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시온] 달콤한 불청객
- 1권
"아시는 분이 여기에 살고 계신다고요?"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묻는 사내의 입가로 비웃음이 그려지는 듯 싶었다. 그가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수인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앞머리카락이 길어서 눈을 가리고 있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멀뚱히 서있는 모습이 금방은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경비인 사내는 미소를 지우고 재차 물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사시는 누구인지 알기나 하십니까."
"물론이지요. 이렇게 적어서 왔는 걸요."
수인은 품에서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꺼내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준수한 경비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경비는 일단 종이를 다 폈다. A4 절반 만한 사이즈의 종이 위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강원도에서 서울 강남까지 올라오는 여정이 자세하고도 상세히 적혀 있었고 가장 아래쪽에는 이 고급회원제 맨션과 호수, 집주인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확인한 경비는 재차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우습지도 않은 수작이라니.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기에 경비는 종이를 다시 수인에게 건넸다.
"잘 읽어봤습니다."
"거기 가장 아래에 적혀있는 이름이 제가 찾아온 사람의 이름이에요."
경비가 그 중요한 걸 읽어보지 않고 그냥 종이를 돌려주는 건가 싶어 다급해질 수 밖에 없었다. 수인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경비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그것도 읽어봤습니다."
"그러면 저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건가요? 지금 되게 추운데요."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어째서요?"
이렇게 종이까지 확실하게 보여줬는데 안 된다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어하는 수인이었으나 그런 수인을 바라보는 경비는 여전히 입가로 비웃음을 달고 있었다. 그는 성가셔하며 손을 휙휙 저었다.
"지금까지 당신 같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애초에 이 건물 안까지 어떻게 해서 들어올 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닙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돌아가기는 어디를 돌아가요. 사촌형이 여기에 살고 있다니까요."
"아, 그러십니까?"
대답을 해도 건성인 투가 역력했다. 조금 더 시간을 끌면 당장 바깥으로 쫓겨날 판이었다.
수인은 약장수 같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고모가 이곳을 알려줬었다. 여길 찾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인은 재차 종이를 경비에게 내밀었다.
"분명히 이 이름이 맞아요. 이 집이라고 했어요. 고모가 오늘 이 시간이면 형이 돌아와 있을 거라고 했단 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아니요. 전 들어가 볼래요."
"자꾸만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면 경찰을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참기가 더는 힘들어 졌다는 듯 나직이 나오는 말에 수인은 입을 다물고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경찰? 경찰을 왜 불러?' 그리 묻는 분위기를 읽은 경비는 혀를 차며 눈을 내리떴다.
"정말로 이 맨션의 방문객이시라면 그 차림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3박 4일은 밖에서 노숙하다 온 것 같은 차림으로 이 고급 맨션으로 들어와 아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 누가 들여보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 그 분께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
경비의 눈동자 안쪽으로 짜증이 서렸다. 왜 이런 놈하고 이런 말을 주고 받아야 하는 거야. 그리 말하고픈 눈빛을 봤을 때 수인은 자신에게 꽂히는 다른 시선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옆을 살피자 한겨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드레스에 하얀 모피를 두른 아름다운 여성과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젊은 사내가 보였다.
도도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들은 수인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저 거지꼴을 한 사람은 뭐야.' 그리 말하고 싶은 듯 껄끄럽기 그지없는 시선을 던지는 것에 수인은 재차 본인의 차림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낡고 닳은 헌 운동화였다. 그 운동화 위에 묻은 흙이 지금 서있는 대리석 바닥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당장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게 기뻐서 앞뒤 보지 않고 들어오기는 했는데.....
수인을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여기를 찾느라 얼마나 다녔는지 운동화 속으로 물이 들어가 발가락이 땡땡 언 것처럼 아팠다. 발가락 뿐만이 아니라 손이나 몸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녹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당신이 여기에 서있는 것 자체가 다른 분들께 실례가되는 일입니다."
고개를 든 수인은 경비를 바라봤다. 여전히 눈은 보이지 않아도 그가 누그러든 상태라는 걸 확인한 그는 당장 수인의 발 옆에 놓인 보따리를 가리켰다.
