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1)

편안한 차림에 아직 젖은 머리카락을 축 늘어뜨린 상태라 해도 본판이 잘났기 때문에 영도는 깔쌈한 모습이었다. 이 상태로 그냥 나가도 눈빛 하나로 여자 마음을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은 잘나디 잘난 영도는 지금 침묵한 채로 있었다. 

잘생긴 사람이 굳은 얼굴을 하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그는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을 암흑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도 옆에 선 수인은 담담하게 권했다.

"드세요."

수인이 가리키는 것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이었다. 반찬 수는 많지 않았다.

뚝배기 된장국에 김치에 나뭍 몇 가지. 그리고 밥이 전부였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공간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상차림이었다. 

수인은 재차 영도에게 권했다. 

"맛있을 거예요."

".....너 말이야."

말을 하고 나서 더 뭐라 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미 청소를 했을 때부터 끝난 일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뭐라 말을 꺼내면 청소부터 시작해서 이 음식까지 따져 물어야 할 판이었다. 그건 완전 잔소리쟁이 새엄마 느낌이 아니던가.

난 쿨하고 멋진 원영도야. 이런 것 가지고 꼬장하게 굴지 말자. 앞으로 오래있을 녀석도 아니잖아. 배도 고파서 뭐 시켜먹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영도는 의자를 끌고 테이블 앞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뚝배기에 그득 담긴 된장국을 보곤 바로 한마디 했다. 

"이런 걸 끓이면 집 안에 냄새 배잖아."

"된장 냄새 배는 게 뭐가 어떠세요. 그런 걸 말할 거면 한국에서 살면 안되지요."

영도는 수저를 꾸욱 쥐고는 수인을 노려봤다. 

"내가 무슨 말 할 때마다 그렇게 말대꾸 할 거냐. 앙?"

"예전에 할머니가 해주면 청국장도 들고 마시던 사람이 새삼스럽게 이래저래 말하니까 한마디 할 수 밖에 없는 거잖아요."

영도를 보지 않은 채로 말을 한 수인은 의자를 끌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수인이 앉자 영도는 당장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뭐야. 왜 앉는 건데?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저녁을 안 먹었나? 영도는 시간을확인했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청소만 하기엔 많은 시간이었다. 오늘하루 뭘 하고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지만 수인은 먼저 수저를 들고 있었다. 된장국을 떠서 맛을 보는 입술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웃고 있었다. 그걸 본영도도 된장국을 떠 맛을 봤다. 

"........"

그 순간 눈 앞으로 우주가 그려졌다. 넓고 넓은 우주 속에서 티끌이 되어 날아가는 영혼을 느끼며 동시에 어렸을 적 할머니의 손을 잡고 논을 거닐던 날이 떠올랐다. 지금은 잊혀진 과거의 향수가 되살아나면서 죽어있던 미각이 하나하나 살아났다. 영도는 지금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와인 가지고 시음하는 놈들이 별 헛소리를 지껄여도 겉으로는 가식적인 미소로 응수하던 영도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가 이 된장국 맛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잔뜩 늘여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자연스럽게 국을 떠먹는 영도의 손길은 바빠질 수 밖에 없었다.

밥을 퍼서 먹는 영도의 모습을 빤히 보던 수인은 그의 밥공기가 바닥을 보이는 순간 물었다. 

"밥 더 먹어요?"

수저를 입에 문 채로 영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은 별 말 없이 냄비에서 밥을 꺼내 그릇에 담아 내밀었다. 당장 그걸 채간 영도는 길게 손으로 찢은 김치를 밥 위에 올리고 크게 한입 먹었다. 우물거리면서 된장국도 후룩 거리면서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 참이었다. 음식이라는 건 죽지 않을 만큼만 흡수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떠한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던 영도가 지금은 미친 듯이 된장국을 탐하고 있었다. 영도가 먹는 걸 보면 마치 일주일 내내 굶은 사람 같았다. 수인으로서는 오해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얇은 옷 입고 새벽같이 나가서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일 하는 동안 한끼도 제대로 못 챙겨먹는 걸까나. 수인은 된장국을 영도 앞으로 내려놓고 다른 김치도 손으로 찢어 그의 밥그릇 안에 넣어줬다. 전이라면 '더럽게 지금 뭘하는 거야!'라고 한마디 할 만한 영도가 잠자코 받아먹었다. 두 그릇도 꾹꾹 눌러뒀는데 부족할 판이었다. 

