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귀가를 서두르는 적이 달리 없었다. 집은 영도에게 있어 휴식 공간일 뿐이었다. 서두른다고 해도 도망가지 않는 그런 안락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의미가 점점 변하는 것 같았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곤란한데. 그리 생각을 하며 당장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야! 촌닭!"
너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영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촌닭을 보면 당장 뒷덜미를 잡아채서 탈탈 흔들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끽 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준엄한 경고를 날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건지 모르겠다. 영도는 거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너 지금 어디에 숨어있는 거야? 오냐, 네가 사고를 치긴 쳤구나!"
그 망할 사장하고 같이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나한테 피해가 가기만 해봐라. 그냥 콱-.
내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주마.
영도는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이 왔다. 그래. 거기에 숨어 있단 말이지? 눈을 빛낸 영도는 그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깥쪽을 볼 수 있게끔 창문 형식으로 뚫어둔 곳이자 그릇 정리대인 곳에 한 손을 대고 당장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너 여기에 숨이 있었냐?!"
그런 데 숨어 있는 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발견함과 동시에 잔소리 10연발을 토해낼 작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란 듯 고개를 위로 드는 수인을 보는 순간 영도는 혀 끝이 얼어붙었다.
세운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던 수인은 고개를 뒤로 해 영도를 바라봤다.
긴 앞머리로 가리고 있던 얼굴이 지금 훤히 다 드러나 있었다. 적당하게 그을린 건강해 보이는 피부. 그곳에서 너무도 눈에 띠는 붉은 입술. 오뚝한 콧날과 더불어.......
".....너 눈이."
중얼거리는 순간 수인은 당장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도의 어깨를 치고 달아났다.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날 정도로 치고 가버리는 것에도 붙잡을 수 없었다. 영도는 멍청한 얼굴로 조금 전 본 것을 되새기려 했다.
한쪽은 검은색. 그리고 다른 쪽은 그보다 연했다. 아니, 색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회빛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그 색이었다. 수인의 눈동자는 양쪽이 다 달랐다. 그걸 전문적인 언어로 뭐라 했더라.
"오드아이?"
그래. 그런 명칭이었던 것 같다. 설령 그 명칭이 정말 아니라고 해도 이미 영도는 절반쯤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건 분명 오드아이였다. 수인의 눈동자는 양쪽이 서로 달랐다.
그래서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렸던 건가. 영도도 저런 건 처음 봤다. 하물며 강원도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촌에서 살던 수인이니 마을 사람들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을 터였다. 나하고 다르니까 이상하다 손가락질을 했을 지도 모르지. 마을 사람들의 경멸의 시선을 받는 수인이라-.
아차차.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쪽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진짜라고도 보기 어려웠다. 영도는 당장 수인이 달려간 욕실로 걸어갔다.
"야. 촌닭. 잠깐 나와 봐."
기다려도 안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수인이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영도는 들으라는 듯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꺼냈다.
"내가 화낸 건 말이지. 그 망할 사장이 뭔 짓을 했을까봐 였어. 너한테 화난 건 절대로 아니야. 그러니까....."
더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 걸까.
영도는 이쪽이 눈을 지적하는 순간 수인의 표정이 흔들렸던 건 기억해냈다. 어쩌면 수인은 지금 오해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 부분에 대해서 수정을 해주고 싶었다.
"그 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머리카락 자르니까 답답하지도 않고 참 좋다. 야."
애써 조근조근하게 말을 하고 난 후 영도는 웃었다. 아하하. 하고 울리는 웃음이 참으로 가식적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공동수상이라고는 해도 신인연기대상을 탄 적 있었던 명성에 비하면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성격 나온 영도는 목청을 높였다.
"나와 봐! 사람이 얼굴을 봐야 대화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얼른 안 튀어나오면 문을 뽀개 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괜히 초조해져선 쉽사리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인상을 쓴 채로 있던 영도는 손잡이가 돌아가는 걸 보고는 당장 그리로 시선을 고정했다.
천천히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고개를 푹 숙인 수인이 나왔다. 왜 저렇게 고개를 숙이는 건지 모르겠다. 얼굴을 들면 그 눈동자를 또 볼 수 있을 텐데. 알게 모르게 목구멍이 탄다. 수인을 대함에 있어 이렇게나 긴장이 되기는 또 처음이라며 영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죄 지었어? 고개 들어봐."
가만히 있었다. 초조해진 영도의 목소리 톤이 약간 올라갔다.
"촌닭. 얼굴 들어. 그래야 말을 하지."
"언제 제 얼굴 보고 말했어요. 그냥 이 상태로 하세요."
별 말 아닌 것 같은데도 뜨끔해진다. 마음 한쪽을 날카로운 뭔가가 쿠욱 찌르는 느낌인지라 영도는 바로 반응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머리 누가 그렇게 한 거야?"
"시경형님이 해줬어요."
"......시경 형니이임?"
그 자식이 왜 네 형님이야? 호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네 형님은 이쪽이라구!
그 여시 같은 놈이 촌닭을 아예 구워 삶았구나.
영도는 엄지로 본인을 가리키며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말했다.
