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오후 늦게 돌아온 어머니는 열이 절절 끓어 누워있는 아들을 보고 혹시 어디에 나갔었는지, 뭘 했는지, 주말 동안 무슨 공부를 했는지 물었다. 그만 좀 해. 아프다는 애 붙들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말렸다. 편했다. 진작 그에게 한 대 맞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말은 그렇게 끝이 났다. 며칠이 무난했고 어느 날은 지옥 같았다. 버틸만한 나날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일찍 눈이 떠졌다. 빗소리 때문이었다. 좀 더 잘까 하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마치고 준비를 하는데 어머니가 우울한 목소리로 조지현을 불렀다.
“오늘은 혼자 가.”
“네.”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밥은 알아서 챙겨먹고.”
“알겠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녀는 변명처럼 중얼거리며 도로 침실로 들어갔다. 조지현은 얼른 방으로 가서 가방을 챙겼다.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이라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자 어머니가 나와서 벌써 가니, 하고 묻는다.
“네. 일찍 가려고요. 비도 오고.”
“그래. 오후에도 비오면 못 데리러 갈 거 같아.”
그녀는 비가 오는 날에는 유난히 힘들어 했다. 머리가 쪼개질 듯한 편두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온갖 병원을 가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스트레스성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의사를 비난했다. 돈을 받으면서 제대로 된 병명 하나 찾아내지 못한다고. 분명히 머리가 아픈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녀는 믿었다. 조지현은 그녀의 두통이 외조부와 외삼촌의 죽음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자살을 한 날에 공교롭게 비가 왔다.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스트레스가 되어 두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학교 끝나면 바로 와. 다른 데 가지 말고.”
“알겠습니다.”
뒷말이 더 붙기 전에 조지현은 우산을 들고, 얼른 현관 문고리를 비틀었다. 초조하게 엘리베이터의 전광판 숫자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우산을 펴고 빠르게 걸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는 뛰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들어서는 버스가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올라탔다. 버스카드를 찍고 고개를 돌렸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강석원이 조지현을 발견하고 눈을 치뜬다. 조지현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쩐 일이야.”
“일찍 나왔어요.”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둘을 제외하고는 맨 앞에 앉은 한 명이 전부였다. 조지현은 버스 단을 올라가 강석원의 옆에 앉았다. 그가 조금 놀란 눈으로 조지현을 본다.
“불편하시면 자리 옮기겠습니다.”
조지현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 했다.
“아니.”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붙든다.
“옮기지 마.”
조지현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비 때문인지 정류장에 도착해도 버스에 올라타는 승객은 없었다. 한산한 버스 천장을 빗소리가 쉼 없이 두드렸다.
“귀는 어때.”
“다 나았어요.”
“그래도 무리하지 마. 기침할 때 조심하고.”
“네.”
오랜만에 함께 하는 등교였다. 버스가 신호에 걸린다. 조지현은 처음으로 신호마다 차가 멈추길 바랐다.
“비 많이 오네요.”
조지현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응.”
언제 눈으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조지현은 속으로 강석원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짜를 헤아린다.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버텼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살얼음 같은 평화였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눈 오면 좋을 텐데.”
“눈 좋아하세요?”
조지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강석원이 특별히 날씨에 대한 호오를 보인 적이 없던 터다.
“너랑 보고 싶어서.”
무심한 듯한 말이 툭 던져진다. 얼굴에 열감이 오른다. 조지현은 시선을 어물거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너희 교실로 가려고 했어.”
“네? 왜요?”
그날 이후로 항상 점심을 같이 먹었다. 요즘 밖에 나가지 못하는 탓에 두 사람이 유일하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강석원이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건넸다.
“낮에 어디 갔다 와야 해서.”
어디, 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분명 중요한 자리일 것이다.
“오늘 학교 안 오셔도 되는 거 아니었어요?”
강석원이 말없이 웃는다. 어제 점심시간까지만 해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분명 직전에 잡힌 약속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도 따끈한 도시락 통의 온기에 조지현은 가슴이 묵직해진다.
“빈 도시락 통은 내가 받으러 올게. 6교시 끝나면 그 교실로 와.”
“……. 감사합니다.”
“대신 남기지 말고 다 먹어.”
넌 너무 말랐어. 강석원이 설핏 눈가를 찌푸린 채 말한다.
“네. 안 남기고 다 먹을게요.”
조지현은 도시락을 가방에 넣었다. 조지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선배님, 하고 그를 부른다.
“왜.”
“선배님 생일이 언제세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묻지 않았다. 강석원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말씀하시기 곤란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좀 곤란하긴 하네. 강석원이 눈을 살짝 내리감은 채 중얼거린다.
“12월 2일.”
대답을 들은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치뜬다. 보름도 남지 않았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그동안 너무 받기만 해서 선물이라도 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강석원의 생일도 안 챙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묻지 않았으면 그냥 모른 채 지나갈 뻔했다.
“그날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할까 했지.”
강석원다운 방식이었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조지현의 물음에 강석원이 아니, 하고 대답한다.
“괜한 데 돈 쓰지 마.”
“괜한 데 아닙니다.”
“필요한 거 없어. 진심이야.”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에게 닿는다. 열렬한 연심이다. 그 단순한 말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조지현은 읽는다.
“그래도, 뭐든 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받기만 하는 기분이라…….”
강석원이 슬쩍 웃는다.
“나도 받고 있어, 충분히.”
버스가 우회전 신호를 기다린다. 이번 신호만 지나면 학교 앞 정류장이었다. 두 사람은 가방을 챙겨 내릴 준비를 했다. 강석원이 그거, 하고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연다.
“그거 갖고 싶어.”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석원을 돌아본다.
“편지.”
“무슨 편지요?”
“네가 손으로 쓴 편지.”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 글씨를 좋아했다. 두 사람이 필담을 나눈 수첩에서 몇 장 뜯어갔을 정도로.
조지현이 말없이 웃음을 삼켰다.
“써드릴게요, 많이.”
“그래.”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어 섰다. 조지현이 우산을 펴며 버스 계단을 내려온 순간, 돌풍이 불었다. 조지현의 우산대가 부러지면서 우산이 뒤집혔다. 바로 뒤따라 내린 강석원이 우산을 펴서 건넸다.
“아니요, 괜찮…….”
거절을 할 사이도 없었다. 강석원은 우산을 손에 쥐어주고 그대로 내달린다. 눈 깜짝할 새에 강석원은 학교 교문을 지나 안으로 사라진다. 조지현은 우산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아직 손잡이에 남은 그의 온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23번. 23번 누구야.”
옆에 앉은 홍순일이 조지현의 팔을 툭, 쳤다. 조지현이 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냐.”
“죄송합니다.”
“애인 생각해? 나와서 이 문제 풀어.”
애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조지현은 벌게진 목덜미를 문지르며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분필을 들고 망설임 없이 수식을 써내려갔다.
“저 새끼 글씨, 진짜 존나 꼴리게 쓰지 않냐?”
“글씨로 충분히 남자 꼬시겠다.”
키득이는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전처럼 노골적인 욕설을 퍼붓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놀리는 것은 여전했다. 조지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수식을 완성했다.
“잘했다. 공식이랑 풀이까지 완벽해. 넌 그런데 진짜 나중에 조지현체 만들어서 팔아라. 아까워서 지우지도 못하겠네.”
조지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수학 선생은 조지현이 푼 문제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책상 옆에 세워둔 우산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남색 체크무늬 우산.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우산이었다. 조지현은 우산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성큼성큼 뛰어가던 강석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를 생각하면 늘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혹시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우산이 펼쳐졌다. 교실에 있던 시선이 일제히 조지현에게 몰렸다. 조지현은 당황해서 우산을 도로 접었다. 손잡이를 톡톡 두드린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버튼을 누른 것이다.
“조지현. 왜 이렇게 오늘 하루 종일 넋이 나갔어. 그 우산이 애인이라도 돼? 아까부터 왜 그렇게 우산만 쳐다보고 있어.”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우산 들고 나가서 서 있어.”
조지현은 수학 선생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우산을 들고 교실 뒤로 나갔다. 수업이 재개되었다. 조지현은 우산을 쥐고 선 채로, 수업을 들었다. 종이 울렸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다들 지하 식당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꺼냈다.
“웬 도시락? 너 급식 아니야?”
누군가 지나가며 알은척을 했다. 조지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냥, 하고 대꾸했다. 교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반찬통을 하나하나 열었다. 모두 조지현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담겨 있다. 심지어 영양학적으로 치우쳐있지도 않다. 커다란 몸으로 싱크대에 서서 아침부터 도시락을 준비했을 남자를 떠올리자 뜨끈한 것이 목을 훑는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조지현은 밥과 반찬을 차례대로 먹었다. 혼자 다 먹기엔 과한 양이었지만 천천히 조금씩 삼켰다. 과식을 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점심시간을 오롯이 식사를 하는 데 사용한 적은 처음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쓸 편지를 생각했다. 편지지는 무슨 색으로 할지, 펜으로 쓸지, 볼펜을 사용할지, 아니면 연필이 나을지, 펜으로 한다면 무슨 색 펜을 고를지. 서두는 뭐라고 하면 좋을지 등.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이토록 머릿속이 부산스러운 일인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문득, 그날 읽지 못하고 버렸던 강석원의 편지가 떠올랐다. Dear. George라고 적은 그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쓰여 있었을까. 펜으로 썼을까. 아님, 연필? 편지지는 무슨 색이었을까. 서두는 무슨 말을 했고 마지막 인사는 무슨 내용이었을까. 다시는 읽을 수 없는 편지를 혼자 추측하며 조지현은 강석원을 생각했다. 길 건너에 서 있던 그를.
“끝났다! 집에 가자!”
큰 소리로 교실 저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조지현은 놀라서 벽시계를 보았다. 벌써 6교시가 끝나 있었다. 조지현은 얼른 도시락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강석원이 고개를 돌린다.
“왔어?”
“네. 일은 다 마치신 거예요?”
“응.”
그의 손에는 상패가 들려 있다. 얼핏 봐도 평범한 게 아니었다.
“상 받으신 거예요?”
그는 슬쩍 웃으며 책상에 아무렇게나 상패들을 올려두고 조지현에게 다가선다.
“입맛에 맞아?”
몇 번을 먹어도 항상 그는 그렇게 물어주었다.
“맛있었습니다. 감사해요.”
조지현은 도시락 통을 내밀며 선배님, 하고 그를 부른다.
“왜.”
“이제 집으로 가실 건가요?”
“그렇지.”
수능이 끝난 3학년은 5교시까지가 전부였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강석원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조지현의 어머니가 하교시간마다 교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것이다.
“오늘 안 오실 거예요.”
조지현은 창밖을 확인했다. 아직도 비가 내린다.
“너 오늘 보충 있잖아.”
강석원의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매번 확인을 할 때마다 놀랐다.
“땡땡이칠 겁니다.”
조지현의 거침없는 발언에 강석원이 급기야 웃음을 터트렸다.
“한 시간정도밖에 여유 시간은 없지만,”
같이 있고 싶어요.
조지현이 속삭이듯 말한다. 강석원이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가서 가방 챙겨갖고 올게요. 학교 현관에서 봬요.”
강석원이 교실을 나가려던 조지현의 팔을 붙든다.
“뛰지 마. 넘어져.”
