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가 속해 있는 소속사는 유명하기는 해도 방송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측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겨 거대 기획사와 마찰이 일어나도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는 서른 중반이지만, 스물살 초, 중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사장 시경의 막강한 사교성 때문인지 안 좋게 꼬일만한 일도 술술 풀리는 편이었다. 때문에 아신 기획사에 소속된 연예인들은 타 기획사보다 편안하게 계약이 맺어지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널널한 건 아니었다. 일단 본인 할 일을 다 하면 편안하지만 아닐 경우에는 그만큼 혹독해질 수도 있는 곳이었다.
노랭이 시경은 유들유들한 것 같아도 일에 함에 있어 인정사정이 없었다.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아닌 연예인에 대해선 아주 징그럽다 할 정도로 내쳐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시경의 눈에 수인이 든 것이 달갑지 않은 게 영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사장 어디에 있어?"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오나 싶더니 사장을 찾는 영도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뒷골목 깡패도 이보다는 예의가 있을 거라며 립스틱을 닫은 인예는눈을 흘겼다.
"몰라요."
"거짓말 하지마. 다 알잖아. 노랭이 어디에 숨겼어?"
"내가 사장님 엄마에요?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숨겨주게?"
코웃음을 친 인예는 곱슬거리는 긴 갈색머리카락을 지닌 글래머한 미인이었다. 일단은 사장의 비서로 일하고는 있어도 외관으로 보면 웬만한 연예인 여럿 뺨 후려칠 스팩이었다. 거울을 위로 들어서 마스카라 상태를 살피는 인예의 모습에 애가 탔던 영도는 카운터에 매달리듯이 몸을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불어. 나 지금 심각하거든?"
"됐거든요? 가서 스케줄이나 확인하세요. 저도 바빠요."
"뭐가 바빠! 손이 놀고 있잖아!"
아침에 와서 화장이나 고치고 있으면서 뭐가 바쁘다는 거야!
한마디 더 붙이려던 눈간 인예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거울을 내려놓으며 영도를 노려봤다.
"소리 지르게 하지 말아요! 인상 쓰면 정성들여서 한 화장이 다 밀리잖아욧!"
정말 할 말 없었다. 어떻게 된 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 모양일까 싶었다.
아연해하는 영도를 두고 인예는 재차 거울을 살폈다. 눈꼬리를 살피던 그녀는 '주름 생겼잖아.'라면서 짜증스러워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됐다. 내가 이 여자하고 무슨 말을 더 하겠어. 저 노랭이의 5년 비서인 인예였다.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다. 차라리 말을 말지. 그런 마음으로 영도는 몸을 돌렸다.
"맞다. 이거 가지고 가요."
딱 가려는 순간 뭘 주는 건가? 영도는 인상을 쓴 채로 뒤를 돌아봤다. 인예가 흔들고 있는 건 반으로 접힌 봉투였다.
"뭔데?"
"스토커님의 선물."
봉투를 받아들였던 영도는 주춤했다. 지금 들고 있는 게 굉장히 껄끄럽다는 얼굴을 한 채로 그는 혀를 찼다.
"이런 건 갖다버려."
"그냥 버렸다가 저주 받으면 어쩌려고요. 알아서 처리하세요."
인예는 거울을 들어 눈썹 모양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영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이 기획사는 도대체 뭐냐고. 소속된 배우들 보호는 하나도 안 되고 있잖아."
투덜대는 말에도 인예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붉은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뭐하면 처리반 붙여줘요?"
"처리반 뭐?"
"사장님 친구 있잖아요. 검은 전갈."
검은 전갈이라니. 잘은 몰라도 뒤세계에서는 악명이 자자한 인간이었다. 유명 연예인에서부터 모그룹 사장 및 국회의원. 유력 인사들의 약점을 틀어잡고 막대한 돈을 빼내서 뒤로 사업자금으로 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검은 전갈이라는 놈한테 걸려서 신세 망치는 사람 여럿 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랭이 친구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스토커는 지긋지긋하지만 그것 때문에 발목 잡히는 일은 더더욱 사양이라며 영도는 양 손을 위로 들었다.
"난 9시 뉴스에 나오는 일 만큼은 사양하고 싶어."
"설마하니 원혁씨가 나오겠어요? 스토커씨가 서해 앞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떠올랐다는 말만 나오겠지요."
"여자가 그런 말 하면 나중에 시집 못 간다."
"걱정하지 마시고 댁 앞가림이나 잘 해요. 슬슬 연애 기사 터질 것 같던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유라. 알지요?"
차가운 기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화를 함에 있어 내내 여유가 있던 영도였지만 지금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쾌한 듯 미간으로 주름을 만드는 영도를 바라보며 인예는 손톱 위로 훅-하고 바람을 불어냈다.
"이번에 그 쪽에서 움직이는 것 같던데요. 알아서 조심해요. 둘이서 붙어있을 것 같은 상황이 되면 빠르게 빠져나와요. 가까이 안 서있어도 잘 맞는 각도면 키스하는 걸로도 나오게 할 수 있다는 건 알지요?"
인예의 붉은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흥미진진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유라. 소문 안 좋아요. 꽤나 더러운 여자 눈에 들었네요. 원혁씨."
"요즘은 왜 이렇게 꼬이는 일만 생기냐. 일단 정보는 고마워."
"천만에요. 사장님 대신에 전달한 말이니까 잘 풀리면 사장님께 고맙다 하세요."
그 전에 멱살 잡고 흔드는 게 먼저였다.
일단은 알았다며 손을 흔든 영도는 밖으로 나왔다. 차마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복도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준식은 영도가 나오자 당장 고개를 들며 어색하니 웃었다.
"사장님 만나고 오셨어요?"
"그 인간 튀었어.
준식을 지나치면서 영도는 들고 온 것을 건넸다. 봉투를 받아든 준식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이건 뭔데요?"
"러브레터. 내용 좀 확인해 봐."
엘리베이터를 올라탄 영도가 아래층 버튼을 눌렀다. 그걸 확인한 준식은 편지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헛숨을 삼키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직된 눈동자가 확연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든 영도는 준식이 보고 있는 걸 빼앗듯이 잡아챘다. 그리고 알몸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사내 몸과 본인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보고는 숨을 죽였다.
사진을 쥔 영도의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갔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 준식은 안절부절 못해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 싶었는지 눈을 굴리던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 미친놈들 많아요."
"......더러워 죽겠군."
이를 악문 영도는 당장 사진을 찢어버렸다.
지금까지 별에 별 것들을 다 받아봤지만 이렇게 지저분한 건 또 처음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더 사진을 잘게 찢어선 옆 휴지통으로 던져버렸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로 걸어가는 영도는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이대로 바깥으로 나갈 생각인 모양이지만 아직 시간이 안 되었다.
"미용실로 모실까요?"
미용실이라니. 영도는 싫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내가 갈 곳이 그런데 밖에 없냐?"
"아니면 영화라도 보실래요?"
"시간이 그렇게 남아도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시면......"
