜 관 안으로 그를 집어넣는지.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아버지를 왜 흙 속에 묻는 것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있는 안 시간은 착착 지나갔고 주변 어른들의 의견에 의해 수인이 갈 곳이 정해졌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인해 다툴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모두가 진심으로 수인을 걱정하고 아꼈으며 누군가는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수인을 키우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수인은 할머니의 곁으로 가게 되었고 지금까지 별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으로 공허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때 왜 귤이 먹고 싶다고 한 걸까. 왜 약을 사러 나가는 아버지를 더 붙잡지 못했던 걸까.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나 남은 아들 생각으로 인해 그 가슴이 검게 타들어갔을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고 머리가 몽롱해졌다.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쉴 수 없었다.

몸이 고통스러운 건 금방 낫고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옅어지기만 하는 것일 뿐, 그 고통의 기억을 아예 잊을 순 없었다. 그런데 왜 그 기억이 지금에 와서 나는 걸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이상해진 걸지도 모르겠다며 수인은 훌쩍거리며 눈을 떴다. 그러자 뭔가를 든 채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영도가 보였다.

약병을 든 영도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얼굴은 준수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동안 약병을 돌리던 그는 한숨을 쉬더니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눈을 뜨고 있는 수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움찔했다. 인상이 펴지고 대신에 부릎 뜬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 눈 뜬 거야?"

"........."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실상 눈을 뜬 것은 이쪽이 그렇게 하고자 마음을 먹은 게 아니라 저절로 떠진 것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있는 동안 영도가 가까이 접근을 했다.

"많이 안 좋냐?"

침대에 팔꿈치를 올리고 고개를 숙인 영도의 얼굴은 진지했다. 걱정을 하는 듯한 그 모습에 수인은 대답 없이 조용히 있었고 영도는 아뿔싸 싶었다. 술병얻은 놈 뭐가 예쁘다고 관심인지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그는 사들고 온 걸 내밀었다. 

"이거나 마셔."

작은 갈색 병이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읽을 수가 없었다. 만사가 귀찮았던 수인은 한숨을 죽이며 물었다.

"......뭔데요."

"숙취에 좋은 음료라고 하더라."

"마시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 영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시고 싶지 않다니. 어디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영도는 들고 있는 병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야. 내가 지금 괜히 나간 거 아니다. 너 이러다가 반송장 되면 나만 피곤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서 먹어. 사람 화나게 하지 말고."

속이 쓰려도 그건 수인 쪽이지 영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화가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한마디 더 하면 손이 올라갈 것 같은 영도의 살벌한 얼굴을 본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손을 들었다. 영도가 들고 있던 병을 가지고 가서는 뺨에 대고 눈을 감는다.

"시원해."

"......."

마시라고 준거지 그렇게 끌어안기 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수인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대고 세게 뭐라 할 수 없었던 영도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숨소리를 들은 수인은 눈을 떴다. 보이는 건 영도의 뒷머리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쪽을 귀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묵묵히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손을 들었다. 영도의 뒷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대고는 천천히 쓸어내렸다. 수인의 손길이 닿았을 때 영도는 급습을 당한 사람마냥 경직된 채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피하진 않았다.

수인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영도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뻗친 부분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리가 잘 된 부드러운 머릿결이었다. 바쁘지 않게 머리카락을 만지는 동안 수인은 점점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그러다가 손을 놓고 병을 쥔 채로 재차 눈을 감았다.

