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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여기서 뭐 하냐?'
얼굴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인은 움찔했다. 살짝만 고개를 들자 소년이 수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왜 울고 있어?'
'....애들이 나랑 안 놀아줘.'
'왜 안 놀아줘? 이상한 놈들이네.'
'내가 엄마, 아빠가 없어서 그러는 거래.'
수인의 말에 소년은 잠시 위를 쳐다봤다. 중학생 정도나 되었을까. 잘생겼지만 불량한 느낌을 풍기던 소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부모님 없는 게 네 잘못인 건 아니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애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아.'
그래서 자꾸만 놀리고 괴롭힌다. 돌멩이를 던지는 애들도 있어서 조금 전에 맞은 손등이 아프기만 했다. 손등을 문지르면서 훌쩍이자 소년이 수인의 손을 잡아 위로 올렸다.
'여기가 아파? 자. 호. 해줄게.'
따스한 바람이 손등을 간질인다. 움찔하고 손가락을 오므리긴 했지만 손을 빼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수인의 손을 잡은 채로 소년이 온화하게 웃었다.
'아프지 않지?'
'.....그래도 아픈데.'
호-같은 걸 해줬다고 해서 바로 아프지 않게 될 리가 없잖아. 그리 말하고픈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소년은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는 수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 제법 눈치가 빠른데. 마음에 들어.'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여기에 있은 지 이제 한달 째였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수인은 이상하게 상대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형은 누구야?'
'나? 내 이름 알려주면 외울 수 있겠어?'
'알려주면 절대로 안 잊어버릴게. 그러니까 이름이 뭔지 알려주면 안될까?'
어쩌면 이 근처에 사는 형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괴롭히는 다른 녀석들은 무시하고 이 형하고 재미있게 놀면 되는 거였다. 그러려면 그 전에 이사람에 대해서 알아야만 했다. 누군지 이름만 알려주면 다음부터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며 수인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매달리듯 쳐다봐오는 수인을 바라보던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눈 색깔이 좀 이상하다?'
'아, 아니야. 이건-.'
갑작스럽게 눈 색깔을 지적하는 순간 수인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황급히 양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슴도치 마냥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숨긴다 해서 이미 봐버린 걸 모르는 척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소년은 수인의 어깨를 잡고 두어번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눈 좀 보여줘. 엄청 예뻤는데-.'
그 순간 수인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숨을 죽인 채로 있는 동안 소년은 계속해서 수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한번만 더 눈 보여주면 안 될까? 응?'
간청을 하는 어투에 마음이 약해진다. 수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정말 내 눈이 예뻐?'
'그래. 그렇게 예쁜 눈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어.'
'정말이지? 거짓말 아니지?'
'내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어. 그러지 말고 조금 더 보여주라. 응?'
애 타 하는 소년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수인은 조심스레 손바닥에서 손을 떼어놓고는 위쪽을 바라봤다. 다시 보게 되었을 때에도 예쁘다는 말을 해줄 것인지 기대감이 든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수인을 확인한 소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소년은 보다 정확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여기서 뭐하냐. 촌닭."
잠이 확 달아났다. 주방 안쪽 바닥에 누워있었던 수인은 고개를 들었고 떡하니 버티고 선 영도를 발견해냈다.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쓴 그는 수인의 어깨를 발로 수욱 밀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일어나. 걸리적 거리잖아."
꼬물거리며 일어선 수인은 선박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누가 여기서 자라고 했어. 거실에 가면 소파도 있는데 왜 하필 주방 바닥에서 궁상맞게 자고 있는 건데?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사람 물 먹이려고말이야."
냉장고 앞으로 간 영도는 문을 열고 물을 찾았다. 그리고 착착 정리가 된 냉장고 내부를 확인하고는 바로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별 짓을 다하네.'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 안쪽으로 짜증스러움이 가득했다.