"됐어. 운동이나 한시간 하고 가자."
갈아입을 옷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영도에게 말할 순 없었다. 분명 굳은 눈빛으로 그윽하게 바라볼 게 분명했다. 눈빛에 살해당하고 싶지 않았다. 영도가 운동을 하는 동안 근처 백화점에 들려 간단하게 사와야겠다면서 준식은 종종 걸음으로 영도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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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였기 때문에 춥기는 해도 햇빛이 따뜻하게 나면 꽤 포근했다. 원래 이런 날에 졸음이 더 잘 오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최씨 영감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한쪽 눈을 떴다.
이 맨션을 오가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식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싶어서 성가시다는 듯 바깥을 살피던 최씨 영감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이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범죄자인 거냐? 최씨 영감은 황급히 신문을 돌돌 말았고 수인은 당황해서는 모자를 조금 위로 올렸다.
"할아버지. 저예요."
"수인이냐?"
물으면서도 긴가민가 했던 최씨영감은 당장 문을 열고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곤 모자 끝을 잡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꾸벅이는 수인을 위, 아래로 확인했다. 얼굴이 안 보이는 건 전하고 똑같지만 그때는 머리카락이고 지금은 모자였다. 왜 그러나 싶었던 최씨 영감은 완전히 바깥으로 나와서 기지개를 켰다.
"에그그그. 죽겠다."
그러다가 손에 들고 있는 돌돌만 신문지를 확인한 그는 어색하니 헛기침을 하곤 경비실 안쪽으로 던져버렸다. 수인은 그런 최씨 영감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졸고 계셨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아니야. 원래는 자면 안 되는 건데 겨울 볕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네. 그런데 넌 왜 그런 모습이냐. 은행 털러 가기로 했냐?"
모자를 쓰고 칙칙한 빛의 낡은 옷을 입은 수인은 어떻게 봐도 수상쩍은 사람이었다. 최씨 영감의 지적에 무안해진 수인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런 건 아니고요.' 라며 웅얼거렸다. 대신에 들고 온 것을 들어보였다.
"주먹밥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괜찮으시면 같이 먹을까 해서 내려와 봤어요."
"주먹밥? 그거 좋지. 어디 보자."
최씨 영감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산책로 쪽을 가리켰다.
"저 위로 올라가서 먹자. 내 돗자리 챙길 테니까 기다려."
경비실 안으로 들어간 최씨 영감은 금방 천에 감싸인 돗자리를 들고 나와서는 씩씩하게 뒤편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자, 가자."
"돗자리 깔고 앉으시게요?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지. 내 전에도 말했잖아. 여기 사는 사람들은 저리로 안 다녀. 여름에는 으슥한 곳에 들어가 엉덩이 까고 방아질 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지."
"......"
야한소리를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최씨 영감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가 굳이 저런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이 수인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수인을 두고 최씨 영감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위로 올라갔다.
산채로로 조금 들어가면 화단이 있었다. 겨울이라 자라는 것도 없었다. 위로 올라가 당당하게 돗자리를 간 최씨 영감은 먼저 앉고는 옆자리를 두드렸다.
"자, 와서 앉아. 어서."
오라고 하니 가기는 하겠는데 정말 괜찮은지 모르겠다. 돗자리 한쪽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수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옆에 잘 정리가 된 꽃들이 보였다.
"역시 여기는 앉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저기 옆에 있는 벤치에 앉는 편이....."
"어허. 괜찮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앉아있어."
걱정 집어넣으라는 듯 최씨 영감은 양 손을 까닥이며 웃었다. 그 능청스러운 웃음에도 수인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여기서 먹다가 사람이 지나치면 어떻게 하지. 아직 수인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화려한 차림을 한 남녀가 '저건 뭐야?'라며 바라봤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명확하게 뭐라 할 순 없지만 그때의 기억은 수인에게 있어 꽤나 싫은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그런 수인과 달리 최씨 영감은 편하기만 했다.
"걱정하지마.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으니까. 그보다 좀 풀어봐.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잘 되었네."
수인은 들고 온 것을 내려놓고 안에서 캡으로 감싼 주먹밥을 끄집어냈다. 크기도 모양도 참으로 촌스럽고 투박했다. 하지만 먹음직스러웠다.
"아이고. 이것 좀 봐라."
최씨 영감은 주먹만한 주먹밥을 들어 눈앞으로 올렸다. 울퉁불퉁하고 쓸데없이 컸지만 그래서 더 소박한 맛이 있었다. 랩을 벗긴 주먹밥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은 그는 수인을 봤다.
"된장 바른 거야?"
"네. 그것 외에 달리 넣을 게 없어서...... 입맛에 안 맞으시면 어떻게 할까 싶으네요."
"걱정을 하지마. 난 밥에 된장만 있으면 열 그릇도 먹는 사람이야."
그걸 증명하겠다는 듯 크게 입을 벌려 주먹밥을 베어 문 최씨 영감은 오물거렸다. 빠르게도 입 안의 걸 넘긴 그는 황홀한 얼굴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최고야."
어렸을 때 어머니가 옆에 앉아 방망이질을 하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놀다가 출출해져서 들어오면 목청을 높이던 어머니지만 그래도 꼭 밥을 챙겨주시곤 했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이 이 주먹밥에서 느껴졌다. 감동을 받은 듯 최씨 영감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들고 있는 주먹밥을 바라봤다.
"정말 대단하군. 자네 요리사가 되어도 되겠구만."
그건 안 될 말이라는 듯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전 할 수 있는 요리만 잘 하지. 다른 건 하나도 못 해요."
"이 정도의 맛이라면 몇 가지만 개발을 해서 장사를 해도 큰 돈을 벌 수 있겠어."
"다 할머니가 해준 장맛이지요."
젊은 사람이 착한데다 겸손하기까지 했다. 최씨 영감은 바로 이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인의 등을 토닥였다.
"내가 손녀만 있으면 당장 자네에게 소개를 해주고 싶구만."
최씨 영감의 말에 수인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어려서 숫기가 없는 것뿐이지 나이 좀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활달하면 딱 좋을 텐데. 그리 생각을 하며 최씨 영감은 재차 주먹밥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래. 앞으로 뭐 하며 지낼지 생각은 좀 해봤나?"
"아직 못했어요. 그래서 답답하네요."
수인은 팔짱을 낀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낀 하늘은 칙칙한 빛을 띠고 있어 그것이 마치 수인의 속마음처럼 여겨졌다.
오늘도 베란다에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수인만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정체된 상태로 있었다. 할 일이 없고 손을 놓고 멍하니 있는다. 그 시간이 이리도 초조하게 여겨질 줄은 몰랐다.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하나도 없는 걸까요."
그저 영도의 식객이 되어버리는 걸까. 식객으로 남느니 하루라도 빨리 할머니 곁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테지만...... 그러면 그 사람은 영영 날 촌닭에 식객에 귀찮은 꼬맹이 정도로만 생각할 테지. 그런 건 싫은데.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경비 지용이 서있었다. 귀에 연락용 이어폰을 낀 그의 모습이 지금 이 분위기에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엄청난 잘못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수인은 당황해 손을 마구 저어댔다.
