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31)

"나가십니까?"

바닥을 내려다보고 걷고 있었기 때문에 수인은 그게 자신에게 향해진 말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언제나처럼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지용과 눈이 마주쳤다.

".....저요?"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자 지용이 수인 쪽으로 걸어왔다.

"산책 가실 겁니까?"

"아, 장에 좀 다녀오려고요. 요 앞에 있다고 들었거든요."

"택시라도 불러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슬슬 걸으면서 가면 돼요. 이 근처잖아요."

"나가서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걸으면 한 20분 넘게 걸릴 겁니다. 혹시 나가셨다가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이리로 연락을 주십시오. 저희 쪽 인터폰 번호입니다."

수인은 지용이 건네는 작은 종이를 받아들였다. 맨션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것이었다. 종이라고는 해도 테두리로 금박이 되어 있어 상당히 비쌀 것 같았다. 그걸 주머니 안쪽에 넣으며 수인은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렇게 수인이 나가고 난 후 지용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카운터 쪽을 맡고 있던 사내가 지용을 흘깃 봤다.

"누구야? 이곳하고는 전혀 어울리는 차림이 아닌데?"

동료의 말에 지용은 수인의 차림새를 확인했다.

낡은 청바지에 싸구려 점퍼. 그리고 다 해진 운동화나 길게 길러서 눈의 반을 가리는 음침한 외모. 확실히 이 화려한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첫날 이곳에 왔을 때에도 저런 모습이었지.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황제랑 같이 지내는 꼬맹이야. 사촌동생이라고 하더군."

황제라는 호칭이 누구인지 모르진 않았다. 동료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선 '원혁?'라고 이름을 말했고 지용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사내는 혀를 차며 자동문을 통과해서 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수인의 됫모습을 한번 더 확인했다. 

"친척이라면 좀 챙겨주지 옷 꼴이 저게 뭐야. 거진 줄 알겠네."

"일부러 저렇게 다니는 걸 수도 있어. 부자들 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잡담은 그만 하고 일이나 하자."

"나는 언제가 되어야 여기서 살아보나."

동료의 말에 지용의 입가로 비웃음이 걸렸다. 

"꿈도 꾸지 말아. 새꺄."

몸의 장기를 다 팔아도 이 맨션 한 칸 얻을 수 없을 터였다. 사람 속 확 잡치게 하는 지용의 표정에 사내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반박할수 없는 비웃음이었기 때문에 애꿎은 펜을 집어던지면서 '이건 왜 이렇게안 나오는 거야.'라며 투덜대는 게 고작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수인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도 흐리구나. 성큼성큼 내려가면서 벽을 통과하는 곳 옆에 붙은 작은 경비실을 확인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면 인사라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를 간 건가. 그리 생각을 하면서 수인은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확인하자 10시였다. 장보러 가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이리로 오는 동안 서울 슈퍼를 몇 번 이용해 봤다. 지리를 묻기 위한 것도 되지만 마실 것을 사려 잠시 들어갔을 때 물건들의 금액에 기함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번에 가게 되는 대형할인마트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쓸데없는 걸 사게 될 지도 몰랐다. 최대한 신중하게 굴 필요가 있다면서 수인은 부지런히 걸어갔다.

한 눈을 팔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고, 어수룩하게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말을 걸 수도 있었다.

서울은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 없어.'라고 했다가 되레 당할 수도 있는 장소였다. 그러하니 만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몇 번이나 할머니가 말했었다. 그 말을 명심하자며 수인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그리고 신호등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앞을 쳐다봤다.

잘 정리가 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보도블록으로 나무가 한그루 씩 박혀있는 게 이상하게만 보였다. 왜 저렇게 인위적으로 해 놓은 걸까. 저렇게 따로 박아 놓으면 나무가 과연 잘 자랄 수 있는 걸까. 그 생각으로 인해 수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바람이 불었다. 앞 허리카락이 날린다. 놀란 수인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누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수인의 옆으로 나이 든 여인이 걸어갔다. 그 여인의 손에 들린 장바구니 가득이 야채가 담겨져 있었다.

"저기-."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그 순간 여인이 뒤를 돌아봤다. 수인의 수상쩍은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물었다

"왜 그래? 학생."

"죄송한데요. 그거 어디서 사셨어요?"

"그거 뭐?"

"거기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요."

여인은 들고 있는 장바구니 속을 확인했다. 이런 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니. 참 드물었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손을 들어 수인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기서 장 서서 일찍 가서 사고 오는길이야. 마트보다는 좀 많이 싸지."

잘 됐다.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수인은 당장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가까워. 1134번 타고 가면 금방이야."

"......버스 타고 가야 해요?"

"타고 30분이면 돼. 빨리 가야지 안그러면 다 팔려. 거기는 12시까지만 하는 데거든."

빨리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에 괜히 조급해진다. 수인은 여인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했다.

"저, 저기서 타면 되나요?"

고개를 끄덕인 여인은 어디서 내리면 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줬다. 생소한 지명을 들었다. 혹시라도 말을 잘못 듣거나 놓칠까봐서 수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수인의 마음은 장이 선 장소에 이미 도착을 해있었다.

마트 보다 훨씬 더 좋은 물건들을 잔뜩 살 생각으로 이미 꿈에 부푼 상태였다. 최대한 돈이 적게 들어야 했다. 그래야 영도한테 이상한 말 듣지 않게 될 거라며 수인은 여인이 가르쳐준 쪽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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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모를 음식들이 순서대로 나오고, 음식에 맞는 와인들도 따로 있었다. 

