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결혼 축하드립니다.”
조지현의 인사에 식장 앞에 서 있던 김선우의 아버지가 활짝 웃는다.
“오, 지현 군 왔구만. 선우는 봤나?”
“아뇨. 지금 가서 인사하려고요.”
“그래, 그래. 나중에 다시 자리 갖자구.”
조지현은 김선우의 부모님에게 반듯하게 인사를 하고 입이 귀에 걸린 친구에게 걸어갔다.
“김선우. 결혼 축하한다.”
“오! 허니!”
“그것 좀 안 부르면 안 돼?”
조지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김선우는 평소처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 유경이 봤냐? 와, 진짜 내 와이프지만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거냐?”
김선우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한다.
“으이구, 저 팔불출.”
김선우의 첫째 형이 혀를 내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가 저렇게 급하다고 저 나이에 결혼을 하냐. 내 동생이지만 진짜 이해가 안 간다.”
김선우의 둘째 형도 한마디 하자 김선우가 발끈해 외친다.
“유경이 누가 채가면 어쩌라고. 나 그 생각하면 잠 못 자.”
뉴욕 여행을 왔던 이유경과 우연히 만난 김선우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뉴욕 가이드를 자처했다. 그녀의 여행 기간 내내 쫓아다니며 안내를 돕던 그는 결국, 이유경이 귀국하는 날 같은 비행기를 잡아타고 같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후로 불꽃 같은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프러포즈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일화였다.
“선우 진짜 잠 못 자요.”
장거리 연애를 하며 김선우가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던 조지현이 친구를 거들었다.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우리 허니 뿐, ……, 어, 아, 안녕하세요.”
김선우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강석원이 고개를 숙인다. 김선우의 형들도 강석원을 알아보고 동생에게 눈짓을 보낸다.
“어, 저기. 지현이 선배님이라고.”
“안녕하세요.”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강석원이 인사하자 김선우의 형들이 앞다투어 손을 내민다.
“저 김선우 첫째 형, 김동우입니다.”
“김윤우입니다.”
강석원은 차례대로 악수했다. 그와 다닐 때 뜻밖에 남자들이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조지현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무슨 선배?”
김동우가 조지현에게 나직이 묻는다.
“고등학교 선배님이요.”
“응? 고등학교?”
김동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지현아. 유경이한테 빨리 가서 인사해. 조금 있으면 신부 입장할 시간이니까.”
김선우의 말에 조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신부 대기실로 가자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환하게 웃으며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축하드려요.”
조지현이 인사를 건네자 이유경이 그를 알아보고 미소 짓는다.
“오셨어요? 먼 길 오셨을 텐데, 고마워요.”
“아닙니다.”
“사진 같이 찍으실래요?”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다른 친구분들이랑 찍으세요.”
“하긴. 지현 씨랑 찍으면 얼굴 사이즈 때문에 내가 좀 불리하긴 하죠.”
이유경의 농담에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선우하고 인사는 했어요?”
“네. 앞에서 만났습니다. 오늘 신부 예쁘다고 자랑 많이 하던걸요.”
이유경이 아휴, 하고 한숨을 쉬며 눈웃음 짓는다. 이유경은 김선우보다 세 살이나 연상이었다. 자기가 조금만 한눈팔면 나이 찬 괜찮은 놈이 분명히 채갈 거라고 김선우는 밤마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럼 저는 자리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나중에 봬요.”
조지현은 인사를 하고 대기실을 나왔다. 대기실 앞에서 기다리던 강석원이 옆으로 걸어왔다.
“인사 다 했어?”
“네.”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는 일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강석원과 걸을 때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며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 생각보다 많이 유명해지셨네요.”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웃는다.
두 사람은 결혼식장 홀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고급 호텔에서 부조도 받지 않고 결혼을 하는 친구를 보면서 조지현은 가끔 잊고 지내던 사실을 상기했다.
“왜.”
조지현이 혼자 웃자 강석원이 물었다.
“신기해서요.”
성격도 좋고 돈도 많고 인물도 제법 멀끔한 편이라 김선우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여자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졌다. 그런 김선우가 프러포즈를 세 번이나 거절당했는데 네 번째에 성공해서 결혼한다는 사실이 조지현에게는 생소하리만치 신기했다.