"죄, 죄송합니다. 일부러 이런 게 아니라-."
"박군. 자네도 이리로 와보게. 이거 아주 끝내준다네."
수인의 말을 자르며 최씨 영감은 새 주먹밥을 꺼내 위로 들었다. 수인과 최씨 영감을 번갈아보던 지용은 주먹밥을 받아 돗자리 끝에 앉았다. 양복 바지를 무릎 즈음에서 위로 올린 그는 이렇게 앉는 게 많이 익숙한 폼이었다. 그는 랩을 벗겨 주먹밥을 한입 베어 물었고 정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굉장한 맛인데요?"
"그렇지. 여기 이 새색시가 한 거라네."
최씨 영감이 손으로 가리키는 순간 수인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새색시라니. 그런 게 아니었다. 지용은 수인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아니요. 아니에요."
고개와 손을 동시에 젖는 수인은 얼떨떨했다. 저 경비와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다니. 언제나 늘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로봇처럼 무표정을 하던 지용이 아니던가. 우물거리고 주먹밥을 먹던 그는 아예 돗자리 위로 다리를 주욱 뻗고 앉았다. 그리고는 우물거리면서 주먹밥을 먹는다.
최씨 영감은 바구니에 들어가 있던 보온병을 꺼내 종이컵에 차를 따라 지용에게 건넸다. 고맙다며 한 손으로 차를 받아든 지용은 한 모금 마시더니 감탄을 했다.
"이건 티백의 맛이 아니로군요."
바로 알아주는 것에 수인은 용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에서 가지고 온 풀을 우려낸 물이에요."
"역시나. 맛있습니다."
지용은 한모금 더 차를 마시고는 눈을 감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혼자서 분위기 다 내는 지용을 흘기며 최씨 영감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네는 뭐 그렇게 먹는 음식을 두고 음미를 하나."
"제가 한때 소믈리에 지망 아니었겠습니까."
"소믈리에? 그게 뭔데? 먹는 건가?"
"마시는 거지요."
입술 꼬리를 위로 올리며 지용은 다시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요즘도 일 하기가 힘드나?"
"뭐, 똑같지요. 원래 남의 돈 받아먹고 일하는 게 제일 더럽지 않겠습니까."
"힘내게나. 자네는 얼굴이 좋아서 조금 있으면 기둥서방 제의가 들어올거야."
"안 그래도 얼마 전에 40대 아줌마랑 했습니다."
"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계좌로 한 장 들어오던데요."
"천만원?!"
놀란 최씨 영감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순간 지용의 얼굴로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백이요. 완전 개짜증이었습니다."
"아이고. 그건 좀 아니네. 물건을 좀 시원찮게 휘둘렀나봐."
"40대 아줌마인데다 80은 나갈 것 같던데요. 세운 것만도 용한 거였습니다."
최씨 영감은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동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지용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한 모금 넘기자 표정이 살짝 풀린다. 차를 마심으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다는 듯 말이다. 그러다가 지용은 옆을 확인했고 벙 쪄 있는 수인을 보고는 뒷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이런 대화는 거북하지요?"
최씨 영감은 지용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고는 얼굴을 내밀었다.
"거북할 게 뭐가 있어. 수인군. 자네도 잘 들어둬야 해. 원래 세상사는 게 다 이래. 더럽다고."
지용은 당장 그런 최씨 영감을 만류했다.
"아닙니다. 촌닭-. 아니. 수인씨는 그런 걸 몰라도 됩니다. 일단 있는 집 자제분이 아니십니까."
"수인이가 있는 집 자제라고?"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최씨 영감의 말에 지용은 그를 돌아봤다.
"있는 집 자제지요. 할아버지하고 전 이곳의 고용인이지만 수인씨는 고용주의 지인입니다. 격이 다르지요."
'이만큼.'라는 듯 지용은 손의 간격을 위, 아래로 벌렸다. 그 설명에 최씨 영감은 입을 반쯤 연 채로 '그런 건가?'라고 중얼거렸고 수인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전 그저 객식구일 뿐이에요."
그리고 언제 여기서 쫓겨날지 모르는 입장에 있었다. 할 일도 없고 식비만 축내는 사람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침울해지기만 한다. 기운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수인은 처량 맞아 보였다. 그런 상태로 마냥 두기도 뭐했던 지용은 최씨 영감을 엄지로 가리켰다.
"그런데 평소에는 뭐하고 지내십니까. 이런 식으로 할아버지하고 같이 밥 먹고 그러는 겁니까. 내 수인씨가 순진한 사람인 걸 아니까 하는 말인데 친하게 지내면 안될 사람입니다. 이쪽은 완전 애로 영감탱이니까요."
"어허! 왜 사람을 모함하고 그래!"
"사모님들한테 몸 팔아서 목돈 모으라고 어드바이스 해준 게 누구십니까."
"어허헛! 애가 듣는데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최씨 영감은 당장 지용의 입을 막으려 손을 들었지만, 지용은 느긋하게 그 손목을 툭툭 쳐냈다. '밥알 묻은 손으로 어딜 만지려고요. 하지 마십시오.'라면서 예의를 차리면서 최씨 손을 툭툭 쳐내는 게 마치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잘 몰랐는데 이 두 사람 정말 사이가 좋구나. 그게 절로 느껴졌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수인은 주먹밥을 하나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된장 특유의 짭쪼롬한 맛과 고소한 맛이 섞여서 자꾸만 입맛을 당긴다. 우물거리며 주먹밥을 먹던 수인은 얼굴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의아해하며 그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안녕."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지나치게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화려한 금발이었다. 익히 아는 얼굴이라곤 하나 이런 타이밍에 나타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만큼 수인은 바로 어떠한 반응을 취할 수 없었다.
주먹밥을 입에 댄 채로 굳어버린 수인을 본 시경의 입술 양끝이 위로 올라갔다.
"어. 굳어버렸네. 이거 재미있는 걸."
건드리는 대로 반응이 오니까 더 놀려주고 싶다는 듯 시경의 입술 꼬리가 양 끝으로 한껏 올라갔다. 시경을 본 지용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섰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지용씨는 여전히 멋있네요."
손을 흔들며 반가운 얼굴을 하던 시경은 여전히 앉아있는 최씨 영감에게도 목례를 했다. 그는 수인의 옆에 놓인 바구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뭐야? 먹는 건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수인은 새 주먹밥을 꺼냈다.
"된장 주먹밥인데요. 괜찮으시면 드세요."
"아니. 그보다 지금부터 같이 어디 갈 데가 있는데 말이야. 따라와 줄래?
"......갈 데요?"
수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모자를 쓰고 있더라도 그가 순간적으로 껄끄러워하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던 시경은 조금 더 짙어진 미소를 지었다.