영도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지금 수인이 어떤 모습으로 누워있는지 차마 확인할 수 없었다. 만약에, 그럴 리가 없겠지만 아주 만약에라도 오늘 새벽 같은 일이 또 생기게 된다면.......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했다. 본인이 낸 소리에 영도는 적잖이 당황했다. 무표정으고 있나 싶던 그의 눈꼬리가 파들거리며 떨리고 뺨으로 미미한 홍조가 서린다. 주먹 쥔 손바닥 안쪽이 긴장으로 인해 습기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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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는 동안 영도는 떨어지지 않고 계속 곁에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 영도는 별 말이 없었다. 이쪽이 제정신으로 눈을 뜨고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기 때문일 터였다.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마다 영도가 긴장하는 듯 싶었다. 가만히 서있던 그는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을 해선 수인의 이마에 손을 올리곤 했다. 그러다가 '열이 안 내리네.'라고 중얼거린 그는 젖은 수건을 들고 왔다. 지금껏 누군가를 간병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듯, 그 손길은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그런 손길이기 때문에 더 안심이 되었다. 어렸을 때처럼 매달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리 할 순 없음이었다.

영도의 서투르지만 성의 없지는 않은 간병을 받는 동안 수인은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른하고 몸의 긴장도 풀린다. 영도가 사온 숙취용 음료는 미지근해져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나 이제 일 나가야 해."

괜찮아. 충분할 정도로 옆에 있어줬으니까.

"오늘 마지막 날이라 회식도 있어. 언제 돌아올지 정확하게 알 순 없어."

일하는 것으로 인해 늦는 건데 뭐라 할 순 없었다. 영도가 저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이쪽이 투정을 부릴 만한 입장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왠지 모르겠다. 영도도 미안함을 느끼는지 바로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나 싶던 그는 수인의 뒷머리에 손을 올리곤 조심스레 쓸어 올렸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라고 말해줄 수 없었다. 이미 절반쯤 의식은 잠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영도의 손이 떨어지고 그의 온기가 멀어진다. 그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걸 느끼며 감겨진 수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푹 잤다 싶을 즈음 눈을 떴을 때 시간은 벌써 오후가 되어 있었다.

3시 20분. 시간을 확인한 수인은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할머니하고 있을 때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오후 3시에 눈을 뜨다니. 새벽 같이 일어나 마당을 쓸고 밥을 짓고 아침을 준비해야 할 때인데 말이다. 멍하니 있던 수인은 앞에 둔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한숨을 쉬나 싶었던 수인은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영도의 방. 오늘은 여기나 가볍게 정리해줘야 할 듯 싶었다.

멍해진 머리를 부여잡고는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몸은 나아졌지만 속이 매스꺼웠다. 아무것도 안 먹고 굶을 순 없으니 뭐라도 떠야만 했다. 밥 말고 죽을 먹어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면 누룽지라도 끓여 먹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거실로 나온 수인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스렌지 위에 올려진 걸 확인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저건 또 뭐지? 별 생각 없이 앞으로 가 냄비 뚜껑을 연 수인은 숨을 죽였다. 냄비 속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북어계란죽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담겨 있는 걸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죽을 떠서 맛을 봤다. 생각보단 괜찮았다.

"맛있네."

어쩌면 술 마시는 일이 많으니까 이런 걸 잘 만드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런 걸 만들어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멍하니 있던 수인은 조금 더 떠서 맛을 봤다.

"정말 맛있어."

먹을수록 속이 채워진다. 허했던 마음으로 뭔가가 그득 들어차는 걸 느끼며 수인의 입술 양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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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촌닭은 사람을 말려죽일 속셈인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숨 죽이고 얌전히 있어도 부족할 판에 왜 이렇게 사고를 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키스를 한 거야? 그게 술김으로 할 만한 짓이야? 원래 게이였던 거 아니야? 원래 이쪽 바닥에서 게이니 레즈라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영도도 전에 몇 번 제의를 받은 적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그때에는 다 거절했다.

만약에 정말 수인이 게이라 한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야? 일단 사촌형님으로서 그 녀석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 걸까? 아니야. 괜한 말 꺼냈다가 헛소리 한다는 식으로 반응을 보이면 어떻게 해. 이쪽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 놈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고 하잖아. 아니면 기억나지 않는 척을 하는 걸꺼? 그건 또 아닌데?