“결혼 안 할 줄 알았거든요.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신랑이 입장했다. 조지현은 웃으면서 친구의 입장을 지켜보았다. 강석원은 그런 조지현을 바라본다. 연주곡이 흐르면서 신부 입장이 시작되었다. 주례는 김선우 아버지의 동창이라는 저명한 시인이 맡았다.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친구분들 사진 촬영 있겠습니다.”
사진을 찍어주는 기사의 외침에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사진 찍고 올게요.”
“그래.”
“같이 찍으실래요?”
강석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조지현은 결혼식 단상으로 올라갔다.
“오, 조지 왔었냐?”
“어디에 있었어? 찾아도 없던데.”
그를 알아본 친구들이 한마디씩 건넸지만, 조지현은 평소같이 무표정하게 고개만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신부가 부케를 던지자 장난기 많은 김선우가 저도 부토니에를 던지고 싶다고 나섰다.
“그럼 누가 받으실 거예요?”
“조지, 나와.”
조지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싫다고 거절하기도 전에 친구들의 등쌀에 밀려 앞으로 나갔다. 결국, 부토니에를 받고 신랑 신부 옆에서 나란히 사진촬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조지현은 지친 얼굴로 강석원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뒤를 따라 친구들이 왔다가 강석원을 발견하고 모두 그 자리에 굳었다.
“헉, 강석원!”
유일하게 공항에 나오지 않았던 정태수가 강석원을 보고 놀라서 외마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어머, 안녕하세요. 지현 오빠. 어, 강석원 씨다. 왜 여기 있어요? 신랑 아는 사람?”
어느새 합류한 정태수의 부인 김혜원이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현이 아는 분.”
이재경이 조그만 목소리로 알려줬지만, 그녀의 호기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떻게 아는 분인데 선우 오빠 결혼식까지 와요?”
“제 선배님입니다.”
조지현이 짧게 대꾸했다. 김혜원이 어머, 하고 웃으며 놀라워했다.
“많이 친한가부다. 그죠?”
“네. 많이 친합니다.”
조지현이 그렇게 답하자, 그의 성격을 아는 친구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굳는다.
“지현이 오빠 유명한 사람도 알고 좋겠어요. 앗, 우리 아기 깼다.”
김혜원이 유모차에서 울음소리가 들리자 얼른 몸을 돌렸다. 그때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하던 김선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왜 다 여기 있냐? 저 앞에 앉아있지 않았어?”
“아니, 조지 여기 있다고 해서 혼자 있는 줄 알고 따라왔는데…….”
그 뒷말에 함축된 의미를 김선우도 모를 리 없었다.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한바탕 회자한 주제였다.
“김선우. 축하한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지현이 덤덤하게 김선우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나 신혼여행 갔다 와서 보자. 연락할게.”
“알겠어.”
김선우가 다른 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조지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요? 오빠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조금 더 놀다 가요. 저도 오랜만에 외출한 건데.”
“돌잔치 때 못 가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차피 초대하면서 올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지현아. 얼른 가 봐라.”
부인의 거침없는 발언에 흙빛이 된 얼굴을 한 정태수가 친구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조지현은 김혜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짧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뒤따라 일어선 강석원도 묵례하고 식장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강석원을 알아본 사람들이 저마다 눈짓을 했지만 정작 쉽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강석원을 쳐다보았다.
“차 살까?”
호텔에서 나와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강석원은 불쑥, 말을 던진다.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지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편하잖아.”
“아니, 전혀요.”
조지현이 불편하세요? 하고 물었다. 강석원이 아니, 하고 대답했다. 평소 강석원의 일상은 운동에서 시작해 운동을 끝난다. 체육관에 갈 때는 일부러 걷거나 뛰어서 갔고,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필요할 때는 소속사에서 차를 보내준다고 했다. 조지현이 입국했던 날처럼.
“그런데 왜 굳이 차를 사요.”
강석원이 차도를 지나가는 차를 힐긋 쳐다본다. 호텔이 남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차를 이용해 내려가고 있었다.
“무리하면 안 되잖아.”