중간에 먹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취향인 걸 고를 수 있었다. 고르라며 내민 와인의 종류 하단에 적힌 금액은 기본이 400부터였다. 이제는 이런 걸 봐도 딱히 동요가 일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늘 먹던 걸 고르는 자신의 모습에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야 애초에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거라고 해도 이쪽은 아니었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지금은 성공하고 젊어서 이런 삶을 살고 있다지만 그것도 늙는 순간 끝이었다. 언제나 늘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워놓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모래가 빠져나가면 가장 위에 서있던 나도 그 좁디 좁은 구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건가 싶었다.

한창 잘 나가는 놈들은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지금 이 상태를 즐기곤 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이쪽이 더 이상하게 여겨질 터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주 이상한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이 마법의 순간이 끝나게 되는 거겠지.

"나랑 같이 있는 게 즐겁지 않나요?"

영도는 위를 쳐다봤다. 맞은편에 앉은 건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우아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겉모습으로 보기에 허튼 수작을 부릴 것 같진 않지만 사람은 겉보기론 알 수 없는 거였다. 언제 갑자기 골 때리는 걸 요구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이도 겉으로 보기보다 굉장히 많을 수도 있을 테고. 영도는 속마음을 감추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맛있는 음식에 아름다운 부인을 앞에 두고 있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무척 즐겁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료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걸요."

영도는 잠시 주춤했다.

정말은 무료했다. 잠이나 더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얼마 전에 개봉한 SF액션 영화를 보러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 할 순 없었다. 이건 비즈니스였다. 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제대로 해야 서로에게 좋았다. 윈윈 전략은, 마냥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전 제 방식대로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답니다."

영도의 입술 양끝이 위로 올라갔다. 화사하게 웃는 영도는 준수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로만 본다면 남자 연예인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영도가 특별한 것은 그 외모 뿐만이 아닌 실력에 있었다. 여자는 들고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처음 당신의 연기를 봤을 때를 기억해요. 마치 매직아이처럼 당신만 툭 튀어나와 있었지요. 어쩌면 저렇게 연기를 못할까 싶었지요. 얼굴 반반한 거 믿고 그쪽으로 들어온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몇 년 전 당신이 연극무대에 선 것을본 적 있었어요. 발성이 안정적이고 노래도 잘부르더군요. 하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당신의 연기였어요."

테이블 위로 든 손가락을 마주 잡은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마치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움직이더군요. 다음 드라마에서. 그리고 그 다음 영화에서도 당신이 맡은 그 배역의 사람인양 천연덕스럽게, 때로는 무섭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 제 눈을 의심했지요. 솔직히 처음 봤을 때에는 당신이 이렇게 성장할 줄은 몰랐어요. 하다가 안 되면 얼굴이랑 몸으로 그렇고 그런 여사님들 엉덩이를 핥으면서 용돈 좀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말씀이 꽤 걸걸하시군요."

영도는 피식. 하고 웃었다. 본인의 안 좋은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걸 모욕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웃고 넘기는 영도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과거의 미숙했던 부분을 죽기 살기로 달라붙어 고쳐내, 지금 이 자리에 오른 사람의 여유였다. 부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지금 당신의 그 모습이 보기에 좋아요.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예요."

여자는 와인 잔을 위로 들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의 팬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앞으로 계속해서 전 당신의 팬일 거예요. 팬인 저는 당신에게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당신이 그걸 알고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자면 두 달에 한번쯤은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요. 당신이 찍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새롭게 시도하는 일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거나 의논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대에게 건배. 그런 느낌으로 잔을 살짝 흔들고는 맛을 본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기만 했다. 하는 말도 거짓은 아닌 것 같지만 어떨까나. 애초에 재벌들에게는 크게 신뢰를 주지 않는 영도였다. 그는 가볍게 농담을 덤졌다.

"차라리 저희 회사 이사님이 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 사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그건 곤란해요. 당신네 쪽 사업은 세탁이 용의치 않아요. 나는 돈맛을 볼 수 있는 쪽으로 일하고 싶어요."

붉은 입술을 한쪽으로 비틀어 올린 여인의 미소에서 장난기가 묻어났다. 농담인 듯 싶으나 진심이었다. 투자를 하나 하면 열 정도를 얻어내야 승부를 거는 타입이었다. 그 순간 영도는 어깨에 들어간 힘이 탁 빠졌다. 우습다는 듯 웃는 얼굴이 처음과 많이 달라졌다. 나이프를 들어 올린 그는 '재미있는 분이시네요.'라고 말했다.

"친분이 생기다보면 개인적인 말도 주고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런 사이도 기대하고 있어요.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 같은 것보다 더 대단한 친구분들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하고 달리 원혁씨는 재능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잖아요. 그런 걸로 보면 제 친구들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너무 비행기 태워주셔서 황송하네요."

"진심이에요. 전 원혁씨의 성장이 참으로 기대가 되어요."

그래도 이런 여자도 있구나 싶었다. 웬일로 이상한 자리를 마련하나 했더니만 나름 괜찮았다. 돌아갈 때 시경에게 괜찮았다고 한마디 정도는 해줘야 겠다며 영도는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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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

차에 올라타자마자 보이는 얼굴은 시경이었다. 이건 시경의 차도 아니고 이쪽 차량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로드 매니저 준석이 고개를 꾸벅였다. 미리 말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인이었다. 말단인 그가 사장이 차에 올라타는 걸 막을 순 없었겠지. 영도는 문 바로 옆에 앉았다.

"왜 거기에 앉아? 뒤로 넘어와."