"한 그릇 더 먹을 거예요?"

"응."

수인은 아예 밥을 한 냄비를 통째로 들고 왔다. 그걸 옆에 내려놓자 영도는 아예 그 채로 들고 먹기 시작했다.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인이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는지인식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빼앗아 먹을 새라 영도는 냄비의 밥과 된장국이 바닥을 보이고 나서야 수저를 내려놓았다.

"끄억."

생긴 것 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트림을 하고 나서 주먹으로 턱 아래를 훔쳐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으네."

포만감에 맞춰서 행복감이 생겨난다. 정말 뿌듯했다. 동그랗게 부푼 배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던 영도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수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지레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영도는 당장 투덜댔다. 

"뭘 쳐다봐?"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긴 제가 치울게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는 하나 조금 전 수인이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영 거시기 했다. 눈이 안 보여도 느낌은 전해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지 새끼를 보는 듯한 눈길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걸까나.

뭐라 더 말을 해주려던 순간 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정리했다. 영도는 수인의 밥그릇을 확인했다. 일단 다 먹은 것 같기는 한데 암만 봐도이쪽이 제일 많이 먹은 것 같았다. 그 부분은 좀 미안하지만, 난 집주인이잖아. 그 정도 먹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욕실 안으로 들어가 양치질을 하는 듯한 영도를 두고 수인은 정리를 시작했다. 이미 이쪽 천장이나 그릇을 놓인 장소에 대한 파악은 다 끝났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다년간의 살림으로 인해 이미 주부 5단에 오른 상태였던 수인은 능숙하게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된장국을 끓인 뚝배기를 확인한 수인의 입술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래도 다 먹었네. 어렸을 때에도 그랬다. 할머니가 끓여준 청국장을 두고 냄새가 난다면서도 코를 잡으면서도 깨끗하게 다 비워 먹었지. 사람이 하나도 안 변했다면서 수인은 더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영도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로 거실 쪽으로 나왔다. 어슬렁거리는 느낌으로 주변을 살피던 영도는 고개를 길게 빼냈다. 수인의 됫모습이 보였다. 

묘하네. 이 집에서 다른 사람이 설거지 하는 광경은 또 처음 본다면서 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비빈 영도는 방에서 챙긴 시디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일단 시디를 넣고 TV화면을 켠 후, 소파에 앉았다. 쿠션을 옆구리에 끼자 배가 지나치게 튀어나온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많이 먹었다. 영도는 손으로 배를 문지르면서 뒤를 돌아봤다. 

"나 커피."

대답이 없다. 설거지 하는 소리와 물소리만 섞여서 들려올 따름이었다. 못 들은 거야. 안 들리는 척 하는 거야.

영도는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커피 마시고 싶다고."

"조금만 기다려요."

수인이 순순히 대답을 하는 순간 영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편하네. 여자하고 다르게 괜히 신경 쓸 거리도 없고 달라붙을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사촌동생. 얹혀사는 입장에 있는 수인이었다. 이런저런 걸 부려먹어도 하나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영도는 만족스럽게 부른 배를 토닥이면서 화면에 집중했다.

저번에 찍은 영화였다. 이번에 사람들 사이로 평판이 좋았기 때문에 DVD화 되기 전에 시디를 얻어서 한번 둘러볼 작정이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기에 여자들에게 그토록 호응이 좋았던 걸까 싶었다. 소파에 한쪽 다리를 올린 영도는 느긋하게 화면에 집중해 나갔다.