조지현이 짧게 웃었다.
“오히려 이 정도 걷는 건 좋아요.”
길을 따라 만개한 꽃이 흐드러져 있다. 완연한 봄이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그냥요.”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유성이 떨어지던 날, 방송국에서는 세계적인 우주쇼를 밤새 방송했다. 사람들은 평생 두 번 오지 않을 축제를 즐겼다. 조지현에게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기나긴 하루였다. 다음날, 아무런 일도 없이 눈을 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조지현이 느낀 안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상성이 절실했다. 평범하게 별다른 일 없이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감사할 뿐이었다.
“아, 그리고.”
강석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 저기요, 하고 두 사람을 불러세웠다.
“강석원 선수 맞으시죠?”
“네.”
곱게 차려입은 여자 두 명이 쭈뼛거리며 강석원에게 다가온다.
“저 팬인데요, 같이 사진 좀 찍으면 안 될까요?”
조지현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걸 본 강석원이 언뜻 입매를 굳혔다.
“이제 사진 안 찍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강석원이 짧게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걷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왜 안 찍으세요?”
한참 뒤따라 내려오던 조지현이 묻는다.
“평생치 다 했어.”
잡지나 화보 촬영 중에 늘 무표정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하고도 안 찍으실 겁니까?”
조지현이 짧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
조금 틈을 둔 다음에 강석원이 말을 잇는다.
“찍을까?”
“지금요?”
“찍자며.”
그냥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강석원이 핸드폰을 꺼냈다. 이리 와. 조지현이 뒷걸음질 치기 전에 강석원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어색한 얼굴이 찍혔다.
“……, 지우시면 안 돼요?”
“안 돼.”
강석원이 사진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덧붙인다.
“너 나한테 빚졌잖아.”
버스에 부딪히는 바람에 강석원이 사용하던 오래된 핸드폰이 부서졌다. 사진도 복구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강석원은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몇 번이나 서비스 센터직원에게 다시 고칠 수 없는지 물었다. 서비스 센터 직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왜 그게 불가능한 일인지 차분하게 설명해야 했다. 강석원은 아직도 그 핸드폰의 잔해를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다.
“그럼 이걸로 된 건가요?”
“아니.”
한참 더 남았어. 강석원이 느슨하게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조지현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봄이 완연하게 드러나는 꽃길을 걷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건 왜 받았어.”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에 들린 부토니에를 보며 물었다.
“선우가 장난친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조지현은 받아온 부토니에를 벽에 걸어두었다. 그 모습을 본 강석원이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 이거 이렇게 말려야 잘산다고 해서요.”
미신이긴 하지만. 조지현은 쑥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친구가 행복했으면 하고 바랐다.
“부케 같은 거야?”
강석원이 물었다. 조지현이 비슷하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은 눈가를 좁힌 채 한참을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없었기에 조지현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의 일상은 그렇게 평화롭게 지나갔다.
“저녁에 뭐 해.”
며칠 뒤에 아침을 먹으면서 강석원은 그렇게 물었다.
“일정 없어요.”
자신의 일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묻는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조지현은 대답했다.
“그럼 시간 좀 내줘.”
“네. 그럴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석원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상하게 팽팽하게 당긴 공기에 조지현은 살짝 긴장한 채로 식사를 마쳤다. 경기가 한 달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강석원은 바로 운동을 하러 갔다. 점심쯤, 강석원에게 문자를 받았다. 점심을 챙겨 먹으라는 것과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의아했다. 보통 밖에서 만나자고 할 때는 같이 가곤 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응. 여기로 가면 돼요? 응.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어딘지 어색한 분위기에 조지현은 알겠다고 말하고 통화를 마쳤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조지현은 적잖이 놀랐다. 간단하게 식사나 하자고 부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강석원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왔어?”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점심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남자는 조지현의 점심을 걱정한다. 아까 먹었어요, 조지현은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가 와서 빈 컵에 물을 따라준다. 조지현은 물을 마시면서 강석원을 흘끔 쳐다봤다.
정장을 입은 강석원의 모습은 거의 드물었다.
“뭐 먹을래.”