갓 걸음마를 뗀 아이를 보는 표정이다.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그와의 입맞춤은 한여름에 만나는 폭우와도 같다. 억누르기 힘든 격정이 실린다.
“걱정 돼.”
서로 코끝이 닿는다.
“눈앞에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계속 걱정 돼.”
강석원이 조지현의 입술을 닦아주며 말한다.
“오늘은 운이 좋네. 등교도 하교도 같이 하니까.”
“그러게요.”
“현관에서 보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현이 먼저 교실을 나왔다.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뛰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느라 힘들었다. 가방을 챙겨들고 우산을 넣으려는데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무늬라 혹시 누군가 헷갈려서 가져간 게 아닌가 싶어 짝을 붙들고 물었다.
“여기 있던 우산 못 봤어?”
“아니. 못 봤는데.”
“남색 바탕에 체크무늬야.”
“어? 그거 아까 쓰레기통에서 본 거 같아. 저거 아니야?”
누군가 교실 뒤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조지현은 달려가서 쓰레기통을 뒤졌다. 살이 모두 부러진 우산이 안쪽에 처박혀 있었다.
대체 누가…….
조지현은 고개를 돌렸다. 최기열이 이쪽을 보다가 몸을 돌린다. 화도 나지 않는다. 조지현은 망가진 우산을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대로 교실을 나왔다.
현관에서 기다리는 강석원이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린다.
“가자.”
조지현이 머뭇거리면서 그를 따라나서지 못했다.
“왜?”
“죄송합니다.”
강석원이 눈가를 좁힌다.
“우산, …….”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당신이 건네준 그 우산을, 수업 시간 내도록 그 단순한 무늬를 눈으로 하나하나 더듬듯이 확인했던 우산을, 최기열이 망가트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잃어버렸어?”
강석원의 질문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인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는 항상 그랬으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강석원이 빗속으로 뛰어간다. 잡을 틈도 없었다. 그가 마음먹고 달린다면 자신은 절대로 그를 잡을 수 없음을, 조지현은 새삼 깨닫는다. 마음을 돌린 강석원도 마찬가지다. 우울한 생각은 그만하자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주룩주룩 쉴 새 없이 내리는 비가 반가웠다. 강석원의 말대로 운이 좋은 날이었다. 문득 문학시간에 배운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조지현은 쓴웃음을 삼켰다.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소설이었던 터다. 괜한 생각이다.
학교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조지현은 내리는 빗물을 보며 멍하니 남자를 기다렸다.
“지현아.”
처음에 제 귀를 의심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송곳처럼 살갗 표피를 파고든다. 불안이 빚은 환청을 들은 거라 여겼다. 그러나 우산을 들고 다가오는 여자를 보는 순간,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는다.
“……, 왜 오셨어요.”
“왜 오긴. 내가 못 올 데 왔어?”
자다가 끌려나온 사람처럼 짜증이 잔뜩 섞인 표정이다. 조지현은 눈을 껌뻑였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침에 안 오신다고 하셔서…….”
“그냥 왔어. 빨리 가자.”
그녀가 겉옷을 추스르며 고갯짓을 한다. 조지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왜 그래?”
“……보충 수업 하나 남아있어요.”
“그래? 그랬던가,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럼 넌 왜 여기 나와 있어?”
“몸이 안 좋아서요. 그냥 갈까 했습니다.”
차라리 들어가라고 말하길 기다렸다.
“하는 수 없지. 가자.”
하지만 여자는 무슨 변덕에서인지 조지현에게 다시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조지현은 어쩌지 못하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 우산은?”
우산 없이 걸어오는 아들을 보며 여자는 눈가를 찌푸렸다.
“망가졌어요.”
“거짓말하지 마. 어디 잃어버린 거지? 넌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어. 틈만 나면 거짓말. 지 애비랑 똑같지.”
사실을 말해도 본인의 기분이 나쁘면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늘 거짓말로 치부했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비닐우산을 두 개 든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우산을 쓸 틈도 없이 그는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빨리 따라와. 누굴 닮아서 그렇게 굼떠.”
어머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친다. 조지현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너를 데리러 오잖아. 그런 엄마가 어디 흔한 줄 알아?”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힘없이 인사했다. 강석원의 옆을 지나쳤다. 빗소리가 들린다.
“너는 그래. 똑 부러진 것 같으면서 어디 한군데 나사가 풀려있어. 그게 걱정이야, 엄마는.”
여자의 의미 없는 혼잣말이 이어진다. 조지현의 신경은 온통 뒤에 쏠려 있다. 남자의 발소리가 들린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는 천천히 걷는다. 반듯하고 규칙적인 발소리.
“엄마는 헛소문 같은 거 안 믿어. 아들 믿으니까. 내 아들이 그럴 리 없어. 넌 절대 그런 더러운 짓 안 하잖아. 그렇지?”
여자가 뒤돌아본다. 조지현은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친다. 이성으로 어쩌지 못하는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날카로운 제동소리, 도로에 퍼지던 피, 비명소리, 사이렌, …….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닙니다.”
“빨리 따라 와. 늦장 부리지 말고.”
조지현은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여자에겐 결벽증이 있었다. 젖은 아들을 제 우산 안으로 들여보내줄 리 없다. 11월의 비는 뼈에 한기가 스밀 정도로 차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강석원이 어떤 표정일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떠올리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당황과 공포로 마비된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다. 강석원을 지켜야 한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여자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조지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옆에 선 남자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우산을 쥐고 있다. 버스가 도착했다. 어머니는 우산을 접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조지현은 버스에 오르기 전에, 간신히 강석원을 쳐다본다.
“뭐해. 안 타고.”
여자가 손짓을 한다.
오지 마세요.
조지현은 그에게 눈짓하며 버스에 탔다.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으려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버스에 오르는 기척이 들린다. 조지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앉아.”
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가 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조지현은 여자가 시키는 대로 가방을 내리고 앉았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강석원은 두 칸쯤 떨어진 곳에 앉는다.
“너 최기열이라고 알지? 걔 아빠가 대의 기업 사장인 건 알고 있어?”
“모릅니다.”
“모르면 이 기회에 알아둬. 너희 아빠랑 동업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너도 걔랑 친해지란 말이야. 나랑 숙현이 봐. 고등학교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사이가 좋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년저년 하고 욕을 퍼붓던 상대가 지금은 절친한 동창이 되어 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이유도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은 이해하길 포기하는 순간 오히려 읽기가 쉬워진다.
“너 걔랑 같이 공부하는 건 어때? 저번에 말한 과외 같은 거.”
“싫어요.”
조지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왜 싫어?”
“성적 떨어집니다.”
“안 떨어지면 되잖아.”
“…….”
“안 떨어지게 두 배로, 세 배로 하면 되잖아. 왜 해보지도 않고 약한 소리 해?”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안 해?”
“싫습니다.”
“싫어도 해. 엄마 말 들어. 넌 내 아들이잖아.”
“부모라고 해서 모든 걸 결정할 권리는 없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손이 떨렸다. 혼자일 때는 상관없다. 강석원의 앞에서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권리?”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왜 없어. 넌 내가 낳았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혐오가, 날카로운 예기가 손톱을 드러내고 연약한 살을 들춘다.
“아이를 낳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알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진저리친다. 제가 낳은 게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라 괴물이라도 되는 듯이.
“뱃속에서 꿈틀거릴 때부터 기분 나빴어. 네가 하는 게 결국 내가 먹는 걸 뺏어먹는 거잖아. 커다란 기생충.”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강석원의 손이 보인다. 우산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죽어버렸으면 했어.”
그녀가 아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한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난 네가 죽었으면 했어. 그래서 병원에 갔었어. 아이를 어떻게 죽이는 줄 알아? 기계를 넣고 갈아버리는 거야. 그러고 나서 조각난 뼈를 빨아내는 거지.”
“……, 그만하세요.”
조지현이 말렸지만 여자는 듣지 않는다.
“그런데 안 된대. 네가 너무 커버려서, 이미 너무 커서 없앨 수가 없다잖아. 그러면서 초음파 사진을 보여줬는데 나랑 너무 똑같이 생긴 거야.”
여자가 낮게 웃었다.
“의사가 보면서 얼마나 예쁘겠는지 상상해보라더라. 소름끼쳤어.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한 네 사진, 보는 거.”
조지현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느끼던 감정이었다.
“그냥 뱃속에 있을 때 죽어버렸어야 했어. 사지를 잘라서. 더 어릴 때, 병원에 가서 너 같은 건 없애야 했는데.”
“…….”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아들의 존재를 부정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저주에 가까운 폭언은 이제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다. 이 모든 것을 강석원이 듣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할 뿐이다.
자신이 열이 나면 옆에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이마를 쓸어내려주고, 악몽에서 진저리치고 일어나면 그 불안을 밤새 도닥여줬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는 자신을 끌어안고 물을 마시게 하고, 죽을 넘겨주고, 밥을 먹여, 피와 살이 돌게 했다. 함께한 시간 동안 그는 진심을 다해 자신을 길러주었다. 부모에게조차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으며 조지현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을 그로부터 배워갔다. 아이에게 걸음마를 알려주듯 하나하나, 남자는 인내심을 갖고 자신을 사랑해주었다.
그런 강석원 앞에서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죽인다.
“네가 없었다면 내가 오늘 이따위로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권리? 권리가 왜 없어.”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 제가 당한 오욕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버스가 신호에 걸린다. 다음 정류장에 내려야 했다. 비에 젖은 몸은 아까부터 으슬으슬 떨린다.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집에 가서 보자.”
그녀가 선전포고를 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벨을 누르자 버스가 멈춰 섰다. 조지현은 가방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강석원의 옆을 지나갔다. 여자가 우산을 펴고 버스에서 내렸다. 강석원은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힘줄이 온통 도드라진 손이 보인다. 참담한 심정에 말도 붙일 수 없다.
“뭐해. 안 내리고.”
어머니가 아래서 소리친다. 조지현은 버스 봉을 쥐고 계단을 내리려 했다. 그 순간 거센 힘이 뒤에서 그를 잡아당긴다.
“가지 마.”
강석원이 자신을 붙든다. 무표정한 얼굴인데 그가 울 것만 같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무너져 내린다.
여자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진다. 그녀가 뒤에 선 강석원을 바라본다.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이 너, 하고 벌벌 떨리는 손을 올린다.
“내릴 거야. 말 거야?”
버스 기사가 물었다.
“안 내립니다. 출발하세요.”
강석원이 소리 질렀다. 기세에 눌린 기사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버스 밖에서 빽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버스 문이 닫혔다. 그녀가 버스에 도로 올라타려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한 뒤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은 채로 제 옆에 앉힌다.
새파랗게 질린 조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타고 미처 닦지 못한 빗물이 흘러내린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는다. 조지현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강석원의 표정이 굳는다.
“미안해.”
그가 사과한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멋대로 굴어서, ……미안하다.”
그가 참괴감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는다.
조지현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부모를 가진 자신은 응당 이런 일을 당하는 게 마땅하지만 강석원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런데 도저히, 못하겠어.”
“…….”
“너 못 보내겠어.”
정류장까지 오면서 우산 한 번 씌워주지도 않고 비를 고스란히 맞게 하던 여자가 아들에게 쏟아 붓던 말은 폭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상대가 텅 빈 눈을 하고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참담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내가 어떻게든 할게.”
