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걱정돼서 따라왔어?”
서혜는 업힌 채로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를 소파 위에 내려준 경원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 그것이었다. 왜 그랬냐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의 일에만, 당장의 감정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뒷일은 나중이라는 듯이.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나 여자랑 놀러 갔던 거 아니야. 아버지랑 형님이 싫어할 거 아니까 자리 지켰던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요…….”
경원이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도 벗겨 주고 젖은 원피스도 탈의하게 도와줬다. 어쩌면 다시는 입을 일이 없을 유니폼이 소파 아래로 하릴없이 떨어져 내렸다.
날씨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팔다리에 닿는 공기가 차갑다. 그런데 서혜는 자기도 모르게 더운 숨을 뱉었다. 오는 내내 따뜻한 등에 기대 있었기 때문일까? 그런 것치고는 경원도 더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진작 따라오라고 했잖아. 오해할 일 없게.”
허벅지를 붙든 경원이 상체를 가깝게 붙여왔다. 무릎이 조금 벌어졌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 거실 한 편에서 주황색 플로어 스탠드만 어슴푸레 반짝이고 있었다. 그림자 진 얼굴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맞닿은 채 멈춘 두 사람의 시선은 지쳐 있었지만 그런데도 어느 때보다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다, 그냥 너랑 놀았어야 됐는데. 걱정시킨 내 불찰이지.”
서혜는 다시 칠흑 같은 눈빛에 얽혀 들어 간다. 자기가 눈앞의 남자에게 벗어날 수 없이 묶이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맞아요. 도련님 잘못이에요. 제가 전과자가 되면 책임지세요.”
“…….”
“살고 싶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죠.”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재잘대는 소리가 잔잔하게 거실을 울렸다. 서혜는 살결을 스치는 촉각에 집중했다. 경원의 커다란 손이 붉어진 뺨을 훑고 지나갔다. 작은 턱을 쓸어 만지고, 입술 위에 약한 압박감을 전해 오고. 차례차례로 피부결 하나하나 체온을 새겼다.
“그래. 그럼 난 너하고만 섹스할게.”
“…….”
“애기야, 넌 어떡할래.”
이제는 그가 남사스러운 소리를 해도 놀랍지도 않다. 변태 같은 남자에게 자꾸 물이 들었다. 아니, 이 남자가 자꾸 자기를 벗겨 내는 거였다. 원래 모습이 뭐였는지, 좋아하는 게 뭐였는지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적 죽음이라는 사망선고를 받은 주서혜를 밖으로 꺼내고, 현실에 결코 있을 수 없는 부활 주문을 걸어서, 끝내 살고 싶게 만들어 버리는 거였다.
“내가 다른 여자랑 노는 거 싫었지? 그래서 따라온 거 맞지?”
“…….”
“아니라고 해 봐. 아까 걔네들 다시 불러서 홀딱 벗고 수영장 입수하러 갈 테니까.”
그리고 살고 싶어진 서혜는 누구보다 솔직할 수 있었고, 누군가 자기를 좋아해 주는 게 좋았고, 그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다 좋았다.
“……가지 마요.”
그의 소맷단을 타고 담배 냄새가 아닌 낯선 향수 냄새가 풍겨 왔다. 한 가지 향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검은색이 됐다. 서혜는 그게 그가 라운지에서 묻혀 온 다른 사람들의 흔적이라는 걸 알았다. 당장 벗겨 버려야지. 서혜도 손을 뻗어서 그가 입은 정장 단추를 풀어헤쳤다. 자연스레 서로의 몸 위로 올라간 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서혜가 상의를 완전히 벗은 사내의 두툼한 팔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등을 잡아 제 배꼽 위로, 그리고 더 아래쪽으로 밀어 넣는다. 자기가 얼마나 충실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려 준다.
“그냥 저랑 있어요. 둘이서만요.”
그것이 신호가 된 듯 두 사람의 입술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칠게 겹쳐졌다.