"잘 들어. 그 녀석은 속에 능구렁이가 한 100마리는 똬리를 틀고 있는 놈이야! 너 같이 순진한 녀석 정도는 혀로 살살 굴려서 날 걸로 꿀꺽 할 놈이라고. 그런 놈 뭐 믿을 게 있다고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알랑방구인건데? 그런다고 너한테 뭐 떨어지는 게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어. 이 머리도 그래-."
수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버리려 했지만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왜일까. 전처럼 그리 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손을 주먹 쥔 영도는 정색을 했다.
"뭐 하러 이렇게 짧게 잘랐어? 괜히 사람들 눈에 띠게 생겼잖아."
"내 눈이 이상해요?"
"뭐?"
"이상해서 사람들 눈에 띌 것 같은가요?"
내내 다른 쪽을 보고 있던 수인이 지금 만큼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가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굳은 그 눈빛을 본 영도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얘가 뭐라는 거야. 그런 기분이 강했던 영도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이쪽을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에 살짝 일그러졌다. 굳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영도는 혀 끝이 얼어붙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멍청한 사람마냥 멍하니 서있는 동안 수인이 다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하고 많은 곳 중에서 왜 하필이면 욕실인지 모르겠다. 방 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되잖아. 하지만 바로 그 때 떠올렸다. 수인이 여기에 온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그가 어디서 지내면 된다고 방을 정해주지도 않았음을 말이다.
방을 정해주지 않다니 큰 실수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실수를 한게 있을 터였다. 그게 뭘까. 생각을 하는 동안 영도의 머리는 점점 더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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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2학년일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친구들하고 놀러갈 약속을 잡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방해로 그쪽으로 갈 수 없었다. 할머니 생신잔치가 있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로 가야 한다며, 안 따라오면 3년 동안 용돈을 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협박을 하는데 당해낼 수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할머니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불만의 마음이 강했다. 이동하는 내내 입을 내민 채로 툴툴 거려도 어머니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 해도 시골로 내려가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영도는 끌려왔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바로 반항을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인사만 간단하게 한 후에 다른 어른들이 말을 걸기 전에 집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만에 찾아온 장소였다. 숲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고급 한옥저택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았다. 실제로 너무도 아름다운 이 장소는 종종 영화 촬영 제의를 받기도 했었다. 모두 거절했지만 말이다.
자연을 보고 좋다는 느낌도 10분이면 긴 거였다. 더는 산과 숲을 보고 감상을 섞을 기분이 들지 않았던 영도는 인상을 쓴 채로 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버스가 오면 당장 타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다 헛거었다. 이런 시골까지 들어올 버스가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산으로 연결이 된 엉성하게 깔린 도로를 바라봤다. 그렇게 몇 분을 보고 있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잘못 들었을거라 생각했지만 재차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확하게 들었다. 영도는 당장 뒤를 돌아봤다. 억새풀이 길게 자란 곳 사이로 뭔가가 있었다.
'거기 누구야?'
설마하니 산짐승이 있는 건 아니겠지. 산 사이에 있는 집이긴 했지만 짐승이 내려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었다. 멧돼지같은 게 내려오면 피해야 겠지만 당시 영도는 어리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일단은 자극적인 상황을 원했다. 정말 멧돼지가 있다 하더라도 격투를 해서 물리칠 용의가 있었다.
때문에 씩씩하게 걸어간 영도는 허리까지 오는 풀을 걷으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어린애잖아. 어린애가 왜 이런 데에 있어?
그제야 영도는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있는 아이가 평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혹시 모를 일이다. 귀신일지도. 하지만 아이는 훌쩍거리면서 간간히 주먹으로 눈가를 훔쳐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궁금증도 생겼다. 도대체 왜 여기서 울고 있는 거야.
영도는 아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너 여기서 뭐 하냐?'
그 순간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커다란 눈동자와 하얗고 작은 얼굴. 반쯤 벌려진 촉촉하게 젖어있는 입술. 정말 어린애였다. 아기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영도에게 있어 심장을 크게 뛰게 했다.
천사 같았다. 문득 든 생각에 영도는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쪽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 때만큼은 그 아이가 천사처럼 여겨졌다.
아이와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할머니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딱 이틀이었다. 떠나기 전에 할머니에게 조식스럽게 '이렇게 작은 여자애도 왔어요?'라고 물었고 그 순간 할머니는 의아한 얼굴로 '여자애가 어디에 있어.'라고 대답했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초리에 영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뒤로 가선 혼자 더 찾아봤지만 역시나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의 그 허망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영도는 그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이후로 다시 할머니 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살기 바빴다고는 하나 선뜻 그리로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씩 생각이 났다. 그곳에서 만난 어린 천사가 말이다.
"......"
눈을 뜬 영도는 아직 방 안이 어둡다는 걸 확인하고는 인상을 썼다.
나도 참 중증이네. 요새 통 꾸지 않았던 꿈을 왜 이제 와서 꾸는 건데?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다면서 인상을 쓴 채로 있던 영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그그그그."
신음을 흘리며 그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두어번 힘을 줘서 꽉콱 주무르자 근육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이것도 다 직업병이었다. 다음에 쉬는 날이 있으면 침이나 맞으러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영도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는 순간 영도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수인은 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이 녀석.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금살금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방 안쪽에 이불을 깔고 누워있는 수인을 발견해냈다.
"........"