강석원은 오늘 평생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때리면 안 된다, 해 끼치면 안 된다, 손자를 볼 때마다 노인이 누누이 이르던 말이었다. 그나마 쓰레기가 되지 않고 자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쓰레기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러니까…….”
강석원이 조지현을 붙들고 간청한다.
조지현에게 약속했다. 같이 살자.
일 년을 버텨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머리카락, 손가락, 눈썹, 손톱, 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매일 조지현은 그곳으로 돌아갔다. 조지현을 거기까지 배웅해준 것은 자신이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조지현을 그곳에 버려둔 것뿐이다.
“선배님.”
조지현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소리를 낸다.
“응.”
“……, 그만해요.”
조지현이 웃는다. 희미하게.
“그만해야 해요, 이제. 전 여기서, 내릴게요.”
조지현이 강석원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나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아챈다.
“나 싫어졌어?”
“…….”
“나 싫어져서 내리는 거면, 보내줄게.”
강석원의 눈빛이 살갗을 뚫는다. 뜨끔한 감각이 피를 타고 전해진다. 서서히 퍼져간다.
“그거 아니라면 너 못 내려.”
강석원의 진심이 무거운 추를 단다. 팔다리가 묶인다. 애초에 그를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그게 이 잔인한 게임의 법칙이었다.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헤어질 것이다. 최악의 방법으로.
“싫어졌어?”
강석원이 묻는다.
“……, 그렇다고 하면 믿으실 겁니까.”
“진심으로 말한다면.”
“선배님이, ……, …….”
강석원의 손에 들린 우산이 보인다. 두 개의 비닐우산. 정류장으로 오는 내도록 그는 그중 하나조차 펴지 못했다.
결국엔, 이렇게 될 것을.
“……, 싫어요.”
치미는 감정을 삼킨다.
“그냥 다 지칩니다. 싫어졌어요. 그러니까, 내리겠습니다.”
“내가 싫어진 거라고 말해.”
“싫어요.”
“똑바로 보고 말해.”
“……, 싫습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턱을 쥐고 제 눈을 바라보게 한다. 조지현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하지 마. 입술 다쳐.”
강석원이 입술을 벌리게 한다. 이 와중에도 남자는 끝 간 데 없이 다정하다.
“내가 싫어?”
강석원이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한다. 더없이 열중한 눈을 하고. 그의 시선은 모든 것을 해체한다. 연약한 방패를 뜯어내고 철책을 부숴 버린다. 그 안에 남은 것은 어리석고 멍청하게 같은 과오를 저지르는 어린아이다. 그를 밀어내려 하면서 그를 놓칠까봐 벌벌 떠는.
“……, 못 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비를 맞아 새파랗게 질린 조지현의 입술이 떨린다.
“싫어한다고, 어떻게 제가, ……선배님을,”
이번 생의 모든 시간을 쏟아 그의 안녕을 위해 사용한다 해도 부족하다. 그저 그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자신이 바라는 전부였다.
“됐어.”
강석원이 조지현을 안는다.
됐어. 지현아. 그거면 됐어.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그는 조지현의 어깨를 도닥인다. 메트로놈처럼 단조롭고 규칙적인 그의 손길에 조지현은 끔찍할 정도로 안도하고 만다. 본능처럼 그에게 기대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이기다.
쏟아지는 비가 차창 밖의 세계를 적셨다. 물먹은 도시가 달리는 버스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늘어졌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쥐고 있는 게 전부였다.
차창 밖의 세계가 오렌지 빛 노을에 불타기 시작했다. 이대로 세상이 불속에 스러져 버리면 좋을 텐데. 그런 끔찍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버스는 종점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늘 씻고 나오면 그는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주곤 했다. 오늘은 수건도 선풍기도 없다.
“얘기 좀 하자.”
조지현은 강석원의 앞에 앉았다. 그는 통장 몇 개와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내가 가진 거. 전부.”
“…….”
“너 대학은 보낼 수 있어.”
낡아서 끝이 나달나달한 통장이 누구의 것인지 이름을 들춰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돈, 허투루 쓰지 마세요.”
“허튼 데 사용하는 거 아니야.”
“선배님.”
조지현이 강석원을 가만히 부른다.
그의 자취방으로 오는 길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을 쥐고 걸었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봐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조지현도 묵묵히 그의 옆을 걸었다. 타인의 시선이나 수군거림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쥔 남자가,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랐다.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신다고 했잖아요.”
“……, 그래.”
“그럼, 이건 갖고 계세요. 저 대학 안 갑니다.”
“조지현.”
“제가 벌어서 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할 줄 아는 거 공부밖에 없어서 나중에라도 꼭 갈 테니까.”
조지현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저한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법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 신분을 살 시간. 그때도 지금도 절실히 필요한 하나였다.
“일 년을 더 기다리라고?”
그렇게 묻는 강석원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는다. 버스에서 조지현을 붙들었을 때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아니요.”
조지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를 따라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같은 실수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똑같은 불행에 강석원을 밀어 넣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몇 시간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습니까.”
조지현이 웃으며 강석원을 본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기다릴게, 얼마든지. 그가 한숨처럼 토해내는 말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가 했던 대로, 천천히 규칙적으로 불안을 다독인다.
강석원의 불안과 상실감, 좌절감.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의 강건함에 가려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조지현은 한참 동안 강석원의 어깨를 다독였다.
“꼭 혼자 가야 해?”
“네.”
조지현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을 반복한 대화였다.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지금쯤이면 아버지 오셨어요.”
강석원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벌써 아파트 현관에서 실랑이만 삼십 분째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현아, 그냥…….”
강석원은 그냥 말없이 어디론가 떠나자고 했다. 일 년이면 자신이 어떻게든 하겠다고. 조지현은 여자의 성격을 안다. 뱀처럼 교활하고 집요했다. 체력이 좋지 않은 자신이 몇 시간이고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는 집중력은 모두 그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일 년이 지난다고 포기할 성격이 아니다. 게다가 강석원은 당장 세 달 뒤 열리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그 뒤가 올림픽이다. 자신이 포기하는 일 년과 강석원이 포기하는 일 년의 무게는 차원이 달랐다.
“제가 잘 말씀드리고 올게요.”
도망간다 해도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꼬이고 꼬인 매듭은 풀어낼 수 없으니 잘라내야만 한다.
“그럼, 이거 가져가.”
강석원이 제 핸드폰을 조지현에게 건넨다.
“무슨 일 있으면 신고해.”
“알겠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강석원과 약속한 게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파트 현관까지만 같이 갈 것. 여자와 강석원이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강석원이 사고를 당한 장면이 끊임없이 재생된다. 처음에는 아예 자취방에서 기다려달라고 말했지만, 강석원이 한사코 반대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저 이제 들어갈게요.”
강석원이 못내 안타까운 얼굴로 이를 사리문다.
“선배님.”
조지현이 그를 불렀다.
“응.”
“오늘 돌아가면, …….”
조지현이 어, 하고 시선을 들었다. 잦아들던 빗줄기 대신 희끗희끗한 눈발이 흩날린다.
“눈 와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고개를 돌린다. 첫눈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만큼 약한 눈발이었다. 그런데도 조지현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한참을 그걸 올려다보았다.
강석원과 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봄과 여름, 가을을 거쳐 겨울의 문턱이다. 그와 사계절을 보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이 밀려든다.
“올해 첫눈이네요.”
“응.”
아침에 버스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정말 첫눈이 내린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첫눈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같이 있을 때 봐서 다행이에요.”
첫눈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리기 때문이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그와 같이 보내는 일상은 지금의 자신에게는 기적이었다.
“앞으로 계속 같이 있을 거야.”
강석원의 시선은 어느새 조지현에게 멈춰 있다. 남자의 등 뒤로 하얀 눈이 흩날린다.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 돌아가면, 선배님하고 밤새 얘기하고 싶어요.”
“밤새?”
“무리일까요?”
둘 다 말이 없는 편이었기에 말하는 시간보다 침묵이 길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문득 문득 대화의 사이에 고요가 찾아든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특별한 언어가 된다.
“힘내볼게.”
강석원의 대답에 조지현이 웃음을 삼키며 공동 현관의 비밀 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렸다. 강석원이 지현아, 하고 부른다. 조지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언제까지 그를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의 층수를 눌렀다. 문이 닫히기 전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조지현은 웃어보였다. 그가 안심하길 바랐다.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심장소리가 커졌다. 강석원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이성을 짓누르는 공포는 어쩌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숨을 고른다.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끊임없이 되뇌었다. 강석원을 지켜야 한다. 그 결심을 수차례 되새기며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나자 여자의 발작적인 고함이 들려왔다.
“너 어디 갔다가 지금 오는 거야!”
집안이 엉망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가져와 내던진 책과 옷이 거실에 널브러져 있다. 아버지는 지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거냐고. 당장 말 못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그래, 앉아라.”
어머니에게 이미 뭔가 들었는지 무거운 목소리다. 조지현은 신발을 벗고 거실에 앉았다.
“무슨 얘기? 너 아까 걔 누구야? 누구냐고! 당장 말해!”
“목소리 낮추세요.”
“뭐?”
“소리 지르지 않으셔도 다 들립니다.”
조지현의 뺨이 돌아간다. 여자가 손을 치켜들며 눈을 부라린다. 조지현은 그런 여자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늦기 전에 병원 가셔야 할 겁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굳는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너!”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 겁니까.”
“조지현!”
어머니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조지현은 아버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삼촌이 병원 치료 받다가 자살하신 건 치료가 너무 늦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너 미쳤어? 지금 누구한테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어머니가 조지현의 머리채를 움켜쥔다. 조지현은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어머니가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저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뭐?!”
“어머니가 그동안 제게 하신 일 병원 기록, 사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손찌검을 한 날, 지하철 즉석 사진기에 들어가 부어오른 얼굴을 찍어 기록했다. 집에 두면 혹시라도 빼앗길까 봐, 학교 사물함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짓궂은 놀림은 이어졌지만 전처럼 사물함을 뒤져 쓰레기를 채워놓거나 책을 버리는 일은 이제 없었다.
“너, 대체 지금…….”
“지금 대화도 다 녹음중입니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약한 것이 반기를 들어 저를 물어뜯자 패닉에 빠진 것이다.
“미성년자도 학대받은 증거가 명확할 경우, 친권 박탈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친권 박탈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히나 그랬다. 자기 또래의 남학생이 그런 판결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부모 중 하나가 정상이라면 두 사람 모두의 친권이 박탈되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무한 도돌이표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는, 고지해줄 필요가 있었다.
“너, 지금, 남자랑 그 짓거리를 하고 싶어서 부모를 버리겠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조지현의 명확한 대답에 여자가 손을 치켜 올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쉽게 내려치지 못한다.
“지현아.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아냐?”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연다.
“알고 있습니다.”
“너 사춘기라 그래. 잠깐 혼돈이 와서 그런 거다. 아무리 그래도 앞뒤 구분 못하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어디 천륜을 네 말대로 그렇게 쉽게 끊어.”
“그럼 제가 죽어야 끊으실 건가요?”
조지현이 물었다.
“그래! 죽어! 너 같은 거 죽어버려!”