"그 짐도 다들고 가십시오. 바닥에 묻은 얼룩은 제가 알아서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지적에 수인은 당장 보따리를 들었다. 묵직했다. 사촌형한테 주려고 할머니랑같이 이것저것 챙겨서 온 것이었다.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 보따리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수인은 자신의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 게 아닐까싶었다. 경비가 말한 것처럼 3박 4일이나 바깥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지금은 그런 걸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서 다시 고모한테 전화를 하도록 하자. 사촌형의 연락처도 물어봐서 직접 전화를 걸어봐야지. 그러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겠지.수인은 경비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더 알아본 다음에 오겠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면서 나가지 않으려 할 때에는 짜증스러웠지만 또 사과를 하니 마음이 누그러진다. 지저분하고 이상한 몰골이긴 해도 어려 보이는데 말이다. 경비는 조금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다시 알아봐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순 없을 거라는 투였다. 그걸 느낄 수가 있었으나 더 말을 하지 않고 수인은 몸을 돌렸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통과하기 전에 수인은 벽에 붙은 전면 거울을 확인했다.
낡은 오리털잠바와 검은 바지. 낡은 하얀 운동화에 지나치게 화려한 털모자를 쓰고 몸보다 훨씬 더 큰 가방과 보따리를 들고 서있는 이상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길게 기른 앞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고 있어 사람을 더 음침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잘 도착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있어 몰골이 어떤지 확인을 하지 못했던 게 실수였던 걸지도 모른다며 수인은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봤다.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도 이상한 내음은 없었다.
하지만 하필 지금 버스에 올랐을 때 괴상한 걸 바라보는 듯 눈을 흘기던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에는 왜 그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새삼스레 이 화려한 건물 안에 있는 게 너무도 창피하게 느껴져 수인은 당장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부는 찬바람과 얼굴에 닿는 눈에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하늘 가득이 눈이 뿌려지고 있었다.
"......"
강원도하고는 다르게 눈송이가 작고 모양도 별로였다. 그래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수인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마냥 여기에 서있을 순 없었다. 어디라도 들어가서 눈을 피해야만했다. 그런데 어디를 가야만 하는 걸까. 이 넓은 서울 바닥에 수인이 아는 사람은 이 고급 맨션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촌형 뿐이었다. 그런 그와 당장 만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열린 수인의 입술을 타고 하얀 김이 토해져 나왔다. 괜히 더 추운 것 같다면서 짐을 들고 터덜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맨션으로 올라가기 전에 통과를 해야만 했던 작은 경비실 앞으로 갔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70대 중반의 노인이 따뜻해 보이는 담요를 몸에 두른 채로 작은 TV를 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수인이 들어가길 망설일 때 친절하게 언덕 위로 올라가면 된다 알려준 노인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 조심스레 창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고개를 돌린 노인은 바깥에 서있는 수인을 발견하고는 당장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왜 다시 왔나. 아는 사람이 집에 없다면서 안 들여보내 주던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수인은 명확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짐을 들고 있는 손 위를 긁적이며 눈을 내리뜨는 모습에서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이 가능했다. 혀를 찬 경비원 최씨 영감은 문을 활짝 열었다
"일단 들어오게. 추워 보이는 군."
"고맙습니다."
살았다. 수인은 2명이 들어가자 꽉 차는 경비실의 온기에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긴 한숨을 쉬고는 문 앞에 서있는 모습에 최씨 영감이 뒤에 넣어둔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가방 내려놔도 되네. 여기는 나만 있는 공간이라 내려놓는다고 누가 집어가진 않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요. 그냥 할아버지한테 피해가 되는 것 같으니 제가 매고 있을게요."
"그런 섭섭한 말은 하지 말고 편하게 있게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잖아."
"....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수인은 짐을 내려놓고 그 옆에 가방도 놓았다. 의자에 앉자 바로 옆에 있던 스토브를 수인의 앞으로 밀어줬다. 고마웠던 수인은 고개를 꾸벅이면서 양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내밀어진 손가락 끝은 다 갈라지고 손톱도 엉망이었다. 어려보이는 분위기하고 다르게 그 손은 모진 세상풍파를 다 겪은 사람의 것이었다. 최씨 영감은 당장 혀를 찼다.
"손이 왜 그 모양이야."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도와서 농사일을 좀 했거든요."
할머니하고 같이 있을 때에는 전혀 부끄럽지 않은 손이었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숨기고 싶어졌다. 이 손을 보고 안 좋게 생각을 할 것만 같았기에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있으려니 최씨 영감은 근처에 있던 로션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라도 바르게."
"죄송하게 어떻게 그래요. 괜찮아요."
"그걸 보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그러지 말고 어서 바르게."
"..... 고맙습니다."
로션을 바른 후에 향을 맡아보자 좋은 냄새가 났다. 서울 사람들은 다들 이런 향기가 나는 걸가 싶었던 수인은 킁킁 거렸다.
"배고프지 않나. 라면 좀 먹겠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몸을 녹일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더 뭔가를 원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하지만 수인의 생각과 달리 최씨 영감은 아래 선반에서 우동 라면 두 개를 꺼내 위에 올렸다. 그리고 한쪽에 넣어뒀던 김밥도 꺼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먹지. 나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혼자서 뭘 먹긴 싫었거든."