"좁아서 답답해."

팔짱을 낀 영도는 창밖을 내다봤다. 일부러 무시를 하려는 것 같지만 어림도 없었다. 시경은 앞으로 넘어와 기어이 영도 옆자리에 앉았다. 영도는 싫은 듯 옆을 흘겨봤다

"왜 이러셔 사장님. 오늘 한가하십니까."

"그 사람 우리 이모야. 괜찮지?"

"........"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어디서 많이 느껴본 적 있는 느낌이다 싶었는데 이모였단 말인가. 이 놈도 참 이상했다. 그런 정보라면사전에 알려주면 좋을 거 아니야. 또 섹스를 요구하는 이상한 아줌마를 만나게 되는 건가 싶어 날을 세웠잖아. 초반 틱틱 거리던 이쪽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싶었던 영도는 혀를 차며 시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처음부터 그런 거 알려주면 좋았잖아."

"그러면 완전 접대용으로 갔을 거 아니야. 난 그런 거 싫어. 우리 이모도 마찬가지야." 

입술 양 끝을 올리는 시경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전형적인 모사가의 눈빛이었다. 이모하고 이쪽을 얽히게 해서 또 뭘 뜯어내려는 거야. 나 정말 미치겠네. 혀를 찬 영도는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 분이야. 친해지면 여러모로 좋을 거야. 이쪽으로도 발이 넓거든.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너한테 가장 먼저 추천을 해줄 수 있는 분이지."

"그런 건 바라지도 않네요."

"사람이 욕심을 좀 내봐. 지금에서 한 단계만 더 올라가면 더 슈퍼스타야. 한국에서는 상대할 사람이 없어지는 거라고. 그런데 왜 여기서 주춤거리는 건데?"

"내 그릇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모양이지."

"한창 물오른 연기력을 선보이는 주제에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몰라. 난 눈 좀 붙일 거야."

눈을 뜨고 말을 섞어봤자 더 성가셔질 따름이었다. 이럴 때에는 상대 안하게끔 자는 척이 최고였다. 눈 딱 감아버리는 영도였지만 시경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흘깃거리면서 영도와 시경을 엿보던 준식은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 혹시 연애시대 1, 2부 가지고 계세요?"

"가지고 있어."

"오늘 감독님이 그걸 들고 와주셨으면 하던데요."

영도는 눈을 떴다.

"이미 다 찍은 걸 왜 들고 오래?"

"필요한 데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늘 원래 일정대로였으면 집에서 나오실 때 전화로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저보다 사장님을 먼저 만나셔서......"

그래서 미리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웅얼거리는 준식은 연신 시경의 눈치를 살폈다. 시경은 운전석에 한쪽 팔을 올리고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다 내 탓이라 이건가?"

사색이 된 준식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로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귀여운 얼굴로 잘도 사람 타박하네."

시경은 준식의 뺨을 잡고 옆으로 비틀었다. 엄청 아팠기 때문에 소리를 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은 준식은 운전대를 단단히 잡았다. 한번 더 옆으로 뺨을 비튼 시경은 '운전하고 있으니까 내 봐준다.'라고 말하며 손을 놓았다.

봐주는 거라고 해도 이미 준식의 한쪽 뺨은 퉁퉁 부어오른 상태였다. 손으로 문지르고 싶어도 운전 중이라 그리 할 수 없었다. 눈물 맺힌 눈을 빠르게 깜박이면서 준식은 영도의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영도는 시간을 확인하고 물었다.

"집에 들렀다가 가도 괜찮은 거야?"

"설명을 하면 이해하지 않을까요?"

영도는 혀를 찼다. 대본 때문에 늦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라는 건가. 안 그래도 원로 연기자가 좀 있어서 늦게 가면서 굉장히 눈치 보이는데 말이다. 시경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면서 영도는 재차 혀를 차며 뒤로 몸을 물렸다. 시경은 그런 영도의 어깨로 한 손을 올렸다.

"뭐야. 지금 화났어?"

"화났습니다. 사장님."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화났다고 말하는 영도를 앞에 둔 시경은 주먹을 입술에 대며 귀여운 척을 했다.

"어머나. 무서워."

이 자식을 정말. 마음 같아서야 멱살 잡고 창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사장이었다. 이쪽이 무명으로 힘들 시기 때 정식 계약을 해서 이만큼 키워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려 보이는 얼굴하고 다르게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았다. 뱃속으로 능구렁이 천마리는 키우고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건드려봤자 좋을 거 하나 없었다.

억울하고 짜증나고 화가 나지만 참아야만 했다. 목구멍 바로 위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꾹꾹 내리누르며 영도는 '집까지 속도 올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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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손에 큰 짐을 든 채로 걸어가는 수인은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저 멀리로 맨션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 제대로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었지만 올 때에는 '여기서 내려야 하나. 아니면 저긴가.'하는 사이에 한 정거장을 더 가게 되었다.

다른 곳은 정거장 간격이 좁던데 여기서는 다리가 있어서 굉장히 멀어졌다. 그렇다고 한 구간을 가자고 또 버스를 탈 순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걷기 시작한 건데 잘했다 싶었다. 조금 더 가면 도착할 듯 싶었다.

양 손에 들고 있는 게 무겁긴 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마트 가서 사려면 이거 3배는 더 줘야 해.'라고 하는 말처럼 정말 싸게 구입을 했다. 이 정도라면 남자 둘이서 3일 넘게도 먹을 양이었다. 당분간은 할머니가 보내주신 된장과 김치를 가지고 국과 찌개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기 좀 샀으니까 오늘 저녁은 그걸로 요리를 할까나. 하지만 기본적인 걸 제외한 다른 음식 만드는 건 서툴렀다. 수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건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그렇게 딱 두가지 뿐이었다.