어머니가 부엌으로 달려가서 칼을 꺼내든다. 조지현은 피하지 않고 여자가 휘두르는 대로 놔두었다. 새파란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조지현의 뺨을 스친다. 아버지가 제 아내의 손을 뒤에서 잡는다.
새카만 벌레가 점점이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온다. 병든 정신이 만들어낸 허상이 온몸을 갉아댄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의 장기가 구역질에 휘말려 뒤틀린다.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너 같은 거 낳지 말았어야 해!”
“그러시지 그랬어요.”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선택한 부모도 아니었다. 태어난 순간, 이미 가족이 되어 있었다. 서로에게 비극이었다.
“저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계속 생각했었습니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여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는다. 남자 좋아서 어미 버리는 더러운 새끼, 걸레 같은 새끼, 개돼지한테 강간당해도 좋아할 새끼, 역겨운 호모새끼. 정상인이라면 떠올리지도 못할 욕들을 토해낸다.
“개만도 못한 새끼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키우세요.”
“조지현!”
아버지가 여자를 끌어안은 채로, 눈을 사납게 부릅뜬다.
“후회할 말 하지 마라.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지금 네 감정이 전부인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그따위 거 아무것도 아니야.”
“제가 후회하는 건,”
조지현이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아직도 강석원은 그곳에 서 있을까.
“……, 조금 더 일찍 왜 이 말씀을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겁니다.”
강석원을 만나기 전, 했어야 할 일이다. 그가 휘말리지 않도록.
아버지가 경악에 찬 눈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집 나갈 겁니다. 그게 싫으시면 죽이세요.”
조지현이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여자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강석원의 앞에서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었다. 소중한 것을 눈앞에서 빼앗기는 비참함을 맛보여주겠다고. 어떻게든, 너를 그 새끼 앞에서 죽여 버리겠다고.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협박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그녀는 알고 있다.
“지금 여기서 죽이시면 됩니다.”
그런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면,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서 끝내고 싶었다. 적어도 강석원의 몸은 다치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찾아 헤매는 일 따윈 없도록. 조지현은 무릎을 꿇은 채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조지현, 너희 엄마 아픈 사람이야. 왜 그런 말로 자극을 해.”
“내가 왜, 어디가 아프다고! 당신 지금 쟤가 하는 얘기를 듣고도 그래?”
여자가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남자가 난감하다는 듯이 여자를 끌어안고 달랬다.
“울지 마. 몸도 약한 사람이, 자꾸 그러면 몸 축나. 병원에서도 그랬잖아.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몸이 아파서 찾아간 병원에서는 모두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그걸 여자는 저 좋을 대로 스트레스라는 단어만 골라서 받아들였다. 여자가 숨넘어갈 듯이 울면서 바닥에 쓰러진다. 그녀에게는 세상의 모든 비극을 합친 것보다 지금의 자신이 가장 가여울 것이다.
“그럼 제 손으로 죽을까요?”
조지현은 어머니가 쥔 칼을 빼앗아 들었다. 여자가 달려들어 칼을 낚아챈다.
“안 돼! 지현아, 안 돼!”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가장 소름끼치는 비극은, 여자는 아들을 제 나름대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끔찍한 사실이다.
“왜 네가 죽어. 내 아들이, 왜! 안 돼.”
가여운 여자다. 곱게 미치지 못해, 가여울 따름이다.
“내가 잘할게. 응? 지현아, 엄마가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랬어. 너 다 잘되라고 그런 거야. 엄마 맘 알잖아?”
여자가 조지현의 손을 붙든다. 혐오가 전신을 타고 퍼진다. 조지현은 그녀의 손을 떨궈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사랑하기 전에는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사랑받을수록, 그리고 사랑할수록, 어머니의 행동은 점점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저는 나가겠습니다. 계속 여기 있으라고 하실 거면 차라리 죽이세요. 죽는 게 낫습니다.”
조지현은 새파란 식칼을 가리켰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사색이 된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들은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모범생이었다. 조용하고 반듯한 소년이 처음으로 드러낸 모습에 둘 다 당혹감을 넘어선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건 열여섯 살이었다.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해 팔 년을 쫓아다녔고 그렇게 결혼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광기와 아버지의 순애가 빚어낸 결과가 자신이었다. 자신에게는 두 사람의 피가 모두 흐른다. 그 사실을, 부모는 간과하고 있었다.
“찌르실 겁니까?”
조지현이 물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그런 거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석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 분 일 초가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져갈 그의 불안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조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안 돼! 못 가!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을 누가 데리고 가!”
여자가 아들의 팔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당신 아들 죽었어요!”
조지현이 소리 질렀다.
한 번도 언성을 높여본 적 없는 아들로 살았다. 개처럼 맞아도, 온갖 욕설을 들어도, 착하게 어머니에게 순종했던 아들로.
“당신이 죽였잖아요. 뱃속에 있을 때, 자고 있을 때, 칼을 휘둘렀을 때! 몇 번이고 죽였잖습니까.”
그런 아들을 어머니는 너무도 쉽게 죽였다.
“너 왜 그래, ……지현아, 너 대체…….”
“살고 싶어서요.”
조지현은 시뻘건 눈으로 제 어미를 노려보며 말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느 순간보다 더, 절실하게 삶에 대한 욕구가 치솟는다. 강석원과 보내는 평범한 시간이 쌓여갈수록 더욱 그랬다.
“살고 싶어서, 그럽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살고 싶어진다.
“나가.”
아버지의 나직한 음성이 뒤따른다.
“이제 우리도 너 같은 아들 없다고 생각하고 살 테니까, 나가.”
“여보!”
“나가. 당장.”
아버지가 현관을 가리킨다. 그에게 지금 조지현은 제 아내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신발을 신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여자의 울음소리가 멀어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바싹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문이 열리고 여자가 달려들어 칼을 찔러 넣을 것만 같다. 끔찍한 공포가 심장을 들쑤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컨베이어 벨트가 구웅구구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기계를 아래로 내린다. 조지현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당장에라도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시야가 까맣게 점멸을 반복하고 피가 서늘하게 식는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자신은 엘리베이터 바닥에 주저앉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지현!”
강석원이 유리로 가로막힌 현관 밖에서 자신을 부른다. 현실이다. 어디론가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강석원에게로 돌아왔다. 조지현은 그제야 눈을 깜빡이고 느릿하게 웃었다. 몸을 일으켰다. 현관까지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다리가 휘청거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공동현관 앞까지 갔다. 센서가 작동해 문이 열리자 강석원이 조지현을 와락 끌어안는다. 강석원의 품에서 온전한 숨을 내쉰다. 조지현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다친 데는?”
“없습니다.”
“……, 미안해.”
“뭐가 미안합니까.”
“혼자 보내서.”
조지현이 흐릿하게 웃었다.
“다시는 너 혼자두지 않을게.”
약속의 말이 더해진다. 이전의 기억들이 겹겹이 쌓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조지현은 몸을 흠칫 떨었다.
“왜 그래?”
“아닙니다.”
속이 좋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났는데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강석원이 창백해진 조지현을 초조하게 바라본다.
“집으로 가자.”
“네.”
여기서 일 초라도 빨리, 일 미터라도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였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불안에 내쫓겨 몸을 움직였다. 현관을 벗어나 화단을 지나는 순간, 고함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점이다. 하나의 점이 툭, 시야에 들어온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점의 크기가 커진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기 전에 날카로운 감각이 등골을 할퀸다. 죽는다. 공포에 잠식당한 뇌가 몸에 내린 명령은, 눈을 감는다 뿐이다. 질끈 눈을 감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 전달된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소리가 들린다. 거친 숨소리, ……소리가 멀어진다. 이전과 같다. 단단한 것이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안전한 세계를 만들어준다. 그제야 자신이 예상했던 충격과 실제로 몸이 받은 충격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임을 깨닫는다.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흐릿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껌뻑인다. 그럴수록, 눈동자에 깃든 생기가 사라져 간다.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 강석원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린다. 배 부근이 뜨끈하게 젖어간다. 그것이 남자가 흘린 피라는 사실을 보지 않고 알 수 있다. 이미 이전에 한 번 겪은 일이다. 강석원이 제 몸을 바쳐 무엇을 구했는지, 조지현은 알고 있다. 십 층의 높이에서 떨어진 물건은 파편이 되어 바닥을 나뒹군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디론가 연락한다. 싸우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차 소리, 사이렌 소리, ……숨소리.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다. 생각이 사라진다. 울지도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한다. 결국에 이렇게 될 것을 알고도 강석원의 손을 놓지 못한 자신의 끔찍한 이기심에 함부로 슬퍼할 수 없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피투성이가 된 강석원을 끌어안고 고요함을 잃은 세계의 소리들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기도할 뿐이다.
모든 게 같아야 한다면, 그의 무사함까지 같길.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강석원한테 그런 거냐고!”
연락을 받은 관장이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달려왔다. 수술실 앞에서 사색이 되어 서 있던 조지현의 아버지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야? 당신이 지금 강석원이 저렇게 만든 인간이야?”
관장이 아버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버지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조지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있을 뿐이다.
“너, 강석원 후배라고 했지? 저번에 봤던.”
관장이 조지현을 알아본다.
“강석원하고 네가 같이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말 해. 어떻게 된 건지.”
관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친다.
“10층 높이에서 텔레비전을 던졌습니다. 그걸 제 대신 선배님이 맞으신 겁니다.”
텔레비전 파편에 맞은 차체가 몇 대나 박살났다고 했다. 그걸 사람이 맞은 것이다. 그 높이에서 떨어진 무게에 실린 힘을 구해내는 공식을 알고 있다. 명백한 살인죄에 해당되는 값이다.
“시발, 너 대신 걔가 그걸 왜 맞아! 그리고 당신 미쳤어? 그걸 그 높이에서 던진 거면 살인죄야. 내가 가만 안 둬. 고소할 거야. 살인죄든 뭐든, 고소할 거야. 지금 쟤가 얼마짜리 선수가 될 애인 줄 알아?”
제 미래와 돈줄을 망친 상대에게 관장은 적절한 분노를 퍼부었다.
“실수였어요, 그건 실수였어. 그 새끼가 우리 아들 데려간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실수한 거라고.”
새파랗게 질린 여자가 덜덜 떨면서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관장이 험악한 표정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네년이 던졌어? 이 미친년아, 니가 그런 거냐고!”
“말이 심하잖습니까.”
“심하긴 뭐가 심해. 지금 당장 삼 개월 뒤에 세계 선수권 나가서 우승할 애야. 그 다음이 올림픽이라고! 벌써부터 미국에서 눈독들이던 녀석이야. 당신들이 지금 뭘 망친 줄 아냐고! 경찰 불러. 이거 경찰 불러서 수사해야 해.”
여자가 겁에 질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지현아, 니가 말 좀 해줘. 응? 네가 잘 알잖아.”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지현이 입을 열자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이제 곧 오실 겁니다.”
“뭐? 네가 왜 신고를 해?”
어머니가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짓는다.
“제가 다 증언하겠습니다. 고소든 뭐든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조지현이 관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지현, 너 지금 네 엄마한테 무슨 짓이야.”
아버지가 낮은 음성으로 제 아들을 비난했다.
“본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뿐입니다.”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아들의 손을 부여잡았다.
“엄마가 잘못했어.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거야. 실수였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여자는 자기연민에 젖어 잘도 늘어놓는다.