최씨 영감은 우동 라면을 뜯었다. 다른 쪽도 뜯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아무래도 같이 먹게 될 것 같으니 간단한 준비 정도는 도와야 할 듯 싶어 바지런히 손을 놀렸다. 뜨거운 물을 담고 냉장고에서 김치도 꺼낸 최씨 영감은 앞에 차려진 것들을 보곤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조촐하긴 해도 나름 괜찮지?"
"그러네요. 맛있겠어요."
"먹다가 부족할 것 같으면 또 말하게. 라면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답을 하는 동안 수인의 눈은 라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꿀꺽하고 생침이 넘어갔다. 그걸 모를 정도로 지금 배가 고픈 거였다. 불쌍하다는 듯 수인을 바라보며 최씨 영감은 물었다.
"자네 나이가 몇인가?"
"스무 한살입니다."
"대학생 인가?"
"아니요. 고등학교만 졸업했습니다."
"어린데도 어른 대하는게 틀이 잡혔구만. 할머니한테 잘배운 모양이야."
"...... 고맙습니다."
수인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내내 또박또박하니 말을 잘 하다가도 얼굴을 붉히면서 쑥스러워 하는 모양이 귀여워 보였다. 의외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최씨 영감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네 정말 귀엽구만.'라고 말했다. 수인은 그 말에 대꾸를 하는 대신에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뜨기만 했다.
"그런데 맨션 사는 지인한테 연락은 해봤나?"
"아니요."
"전화 써도 되네. 한번 연락 좀 해보게."
"그러면 조금만 빌려 쓸게요."
수인은 내밀어진 전화를 받고는 번호를 꾹꾹 눌렀다. 틀렸을까봐 신중하게 번호를 누르고 난 후 귀를 댔다. 일정하게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만 들리지 상대방 목소리는 없었다. 계속해서 신호만 가자 수인은 아쉬워하며 전화를 귀에서 뗐다.
"왜? 전화를 안 받나?"
"고모는 바쁜 분이셔서요. 있다가 다시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렇게 하게. 그보다 라면 다 익은 것 같은데."
먼저 먹으라는 듯 최씨 영감은 라면을 수인의 앞으로 밀어줬다.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 인사를 한 수인은 바로 뚜껑을 뜯어내고 양 손으로 컵라면을 들어 국물부터 마셨다.
따뜻한 국물이 언 몸을 녹여준다. 맛 자체도 좋았지만 뜨거운 걸 먹어서 정말 좋았다.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쉰 수인은 라면보다는 국물을 더 마시다가 최씨 영감이 손도 안되는 걸 보고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안 드세요?"
"난 면이 분 라면이 좋아. 먼저 먹고 있게나. 김밥도 먹고. 차면 국물 찍어서 먹어. 그러면 나름 괜찮아."
"아, 네."
고개를 꾸벅이면서 라면을 먹고 김밥도 먹고 다른 반찬도 열심히 집어먹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염치불구하고 마구 먹어댔다. 금방 라면을 다 먹고 국물을 후륵거리자 영감이 혀를 찼다.
"배 많이 고팠나 보네."
김밥도 먹고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대충 넘긴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아침 먹고 다 못 먹었어요."
"뭐? 정말? 지금이 저녁 9시인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국물을 마시며 수인은 웃었다. 긴 앞 머리카락이 답답하긴 했지만 서글서글하니 성격이 좋았다.
"어디서 올라온 건데?"
"강원도요."
"멀리서 왔구만. 방학기간은 아니닌 놀러온 건 아니겠고. 왜 온 건가."
"할머니가 이제 슬슬 서울로 올라가서 세상 물 좀 먹어보라고 해서요."
"그럼 강원도에는 할머니 혼자만 계신 건가?"
"고모할머니도 계시고 친척분들이 많으세요. 그래서 저도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면 안심이지."
그렇다. 만약 할머니 혼자 남는 거였다면 걱정이 되어서 절대로 서울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주변 분들도 계시고 할머니도 '아직 어리니까 서울 생활도 해봐야지.' 라고 말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용기를 낸 거였다. 사실 아직도 할머니가 걱정 되었다. 지금 저녁은 제대로 드셨을가 싶은 생각만 들었다.
"처음 서울 상경해서 불안하겠지만 그게 다 자넬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좁은 물 속에서 천년 만년 있는 것보다야 넓은 곳으로 나와 견식을 넓히는 것도 나쁠 일이 아니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경험이라는 건 값진 거니까. 다 자네의 앞길에 도움이 되는 거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수인은 첫날부터 서울 생활의 높은 벽을 느껴버렸다. 이 화려한 공간에 자신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은지를 느껴버린 거였다. 할머니하고 살던 때에는 느껴본 적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상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스스로가 굉장히 하잘 것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졌다.