물을 꺼내 마신 영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사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아직 방 안은 어두운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는 물을 다시 냉장고 안에 집어넣고 아직 잠이 덜 깬 수인을 내려다봤다.
"이거 받아."
던져진 것을 받아든 수인은 그걸 확인했다. 열쇠였다.
"이게 뭔데요?"
"뭐긴. 열쇠잖아. 이상한 사람들한테 넘기면 죽을 줄 알아. 나가지 말고 집 안에 얌전히 처박혀 있어. 그리고 이거 먹는답시고 괜히 집 안에 냄새 풍기게 하면 너 그 날로 쫓겨나는 줄 알아. 알았냐?"
수인은 손바닥에 놓인 열쇠만 바라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맨 바닥에 앉아 잠바를 덮은 채로 부스스한 머리 꼴을 하고 있는 수인을 본 영도는 혀를 찼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면서 그는 발로 수인의 무릎을 툭 치며 '비켜.'라고 말했다. 옆으로 길도 넓은데 왜 괜히 시비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안 들리는 척 있으려니 영도가 재차 혀를 차며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렇게 영도가 가버리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기계음이 들리고 집 안은 조용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다 전자렌지 옆에 달린 전자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 15분이었다. 이렇게 일찍 어디를 나가는 걸까. 그러고 보니 영도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멍하니 있던 수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정리를 했다.
영도의 말대로 거실에는 소파도 있고 찾으면 덮을 이불도 얻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주방 바닥에서 자는 건 이상하게 보일만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반항을 하는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고 단지 눈치가 보일 뿐인데. 그것에 대해 영도가 알아줄까 싶었다.
한숨을 쉰 수인은 잠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어두운 방은 낯설고 무서웠다. 이렇게 넓고 좋은 집인데 왜 한기가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정말은 반팔을 입고 있어도 훈훈함이 느껴지는 곳인데.
조심스레 거실 쪽으로 나온 수인은 소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전화기에 손을 댔다. 무선인데다 디자인이 좋은 전화기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작동하는 법을 몰랐지만 젊은 사람인지라 두어번 만지작거리는 동안 어떻게 하면 되는지 스스로 깨달았다.
번호를 꾹꾹 누르고 전화기에 귀를 댔다. 신호가 길다 싶을 정도로 가고 틱. 하고 짧게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할머니?"
다급한 사람 마냥 말을 꺼내자 잠시 후 수화기 반대편에서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인이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할머니."
특유의 느리고 어눌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심이 되었다. 코끝이 찡해져서 손가락을 들어 코 아래를 눌렀다.
[집은 잘 찾아갔고? 영도는 건강하게 잘 있드냐.]
집은 잘 찾아갔지만 영도가 건강한 지는 잘 모르겠다. 화를 잘 내고 짜증부리는 걸 보아하니 체력은 있는 것 같았지만. 영도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그걸 할머니가 알아차리게 할 순 없음이었다. 수인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건강하게 잘 있어요. 친절해서 제가 모르는 것도 잘 알려줘요. 그리고할머니가 보내주신 선물 잘 받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지금은 바빠서 바로연락 못 드리지만 한가해지면 전화 드린데요."
[그렇겠지. 착한 아이니까.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구나.]
"큰고모가 잘 해주시지요? 혹여 편찮으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내려갈게요."
[난 건강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나 서울에서 빨리 적응하고 지내라. 이렇게이른 시간에 전화하는 걸 보니 아직은 낯선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할머니가 지금 이 시간이면 일어나 계시니까 일부러 일찍 전화건거예요."
[그래.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마.]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래도 네가 괜찮다고하니 믿겠다는 식이었다. 할머니랑 지낸 시간이 얼만데 목소리로 지금 상태를 모르겠는가. 우는 소리를 내면서 당장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꾹 참으려 수인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잘 지낼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마지막 안부 인사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너무 고급이라 오래 들고 있기도민망해서 그걸 다시 내려놓고 수인은 양 손을 마주 잡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다가 눈을 내리뜨자 발가락이 보였다. 꼬물거리다가소파에 등을 기대고 긴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정말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문득 든 생각이 마음에 불안을 안겨준다. 속이 시끄럽구나.