하지만 맨션에 있으니까 이쪽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살림 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 주도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기까지 일단은 그런 거라도 열심히 해야 할 거라며 수인은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

들고 있는 짐이 무겁다. 살짝만 내려놓으면 안 될까. 그리 생각을 하며 눈을 내리뜨려던 찰나 옆으로 검은 차가 멈추었다. 크고 깨끗하고 비싸 보이는 차였다. 이건 뭔가 싶었던 수인은 그쪽을 쳐다봤고 차 문이 열리고 거기서 영도가 나왔다.

"......어?"

설마하니 차에서 영도가 내릴 줄은 물랐다. 예상치 못했던 일에 수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눈동자 안쪽으로 숨겨지지 않는 반가움이 서렸다. 물론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지도 알겠지만 말이다.

영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가서 돌아오는 길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그가 먼저 손가락으로 정확히 수인을 가리키며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영도의 질타에 수인은 순간적으로 주눅이 들었다. 잘못을 한 건가.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장 보고 왔어요."

"마트가 이쪽이냐? 마트는 왼쪽이라고 했잖아. 여기는 완전히 반대쪽이잖아."

"마트보다 훨씬 더 싸게 파는 장이 있다고 해서 거기로 다녀왔어요."

수인의 말에 영도는 같지도 않다는 듯 당장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로 수인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때마다 수인의 고개가 옆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너 그러다가 길 잃고 싶어? 너 같은 촌닭은 가만히 걸어 다니기만 해도 촌스러운 게 풀풀 풍겨. 그러다가 도를 믿으십니까. 라는 놈들한테 걸려 사기당하기 딱이라고. 이상한 데로 끌려가서 앵벌이 당하고 싶어서 이래? 물건 싼 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가 알려준 마트나 가란 말이야. 내가 카드 줬잖아."

말을 하면서 영도는 점점 더 화가 났다. 왜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이렇게 제 멋대로 구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무슨 일 생기면 뒤집어쓰는 건 몽땅 자신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면 당장 시골로 돌아가라 하고 싶었다. '할머니 옆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될 거 아니야.'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앞까지 올라왔다.

입을 꾹 다문 영도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꽤나 날이 선 모습이었다. 그런 영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이 준 카드라도 그건 내가 번 돈이 아니잖아요. 나는 꼭 필요한 때에만 형 카드를 쓸 거예요. 어차피 그건 다 나중에 제 빚이 될 테니까요."

"......뭐라고?"

"그리고 나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지 않아요. 앵벌이로 끌려가지도 않고 사기 당하지도 않아요. 누가 사탕 흔들면 따라가는 어린애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화 내지 말아요."

"너 지금-."

"모르겠어요? 나도 나름 노력하는 거라고요. 어떻게 하면 형한테 피해를 덜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따박따박 말대꾸는 잘도 했다. 잘난 거 하나 없는, 이쪽 도움이 아니라면 여기서 생활도 할 수 없는 놈이 말이야.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기는. 다른 때라면 안 그랬겠지만 안 그래도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때문에 지금 수인의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기에 힘이 들어갔다.

영도는 눈을 내리뜬 채로 냉랭하게 한마디 했다.

"다 필요 없거든?"

"......"

말투는 요즘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억양은 영판 달랐다.

지금 영도는 이쪽을 귀찮아하고 있었다. 별 시답잖은 놈이 헛소리를 늘어놓는군. 라고 말하고픈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수인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 줄 알았으면 그냥 마트나 갈 것을.

몇 천원 아끼자고 장에 가서 양손 가득이 짐을 들고 낑낑 거리며 20분 째 걷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청승맞게 여겨졌다.

수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꾹 다물린 입이 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답답했다. 하다못해 지금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만 알면 이렇게나 속이 답답하진 않을 터였다. 혹 모르지. 조용히 있는 것 같아도 정말은 이쪽은 노려보고 있을 지도 말이다. 그 눈빛부터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던 영도는 손을 들었다. 수인의 앞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기려 했다.

"뭐야? 지금 두 사람 싸우려는 거야?"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경은 영도의 어깨에 떡하니 팔을 올렸다.

이 인간이 왜 남의 집안 문제에 끼어들려는 거야. 아차. 수인이 사촌동생이라는 걸 이 인간은 모르고 있을 텐데.

낭패라는 듯 굳은 얼굴이 된 영도의 어깨에 매달린 채로 시경은 수인을 봤다. 그의 눈이 짧은 순간 수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윽 훝고 지나간다. 다음 순간 입가로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영도의 뺨에 손가락을 대고 꾸욱 눌렀다.

"영도 못됐다. 왜 이렇게 귀여운 동생을 울리고 그래?"

"울린 거 아니야. 그리고 나랑 내 사촌동생 일이야. 사장님은 좀 빠져 주시지?"

"이건 집안일입니다. 라는 건가."

시경의 한쪽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흥미진진해하고 있었다.

나름 수인과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 상황을 시경의 단순한 놀이 상황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영도는 재차 입을 열었다. 금방 처리를 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하려는데 수인이 옆을 지나쳐갔다.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당황한 영도는 당장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야. 어디를 가는-!"

"원혁이다!"

영도가 수인을 붙잡으려는 것과 동시에 앞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고딩들이었다. 영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비명소리는 더 커졌다.

