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시경은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둘이 붙어서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걸까. 설마하니 정말로 수인을 이쪽 바닥으로 끌어들일 셈은 아니겠지?
처음 시경이 수인에게 관심을 보일 때부터 설마 싶으면서 유심히 살펴봤다. 멋대로 접근을 해서 미용실에 가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는 건 그 흑심이 드러났다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원래 상품 보는 눈이 탁월한 시경이었다. 그가 고른 상품 중에서 마진이 떨어지지 않은 게 없었다. 하지만 이번 그의 선택은 미스였다.
수인은 강원도 산골에서 올라 온 오리지널 촌닭이었다. 곱상한 것 같아도 눈에 띠게 예쁜 얼굴도 아니고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훈남도 아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함에 그저 눈동자가 특별할 따름이었다. 그것만 가지고 장사를 할 셈은 아니겠지? 눈동자 색에 콤플렉스를 가진 놈에게 사람 앞으로 나서라고 한다면 잘도 그걸 따르겠다.
혹시 모르지 워낙에 촌스러운 놈이니까 시경이 하는 말에 홀라당 넘어갈 수도. 정말은 그런 게 아닌데도 그게 진짜인 양 믿고 나방처럼 달려들어서 불에 타버리는 거다. 그런 식으로 피폐해지고 망가지는 사람 여럿 봤었지.
턱을 괸 영도의 눈빛이 어두워진다.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로 있는 영도의 앞으로 잔이 나타났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바텐더가 보였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괜찮으시다면 한잔 하시죠."
"고마워. 안 그래도 목말랐으니까."
영도는 잔을 들어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시원하고 혀 끝으로 톡톡 튀는 맛이 퍼진다. 목구멍을 통과해 몸으로 스며드는 순간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뒷맛이 묘했다. 영도는 잔에 입술을 댄 채로 바텐더를 바라봤다.
"특이하네?"
"좋아하실 것 같은 조합으로 만들었으니까요."
눈치가 참 빨랐다. 그래서 인샬라를 좋아하긴 했지만 오늘은 마음에 드는 술을 만났어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팔꿈치를 위로 올리고 복잡한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영도를 확인하며 바텐더는 넌지시 물었다.
"저기 저 유쾌한 청년하고는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사촌동생이야."
"그것 참. 정말 안 닳은 사촌이네요."
"형제도 안 닳는 세상에 사촌이라고 해서 꼭 비슷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퉁명스럽게 말해도 바텐더는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동요가 된 상태였다. 왜 이렇게 마음이 술렁거릴까. 누군가 뒤통수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지금도 수인이 시경하고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걸 꾹 참으며 물었다.
"저 녀석 몇 시부터 여기에 왔어?"
"8시 50분 정도에 와서 1시간 반 넘게 혼자 있다가 저기로 들어간 거지요. 그 동안 주스만 계속 마셔댔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치 않는 것 같더군요."
바텐더는 잔을 위로 올렸다. '그 동생분.'라며 운을 띄웠다.
"손 끝이 많이 갈라졌더군요. 일을 많이 했나 봅니다."
"그런 거 몰라. 시골에서 왔으니까 농사일 거들었나 보지."
"아직 스물도 안 된 것 같은데 손가락 끝이 그렇게 갈라진 걸 보면 물이 닿을 때마다 상당히 아플 겁니다. 지금부터 관리해야지 안 그러면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촌닭은 여자 같은 거 몰라. 아직 배워야 할 게 한참 남았다고."
그리고 스물 한 살이었다. 보기보다 어리지도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건성인 투로 넘기려 하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수인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는 듯 싶은 모습이었다. 그런 영도의 태도에 바텐더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사촌 동생에 대해서 아주 잘 아십니까?"
"......알 턱이 없잖아."
"그러면 그 무엇도 자신 있게 말해선 안 되는 겁니다. 보아하니 두 분 사이가 별로인 것 같은데 그 상태라면 서로 피곤해지실 겁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저 분하고 원혁씨는 사는 세계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초반에 조율하지 않으면 서로 힘드실 겁니다."
"저 놈이 내 여자도 아니고 조율하면서 살 건 뭐야."
"사촌동생이라면서요. 가볍게 만났다 헤어지는 남보다는 훨씬 더 인연이 깊은 거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영도가 가만히 있는 동안 바텐더는 새롭게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옷부터 바꿔야겠습니다. 저렇게 촌스러운 차림 3년 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내버려 둬. 할머니가 사준 거라고 자부심이 가득하니까."
퉁명스럽게 말은 해도 정말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틱틱 대기는. 바텐더는 통에 얼음을 넣고 흔들었다. 사각사각하는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텐더의 현란한 손놀림에 시선을 빼앗긴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로 뭔가가 달라붙었다.
"어머나. 원혁씨 아니야. 오랜만에 오는 것 같은데?"
뒷꼬리가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화려한 미인이 등장해 영도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무도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손톱이 긴 손가락으로 영도의 턱 아래를 슬슬 간질였다.
"자기 요즘 정말 바쁘더라. 전처럼 같이 놀러갈 수 없는 거야?"
"놀러가기는 했어도 너랑 단 둘이 간 적은 없어. 괜히 사람들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마."
"오해 좀 해주면 뭐 어때서. 깍쟁이."
깍쟁이라니. 여자가 사용하는 단어가 심히 듣기에 거슬렸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영도는 바텐더가 만들어준 칵테일에 손을 댔다. 잔에 입술을 대는 영도의 그린 듯한 옆선에 여자는 몽롱한 눈빛이 되었다.
"나이 먹으니까 분위기가 더 나나봐. 자기는 언제 서른이 돼? 남자는 서른부터 성적 매력이 폭발한다던데."
"내가 서른이면 그쪽은 서른 둘이 되는 건가?"
그 순간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화가 난 걸 어필하려는 듯 주먹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자 나이를 운운하다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냥 말 한번 해본 거지. 난 이십대. 그쪽은 서른이라는 걸 말이야."