20명이 들어와도 충분히 잘 수 있을 만한 넓은 집이었다. 그런데 하고 많은 곳 중에서 왜 하필이면 주방 바닥이란 말인가. 이래서야 마치 이쪽이 뺑덕어멈이 된 것 같잖은가.
인상을 쓴 채로 있던 영도는 불편하게 쪼그리고 누워선 색색 거리고 고른 숨을 토해내는 수인을 보다가 그쪽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히 수인의 언굴 쪽으로 시선이 간다. 하지만 애써 본인의 행동을 무시하며 수인의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야, 일어나.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방으로 들어가."
손가락으로 어깨를 꾹꾹 누른다. 그때마다 수인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지만 여전히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울려퍼졌다.
"일어나라니까. 야, 내 말 안 들려?"
정말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한숨을 쉰 영도는 수인을 바라봤다.
그냥 무시하고 물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선뜻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좀 무심했던 걸 수도 있겠지.
남도 아니고 사촌 동생이잖아. 어머니 동생의 아들. 거리상으로 보면 형제같은 거였다. 형제가 없는 영도에게 있어선 동생으로 생각하고 살뜰하게 보살펴줘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수인을 너무 굴려댄 것은 아닐까. 나중에 이 녀석이 어머니한테 이런저런 말을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
중얼거린 영도는 수인의 옆으로 가서는 팔을 내렸다. 수인의 몸을 안아들었다. 일명 공주님 안기 자세였다. 사내놈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 안아들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의외로 가볍게 올려지는 몸에 영도는 당장 빨딱 일어섰다.
바로 그 때 수인이 영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양 손을 모아 가슴 위에 올린 수인의 얼굴이 어깨에 딱 달라붙었다. 고르게 숨을 토해내는 수인의 눈은 감겨져 있었다. 그 눈썹이 꽤나 길었다.
.......눈이 정말 예뻤는데.
문득 드는 생각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영도는 헛기침을 했다. 에비. 지금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계속해서 헛기침을 하다가 수인이 재차 '으응.'하는 소리를 내자 영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주방에서 나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수인을 재우긴 해야 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방이 없었다. 여기서는 남을 재운 적 없고 오로지 영도 그만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손님방 같은 것도 따로 만들어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분의 침대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소파에서 재울 수도 없었다. 소파에서 재우느니 차라리 아까 주방 바닥이 훨씬 더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수인을 어디에 내려놓고 잠자리를 준비해서 다시 눕힐 수도 없는 거였다. 그건 너무 번거로우니까.
괜히 착한 척을 했나? 그냥 두고 물만 마시고 나을 걸. 후회의 마음이 들었던 영도는 반쯤 열린 자신의 방 문을 쳐다봤다.
"......내가 정말 미쳤지."
중얼거린 영도는 수인을 안아든 채로 본인의 방 쪽으로 터덜거리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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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6시가 되었을 때 수인은 눈이 떠졌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게 새하얀 장이 아닌, 컴퓨터라는 것에 수인은 숨을 죽였다.
여기가 어딘가 싶었다. 설마하니 이상한 곳인 건 아니겠지? 긴장한 채로 찬찬히 방을 둘러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하지만 방바닥에 대충 벗어던져진 옷가지를 봤을 때 미간 사이에 만들어져 있던 주름이 펴졌다. 그 옷은 영도의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는 영도 방이라는 걸까.
처음 들어와 봤다. 다른 곳은 다 다니면서 청소를 했지만 영도의 방 만큼은 건드릴 수 없어 문도 열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영도 방은 이런 느낌인 거로구나. 수인은 침대 위로 한 손을 내려 가볍게 쓰다듬었다. 정리가 된 주변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바닥에 대충 벗어진 옷을 확인했다.
깔끔하게 정리를 해놓고선 저 바지는 도대체 뭔가 싶었다. 이상한 듯 싶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듯 한 방모양에 괜히 웃음이 나온다. 실제로 수인의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인은 책상 옆에 붙은 작은 거울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보이는 건 두 개의 눈동자였다. 한쪽은 검은색. 다른 쪽은 회색이었다. 이상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이 눈동자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다. 어린애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 괴롭힘도 있고 이유 모를 폭행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알아서 피하고 굽힐 줄도 알아야 했는데 수인은 대쪽같은 면이 있어서 영도를 대할 때처럼 옳은 말처럼 들리는 반항을 했다가 더 맞고는 했었다.
그 모든 게 다 옛날 일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질을 하면서 '넌 이상해!'라고 던져진 말에 대한 마음의 통증은 여전히 멍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도 있었다.
'예쁘기만 한 걸.'
웃으면서 말하던 소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이쪽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입 안이 쓰다. 그때 들은 그 말을 마음에 품고 지금까지 지내왔다고도 할 수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잖아. 그렇다고 상처를 받진 않았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수인은 거울을 잡아 책상 위에 엎드려 놨다. 본인 물건 건드렸다고 영도가 뭐라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수인은 허리를 세우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바로 옆 책장에 꽂힌 수많은 비디오와 시디,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책들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직도 잘 모르지만 영도는 꽤 유명한 연예인인 듯 싶었다. 이것들은 영도가 유명해지기까지 밟고 넘어온 것들일 터였다. 손을들어 가장 앞에 있던 것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쪽에 꽂힌 시디를 꺼내 겉면을 확인했다. '욕망의 굴레 4'라고 붙여 있었다. 수인이 보기에 제목이 이상했다. 내용도 그런 걸까. 보고 싶다. 시디를 만지작거리다가 그걸 집어넣고 천천히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책장 가득이 꽃힌 그 모든 것들이 영도가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였다. 그가 지금까지 남겨온 것들이었다.