"겁 먹지마. 안 잡아먹어. 따라오면 분명 재미있을 거야. 전에도 그랬잖아?"
전이라고 한다면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 때에는 재미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경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려니 시경이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아. 난 해 끼치는 사람이 아니야."
바라보며 시경은 다정하게 웃었다. 하지만 수인이 보기에 시경은 지나치게 화려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대해보지 못한 그런 류의 사람이기도 했다. 해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 그걸 선뜻 믿을 수 있어야지. 저번에 미용실을 갔을 때에는 분명 잘 대해주긴 했지만......
"같이 가자. 재미있게 해줄게."
수인은 눈을 감았다 떴다. 처음에는 고민하는 듯 싶은 얼굴이었으나 다음 순간 수인은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한 듯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수인은 뒤를 돌아봤다.
"잠시 다녀올게요. 그것들은 다 드셔도 돼요."
"그래. 뒷정리는 다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최씨 영감의 말에 고맙다는 말을 한 수인은 돗자리 위에서 일어났다. 시경이 아래로 먼저 내려가 수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말은 안 해도 잡아 주겠다는 의사가 전해졌다. 하지만 수인은 그 손을 잡지 않고 가볍게 아래로 몸을 날렸다. 사뿐하게 내려앉는 모습에 시경은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그것도 잠시 수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곤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 두 사람이 멀어지고 금방 보이지 않게 되자 최씨 영감은 혀를 찼다.
"해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고는 해도 보면 딱 위험한 놈인데."
수인은 저런 재미없는 부류의 인간하고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암만 해도 걱정스러웠던 최씨 영감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러는 동안 지용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댔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최씨 영감은 주먹밥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물며 물었다.
"뭐야. 그 여편네한테 또 호출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꾸를 한 지용은 오랫동안 신호가 가기만 할 뿐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자 끊어버렸다.
"바쁜가."
중얼거리는 지용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본인은 아니라 하나 이렇게 보면 딱 여자 문제였다. 누구를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수인의 일은 머리 속에서 까맣게 지워내 버린 최씨 영감은 응큼하게 여겨지는 미소를 지으며 헤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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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에 앉은 두 연인은 서로를 바라봤다. 이렇게 저렇게 대화를 나누는 일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걸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말이 결정될 것이다. 여전히 사이좋은 연인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헤어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다가 남자가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그 얼굴로 음영이 드리워지고 이윽고 옆으로 빛이 들어온다. 그걸 느낀 것인지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고개를 들었다. 바로 정지가 들어가고 화면 위로 손가락이 내려왔다. 사내. 영도의 얼굴을 가리키며 감독은 뒤를 돌아봤다.
"이게 마지막 장면이 될 거야."
감독의 옆에 앉아있던 편집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하지 않아서 시청자들이 뭐라 하지 않을 까요?"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원혁씨는 어때?"
편집실에 들어와 있었던 영도는 감독을 내려다봤다.
"전 마음에 들어요."
"그러면 된 거야."
원혁이 마음에 들면 그걸로 만사 해결이다. 그런 뉘앙스로 허리를 세운 감독은 정지된 화면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주인공 마지막 씬까지 다 찍었어. 내일 촬영만 하면 정말 완전히 땡이야."
"이야. 긴 것 같았는데 벌써 다 끝나버리네요."
허리에 양 손을 올린 영도는 감회가 새롭다는 얼굴이었다. 감독은 원혁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웃었다.
"그간 정말 수고가 많았어. 이번에도 드라마 대박 날 것 같아."
"그러면 고맙지요. 서로에게 좋은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내일 촬영 끝나고 쫑파티 할 건데 올 거지?"
"오지 말라고 해도 와야지요."
"그래. 그리고 하나 더 말인데......"
감독은 원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도 할 생각일까.
복도로 나와 지나치던 여자가 사라지자 감독은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넌 연극 무대 같은 건 관심 없어?"
"왜 관심이 없겠어요. 무명일 때 발성 다진다고 몇 번 무대에 선 적 있어요"
"그래? 그러면 돌아가는 시스템은 잘 알겠네?"
"전하고 얼마나 달라진지는 몰라도 대충은 비슷하지 않겠어요?"
"내 후배가 이번에 색다른 연극을 시도해볼 모양이야. 그런데 마땅한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던데. 괜찮으면 한 번 가서 오디션이라도 봐 볼래?"
원혁은 쓰게 웃었다.
"그러고 싶어도 저 내년 6월까지 스케줄 다 차있어요. 2월 부터는 영화 들어가고요."
"너 바쁜 사람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이 명함 좀 가지고 있어라."
영도는 감독이 건네는 명함을 받았다.
극단도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거였다. 이런 스팩에 스폰서가 제대로 붙을 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쪽과 계약을 맺은 후 그걸로 언플을 해서 돈을 끌어모을 계획일지도 몰랐다.
"괜찮은 놈이고 머리도 좋아. 분명 다른 연극하고는 차별이 되는 걸 만들어내지 않을까. 잘은 몰라도 네 커리어에 도움이 되면 됐지 망치는 일은 없을거다."
말은 그리 해도 이미 본인 작품이 끝난 마당이었다. 이후에 이쪽이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이미 그에게 있어 관심 밖의 문제일 터였다. 후배라 해도 내 가족이 아니고, 그냥 능력이 있으니 소개를 해주고 싶은 거겠지. 한번 소개를 했다는 식으로 후배들 사이에서 어깨에 힘주고 싶은 걸 수도 있고 말이다.
이 바닥 생리에 대해선 빤한 영도였다. 때문에 웃었다.
"나감독님이 주시는 거니까 받아야지요. 대본 나오면 한 부 보내주세요."
"내일 가지고 올게. 내가 다른 사람 일은 잘 나서지 않는데 유독 아끼는 후배다 보니 오지랖 넓게 나서게 된다. 괜히 껄끄럽게 해서 미안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감독님 사람이랑 작품 보는 눈은 저도 신뢰하니까요."
"은근슬쩍 돌려서 네 자랑 하는 구나."
지금 나감독이 찍은 드라마의 주연은 다른 누구도 아닌 원혁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있다함은 원혁을 선택한 그의 탁월한 감각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알아차린 거냐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원혁의 팔을 두어번 두드리는 나감독은 굉장히 만족한 얼굴이었다.
쫑파티가 끝난 후에도 연락은 계속 주고받자며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 나감독과 헤어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 10시 반이었다. 마무리 작업만 하는 거라서 일찍 끝나는 거지 초반에는 새벽 촬영도 하고 밤샘도 해봤다. 어쩌면 지금 이 시기가 가장 한가한 듯 싶었다.
아닌가. 조금 있으면 시상식이 남아있구나. 일정을 모르겠네. 얼마 전에 슈트를 맞춘 게 있는데 그건 제대로 잘 나오려나. 미용실 예약 같은 건 매니저가 알아서 하겠지만 말이다.
"일 끝나셨습니까."