중얼거리던 수인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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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눈이 쌓여있지만 로비를 걷는 영도는 얇은 자켓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주머니에 한 손을 꽂아 넣은 채로 보폭이 넓게 걷는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넘쳐흐른다. 문 앞에 서있던 경비는 다가오는 영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용씨. 괜찮으면 내 집에 있는 촌닭 관리 좀 부탁드릴게요."
촌닭? 짧은 순간 경비원 지용은 어제 밤 영도를 따라 들어갔던 수인을 떠올렸다. '아아.'하는 소리를 낸 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고 있는지 알아보게 한시간마다 인터폰 할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요. 혹시라도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면 막아줘요. 쓸데없는 짓 못하게 하고요."
"제가 통제하지 못할 일을 하면 어떻게 하지요?"
"이쪽으로 전화 줘요."
영도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지용에게 내밀었다.
"우리 매니저 번호에요.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연락 줘요. 내가 올 테니까."
"네. 알았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지용의 인사를 받으며 영도는 한 손을 들었다.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자 찬바람이 확 불어온다. 몸이 으스스할 정도의 한기였다. 헛숨을 삼킨 영도는 움츠리다가 곧 가슴을 넓게 폈다. 깊게 숨을 삼킨 후 영도는 선글라스 가운데를 위로 추켜올리곤 밖으로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푹 자고 일어나 기분 좋게 일하러 나가야 했을 터였다. 아무도 없는 곳을 혼자 걸어 내려가는 이 감각이 좋았기 때문에 콧노래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그 망할 촌닭 때문이었다. 왜 하필이면 나인 건데. 난 혼자서도 잘만 지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총각인 내 옆에 붙어서 난리야. 저기 사촌 누나도 있고 작은 고모 댁도 있잖아.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나한테 떠넘기고 말이야.
"재수 없어서 원....."
중얼거리는 영도의 얼굴은 점차 굳어갔다
성큼성큼 걸어 내려간 영도는 맨션을 벗어나 도로변으로 나왔다. 세워져 있는 검은 벤의 문이 열리고 당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30대 초반의 귀엽게 생긴 청년이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그래."
대답을 하는 투가 건성이었다. 다른 때와는 다르니 기분 상태가 안 좋은 걸 모를 수 없었다. 로드 매니저는 조심스레 '컨디션 별로세요?'라고 물었다.
"아니 괜찮아."
영도는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앞에 끼워 넣고는 뒤로 고개를 젖혔다.
눈을 딱 감는 폼이 '더 말 걸지마. 나 잘 거야.'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저런 상태인데 말을 붙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일정에 대해선 영도도 알아야 할텐데. 눈치를 살살 보던 로드 매니저는 신호가 걸리던 때에 맞춰서 말을 건넸다.
"일단 미용실에 가서 오늘 대본 드리겠습니다. 9시까지 수원으로 가셔야 하고 오전에 대본 연습을 하신 후 2건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14시부터 본 촬영에 들어가실 거고 20시에는 미팅이 있습니다. 그리고 24시에는-."
"너무 늦게까지 일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사장님께 연락 취할까요?"
"그래. 12시까지는 나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줘."
"일단 말씀은 전해드리겠습니다."
"부탁 좀 할게. 일하고 싶진 않은 게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그래."