빈정거리는 영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단순히 이쪽의 관심을 끌려 냉정하게 구는 게 아니라 정말 성가셔하고 있는 거였다. 다른 사내가 저런 눈빛을 보냈다면 절대로 가만히 안 있었을 거라며 입술을 비죽인 여자는 그래도 좋다는 듯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요즘 여자 궁하지 않아? 통 여자 만난다는 소식이 없던데?"
"남의 사생활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으신가. 요즘에 기자하고 사귀나 보지?"
"이유라하고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데?"
여기서 왜 이유라 이름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영도는 기분 나쁘다는 듯 여자를 흘겨봤다.
"너 정말 기자 끄나풀이라도 된 거야? 뭐야?"
"기분 나빠하지마. 그 계집애가 잔뜩 벼르고 있어서 하는 말일 뿐이니까."
"벼르긴 뭘? 나랑 결혼한데?"
"사귀다가 차버릴 거래. 자기한테 모욕감을 줬다나 뭐라나. 이래서 안 배운 것들은 못 쓴다니까. 하는 짓거리가 영 꽝이야."
혀를 차면서 고개를 살레살레 젖는 여자도 그리 배운 것 같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나 싶던 그녀는 영도 쪽으로 몸을 찰싹 붙이곤 엄청난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소곤거렸다.
"하여튼 조심해. 그쪽 프로덕션 사장 악질인 거 알지? 잘못 걸리면 추문이야. 더럽고 추잡스러운 소문."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름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영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거였다.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악질로 따지면 우리쪽 사장도 만만치 않지."
"어머! 오호호! 오호호! 맞다. 맞아!"
마구 웃으면서 여자는 손뼉을 쳤다. 즐거운 건 여자 뿐으로 영도는 지겨워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꽤나 재미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클럽에 나타난 영도였다. 그와 아는 척을 해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하나, 둘 그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금방 떠들썩해진다. 개별적으로 놀던 이들이 한무리가 되니 흥은 넘치고 더 소란스러워졌다.
"저기는 재미있어 보이네."
시경의 말에 수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워낙에 많아서 영도는 보이지도 않았다. 바로 어떤 표현을 하는건 아니나 꾹 다물린 입매에서 기분 나쁨이 전해졌다.
"왜? 형한테 여자들 꼬이는 게 싫어?"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요."
수인은 영도가 치워낸 술병을 들었다. 술이나 마시자 싶었다. 이건 어떤 술인지 모르겠지만 달콤하고 혀끝이 얼얼한 느낌이 독특했다. 자작을 하는 수인을 빤히 보던 시경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뭔가 싶어 그쪽을 보자 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같이 놀자."
"아니요. 전 괜찮-."
괜찮으니 혼자 가라 하고 싶었지만 손목을 감싸는 손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결국 이번에도 시경의 뜻대로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영도의 뒤로 가서는 앞을 막는 사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뭔가 싶어서 띠꺼운 눈길을 보내던 사내는 서있는 게 시경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눈을 깔았다. 그런 식으로 영도의 바로 옆까지 접근을 한 시경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같이 놀자."
영도는 시경을 흘깃 봤고 그 옆에 선 수인도 확인했다. 잠자코 있으려 했지만 자연스럽게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고개를 돌려버리고 마는 영도를 두고 다른 이가 수인을 손가락질 했다.
"그 애는 뭔데 아까부터 계속 데리고 다녀요?"
"내가 아끼는 동생이야. 왜 데리고 다니면 안 되는 거야?"
시경은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괜히 개기면 안 될 것 같았던 이는 깨갱하고 물러났다. 직후 시경은 영도 옆자리에 수인을 앉혔다. 그 앞으로 이런저런 술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시경은 누구 들으라는 듯 말했다.
"수인아. 너 마실 술 여기에 많다."
"그런 애가 술을 마실 줄이나 알겠어?"
바로 무시를 하는 말이 날아오자 시경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왜 이래. 보기보다 잘 마셔. 그렇지?"
질문을 받는 건 당사자인 수인이 아닌 영도였다.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 안쪽으로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그걸 봤을 때 영도는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느꼈지만 그걸 내리누르고는 무시를 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 앉은 여자에게 잔을 건넸다.
"마셔."
"어머. 나 술 사주는 거야? 고마워~."
여자는 당장 영도의 목을 끌어안으며 격한 감동을 표현했다. 그러자 다른 여자들도 영도에게 매달려 '나는 왜 안 사주는 건데?'라며 징징 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때라면 가볍게 무시해버렸을 터였다. 하치만 지금은 괜한 오기가 생긴 영도는 바텐더를 보면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 사인을 읽은 바텐더는 뒤에서 맥주를 꺼내 위로 올렸다.
"자, 한병씩 드십시오. 원혁씨가 쏘는 술입니다."
"와우~ 화끈한데~"
"아싸!"
금방 환호가 가득 찬다. 사람들은 위로 나온 맥주를 들고는 뚜껑을 땄다.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맛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수인의 앞으로도 술이 한 병 내려놔졌다. 누군가 그런 수인에게 빈정거리는 말을 던졌다.
"애송이 아서. 그러다가 이불 위에 오줌 지린다?"
"너무 그러지마. 불쌍하잖아~"
말은 그리 하면서도 이미 웃고 있었다. 배를 잡고 웃어대는 이들은 무시를 한 채로 수인은 병을 따서는 꿀꺽꿀꺽 마셨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병 하나를 다 비워내고는 태연히 입술 주변을 닦아냈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그는 조금도 취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제야 다른 이들은 수인에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술 정말 잘 마시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것도 마셔볼래?"
누군가 내미는 술병의 모양을 본 이가 만류를 했다.
"그렇게 센 술은 안 돼."
"뭐 어때. 형. 마시게 해도 되지?"
사내가 묻는 말에 시경은 영도를 봤다. 영도는 정면을 바라볼 따름이지만 그 눈으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멋대로 구는 이쪽에 화가 나서 뭔 짓을 해도 무시하고 말겠다는 투로 굴고 있지만 정말은 신경 쓰여 죽을 거다. 그렇게 신경쓰이면 지금 바로 잡아끌고 밖으로 나가면 될 텐데 말이다. 시경은 누구 들으라는 듯 말했다.