나타난 건 준식이었다. 요 며칠 계속 준식이랑 붙어 다니고 있었다. 이상할 건 없지만 매니저 용한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즘 내 매니저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제, 제가 일을 못해서 그러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 매니저가 붙어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준식이 일을 잘하긴 하지만 연말이 가장 바쁠 때였다. 그런데 어딜 이렇게 다니는지 모르겠다. 연말이라 챙겨줘야 할 사람들이 많은 건 아니겠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안 준식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여댈 따름이었다.
영도를 비롯해 로드매니저 준식,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담당 등 여럿이 한 무리를 지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기자증을 목에 건 사내가 접근했다.
"실례합니다. 원혁씨."
이 성가신 자식은 또 뭔가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어진다. 당장 꺼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인터뷰는 정식 요청을 거친 후에 하고 싶습니다만."
"그러지 말고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잘하면 대박 터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대박이라. 또 무슨 찌라시를 들고 온 건가.
눈을 내리뜨는 영도는 고까운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기자는 물었다.
"이유라하고 어떤 관계십니까."
"함께 드라마를 찍는 사이지요. 그걸 모르고 묻진 않으실 텐데요."
시치미를 뚝 때며 눈을 흘기는 영도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의 틈이 없는 그 미소에도 기자는 굴하지 않았다.
"제가 그런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어떤 관계십니까?"
"친한 동료 사이입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기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도는 기자 앞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앞을 버티고 서는 영도의 모습에 기자는 움찔했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에 비하면 담력 없는 모습이었다.
"한 건 잡기 위해서 직접 달라붙는 건 아주 구시대 방식 아닙니까. 요즘 세상에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대박 터트리길 원하다니. 좀 안일하신 것 같습니다?"
한쪽 입술 꼬리를 올리며 영도는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기자증을 확인해 상대의 이름을 파악하고는 기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박기자님."
"......"
키 차이도, 박력의 차이도 확연했다. 떨어진 간격이 있다 하나 기자는 영도의 살벌한 눈빛에 기가 질려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심해서 귀가하시라는 말을 건넨 영도는 느리게 몸을 돌려 기자의 앞에서 멀어졌다.
내내 숨을 죽인 채로 있던 준식은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막지 못했습니다."
"상관없어. 일단은 집부터 가자. 피곤해 죽겠네."
영도는 크게 하품을 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말에 영도는 기지개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집에 가서 먹으면 되니까 괜찮아."
"집이요?"
무슨 집? 그런 의문이 섞인 뉘앙스에 영도는 준식을 내려다봤다.
"왜? 뭐가 이상한 건데?"
"아니요. 지금까지 집에서 드신 적은 거의 없으셨던 것 같아서....."
듣고 보니 그랬다. 지금까지 집은 식사를 위한 장소가 아닌, 씻고 자고 그리고 연기를 재확인하는 장소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서 뭔가를 먹은 건 술과 간단한 안주, 그리고 사들고 간 인스턴트 음식들 뿐이었다. 실상 수인이 집에 들어온 건 며칠 뿐으로 녀석이 해준 밥을 먹은 것도 두어번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당연하게 집에 가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 걸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이건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별거 아니게 넘어갈 수 있을 법한 일인데도 묘하게 진지해진다. 실제로 인상을 쓴 채로 가만히 서있는 영도는 쉽사리 말을 붙이기 어려운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준식은 일단 차에 오르자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영도는 차에 오르면서도 쉬이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영 이상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차에 어디선가 진동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준식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사장님한테서 전화 왔습니다."
촬영하는 동안 다른 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준식에게 핸드폰을 맡겨두고 있었다. 그걸 지금에 와서 깨닫게 되었다면서 영도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액정 위에 뜬 노랭이라는 문구를 본 영도의 미간으로 주름이 생겨났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일까? 괜히 전화를 받았다가 피 보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시를 하고 쉽사리 떼어놓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성가셔 죽겠네."
툴툴 거리는 말을 내뱉은 영도는 핸드폰을 받았다.
"뭔데."
사장의 전화를 받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간 시경에게 당한 것이 많았던 만큼 좋은 말이 나을 수 없었다. 영도는 시경이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묘하게 조용했다. 왜 이렇게 잠잠한 거야? 더 불안해진 영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왜 이래? 할 말 있으면 해."
핸드폰에 귀를 대자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였다. 클럽인가? 아니면 어울리는 놈들하고 파티를 즐기는 건가? 그때 시경이 물었다.
[지금 어디야?]
"일 끝나고 집으로 들어갈 거야. 쓸데없는 곳으로 오라는 말을 할 셈이면 그만둬."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 난 인질을 붙잡고 있어.]
".......인질이라고?"
시경이 뭔 소리를 해도 반드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던 영도였다. 그런데 인질 운운을 하는 순간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빠르게도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건 바로 수인이었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진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 알아둬. 네가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으컁컁컁~.]
괴상망측한 웃음소리와 함께 시경은 전화를 끊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음악소리도 끊겼다. 듣기 싫은 시경의 목소리는 이미 멀어진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영도는 핸드폰에 댄 귀를 떼어낼 수 없었다.
.....지금 이 미친놈이 뭔 짓을 하는 거야.
핸드폰을 쥔 채로 굳어버린 영도는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쉽사리 말을 건넬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냥 저 상태로 있게 할 순 없었던 준식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집으로 갈까요?"
"홍대 인샬라로 가."
핸드폰을 된 손에 힘을 준 영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 망할 놈의 새끼."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는 영도는 살벌 그 자체였다. 괜한 불똥이 튈 것 같았던 준식은 토 다는 일 없이 바로 시동을 걸었다.
차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영도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핸드폰을 부서뜨릴 것처럼 꾹 쥔 채로 정면을 노려보는 그는 단단한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이건 분명 노랭이랑 촌닭이 같이 붙어있는 거였다.
망할 노랭이. 내가 분명 내 사촌동생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지? 촌닭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그 노랭이랑 만나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라 했잖아. 왜 인간들이라는 게 하나 같이 사람 말을 못 씹어서 난리야. 한마디 하면 탁 알아들을 순 없는 거냐며 연신 어금니를 갈아댔다.
무시무시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영도는 누구에게 더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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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크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으로 화려한 불빛이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로 흐르는 음악은 수인이 듣기에도 끈적하다 여겨지는 것이었다. 몽환적이었다. 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외부와는 단절되는 어떤 걸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본능적인 무엇을 일깨우는 분위기라고나 할까나?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아무나 들어올 순 없는 장소였다.
바 구석에 앉은 수인은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별 움직임 없이 빨대만 물고 있는 수인의 앞에 놓인 잔에 든 오렌지 주스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그저 물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술을 줄 걸 그랬나?"
반짝거리는 불이 들어오는 형광등을 보고 있던 수인은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말에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수건으로 잔을 닦던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의 앞머리를 길게 길러서 옆으로 넘긴 온화한 인상의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주스가 입맛에 안 맞으면 말해. 다른 걸 줄 테니까."
입을 열어 빨대를 놓은 수인은 바텐더를 바라봤다.
"아니요. 괜찮아요."