"꺄아아악! 정말 원혁이잖아!"

"큰일이네? 알아보는 사람들 달려든다. 일단 차에 올라타."

팔을 잡아끄는 시경은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영도가 볼 때에는 열 받는 얼굴이었다. 뭘 저렇게 헤죽거리는 건가 싶어서 한소리 하고 싶었으나 그 전에 차에 올라탔다. 올라타면서 영도는 횡단보도를 다 건너 보도를 걸어가는 수인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당장 혀부터 차게 된다.

저 망할 촌닭 꼬맹이. 날 무시하고 그냥 가 버려? 집에 들어가서 두고 보자. 열 받았던 원혁은 당장 이를 갈았다.

"지금 화났어?"

영도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시경은 생글거리고 웃는 얼굴이었다. 동안이고 원체 미형이다 보니 그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워 보이긴 했다. 하지만 영도는 기분 나빴다. 원래 이런 식으로 웃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기분 나쁜 얼굴인 건데?"

"기분 나쁜 얼굴? 내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어?"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며 시경은 우후후-하고 웃었다. 그런 웃음소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당치도 않았다. 영도는 입술을 씰룩거렸고 준식은 사색이 되어선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무서워 죽겠네.'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있던 준식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바로 차를 몰았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영도는 재차 창 밖을 확인했다.

차가 지나치는 옆으로 수인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걸어서 가는 수인보다 차로 이동하는 이쪽이 훨씬 더 빨리 도착할 터였다

.....그냥 차에 태워서 좋게 말할 걸 그랬나.

"지금 후회하고 있어?"

영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는 대답 없이 시경을 돌아봤다.

시경의 눈동자가 다른 때하고 다르게 많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놀이감을 발견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기분 나쁘다. 그런 생각이 든 영도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왜 이래."

"왜 이러긴. 영도님의 사촌동생이 귀여워서 그러지이~."

"귀엽다고? 저 촌닭이?"

지금 뭔 말을 들은 건가 싶었던 영도는 창 밖을 가리키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영도를 본 시경이 팔짱을 끼었다.

"영도는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없다니까."

"하지만 헛소리 하는 사람은 단박에 알아보지.

너처럼 말이야.

불신이 가득한 영도의 반응에 시경은 아하하-하고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어깨를 으쓱인 그는 '뭐. 몰라도 상관없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더 귀찮게 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금방 떨어진다. 그보다 시경이 수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싶어 불안했다. 저 촌닭은 이 놈의 유연한 혓바닥에 홀라당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선 안 되었다. 공적으로면 모르겠지만 사적으로 보면 이 놈은 지나치게 허리 아래가 가벼웠다. 수인이라면 시경에게 단물 쓴물 다 빨린 뒤에 비참하게 버림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네 사촌동생 이름이 뭐야?"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 것에 자연스럽게 영도의 가드가 올라갔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 애 평범해. 그냥 촌닭이라고."

"앞 머리카락은 왜 기르는 건데? 자르면 안 되는 거야?"

"나도 모르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꼴이었어."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리는 건데 답답하지 않을까. 뭔가가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감추는 거야.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그런 생각을 왜 해?"

할 리가 없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꼴이었다니까? 강원도가 겨울이 되면 많이 추워지니까 눈을 보호하려고 앞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모양이지.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던 영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홍터가 있나? 그게 아니라면 엄청난 추남인 거 아니야? 코랑 입술이랑 턱 라인을 보면 그리 나쁘진 않는데? 무엇보다 친가 쪽은 인물이 좋은 편이었다. 가족들 중에서 평범하게 생겨도 밖에 나가면 잘 생겼다는 말을 듣는 축복받은 유전자를 지닌 가족들이었다.

"저런 타입이 변신을 하면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시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내 사촌동생 건드리지마."

"안 건드려. 그냥 귀엽다고 말하는 것뿐이잖아."

"그런 말도 하지마."

너는 쳐다도 보지도 말고 귀엽다는 말도 하지마. 두 번 다시 수인이 녀석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 그 녀석에게 일이 생기면 피 보는 건 이쪽이란 말이야.

수인에 대해 길게 말을 하면 할수록 시경이 더 집요하게 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 대화는 여기까지. 그런 느낌으로 영도는 팔짱을 끼고 정면을 노려봤다. 옆얼굴이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 노골적으로 이쪽을 피하려 하고 있음이었다. 꽤나 흥미진진하다는 듯 영도를 바라보던 시경이 물었다.

"최근 들어서 첫사랑 꿈은 안 꿔?"

"시끄러워.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제발 좀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냐? 영도는 눈빛으로 그리 말했다. 쏘아보는 눈빛에도 시경은 여유 그 자체였다. 요즘에는 그 꿈을 꾸지 않는 모양이네. 중얼거린 시경은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콧노래를 불렀다. 다리를 꼬고 앉아 발목을 까닥이는 폼에 영도는 한숨을 쉬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첫사랑이라. 그러고 보니 요새 통 꿈을 꾸지 않았다.

분명 시경이 중학생 때였을 거다. 우연히 놀러간 할머니 집에서 그는 천사와 만났다. 사람들 앞으로는 나서지 않고 풀 사이에 숨어서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리고 울고 있었다. 이쪽이 부르자 수줍게 고개를 들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했다. 지금에 와서 천사를 봤다는 소리 같은 걸 하면 주변 사람들이 바보 취급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영도는 확신했다.

그건 분명히 천사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닳아빠진 현대인의 삶을 살고 있는 그였지만, 그 첫사랑만큼은 환타지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겨울 정도로 현실적인 것투성인데 그런 것 하나 환상적인 기억으로 남기는 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말하고 난 후 영도는 눈을 감았다.