다른 때하고 다른 영도의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흘려듣지 말고 꼭 사장한테 잘 말을 해둬야 할 것 같다면서 로드 매니저는 바뀌는 신호에 맞춰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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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를 보내고 난 후 다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 거실은 훤해져
있었다. 7시 정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벽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나 늦게 일어난 적이 없었던 만큼 놀랍기만 했다. 벙쪄 있는 동안에도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일단은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겠다며 수인은 주변정리를 하면서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하고 수건을 찾는 동안 배속에서 끄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제 저녁도 라면하고 김밥으로 때웠을 뿐이었다. 배가 고픈 게 당연했지만 이 집을 다 뒤진다 해도 밥이 나올까 싶었다. 밥 먹고 싶으면 해먹어야 하는데 쌀이 있을까. 영도는 음식 냄새 풍기지 말라고 했는데.
걱정이 되었지만 배가 고팠다. 이럴 때에는 밥을 먹는 게 제일이었다. 수건을 목에 두른 채로 거실로 나온 수인은 방을 둘러봤다. 어디를 봐도 고가의 물건들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편하게 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늦게까지 자버렸지만 말이다.
어떻게 할까 싶어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용기를 내자며 당장 주방 쪽으로 이동을 했다. 성큼성큼 걸어가 주방 앞에 도착한 수인은 압력밥솥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냄비 몇 개를 발견했지만 다 장식용일게 분명한 것이었다. 중간 사이즈의 냄비를 한 손에 쥔 채로 있던 수인은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없잖아."
배는 고프고 밥은 먹고 싶은데.
수가 없다면서 수인은 당장 집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야 '쌀 찾기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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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쌓인 걸 치워야 하는 게 바로 경비들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따로 인력을 부르기 때문인지 양복을 입은 경비들은 가만히 있고 빗자루를 들고 있는 건 30대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그 사이로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빗자루를 들고 설렁설렁 빗질을 하고 있었다. 대체적인 정리를 인부들이 한다면 마무리만 해준다는 식이었다. 찾고자한 인물을 본 수인은 당장 그리로 갔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예의바른 놈이 이 맨션에도 있었던가 싶었던 최씨 영감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양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서있는 수인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눈을 치떴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수인 학생이구만."
엄밀히 말하면 학생은 아니었지만 한결 친근한 호칭에 기분이 좋아진다. 수인은 챙겨온 걸 조심스레 내밀었다.
"괜찮으시면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응? 그게 뭔데?"
"밤이랑 해서 할머니가 싸주신 김치 좀 챙겨왔어요."
"아이고. 그런 귀한 걸 나한테 줘도 되나?"
최씨 영감은 빗자루를 놓고 장갑도 벗어선 수인이 내미는 걸 받아들였다. 작은 천 수건으로 싸놓으니 마치 옛날 도시락 같은 풍취가 느껴졌다. 도시락 위에 코를 대고 깊이 냄새를 맡은 최씨 영감은 전율에 몸을 떨었다.
"으음. 좋은 냄새야. 엄청 맛있겠구만. 점심은 먹었나?"
"네. 부끄럽게도 너무 늦잠을 자서 먹고 나왔어요. 괜찮으시면 다 드셔주세요."
"물론이지. 이 귀한 걸 남길 수야 없지. 그래. 이제부터 자네 여기서 지내는 건가."
"당장은 잘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기쁘구만. 여기에도 모처럼 제대로 되 사람이 살게 되는 거야. 아주 잘 된 일이지."
최씨 영감은 웃으면서 수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최씨 영감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마냥 웃기가 쑥스러웠던 수인은 모르는 척 주변을 둘러봤다. 눈은 꽤나 많이 치워진 상태였다.
"청소를 다 하시는 건가 봐요?"
"저기 젊은이들이 다 하고 나면 난 둘러보기만 하면 되지. 힘들 일은 하나도없어."
위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빈틈이 있으면 나중에호되게 혼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는지 그 손길들이 분주하기 그지 없었다.
밥을 먹다가 최씨 영감이 생각나서 챙겨들고 나오긴 했지만 전해주고 나니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눈치가 빠른 최씨 영감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늙은이하고라 마땅히 나눌 대화가 없지? 그래도 종종 찾아와라. 여기는 사람이 와도 언제나 늘 인사 한번 없어. 그보다 저기 들어가 봤니?"