똑바로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대답을 하는 수인의 모습에 바텐더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곧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지금 수인은 이 가게 안에 있는 그 누구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명품이 아니면 특이한 형식으로 된 옷, 화려한 드레스 차림에 아름답게 치장을 한 이들 중에서 가장 수수하고, 촌스러웠다.
입고 있는 옷은 그가 평소에 입던 것으로 착실하게 세탁을 한 깔끔한 옷이었으나 뭔가 오래된 느낌을 풍겼다. 운동화 아래는 흙이 묻어 있고 검에 탄 때도 묻어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잘 잘랐으나 얼굴의 반을 가리는 우스꽝스러운 선글라스 때문에 모든 게 다 엉망진창으로 여겨졌다. 피부는 연한 갈색이고 손가락 끝은 하나도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굳은 살이 베기고 튼 살도 보였다. 그야말로 패션테러리스트. 촌스러움의 극치인 모습이었다.
다른 경우라면 수인같이 차려 입은 이가 이 가게에 들어올 수 없음이었다. 입구에서 얼씬 거려도 재수 없다며 가드가 주먹을 휘둘렀을 터였다. 그런데도 지금 수인이 이 가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당당히 주스를 마실 수 있는 건, 그를 데리고 온 게 시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수인의 촌스러움을 두고 '어떻게 저런 걸 입고 자살하지 않을 수 있는 거지?'라고 수군거리던 이들은 수인에게 다가서는 인물을 보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가죽재질의 래깅스에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티. 손목에는 팔찌를 여러 겹 겹쳐서 끼고 반지에 귀걸이까지 하고 붉은 천으로 머리를 감싸서 꼬랑지를 길게 늘어뜨린 스타일을 하고 있는 건 바로 시경이었다. 원래 곱상한 외모였던 시경이었기에 그렇게 차려입으니 여자 같기도 했다.
몇몇이 추파를 던져도 눈길 한번 안 주던 시경은 수인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두른 그는 다정하게 눈웃음을 쳤다.
"어때? 재미있지?"
"재미없어요."
"아하하하!"
기대하던 대로의 대답을 기대했던 대로 한다.
뚱하다고 여겨지는 얼굴로 한마디 내뱉는 말이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바를 두드리며 폭소를 하는 시경의 모습에 맞은 편에 있던 바텐더도 쓰게 웃으면서 '재미있는 아이네.'라고 중얼거렸다.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시경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바텐더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한 잔만 내 줘."
"언제나 늘 마시던 걸로?"
"그런 걸 묻지 말고 알아서 준비해. 촌스럽게 왜 이래?"
시경의 타박에 준수한 바텐더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런 식으로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은 거지."
바텐더의 말에 시경은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그를 바라봤다. 시선을 주고 받는 두 사람 사이로 오묘한 뭔가가 주고 받아지는 것 같았다. 그걸 느끼지만 정확하게 뭔지는 알 수 없다. 이윽고 피식. 하고 웃은 시경은 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재미있지? 예쁜 사람들 많잖아?"
"예쁜 건 잘 모르겠고 특이한 사람들은 많은 것 같으네요."
"그러면 나도 특이한 사람일까?"
수인은 시경을 바라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의 반이 가려지고 눈동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실상 이 가게 안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을 한 수인이었다. 그럼에도 시경은 이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 지금의 수인이 불편하게 여겨졌다. 그게 단순한 착각일 뿐일까.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차에 수인이 말했다.
"여우같은 사람 같아요."
".......여우라고?"
그건 또 뭔데? 그리 묻고픈 듯 바라보는 시경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같아요. 할머니가 서울 올라가서 제일 주의할 건 사기꾼도 뭐도 아닌 여우같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여시처럼 살살 웃으면서 사람 심장 파내가는 것들이라고요."
그 순간 시경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서울로 귀한 손자를 보내는 할머니의 마음에 따뜻해지고 그런 할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을 수인이 귀엽게 여겨졌다. 가식과 허영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십수년을 살아온 시경에게 있어서 지금 수인이 귀엽기만 했다.
"멋진 분이시네. 그런 말씀도 해주시고."
머리를 쓰다듬는 시경의 행동에 수인은 잠자코 있기는 하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껄끄러운 뭔가가 목구멍 안에 박혀있는 듯 싶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시경이 한 귀로 흘러듣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쉽사리 적응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수인에게 있어 낯설고 이상한 것 투성이었다.
"여기 정말 재미없어? 네 또래라면 들어오고 싶어서 미치는 장소인데."
"솔직히 답답하고 이상해요. 무섭기도 하고요."
"왜 무서워? 다들 겉모습만 화려하지 머리는 텅텅 비었어. 무서울 거 하나없는 놈들이야."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걸까. 수인이 언뜻 봐도 이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시경에게 말을 붙이고 싶거나 친한 척을 하고 싶어 했다. 동경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대상이 되는 시경은 시니컬하기만 했다. 그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뭐라 말을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수인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시경이 수인의 손목을 잡았다.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
다른 곳 어디를 가도 적응할 수 없을 듯 싶었다. 그냥 여기에 앉아있고 싶다는 말을 하려 했으나 그 전에 일으켜 세워졌다.
시경에게 잡혀 가는 수인 쪽으로 재차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크게 소리내 말하는 건 없으나 알게 모르게 무시하는 눈빛들이 날아왔다. 수인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안쪽으로 천을 걷으면 룸 형식으로 된 공간이 몇 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가자 안경을 낀 사내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시경이 아는 사람인 듯 그는 스스럼없이 상대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문현민. 여기서 뭐하고 있어?"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 사내는 읽고 있던 걸 내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용모를 지닌 사내는 웃는 상이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차분한 차림을 한 이의 옆으로 가면서 시경은 말을 건넸다.
"시끄러운 장소에서 대본 외우는 건 여전하네?"
"그렇지요. 저도 고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네요."
음악이 쿵쾅 거리고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가득한 곳에서 대본을 들고 있으면 쇼한다는 말 듣기에 십상이었다. 하지만 현민은 시끄러운 곳에서 집중이 잘 되는 특이한 타입이었다. 조용하면 되레 대본을 외울 수 없기 때문에 종종 인샬라를 찾고는 했다. 시경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이 주로 발길을 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수인아. 이리로 와. 소개시켜 줄게."
시경의 손짓에 수인은 천천히 다가와 현민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했다. 놀란 듯 현민을 바라보는 것에 그는 시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는 뭡니까?' 그리 묻기가 무섭게 수인이 중얼거렸다.
".......연예인이다."
수인의 말을 들은 시경이 '엥?'하는 소리를 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영도도 연예인이었잖아. 유명 배우랑 같이 살면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데?"
"하지만 할머니가 좋아하는 배우에요."
수인은 손가락을 들어 현민을 가리켰다. 그러자 유한 인상의 사내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조차도 드라마 속 모습과 딱이었다. 겉보기로는 20대 후반 같으나 실상 그는 경력 20년이 넘는 중견 배우였다.