한 사내가 서있고 그 앞으로 여자가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여러 가지의 표정들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꿈도 꾸지 못할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저런 표정 연기도 할 수 있었다. 역시 못하는 건 배우면 된다니까. 예전에 나 안 쓴 사람들은 지금 후회를 하고 있겠지. 나도 웬만한 돈이 아니라면 너희들하고는 다시 일 안 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 그런 상태가 되어선 황제 포즈로 화면을 보던 영도이나 점점 그 얼굴이 진지해졌다. 능청맞은 모습은 오간데 없고 앞으로 몸을 내민 채로 그는 점점 더 화면 속의 또 다른 자신에게로 몰입해가고 있었다.

그래. 저때에는 그런 감정이었다. 이때에는 달리 움직였으면 좋았을텐데. 화면 앵글이 이상한 거 아니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탐색가의 눈을 하고 있던 영도는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벅머리의 눈도 안 보이는 수인이 떡하니 앉아있는 것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몸을 물렸다.

"깜짝이야! 왔으면 왔다고 말해!"

소파에 찰싹 달라붙은 영도의 손은 심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정말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며 사색이 되어 할딱거리는 그를 무시한 채로 수인은 TV화면을 가리켰다.

"이게 뭐예요?"

"뭐가?"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던 영도는 그런 본인의 행동에 무안해하며 웅얼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인의 눈동자는 TV화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놀란 듯 바라보는 그 눈길에 영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왜 그러는 건데?"

"형이 왜 TV에 나와요?"

물으며 수인은 영도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눈동자는 안 보여도 분명하게 궁금해 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 나오는 영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영도도 살짝 당황했다. 왜 모르는 건데? 강원도에 TV가 없었나? 아닌데? 예전에 놀러 가면 붙어 있었는데? 영도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이게 영화 내용이라서 그런가. 아직 DVD 안 되서 그래?"

"형. 연예인이에요?"

그대로 영도는 얼어붙었다.

지금 원혁이라는 연기자는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인물이었다. 인지도는 물론이거니와 인기 상승가인 나를 모르는 사람은 갖 태어난 아기와 눈 안 보이는 노인뿐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던 영도에게 있어 지금 수인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 이 놈이 뭔 쉰소리를 하는 거야. 혹 모른다.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척 굴어서 이쪽의 관심을 끌려는 걸지도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도 그런 일은 흔히들 있지 않은가.

영도는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너 나 몰라?"

"원영도형이라는 건 아는데....."

"그 이름 말고. 원혁이라는 이름 몰라?"

입을 다무는 걸 보아하니 모르는 모양이었다. 영도는 그게 더 놀라웠다.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묘한 생물체를 바라보는 눈빛에 아랑곳없이 수인은 타온 커피를 영도 앞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옆에 앉았다. 허리를 주욱 펴고 허벅지 위에 양 손을 올린 수인은 꽤나 집중한 모습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원래는 혼자 보려고 가지고 온 거였다. 그리고 본인이 나온 영화를 다른 사람하고 보는 건 꽤나 쑥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티는 내고 싶지 않았다. 영도는 일단 수인이 타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쿨럭!"

조금 전 구수했던 된장국의 맛이 기분 좋게 혀 끝에 남아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지워내 버리는 엄청난 쓴 맛에 '뭐야 이건!"라고 소리를 친 영도는 혀를 내밀고는 켁켁 거렸다. 목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영도였으나 수인은 이상하다는 듯 영도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왜 그러냐고? 이건 왜 이렇게 쓴 건데?!"

영도는 들고 있는 컵을 내밀었다. 이렇게 보니 잔속의 액체는 지나칠 정도로 검었다. 마치 사약 같았다. 이게 정말 커피인가 싶어 냄새를 맡자 맞는 것 같긴 했다. 얼얼한 혀를 내민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영도를 바라보던 수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전 커피 끓일 줄 몰라요."

".......뭐라고?"

"할머니는 차를 마시지 커피는 안 마셔요. 그건 몸에 안 좋으니까요."

"........"

그래서 이딴 식으로 끓여왔다는 거야? 못 끓이면 초반부터 말을 하든가? 너 자꾸 이런 식으로 사람 물 먹일 작정이냐?

성질 같아서는 당장 수인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지만 참았다. 영도는 손을 꾸욱 쥐었다.