강석원이 메뉴판을 건네며 묻는다. 조지현은 눈으로 대충 메뉴판을 훑은 다음, 메뉴를 골랐다. 강석원이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했다.
“와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나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강석원은 추천해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웨이터가 리스트를 가져와 보여주고는 간단하게 추천했다. 강석원이 그중 하나를 골랐다.
“괜찮지?”
“아, 네.”
와인을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니었기에 선호도도 없었다. 웨이터가 와인잔을 채워줄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어색한 분위기에 조지현은 와인을 조금씩 나누어 마시면서 강석원을 쳐다보았다. 항상 운동복 차림만 보다가 슈트 차림의 강석원을 보니, 묘하게 긴장되었다.
“어디 갔다 오신 건가요?”
“아니.”
차가울 만큼 짤막한 대답에 그런데 왜 옷차림이 그러느냐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전채 요리가 나왔다. 어색함에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마주 앉은 강석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불안했다.
별이 떨어지던 날, 강석원에게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석원은 놀라거나 미심쩍어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뿐이었다. 덧붙이는 질문도 말도 없었다. 그날 밤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안겨 잠이 들었다.
이후로도 강석원은 그날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는 듯이. 하지만 문득문득, 강석원이 자신의 말을 모두 믿어주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조지현은 전채 요리를 먹으면서 강석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시선을 돌린다. 의외로운 일이었다. 강석원은 한 번도, 시선을 피하거나 한 적이 없다. 조지현은 다시 강석원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수프입니다.”
웨이터가 수프 그릇을 놓아주고 갔다. 스푼으로 수프를 먹으면서도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다.
“입에 맞아?”
“……네.”
간간이 어색한 대화만 오갔다. 깔끄러운 공기에 음식이 간신히 넘어갔다. 강석원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 것을 감안해도 심한 수준이었다. 화가 난 건가 싶어 몇 번이나 그의 낯을 살폈다. 강석원은 무표정하게 식사를 할 뿐이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컨디션에 따라 기분이 오르내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려 해도 마음이 어둑해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전과는 뭔가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
“…….”
또다.
강석원은 매번 시선을 피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테이블을 둘러싼 공기가 점점 더 어색해지고 무거워졌다. 강석원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괜한 얘기를 한 건 아닌가 후회가 밀려왔다. 7년을 기다리게 해놓고 그런 말을 믿으라고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허무맹랑하다. 충분히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조지현은 점점 입을 열기가 무서워졌다. 코스 요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라고는 예닐곱 마디가 전부였다.
“디저트입니다. 식사는 어떠셨나요?”
웨이터가 다가와서 물어왔다.
“괜찮습니다.”
“혹시 뭔가 마음에 안 드시거나, 불편하신 사항이 있으셨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테이블의 분위기가 어색한 것을 눈치챘는지 웨이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닙니다.”
강석원이 짧게 대꾸하자 웨이터도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섰다. 조지현은 티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차갑고 달큼한 감각이 혀를 감쌌다.
“맛있어?”
“네?”
“아이스크림. 잘 먹는 것 같아서.”
오늘 그가 한 것 중, 가장 긴 말이었다.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더는 이렇다 할 말도 없다. 조지현은 묵묵히 아이스크림을 비워냈다. 어릴 때, 어머니는 본인이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어린 아들이 음식을 남기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석원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음식을 모두 비워냈다. 위가 쓰렸다. 강석원은 와인을 마시다가도 때때로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경기를 하는 사람처럼, 입매를 찌푸렸다.
“지현아…….”
“선배님.”
그러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 네가 먼저 해.”
조지현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그만 일어날까요.”
강석원이 조금 당황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가 피곤해? 하고 물었다. 조지현은 네, 하고 대답했다. 강석원을 신경 쓰느라 지쳐버렸다.
“그래. 일어나자.”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도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왜 밖에서 만나서 식사하자고 했는지, 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어 불안하기만 했다. 건물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밤바람이 나긋하게 느껴질 만큼, 완연한 봄이었다.
“선배님.”
조지현의 부름에 강석원이 걸음을 멈추어 선다.
“왜?”
“……, 저한테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조금 당황한 듯, 강석원의 표정이 굳는다. 그러더니 낮게 혀를 찬다.