***********************************

집으로 들어왔을때 약간의 다름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서 둘러보자 욕실 앞에 영도가 입고 갔던 옷이 벗어져 있었다. 집에 들렀다가 다시 나간 건가. 연예인이니 바쁜 게 당연한 거겠지.

수인은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사온 물건들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정리부터 해야만 했다. 묵묵히 물건을 하나, 둘씩 꺼내던 수인은 손을 놓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정말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영도는 이런 걸 기대하고 있지 않은것 같은데. 어쩌면 이렇게 하는 게 그에게도 좋을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부담만을 안겨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수인은 고기가 들어가 있는 팩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굳은 눈길로 그걸 바라보다가 봉지에서 다른 걸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바로 그 때 음악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소리인지라 처음에는 귀로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이건뭐지?'라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있었다. 이건 설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수인은 급히 현관문 앞으로 달려갔다.

"누구 오셨나요?"

바로 그 때 음악소리가 멈추었다. 현관문 밖에 누가 서있는 거였다. 그런데 혼자만의 판단으로 문을 열어줄 순 없었다. 이 집의 주인인 영도는 지금 자리에 없는 거니 말이다.

"문 안 열어주나? 나 손님인데."

문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경쾌하고 톡톡 튀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허스키한 느낌이 섞여서 매력적으로도 들렸다. 누굴까. 엘리베이터를 나오면 집은 하나 밖에 없는 형식이었다. 지용이 아무나 들일 리가 없고 이 맨션의 관계자일 수도 있었다. 혹 모른다. 다른 층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영도의 손님 일지도.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게 없었기 때문에 수인은 쉽사리 문을 열 수 없었다.

"죄송해요. 집 주인이 지금 없어요."

"그거 알고 찾아온 거야. 내 목소리 모르겠어? 아까 영도 옆에 붙어 있었는데."

영도 옆에 붙어있던 사람? 그제야 수인은 영도의 어깨에 팔을 올리던 아름다운 생김새의 사내를 떠올렸다. 친해 보였지. 영도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었다. 정말 친구일 지도 모르지. 하지만 영도는 일을 나간 참이었다. 같이 있던 사람이 왜 이리로 온 거란 말인가. 암만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난 손님인데 이렇게 세워두기만 하기야?"

".....잠시 기다려 보세요."

수인은 문을 열었다. 다 열기는 했어도 위에 달린 안전체인은 그대로였다. 때문에 문을 활짝 열 수 없었다.

문 밖에 서있던 시경은 조금 열린 문 틈으로 얼굴을 내미는 수인을 확인하고는 체인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 안전장치도 풀어주면 안 될까나?"

"왜 오신 건데요? 형한테 전할 말이 있는 거라면 저한테 하세요. 대신 말해 드릴게요."

"꽤나 신중하네. 그런 점도 마음에 드는 걸?"

그저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말을 할 따름이었다. 그런 걸 마음에 든다 하는걸 이해할 수 없었다.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에 시경의 입가에 서려있던 미소가 진해졌다.

확실히 수인은 특이했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다. 시경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었다.

"영도한테 들었어. 공부하러 서울로 올라온 거라며.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가능하면 도움이 되는 쪽으로 노력해 볼게."

이 사람이 뭐라고 도움을 주려는 걸까. 영도도 없는 이 집에 찾아와서 말이다.

조금 전까지 영도와 함께 있던 사람이 지금은 이곳에 있었다. 영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찾아왔다는 건 이쪽을 만나러 온 거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너무 앞서가는 생각인 걸까. 하지만 의심스러웠다. 수인이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화려하고 예쁜 사람이기도 했다.

영도와 있었을 때 그가 시경을 부르던 호칭을 떠올리며 수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사장이세요?"

"영도가 소속해 있는 엔터테이너 사장이야."

"......"

그러면 높은 사람이었다. 영도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런 식으로 밖에 세워두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큰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어 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경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일단은 그걸 전달하러 온 것뿐이야. 그러면 예쁜아. 수고해. 다음에는 이런 딱딱한 거 치우고 나서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자."

손을 흔든 시경은 수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 수인은 다시 명함을 확인했다. 뭔가가 잔뜩 적혀 있지만 잘 모르겠다. 명함을 앞 뒤로 확인하던 수인은 문을 닫고 위에 걸린 걸 풀어냈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야 나오는 거야?"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옆을 쳐다보자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시경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이를 보이며 웃는다.

"생각보다 순진한데?"

시경이 수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수인은 옆으로 몸을 물리면서 경계심을 내비쳤다.

"왜 이러세요."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마. 단지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야."

시경은 손가락으로 수인의 앞머리카락을 아래에서 위로 스윽 올렸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인지라 막을 새도 없었다. 이마로 머리카락이 후두둑 떨어지는 걸 느끼며 황급히 손을 들어 얼굴의 반을 가렸다. 뒤로 몸을 물리자 시경이 수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머리카락 자르러 가자."

"저 지금부터 정리할 게 많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 무턱대고 따라갈 만큼 멍청하지도 않아요."

"난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꼴로 서울 시내 돌아다니면 다들 무시한다? 여기 사람들은 겉모습을 중시하거든. 서울 생활에 적응하러 왔다가 왕따 당하면 너만 손해야. 안 그래?"

수인은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 따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경도 할 말을 할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최대한 단정한 모습으로 꾸며야지 일도 잘 풀릴 거야.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질 걸. 어쩌면 영도도 색다른 눈으로 널 볼지도 모르지."