"됐다. 됐어. 그래. 이건 그냥 내가 끓여먹고 말지."

덕분에 모처럼 배부르게 맛있는 가정식 밥을 먹었다. 그런데 끓이지도 못하는 커피를 부탁해서 괜히 큰소리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괜히 이쪽 속이 좁아 보이잖아. 이럴 때에는 그냥 참고 넘어가는게 양반인 거라면서 아래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간 영도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수인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영도가 납치 된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오타바이를 타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 속에 나오는 인물이 아는 사람이면 전해지는 느낌은 달라졌다. 영도가 잘생긴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액션을 할 때에나 맞을 때, 그리고 부상을 입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화면은 속도감 있게 진행이 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지 알 순 없었다. 영도가 돌아왔고 그는 수인의 앞으로 잔을 내려왔다. 커피인가 싶어 눈을 내리뜬 수인은 녹차를 발견했다. 조금 전에 한 말을 기억하고는 커피 대신에 녹차 티백을 넣어서 온 모양이었다. 아주 성격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라며 수인은 잔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모금 머금었다. 

영도는 홀짝거리며 녹차를 마시는 수인을 확인했다. 하나도 예쁘지 않은 놈한테 일부러 녹차를 끓여서 대령한 이쪽이 대견하게만 여겨졌다. 정말 착하지 않냐면서 영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봤다.

"전 녹차잎이 더 좋아요."

느긋한 영도의 입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가만히 있나 싶던 영도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수인을 노려봤다. 어금니를 악물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냐?"

"녹차잎이 더 맛있어요. 그걸로 마시고 싶어요."

"......먹기 싫으면 먹지마!"

"소리부터 치지 말아요. 다 필요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이제부터 여기서 지내야 하는데 먹을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일단 압력밥솥하고 식기도 더 필요하고, 기본적인 양념이랑 음식 재료들도 필요하단 말이에요."

영도는 기가 막힌 듯 입을 반쯤 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완전히 수인 페이스대로 끌려가게 생겼다.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영도는 냅다 수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주 여기서 눌러 살 거 아니야. 앞으로 뭐 할지 결정만 내리면 바로 나가야 하는 거야. 그런데 무슨 압력밥솥이 필요하고 음식 재료는 뭐야. 그냥 시켜 먹어. 아니면 나가서 사 먹어. 여기 음식점 많아."

"전 아직 서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리고 돈도 많이 없어요. 형한테 손 벌리자는 거 아니에요. 낭비도 안 할 거예요. 그냥 나랑 형 먹을 것만 조금씩 해둔다는 거잖아요."

"네가 왜 내 먹을 걸 걱정해. 네가 내 마누라야?"

"그런 사람이 그렇게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요? 다 바깥에서 시원찮게 먹으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내가 언제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거야? 라고 따지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도도 내심 얼마나 추하게 먹을 걸 탐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돈 많이 안 쓸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줘요. 저도 뭐가 있어서 알아보고 다닐 게 아니겠어요. 설마하니 저한테 줄 용돈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여기 40억짜리라면서요. 게다가 연예인이면 돈 많이 벌 거 아니에요."

영도는 기가 차다는 듯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가까스로 평정을 찾은 영도가 선택한 공격패턴은 바로 빈정거림이었다.

"이제 보니 이거 완전히 발랑 까진 놈일세. 야. 너 나한레 붙어서 한탕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지금은 식대고 다음에 뭐로 돈 뜯어 갈래?"

빈정거리며 말하면 바로 어떤 반응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시끄럽게 왈왈거리면서 귀엽지도 않은 놈이 가소롭게 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입 꾹 다물고 그냥 쳐다보기만 한다. 빤히 바라보는 게 조금 거시기 했다. 지금으로선 영도는 본인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형은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적성이 풀려요?"

말을 하고 수인은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나하나 따지면서 식대를 줘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열거하면 시끄러우니까 한 10만원이나 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실컷 사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수인은 잔뜩 굳은 얼굴로 화면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연기 연구를 해보려 했는데 이런 분위기라면 마냥 자리에 앉아있기도 뭐했다. 틱틱 거리고 말을 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영도는 짜증이 났다.