국물을 다 먹어감에 따라 배는 부르지만 속은 허해졌다. 최씨 영감은 들고있던 라면을 내밀었다.
"더 먹을 텐가?"
"아니요. 이미 충분히 배가 부른데요 뭘."
정말은 더 먹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염치없는 짓이었다. 김밥을 하나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수인은 살짝 웃어보였다. 그걸 보고 영감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 동안에도 계속 눈이 내렸다. 추운 곳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게 걱정이었는데 배가 부르고 따뜻한 곳에 있으니까 점점 몸이 이완된다.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끼며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 자리에서 맨션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느껴질 만큼 굉장한 건물이었다.
"되게 비싼 맨션인 것 같아요. 얼마에요?"
"처음 분양 받을 때 15억이었는데 지금은 3배 넘게 올랐을 거야."
"‥‥‥-45억이요?"
"뭐, 그 정도는 되겠지."
"정말 대단한 사람들만 사는 곳인가 봐요."
"그런 곳은 아니야. 남자 잘 만난 젊은 여자나, 부모 빽 믿고 나대는 젊은 놈들도 더러 있지. 별 거 아니야. 그러니까 괜히 주눅들거나 하지 말게나. 난 지금 자네가 들고 있는 그 보따리가 더 값지게 여겨지는 군."
최씨 영감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방 만큼 큰 보따리가 있었다. 이것저것 넣은 것들이 있어서 가방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이었다. 그걸 본 수인은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사촌형 주려고 할머니랑 열심히 준비한 거예요."
"귀한 선물이야. 좋아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 전에 만날 수 있어야 할 텐데. 오늘 못 만나면 어떻게 하지. 아니야. 고모가 말을 해두었을 테니 집을 비울리가 없었다. 하지만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든다. 마주 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수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일 하세요?"
"12시 정도 되면 정리하고 들어가 봐야지."
"그래요?"
나는 12시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수인은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눈으로 확인이 될 만큼 우울해하는 수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최씨 영감은 지나 치는 투로 말했다.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갈 텐가."
"네?"
"그냥 해보는 말이야. 나 이상한 변태 늙은이는 아니니까 잘 생각해 보게. 나도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닌데 자네가 손자 같아서 이렇게 말도 꺼내는 거지. 뭐하면 여기서 지내도 되고."
"여기서요?"
"그래. 문 잘 잠그고 불만 끄고 있으면 돼. 스토브 켜면 나름 따뜻하지 바깥에 있어봤자 얼어죽기 밖에 더 하겠어."
사정이 딱한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걸 지나칠 순 없었다. 요즘 세상이 무섭다고는 하나 그렇다 해서 이런 어린애 사정마저 눈 감을 수 없다는게 최씨 영감의 생각이었다.
수인의 입장으로는 고맙기 그지없는 제의였다. 하지만 사람 염치라는 게 있었던 만큼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걸까.
잠시 생각을 하던 수인은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말을 꺼냈다.
"여기 화장실은 어디에 있어요?"
"화장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같이 가줄까?"
"아니에요. 참을게요."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그 무서운 인상의 경비원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비싼 건물이라 그런지 경비라는 사람도 양복을 차려입고 젊은데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귀에는 뭘 달고 있어서 첩보원 같은 느낌이었지. 어쩌면 총도 들고 있을 지도 몰라. 한번 더 갔다가 총을 꺼내들고 '너 정말 성가시게 구는군.' 같은 말이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한숨을 쉬며 수인은 눈을 내리떴다.
답답하구나.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마냥 앉아 있을 수 없었던 수인은 엉덩이를 떼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급한가 보지? 그러면 저기 산책로 뒤로 들어가서 일 보도록 해. 지금 이 시간이면 사람도 없을 테니까."
"....... 다녀오겠습니다."
노상방뇨를 할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인은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을 때 옷깃을 파고들어오는 한기에 몸이 절로 떨렸다. 팔짱을 낀 수인은 경비실 뒤로 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오르자 구불구불한 길목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산책로인 모양이었다.
눈이 쌓인 산책로를 비추는 건 은은한 색이 들어간 전등이었다. 살던 곳은 10미터 간격으로 전등이 떨어져 있어 언제나 늘 늦은 밤이면 그 길을 지나가는게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서울로 오는 내내 불빛이 어두운 곳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지 꼭 환하게 빛이 채워져 있었다. 그게 참 신기하고 놀랍기만했다. 지금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수인은 빛이 올라오는 전등 앞에 서서 양 손을 들었다. 빛을 가리자 그 주변이 환해진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수인의 입가로 미소가 걸린다. 희미하게 웃으면서 수인은 엄지를 맞대고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꼬물거리다가 위로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새가 난다. 나비가 난다. 수인은 어느새 그 놀이에 푹 빠지게 되었다.