수인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책로 입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입구까지만 갔다 왔어요."
"그러지 말고 더 안으로 들어가 봐라. 유명한 디자이너가 꾸민 곳이라 그런지 꽤 볼만하다. 한바퀴 돌면 아마 이 맨션이 세워지고 난 후 최초로 한바퀴 돈 입주자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아직은 입주자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을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게다가 배는 부른데 다신 그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할아버지 말대로 산책로를 한바퀴 도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싶었던 수인은 인사를 드리고 난 후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도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선이 어떤 것인지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아까 건물 밖으로 나을 때 경비가 집요하게 어디극가느냐고 물어댔기 때문이었다. 새벽 일찍 나간 영도가 감시를 부탁한 거겠지잘은 몰라도 거기까진 추측하는 게 가능했다.
산책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선 위를 올려다봤다. 밤에는 몰랐는데 동그란 아치형의 입구가 있었다. 넝쿨이 제법 멋있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조금 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석구석 신경을 쓴 티가 묻어났다. 아주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이것은 꽃과 식물과 나무들이 기분 좋은 정원이 아닌, 보는 사람들 즐거우라고 만든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한없이 다운 되는 걸 느끼며 수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서울 하늘은 칙칙한 빛이었다. 강원도하고는 많이 달랐다.
여기는 마치 거미줄 같았다. 잘 짜인 촘촘한 그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느끼는 건 이쪽뿐으로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겠지. 그들에서 있어 이 장소는 당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곳에서 그물이나 거미줄이니 운운하는 이쪽이 되레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며, 수인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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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영도가 인사를 하는 걸 시작으로 사방에서 수고했다는 말들이 나왔다. 오늘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서 예정보다 일찍 끝나게 되었다. 모든 것이 흡족하고 오늘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던 영도는 위로 손을 들어 크게 박수를 치고는 재차 인사를 건넸다.
현장에서 마냥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인기 연예인 측에 속했던 영도는 원로 연기자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난 후 바깔쪽으로 이동했다. 걸어가는 동안 지나치는 이들이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원혁씨, 오늘도 멋있었어요. 이대로만 가면 아주 멋진 작품이 나오겠어."
원혁은 영도의 예명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을 손을 들었다.
"그 컨디션 주욱 유지해주세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주변 사람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들이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원혁은 예의바른 연예인 그 자체였다. 평소 화를 내지도 않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행동하며, 하드한 스케줄 속에서도 불평불만의 목소리 한번 낸 적 없는 원혁이었다.
지금은 톱스타의 지위에 오른 그는 웬만한 것들은 알아서 넘겨도 될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데뷔 때의 초심을 잃지 않은, 아주 드물게 제대로 된 청년이라는 게 그쪽 바닥 사람들의 주된 평판이었다. 물론 그 평판이 100% 맞다고는 볼 수 없는 거겠지만 말이다.
"으아. 피곤해."
늘어지는 소리를 낸 영도는 당장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조금 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모습은 오간데 없었다. 다리를 좌악 벌리고 앉아선 입을 반쯤 벌리고 있어도 여전히 멋졌지만, 조금 전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지라 로드 매니저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다음이 미팅이었지?"
"아. 네. 그런데 그거 사장님께서 뒤로 미루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여자가 올라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로 제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인지라 놀라움은 클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의상을 갈아입기도 전인 상태였다.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영도가 있는 자리까지 온 여성은 그의 무릎 위에 엉덩이를 걸치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세간에서는 남자들의 꿈이라고 불리는 아이돌 그룹 출신의 여배우 이유라였다. 로드 매니저는 '엄마야.'같은 얼굴이 되어선 황급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영도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당장 커튼으로 창을 가렸다. 그리고 목을 끌어안은 채로 키스를 하려는 유라를 노려봤다.
"왜 이래? 들키면 둘 다 재미없어진다는 거 몰라?"