원래 여기는 내 집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왜 이쪽에서 수인의 눈치를 보면서 불편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건데. 영도는 혀를 차면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동안 뒤는 조용했다.

저 놈이 진짜. 그런 느낌으로 영도는 수인을 노려봤다. 수인은 여전히 화면 쪽으로 얼굴을 고정하고 있었다. 앞으로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다. 머리카락 때문에 안 보이는 거지, 정말은 옆으로 눈 확 찢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당장 방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큰 소리가 나게 문 닫는 건 선택 사항이었다.

침대에 몸을 날린 영도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리를 버둥거렸다. 위로 고개를 든 그는 오만인상을 쓴 채로 한마디 했다.

"내 정말 미치겠네!"

여긴 내 집이라고. 그런데 어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건드리는 거야. 네가 그렇게 분위기 잡고 있으면 내가 쩔쩔 맬 줄 알았냐? 천만의 말씀이다!

씩씩 거리며 영도는 베개를 베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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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가 들어간 직후 뭐라고 큰소리를 내는 것 같았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그쪽이 아예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마음 상했다. 수인은 뒷주머니에 넣은 작은 동전 지갑을 꺼냈다. 지퍼를 열자 꼬깃꼬깃하게 접은 만원짜리가 나왔다. 전부 여섯장이었다. 나머지 돈은 할머니가 통장에 넣어둬서 다 그쪽에 모여 있었다. 그 돈이 얼마인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왔을 때 할머니가 손에 쥐어주신 통장은, 마음 같아선 들고 오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도 몸이 안 좋기 때문에 그걸로 한약이나 지어 드셨으면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걸 바로 돌려줄 수 있을 만큼 수인은 지금 생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도가 저런 식이어서야 앞날이불안하기만 했다.

'그렇게 예쁜 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은,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하지만 수인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날의 일을 영도는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역시나 그 때 그 말은 거짓말이었던 거야.

괜히 우울해지는 걸 느끼며 수인은 지갑 속에 들린 만원짜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이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서울은 너무 넓고 커서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듯 싶었다.

그리고 그 때 수인의 눈 앞으로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작은 손을 감싸던 손길. 만남의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소년은 꽤나 절박하게말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왜 내 말을 못 믿는 건데?]

바라보는 눈동자는 진실 되었다.

그래. 그때에는 그것이 세상 유일의 진실이었겠지.

"......."

느리게 눈을 깜박인 수인은 무릎을 세우고 그걸 끌어안았다. 무릎에 턱을 올린 채로 화면에 집중했다. 슬픈 눈동자를 한 채로 영도가 여자에게 애원하고있었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 철벽 같은 모습에 영도가무너진다. 내리는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영도의 뒷모습이 너무도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단순한 연기일 터였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괜히 마음이 아련해 진다. 이상한 느낌이라면서 수인은 느리게 본인의 어깨를 위, 아래로 쓰다듬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시간은 8시 10분 이었다. 어제 분명 10시 반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그걸로 봤을 때 꽤나 오래 잔 거였다. 덕분에 몸이 개운하다면서 기지개를 하던 영도는 뭔가가 울리는 소리에 침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를 만져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발견하고 그걸 집어 들었다.

액정에 직힌 건 [노랭이] 였다.

"......아침부터 바가지인가."

중얼거리는 영도의 얼굴은 칙칙했다. 싫은 듯 인상을 쓴 영도는 뺨을 문지르면서 하품을 했다. 동시에 전화를 받았다.

[잘 하는 짓이다. 왜 이렇게 늦게 전화를 받아.]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정말 좋은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모처럼 기분 좋게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는데 상대의 꼬는 말투 때문에 다 글러먹었다. 무표정으로 있던 영도의 입술 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긁지 좀 마. 요즘 나 일 잘 하잖아. 꼬박꼬박 돈 벌어주고 있는데 왜 이렇게 바가지야.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 확 잠적해 버린다?"