"지금 뭘 하는 거냐."
눈만 내리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 푹 빠져 있었던 수인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말에 흠칫하고 놀랐다. 뭔가 싶었던 수인은 고개를 들었고 그런 그의 눈에 검은 실루엣이 들어왔다.
사내는 수인이 서있는 바로 옆에 있는 높은 화단의 옆에 있는 전등 아래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전등 바로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있는 수인을 확인하고는 당장 안색을 굳혔다.
"식모 하나 들인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지진아가 들어온 거 아니야."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토해져 나온다. 추운 날이었지만 얇아 보이는 잠바와 청바지. 구두를 신은 사내는 모자에, 연한 색이 들어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평범한 듯 싶으면서도 묘하게 눈에 튀는 사람이었다. 어둠속에서도 그가 평범 이상의 외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수인의 옆으로 뛰어내려왔다. 허리를 주욱 펴자 키가 굉장히 컸다. 상대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끔 하는 느낌이 풍겨져 나왔다.
"너 이름이 뭐야."
"..... 문수인인데요."
"몇 살이야? 아, 스무 한살이라고 했지?"
이제 막 기억이 났다는 듯 사내는 주머니에서 손을 거내 앞머리카락을 살짝 뒤로 넘겼다. 그 가벼운 손짓 하나에 시선이 간다. 숨죽인 채로 있던 수인은 물었다.
"원영도씨, 맞아요?"
"누가 그런 촌스러운 이름으로 부르래."
하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그 이름이 맞는 모양이었다. 바로 더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으려니 그는 재차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래도 옷이 얇다보니 추운 모양이었다.
"왔으면 바로 안으로 들어오지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괜히 엄마가 전화 걸어서 시끄럽게 굴었잖아. 난 지난 삼일 동안 잔 시간이 5시간 안짝이라고. 기절해서 곯아떨어져 있었는데 이게 뭐야. 짜증나 죽겠네."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리더 사내는 수인이 어떤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옆으로 몸을 돌렸다.
"아, 따라와."
"짐이 다른 곳에 있는데요."
"얼른 챙겨서 와. 안 그러면 버리고 갈 줄 알아."
정말 버리고 혼자만 가버릴 것 같았다. 마음이 급했던 수인은 당장 몸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서두른다고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수인은 경비실에 도착해서는 문을 열었다. TV를 보면서 하품을 하던 최씨 영감은 수인을 돌아봤다.
"벌써 일 보고 왔나?"
수인은 짐에 손을 대면서 고개를 꾸벅였다.
"사촌형이 와서 가봐야 겠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내일 제대로 인사드리러 올게요."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사촌형이랑 잘 지내면 그게 더 좋지."
최씨 영감의 다정한 말에 수인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고개를 꾸벅인 수인은 당장 박으로 나가 종종 걸음을 옮겼다. 너무 서둘러서 발을 삐끗 해 넘어질 뻔 했으나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는 위를 쳐다봤다. 없었다. 그 새 들어가 버린 건가.
마음이 급해졌던 수인은 가방을 메고 보따리를 옆구리에 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 자동문 두 개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 앞에 서있는 그가 보였다. 뭐라 말을 하는 그 앞에 선 경비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로 한숨을 쉰 그는 고개를 돌려 수인을 봤다.
"야. 이리로 와."
수인은 종종걸음을 옮겨 영도의 옆으로 가 섰다. 그는 엄지로 수인을 가리키며 경비를 바라봤다.
"이 녀석이요. 얼굴 잘 기억하고 있다가 들어온다고 하면 들여보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모르고 한 일이니까 너무 미안해할 건 없고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올라가십시오."
경비는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고 영도는 당연한 듯 그를 지나쳐 갔다. 바로 허리를 세우지 못하는 경비가 신경 쓰여 그를 흘깃거리고 보던 수인은 급히 영도를 쫓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복도가 나오고 벽 쪽으로 2대씩 총 4대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중 하나의 문이 열리자 영도는 타라는 말도 없이 혼자 들어갔다. 수인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 영도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수인은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경직되어 서있는 동안에도 영도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잠을 못 자서 저런 얼굴인 모양이었다. 층으로 올라가는 시간은 짧겠지만 지금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내고 싶은 마음에 수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형은 부잔가 봐요."