"마시게 해 봐."
"자, 이것도 마셔봐."
사내는 병을 수인에게 내밀면서 고개를 숙였다. 눈빛은 수인을 무시하고 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독하긴 해도 맛은 최고지. 속이 뻥 뚫리게 될 거야."
권하는 건 이 안에서도 꽤나 악명이 높은 놈이었다. 그런 걸 촌놈에게 권하다니. 마셨다가 무슨 일 나면 어쩌려고. 시경이 데리고 온 아이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미 재미있는 일이라고 판단을 내린 일에 대해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던 이는 마개를 열고 수인에게 재차 권했다. 수인이 병을 받아들고 입술을 대는 순간 모두가 긴장해 입을 다물었다.
묘한 침묵 속에서 영도가 고개를 돌려 수인을 봤다. 수인이 병을 기울듯이 들고 안에 담긴 액체를 한모금 마셨다. 기다렸다는 듯 꿀꺽꿀꺽하고 술이 넘어간다. 그걸 본 영도는 당장 질린 얼굴이 되었고 주변에서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우와와아! 굉장하다!"
"술 엄청 센데?! 굉장하잖아!"
"대단하다! 더 마셔봐!"
주위에서 시끄럽게 굴어도 상관치 않고 수인은 마지막 한 방울 마저 다 마셔버렸다. 빈 병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쳐냈다. 뒤에서 나온 손이 빈 병을 들고 가서는 공중에서 두어번 흔들었다.
"이걸 다 비웠어?"
술병을 흔들어도 바닥에 깔리는 건 없다. 정말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거였다. 시경이나 이렇게 마실 수 있는 건데 말이다.
흥미롭다는 듯 시경의 입술 꼬리가 완만하게 올라갔다. 그는 수인의 머리에 한 손을 올리곤 대견하다는 듯 토닥였다.
"엄청나. 굉장한데? 너 술고래구나. 술은 어떻게 배운 거야?"
"산 건너 할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시골에서 이런 술이 있나?"
"뱀술 정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내뱉은 말에 모두가 벙 찐 얼굴이 되었다.
뱀술? 그건 또 뭐야?
그리 묻는 눈빛들에도 수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차분하게 있던 수인은 재차 술병에 손을 댔다. 시경은 그 술병의 아래 부분을 붙잡았다.
"그만 마셔. 이건 뱀술처럼 약이 아니야."
수인이 위를 쳐다봤다.
애초에 술을 먹인 건 너면서 이제와 말리는 거냐.
그리 묻는 눈빛을 모른 체하며 시경은 영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단 독이지. 그렇지? 우리 스타 나으리."
부름에 영도는 반응을 보였다. 느리게 고개를 돌려 시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무표정이라 볼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옆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수인이 똑바른 자세로 앉아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은 집에서 그대로고, 자세는 번듯하기만 했다.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잘 잘려있으니 보기에 좋은데 거슬린다. 그건 저 선글라스 때문이었다. 지극히 촌닭다운 수인에게 있어 저런 고가의 물건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 외에도 지금 이 공간 안에 수인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가 웃고 박수를 쳐준다 해서 그게 너를 추켜 세워주는 거라고 생각하지마.
이건 그저 데리고 노는 것뿐이다.
치미는 울화를 내리누를 수 없었던 영도는 벌떡 일어섰다. 고정된 의자라 큰 소리가 난 것은 아니나 박력이 대단해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도는 수인의 옆으로 가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일어나."
위로 주욱 당겨도 수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항하는 건가 싶어 팔을 잡은 손으로 힘을 주자 얼굴을 든다. 고개를 빳빳이 드는 것에 영도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일어나라고."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수인을 바라보는 영도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는 순간 수인은 아래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화가 난 것을 어필하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었다. 너는 내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거야.
그 순간 초치는 말이 옆에서 들렸다. 시경은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수인이는 여기에 더 있고 싶은 모양인데?"
"......"
시경의 태도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이제 시경의 장난에 놀아날 마음이 없었다. 영도는 시경의 어깨를 일부러 세게 치고는 수인을 잡아당겼다. 억지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진 수인은 다리에 힘을 줬다. 따라가지 않겠다는 거였다.
이걸 한 대 칠 수도 없고. 다음 순간 영도는 수인 쪽으로 몸을 숙였다. 수인의 배에 어깨를 대고 다음 순간 그 몸을 들어올렸다. 짐을 들듯이 번쩍 올려든 영도는 시경을 노려봤다.
"두 번 다시 이 녀석 건드리지마. 안 그러면 너랑은 끝이야."
끝이라니. 하고 많은 표현 중에서 왜 그런 유치한 단어를 선택하는 건데?
시경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영도를 바라봤고 영도는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뜨는 마지막 순간 영도는 시경을 노려봤다. 날카로운 눈빛 안쪽으로 살의가 끼어 있었다. 누군가 '장난 아니다.'라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그렇게 영도가 수인을 데리고 나가버리자 시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놀고 있어. 난 더 놀러 간다."
날카로운 영도의 눈빛을 받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경쾌한 얼굴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긴 했지만 말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시경이 나가고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 말이 나왔다.
"보장하는데 언젠가 정말로 원혁이한테 살해당할 거야."
"어딘가 뒷산에 산채로 매장당할 거야."
"그 전에 잘못 했다고 엎드려서 빌지 않을까?"
유리잔을 닦으면서 지나치듯 하는 바텐더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수긍하는 그 분위기는 시경의 알듯 말듯한 성격을 대변하는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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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선 영도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디에 차를 세워뒀는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차가 보이질 않았다.
"어?"
순간적으로 잘 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 떠도 여전했다. 차가 없었다. 그 커다란 차가 어딘가에 가려져서 안 보일 턱은 없고 지금 정말 없어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당혹을 감추지 못한 영도는 급히 그리로 달려갔다. 그래도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에 닿는 시선은 '맞나? 아닌 것 같은데? 원혁이 저런 꼴로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같은 것이었다. 12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 뒤쪽이라 인적이 드문 거지 반대편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사람들이 많으면 정체가 들통 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영도는 급한 대로 골목길로 들어가선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인은 내려놓았다.