영도를 거론하는 순간 수인이 살짝 흔들렸다. 그걸 시경이 잡아챘다.

그의 입가로 미묘한 미소가 걸린다. 어떤 식으로 나올 거냐? 그리 묻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수인은 아까보다 다소 작아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런 이상한 말로는 넘어가지 않아요."

"눈동자 색 때문에 그래? 내가 볼 때에는 예쁘기만 하던데 왜 그러지?"

수인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놀란 수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앞머리카락을 눌렀다. 잘 덮어져 있었다. 영도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느낌은 없었는데 어떻게. 수인은 시경을 바라봤다.

"언제 봤어요?"

"난 눈썰미가 좋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많은 걸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알아채는 건 문제도 아니야. 그런 건 껌이지."

시경은 수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가늘게 휘고 입술 양 끝을 올리는 그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안에 들어가서 정리할 것만 하고 바로 나와. 나랑 같이 나가자. 예쁘게 꾸며줄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갑자기 나타난 이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아직까지도 시경의 이 말도 안되는 제의에는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단호한 결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꽤나 진지했다. 덧붙여 성가시다는 듯 이쪽을 보던 영도의 얼굴도 떠올랐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않았던 주제에.

수인은 천천히 손을 주먹 쥐었다. 조용히 있나 싶던 그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라고 말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시경은 이거라는 듯 손을 불끈 쥐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

대본을 받는 순간 바로 외워버리고 집에 두고 다녔다. 중간에 대사가 꼬이거나 기억이 나지 않을 상황에 대해서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신을 100% 믿고 연기에 임했다. 그러다보면 불안은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겨난다. 

사소한 무엇이라도 열의를 가지고 임하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과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이 영도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에 와서 꽃피우고 있었다.

촬영을 하는 동안 여러 번의 NG가 있었지만 영도가 낸 부분은 전무하다시피했다. 처음 촬영을 해서 거의 마무리가 될 때까지도 영도로 인해 생긴 NG는 한손에 꼽을 정도였다.

방송국 창사 50주년을 기념한 15부작 드라마의 마무리 단계에 다다라 있었다. 모든 것이 사전 녹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있어도 두려움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그 결과가 좋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도는 방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대 배우를 바라봤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응시하던 상대 배우의 입술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감독은 컷 사인을 내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에 영도의 표정이 풀어진다. 마치 마법에서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번 눈을 감았다 뜬 영도는 맞은편에 앉은 중년 연기자에게 먼저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았네. 자네가 완벽하게 잘 해서 이번에도 빨리 끝나는 구만."

"아닙니다. 선배님이 리드를 해주셔서 연기가 수월했던 것뿐이지요."

악수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일어섰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훈훈하기만 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나? 저녁 먹고 들어갈까?"

"죄송합니다. 선약이 되어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다음에 제가 좋은 곳에 모시고 싶은데, 시간이 되실까요?"

"한창 잘 나가는 자네와 달리 지금 난 남아도는 게 시간 밖에 없지. 언제든지 불러만 주게.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할 테니까."

"황송하게 왜 그러십니까."

실제로도 무안한 듯 어색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영도의 모습에 중년 연기자는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자리에서 몇 마디를 더 나눈 후에 헤어졌다.

스텝이나 감독에게 인사를 한 후 촬영장을 빠져나오자 매니저 용한이 보였다. 점점 배가 불러서 지금은 영도가 보기에도 걱정이 될 만한 체격의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의를 건넸다.

"수고했어. 영도아."

상의를 받아 입으면서 영도는 하품을 했다.

"다음 스케줄 없지? 나 집에 들어간다."

"스트레스 풀어주려고 룸 예약했는데 안 갈 거야? 아는 친구들 몇 불러서 놀아."

"아니. 그냥 집에 들어갈게."

이제는 친구들 만나는 것도 지겨웠다. 다 같은 물에서 활동하는 것들이라 멀리하는 편이 낫기도 했고 말이다. 바로 됐다고 하는 영도의 대답에 용한은 의외라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말을 꺼냈다.

"준식이한테 들었는데 집에 친척동생이 와있다며? 어리다고 그러던데. 동생 신경 쓰여서 그래? 의외로 좋은 형님이었나 보네."

"그런 거 아니야."

걱정되어서 일찍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제대로 교육을 시킬 작정이었다. 강원도에서 갓 상경한 촌것이 함부로 돌아다니기에 서울은 너무도 위험한 장소였다. 이쪽이 알려준 곳 외에는 다니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잘 듣는 거지 바로 지나쳐 가버리는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가르쳤냐면서, 정공법으로 들어가 혹독하게 혼을 내줄 셈이었다. 눈물 쏙 나게 해줄 거라며 영도는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실례합니다. 원혁씨."

용한과 가볍게 대화를 주고 받으며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영도는 갑자기 나타난 인물에 금방 표정이 달라졌다. 굳은 얼굴이 된 영도 앞에 서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그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이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명함은 영도가 받았지만 반응은 용한이 빨랐다. 사람 좋게 웃던 게 언제냐는 듯 그는 영도의 앞을 막아서며 수상한 사내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 관련이라면 사무실 쪽으로 해주십시오."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이걸 읽어주십시오."