"무슨 말이야, 그게."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영도는 수인을 흘겨봤다. 눈동자 안쪽에 담긴 건 스트레스와 짜증이었다. 그것과 마주한 수인은 역시나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쓸데없는 말해서 죄송해요."
바로 물러서는 수인의 태도에 영도는 다소 풀린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걸 지적했다. 눈을 완전히 덮고 있는 수인의 앞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너 머리 꼴이 왜 그 모양이냐. 일부러 촌닭티 안 내도 되는 거잖아."
영도의 손길을 피하려는 듯 수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집이랑 이발소가 너무 멀어서."
"이발소? 아직도 그런 데가 남아있냐? 나 정말 미치겠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영도의 입매가 우그러졌다. 비웃고 있었다. 이상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수인은 솔직히 영도의 태도가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하나 싶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야, 내려."
어김없이 영도가 먼저 내렸지만 아까와 다르게 내리라고 말을 해준 게 어딘가 싶었다. 수인은 영도를 쫓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나오자 5평 남짓의 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고 안쪽에 있는 건 문 하나 뿐이었다. 다른 문은 없었다. 저기로 들어가면 집이 나오는 걸까.
"괜히 주변 기웃거리지마. 내 말했지. 일부러 촌닭티 안 내도 되는 거라고."
"..... 죄송해요."
낯선 곳이고 모르는 것투성이기 때문에 주변을 살펴보는 것 뿐이었다. 단지 그 뿐인데도 고개를 돌릴 때마다 지적을 받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영도가 풍기는 기운이 너무 세서 수인은 말문이 막혔다. 대등한 입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도에게 얹혀살기 위해 온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더더욱 기를 못 펴게 된다. 나름 살던 곳에서는 골목대장으로 불리던 수인이었는데 말이다.
"들어가자."
영도가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수인은 주춤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너무도 좋아 보이는 넓은 집안 내부에 수인은 숨을 삼켰다. 솔직히 이런 건 TV나 잡지에서도 본 적 없는 공간이었다. 너무도 대단해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건물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수인은 주춤거리며 신을 벗으려 했다. 영도가 당장 그런 수인의 앞으로 손을 내렸다.
"기다려. 일단 그 지저분한 것들 다 현관에 내려놓고 옷도 벗고 들어와. 샤워실은 저기 있으니까 일단 거기로 들어가서 씻기부터 해."
"저 그렇게 안 지저분한데요."
"안 지저분하다고? 그 꼴을 하고선?"
영도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옆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옆으로 길어서 넘긴 앞머리카락과 목뒤를 덮는 긴 스타일임에도 지저분하다거나 이상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모자를 쓰고 있다 벗은 거지만 누군가 굉장히 신경을 써서 머리를 만져준 느낌이었다.
잘 생긴 얼굴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너무너무 잘 생겨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인지라 순간 수인은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다음에 이어지는 영도의 말로 인해 사라졌다.
"야. 그 거지꼴을 하고 어딜 들어오려고. 이 바닥이 얼마 짜린줄이나 알아?"
정확히 현관 앞 바닥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수인은 정신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농담을 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영도의 미간에 서린 짙은 주름이 그의 진실이 느껴지게끔 했다.
정말 말도 안 돼. 뭐, 이런 경우가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을 하며 수인은 살짝 반항을 했다.
"할머니가 사주시고 제가 깨끗하게 세탁해서 오늘 아침에 입은 거예요. 가방도 잘 정리한 거고 보따리는 할머니가 직접 장에 가서 구입한 거예요. 이 가방 속에는 제 물건이 대부분이지만 할머니가 형한테 전해 주라고 넣어주신 것도 많고 보따리에는 산에서 캔 나물이랑 버섯, 삼도 있어요. 그걸 여기에 어떻게 내려놓으라고요. 당연히 주방에 내려놔야지요."
"시끄러워. 뭐라는 거야.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까 여기다 내려놔."
이번에 손으로 가리키는 건 현관 바닥이었다.
지금 들고 있는 짐과 가방을 이 현관에 내려놓으라는 건가.
물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동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짐을 내리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명백하게 다른 상황이었다. 화가 났다. 영도의 오만한 태도에 마냥 끌려갈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싶었던 수인은 신을 벗고 당장 위로 올라갔다.
"너 지금 어딜 들어가는 거야!"
"지금 그 말 할머니한테 똑같이 할 수 있어요?"
영도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수인은 당장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정말 실망이에요. 전화로 할머니랑 통화할 때에는 그렇게 사람 좋은 척하더니만 나한테 왜 이래요? 다른 건 몰라도 보따리는 주방에 내려놓을 거예요. 현관에 억지로 두게 하면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 할머니랑 큰고모한테 다 말할 거예요."