[이 바닥에서 일 그만하고 싶으면 그리 하시던지.]

"나 벌만큼 벌었어. 이런 일 안 하고 시골 내려가서 농사지으면서 살아도돼."

[천하의 원영도가 잘도 농사 하시면서 살겠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영도는 이불을 치워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무슨 일인데? 오늘은 오후부터 일 있잖아."

[잠깐 같이 가볼 데가 있어. 지금 바로 내려와.]

"지금 바로? 나 지금 일어났어."

[대충 양치만 하고 그대로 나와. 너는 그런 모습도 멋지잖아.]

"그런 말에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도는 이미 청바지를 챙겨 입고 있었다. 어깨에 핸드폰을 대고 귀로 누르면서 옷장을 엮어 위에 입을 것을 골랐다.

"어디로 나오면 되는데?"

[집 앞이야. 차려입고 나와. 딱 10분 기다린다.]

"장난해? 20분은 기다려. 아침 똥은 눠야 할 거 아니야."

[아이고. 이 말을 기자들이 들어야 하는데.]

"시끄러워. 요즘 똥 누는 걸로 누가 기사를 써. 있다가 봐."

전화를 끊고 셔츠를 챙겨 입은 후에 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보이는 것에 영도는 움찔했다.

소파에 여전히 수인이 앉아 있었다. 수인의 시선은 TV로 고정 되어 있었고 화면 속에 비치는 건 어제 저녁에 본 영화였다.

저 녀석 저거 몇 번이나 본 거야? 그래봤자 1시간 40분 짜리인데.

영도는 수인의 뒤로 가서 손으로 머리를 툭 쳤다.

"야. 너 여기서 뭐 하냐. 밤 샜냐?"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수인은 머리에 손을 댄 채로 고개를 들었다. 영도는 대충이라지만 옷까지 다 차려입고 있었다. 내내 TV만 보고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화면에서 튀어나왔다. 같은 얼빵한 소리를 낼 뻔 했다. 그러다가 점점 현실감각을 되찾은 수인은 멍청하니 중얼거렸다.

"어? 벌써 시간이?"

소파에서 일어선 수인의 손에는 리모컨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밤을 새서 뭘 해본 적이 없는 놈이었을 거다. 그러니까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거겠지. 그런 모습을 보자니 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영도는 욕실로 들어갔고 바로 양치를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확인한 영도의 어깨로 힘이 들어갔다.

"읍! 쿨럭!"

입에 머금고 있던 거품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걸 바로 뱉어내며 켁켁 거리던 영도는 물로 입을 대충 헹구고는 다시 거울 속을 살폈다. 착각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준수한 사내의 얼굴은 부어있었다.

".....이 무슨 참상이란 말이야."

사람 얼굴이 어떻게 하루 만에 두 배가 될 수 있는 거지?

다소 오버를 하면서 영도는 뺨에 손을 댄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뺨으로 양 손으로 꾸욱 누른 채로 미간에 힘을 주는 영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시간이 있었으면 마스크 팩이라도 해볼만 하지만 지금 아래에서 노랭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면 늦은 대로 갈굼을 당할 터였다. 이 얼굴을 보면 또 밤새서 놀았다고 지랄 거릴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암만 생각해봐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던 영도는 곧 어제 저녁에 엄청나게 먹어댔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 때문인가."

뚝배기 된장국의 위력인가. 먹을 때만 좋았지 얼굴이 이래서야 사람들 앞에 어떻게 나가란 말이야. 내가 진짜 미치겠네. 지금까지 이렇게 망가진 얼굴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걸 어쩌나 싶어 망연히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었던 영도는 다시 양치를 하면서 일을 보고 나왔다.

방으로 들어가 잠바를 걸치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앞에서 수인이 알짱거렸다. 그걸 보는 순간 괜히 기분이 틀어진다. 영도는 수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영도가 다가오자 수인은 입을 열었다.

"저기 밥-."

"여기에 있어."

거의 동시에 말이 나왔다. 영도가 지갑을 내민 것과 수인이 말을 하는 것은 말이다.