“……셨어야죠.”
“뭐?”
“기회가 있을 때, 죽이셨어야죠. 그래서 찾아간 거잖아요.”
새빨갛게 충혈된 조지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공책에 정리해둔 사건 중 남은 것은 강석원의 사고다. 어머니는 보란 듯이 아들을 차도에 밀어 넣는다. 그런 자신을 대신해 강석원은 사고를 당한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최기열과의 사건도 비슷하지만 더 조용히 넘어갔으니, 이번 것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안 된다면, 피해가 오롯이 자신에게만 향하길 바랐다. 강석원만큼은 어머니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현아…….”
부들부들 떠는 여자를 아버지가 복도 구석으로 데리고 간다. 관장이 그들을 쫓아가 소리를 높인다. 병원 관계자들과 경찰까지 뒤섞인다. 소리가 멀어진다. 조지현은 제 손을 내려다본다. 피투성이다. 강석원이 흘린 피다. 자신이 그를 밀어 넣은 것이다. 이 끔찍한 일에,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 모든 일은 큰 맥락대로 흐른다. 그는 무사할 것이다. 수술은 무사히 끝나고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하지만 온몸을 잠식한 불안감에 숨을 쉴 수 없다. 강석원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형태가 으스러진 어깨로 강석원은 끝까지 조지현을 감싸 안았다. 파편이 박힌 다리에서는 터진 호스처럼 피가 새어 나왔다. 강석원의 피가 자신을 적신다. 목구멍으로 피가 넘어들어 온다. 숨을 쉴 수 없다. 죽었어야 했다. 여자에게 더 심한 말을 해서 그녀의 분노가 온전히 자신에게 쏟아지게 했어야 한다. 죽이라고 말했지만 살고 싶었다. 강석원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 나약한 마음이 결국에 강석원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조지현은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신은 이 모든 일의 공범이다. 아니, 주범이었다.
“야!”
복도 의자에 쭈그려 앉아있던 조지현이 고개를 든다.
“네 이름이 조지현이냐?”
“그렇습니다.”
“들어가 봐. 너 찾는다.”
관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전한다. 조지현은 벌떡 일어나 복도를 가로질러 뛰었다.
“시발, 사내새끼들이 할 짓이 없어서.”
뒤따르는 비난은 이미 상관없는 것이었다. 조지현은 홀린 사람처럼 병실 앞에 선다. 아홉 시간에 걸친 대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매우 피곤한 얼굴로 나온 의사는 남은 건 환자에게 달렸다고 했다. 그는 무사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잔인한 게임의 유일한 희망은, 강석원은 무사하다는 것이다. 병실 문을 연다. 강석원이 자신을 바라본다. 다리와 어깨에 깁스를 하고 누운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아름다울 만큼 강하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강석원이 다치지 않은 팔을 위로 들어올린다. 그 짧은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조지현은 병실 문을 닫고 그에게 달려갔다. 강석원의 팔에 안긴다.
“지현아.”
낮게 스치는 음성이 자신을 부른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에 차마 소리 내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다친 데는?”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비껴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거라고,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 기적 같은 확률에서 눈을 뜨자마자 남자는 조지현의 무사를 묻는다.
“……, 괜찮습니다.”
조지현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는 무사합니다.”
다쳐야 했던 것은 자신이다. 강석원이 아니다. 그런 부모를 둔 죗값은 자신이 치렀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저 같은 것 때문에…….”
“너 같은 게 뭔데.”
“…….”
“그런 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마.”
강석원이 조지현의 뒷머리를 바싹 끌어안는다. 조지현은 말없이 그의 팔을 붙든 채로 뜨거운 숨을 삼킨다.
문득 강석원이 묻는다.
“그럼 이제 된 거야?”
조지현이 고개를 든다.
“이제, 끝난 거냐고.”
“…….”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하다. 조지현은 멍하니 강석원을 보다가 간신히 입을 뗐다.
“제가 그때 했던 말, 믿으신 겁니까.”
강석원이 눈짓으로 긍정한다.
“제가, ……저 때문에 선배님이…….”
쓰레기 같은 정신병자인 제가 당신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 겁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 남자는 어떤 표정이었던가.
“이거면 됐어?”
강석원이 담담히 묻는다.
그는 조지현의 말을 믿었다. 당신의 인생을 망칠 것이라는 그 말을, 진심으로도 믿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어떤 비난도 원망도 없다. 이 모든 것도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라는 듯이.
새빨갛게 달군 칼이 심장을 쑤시고 들어온다. 눈물이 고일 새도 없이 떨어진다.
“울지 마.”
강석원이 입매를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네가 울면,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를 제게 기대게 한다. 닿기만 해도 온몸이 바스러질 듯이 아플 텐데도, 그는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준다.
“선배님.”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응.”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저 같은 거, 어차피 나중에 어머니처럼 미쳐버릴 테니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조지현.”
강석원이 날선 음성으로 조지현을 부른다.
“내가 그 여자한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하나 있어.”
그게 무엇인지 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선배님 만나서, 다시, ……, 몇 번이고 좋아할 겁니다. 진심입니다.”
엉망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여자에게 감사한다. 태어나게 해줘서, 덕분에 강석원은 만날 수 있었다.
강석원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지현아, 하고 부른다.
“이제 괜찮을 거야.”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도닥인다.
그의 마음은 참담할 만큼 깊다. 발을 내딛는 순간 도로 거둘 새도 없이 빠져들고 만다.
“사랑해요.”
웃으며 말했다. 눈물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나도 그래.”
강석원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 단순하고 짧은 한마디에 조지현은 삶을 얻는다. 앞으로 가지게 될 모든 시간은 남자에게 받은 것이다.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던 남자가 미안해, 하고 말을 돌린다.
“오늘은, 약속 못 지키겠다.”
“무슨 말씀입니까.”
“……밤새 얘기하는 거, 다음에 하자.”
그의 음성에 졸음이 묻어난다. 마취 기운에 지금 눈을 뜬 것도 무리였다. 강석원의 눈도 흐릿해진다. 조지현의 무사를 확인하자 긴장이 풀린 것이다. 조지현은 주무세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숨소리는 규칙적으로 잦아든다.
조지현은 잠든 강석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남자의 침대 옆에서, 몇 번이고 같은 맹세를 제 안에 새겨 넣었다.
병실에 고요한 어둠이 찾아왔다.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간호사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조지현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간호사는 강석원의 체온과 혈압을 재고 차트에 수치를 적어 넣는다.
“밥 먹고 와.”
강석원이 조지현을 보며 말했다.
“좀 이따가요.”
“그러게. 배고프겠다. 사촌 형 간호도 좋지만 먹어가면서 해야지 너무 말랐다, 너.”
어머니뻘 되는 간호사는 조지현을 볼 때마다 같은 소리를 했다.
“지현이 몇 살이라고 했지?”
“열여덟입니다.”
“우리 아들보다 두 살 많네. 공부도 잘한다며.”
조지현은 놀라서 눈을 껌뻑였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다.
“사촌 형이 그러던데. 전교 1등만 한다고.”
강석원은 무표정하게 주사약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말수 없는 남자가 간호사에게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들을 했을까 상상하자 괜스레 열이 오른다. 조지현은 뜨끈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사촌 형 병간호도 하고. 너무 잘 자랐다.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시겠어.”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언제쯤 운동할 수 있습니까.”
강석원의 질문에 간호사가 한숨을 내쉰다.
“환자분. 아직 뼈도 안 붙었어요. 무리하지 말고 지금은 누워만 있어야 해요. 알았죠?”
“샤워는요?”
조지현의 물음에 간호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것도 무리지. 뜨거운 물에 수건 적셔서 당분간은 닦아주는 정도로만 참아야 해. 머리는 감을 수 있고.”
“그건 오늘 아침에 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녀는 조지현을 매우 대견하게 여겼다. 친형제도 아니고 사촌이라는데 항상 옆에서 극진하게 강석원의 병간호를 하는 모습이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한 것이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호출하고.”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간호사가 병실 문을 닫고 나갔다.
“제가 수건으로 씻겨드릴게요.”
“아니, 괜찮아.”
“왜요. 샤워하고 싶으시다 했잖아요.”
강석원은 매우 깔끔한 성격이었다. 집은 늘 정돈되어 있고 운동을 하고 나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어김없이 샤워했다. 수술을 하고 눈을 뜬 다음날에도 강석원은 샤워는 언제쯤 가능하냐는 질문을 간호사에게 했던 것이다.
강석원이 설핏 이마를 찌푸린 채 낮게 혀를 찬다.
“저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조지현이 강석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플 때, 선배님도 저 계속 돌봐주셨지 않습니까.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부담 갖는 게 아니고, …….”
곤란할 것 같은데. 강석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항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현은 병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받았다.
강석원은 일 인실을 사용했다. 관장은 그에게 비싼 보험을 들어뒀다고 했다. 시발, 이러라고 들어둔 보험이 아니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강석원에게 화를 냈다.
대야에 뜨거운 물을 담아서 수건과 함께 가져왔다. 수건을 뜨거운 물에 담가두고 강석원의 환자복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붕대를 감은 그의 어깨가 드러난다. 어깨가 완전히 탈골되고 으스러진 뼛조각이 살을 뚫고 나왔다고 했다. 그 몸으로 끝까지, 그는 자신을 감싸 안은 것이다. 조지현이 강석원의 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 추운데.”
강석원이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 주의를 환기시킨다. 조지현은 잠시만요, 하고 물을 짠 수건으로 천천히 그의 몸을 닦아준다.
“괜찮으세요?”
“응.”
“이쪽 팔 드실 수 있어요?”
깁스하지 않은 팔을 가리켰다. 강석원이 그가 시키는 대로 팔을 든다. 조지현은 정성스럽게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대야에 수건을 담가 물을 적시고 다시 짰다.
“몸 일으켜드릴게요.”
조지현은 그의 팔을 제 목에 두르게 하고 그를 세워준다. 완벽한 대칭을 이룬 그의 등 근육이 강석원이 힘을 주는 방향대로 움직인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빚어낸 아름다운 형태였다.
“왜?”
조지현이 수건을 든 채로 멍하니 서 있자, 강석원이 고개를 돌려 묻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지현은 수건으로 그의 등을 닦는다. 얇은 수건을 사이로 그의 단단한 근육이 스치는 감각이 느껴진다. 성교를 할 때마다 몇 번이나 남자의 등에 손을 둘렀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괜히 혼자 의식하는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 식어서 다시 받아올게요.”
조지현은 대야를 들고 얼른 일어섰다. 물을 세면대에 따라 버리고 다시 받기 시작했다. 뺨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강석원은 어느새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조지현은 얼른 다가가 매듭을 묶어주고 그를 다시 눕게 했다.
“바지……, …….”
바지의 매듭을 풀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의 상태를 알아챘다. 강석원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다.
“……, 벗겨드리겠습니다.”