나랑은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너무도 달라서 때때로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해야 하는 게 옳은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잘 지내고 있던 영도에게 있어 이쪽은 불청객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주먹을 쥐고 그걸로 가슴 가운데를 꾸욱 누르던 수인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양 손을 들어서 팔을 문지르다가 문을 바라봤다. 영도는 지금 어디서 자고 있는 걸까.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던 수인은 방 밖으로 나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많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거실 쪽에 놓인 소파에 누워있는 영도를 금방 발견해 냈으니 말이다.
언뜻 보기에도 불편해 보였다. 키가 큰 사람이 소파에 구부정하게 몸을 뉘이고 있으니 편할 리가 없었다. 수인은 그리로 걸어갔다.
옆으로 몸을 뉘인 영도의 미간으로 몇 개나 되는 주름이 생겨있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쪼그리고 앉아선 영도의 미간으로 손가락을 하나 댔다. 그리고는 꾸욱 눌렀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나 싶던 영도가 움찔해서는 손을 들어 수인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입맛을 다신다.
반쯤 입을 벌리고는 고른 숨을 토해내는 걸 보아하니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을까나. 수인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댄 채로 영도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 잘 생겼다. 조각 같은 얼굴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연기도 잘했다. 이쪽만 몰랐던 거지 정말은 엄청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거다. 바깥으로 나가면 따라붙는 사람들이 줄을 섰겠지. 이 맨션도 영도가 번 돈으로 산 것일 터였다.
대단하구나. 나랑은 많이 틀려.
수인의 손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영도의 뺨에 닿은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인다. 마치 간질이듯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영도의 미간이 꿈틀거리고 흔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턴 영도는 다음 순간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영도가 눈을 뜨고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수인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영도는 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중심을 잃은 수인은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아주 제대로 넘어져 버렸기 때문에 쿵-하는 큰 소리가 났다. 놀란 영도는 잠이 확 깨서는 당장 몸을 일으켰다.
"너 괜찮-."
괜찮은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등짝으로 담이 왔다. 갑자기 움직였기 때문이었지만 확 퍼지는 엄청난 통증에 영도는 반쯤 일어난 상태로 굳어버렸다. 손은 넘어진 수인 쪽으로 향해져 있지만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영도는 한참 후에 '으아아아-.'하고 소리를 냈다.
신음소리를 들은 수인은 바닥에 양 손을 대고는 뒤를 돌아봤다. 영도가 등 뒤로 손을 뻗은 채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가만히 쳐다보던 수인은 소파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요?"
"다, 담 왔어. 등으로 담 왔어. 으으으~."
아프다. 정말 너무너무 아팠다. 이렇게 아픈 건 알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정말 아파서 눈물이 글썽거리고 맺힌다. 안절부절 못해하는 동안 수인은 영도의 뒤로 가서는 그의 등에 손을 댔다. 영도는 당장 기겁을 하며 몸을 피했다.
"놔 둬! 어디를 건드리는 건데?!"
"참아 봐요. 아프지 않게 해줄 게요."
"네가 물리치료사도 아니고-."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요."
"........"
입 다물라는 말에 영도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수인에게 등을 내놓은 채로 그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작은 손인데도 불구, 꽤나 힘이 들어가 있었다. 꼭꾹 누를 때마다 그쪽으로 뭔가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프기만 했는데 알게 모르게 시원함이 퍼진다. '오호라.' 그런 상태가 된 영도는 눈을 감았다.
뭉쳐졌던 근육이 서서히 풀리는 걸 느끼며 영도는 뒤로 손을 돌려 허리 부근을 가리켰다.
"여기도 아파."
수인의 손이 그리로 가서 꾹꾹 누른다. 역시나 시원했다. 이것이 약손인가. 영도는 수인의 손이 떨어질 새라 다른 쪽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여기. 여기.'라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요구를 하는 것에 수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상한데? 그리 생각을 해도 이미 손을 댄 참이었다. 수인은 영도가 골라주는 곳을 집중적으로 주물렀다. 영도의 얼굴은 완전히 풀렸다.
"우와. 엄청 시원하다."
자주 찾아가는 정형외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시원한 손맛이라니.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특한 짓도 할 줄 알았던 말인가. 만족감으로 영도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한 십여분을 주물렀을까. 정말은 더 해줬으면 좋겠지만 더 시키면 너무한 거겠지 싶었던 영도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래. 거기까지. 그만하면 됐어."
수인의 손은 여전히 등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픈 남편을 간호하는 듯 정성스럽기만 한 그 손길에 완전히 담이 풀린 영도는 팔을 앞, 뒤로 움직이면서 목도 한 바퀴 돌렸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너 굉장하잖아."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영도는 당장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수인은 당장 고개를 푹 숙였고 그 모습에 영도도 얼굴을 돌렸다.