바닥에 양발을 댄 수인은 비틀거렸지만 벽에 등을 기대곤 가만히 있었다. 그걸 확인한 영도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준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몇 번이나 신호음이 가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래?"
이런 식으로 전화를 안 받는 걸 이쪽이 제일 싫어한다는 걸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런 놈이 신호만 가게 마냥 손 놓고 있을 리가 없는데. 그리 생각을 하는 동안 마음이 점점 조급해진다. 급한 대로 영도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신호음만 울릴 따름이었다.
"이 자식이 빠져서는-."
부모님 돌아가신 일 외에는 부르면 튀어나오는 게 정상이었다. 화장실에서 일 보고 있어도 연락을 하면 끊고 나와야 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나 전화를 안 받아? 평소의 준식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상하다 생각을 하면서도 재차 전화를 걸게 된다.
세 번째로 전화를 하게 될 때 갑자기 수인이 비틀거렸다. 앞으로 쓰러지려는 것에 놀란 영도가 그쪽으로 손을 뻗자 수인이 포옥 안겨왔다.
체중을 실어 안겨오는 것에 영도는 어어-하는 소리를 냈다.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대는 영도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수인의 무릎이 꺾인다.
"어? 야?!"
멀정히 잘 서있던 놈이 갑자기 휘청거리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드폰이 떨어졌지만 영도의 손은 수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은 원체 무겁기 마련이었다. 아래로 주욱 내려가는 수인을 부축하며 영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야. 다리에 힘 안 줘?"
하지만 여전히 비틀거릴 따름이었다. 이쪽 품에 얼굴을 묻느라 수인의 선글라스가 위로 올라갔다. 덕분에 감고 있는 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잠들어 있었다.
"이 촌닭이-."
주는대로 마실 때부터 알아봤다. 그러게 사람이 말리면 하지 말아야지. 뭘 잘났다고 주는 대로 마시는 거야. 어머니가 이쪽을 붙잡고 잔소리를 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수인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네가 알아서 술 깨고 집으로 기어들어와!"라고 하고 싶지만 영도의 손은 수인을 위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끙끙 거리면서 부축하는데 옆에서 빠앙-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영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 도로변으로 검은 외제차가 서고 뒷 유리창이 내려갔다. 그 사이로 금발 머리카락을 지닌 뺀질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시경이었다.
"준식이한테는 먼저 퇴근하라고 했으니까 거기서 기다려도 돌아오진 않을거야. 오늘은 막차 타고 귀가하도록 해. 그럼 이만."
시경은 손바닥 키스를 날리며 진한 윙크를 했다. 그리곤 창이 올라가고 차가 출발한다. 영도가 어떤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시경의 차는 순식간에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
.......뭐 저런 쌍쌍바 같은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이도 저도 아닌 얼굴로 있던 영도는 하-하는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을 타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하하. 하고 메마른 웃음을 토해내던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소리를 질러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바깥으로 달려 나가 죽자고 시경을 쫓아가 두어방 갈겼으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아침 뉴스에 대문짝하게 나와도 좋으니까 저 새끼랑 어떻게 해결을 봐야 할 듯 싶었다.
아니. 사장이라는 새끼가 소속 연예인 관리를 이렇게 안 해줘서 나더러 어쩌라고? 내가 지금 너랑 계약 파기하겠다고 먼저 언플한 것도 아니고, 다른 소속사랑 만나서 뒷공작 꾸미지도 않고, 연애를 한다고 마음 졸이게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일을 안 하고 다른 데서 딴 짓을 하길 했냐 뭐냐.
내가 발로 연기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 개새끼야!"
욕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수인을 끌어안은 채로 발로 바닥을 세게 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뒷발로 벽을 마구 쳐댔다. 씩씩거리는 동안 품 안에서 우웅-하는 소리가 났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눈을 내리뜨자 선글라스가 거의 다 벗겨진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자고 있기는 한데 지나치게 자리가 불편한 듯 입술이 앞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응석을 부리 듯 잠든 그 얼굴에 영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화근이 촌닭 때문이었다. 애초에 노랭이랑 안 놀았으면 이런 일도 안 생겼을 거 아니야? 내 원래 계획은 12시 안에 귀가해서 이 촌닭이 해주는 밥을 먹고......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영도는 가만히 있었다.
화가 나 죽을 것 같던 얼굴도 많이 풀린 상태였다. 아니. 그건 무표정이었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재차 눈을 내리떴다. 수인은 영도에게 안겨져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상태였다. 놓으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바닥에 추하게 널브러질 터였다. 정말 그리 한다 해도 수인은 원망을 해선 안 되었다. 다 자업자득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긴 속눈썹. 그 아래로 통통한 뺨과 매끈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유난히 붉은 듯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스물 한살이라고 했나. 아직은 어렸다.
아직은 세상을 모르지.
"......내가 정말 미치겠네."
천하의 원영도가 언제부터 보모 짓거리를 하게 됐냐. 혀를 찬 영도는 수인을 한 팔로 받쳐 들고는 그의 머리에 어정쩡하게 올려져 있던 선글라스를 빼앗아 썼다. 좋은 제품이었다. 노랭이 건가. 이거 옥션에 올려서 천원에 팔아버릴 거라며 영도는 수인의 팔을 잡아 옆으로 돌렸다. 순식간에 뒤로 돌려선 그 몸을 업었다. 한 팔로 엉덩이를 바치고 무릎을 구부려서 떨어진 핸드폰도 챙긴 직후 다리를 주욱 폈다.
양 손으로 수인의 엉덩이를 단단히 바치고 밖으로 나왔다.
연기나 TV촬영이 아닌 것으로 누군가를 업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실상 영도는 연애를 할 때에도 여자를 업어본 적 없었다. 얼굴이 반반한 편이었던 그는 성가신 일에 대해선 싫다고 분명히 말하는 타입으로, 여자가 곤란하게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대번에 정색을 하는 타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도 알아서 곤란한 말을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기만 했다.