영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내내 가만히 있기에 순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 걸 제외하고라도 저런 태도는 아닌 거 아니야? 더부살이로 온 주제에 말이다.
"이 쪼그만 놈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나불대고 있어."
"전 문수인이라는 이름이 있거든요?"
"그래서 뭐? 그 이름으로 불러주라고?"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해요. 이름 있는 사람한테 이름 불러야 하는 것 정도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아실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라고?"
영도는 뒷목을 잡았다.
지금 이 망할 촌닭이 대체 뭔 소리를 나불대는 건가 싶었다.
영도가 충격을 받든지 말든지 수인은 또박또박 말했다.
"저 형 하인으로 들어온 거 아니에요. 식모도 아니라고요. 큰고모가 그랬어요.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 덕분에 대학가고 유학도 다녀왔다고. 그 보답을 하고 싶으니까 서울로 올라와서 형이랑 생활하면서 앞으로 진로에 대해서 결정하라고요. 더부살이긴 해도 제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건 아니고 어른들께서 결정하신 일이에요. 그러니까 손가락질 그만하고 촌닭이라고 하지도 말아요. 막 서울 올라온 동생 괴롭히는 못된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입을 꾹 다문 수인은 영도를 바라봤다. 눈이 가려져 있어도 꽤나 날이 선 눈빛이라는 게 느껴져서 기가 막혔던 영도는 입을 반쯤 벌렸다. 뭐라고 하려는 순간 수인은 당장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영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귀신 같이 주방을 찾아냈다. 한쪽 벽이 있긴 하지만 허리 위로 터져 있고 그 위로 테이블 같은 곳이 놓여있는 신기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수인은 냅다 그 위에 보따리를 올렸고 가방도 벗으려 했다. 영도가 막지만 않았으면 정말 그랬을 터였다.
"기다려! 지금 어디다 두려는 거야!"
달려온 영도가 가방을 빼앗아가려 하자 수인도 마음이 급해졌다.
"이것 놔요! 할머니 선물이라니까요!"
"그런 거 필요 없어! 당장 안 치워?! 이게 정말-!"
영도는 수인의 팔을 잡았다. 놓으라며 소리를 치면서 수인은 가방을 끌어안았다. 나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때에 맞춰 전화벨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 심각하게 변했을 터였다.
때르릉 하고 울리는 소리에 수인과 영도는 동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수인은 그런 영도를 흘깃 봤다.
"전화나 받아요."
"..... 이 자식이 정말."
영도는 이를 갈았다. 으득-하는 소리가 살벌하기 그지없었으나 수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때리면 맞으면 그만이었다. 맞아죽어도 이건 양보 못한다. 거동 불편한 할머니가 하루에 1시간씩 꼭 산에 올라가서 캐온 것들이었다. 귀한 외손주 먹이겠다고 말이다.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왜 모르는 건가 싶었다.
수인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입술을 손바닥으로 퍽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영도는 수인의 팔을 놓았다. '에씨'하고 혀를 찬 영도는 당장 거실로 들어가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을 집었다.
"여보세- 아. 귀 떨어지겠네."
핸드폰에 귀를 대자마자 바로 떼고는 싫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다시 귀를 댄 영도는 건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찾아왔어. 애가 띨빵하게 다 와서 길 잃고 놀고 있더만. 아, 진짜야. 애 이상해. 뭔가 좀 부족한 애 아니야?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고."
영도는 핸드폰을 쥔 채로 성큼성큼 걸어와 수인에게 그걸 내밀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잘 받아."
양 손으로 핸드폰을 받아든 수인은 영도를 봤다. 당장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다. 헛소리 하면 알아서 해. 그리 경고를 하는 눈빛을 받으며 수인은 핸드폰에 귀를 댔다.
"여보세요?"
[어머나~. 수인아~.]
살살 녹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에 수인은 눈을 깜박였다. 조금 전 영도가 들고 있을 때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목소리와 정말 동일인물인가 싶었다.
[괜찮니? 내 아들이지만 성격 완전 개차반이라 내가 맡겨놓고도 안심이 안 돼. 내가 지금 외국만 아니라면 더 살뜰하게 챙겨줄 수 있는 건데 말이야. 오늘 올라오느라 많이 힘들었지? 아까 전화 왔는데 내가 샤워를 하는 중이라 못 받았어. 정말미안해. 혹시라도 내 아들놈이 섭섭하게 대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렴. 내가 한마디 단단히 할 테니까.]