막상 돌리고 나서 왜 그랬을까 싶었지만 이미 해버린 일이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수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거시기한 분위기와 상황이었다. 아, 왜 이렇게 어색한거야. 그리 생각을 하는 영도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괜히 어색해진다. 그러는 동안 수인의 손은 착실하게 영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어색함은 점점 강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영도는 재차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됐어. 이제 괜찮아."
꼬물거리며 앞으로 이동해서 앉았다. 서로 다른 방향을 멀뚱히 쳐다봤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왜일까. 전처럼 편하게 앉으면서 수인에게 물 가져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상하네? 영도의 얼굴이 점점 오묘하게 변했다. 때에 맞춰 수인이 입을 열었다.
"밥 먹을 거예요?"
"먹어야 겠지."
"조금만 기다려요."
영도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동안 수인이 등에서 떨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수인이 완전히 멀어지고 난 후 영도는 본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두어번 주물거렸다.
하나도 안 시원했다. 역시나 조금 전 수인이 했던 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구나. 그리 생각을 하면서 뒤를 흘깃 바라봤다.
주방 안쪽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수인의 모습이 보였다. 다듬어진 머리카락 덕분인지 머리통도 작아 보이고 몸도 가느다랗기만 한 것 같다. 이상한 더벅머리를 하고 있을 때에는 웬 외계인인가 싶더니만 지금은 좀 사람 같다. 그냥 그런 쪽으로 좋게 생각을 해버릴까나.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영도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소파 구석에 넣어뒀던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살금살금 걸어가서 방으로 들어간 영도는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으그그그-."
죽는 소리부터 나온다. 온 몸이 찌뿌둥한 게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세를 한 채로 침대 위에 뻗은 채로 있던 영도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핸드폰의 번호를 검색했다. 몇 번 하지 않아 시골 전화번호가 나온다. 이 번호 저장만 해두었지 이런 식으로 연락을 취해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긴장이 되어선 손에 쥔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던 영도는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신호가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는 당장 귀를 대고는 숨을 죽였다. 영도의 다리 사이로 베개가 끼어져 있었다.
[여보세요.]
늙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영도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꿇고 앉은 영도는 굽실거리듯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외할머니. 저 영도입니다."
[영도? 아이고. 내 똥강아지. 오랜만에 목소리 듣는구나.]
똥강아지라니. 이 호칭을 얼마 만에 듣는지 모르겠다.
풀어진 얼굴로 웃던 영도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는 앞에 정말로 외할머니가 있는 듯 굽실거렸다.
"그간 건강하셨어요? 변변히 전화 연락도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라. 손주들 중에서 너처럼 꼬박꼬박 용돈 보내오는 애도 적다. 그래. 수인이하고 잘 지내고 있지?]
뜨끔한 말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과연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는 건 수인을 타박하고 험한 소리를 하고 발로 툭툭 친 기억 밖에 없었다. 지금 수인의 입장은 참으로 어정쩡한 거라지만 그걸 솔직하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게 영도의 판단이었다.
"잘 지내고 있지요. 애가 싹싹하고 말도 잘 해서 적응이 빠르더라고요."
[그래. 수인이가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애지. 그래도 참 착하고 마음이 여린 애란다. 강한 것 같아도 안 그래. 고슴도치 같은 애거든.]
"아, 네. 그렇지요. 그래도 잘 하고 있어요. 제 밥도 차려주고요."
[그 애 할 줄 아는 요리는 김치 넣은 거랑 된장국 밖에 없는데......]
"한국 사람이 그런 것만 먹고 살면 되지요. 뭐가 더 필요한가요. 그보다 이번에 챙겨서 보내주신 것들 고맙습니다. 그냥 옆에 두고 드시지 왜 저까지 챙기셨어요. 그 귀한 것들을요."
[암만 귀하다고 해도 너보다는 아니지. 내가 힘들게 산에서 캔 나물로 한 것들이다. 씁쓰레해도 몸에는 좋은 거니까 꼭 챙겨 먹도록 해라.]
"물론이지요. 수인이 못 먹게 하면서 제가 다 먹고 있어요."
나도 참 거짓말 징하게 잘하네.
머리에 손을 올린 채로 아하하. 하고 웃던 영도는 할머니에게 자꾸만 거짓말을 하는 게 마음 쓰였기 때문에 화제를 돌려버렸다.
"저기 할머니. 제가 수인이한테 바로 묻기가 뭐해서 여쭈는 건데요. 수인이가 사람 눈을 똑바로 보지 않더라고요."
갑자기 반대편이 조용해졌다.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부분을 이쪽이 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길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 괜찮은데 수인이가 영 껄끄러워 해서요."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렸을 텐데......]
"다 정리했지요. 서울에서 그렇게 지내면 사람들 손가락질해요. 워낙에 뒤숭숭한 동네라 괜한 오해 받고 경찰서로 끌려갈 수도 있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웬만해서는 머리카락에 손 못 대게 했을 텐데. 정말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구나.]
"아하하하. 뭐, 그렇지요."
실은 이쪽이 자르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망할 노랭이의 작품이었다.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그 망할 놈은 사고를 치고 지랄이야. 수인도 문제였다. 오드아이인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머리카락 내리고 있어야 할 게 아니야. 대체 무슨 말에 넘어가서 머리카락을 자르게 된 건지......
이상하게 불쾌해진다. 기분이 나빠지는 걸 느끼면서도 영도는 계속해서 물었다.