영도는 오늘 아침 집을 나섰을 때의 상황을 눈 앞으로 그려봤다. 수인은 아침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옆으로 몸을 뉘었다. 아직 숙취가 덜 깬 건지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괜히 옆으로 가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거다. 그러면서도 왜 아직까지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영도의 손은 아까부터 맨션 경비인 지용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본인답지 않게 말이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인이 나타난 순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면서 영도는 인상을 쓴 채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인가 봐?"

정말로 기분이 별로였기 때문에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도 거슬렸다. 실상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의 등장이기도 했다.

영도는 옆을 확인했다. 뒷짐을 진 채로 웃고 있는 이유라가 보였다.

"이유라씨. 별 일이 아니라면 괜한 접근을 하지 마시죠."

"왜 그렇게 날 경계해? 그러지마. 내가 자기를 잡아먹기라도 한데?"

"기획사랑 손잡고 무슨 짓 하려는 건데? 나 물 먹일 생각이라면 하지마. 이쪽 기획사도 나름 대단한 거. 알지?"

"물론이지. 그쪽이나 이쪽. 둘 다 박빙인 거 아니겠어?"

흘러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의도로 접근을 해서 저리 꼬는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영도는 이유라를 바라봤다.

마지막 촬영을 위해 도수 없는 안경을 쓴 영도는 지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풍겨져 나왔다. 양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으니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달콤해 보인다. 이유라는 욕심이 나 죽겠다는 듯 윙크를 날렸다.

"역시나 자기는 멋져."

헛소리하고 자빠졌다.

영도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이유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영도의 뒤를 따랐다. 촬영장 내부이고 주변에 보는 눈들도 많아서 쓸데없는 짓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영도도 괜히 눈에 튀는 짓을 하지 않으려 했다.

"너무 콧대 높이지마. 자기. 그러면 자기만 손해야."

이유라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간격을 벌린 채로 영도의 옆을 따랐다. 

"나 괜찮은 여자야. 사귄다고 꼭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무 날 경계하지마. 자기가 몸을 사리면 사릴수록 난 점점 더 재미있어져."

영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을 내리뜨는 모습에서 한기가 풍겨져 나온다. 그런 영도에게 재차 윙크를 날린 이유라는 앞으로 나아갔다. 때에 맞춰 나감독이 모든 배우들을 불러들었다.

"자. 마지막으로 화목해 보이는 가족사진을 찍어 봅시다. 다들 모이십시오."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본인들의 자리를 찾아갔다. 드라마의 여자, 남자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이유라와 붙어서 서야 했던 영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떨어지고 싶다. 하지만 연기를 위해서 참아야 겠지.

나름 노력을 한다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설펐던 모양이다. 바로 지적이 날아왔다.

"원혁이 네가 조금 더 앞으로 나와야 겠다. 그래. 그렇게. 유라는 영도한테 팔짱끼고."

"이렇게 하면 되나요? 감독님?"

이유라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영도에게 달라붙었다. 덕분에 그녀의 가슴이 영도의 팔에 닿았다. 물컹한 살이 눌리는 느낌이 불쾌했다. 순간적으로 어제 저녁에 본 수인의 밋밋한 가슴이 떠오르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이유라의 가슴을 두고 기분 나쁘다 생각을 하면서도 수인을 떠올리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색해진 영도는 헛기침을 했고 그 행동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라가 너무 적극적이니까 원혁이가 부끄러워하잖아."

"어머나. 그렇게 쑥스러워하는 건 또 처음보네? 아주 귀여워."

"그러게 말이야. 두 사람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일은 무슨! 불쾌했던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고 이유라는 여우처럼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들은 단지 친구일 따름이에요."

"친구가 발전하면 애인인 거지. 별거 있나?"

"그러게요. 오호호호호!"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이유라에게서 막강한 자신감이 풍겨져 나왔다.

다른 원로 배우분들도 있는 앞에서 이 무슨 경박한 웃음이란 말인가. 그리 생각을 하며 바라봐도 이유라는 태연하기만 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녀는 조금 더 원혁의 팔을 붙잡았다. 확 빼내 버릴까. 하지만 마지막 촬영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NG를 낼 순 없었다. 그건 원영도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자, 잡담은 그쯤으로 하시고요. 다들 이쪽을 봐주세요."