걸을 때마다 양쪽으로 나온 수인의 다리가 흔들렸다. 보이는 수인의 청바지는 물이 많이 빠졌고 낡은 티가 났다. 신은 운동화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오랫동안 입고 신은 물건이었다. 언제나 늘 새 물건들로만 둘러싸여져 지내왔던 영도가 그간 잊고 있었던 어떤 것이 느껴졌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깨에 올려진 수인의 얼굴이 흔들린다. 그러다가 옆으로 흘러내리려 하자 몸을 추스르면서 고쳐 업었다. 느리게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12시가 넘은 거리는 아직도 빛이 가득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도,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도, 그리고 다정해 보이는 연인들도 많았다. 이 거리의 빛은 언제나 꺼지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새벽이나 되어야지 사람들이 사라지겠지.
"원혁 아니야?"
옆에서 들리는 말에 영도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가는 영도를 두고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아닌 모양이지. 일반사람들 중에서도 연예인 닳은 사람 많아."
"하긴 원혁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노래방이나 찾아봐. 추워 죽겠어."
멀어지는 대화 소리를 들으면서 오늘이 추운 날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영도는 두터운 차림이 아니었다. 언제나 늘 차량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간소하게 입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춥지 않은 건 업고 있는 민폐덩어리 때문일 터였다. 어리기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뜨끈뜨끈해서 마치 난로를 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걸을 때마다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다. 일어나려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아주 제대로 취해버린 모양이었다. 뱀술 좀 마셨다고 해서 술고래가 된 것도 아닐 텐데. 이 어린 것은 왜 이리도 무모한 건가 싶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던 영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도로로 나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택시가 세워진 곳으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거하게 취한 이들도 있고 아예 바닥에 주저앉은 이들도 있고,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택시를 잡으려고 혈안이었다.
저들이 다 가길 기다리고 택시를 기다리는 건 안일한 거였다. 차라리 매니저 용한한테 전화를 걸어볼까? 그 놈도 시경하고 한통속이라 이미 전화를 꺼놓았을 수도 있었다. 정말 미치겠군. 그리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씩씩하다고는 해도 그는 최대한 건물 쪽으로 몸을 붙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영도는 버스노선도를 확인했다. 가만히 보면 알 것 같은데 살짝 헷갈리기도 했다. 여기로 가면 동네 쪽으로 들어가는 게 맞나? 그리 생각을 하며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버스 정류장. 참 그리운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곳도 줄창 이용을 했는데 뜨고 나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차가 집 앞으로 탁탁 나오니까 그것에 익숙해져서 버스나 지하철 같은 건 등한시하게 되었다. 차가 없으면 택시로. 그런 생활이 도대체 몇 년인가 싶었다.
그때 수인이 고개를 뒤로 빼더니 어깨 쪽으로 머리를 박았다. 툭툭. 치는 느낌에 영도는 한마디 했다.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여기서 던져버린다?"
지금도 던져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냐.
영도는 다시 버스 노선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영 모르겠다. 이렇게 보는게 맞는 건지, 이 자리에 서있는 게 잘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리로 다가오는 버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맨션 근처에서 본 버스였다. 아무래도 여기서 타야 동네로 들어가는 게 맞는 것 같고 때마침 동네로 들어가는 버스를 발견했으니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영도는 급히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버스가 속도를 늦추더니 앞에서 멈추었다.
수인을 업고 있어서 버스에 오르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끙끙 거리면서 버스에 올라탄 영도는 버스비를 내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운전기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일행 좀 내려놓고 와서 돈 낼게요."
"그렇게 하십시오~."
이런 손님이 처음은 아닌 듯 버스 기사는 바로 문을 닫았다. 영도는 버스 안에 앉아있는 이들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들어갔다. 뒤쪽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수인을 두고 다시 앞으로 걸어왔다. 달리는 중이라 꽤나 몸이 흔들렸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금액을 확인했다.
2,000원이라. 잔돈이 있으려나. 지갑을 확인하자 다행히도 천원짜리 세 장이 보였다. 안도한 영도는 돈을 내고 다시 뒤로 갔다.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은 몇 되지 않았고 그들은 하나 같이 창 밖을 내다보거나 휴대폰을 이용해 음악 또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쪽에 관심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덜컹하고 흔들리는 버스에 맞춰 영도의 몸도 크게 흔들렸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가까스로 수인을 앉힌 자리까지 온 영도는 바깥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수인을 안으로 밀어내고는 옆자리에 앉았다.
"어차."
절로 소리가 나왔다. 수인의 옆에 앉은 영도는 뻐근한 어깨를 두어번 돌리고는 버스 내부를 확인했다. 촬영을 하려 버스를 탄 적은 있어도 개별적으로 탄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낯설고 이상했다. 요즘 버스는 많이 좋아졌다니까. 그리 생각을 하는 동안 재차 버스가 흔들리고 수인의 고개가 크게 움직이더니 영도의 어깨에 안착했다.
머리를 기댄 수인은 인사불성이었다. 눈을 딱 감고 입도 반쯤 벌려져 있는데 술 냄새가 풀풀 냈다.
설마 급성 알콜 중독으로 어떻게 되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웠던 영도는 수인의 턱을 잡고 입술과 코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술 냄새와 섞여서 고른 호흡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의사가 아니니 잘 모르겠다. 이걸 어째야 하나 싶었던 영도는 핸드폰을 꺼냈다.
덜컹하고 흔들리면서 수인의 몸이 앞으로 넘어가자 놀란 영도는 그 몸을 끌어안았다. 팔로 단단히 부축을 하듯 안고는 노래 소리에 집중했다. 노래가 끊기고 반대편으로 '여보세요.'라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집이냐?"
[나 지금 자고 있었는데......]
"그럼 집이겠네. 나 1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괜찮으면 집으로 좀 와봐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늦은 시간에 내가 왜 너네 집으로 가야 하는 건데?]
대꾸를 하는 목소리 안쪽으로 졸음과 짜증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도는 할 말을 할 따름이었다.
"안 오면 알아서 해."