"결과적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게 되어서요. 그냥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애가 자꾸만 시선을 피하려고 하네요. 사람 무안하게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그 눈 때문에 괴롭힘을 많이 당했거든.]
"......괴롭힘이요?"
그렇게 예쁜 눈동자를 두고 누가 괴롭혀?
반사적으로 확 드는 생각에 이어서 할머니의 말이 계속 되었다.
[좁은 동네이다 보니 나와 다른 걸 인정하는 게 안 되지 . 애비가 죽고 난 후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이리로 오게 되어서 읍내 학교에 다녔지 . 다들 태어나서부터 알고 지내던 아이들뿐인 곳에서 수인이가 처음 나타났는데 눈동자 색이 다르잖아. 어려서부터 몹쓸 말 많이 듣고 맞기도 많이 맞고, 그랬다. 내가 그 때 생각을 지금해도 가슴이 미어지지.]
실제로도 할머니의 목소리 뒷부분은 축축하게 젖어갔다.
긴 한숨을 쉬면서 할머니는 '내가 내 옆에 두고 공부를 가르쳐야 하나 싶기도 했었어.'라고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애도 적응을 하지 못해서인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난리도 아니드만 언제부터는 씩씩해지는 거야. 다녀왔다고 말을 해도 얼굴이나 팔, 다리늘에 생체기도 잔뜩이지. 등이나 허벅지 안쪽 보면 아직도 그때에 다친 상처들이 수두룩하지. 지금은 다들 커서 안 그래도 어렸을 때에는 말도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 수인이 너한테 보낼 때도 나도 속이 편치 않았어. 간신히 여기 생활에 안정을 찾고 있는데 또 다른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일들이 반복이 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너도 알잖니. 여기서 그 젊은 게 뭘 하겠어. 농사를 할 거야. 아니면 일찍 결혼을 할 거야. 한 살이라도 어리고 뭔가를 하고자 할 때 내 곁에서 떠나게 하는 게 옳은 거지. 그래서 그 아이 너한테 보낸거다. 모든 게 낯설고 무서울 거야. 그러니까 영도야. 애 괴롭히지 말고 잘 보살펴줘야 한다. 알았지?]
"제가 괴롭힐 게 뭐가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저만 믿으세요."
[그래. 믿지. 그런데 머리카락을 잘랐다니. 정말 놀랍구나.]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중얼거리는 말에 영도는 괜히 속이 꼬였다.
그 머리카락 제가 자르게 한 게 아니에요. 그런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는 짤막한 인사를 주고 받은 후, 영도는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기지개를 하듯이 양 팔을 위로 뻗은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래. 어려서부터 그 눈동자 때문에 괴로운 일이 많았다는 거지 . 그렇다면 눈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적지 않았을 터였다. 대체 그 노랭이는 어떤 방법으로 꼬셔서 애 머리를 자르게 한 거야. 그 전에 어떤 식으로 접촉을 한 거야.
영도는 옆으로 몸을 돌려 눕고는 사장인 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음만 울리지 이 놈이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로 촉이 왔다. 영도는 혀를 차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 새끼 튀었구만."
일부러 전원을 꺼둔 거다. 이쪽에게 고운 말 못 들을 걸 간파하곤 말이다.
정말 열 받네. 주먹으로 침대를 후려친 영도는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을 고쳐 잡고는 다시 전화를 걸려는데 어디선가 풋풋한 냄새가 났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코를 씰룩거리던 영토는 다리 사이에 끼고 있었던 베개를 확인했다.
여기서 나는 냄새인가? 별 생각 없이 베개를 집어 코 아래에 대고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풋풋한 풀의 향기가 났다. 도심에서 생활을 하면서 맡아본 적 없는 그런 싱그러운 냄새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지 않던 냄새가 왜 지금 나는 건데. 설마 그 냄새 때문인가?
처음 맡아보는 냄새이기 때문에 쉽사리 코를 뗄 수 없었다. 어느새 영도는 팔로 베개를 꼬옥 끌어안고 베개에 코를 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싱그러운 내음이 머리 속을 맑아지게끔 한다.
아, 편안해. 기분 좋아. 반쯤 풀린 얼굴로 있던 영도는 스르르 침대 위로 무너졌다. 엎드린 채로 베개를 끌어안고 데굴거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당장 눈이 떠졌다. 이윽고 지금 이쪽 상태에 대해 깨달은 영도는 황급히 베개를 침대 아래로 던져버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변태처럼 왜 베개를 끌어안았던 건데. 그러지마. 너 굳이 베개를 끌어안을 필요 없이 원하기만 하면 여자가 몇이나 생기는 인기남이잖아. 그런덱 왜 이러는 건데. 에비. 말자, 말아.
당혹스러운 얼굴로 팔과 가슴을 털어내던 영도의 시선을 끄는 건 바닥을 구르는 베개였다. 그걸 가만히 쳐다보던 영도는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왔다. 살금살금 걸어가서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거실에 수인은 없었다. 분명 주방에 있을 터였다. 그 놈의 주요 거점구역일 테니.
다른 때라면 당당하게 나가서 활보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거실과 주방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가면 옷 방이 따로 있었다. 옷 고르는 척 하면서 수인의 상태를 확인해 볼까.