감독의 지시에 영도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 위에 선 나감독은 이쪽을 보라는 듯 한 손을 든 채로 말했다.

"이번 촬영이 마지막입니다. 이걸로 우리들은 되돌릴 수 없는 항해를 하게 되는 거지요. 첫방 대박을 바라면서 모두 본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미소를 보여주세요. 다들 잘 하실 수 있어요. 그러면 갑니다!"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 모두가 연기자로 돌아가 있었다. 철없는 이유라만 여전히 영도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달라붙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껄끄러웠지만 연기 중에 이유라를 밀쳐낼 수 없음이었다.

뭐라 딱 집어 말할 순 없으나 지금 유라의 태도가 다른 때와는 많이 달랐다. 미묘하게 이상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들뜬 상태였다. 그런 감정 상태가 지금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인지 NG여왕이었던 그녀는 큰 실수가 없었다. 영도나 다른 연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3시부터 시작된 촬영은 8시가 되어가서 마무리가 되었고 그 분위기는 뒷풀이로 이어졌다. 모두가 참석하겠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여지고 의상을 갈아입지 않고 곧장 회식 장소로 이동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사이로 영도도 있었다.

같이 이동하자는 나감독의 말에 영도는 전화 한 통화만 하겠다는 것으로 살짝 빠져나왔다. 촬영이 끝난 후의 뒷풀이는 원래 약속이 잡혀있던 거라 빠져나갈 마음은 없었다. 단지 내내 신경 쓰였던 수인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집으로 전화를 하면 받겠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수인은 요즘 초딩들도 들고 다니는 핸드폰 하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나 촌스러울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 차에 올라탄 영도를 향해 매니저 용한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쉬어. 내일부터는 시상식 준비한다? 의상이랑 헤어같은 거 회의 들어갈 건데.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브랜드 같은 거 있으면 말만 해."

"응. 알았어."

건성으로 대꾸를 하며 영도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암만 신호가 가도 수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번에 영도의 얼굴로 기분 나쁨의 감정이 퍼져나갔다.

"이 녀석은 지금 또 어디로 간 거야?"

흑시 눈치 보느라고 안 받는 건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쓴 채로 있던 영도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려했다. 그 때 바로 화면으로 노랭이가 떴다.

"이 망할 놈팽이가."

내내 이쪽을 피하던 놈이 뭔 배짱으로 전화인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퍼부울 게 있었던 영도는 피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하이. 우리들의 스타.]

"죽을래? 뒤지게 맞을래?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지 않겠어?"

영도의 음산한 말에 당장 '으하하하!' 하는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쪽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닌데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전화상이라는 해도 당장 시경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말이야-."

[안전벨트 안 맸으면 뭐라도 단단히 붙잡도록 해. 앞으로 1분 후에 일 터질거야.]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게 있어. 일단은 나서지 말고 지켜만 보고 있어. 그러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았지? 당분간 연락 두절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이만 끊는다.]

전화는 바로 끊겼다. 뚜-하는 소리가 울리는 핸드폰을 귀에서 뗀 영도는 중얼거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경이 하는 일 중에서 제대로 된 일이라는 건 그다지 없었다. 이번에도 일단 사고를 친 후에 수습을 하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불안해진다. 싸한 뭔가가 뒷통수를 타고 흐르는 걸 느끼며 영도는 급히 매니저 뒤로 이동했다.

"인터넷 검색 좀 해봐. 내 이름으로."

"왜? 안 좋은 연락이라도 온 거야?"

"일단은 확인부터 해야 하니까 좀 알아봐. 어서."

이쪽을 바라보는 영도의 얼굴은 지나치게 진지했다. 그 얼굴에서 일이 터지긴 했음을 깨달은 용한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한 1분 정도를 검색했을까.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용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자세히 좀 살펴봐. 사장한테 전화 왔는데 느낌이 영 이상해."

"그래?"