듣고만 있던 수인은 눈동자를 움직여 영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영도는 크게 입을 벌리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고 했다. 그런 그를 응시하던 수인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가 힘들게 챙겨주신 선물을 현관 앞에 내려놓으라고 한 것 빼면 다 괜찮았어요."
"야. 너-!"
영도가 소리를 치려던 때에 맞춰 수인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고모가 바꿔주래요."
"....."
영도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화가 나 미치기 일보직전의 얼굴은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던 수인은 재차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서 받아보라는 사인에 영도는 어금니를 악물고는 그걸 받아들였다.
"여보세요."
썩 내켜하지 않은 투로 전화를 받은 영도는 꽤나 오랫동안 사과의 말을 해댔다. '알았어요. 잘못 했다니까요. 그래요. 네. 물론이지요.'같은 말들은 건성인 투가 역력했다.
영도가 전화를 받는 동안 수인은 잽싸게 보자기를 풀었다. 안에 담긴 것들을 하나씩 꺼내자 영도가 삿대질을 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핸드폰을 손으로 막고는 '너 그만 안 둬?!'라며 나직하게 목소리를 높여도 수인은 모르는 척 안에 담긴 것들을 끄집어냈다.
영도는 주먹을 쥐고 공중에서 붕붕 휘둘렀다. 수인의 행동은 영도로 하여금 유치해질 수 밖에 없게끔 했다. 화를 꾹 참고는 간신히 전화를 마무리 지은 영도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바람처럼 수인에게 달려들었다.
"너 정말!"
"이 김치는 3년 묵은 거고, 이 총각무는 형이 좋아하는 거라고 해서 할머니가 새로 담가 맛있게 익힌 거예요. 그리고 이 동치미는 아주 좋은 재료들만 들어간 거고, 이 나물은 할머니가 캐려다가 언덕으로 구를 뻔해서 위험하기도 했어요. 이 버섯은 시중에서 팔지도 않은 거예요. 무농약이고 이렇게 크고 싱싱한 건 약방으로 밖에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대추랑 꿀 넣고 10시간 달여 먹으면 이게 바로 약이에요."
앞에 주르륵 내려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설명을 한 수인은 영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봤자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할머니 성의를 봐서 정리하는 건 참아줘요. 그리고 내일 날 밝으면 안부 전화 주시고요. 할머니 요새 많이 편찮으세요. 괜히 마음 쓰이게 하지 말아요."
"..... 그래. 네 멋대로 해 봐라."
핸드폰을 쥔 영도는 무섭도록 수인을 노려보고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 탕. 하고 큰 소리가 날 정도로 방문을 닫았다.
혼자 남겨진 수인의 어깨에서 점점 힘이 빠진다. 가만히 있던 수인은 지금 손 안에 감싸고 있는 것을 내려다봤다. 3년 묵은 김치를 넣은 통이었다. 이건 부침개를 해먹어도 맛있고 고기랑 같이 싸먹어도 좋고. 김치찌개에도 그만이었다.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가져가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이걸 싸서 보내준 할머니의 정성은 알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동시에 수인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영도에게 있어 그리 썩 달갑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주 좋지만은 않을 거라며 손가락을 꼼직 거리던 수인은 챙겨온 것들을 냉장고 앞에 내려놨다. 일단은 보관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연 수인은 옆에 주르륵 꽂힌 맥주 캔과 소주병 . 그리고 변변한 반찬 없이 대충 넣어진 냉동식품과 과일 같은 것들을 확인하고는 안색을 굳혔다.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거지."
거기다 이건 유통기한도 지난 거였다. 뭘 집어넣기 전에 이것들부터 정리해야 할 듯 싶었다. 그건 내일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대충 냉장고 안을 정리하던 수인은 챙겨온 것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꽤 챙겨왔다 생각했는데도 냉장고가 워낙에 커서 그런지 티도 나지 않았다. 짐들을 안에 다 넣은 수인은 일어서선 팔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지만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영도나 서울 사람들은 이 냄새가 싫은 걸 수도 있었다.
손을 내린 수인은 주변을 둘러보다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모두 할머니가 사준 옷들이었다. 그러하니 만큼 아직 새것이고 괜찮았다. 오늘 하루 종일 바깥에 있었던 것 때문에 땀 냄새가 나는 것 뿐이지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 거라며 수인은 가방을 챙기고 욕실 쪽으로 이동 했다. 일단 씻고 나서 짐 정리를 하자 싶었던 거다. 그리고 거실을 지나가려던 수인은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을 보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벽에 걸린 건 영도의 사진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사진이 한 면을 다 장식하고 있는데 달리 뭘 한 건지 묘할 정도로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자기 사진을 저렇게 크게 걸어두다니. 변태인가.
거기까지 생각을 한 후, 수인은 다시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