"난 지금은 자기 생각 때문에 그런 거 몰라."
유라는 입술을 앞으로 주욱 내밀었다. 전에 한 것이 키스신인지라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입술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확 오른 영도는 손바닥으로 그녀의입술을 눌러버렸다. 그 힘에 유라는 영도의 무릎에서 의자 쪽으로 떨어졌다. 꺄악. 하는 소리에 놀란 로드 매니저는 당장 차 시동을 걸었다.
"시동 꺼. 그리고 넌 내려."
로드 매니저와 이유라 두 사람은 모두 굳어버렸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을 하고 있는 원혁을 앞에 둔 이유라는 애써 웃어보였다.
"왜 이래? 재미없게?"
"진짜 재미없게 해줄까. 이런 식으로 한번만 더 해봐. 그땐 너랑은 끝이야. 앞으로 두 번 다시 나랑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지?"
영도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그 눈동자 안쪽으로 서린 것이 경멸이라는 걸 읽은 유라는 입을 반쯤 열었다. 기가 막혀.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있던 것도 잠시 그녀는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지독한 모욕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한테 이렇게 굴다니. 나중에 후회하게 해 줄 거라며 유라는 당장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내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차 밖에서 그녀의 매니저 목소리가 들렸다. '너 또 뭘 하는 거야?'라고 묻는 목소리는 험악했지만 유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변은 금세 조용해졌다.
"출발해."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 듯한 영도의 목소리에 로드 매니저는 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동을 걸었다. 조심해서 뒤로 차를 뺀 직후 촬영지를 벗어났다.
도로로 접어드는 동안에도 준식은 몇 번이나 영도의 안색을 확인했다.
"아까 말하려다가 만 거 말인데요. 사장님이 미팅도 취소해 주셨어요. 피곤하면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쉬시래요. 대신에 클럽 같은데 나타난 거 나중에 귀에 들리면 알아서 하라고도 하셨어요."
"그럴 기력도 없어. 일단 집으로 들어가."
"네. 알았습니다. "
다른 때라면 '내가 다니는 클럽에 다 사람 풀어놓을 건가.'라면서 웃기지도 않는다는 반응을 보여야 할 영도가 지금은 눈도 뜨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피곤하긴 정말 피곤한 모양이라며 준식은 잠자코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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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라는 본명 대신에 원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지 10년이었다.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게 21살 때부터라 다들 그 즈음이 데뷔 시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말은 16살 때 모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을 했었다. 물론 3달 만에 접어야 했고 길고 긴 연습생 생활과 단역을 하는 등 5년 가까이 무명 시절을 거친 후 이 자리에 오른 거였다.
유명하고 아니고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의 태도가 얼마나 뒤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선 논문으로 100장을 적을 만큼 서러운 일이나 무시당한 일이 수두룩했다.
당시에는 모욕을 주던 사람들이 유명해져서 나타났을 때 이쪽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저 스타 원혁만을 바라보며 아부를 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태도가 영원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언제고 인기가 떨어지면 안면 몰수할 사람들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여자 문제로 스캔들 같은 거 만들려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붙은 건 정말 성가셨다. 사장에게 따로 연락을 해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말을 해야 할 듯 싶었다.
그 전에 오늘 너무나 피곤했다. 평소보다 적은 스케줄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찌뿌둥한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병원 신세 져야하는건 아니겠지. 최근 들어 생각하는 거지만 지난 5년 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건 아닌가 싶었다. 슬슬 장기간의 휴식이 필요할 때일지도 몰랐다. 다른 회사처럼 지금 이 시기에 군대를 가야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씌일 필요도 없고 말이다.
영도는 직관력이 있었기 때문에 막 이름이 날릴 22살 때 군대를 다녀왔다. 그리고 24살 때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무명 때처럼 힘들진 않았다. 좀 노력을 하니 주변에서 알아주고 이쪽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연락을 취해왔다.