시경한테서 연락이 온 거라면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이쪽이 모시는 사람이라곤 해도 시경은 너무 특이하고 이상했다. 그냥 흘려 넘겼다가 피볼 수도 있음이었다. 그래서 다시 차분하게 검색을 해봤다. 그러다가 방금 딱 뜬 기사를 확인한 용한은 검색을 하던 손가락을 딱 멈추었다.

"어?"

짧은 소리를 내고는 움직임이 없었다. 굳어선 어느 한 부분을 쳐다보는 용한은 이상해 보였다. 왜 그러는 건가 싶었던 영도의 얼굴이 덩달아 굳어졌다.

"왜 그래? 뭐가 떴는데?"

묻는 영도를 쳐다본 용한은 '이건 좀....'라고 중얼거리면서 영도 쪽으로 핸드폰을 돌렸다. 차마 이쪽 입으로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왜 읽어주지 않고 보여주는 건가 싶었던 영도는 용한의 핸드폰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화면에 뜬 걸 본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입술사이로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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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를 들고 앉아있는 두 사람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고 그 사이에 끼인 수인은 주변 눈치를 보는 입장에 있었다. 숨을 죽인 채로 있던 수인은 슬그머니 바닥에 깔린 패를 확인했다.

없었다. 망했다. 라는 말을 내뱉어야 할 때인 듯 싶었다. 그 순간 지용의 눈이 빛났다. 그는 당장 패를 내리치며 외쳤다.

"났다!"

"으악!"

지용이 외치는 순간 최씨 영감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가 들고 있던 화투들은 이미 이불 위로 떨어져 있었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최씨 영감은 아이처럼 발을 굴렀다.

"무효야! 이건 인정할 수 없어!"

"명확한 결과를 눈 앞에 두고 인정하느니 마느니 운운하는 것처럼 추잡한 게 없는 겁니다."

"이 인정사정 없는 놈! 노인공경이라는 네글자의 받침법도 모르는 놈!"

"시끄럽고요. 일단 내놓으세요."

손을 앞으로 내미는 지용은 떳떳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하게 패를 돌려서 이긴 그였다. 미련을 못 버리는 최씨 영감의 손등을 쳐서 화투를 몰수한 지용은 바닥에 패를 뿌리고 빙글빙글 돌렸다. 완전한 꾼의 실력이었다. 그 때 지용이 고개를 들어 수인을 바라봤다. 

"뭐하십니까. 돈 내놓으시지요."

"......잠시만요."

얼떨떨한 얼굴로 수인은 지갑을 꺼냈다. 21살의 청년이 들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꽃무늬 동전지갑이었다. 수인이 꺼낸 지갑을 본 지용과 최씨 영감은 순간 그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을 꺼낸 수인은 지용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수인의 손에서 나온 돈을 내려다보던 지용은 '애들 코 묻은 돈은 받기가 좀 그런데.'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었다. 누구 하나만 봐줄 순 없었다. 그는 이내 최씨 영감에게도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애로 영감님도 돈 내놔요."

"몹쓸 놈."

툴툴 대면서 최씨 영감은 돈을 꺼내 지용에게 내밀었다. 그러는 동안 다시 패가 섞여진다. 또 할 생각인 듯 싶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있는 수인은 위를 확인했다. 3평 남짓의 작은 방은 지용이나 다른 경비가 휴식을 취하는 장소라 했다. 작은 평수라 해도 수납공간이 있고 화장실과 욕실도 붙어있는데다 냉장고 및 간의 가스렌지도 있는 등, 알찬 모양새였다. 고급 맨션이다 보니 이런 곳도 좋게 만든 모양이라며 수인은 꼼질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영도는 오늘 회식까지 한다 했으니 더 늦게 들어오겠지. 한 12시에나 들어올까. 그게 아니면 밤을 새고 올까. 회식 할 때, 이상한 곳으로 가서 여자들도 부르는 걸까.

"수인씨."

부름에 수인은 지용을 쳐다봤다.

"싫으면 더 안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재미있어요."