......아니지. 애초에 내가 이렇게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거잖아. 난 어디까지나 이 집의 주인이야. 어깨를 넓게 펴고 당당하게 굴 필요가 있어. 내가 왜 객식구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데.
영도는 문을 다 열고 밖으로 나왔다.
"흠흠."
괜히 소리를 내보면서 뒷짐을 진 영도는 양반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방 쪽을 지나치기 전에 그곳을 흘깃 봤다. 수인이 등을 보인 채로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다. 벌써부터 밥 준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흠흠."
두 번째로 내는 소리에 신경이 쓰였던지 수인이 뒤를 돌아본다. 영도는 거만하게 턱을 올리며 요구했다.
"물."
수인은 잠자코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다시 등을 돌린 채로 냄비 앞에 선다. 끓고 있는 중이라면 굳이 거기에 서있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아니면 뭐야. 내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는 거냐.
괜히 기분이 구려진다. 영도는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고는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흘러가고 점점 더 머리가 맑아졌다. 동시에 머리카락을 자르게 된 자초지종에 대해서 들어봐야 할 듯 싶었다. 일단 이쪽은 수인의 보호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니 말이다.
"문수인. 이리로 와 봐."
"밥 하고 있잖아요."
"끓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당장 이리로 와. 어서."
쓸데없는 말은 무시해도 된다는 듯 수인은 여전히 가스렌지 앞에 서있을 따름이었다. 대번에 영도의 눈으로 힘이 들어갔다.
"촌닭. 내가 소리 높여야 달려을 거냐?"
나직한 목소리는 음산하기까지 했다. 내내 무시를 하듯이 등을 보인 채로 서있던 수인이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던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듯이 어깨를 들썩인다. 그리고는 영도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척척 걸어와 영도의 바로 옆에 와서 앉았다.
허벅지 위에 양 손을 올린 수인의 고개가 푹 숙여져 있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너무 죄인처럼 그렇게 있을 필요는 없는데. 고개를 들라고 하고 싶어도 어떤 식으로 운을 띄워야 하는 건가 싶었다.
수인이 손을 들자 영도는 움찔했다. 하지만 수인은 본인의 앞머리카락을 잡아 마구 흩트릴 따름이었다. 그래봤자 정리가 잘 된 머리카락이 다시 길어져서 눈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신경 쓰였다면 애초에 안 자르는 편이 나았잖아.
"왜 그랬던 건데."
"뭐가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정말 신경 쓰인다.
인상을 쓴 채로 영도는 재차 물었다.
"머리카락은 왜 자른 거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도 잘 몰라요. 그냥 정신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노랭이 그 놈이 집까지 찾아온 거지?"
"노랭이가 누군데요."
"우리 회사 사장."
"....."
사람 이름으로 부를 것이지 노랭이가 뭐야. 누굴 촌닭으로 부르지 않나. 야라고 하지 않나. 그 버릇은 자기 사장한테도 유효한 모양이라며 수인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다문 입술에서 반항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그 입술 모양이 신경 쓰였던 영도는 자연스럽게 말이 많아졌다.
"그 자식이 와서 뭐라 말했기에 홀라당 넘어갔냐. 다른 사람들이 네 눈 보게 하고 싶지 않았으면 그냥 그 상태로 있었어야 했을 거 아니야. 그렇게 신경 쓰이면 어떻게 바깥에 나가려는 건데?"
"나갈 때 모자 눌러쓰면 되잖아요."
"머리 잘 잘라놓고는 거기에 다시 모자를 쓴다고?"
"그러면 나더러 어쩌라고요?"
수인은 고개를 들어 영도를 쳐다봤다. 인상을 쓴 채로 똑바로 바라보는 수인의 모습에 영도는 흠칫했다. 수인이 이런 식으로 덤비는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눈동자가 다 보여 표정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굳어지는 영도의 얼굴을 확인한 수인은 재차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영도는 당장 그런 수인의 턱을 잡아 다시 자신을 보도록 했다.
"넌 사람이 말을 하면 얼굴을 봐야 할 거 아니야?"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과 말이었다.
손에 잡힌 턱이 의외로 부드럽고 날렵해서 놀랍고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수인의 눈동자에 두 번 놀랐다. 손을 대기는 했는데 더 당황스러워진다. 굳어서 가만히 있는 동안 수인의 미간으로 살짝 주름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대화 하면서 언제 형이 제 눈 똑바로 보면서 말 한적 있어요?"
그래. 이 놈은 이런 성격이었다. 이 까칠한 놈.
영도는 혀를 차며 당장 턱을 잡은 손을 놨다.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더니 먹을 걸 꺼내기 시작한다. 그걸 보던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그 순간 수인이 그를 바라봤다.
"밥 먹고 씻어요."
어이가 없었다. 지가 뭐라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니 눈 보였다고 해서 초능력이 생긴 거냐. 아니면 절대 권력을 얻은 거냐.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당장 알았다며 고개를 조아릴 거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다.
이 성질머리 나쁜 촌닭아!
생각은 너무도 많아서 머리통이 터져버릴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영도는 다시 자리에 앉아있게 되었다. 그걸 확인한 직후 수인은 주섬주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기와 밥그릇을 찬장에서 꺼내는 걸 본 영도는 인상을 쓰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에 얼굴을 댄 채로 눈을 깜박였다.