이번에 내민 것은 대본이었다. 이런 걸 건네고 싶으면 소속사 쪽으로 하라고. 소속사는 괜히 폼으로 있는 줄 알아? 용한의 얼굴 위로 서리는 짜증을 모르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사내는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저희 쪽에서 야심차게 준비를 한 연극 대본입니다. 연기력과 노래가 되는 원혁씨라면 분명 큰 성공을 이끌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먹고 튀는 그런 기획사는 절대로 아닙니다. 후원자들도 많고 갖출 건 제대로 갖춘 회사입니다. 다른 배우들도 대부분 결정이 난 상태입니다. 그러니 한번 읽어보시고 관심이 가신다면 꼭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냥 서있으면 계속 시끄럽게 굴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라는 느낀으로 매니저는 상대 쪽으로 양 손을 내밀었다.

"말씀 고맙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자."

매니저는 영도의 등에 손을 대고 안쪽으로 밀었다. 어디까지나 매니저 선에서 제지를 가한다는 느낌으로 움직였다.

사소한 작은 일이라도 순서대로 차근차근 움직이는 게 옳은 거였다.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런 식으로 대본을 떠넘기다니. 말도 안 되었다.

"네가 이류 배우도 아니고,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한다면서 험담이나 잔뜩 해댈 셈이었던 매니저는 대본을 넘기는 원혁을 보고는 당장 얼굴을 구겼다.

"뭐 하러 그런 걸 봐?"

"혹시 모르지. 괜찮은 내용일지도."

하지만 초반 10페이지 가량을 봤을 때 한숨이 나왔다.

남자 주인공에 의한 남자 주인공을 위한, 남자 주인공만의 연극이었다. 초반부터 누드씬이라면 말 다 한 거다. 배우 이름 하나 내걸어서 일시적 화제를 모아서 이름 좀 팔겠다는 거다. 애초에 이쪽이 이런 무대에 설 거라고 생각했던걸까. 여기저기 찌르다가 이쪽으로까지 온 걸지도 모르지. 영도는 대본을 용한에게 건넸다.

"쓰레기네."

"그럴 것 같던데 뭘. 얼굴만 봐도 딱 사기꾼 타입 아니냐? 이쪽 바닥이 놀이터도 아니고, 요즘에는 막장인 놈들이 너무도 많아."

용한은 대본으로 영도의 등을 두어번 토닥였다.

"요즘 무대 쪽으로 관심 많다는 건 알지만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이미 넌 내년 중순까지 스케줄 다 차있어."

"알고 있으니까 시끄럽게 좀 굴지마."

영도는 대본을 매니저에게 건넸다. 주지 않으면 계속 눈치를 살피면서 시끄럽게 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영도가 건넨 대본을 앞, 뒤로 살피던 매니저는 그걸 돌돌 말아 목 뒤를 두드리며 '어. 시원하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는데 라디오 방송이 모여 있는 쪽 입구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로 늘씬하게 잘 빠진 여자가 있었다. 

이유라였다. 한창 잘 나가는 탤런트인 이유라는 고개를 들다가 영도를 발견했고 그 순간 눈을 빛낸다. 하지만 방송국 로비에 깔려있는 기자들을 의식한 건지 바로 고개를 돌린다. 그 짧은 순간의 일을 눈치 챈 용한이 영도의 옆으로 접근했다.

"이유라, 재 말이야. 아직도 너한테 꼬리쳐?"

"준식이가 불었을 거 아니야. 전에 차에 올라타기까지 하던데?"

"안 되겠네. 재네 사장은 엄하기로 유명한데 재는 뭘 믿고 저렇게 멋대로 굴어."

"한창 인기 얻고 있잖아. 콧대가 하늘까지 솟았어. 뭐든지 제 말대로 된다고 믿고 있는 거지."

"아주 여우같은 거야. 저런 거하고 왜 만났던 건데?"

막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유라가 뒤를 돌아봤다. 긴 머리를 손으로 넘기면서 정확하게 영도를 보고는 붉은 입술 꼬리를 올린다. 혹시나 이쪽이 하는 말을 들었을까봐 황급히 입을 다물었던 용한은 그녀의 미소에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저게 아주 몸이 달았구만.'라고 중얼거리려니 영도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그냥 소개로 두어번 만났을 뿐이야. 그걸 두고 제 멋대로 내 애인인 척 구는 것 뿐이지."

"애초에 안 만났으면-!"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지자 한쪽 구석에 있던 기자들이 눈을 빛낸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실수를 했다 싶었던 용한은 영도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어금니를 꽉 문 채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안 만났으면 좋았잖아. 딱 봐도 집요할 것 같구만. 왜 그랬어."

"나도 모르겠다."

영도는 용한의 팔을 옆으로 치워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영도는 상의 위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박힌 [노랭이]를 본 용한이 '어? 사장님이다.'라며 반색을 했다. 그에 반해 영도는 찌그러진 얼굴이다.

짜증나네.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또 뭐야."

[저녁 10시에 일 다 끝난 거야? 그래도 이른 시간이네. 안 그래?]

"우리들 사이에서는 이른 시간이라도 일반적인 사람들한테는 늦은 시간이지. 푹 쉬어야 하는 시간이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걸로 불러낼 생각하지마. 오전 일로 충분한 거잖아."

[불러낼 마음은 없어. 집으로 곧장 들어가. 내가 선물을 준비해 놨으니까.]

"......뭐라고?"

이 무슨 쉰 소리란 말인가. 선물이라니? 무슨 선물?

그 단어에 설렘이 들기 보다는 기분이 확 잡쳤다. 다른 곳도 아니고 집이라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설마?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영도는 앞뒤 분간 않고 당장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달려가 버리는 영도의 모습에 놀란 매니저가 급히 앞으로 팔을 뻗으며 '야! 같이 가!'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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