재미는 있지만 쏠쏠하게 돈이 나가고 있었다. 큰 낭비는 아니라 해도 천원 한 장이 아쉬운 수인이었다. 노름과 별반 차이가 없는 고스톱을 마냥 할 수 없었다. 머뭇거림이 전해졌을까. 최씨 영감도 거들었다.

"둘이서 해도 되니까 내키지 않으면 말아. 우리는 이렇게 잘 놀아."

최씨 영감은 엉덩이 아래 쪽에 넣은 십원짜리 동전을 손바닥으로 옮겨 흔들었다. 촬촬촬. 하고 동전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이번에는 둘이서 하자. 네놈의 그 건방진 콧대를 콱 눌러버릴 테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죠."

가소롭다는 듯 지용은 짧은 코웃음을 날렸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앞으로 두 사람이서 할 모양인 듯 싶었다. 새삼 끼어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슬슬 하고 싶지 않았던 참인지라 수인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영도가 끓여준 죽을 먹고 사온 숙취용 음료도 마셨다. 1시간 정도 누워있으려니 슬슬 정신이 돌아온 수인은 밖으로 나왔고 산책로를 걷는 동안 최씨 영감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지용이 다가왔다. 두 사람이 갑자기 싸우나 싶더니 이리로 끌려오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도박판에 끌려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어영부영하는 동안에 1,200원을 잃었다. 십원짜리 내기라고는 해도 두 사람이 워낙에 잘 하다 보니 금방 돈이 빠져나간다. 100원으로 했으면 판이 얼마나 커졌을까. 그리 생각을 하며 고스톱에 열중인 두 사람을 바라봤다.

미간으로 짙은 주름을 만든 채로 최씨 영감은 웅얼거렸다.

"훈수 두는 거 없다."

"수인씨는 그런 걸 할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하고는 다르게요"

"그 누가 누구냐."

"묻는 사람이 제일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최씨 영감은 이를 갈았다.

"건방진 놈. 아무래도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듯 싶구나."

"애로 영감한테 키워진 기억은 없습니다-."

"하여튼 이 놈은 혓바닥이 문제야. 그냥 콱-."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판 엎으려고 하지 말고 집중하세요. 이번에는 안 봐줍니다."

"언제 봐준 적이 있었냐!"

날카로운 외침에 지용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승부의 세계란 비정한 거였다. 봐주는 한심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지용의 미소에 최씨 영감의 이마로 식은땀이 맺혔다. 이 괴물 같은 놈.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최씨 영감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심심하면 TV봐도 됩니다. 수인씨."

패를 보면서도 여유가 있는 지용의 말에 수인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밖에 안 나가봐도 괜찮아요?"

"응? 바깥에 한사람 있지 않습니까. 원래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쉬는 식이니 걱정할 거 없어요. 그리고 이런 곳에는 도둑도 잘 안 듭니다."

겉보기가 대단하니 잘못 건드렸다가 피 볼게 분명해서 접근도 하지 않는 거다. 이런 곳에서 살려면 재력이 보통은 넘어야 했다. 재수 없으면 동전 하나 훔친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음이었다.

지용이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대략이나마 알 것 같았던 수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를 돌아봤다. 심심하다. 문득 든 생각에 수인은 리모컨을 들었다. 시골에선 심심하면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걸 할 수 없으니 정말 답답했다.

멍하니 있는 것도 심심했던 수인은 리모컨을 들었다. 음향을 제일 낮게 하면 지용과 최씨 영감을 방해하지 않는 게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TV를 켠 수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왜 그래?"

바로 수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최씨 영감을 두고 지용은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딴청 부리지 마십시오."

불리해지니까 딴청을 피울 셈인 거지? 그런 눈빛을 보내는 지용을 무시한 채로 최씨 영감은 수인이 쳐다보는 쪽을 확인했다.

TV화면 가득에 영도와 예쁜 여자의 얼굴이 반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단에는 '톱클래스의 스캔들'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입에서 침이 튀는 것도 잊고 큰소리를 친 최씨 영감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흥분을 해선 목청을 높였다.