어려서부터 연기를 시작해서 지금은 안정된 연기로 사극에 주로 출연을 하는 편이었고, 사극을 좋아하는 할머니가 꼭 챙겨보는 드라마에 간혹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얼마 전에 끝난 사극에서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수인은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인 좀 해주세요. 할머니가 좋아하실 거예요."
"사인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장님. 아는 아이입니까?"
"응. 잘 아는 아이지. 아주 귀여워."
입술 양 끝을 올리며 웃는 시경의 모습에 현민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었다. 그러다가 대본의 안쪽에 끼워 넣은 하얀 종이를 꺼내 거기다 금방 싸인을 해냈다.
"여기에 있어."
"고맙습니다."
수인은 현민이 준 사인을 확인했다. 정말로 연예인의 싸인이구나 싶었다. 실상 영도도 연예인이었으나 그는 별로 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시후에게 있어 할머니와 함께 볼 때마다 얼굴을 본 현민이 훨씬 더 대단하게 여겨졌다. 이 싸인 한 장이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 터였다. 자연스럽게 수인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할머니가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거니? 넌 내가 별로고?"
"좋은 연기자이신 것 같아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일 뿐이었다. 그걸 느낀 현민은 씁쓸해 하면서 뒷머리에 손을 올렸다.
오랜 연기를 통해 최근 사극에 정착을 했더니만 젊은층에게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었다. 수인의 저런 말이 이상할 건 없어도 역시나 마음은 아프다면서 머리를 긁적이려니 시경이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듯 두어번 손뼉을 쳤다.
"다시 소개할까? 이쪽은 문수인. 그리고 이쪽은 문현민. 우리 쪽에서는 방부제로 부르지. 올해로 벌써 35살인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
"제가 태어날 즈음부터 연기를 하셨으니 그 나이대인 건 당연하겠지요."
싸인을 잘 챙기면서 수인은 말했다.
현민은 시경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꽤나 당돌한 아이인 것 같았다. 시경이 관심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가기도 했다.
"재미있는 아이네요."
"그렇지? 하지만 흥미를 보여선 안 돼. 영도가 화낼 거야."
"영도가 왜요?"
"사촌 동생이거든."
현민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정말 놀란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린 현민은 수인의 모습을 위, 아래로 바라봤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영도의 사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이 차가 그리 많이 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 이리도 차이가 나나 싶었다. 영도는 아주 화려한 호랑나비 같았고 수인은 허허벌판에 자라는 흔하디 흔한 잡초 같은 느낌이었다. 수인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고,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자면 그런 느낌이라는 거였다.
"별로 안 닮았네요."
"아니. 닳았어."
시경의 단호한 말에 현민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경은 재차 말했다.
"아주 많-이."
수인을 보고 웃는 시경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 수인은 한 가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뭐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수인을 데리고 시경은 여기저기를 다녔다. 처음에는 영도의 사무실, 다음에는 이상한 가게, 스튜디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게 했다. 똑바로 서선 사진을 찍게도 했지만 촬영이라는 걸 할 때에도 웃는 건 시경 뿐으로 다른 사람들은 '저런 걸 어디서 주어온 거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다가 저녁을 먹고 결국에는 이곳으로 왔다. 여기에 와서도 신이 난 건 시경 뿐으로 수인은 1시간 넘게 혼자 앉아있었다.
낯선 곳이니 만큼 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흘렀다. 그런데 피곤하진 않았다. 모든 게 새롭고 낯설고 이상했기 때문에 그걸 앉아서 구경하는 것에 슬슬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이제 곧 11시였다. 12시가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고 있을 즈음 한 여자가 술병을 들고 왔다. 간단하게 먹을 음식도 놓여졌다. 저녁은 대충 먹었다 해도 막상 뭔가가 나오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경은 다른 걸 먹이고 싶었던지 당장 술병을 들어 흔들었다.
"성인이지? 술 마실 줄 알거야? 그렇지?"
윙크를 날리며 병을 딴 시경은 술을 따랐다. 쪼르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잔으로 술이 채워졌다.
"원래 불안할 때에는 마시는 게 제일이야. 앞으로 뭘 할까하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하지? 터질 것 같지? 그럴 때에는 생각 없이 마시고 뻗으면 돼. 엄청난 두통과 함께 눈을 떴을 때, 눈 앞이 번쩍거리지. 그 순간 아, 내가 앞으로 뭘 해야 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거야."
"사장님. 그건 쫌......"
지금 시경이 하는 말은 현민이 듣기에도 허점이 많았다. 그런 말로 수인이 넘어올 거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경은 술을 따른 잔을 수인에게 권했다.
"괜찮아. 마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응?"
꼬리가 길게 달린 악마가 순진한 아이를 꼬득이고 있었다. 이러다 뭔 일 생기는 거 아니야? 현민이 안절부절 못하는 동안 수인은 잔에 입술을 댔다. 미미한 알코올의 향이 맡아진다. 잠시 주춤하나 싶던 수인이나 곧 잔을 기울였다. 술이 수인의 입술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오호~. 잘 마신다~."
손뼉을 치며 웃는 시경의 얼굴은 유쾌함 그 자체였으나 현민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다 일 생기는 거 아니냐면서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안 수인의 잔에 재차 술을 따르며 시경은 뒤를 돌아봤다. 클럽의 문이 열리고 영도가 들어섰다. 멀리서도 한 눈에 확인이 될 만큼 굳어있는 얼굴을 본 시경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보모의 등장이네."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영도는 정확히 시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안쪽으로 불똥이 튀었다. 영도는 날듯이 시경에게 달려갔다.
"야! 노랭이!"
"쉬. 사람들 보잖아."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 앞에 댄 시경은 동시에 윙크를 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으로 들어간 영도는 다짜고짜 시경의 멱살을 잡았다.
"죽고 싶어? 내가 분명히 말했지? 촌닭 건드리지 말라고! 촌닭 지금 어디에 있어?!"
"저기에 있잖아."
혀를 베에-하고 내밀면서 시경은 뒤를 가리켰다. 양 손으로 잔을 든 채로 앉아있는 수인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 촌스러운 모습은 또 뭐야.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수인이 보란 듯이 잔 안의 술을 비웠다.
"촌닭!"
술을 주욱 들이키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영도는 앞으로 팔을 뻗었다. 시경을 넘어서 간 그는 수인의 손에 들린 잔을 채가듯이 빼앗았다. 거꾸로 탈탈 털어도 물기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정말 깨끗하게 다 비워버린 거였다.
이 촌닭이 정말 사고 치네.
경악한 얼굴로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누가 술 마시래? 너 맞고 싶어?"
친동생이었다면 말할 것 없이 당장 주먹부터 날렸을 거였다. 이게 어디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싶었던 영도의 얼굴은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화가난 것이 역력한 그 얼굴을 눈 앞에 두고도 수인은 태연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나도 성인이에요. 술 마시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
"왜 그러냐고? 네가 나한테 얹혀사는 이상에는 내 말을 따라야 해. 서울에 내가 있는 동안 내가 바로 네 보호자야."