자고로 사람은 뒤가 구린 일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군대 문제로 여기저기 난리인 것을 생각하며 진작 다녀온 자신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피곤했지만 기분은 좋아졌다. 전에 이쪽에게 건방지게 굴던 누군가가 울며 겨자 먹기로 군대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 그런 모양이라며 영도는 당장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영도는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내 집이었다. 그런데 낯선 어떤 공간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러나 싶었던 그는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답지 않게 다시 밖으로나가 호수를 확인하기 까지 했다.
정확했다. 왜 이러나 싶어 다시 안으로 들어온 영도는 문을 잠그고 거실로 올라갔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거실의 불이 켜진 상태인 것을 깨달았다.
"어?"
내가 오늘 새벽에 나갈 때 불을 끄지 않았던 걸까.
이상하다면서 뒷머리에 손을 댄 채로 가만히 있던 영도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인기척에 헛숨을 들이키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떡하니 서있는 인물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나려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윽?!"
짤막한 소리를 내고는 더 입 벙긋도 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위를 올려다보는 영도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마치 귀신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욕실에서 나온 참이었던 수인은 그런 영도의 반응에 무안해졌다. 어떤 식으로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잡고 있던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너-."
영도는 손가락으로 수인을 가리켰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떠올랐다. 어제 저녁에 일어난 웃기지도 않은 촌극. 이 집 안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있게 된다는 걸 떠올리는 순간 엄청난 피로가 몰려들었다.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기만 하는 영도에 맞춰 수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욕실 정리를 하는 동안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나가서 인사를 했어야 했던 걸까. 다짜고짜 뒤에서 나타나면 누구라도 놀랄 거라면서 수인은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렸다.
"욕실 정리 다 했어요. 먼저 가서 씻으실래요?"
"욕실 정리라고?"
물으면서 영도는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 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 느껴졌던 이질감의 정체에 대해서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나치게 깨끗했다. 사람을 불러 청소를 시킨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하니 만큼 언뜻 보면 깨끗할 것 같은 이 집도 실상은 구석구석 묵은 먼지가 많았다.
날이 눅눅할 때에는 공기 중으로 이상한 세균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쾌적했다. 사는 공간이 깔끔해지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는 거겠지만, 이쪽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청소를 한것에 화가 났다. 영도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왜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건데?!"
손가락으로 수인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이는 영도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모른다는 식으로 수인은 뚱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열 받았지만 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던 영도는 당장 본인의 방을 확인했다. 문은 닫혀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라 당장 수인을 추궁했다.
"설마 내 방도 들어갔냐?"
"그런 일은 하지 않아요. 그저 거실하고 욕실, 베란다 청소만 했을뿐이에요."
"너 오지랄 참 넓다. 그런 거 할 필요 없이 내가 사람 불러서 청소를 하면 되는-."
"숨 쉴 때마다 콧구멍에 뭐가 걸리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사람 부르기 전에 감기 걸릴 것 같아서 청소좀 한 거예요. 앞으로 멋대로 청소 안 할 테니까 그만 떠들고 들어가서 씻어요. 나갔다 온 사람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거실에 서있는 건데요? 그 자리 다시 닦아야 하는 거잖아요."
수인은 냉큼 영도가 서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그 태도가 워낙에 당당해서 당황한 영도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든 영도는 재차 수인을 노려봤다.
초반 기선 제압이 중요했다. 이 촌닭에게 이 집 안에서 생활할 때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해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여긴 네가 제멋대로 굴어선 안되는 곳이란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수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고 그것이 영도는 어이가 없었다.
"나 정말 미치겠네."
중얼거린 영도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옆으로 눈을 흘기는 폼이 뭐라 한마디 더 할것 같았으나 수인은 물러섬이 없었다. 똑바로 바라보자 영도가 혀를 차며 당장 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손에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수인은 물소리가 나는 것에 맞추어 한숨을 토해냈다.
아. 긴장했네.