유리가 덮여진 테이블 위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 사이로 계속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끓는 소리. 그리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이 집에서 살면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처음인데.
영도는 아래로 내린 손을 마주 잡았다. 조금 전 수인의 턱을 잡은 감각은 아직 손가락 끝에 남아 있었다.
.......이상하다. 정말 너무너무 이상했다.
이 이상한 느낌은 뭐란 말인가. 영도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있는가 싶던 영도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에 수인이 뒤를 돌아봤다. 크게 떠진 눈동자. 귀여운 것 같기도 한 곱상한 얼굴을 보는 순간 영도는 당장 한마디 내뱉었다.
"똥 누러 갈 거다!"
"누가 뭐래요?"
영도는 아차 싶었다. 그리고 창피해 졌다.
왜 하필이면 이런 말이 나오는 거란 말인가. 똥이라니. 나 정말 미치겠네. 그리 생각을 해봤자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이었다. 주워 삼킬 수도 없는 말들. 혀를 찬 영도는 당장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다.
서둘러 사라지는 영도를 본 수인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냄비 뚜껑을 열고 찌개의 맛을 봤다. 미묘한 것 같았다. 김치만 넣으면 모르겠지만 고기를 넣어봤더니 맛이 이상해진 것 같다. 그냥 김치만 넣은 게 제일 맛있는 법인데 너무 욕심을 부린 모양이었다.
수저를 내려놓은 수인은 가만히 있다가 앞머리카락을 잡아 아래로 주욱 내렸다. 그래도 눈을 가리기에는 턱없을 정도로 짧았다. 너무 짧게 자른 걸까. 하지만 이쪽을 보는 영도는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의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만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중얼거린 수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 영도의 손이 닿았던 턱에 손가락을 댔다. 크고 억센 손길이었다. 이쪽과 다르게 완연히 다 자란 사내의 손을 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도 좋았다. 여러모로 이쪽과는 비교가 되었다.
수인은 손바닥을 펼쳐서 손등을 확인하고는 꼬옥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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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도 반응이 없다. 영도는 조용히 뒷자리로 가서 앉을 따름이었다. 앉자마자 한숨을 쉬며 뒤로 고개를 젖힌 영도는 당장 눈을 감았다.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드라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곁가지 일들은 다 잘라낸 상태였는데 말이다.
준식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무실부터 들어가겠습니다."
"아아-."
그래도 이번에는 대답을 해주는 구나. 아주 입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나마 반응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안심한 준식은 당장 차를 몰았다. 차가 움직이는 순간 영도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배 위에 한 손을 올렸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어서인지 동그랗게 올라와 있었다. 이렇게 잘 먹은 아침은 몇 년 만인가 싶었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집 밥이라 그런지 술술 넘어갔다. 결국 2공기를 다 비우고 의미 없이 TV를 켰다 껐다를 반복하다가 준식한테 조금 빨리 오라고 문자를 보내고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수인이 다른 말을 하는 건 없었지만 이쪽이 나갈 때에는 뒤를 따라왔다. 현관 앞에 서 있다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고 바로 눈을 내리떴다. 작은 목소리로 다녀오라는 말을 하는 것에 영도는 저도 모르게 '다녀올게.'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 정말 미치겠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쪽을 두고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준식은 앞 유리를 통해 영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영도는 눈을 꾹 감고 있었다. 혼잣말인가. 그렇게 생각을 한 준식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영도는 가만히 있다가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아아. 정말 죽겠네."
중얼거리던 영도는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가 다리를 동동 구른다.
그 모습에 준식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영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혼나는 건 이쪽이었다. 해결 불가능할 정도로 묘한 문제에 걸려든 것은 아니겠지? 걱정스러워도 몸을 뒤트는 영도의 모습이 이상해서 쉽사리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아! 정말!"
소리를 친 영도는 몸을 반으로 구부렸다.
앞으로 엎드린 채로 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혼자만의 생각을 시작했다.
촌닭이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쳐. 그 아래에서 엄청나게 예쁜 얼굴이 나타난 건 아니었다. 훅 가버릴 듯한 미모는 절대로 아니었단 말이야.
눈동자색이 다르다고 쳐. 그게 뭐. 요즘에는 일부러 칼라 렌즈 끼는 사람들도 수두룩 하잖아. 파랗고 노란 눈동자를 하는 것들에 비해선 많이 양호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꾸 생각하지 말고 떠올리려 하지 말자. 영도는 열심히 머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귀엽게 생긴 건 사실이잖아.
"......."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에 영도는 굳어버렸다.
그래. 묘하게 부드러운 선인 건 확실했다. 확 눈을 잡아끄는 미인은 아니라 해도 보면 볼수록 뇌리에 남는 얼굴형이었다. 추남은 절대로 아니었다. 건강하게 살짝 그을린 갈색 피부톤은 부드러울 것 같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 고양이같은 느낌이었다. 화가 나면 올라가는 눈꼬리나 앙 다문 입술 모양도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괜찮을 지도.......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이제는 더 무슨 말을 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조금 전에 한 생각들이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내가 미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우습지도 않은 생각들을 할 리가 없잖아.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머리 속에서 다 지워버려.
무념무상. 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코끝을 스치는 풋풋한 풀의 내음은 강해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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