매듭을 푸는데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헛손질하고 나서야 간신히 바지를 벗겨냈다.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의 아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지현은 깁스한 곳을 피해 강석원의 허벅지를 닦아내었다. 조지현의 손이 스칠 때마다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가 긴장하듯 움찔거렸다.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그래.”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지현은 반대편 허벅지를 닦아주었다. 강석원의 시선이 뺨에 닿는다. 민망해서 눈을 둘 데를 모르겠다. 일부러 다른 곳을 보며 손을 놀리던 조지현은 강석원의 다리 안쪽을 건드리고 말았다. 강석원이 숨을 삼키며 눈가를 찌푸린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얼른 얼굴을 돌려 사과했다. 눈이 마주쳤다. 조지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수건을 손에 꼭 쥔 채로, 조지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강석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곤란하다고 한 거야.”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조금 더 숙인다. 이제는 목덜미까지 붉다.
“거기 바지 좀 줘.”
“아직 다 못 했습니다.”
“더 하면 진짜 곤란해져.”
지금도 거의 한계라도 해도 좋을 만큼 부풀어 있었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강석원이 뭐? 하고 되물었다.
“원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을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톡, 두드린다.
“아직 뼈 안 붙었어. 바지나 줘.”
조지현은 그를 도와 다시 환자복 하의를 입혀주었다. 옷을 입고도 강석원은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조지현은 옆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그런 강석원을 지켜보았다.
“조지현.”
“네.”
“가서 밥 먹고 와.”
“선배님 식사하는 거 보고 갈게요.”
삼십 분만 있으면 밥 차가 올 시간이었다.
“이따가 MRI검사 있어서 금식이야. 얼른 먹고 와.”
“그럼 촬영하시고 나서 먹을게요.”
강석원이 느른하게 웃는다.
“나 잠깐만 머리 식히자.”
너 보고 있으면 진정이 안 돼서 그래.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말에 조지현의 얼굴이 다시 붉어진다. 손에 든 수건을 내려놓고 그럼 잠깐 갔다 올게요, 하고 말한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강석원이 몸을 침대에 다시 눕히며 대답했다. 조지현이 병실 보조 침대에서 자는 것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는 조지현이 잠시만 사라져도 몹시 불안해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조지현은 병실에서 나왔다. 지하로 내려가 도시락을 사서 먹었다.
이번 일로 어머니는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지현은 빠짐없이 모든 사실을 증언했다. 명백한 과실치사였다. 차도로 밀어 넣었을 때와 상황이 달랐다. 주변에 숱한 증거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처럼 동정 어린 눈물만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실수로 그 높이에서 텔레비전을 집어 던지는 인간은 없는 것이다. 조지현은 모든 것을 증언했다. 그 와중에 두 사람의 관계가 모자라는 것을 확인한 경찰은 몹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범인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이해받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모두 먹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실을 비운 지, 십 분도 되지 않는데 벌써 강석원이 보고 싶다. 병실 문을 열자 강석원이 고개를 돌린다. 그의 얼굴에 스친 안도를 읽는 순간, 괜스레 울컥했다.
“저 양치할게요.”
“그래.”
조지현은 욕실로 들어가 양치를 마치고 나왔다. 몸을 아예 이쪽으로 돌려 조지현이 나오길 기다리던 강석원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침대로 다가갔다.
“더 가까이.”
조지현은 한 걸음 더 다가선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입술에 손을 뻗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움찔, 하고 어깨를 떨었다.
“거품.”
강석원이 손끝에 묻은 치약 거품을 보여준다. 혼자 괜한 기대를 한 것 같아 조지현은 눈을 어물거리며 시선을 떨군다. 강석원이 지현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든 순간, 입술이 겹쳐진다. 아주 얕은 입맞춤이다. 입술이 맞물리고 비벼지는 게 전부인.
처음이었다. 사고가 난 이후로 처음 갖는 성적인 접촉이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조지현은 멍하니 강석원을 바라보았다.
“왜.”
“……, 좋아서요.”
대답을 들은 강석원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왜 그러십니까?”
조지현이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묻는다.
사고를 당한 강석원이 혹시 자신이 싫어지지는 않았을까 매일 밤 고민했다.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치미는 불안은 어쩌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했는데 원망이 뒤늦게 찾아온다 해도 당연한 결과였다.
“너무 좋아서.”
무심한 투로 내던진 말에 미묘한 열기가 배어있다. 얇은 환자복은 그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잠깐 나갔다 올까요?”
“아니. 창밖 보면 돼.”
강석원이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린다. 조지현은 옆에 오도카니 서서 강석원이 고개를 돌리길 기다렸다. 한숨을 삼키는 기척이 들린다. 이윽고, 남자는 다치지 않은 팔을 뻗어 조지현의 목을 잡아당겼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지현 학생 여기서 기다리는 거예요?”
“안녕하세요.”
같은 층에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였다. 이곳에서 며칠 지내지 않았지만, 보호자 대부분은 조지현을 알게 되었다. 환자와 보호자 둘 다 눈에 띄는 데다, 어른도 하기 힘든 병간호를 학생인 그가 혼자 도맡아 한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워한 터다.
“세라야. 세라가 좋아하는 지현이 오빠 있다.”
예닐곱 살가량 되는 여자아이가 부끄러운 듯 후다닥 어머니의 뒤로 숨는다.
“얘가 지현이 오빠, 지현이 오빠, 얼마나 노래를 부르던지. 티비에 나오는 오빠들보다 더 잘생겼대요.”
조지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빠한테 인사 안 할 거야?”
여자아이가 쭈뼛거리며 어머니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도로 숨는다.
“아휴, 진짜.”
어머니가 제 딸을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무슨 행동을 해도 귀여움을 받을 나이였다.
“그런데 학교는 안 가도 돼요? 고등학생이라면서요.”
“괜찮습니다.”
“어린데 힘들어서 어떡해. 어쩌다가.”
그녀가 혀를 쯧쯧 찬다. 보호자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부모 없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사촌으로 소문이 난 듯했다.
“강석원 환자 보호자 분.”
간호사가 조지현을 불렀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지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MRI촬영실 앞으로 갔다. 휠체어를 탄 강석원이 나온다. 촬영기사에게 휠체어를 건네받고 조지현은 고개를 숙여 물었다.
“괜찮으세요?”
“응.”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드물게 조영제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괜찮아.”
대답을 듣고 나서야 조지현은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입구에 서 있던 모녀와 다시 마주쳤다.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지나쳤다. 여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조지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이거 드세요.”
아이가 사탕 하나를 건네고는 다시 어머니에게로 달려간다. 조지현이 당황한 얼굴로 사탕을 손에 든 채로 돌아보자 아이의 어머니가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강석원은 아무런 말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조지현은 그에게 물었다.
“버릴까요?”
보호자나 간호사들이 건네준 음식을 볼 때마다 강석원의 표정은 여지없이 굳었다.
“아니. 왜?”
“싫어하는 거 아니셨습니까.”
“어린애잖아.”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휠체어가 덜컹거리지 않도록 천천히 밀어 넣는데 뒤에서 잠깐만요,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의 가족이었다. 남편의 휠체어를 밀면서 여자가 다가온다. 조지현은 얼른 버튼을 열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주었다.
“고마워요.”
가족이 모두 탄 것을 확인하고 조지현은 버튼에서 손을 뗐다.
“그럼 다음 주면 퇴원이겠네?”
부부가 대화를 시작했다.
“별일 없으면 그럴걸.”
“잘됐다. 병원 밥 지겨웠잖아. 집에 가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요.”
아내가 웃으며 말하자 남편은 휠체어를 쥔 아내의 손을 툭툭 두드린다.
“우리 세라도 아빠 때문에 힘들었지? 이제 병원 안 와도 돼.”
아버지가 딸의 뺨을 문지르며 다정한 투로 말한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어? 왜 그래. 세라야. 아빠가 뭐 잘못했어?”
울음을 터트리면 혼내는 게 아니라 본인의 잘못이 무엇인지 먼저 묻는다. 조지현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냅둬. 얘 지금 병원 못 온다니까 이러잖아요.”
여자가 웃으며 조지현을 눈짓한다. 남자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아. 아빠가 아프다는데 너는 잘생긴 오빠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아이가 울먹거리며 아니에요, 아빠, 하고 남자의 품에 파고든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착했다.
“먼저 내리세요.”
조지현이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가족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이가 아빠에게 안겨 칭얼칭얼 뭐라고 말을 속삭였다.
“야, 야. 세라야. 그건 네 맘대로 안 돼. 나이 차이도 좀 고려를 해야지. 그리고 뭣보다 오빠 의사가 중요해.”
남자가 당혹스러운 듯 대답하며 조지현을 본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휠체어를 끌어내면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세라가 뭐라는데?”
남자가 웃으며 제 부인에게 귓속말한다. 여자도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진짜 유치원 다니더니 못하는 말이 없다. 얘, 어쩜 좋아.”
조지현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지현 학생. 세라가 할 말 있대요.”
여자가 제 딸의 등을 민다.
“그래. 가서 빨리 차여라. 아빠 그래야 오늘 밤 맘 편히 자지.”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조지현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한 개 더 조지현에게 건넨다.
“괜찮아. 나 아까 받았어.”
“드세요.”
아이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사탕을 준다.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사탕을 하나 더 받아들었다.
“저 오빠랑 결혼할래요.”
“응?”
“오빠랑 결혼할래요. 좋아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거래요. 엄마랑 아빠처럼.”
“너 언제는 아빠랑 결혼한다며. 딸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남자가 휠체어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조지현은 당혹감에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미안해. 나 결혼할 사람 있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조지현의 입에서 나오자 다들 굳어버렸다. 가장 당혹스러워한 것은 결혼 신청을 건넨 아이였다.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간다. 자신의 실패와 수치를 몇 번이고 보듬어줄 가장 안전한 장소로.
“세라야. 오빠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나중에 더 잘생긴, ……더 착한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머니가 딸의 등을 도닥이며 조지현에게 눈을 찡긋한다. 얼른 가라는 뜻이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휠체어를 밀었다. 병실로 돌아왔다. 강석원의 팔을 제 목에 걸게 하고 그를 부축해 침대에 오르게 했다.
조지현은 휠체어를 접어 구석에 세워두고 강석원에게 돌아왔다. 강석원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강석원의 바싹 마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물 언제 드셔도 되는지 간호사 선생님께 여쭤보고 올게요.”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누구랑 하려고.”
“네?”
“누구랑 결혼할 거냐고.”
“당연히 선배님이랑, …….”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자신이 몹시 낯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열감이 느껴졌다. 조지현은 어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한국에서 동성 혼인이 허락되지도 않을뿐더러, 강석원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은 것이다. 여러모로 무리한 발언이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손 좀, 하고 손목을 작게 흔들었다.
“언제 할까.”
“…….”
“언제 결혼할까.”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그냥 흘리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온 마음을 다해 화답한다.
“법적으로 미성년자는 부모님 동의하에만 가능하니까, 일 년은 지나야, ……우리나라는 동성혼 성립이 안 됩니다.”
“알아.”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쥔 채로 잡아당긴다. 손끝에 입을 맞춘다. 가지런한 손가락에 차례대로, 동반자에게 영원을 서약하듯 입술을 댄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맹세들이 새겨진다.
“선배님 나으시면요.”
조지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강석원이 그리고, 하며 말을 붙인다.