“나중에 할게.”
“지금 하셔도 됩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두려움에 잠식당한다. 조지현은 사형 언도를 기다리는 사형수 같은 심정으로 남자의 입술만 바라본다.
“나중에.”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대답이 돌아온다. 알겠습니다. 조지현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흐드러지게 핀 밤 벚꽃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쓸쓸한 밤이었다.
“먼저 씻으세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가 슈트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지현은 고개를 돌렸다. 벗은 그의 등을 좋아한다. 노력이 빚어낸 아름다운 근육과 뼈의 모양, 그리고 어깨에 남은 상처. 끔찍한 재활을 이겨낸 결과였다. 그걸 보면 무심코 어리광을 부릴 것만 같았다. 강석원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기다려줘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의 도리였다.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누웠다가 도로 일어났다. 저녁 식사 내내 신경을 썼더니 위가 아팠다. 약을 찾아 먹으려고 캐비닛을 열다가 강석원이 걸어둔 재킷을 건드렸다. 재킷이 툭 떨어졌다. 조지현은 얼른 허리를 굽혀 옷을 집어 들었다. 옷을 걸어두는데 바닥에 떨어진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상자였다. 조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를 집어 들었다. 손에 쥐고 나자, 그 상자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샤워를 마친 강석원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나오다가, 상자를 든 조지현과 눈이 마주친다.
“…….”
“…….”
한동안 말이 없다. 어색하고 낯선 침묵이 흐른다. 조지현은 눈을 두어 번 껌뻑이다가,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다.
“이거 제겁니까.”
강석원이 하아, 한숨을 내쉬고는 손으로 뺨을 쓸어내린다. 몹시도 곤란하고 당혹스런 낯이었다.
“……, 다른 사람 겁니까?”
“그럴 리 없잖아.”
강석원이 대답한다.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다.
“그럼 열어봐도 되나요?”
강석원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래, 하고 대답한다. 조지현은 상자를 열었다. 심플한 반지가 들어있다. 반지를 상자에서 빼내려는데 그 안에 음각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조지현의 시선이 멈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반지를 바라본다.
“……, 저번에 네 이름을 말해주다가, 실수했나 봐.”
강석원이 판정패 당한 복서처럼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뒤에 확인전화가 왔는데 운동 중이라 시끄러워서 나도 잘못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했어. 디어, 뒤에 들어가는 이름이라 영어라고 생각한 것 같아.”
그답지 않게 변명이 길어진다. 강석원이 또 한 번 한숨을 몰아쉰다. 그의 뺨에 붉은 기가 스며있다.
“미안해. 하필, 네가 안 좋아하는 별명을.”
“……, 아닙니다.”
반지에 새겨진 글자를 보는 순간, 조지현은 심장이 멎을 뻔했다.
강석원에게 시간의 귀환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세세한 것을 모두 말하지는 않았다.
Dear. George.
소년에게 받았던 편지는 서두에 적힌 글자를 읽자마자 그대로 구겨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그 뒷말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른다.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만 가끔은, 문득문득 생각났다. 자신의 기억에만 남은 편지에 무슨 글자가 적혀 있었을지. 어쩌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지 모를 마음을 단 한 글자도 읽지 않고 버린 것이다. 소년의 진심 어린 연정을.
그게 못내 안타깝고 미안했다.
눈이 마주친다. 이번에 강석원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제 마음을 굳힌 듯이, 강석원이 입을 연다.
“집 구해 놨어.”
강석원이 말을 잇는다.
“같이 살자.”
단순하고 담담한 말이 지니는 깊은 진심을 안다. 편지에 적힌 글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 자, 한 자, 얼마나 고민하며 썼을지 읽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Dear. George.
반지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읽는다.
“너랑 계속 같이 살고 싶어.”
강석원이 단단한 제 마음을 고백한다. 한 번의 흔들림도 없던, 그의 온 진심이 흘러들어온다.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손가락에 반지를 꼈다. 돌고 돌아, 미처 읽지 못했던 소년의 마음이 손가락에 닿는다. 남은 삶에 보이지 않는 맹세를 새겨 넣었다.
친애하는 그를 위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