엄지로 가슴을 누른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실제로 수인에게 뭔 일 생기면 피 보는 건 영도 바로 그였다. 어머니에서부터 할머니, 그리고 다른 친척들도 다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옆에서 자란 수인은 모든 이들의 동정을 받는 입장에 있었다.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온 수인이 술에 입을 대고 고주명태로 있다는 게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면 이쪽은 죽어나는 목숨이었다. 그 전에 술 같은 건 입에 대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며 영도는 다른 잔도 빼앗아 갔다. 술병도 들고 간다. 그러면서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간 사이로 짙은 주름을 만든 채로 수인은 중얼거렸다.
"치사해."
"뭐라고?"
이게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영도는 수인을 봤다. 그 순간 수인의 손이 매처럼 빠르게 움직여 영도가 가지고 간 술병을 채갔다. 그리고는 술병 주둥이에 입을 대더니 벌컥벌컥 마셔댔다. 화들짝 놀란 영도는 당장 수인에게서 술병을 빼앗으려 했다.
"너 정말 왜 이래?! 미쳤어?!"
"내버려 둬. 마시고 싶은 것 같은데. 그냥 마시게 둬."
"넌 입 다물고 있어!"
아까부터 자꾸 사람 성질 건드리는 시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소리를 친 영도는 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마시지도 못하는 술 마시는 거 아니-."
"술 마실 줄 알아요."
"뭐?"
"술 마실 줄 안다고요."
입을 다문 수인은 초롱초롱 했다. 이 독한 걸 거의 다 마시고도 이 상태라니. 정말 술이 센 건지. 아니면 나중에 취해서 헤롱거리는 건지, 아직 알 순 없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은 화가 난 듯 보이는 얼굴이기도 했다. 왜 저런 식으로 이쪽을 보는 건가 싶기도 했던 영도가 가만히 있는 동안 시경이 그의 등에 달라붙었다.
"정말 세네? 이걸 그냥 한 병 다 마시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네? 굉장하다."
영도가 빼앗은 병을 툭툭 건드리던 시경은 수인 앞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게 몇 개로 보여?"
손가락 두 개를 흔드는 시경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실상 지금 이 상황과 수인과 영도의 모습은 그를 너무도 즐겁게 하고 있었다. 마치 장난감을 앞에 두고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그의 손가락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조용히 움직인 수인은 시경을 똑바로 바라봤다.
"사장님은 제가 장난감인 줄 아세요? 사람 가지고 장난치지 말아요.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자꾸 그렇게 빙빙 돌리기만 하면 사람 더 이상해 보여요."
수인의 태도에 시경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것 봐라?' 같은 얼굴이 된 시경은 영도를 돌아봤다.
"맹랑한 놈이야.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들뜬 시경과 달리 영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지 도통 모르겠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일단은 시경부터 치워내야겠다면서 영도는 그를 내려다봤다.
"사장님. 이건 월권인 것 같은데요. 이 애는 이 바닥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제 사촌일 뿐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촌닭을 가지고 놀면 제가 좋아라 할 것 같았습니까. 아니면, 요새 너무 심심해져서 괜한 사람 건드리고 싶었던 겁니까. 뭐하면 원하는 대로 제가 한번 미쳐 날뛰어 볼까요?"
다른 때와 달리 존대를 하나 하는 말은 모두 협박이었다.
바라보는 눈빛 안쪽으로 살기가 감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눈치를 살살보던 현민이 슬그머니 일어서며 '볼 일이 있어서 이만.'라고 웅얼거렸다.
현민이 밖으로 나간 후에도 영도는 시경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영도가 어떤 식으로 바라봐도 시경의 여유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들리지 않던 바깥의 음악소리가 귀로 들어온다.
원래라면 영도도 즐기기 위해 찾아야 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날을 세운 채로 있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 문득 모든 것이 성가시고 싫게 여겨졌다.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날이 선 모습을 취하는 걸 시경은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이런 일을 치는 거였다.
내가 왜 저 노랭이한테 끌려가야 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촌닭한테 신경을 써야 하는 건데.
일단 찾으러 왔다. 그러면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영도는 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채로 여전히 이쪽을 무시하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영도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너 여기서 계속 있을 거야?"
"술 마실 거예요. 마실 수 있어요."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해 봐. 나중에 무슨 일 생겨도 난 몰라."
영도는 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설마하니 이렇게 바로 나가버릴 줄은 몰랐다. 수인은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영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잔을 쥔 수인의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화 나버렸네? 어떻게 하지?"
수인은 옆으로 다가온 시경을 바라봤다. 시경은 생글거리고 웃고 있었다.
"알게 뭐예요. 사장님도 다른 곳으로 가세요. 어차피 나랑 있어봤자 하나도 재미없으시잖아요."
"아니야. 재미있어. 섭섭하게 왜 그런 말을 해."
"웃고는 있어도 정말 웃는 걸로 보이지 않아요."
그 순간 시경의 입가에 서려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무표정을 한 그는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위로 눈동자를 들었다.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한 그는 수인의 뺨을 잡아서 옆으로 지익 늘렸다.
"쓸데없이 예리한 꼬맹이야. 그래서 짜증나면서도 흥미로워."
시경이 붙잡은 뺨이 아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시경은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몸을 밀착했다. 얼굴을 가까이 붙인 그는 마치 악마가 유혹을 하듯이 속삭였다.
"여기 재미있지 않아? 화려하고 멋있지? 막 동경하고 싶고 너도 이곳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만 하면 내가 도와줄게.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줄게."
수인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들자 안쪽으로 스며들어온 알록달록한 불빛이 보였다. 계속해서 흘러들어오는 음악소리. 그 음악에 심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아름다운 사람들. 어디를 보나 예쁜 사람들이 좋은 걸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바깥과는 단절이 되어 아예 다른 세상인양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수인은 이 단절된 세계를 부럽다거나 속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려해 보이지만 그건 겉모습뿐인 것 같아요. 웃고는 있어도 다들 정말 즐거워 보이지 않고 어딘가 텅텅 비어져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바라보는 눈빛 안쪽으로는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끌어내릴 수 있을까. 가치 없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말들이 담겨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인 양 굴었다. 그건 얼마나 피곤한 일일까.
"제 눈동자 때문에 자꾸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고 행동을 하시는 거지요?"
"아니야. 그런 게-."
"오드아이 같은 걸로 얼마나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만 둬요. 손해만 클 거예요."
시경은 입을 다물었다. 수인은 잔 위에 손가락을 하나 올렸다.
"형 연기 잘하잖아요. 그쪽으로 투자를 하는 게 훨씬 더 이득일 거예요."
손가락이 잔을 타고 내려가면서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역시나 맹랑한 놈이라니까."
웃는 시경의 미소는 다른 때와 달랐다. 위험한 뭔가가 느껴지는 미소를 눈 앞에 두고도 수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마주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어느새 시경도 차차 미소를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