“사탕은 버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보조 침대에 누운 조지현이 인사하자 잘 자, 하는 인사가 돌아온다. 조지현은 눈을 감고 숫자를 센다. 잠이 오지 않을 때의 버릇이다. 전에는 영어단어를 떠올리거나 수학 공식을 암기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 단위까지 숫자가 올라가고 나서야 의식이 수면에 잠겨 든다. 가물가물한 의식을 놓으려는 순간, 절걱거리는 쇳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잠결에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리는 점차 분명해진다. 누군가 문을 연다. 이상하다. 이 시간에 병원을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병원 문을 열 때 저런 소리가 났던가? 머릿속에 이는 의문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끼이익, 낡은 중첩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박자박 발소리.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 아니, 강석원을 먼저 깨워야 한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한다. 소리를 내야 하는데 목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다. 그림자가 드리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한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번뜩이며 자신과 강석원을 번갈아 훑는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깨우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차가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동안 해주지 못한 사랑을 후회한다는 듯이 다정한 손길이다. 그러나 손길이 더해질수록, 몸은 공포로 빳빳하게 굳어간다. 강석원을 부르려고 입을 떼는 순간,
“네 말대로 지금 여기서 죽여줄게.”
그렇게 말한 여자는 손에 든 날붙이를 치켜 올린다. 어둠 속에 번쩍이는 날붙이가 조지현의 얼굴로 날아든다.
“――!”
조지현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식은땀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려고 팔을 내저었다. 시야가 휘휘 돌았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에라도 어디선가 날붙이를 들고 달려들 것 같은 공포에 피가 얼어붙는다. 속이 뒤틀렸다. 조지현은 보조침대에서 기어 나와 욕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들고 속을 게워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쓰며. 한참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레버를 내렸다. 물로 입을 헹궈내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꿈에서 본 여자와 같은 얼굴이다. 자신의 얼굴을 그래서 끔찍하게 싫어했다.
조지현은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눕는다.
“토했어?”
강석원이 묻는다. 잠기운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다.
“저녁에 먹은 게 체했나 봐요. 먹을 때, 맛이 좀 이상했는데. 다음부터는 유통기한 확인하고 사 먹어야겠어요.”
조지현은 묻지도 않은 것들을 주절주절 덧붙인다. 강석원이 몸을 돌리는 기척이 들린다.
“잠깐 올라올래?”
조지현이 힘없이 웃었다.
“무너져요. 침대.”
“둘이 누워도 최대하중 안 넘어.”
“그건 또 어떻게 아십니까.”
“간호사한테 물어봤어.”
말수도 없는 남자가 간호사에게 그런 것들을 묻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온다. 조지현은 보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강석원이 조지현이 올라올 수 있게 옆으로 비켜준다. 조지현은 그의 옆으로 가서 모로 누웠다. 강석원이 성한 팔을 내밀어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올려주며, 그가 묻는다.
“악몽 꿨어?”
그는 한 움큼의 약을 처방받는다. 진통제와 항생제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 정도의 약을 먹으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강석원은 약 기운에도 조지현의 모든 기척을 알아챈다.
“네. 그런가 봐요.”
“무슨 꿈.”
강석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조지현의 꿈 내용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떤 내용인데.”
그는 다시 한 번 내용을 묻는다. 조지현은 당혹감에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누군가, 다치는 꿈입니다.”
“꿈은 꿈일 뿐이야.”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는 구속기소 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과가 없는 초범치고는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와 어머니에게 유리하게 증언을 해달라고 고개를 숙였다. 조지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 자신에게 저지른 일들은 상관없지만, 강석원에게 행한 일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녀는 절대로 병원에 찾아와 자신이나 강석원을 해칠 수 없다. 그런데도 불안은 벌레처럼 나타나 불시에 의식을 파고든다.
“선배님은, 악몽 같은 거 꾼 적 있으십니까?”
조지현은 애써 생각을 돌리려고 강석원에게 물었다.
“많지.”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꿈이요?”
“링에서 상대를 앞에 두고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꿈.”
“무서우세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지는 않아.”
“그럼요?”
“화가 나. 자신한테.”
“…….”
“너무 무력해서, 화가 치밀어.”
조지현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제야 깨닫는다. 그는 자신에게 앞으로의 계획이나 현재 상황에 관해 묻지 않았다. 조지현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었고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강석원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데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선배님은, 잘하고 계십니다.”
조지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잘하고 계세요.”
그때도 그랬다. 강석원의 회복 속도에 의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미국에서 프로모터한테 제안이 들어왔었어.”
“…….”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관장님은 올림픽 메달까지 따고 가라고 했는데, 미국으로 바로 건너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려면 내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야 하지만. 보여지는 타이틀이 중요한 곳이니까.”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사과했다.
“왜 네가 사과를 해.”
조지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 느껴졌다.
“조지현. 이건 확실히 하자.”
강석원의 음성이 명확한 경계를 세운다.
“네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어. 무슨 일이 생기든 그건 내 결정이고, 내가 책임질 문제야.”
“…….”
“좀 늦어지겠지만, 언젠가 미국으로 갈 수 있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그는 정상에 우뚝 설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조금 힘들겠지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기다릴 겁니다.”
강석원이 땀으로 젖은 이마에 입을 맞춘다.
“바로 데리고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
그는 자신의 무능을 늘 죄스러워했다. 제가 가진 재능과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어 어쩔 줄 몰라 한다.
“……, 고마워요.”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끌어안긴 채로 말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방금까지 뒤틀리던 세계는 규칙적인 심장 소리에 맞춰 정돈되어 간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안은 손에 힘을 살짝 주고는 조지현을 도닥인다. 어서 자라는 듯이.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강석원은 손을 움직인다. 조지현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다시, 만나서…….”
“다시?”
강석원이 되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에 빠져든 조지현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간호사가 들어오자 조지현은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 잠깐, …….”
“왜.”
강석원이 묻는다.
“아니, 잠깐 밖에…….”
간호사가 조지현을 보고 웃었다.
그날 조지현은 강석원의 침대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화가 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실 침대에 두 명이 올라가자는 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아냐, 골절 환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아직 수술 자국도 아물지 않았다, 보호자도 그렇지만 환자도 생각이 있느냐 등등. 강석원은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했다. 조지현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함이었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조지현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결국, 간호사는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정말 혼날 거라는 말을 하고 병실을 나갔다.
그날 이후로 조지현은 간호사를 볼 때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요즘도 보조 침대 불편하다고 환자 침대 올라가서 자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그런 적 없습니다.”
조지현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순진할 정도로 솔직한 반응에 간호사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불편한 데는 없죠?”
“네.”
강석원은 아직도 새빨개진 얼굴로 옷자락만 만지는 조지현을 보며 대답했다.
“아, 그리고 이거 생각 있으면 하세요.”
그녀가 카트에 실린 종이를 내밀며 설명한다.
“내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병원에서 12월 되면 하는 행사거든요. 편지 써서 보내면 내년에 기재하신 주소로 보내드리는 거예요. 하실래요?”
강석원이 조지현을 본다.
“지현이도 할래?”
“네? 아, 저는 그냥…….”
강석원이 말없이 종이를 받아든다.
“써서 드리면 되는 겁니까?”
“주소 기입하고 주시면 돼요. 여기 봉투.”
간호사가 편지 봉투를 건넸다. 그녀가 나가면서 귀엽다는 듯이 조지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이리와, 하고 손짓했다. 그가 종이를 조지현에게 준다.
“펜 드릴게요.”
조지현은 필통에서 펜을 꺼냈다.
강석원의 집으로 가서 필요한 짐을 대충 꾸려오면서 책과 필통을 가져왔다. 굳이 지금 공부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을 펼치니 뜻밖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혼자서 문제집을 푸는 조지현을 보며 강석원은 공부가 습관이 아니라 취미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게 묻는 강석원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묻어났다.
“뭐라고 쓰실 거예요?”
“글쎄.”
조지현도 종이를 보며 펜을 들었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지켜내느라 내년의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미 한 번 지내온 나날인데 마치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
“조지현.”
“네?”
“바꿔 쓸래?”
“펜 안 나오세요? 다른 거 드릴게요.”
조지현이 필통을 뒤적이며 물었다.
“아니, 쓰는 사람. 나한테 말고 너한테 쓰고 싶어.”
조지현은 그제야 강석원의 의도를 알아챈다.
“너는 나한테 쓰고. 어때?”
“괜찮을 거 같네요.”
조지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뒤, 강석원에게 하고 싶은 말.
조지현은 선배님께, 라는 서두를 적어 넣었다. 문득, 두려움이 스친다.
일 년 뒤에도 지금처럼 강석원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걸까. 강석원은 자신을 찾으러 헤매지는 않을까.
“어떻게 되는 걸까요.”
조지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운동하고 너는 공부하고. 비슷하겠지.”
조지현이 그렇겠죠, 하고 펜을 쥔다.
“선수촌에서 훈련받을 거야.”
강석원이 설명을 잇는다.
“올림픽 국가 대표로 선발되면.”
“당연히 그럴 겁니다.”
어머니는 재판을 받을 것이다. 더 이상 강석원의 미래를 위협할 만한 일은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불안감은 어쩌지 못했다. 미래는 바뀌어 있을까?
“많이 보고 싶을 텐데.”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이 고개를 든다. 일 년 뒤의 훈련을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린다.
“저도요. 많이 보고 싶을 겁니다.”
“보러 와. 그때.”
“알겠습니다.”
강석원의 말에 불안이 스러진다. 서두를 써놓고 한참 종이를 바라보던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쓰실 건가요?”
“나중에 직접 봐.”
“알겠습니다.”
조지현은 웃으며 펜을 움직였다.
부디 일 년 뒤에도 강석원과 함께이길 바랄 뿐이었다.
조지현은 우울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렸다.
아무래도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여러모로 검토를 해봤는데, 방임이나 학대의 뚜렷한 증거가 없어서 심사 진행이 좀 어려워요. 조지현 학생, 학교생활이나 성적도 그렇고, 주변 증언도 그렇고요.
학대의 뚜렷한 징후에는 아동의 방치가 있다. 부모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자식이 얼마나 방치된 채 생활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현은 소위 ‘지나치게 관리가 잘된’사례였다. 학교도 꼬박꼬박 나가고 성적도 늘 좋았다. 옷차림도 반듯하고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생활을 해온 것이다.
상담받은 결과는 어떻습니까. 친권 박탈을 청구할 경우 대상의 심리 상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얼마 전에 심리 검사를 받았다. 불안 증세와 우울증세가 있긴 해요. 공황장애도 그렇고. 이건 확실히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때 말씀하신 가족력도 그렇고 걱정되는 수준이긴 해요. 그런 거로는 안 되는 건가요? 네. 조지현 학생이 불안한 상태라는 게 곧 부모의 학대라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좀 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해요. 그렇게 말하는 상담사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조지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삼자에게 그간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폭언을 말할 때마다 그녀는 안타까운 감정을 내비쳤다. 어머니하고도 상담해야 하는데, 현재 상황이 이래서 좀 힘드네요. 이 사건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건가요.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어요. 아버지는 이게 실수라고 말씀을 하고 계셔서. 거기까지 들었을 때, 조지현은 눈을 내리감았다. 조금만 빗겨 맞았다면 강석원은 즉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이 모든 일이 아내에게 닥친 불행이라고 여겼다. 사진이나 구체적인 증거가 더 있으면 나을까요? 조지현의 물음에 상담사는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어디 갔다 와.”
병실로 들어가자 강석원이 묻는다.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나갔다 오면 강석원은 여지없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잠깐 통화 좀 하고 왔습니다.”
“누구랑.”