잠시 떼어 낼 듯하다가, 숨이 부족해 헐떡거리는 여자의 입을 다시금 막는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숨을 불어넣는다.
서혜는 저항 없이 혀를 내밀고 무엇이든 받아 먹었다. 갈급한 듯이 혀를 섞고, 경원이 제 입 안을 어디 하나 빼먹지 않고 유린하는 것을 신경줄 하나하나에 새겨 넣듯이 기억했다.
“하아…….”
잔뜩 뭉그러지며 비벼 대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길게 실선이 이어진다. 경원이 거슬린다는 듯 안경을 벗겼다. 서혜가 그 잠깐의 시간도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의 목덜미로 팔을 감아 넣었다. 기꺼이 그 약한 힘에 끌려가 주자, 그녀는 아예 남자의 젖은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한 번 더 해 달라 아양을 부렸다. 흐읍, 하, 소리가 점점 야릇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혀를 섞는 데에만 집중했다. 굳이 거창한 고백을 하지 않아도 감정이 통하는 느낌이 좋았다. 왜 진작 이런 입맞춤을 하지 못 했는지 후회될 정도로 기분이 날아갈 듯 황홀했다. 그래, 섹스 같은 건 애초부터 안 해도 좋았을 정도로. 이 생각을 경원이 알았다가는 얼마나 경을 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타닥, 타닥, 경원이 발코니에 있는 난로에 불을 피웠다. 서혜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혜의 바람대로 둘만의 시간을 난롯불만큼이나 뜨겁게 보냈다. 그리고 미지근하게도 보냈다. 난로 앞에 모여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내내, 서혜는 우스운 해프닝이 있었던 것처럼 배실배실 웃어 댔다.
“연희 걔가 절 얼마나 미워했는지 몰라요. EP라는 기획사에서 학교로 비공개 오디션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요. 제가 1등 했거든요. 연희가 2등이었고요. 딱 한 명만 뽑아 간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연희는 화가 나 있었어요. 제가 학교 그만두기 전까지요.”
“근데 왜 너는 왜 가수 안 하고 관뒀어. 네가 뽑혀간 거 아니야?”
“한동안 성대 손상이 심했거든요. 제가 아마 따돌림 같은 걸 당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안 좋게 목을 다쳤는데…… 어른들끼리 합의하고 넘어가 버렸죠, 뭐. 실수를 저지른 남자애도 저도 아직 학생이라서 사리 판단이 안 된 거라고요.”
경원은 서혜가 늘어놓는 옛날이야기에 특별히 감상을 남기지 않았다.
“현수는, 연희네 집안에서 폭행 교사를 시도한 거라고 그래요. 옛날부터 연습생들끼리 차로 치어서 경쟁자를 없애 버린다는 괴담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데 현수가 그때 가해자 측 남자애하고 같이 술을 마시다가 들었대요. 녹음도 했다고. 적극적으로 기자도 만나고 수사도 다시 받게 하자고 그러는데…… 역시 저는 제대로 할 자신이 없어요. 도련님한테 말하는 것도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 어떻게 온 세상에 대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힘들면 하지 마. 괜찮아. 네가 그쪽이 더 편하고 행복하다면야.”
“네. 오늘 연희를 만나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제가 행복하게 살면, 그 애는 싫어할 거라는 걸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더 행복해지려고요.”
왜 서혜의 목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가 버리는지, 젊은 애한테 왜 재활치료 같은 게 필요한지. 그 큰돈이 어디서 났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리 개운하지는 않다.
얼마 뒤에 박 실장에게 전화가 와서 소식을 전했다. 알렉스의 소속사 측에서 사과를 받아 냈다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새벽까지 못 자고 사고를 수습하기 바쁜 직원들을 생각하니 서혜는 벌써 뒤통수가 따가운 기분이었다.
경원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서 서혜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 옆으로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서혜는 자신의 곁을 지켜 주는 나무 옆에서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뜨거운 율무차를 꼴깍꼴깍 삼키며 포근한 기운을 만끽했고, 술 없이도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다.