전화를 끊고 그걸 품 안에 넣은 후 재차 수인을 확인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고개가 까닥거렸다. 그러다가 아래로 툭 떨어지자 영도는 급히 그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수인의 머리를 잡고 천천히 위로 올려 다시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한 영도의 얼굴은 진지했다.
실은 술 못 먹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번에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뭔 일 생기는 거 아니겠지? 한 때 TV를 틀면 동아리나 과 선배들이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해서 죽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 여럿 나왔는데. 영도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주량을 넘게 술을 마신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알고 있었다.
택시라면 밟으라고 닦달이나 하지 버스는 그리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충분할 정도로 밟고 있는 버스 기사에게 더 달리라는 말을 하고픈 눈길을 던질 따름이었다. 그 때 아래로 내려간 수인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러더니 한 손이 위로 올라가 영도의 팔을 잡는다. 양 손으로 팔을 끌어안고 그쪽으로 매달린다. 당황했지만 영도는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매달리지 마. 무겁잖아."
나는 널 업기까지 했다고. 나중에 술깨면 도대체 뭔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데?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안 수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위로 올라간 눈꺼풀 아래로 수인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
술에 취해서 붉게 물든 눈가나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를 봤을 때 영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하고 침 넘어가는 걸 느끼며 영도는 내심 당황했다.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면서 영도는 수인의 눈 위로 손을 올렸다. 눈빛을 가려버리려 했다. 그러자 수인이 그런 영도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아까보다 훨씬 더 또렷해진 눈동자로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어쩐지 눈빛이 맑다. 설마하니 벌써 술에서 깬 걸까? 차라리 잘 되었다. 내려서는 두 다리로 걸어가라고 해야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수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멍청이."
"......뭐라고?"
멍청이라니. 나 너 여기까지 업고 왔다니까? 애초에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진즉 집으로 들어가 쉬고 있었을 거라고. 그런 나한테 지금 멍청이라 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 기가 막혔던 영도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있었고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치사해. 바보."
중얼거린 수인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영도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수인은 재차 고른 호흡을 토해냈다. 영도는 그런 수인의 머리통에 한 손을 올렸다.
"야. 너 일어나봐. 지금 자는 척 하는 거 아니야?"
자는 척 하면서 사람 욕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수인의 머리를 잡아 가볍게 꾹 눌렀다. 그리 하는데도 수인은 눈을 뜰 기미가 없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영도는 더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잠든 수인을 바라보던 영도는 손을 놓고 몸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올린 채로 잠든 수인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허벅지 부근에 올려진 수인의 손이 보였다. 끝이 거칠고 갈라진 부분도 더러 있었다. 고생을 많이 한 손이었다. 수인의 손을 보고 본인의 손을 번갈아보던 영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일부러 감출 필요가 없음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도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 수인의 손을 잡았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스스로도 의아했지만 이미 손을 잡은 후였다.
잡은 손은 거칠고 마디가 단단했다. 완연한 사내의 손이었다. 그런 손을 뭐가 좋다고 잡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묘하게 긴장이 된다. 마른침을 삼키며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빠르게 달리는 버스 안은 훈훈했다. 하지만 맞닿은 체온은 더 따뜻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울렁거림이 듦을 느끼며 영도는 흔들리는 수인의 머리를 다른 손으로 잡아 어깨 쪽으로 조심스레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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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뭘 하려니 졸려서 견딜 수 없었다. 하품을 하면서 짐을 챙기는 친구를 바라보던 영도는 다리를 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영도의 발바닥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친구의 등 가운데에 꽂혔다.
"너 정말로 제대로 본 거 맞아?"
발로 차도 앞으로 몸을 조금 숙일 뿐, 별 반응이 없던 이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허리에 양 손을 올린 채로 근엄하게 서있는 영도를 바라봤다.
"정말 열심히, 성심성의껏 진찰했거든요? 술병 난 것일 뿐 크게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친구님. 그러니까 제발 좀 저를 거칠게 다루지 마세요."
존대를 하는 이의 눈동자는 반쯤 풀려 있었다.
이 맨션으로 들어와 어찌어찌해서 안면이 익게 된 이었다. 이름은 주호법. 나이는 영도보다 3살 많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말을 놓게 되었다. 물론 그건 영도만의 생각으로, 주호법은 끽하면 사람을 쥐고 흔들려는 영도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미남자를 예의바르고 할 일 확실하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정말은 깡패 같고 제멋대로에 지저분하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한숨을 쉰 호법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눈을 비볐다.
"답답해하면 입고 있는 옷 벗겨주고 머리 아프다 하면 약 먹이면 돼. 네가 말한 대로 마신 걸 보면 분명 내일 아침이 괴로울 거다. 해장술이라도 끓여주든가."
"내가? 저 촌닭한데?"
그건 말도 안 돼지. 그리 말하고픈 듯 인상을 쓰는 영도를 두고 호법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너 내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말이지."
호법은 가방을 뒤적였다. 핸드폰을 여기 어딘가에 넣어뒀는데? 그런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서 찾아보자 싶었던 그는 안경을 위로 추켜올리며 영도를 쳐다봤다.
"난 수의사이니까 너무 신용하지마."
"수의사든 의사든 그게 그거지. 하지만 나중에 문제 생기면 다 네 탓이야."
"......."
허리에 손을 올린 영도는 당당하고 뻔뻔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애초에 영도가 부른다고 해서 달려온 이쪽도 멍청한 거였다며 호법은 긴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겠다. 난 이만 간다."
손을 흔들며 몸을 돌린 호법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비틀거리며 나가는 그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일부러 찾아와서 진찰을 해주고 가는 거였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 해줘도 되겠지만 영도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호법이 집을 나서고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순간 당장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수인이 보였다. 전에는 '나 외에는 절대로 그 누구도 자서는 안돼.'라고 명명했던 침대가 어느 순간부터 수인 전용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다리를 주욱 뻗은 수인은 얇은 이불을 하나 덮고 있었다. 색색거리고 잠이 든 그 얼굴이 꽤나 편안해 보였다. 만취한 수인을 여기까지 업고 온 영도는 아주 죽을 맛이었는데 말이다.