영도 앞에서는 잘난 듯 떠들어 댔지만 실상 꽤나 긴장이 되는 일이었다. 청소를 하면서도 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녁에는 안 보였던 이 집의 더러움이 낮이 되니 더는 가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영도가 집안에서 생활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 그나마 이 정도인 거지. 사람이 좀 돌아다니면 엄청나게 먼지가 쌓였을 판이었다.
집 안에 가만히 있는건 사람 할짓이 못 되었다. 몸 움직이면서 운동이나 하자싶은 게 어느새 대청소가 되어버렸다. 베란다 뒤쪽의 세탁기 앞에 쌓인 빨래감들을 영도가 보게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방 구석구석에 대충 쑤셔넣은 것들을 모두 빼낸 건데도 그걸 가지고 트집 잡을 사람이었다. 생긴 건 아닌데 사람 정말 속 좁았다. 안 그럴 사람 같았는데.....
잠시 생각을 하는 동안 수인은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닫힌 욕실 안 쪽으로 계속해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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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건 샤워기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머리를 감던 영도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전부 뒤로 넘긴 후 오른쪽에 걸린 거울을 확인했다.
물 떨어지는 곳 아래에 서있는 사내는 지나치게 섹시했다. 몇 년 전부터 키운 근육도 완전히 자리를 잡아 멋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때에도 마찬가지겠지만 왜 샤워를 할 때 보이는 모습이 유독 멋진 거냐면서 영도는 알통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삘을 받아서는 얼굴 옆선을 확인했다.
자못 진지한 얼굴로 있던 영도의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괜찮네. 본인의 뺨을 두어번 토닥이면서 휘파람을 불던 영도는 목욕 타올을 잡았다. 그러던 그는 다시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삼 또 얼굴을 보려던 건 아니었다. 이상한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싶으면서도 거울에 손가락을 대서 주욱 옆으로 밀어냈다. 습기가 차있는 걸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거울 앞에 얼굴을 주욱 내밀어 유심히 살피다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욕조로 봤다.
가만히 서있나 싶던 영도는 쪼그리고 앉아 욕조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바닥을 문지르자 뽀득한 느낌이 났다. 전에는 안 이랬는데.
혼자 살기만 무려 2년 째였다. 전에 한번 사람을 불렀다가 뭔가 좀 찝찝한 느낌이 들어 가끔 혼자서 대충 먼지를 털어내는 수준으로 정리를 하던 집안이었다. 그런 마당에 욕조 청소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는 거였다. 적어도 1200조의 세균이 득실거릴 것 같은 욕조가 이렇게나 깔끔해지다니 . 이걸 다 그 꼬맹이가 했단 말인가. 하긴 청소가 익숙할 만도 하지. 할머니랑 같이 지내면서집안일은 다 그 녀석이 해야 했을 테니.
"......"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여기저기를 뒤지는 놈이었다면 당장 쫓아냈을 터였다. 하지만 저 꼬맹이는 분명 소파에 앉아 눈알을 데굴거리다가 청소를 시작했을 터였다. 언뜻 본 거실이나 욕실.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물건이 변한 느낌은 없었다. 정말 방 쪽으로는들어가지 않았던 거였다.
인지하지만 인간의 도리를 운운하면서 엄하기도 하셨던 할머니 아래에서 10년 넘게 키워진 놈이니 인성은 괜찮을 터였다. 데리고 있어도 아주 성가시진 않겠지. 가끔 이런 식으로 청소를 해준다면, 나쁠 게 뭐가 있겠어. 아주 여기에서 지낼 것도 아니잖아.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거나 대학 진학을 해버리면 그 핑계로 엄마한테 밀어붙이면 된다. 그러면 그 갑부 여자가 따로 아파트 하나 얻어주겠지. 아니면 외국물 좀 먹어야 할 것 같다면서 유학이나 보내버리라고 해버릴 까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영도는 다시 일어나 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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