"같이 드라마 찍는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저 이유라라는 여자 말이야. 얼굴에 색기가 아주 좔좔이더라고. 물건 제대로 달린 사내놈이라면 넘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겠더라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화투를 날려 최씨 영감의 이마 가운데에 명중시킨 지용은 상대가 욱해서 뭐라 하기 전에 곁눈질로 수인을 가리켰다. 왜 옆으로 눈깔질인가 싶었던 최씨 영감은 굳은 얼굴을 한 수인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다곤 해도 다물어진 입매에서 불편한 속내가 전해졌다. 눈을 굴리던 최씨 영감은 헛기침을 했다.

"원래 연예인이라는 건 붙어만 다녀도 스캔들 감이야. 옆에 다른 사람들 있고 없고는 크게 신경 쓸 바가 아닌 거지."

"그래요. 곧 드라마 방송한다고 하더니 언플 시작인 모양입니다."

"저런 기사를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그러지 말고 수인이. 같이 붙어서 화투나 치자고. 둘이서 하려니 영 재수가 없네."

최씨 영감의 말에 지용은 그에게 서늘한 눈빛을 던졌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시는 군요."

"하여튼 젊은 놈이 영 싸가지가 없다니까."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며 최씨 영감은 혀를 차댔다. 대화를 나누는 짧은 순간 갑자기 수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최씨 영감은 그를 올려다보며 '뭐, 뭐야? 가게?'라고 물었고 수인은 고개를 꾸벅였다.

"집에 올라가서 전화 좀 해봐야 겠어요."

"그래. 그러던가. 올라가서 쉬어."

수인은 밖으로 나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나 서두르고 있었다. 수인이 완전히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최씨 영감이 입을 열었다.

"사촌이다 보니 스캔들도 신경 쓰이는 걸까나."

"제가 수인씨 입장이었으면 참 싫을 것 같습니다."

"뭐가?"

"나는 구질구질한데 사촌인 누구는 모두가 다 알만한 톱스타에 돈도 많고 얼굴 반반하고 몸도 좋지 않습니까. 그런 마당에 저런 미인하고 스캔들이 터지는데 부러운 게 당연하지요. 자기 신세하고 비교하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최씨 영감은 혀를 차면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래서 네가 문제라는 거야.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하냐. 수인인 수인이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어."

"장점이 암만 많아도 전 수인씨보다는 원혁씨 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듭니다. 그런 사람이 돼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젊은 것들은 생각이 짧다니까."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진국을 못 알아본다면서 패를 위로 든 최씨 영감의 배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허기가 진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배고프지 않나? 수인이 해준 된장 주먹밥이 먹고 싶구만."

"올라가서 해달라고 해보십시오. 해줄 것 같기도 한데요?"

"그래서 너도 한쪽 얻어먹으려고?"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고요."

지용의 순순한 긍정에 최씨 영감의 얼굴이 엉큼하게 변했다. 이쪽을 보는 눈초리가 기분 나쁘기 그지 없었다. 지용은 '왜 그렇게 보십니까.'라고 물었고 최씨 영감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내 지금껏 여러 연애를 해봤고 사람들을 봐왔지만 남자는 먹는 거에 끌리게 되어 있어. 자기 입맛에 딱 맞는 뜨끈뜨끈한 밥에 반찬이 최고인 거지. 그런 거를 볼 때 수인인 정말 일등 신부감이야. 여자가 아닌 게 아쉽단 말이야."

"그렇게 아쉬우면 직접 요리를 배워보시든가요. 일단 전 났습니다."

지용이 자신만만하게 패를 날리는 순간 방심하고 있던 최씨 영감의 입과 눈이 크게 떠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의 얼굴을 하던 그는 '이건 무효야!'라며 화투를 두고 있던 이불을 잡아 옆으로 던져버렸다. 휘릭 날아가 버리는 이불에 지용은 '이게 무슨 짓입니까!"라고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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