"이 망할 촌닭녀석."
멋대로 노랭이를 따라가서 술 진탕 마셔서 뻗어버린 놈이었다. 이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집까지 챙겨 와서 수의사까지 부른 건지 모르겠다. 그냥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수인을 바라보던 영도지만 그는 거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가만히 보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자 문자가 한 건 도착했다. 열어보자 안쪽으로 바로 글이 뜬다.
[오늘 피곤했지? 내일은 2시부터야. 마지막 촬영 재미있게 하도록 해.]
보낸 이는 노랭이었다.
이 망할 놈의 새퀴. 다음에 볼 때에는 사장이고 뭐고 그냥 모가지를 확.
분한 마음이 컸던 영도는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었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는 바로 밖으로 나왔다.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자고 싶지만 찝찝한 건 싫었다. 저 촌닭도 씻으라고 하고 싶지만 만취해서 자는 놈 깨웠다가 무슨 주사를 부릴지 모르니 그냥 두기로 했다.
귀찮아서 10분 만에 씻고 나온 영도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별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던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수인을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그제야 수인을 침대 위에서 재웠다는 게 생각났다.
지난 몇 년간 이 방은 언제나 늘 영도 그만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던 만큼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 뭐야. 이번에도 나 소파에서 자야하는 거야? 하지만 전에 잘못 잤다가 허리가 무진장 아팠었는데. 그렇게 아팠는데 또 소파에서 자야하는 거야? 뭐야?
"......어차피 같은 남자이고."
그리고 사촌이었다. 남자끼리이니 알몸으로 자는 거라고 해도 괜찮았다. 신경을 쓰고 몸을 사리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는 생각이 든 영도는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어떻게 할까. 그리 생각을 하는 듯 진지한 얼굴을 하던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영도는 수건을 책상 위에 올리고 화장대에서 로션을 꺼내 얼굴에 발랐다. 불을 끈 그는 수인의 옆에 누웠다. 붙어 누워서 팔짱을 낀 그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가만히 있나 싶더니 꼼질거리면서 침대 끝으로 이동한다. 그 상태로 그냥 가만히 있나 싶더니 갑자기 바닥 쪽으로 손을 내린다. 두어번 더듬나 싶던 그는 손가락 끝에 잡히는 파자마 바지를 들고는 다리에 끼워 넣었다. 처음 누웠을 때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던 거다.
누운 채로 버둥거리면서 바지를 입은 후 다시 잠드나 싶던 영도는 잠시 후 '에씨.'라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랍장 안쪽에서 상의 속옷을 하나 꺼내 걸치고 다시 누웠다.
두어번 꼼질거리나 싶던 영도는 다음 순간 고른 호흡을 토해내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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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사랑. 나의 천사.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풋풋하게 누군가를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것 같지만 딱 내 짝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그 아이와 시간을 보냈고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쉬우니 아이를 데리고 어른들 앞으로 가자 싶었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소개를 하고 나서 내 걸로 침을 발라두자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런 영도의 마음도 모르고 아이는 따라가지 않겠다며 고개를 저어댔다. 영도로서는 참 억울한 순간이었다.
나 너 데리고 갈 거라니까. 이런 식으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라고.
그리 말하는 데도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먼저 가보라는 말을 하는 얼굴이 너무도 슬퍼보여서 영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말대로 혼자 가버리면 나중에 정말 후회하게 될 것 같았던 거다.
굳은 얼굴로 서있으려니 아이가 등을 밀었다. 꾹꾹 누르는 손이 작았다. 귀여워서 다시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디선가에서 '영도야~.'하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도는 그쪽을 쳐다봤고 그 짧은 순간 아이는 억새풀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아이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도는 어른들에게 발견이 되었다.
너무도 싫어하는 영도를 끌고 왔기 때문에 그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의 걱정은 대단했다. 혼자 돌아간다고 숲으로 들어간 건 아닌지, 이상한 사람 차에 탄 것은 아닌지. 그 생각으로 결국 사람들과 함께 영도를 찾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 보러 온 건데 그게 그렇게 싫었던 거냐며 역성을 내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영도는 그게 아니라며 항변을 했다.
'난 그저 여기서 여자애랑 같이 있었을 뿐이라고.'
'여자애? 이게 지금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주먹을 휘두르는 엄마를 피해 옆으로 물러서며 영도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정말 같이 있었다니까. 이만한 여자애라고.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너 자꾸 헛소리 할래? 그렇게 여기에 있기 싫어? 그래. 알았어. 지금 바로 올라가면 되잖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 엄마는 왜 내 말을 잘 듣지도 않고 그래?'
억울하기만 했던 영도는 정말 답답하다는 듯 미간 사이로 짙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런 얼굴로 바라봐도 그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이 녀석이 지금 쇼하는 구나-그런 눈길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정말 짜증나네. 인상을 쓴 영도가 재차 한마디 하려는 순간, 되었다며 손을 저은 엄마가 그의 손을 끌고 갔다. 몇 대 맞으면서 차로 끌려간 영도는 뒤를 돌아봤다.
검게 물든 억새풀밭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알았다. 조금 전에 정말로 어린 여자아이를 만났던가 싶을 정도였다. 아닌데. 난 정말로 봤는데? 내 천사는 어디로 간 거야? 지금 숨어있는 거라면 당장 나와. 어서-.
억울함에 이런저런 말을 해도 그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도가 이상한 말을 한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는 건가 싶어 가슴을 치는 영도에게 결국 누군가 한마디 했다.
'거기에 여자애는 없어.'
라고 말이다.
어른의 말에도 영도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달, 혼자서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다. 시골에 있던 친척은 영도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들에게 관심은 없었다. 할머니도 뒷전이었던 영도는 당장 억새풀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할머니에게 갔을 때 여자애는 없는 거냐고 묻자 다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은 정확하게 하지 않아도 '애가 왜 이러지?'라는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 눈빛들에 영도는 심장이 차가워졌다.
누군가 말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전쟁이 났을 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이 풀 사이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배고픔에 굻주려 죽어갔다고 말이다. 그 억울한 영혼들 중 하나를 본 게 아니냐고 말이다. 어린 영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거부했다.