수인은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눈은 지갑이 아닌 영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영도의 눈썹 사이로 주름이 만들어졌다.

영도는 수인이 어제 했던 말을 이어서 할 거라 생각했다. 생활비 운운하면서 돈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조금 전에 들은 건 분명 밥이었다. 밥 먹고 나가라 이건가. 얼굴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전처럼 짜증스러운 말을 내뱉을 순 없었다. 가만히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이 드는 걸 느끼며 영도는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밀었다.

"받아."

수인은 가만히 있었다. 결국 영도가 수인의 손을 들어 그 안에 카드를 밀어넣었다.

"맨션 오른쪽으로 나가서 20분 정도 가면 대형할인마트 하나 있어. 택시타고 다녀도 괜찮아. 가서 먹을 거 사와."

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는 수인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영도는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고 바로 몸을 돌렸다. 신을 구겨 신는데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렇게 초조한지 모르겠다. 결국 신을 다 신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엉거주춤하게 엘리베이터 앞에 선 영도는 버튼을 누르고 뒤를 돌아봤다.

닫힌 문. 저 안에 수인이 있었다. 이쪽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수없다고 한마디 하는 걸까나.

"......아무려면 어때."

원하는 대로 카드 줬잖아. 저건 한도액이 500까지만이었다. 암만 긁어도 그 이상이라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다. 입술을 씰룩인 영도는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신을 제대로 신고 허리를 바로 세우자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가면서 입고 있는 옷들을 확인했다. 이른 시간이라고는 하나 경비들은 언제나처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가 나서는 영도를 확인하고는 목례를 했다.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꾸벅이며 지나치던 영도는 몸을 돌렸다. 척척척 걸어오는 영도에 지용은 왜 그러나 싶어 그를 바라봤다.

"지용씨. 어제 촌닭 뭐하면서 지냈습니까."

".....촌닭이요?"

"제 사촌동생이요."

"별 일 안 하셨습니다. 점심 때 나와서 앞 산책길 좀 다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혹시 오늘 외출한다고 하면 보내주십시오. 마트에 갈 거예요. 혹 길을 물으면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 필요하다 싶으면 택시라도 불러주십시오."

"알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한 후 영도는 바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른 시간이라도 다니는 사람은 있었다. 밤 새서 논 것 같은 여자가 딸꾹질을 하면서 이쪽을 보더니 눈이 커지는 걸 본 영도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손으로 머리를 마구 정리했다. 맨션을 다 벗어나 도로가로 나오자 고급 외제차가 한 대 보였다. 곧장 그리로 가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늦었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들리는 유쾌한 목소리에 영토는 옆을 확인했다.

금발로 염색한 미모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착 달라붙는 재질의 가죽바지에 아무나 소화해내지 못하는 복실거리는 하얀 털로 된 티를 입은 사내는 귀걸이에 팔찌까지 차고 있었다. 워낙에 화려한 얼굴이기 때문에 어울리는 거지 다른 놈들이 저런 모습이었다면 당장 주먹을 휘둘렀을 거라며 영도는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 20분이야."

"땡. 21분이야."

"그게 그거지."

20분이든 21분이든 1분 차이가 뭐 대수더냐. 이만큼 시간 잘 맞춰서 나오는 나 같은 연예인이 어디에 있어.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을 끼는 영도의 모습에 시경은 접고 있던 부채를 세워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오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으네. 무슨 일 있었어?"

"별 일 없었어."

그러니까 부채 같은 걸로 사람 찌르지 말라고. 영도는 싫은 듯 눈을 흘기며 옆으로 몸을 물렸다.

"그런데 얼굴은 왜 그렇게 많이 부었어?"

"집에 들어와서 계속 먹기만 해서 그래."

"집에서 술 마시는 거 아니지? 그건 최악인데."

중얼거리면서 시경은 손바닥으로 영도의 배를 만졌다. 안쪽 배도 만지면서 '뭐, 살은 안 붙은 것 같네.'라고 중얼거렸다. 영도는 그런 시경의 손목을 잡아 옆으로 밀어내며 물었다.