“근데 도련님 가족분들이요. 그래도 도련님하고 연을 끊어 버리는 건 싫은가 봐요.”
“그렇게 보여?”
“사정도 잘 모르는데 함부로 말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그렇게 보였어요. 저한테는 가족들이 그래요. 아빠가 땅 사서 돈 번다고 욕심부리는 게 싫지만,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또 미련이 생겨요.”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연 끊고 집 나오는 게 쉬운 줄 알아? 집 나와서 개고생이지.”
경원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편안했다. 어떤 의심이나 평가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들린다. 진정한 의미로 파트너가 된 것 같았다. 투덜대는 목소리도,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 하는 말로 들리는 걸 보면 분명 그랬다.
“나도 절대 집 안 나가잖아. 무사히 유산 물려받을 때까지 모기처럼 붙어살 거야. 우리 집안도 별거 없어. 고상한 척만 있는 대로 하지.”
“…….”
“어릴 때 부모님들 갈라지면서, 형들은 아빠 따라가고, 난 고등학생 때까지 엄마 밑에서 자랐거든. 근데 어느 날 의사가 엄마한테 간 이식이 필요하다고 그러더라?”
“…….”
“수술하기 며칠 전에, 갑자기 그 대단한 회장님이 불쑥 찾아왔어. 나는 엄마 아프다는 소식에 달려온 줄 알았더니, 내가 공여하는 거 막겠다고 찾아온 거야. 내 아들 장기 떼 가는 꼴 못 본다고. 난 그대로 병원에서 그 인간 집으로 끌려 들어가서 갇혀 버렸고…… 엄마는 그사이에 자살하고.”
경원도 옛날이야기를 하듯 말한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어떤 자학의 시간이 있었을까.
“쫓겨나듯이 유학 갔다가 사고만 치고 돌아왔더니, 그때부터는 아빠든 형들이든 화를 못 참아서 싸우는 날만 있었지. 그래도 온갖 핑계 대 가면서 들볶고 얽혀 사는 거 보면, 나도 혼자 사는 게 무서운 나약한 놈인가 싶다.”
서혜는 감히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을 쬐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잘생겼다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고, 어차피 대답이나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
“게임에서야 나약하면 맞아 죽지만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게 살아지지는 않더라고.”
경원은 자기 방식대로 마음이라는 걸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서혜에게는 이제 그런 교류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경원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괜찮았다. 서혜는 아주 조금씩, 손아귀에 쥐어져 흘러 나가는 작은 물방울만큼. 모래시계 위에 쌓여 가는 모래알들만큼. 속을 알 수 없던 남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더욱 지금의 상태로는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윤경원은 또다시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지내게 될 텐데. 그 꼴을 어떻게 보겠는가.
“저 양리 마을로 돌아갈게요.”
그날 먼저 옆을 돌아본 것은 경원이었다.
서혜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자신과 달리 얼굴에서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몰랐다. 경원은 서혜의 표정을 봐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야만 했다.
“해고됐다고 그러는 거야? 아이템은 약속한 대로 줄 거야.”
“도련님이랑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게임은 이제 재미가 없어졌어요. 아이템도 언제부턴가 안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거 받아 버리면, 여기서 지낸 시간이 전부 대가를 바란 것처럼 되어 버리잖아요. 그런 거 아니었는데.”
“…….”
“돌아가서, 혼자서도 최석훈을 완전히 지울 수 있게 되면요. 제가 정말 온전한 주서혜로 살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제가 고백할게요. 받아 줄지 말지, 도련님이 대답해 주세요. 기다릴 테니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한 서혜는 밝게 웃고 있었다. 건강한 안색으로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경원의 마음도 덩달아 그 감정을 쫓아갔다. 떠나겠다는 것이 곧 마지막은 아니었다. 뒤늦게 돌아온 대답이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