난 분명히 천사를 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이 손 끝에 그 온기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천사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이쪽을 두고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을 했던 걸까. 몇몇 어른들은 굿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말에 영도는 짜증을 내며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영도의 첫사랑은 끝이 났다.
어디서 나타난 아이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유령이나 귀신이 아닐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만날 수 없으니 그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로 여자를 사귀고 만나기도 해봤지만 종종 천사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 억새풀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한숨을 쉰 영도는 눈을 떴다. 멍하니 있던 그는 갈증을 느끼고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거뭇한 뭔가를 보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헉!"
검은 그림자가 침대 위에 있었다.
도둑인가? 스토커인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던 영도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게 수인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당장 성질을 냈다.
"너, 일어났으면 나가! 앉아서 뭘 보는 거야?!"
귀신인 줄 알았잖아! 사람 심장 멈추게 해서 죽일 생각이냐?!
영도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 듯이 뛰는 심장에 한 손을 올렸다. 헐떡거리는 영도를 바라보는 수인은 차분한 눈길이었다. 어둡기 때문일까. 오른쪽의 회빛 눈동자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보다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귀염상은 아니었다. 허나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는 것에 영도는 마른침을 삶키며 손을 들었다.
"술 덜 깼으면 마저 자."
그 순간 수인의 손이 영도의 손을 잡았다. 언제 접근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촉감이 느껴져서 그쪽으로 고개를 내렸을 때, 수인에게 이미 손이 잡힌 채였다. 손목을 잡은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세게 쥐는 손길에 영도는 긴장이 되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긴장감이었다. 호흡 소리가 이상하게 들릴까봐서 아래 입술을 깨무는데 수인이 중얼거렸다.
"치사해."
".......뭐라고? 너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인사불성으로 취한 널 버스타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나한테 그 무슨 망발이야. 나중에 술 깨서 나한테 어떤 식으로 사죄를 하려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있는 동안 수인이 재차 중얼거렸다.
"자기만 다 잊어버리고. 치사해."
중얼거린 수인은 영도의 손을 잡고는 앞으로 접근을 했다.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 있는 느린 움직이었다. 하지만 수인의 얼굴이 코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영도는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보이는 건 수인의 눈동자였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특별한 눈동자가 우주처럼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술로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닿는 촉감이 느껴지는 순간 바로 떨어졌지만 영도는 반응을 취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동안 수인은 영도의 앞으로 접근을 한 채로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여 영도를 바라보는 수인은 진지한 얼굴이있다. 이쪽에서 이렇게 입을 맞추었는데 그쪽은 어떤 식으로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다는 듯 바라보던 수인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재차 얼굴을 내밀었다.
입술이 닿는다. 분명하게 인지를 하고 있었으나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수인의 입술이 다시 닿아있었다.
지금 왜 이러는 거야.
문득 든 생각에 영도의 손가락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지금 이건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수인을 밀어내야만 했다. 이 녀석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고 이 상황에 끌려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당장 떨어뜨리고 욕실로 끌고 가서 찬물을 머리에 부어줘야 했다. 주정은 다른 곳에서 부리라며 화를 내도 괜찮았다. 그리해도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향기가 났다. 풋풋한 내음. 지금껏 맡아본 적 없는 깊은 향을 맡는 순간 아찔해진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영도는 수인을 끌어안고 그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있었다.
벌려진 입술 안쪽으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할딱거리는 숨을 삼키며 영도는 더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어느새 그의 양 손은 수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밀어대는 힘을 당해낼 수 없었던 수인은 뒤로 쓰러졌다. 넘어진 수인을 아래에 깐 채로 영도는 작은 머리를 붙잡고 입을 맞췄다. 쪽쪽 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느새 입고 있는 모든 것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정신없이 수인의 입술에 매달려 실컷 탐하고 이를 세워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달콤했다. 사생활이나 연기로 여러번 키스를 해왔다. 하지만 지금껏 입을 맞추었던 그 누구와도 다른 맛이 났다. 이 맛과 향에 취해버릴 것만 같았다.
들떠서 입을 맞추는 동안 다른 곳의 맛을 보고 싶어졌다. 영도는 수인의 바지춤을 건드렸다. 셔츠를 잡아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매끈하게 손 끝에 달라붙는 피부였다. 타인의 피부를 이런 식으로 만지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머리로 열이 몰려 몽롱해진다. 멍하니 수인의 위에서 치대던 영도는 조급하게 굴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당장 수인의 셔츠를 잡아 목 위까지 올렸다. 그리고 보이는 밋밋한 가슴과 날씬하게 떨어진 허리라인. 그리고 옆구리 부근에 난 화상 흉터를 본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상처를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슴이 달려있지 않은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욕망이 미친 듯이 몸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번 더 입을 맞추면 그 때에는 정신없이 수인을 탐하게 될 것 같았다. 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을 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 다 술에 취했으니까.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해버리는 거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셔츠를 잡은 영도의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짧은 순간의 망설임. 영도는 셔츠를 천천히 내려 수인의 상반신을 덮었다.
보이는 건 양 팔을 위로 올린 채로 누워있는 수인이었다. 이쪽을 바라보고는 있어도 그 눈동자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영도는 차분한 수인의 눈빛에 지금 몸 상태에 대해 깨달았다. 묵직하게 발기가 된 본인의 물건을 느낀 그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미쳤어. 내가 정말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야.
".......미안하다."
중얼거린 영도는 당장 수인의 위에서 내려왔다. 방 밖으로 나온 영도가 향한 건 욕실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얼마 안 있어 안 쪽에서 물 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자 방 안에 남게 된 수인은 손을 들어 셔츠를 잡았다. 양 손으로 옷을 아래로 내린 후 옆으로 몸을 돌렸다. 몸을 웅크린 채로 눈을 내리뜨는 수인은 우울한 얼굴이었다. 칙칙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인은 입술을 반쯤 열었다. 답답한 듯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로 텁텁한 느낌이 난다. 목 마르다. 그런데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멍하니 있던 수인은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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