"남의 배 상태 알아보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정말 무슨 일이야?"

"누구 좀 만나보지 않을래?"

그 순간 영도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이 인간이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기만 했던 영도는 착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런 거 안 한다고 했잖아."

"천하의 원혁 우습게 보려고 이런 말 꺼내는 거 아니야. 앞으로 만나볼 사람은 2차 요구하는 발정 난 암캐는 아니야. 순수하게 네 연기를 애정하고 아끼는 점잖은 사모님일 뿐이야. 점심 때 나가서 2시간 코스로 식사 하고 1시간 산책하고 돌아오면 땡이야. 그걸로 네가 늙어서 추해지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아군이 되어줄 사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야. 나쁠 거 없잖아.

그게 그거지. 스폰서 하나 물어주겠다는 거잖아.

이 나이에 이만큼 올라와서도 이런 제의는 끝이 없구나. 구질구질 했다. 연기하고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만, 이 바닥 생리상 그리 할 수도 없었다.

"회사에 떨어지는 건 뭔데?"

"애들 늘어났잖아. 연습생들은 다른 건물로 보내야지. 본관은 엘리트들만 모아서 럭셔리한 느낌을 풍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좀 도와줘. 잘 풀리면 내년 상반기 때 노래 앨범 하나 내자. 응?"

시경의 손가락이 영도의 입술을 쓸어 올렸다. 인상을 쓴 영도는 뒤로 고개를 젖혔다.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면서 피하고 있었다. 보통사람들이라면 얼굴 붉히면서 바로 손을 치웠을 테지만 시경에게는 어림도 없는 반항이었다.

"아직 노래 욕심 있지?"

"성가셔 죽겠네."

아주 안 한다는 말은 없었다. 성가시기는 해도 서로에게 좋은 윈윈 전략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 터였다. 

이 바닥에서 있은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순진한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바닥이었다. 군대에서 막 제대했을 때 이런 일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그때에 이하면 양호하다 할 수 있었다. 그냥 값비싼 음식 먹고 적당히웃다가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평소랑 뭐가 다르겠어.

팔짱을 낀 영도는 생각했다. 아침에 그 촌닭이 끓여주는 된장국에 밥 조금 말아서 먹고 올 것을.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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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집이었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방 가득이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려들지만 그렇다 해서 바로 창을 닫진 않았다.

잠바를 입은 채로 수인은 발코니로 나와 바깥을 확인했다. 멀리 걸어가는 사람들과 움직이는 차량들이 보였다. 정말 사람이 많았다. 차는 왜 또 저렇게 많은 걸까. 서울에는 부자들만 있는 걸까.

"쿨럭."

기침이 나오자 수인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창을 닫았다. 입고 있던 잠바를 걸친 채로 소파에 앉아 TV화면을 바라봤다. 정지 상태로 있지만 그 속에는 영도가 있었다. 화면에도 있고 뒤에 있는 벽에도 그의 얼굴이 커다랗게 걸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왜 자기 사진을 저렇게 크게 걸어놓는가 싶어 이상한 사람이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연예인이었던 거다.

할머니 집에 TV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하는 드라마나 방송들이 하나 같이 이상하다면서 할머니가 코드를 뽑아버리셨다. 공부를 하고 할머니일을 돕다보면 TV를 일일이 챙겨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보는 노래 방송이나 뉴스를 보면서 그 외에 정보에 대해선 까막눈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가 되었었다. 영도가 연예인이라는걸 할머니는 알고 있을까. 알면 분명 좋아할 텐데.

수인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금빛 카드. 비싸보이는 거였다. 이걸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거겠지. 카드 한쪽을 빤히 바라보다가 뒤로 넘겼다. 영도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꽤나 멋들어진 것 같았다. 그걸 엄지로 쓰윽 문지르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할머니한테 전화를 할까. 짧은 고민 후, 그냥 내려왔다. 아직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이런 상태로는 할머니한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도 확실하게 하는 입장이 되면 그때, 연락을 하도록 하자. 스스로에게 그리 말을 하고 결심을 한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후, 장이나 다녀와야 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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