조지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친권 박탈 청구를 했다는 말을 아직까지 강석원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랑 통화했는데.”
“어머니 문제로 복지시설 담당자랑 통화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마, 결과는 별로 좋지 않을 겁니다.”
운이 좋게 어머니의 친권이 상실된다 해도 아버지가 남아 있다. 후견인인 아버지의 권리까지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석원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신경 쓰이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조지현은 강석원의 침대로 다가갔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을 어루만진다.
“밥은?”
“이따가 먹으려고요.”
조지현이 머뭇거리다가 선배님, 하고 그를 부르자 강석원이 응, 하고 대답했다.
“저 학교 좀 다녀오겠습니다.”
“학교는 왜?”
“자퇴서 내고 오려고요.”
강석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조지현은 이미 담임에게 전화를 해두었다.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학교를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담임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좁은 동네였다. 건너 건너 이야기가 들어갔을 것이다. 강석원도 학교를 나가지 않고 있으니 이야기는 신빙성 있게 퍼졌을 게 분명하다.
“전학 가는 건?”
“검정고시 보면 됩니다. 그게 편해요.”
“…….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강석원은 조지현이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사실 지금 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조지현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수업 듣는 거 안 좋아해요. 지루한 선생님도 너무 많고요. 학교 가는 거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강석원이 웃음을 삼킨다. 조지현이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을 하고 있음을 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저 진짜 괜찮아요. 학교에 미련 없습니다.”
“그래도.”
조지현은 강석원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머금었다가 물러선다.
“며칠 뒤에 선배님 생일이잖아요. 편지 쓰려면 편지지도 사야 해요.”
“얼마나 쓸 건데.”
“많이요.”
강석원이 조지현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는다. 조지현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초조한 그의 시선에 열기가 묻어난다.
시계를 확인했다. 혈압을 재거나 주사를 맞을 시간도 아니다. 오늘은 검사도 없다. 의사의 회진도 없었다.
조지현이 강석원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승낙의 표시다. 강석원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강석원의 손이 목덜미를 쥐고 목뼈를 손가락으로 차례대로 훑는다. 관능적인 손길에 조지현은 아래가 저릿했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더 닿고 싶다는 생각에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침대로 몸을 숙였다. 침대가 덜컹, 하고 흔들렸다.
조지현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아.”
강석원이 다시 조지현을 잡아당기려 했다.
“잠시만요.”
조지현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강석원이 굳은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조지현은 의자를 가져다가 문 앞에 세워두었다. 문을 잠글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렇게 하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커튼도 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조지현이 물었다. 강석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뼈가 왜 아직도 안 붙는 거지.
조금 불퉁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혼잣말에 조지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멀었어요. 조지현은 그에게 다가가며 대답했다. 강석원이 커튼을 쳤다. 커다란 그림자가 조지현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정말 괜찮겠니?
자퇴 신청서를 받으며 담임은 거듭 물었다. 부모의 허락란에는 아버지의 사인을 받았다. 병원으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자퇴 신청서를 내밀었을 때, 그는 두말없이 사인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엄마 저러다 큰일 나. 마음도 몸도 약한 사람이야. 네가 이해를 해줘야지, 응? 제발 부탁한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서 지내는지, 자퇴를 한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아들에 관해서는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너는 성적도 이렇게 좋고, 여러모로 아깝다.
안타까워하는 담임에게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교실로 갔다. 건물 보수 공사 때문에 2학년은 3학년 교실로 옮겨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다행히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물함에 넣어둔 물건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사진과 병원 진단서가 든 파일도 함께 챙겨 넣었다. 이게 친권 상실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재판 결과에는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교실을 둘러봤다. 그 어떤 감흥도 없다. 뒷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조지현.”
어딘지 다급한 최기열의 목소리에 조지현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너 자퇴한다며? 진짜야?”
교무실에서 담임과의 상담 도중에 심부름을 왔던 같은 반 녀석 하나가 힐끔거리며 이쪽을 쳐다본 기억이 났다.
“진짜 자퇴해?”
“응.”
최기열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조지현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최기열이 그날 우산만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그날 어머니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제 어머니한테 학교에서의 소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굳이 이런 이유를 찾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기열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일은 모두 끝났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얽히는 게 이상하게 불길했다.
“먼저 갈게.”
조지현이 최기열의 옆으로 비켜 걸었다. 최기열이 조지현을 막아선다.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나는 어쩌라고.”
마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가 배신당했다는 투다. 조지현은 황당함에 눈을 치떴다. 최기열이 벌게진 얼굴로 말을 잇는다.
“너 학교 왔다는 얘기 듣자마자 뛰어왔어. 네가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면 난…….”
최기열의 시선이 조지현의 목덜미에 멎는다. 그가 손을 뻗어 조지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뭐하는 짓이야.”
조지현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가 조지현의 옷자락을 내렸다. 목덜미와 어깨에 남은 흔적을 확인한, 최기열이 헛웃음을 짓는다. 그가 시발, 하면서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걸레 같은 년.”
“…….”
“강석원한테 이미 대줬냐?”
조지현은 그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넌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뭐?”
최기열의 눈에 짙은 분노가 스민다.
“내가 선배님하고 뭘 하는지가 그렇게 궁금해?”
최기열이 주먹으로 조지현의 얼굴을 내리쳤다.
“닥쳐!”
책상 위로 쓰러지면서 책상이 와장창 무너졌다. 조지현은 몸을 일으키고 코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얼굴 때리지 마.”
“뭐?”
“상처 남는 거 싫으니까.”
몸은 어떻게든 숨길 수 있겠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다. 강석원이 알면 분명 삼키지 못할 화에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 내 몸에 손대지 마. 다음에는 그냥 경찰에 신고할 거야.”
조지현이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멨다. 교실을 나가려는데 최기열이 조지현의 머리채를 뒤에서 움켜쥔다.
“――!”
그러고는 조지현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트렸다.
“시발, 왜 걔한테는 대주고 나한테는 안 대주는데. 그 새끼는 뭐가 그리 대단해서!”
최기열이 조지현의 목덜미를 물고 흥분한 아랫도리를 문질렀다.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조지현이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애초에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궁금하냐고? 그래, 궁금하다고 하면 말해줄 거야? 그 새끼가 언제 어디서 너 처음 따먹었어? 다리 벌리고 앞에서 박은 거야? 아님 뒷치기한 거냐? 대답해 봐.”
조지현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최기열은 윽박질렀다.
“강석원이 네 뒷보지를 들락거렸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조지현은 그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최기열이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손을 뗐다. 조지현은 몸을 일으켰지만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명치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조지현이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 최기열이 제 바지 퍼스너를 내렸다.
“개 같은 년이, 오늘 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그렇게 말하며 최기열이 주먹으로 몇 번이나 조지현의 배를 내리쳤다.
“뭐? 얼굴은 때리지 말라고? 시발, 그래 너도 니 얼굴 좆 꼴리게 생긴 건 아나보지? 나도 니 얼굴 생각하면서 밤새 딸친 적 많거든. 나만 그런 줄 알아? 다른 애들도 다 그랬을걸?”
최기열이 조지현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작은 돌기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번들거린다. 그가 조지현의 가슴을 더듬었다. 손끝에 걸린 돌기에 허겁지겁 입술을 대며 최기열이 중얼거린다.
“지현아, 시발……, 너 진짜 존나 야해.”
코피가 입으로 넘어가 숨이 막혔다. 조지현은 기침을 하며 간신히 숨을 내뱉었다. 최기열이 제 성기를 조지현에게 문지르며 발정 난 개처럼 끙끙거렸다.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지현은 어떻게든 그를 밀어내려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최기열은 더 흥분해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지현아, 조지야, 시발, 진짜. 그가 조지현의 얼굴을 붙들고 입을 맞추려 했다. 조지현은 팔을 휘둘러 그를 밀어냈다. 최기열이 조지현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 너 도와주러 올 사람 없어. 이쪽으로는 사람 안 와.”
최기열이 비열하게 웃는다. 조지현이 눈에 힘을 주어 최기열을 노려보았다.
“너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아래가 터질 것 같아. 지현아, 응? 얼굴 이렇게 해 봐.”
최기열이 입을 맞추려고 턱을 돌리려 했지만,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고 있는 힘껏 버티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최기열이 하, 하고 웃음을 삼킨다.
“다정한 사람 좋다고 해서 다정하게 해준다고 해도 끝까지 지랄이지? 그래, 이젠 내 맘대로 한다.”
그가 조지현의 바지에 손을 뻗었다.
“하지 마, 미쳤어?”
설마 한낮에 교실에서 이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멍청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는 인적 없는 체육관으로 자신을 불러내는 수고를 들인 것이다.
최기열이 조지현의 바지를 끌어내리며 웃었다.
“너 옷 갈아입을 때 네가 바지 내리면 애들이 다 너만 쳐다봤어. 왜인 줄 알아?”
최기열이 조지현의 몸을 뒤로 뒤집었다. 그러고는 조지현의 속옷을 끌어내린다. 뽀얗게 드러난 살결에 최기열은 마른침을 삼킨다.
“다 말랐는데 여기만 올라붙어서, 진짜, ……, 존나 꼴려. 니 엉덩이 여자 보지보다 더 꼴리게 생겼어.”
그가 조지현의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문질렀다. 축축하고 더러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무아지경에 빠진 최기열이 들뜬 목소리로 조지현, 지현아, 하고 그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흐릿했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최기열의 말대로다. 지금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현아, 하아, 진짜……, 미치겠다. 지현아, 넣어도 되지? 응? 나 넣을게. 니 보지에 넣고 싶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금만 더, 뻗으면, 조지현은 이를 악물었다. 잔뜩 흥분한 최기열이 조지현의 목덜미를 깨물며 숨을 내뱉었다. 엉덩이 틈에 제 성기를 문지르며 틈을 찾는다. 조지현은 온몸을 타고 오르는 혐오감을 참아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으악――!”
최기열의 비명이 울려 퍼지며 피가 튀었다. 그가 제 볼펜이 꽂힌 제 허벅지를 확인하고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조지현을 보았다.
조지현은 옷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나뒹구는 가방을 움켜쥐고 교실을 뛰쳐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이나 넘어졌다. 뒤에서 최기열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혼란스런 머리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보이는 대로 달리는데 뒤에서 우악스러운 손이 조지현의 가방을 움켜쥔다.
“너 진짜 죽었어.”
최기열이 가방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조지현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최기열이 조지현의 뒷덜미를 쥐고 다시 복도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교실 안으로 들어가면 끝이다. 조지현은 주먹으로 피가 흐르는 최기열의 다리를 내리쳤다. 최기열이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조지현은 복도를 내달렸다. 계단이 보인다. 계단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시발 년이!”
최기열이 조지현의 머리채를 쥐었다. 끔찍하다.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은 제자리다. 어떻게든 고스란히 그 전철을 밟는다. 최기열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강석원은……, 결국에 자신은 강석원을, ――.
조지현은 이를 사리물었다. 절대로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조지현은 최기열의 얼굴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불시에 코를 얻어맞은 최기열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그 뒤의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화가 난 최기열이 조지현을 그대로 밀었다. 밀어낸 최기열조차 당황한 표정이었다. 몸의 균형이 뒤로 무너졌다. 계단 아래로 떨어지면서 조지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최기열은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