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암흑이다. 차가운 암흑에 누운 기분이다. 눈을 뜬 상태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어둠 속의 경계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구웅, 구웅, 구웅.
컨베이어 벨트 소리가 공기를 타고 올라온다.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무겁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지만 일렁이는 시야는 여전했다. 땡, 하는 울림 뒤에 48층입니다,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48층이란 소리에 뭔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한다. 조지현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금이 간 핸드폰이 발치에 걸렸다. 핸드폰을 주워들고 엉겁결에 엘리베이터에 탔다.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는 알아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광판에 보이는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조지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는다. 뭐가 뭔지 아직도 머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 로비에 도착했다.
“괜찮으십니까?”
엘리베이터 안에 주저앉은 조지현을 발견하고 경비원이 달려와 묻는다. 조지현은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와드릴까요?”
조지현은 손잡이를 쥐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병원에라도…….”
대답하지 않고 일어났다. 사람들의 소리가 멀어진다. 조지현은 로비를 빠져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는다.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명확해진다. 그리고 점점 이전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 아니 과거와 현재가 뚜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고를 당했고, 눈을 떠보니……. 조지현은 제 뺨을 철썩 쳤다. 얼얼한 고통에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세게 제 얼굴을 내리쳤다. 지나가던 사람이 못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옆으로 비껴 걷는다.
현실이다. 현재로 돌아왔다. 또, 돌아오고 만 것이다.
어째서, 대체 왜.
조지현은 자신이 기억을 잃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마지막 통화는 정확히 7분 전이다. 7분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은…….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강석원을 두고 왔다. 영영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서울역에서 기다려. 그와의 마지막 통화에 심장이 짓이겨지는 기분이다. 그러다 문득 쓰러지기 전, 이곳에서도 통화를 했던 게 떠오른다. 통화목록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저장하지는 않았지만 또렷이 기억하는 번호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강석원에게 가야 한다. 이곳에도 강석원이 있다. 그를 만나야 했다.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강석원은 자신과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운동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누구에게도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고, 그는 그날 약속했다. 그렇다면 분명…….
피잣집 앞에 도착했다. 강석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현은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끝이 떨려 몇 번이나 숫자 패드를 잘못 눌렀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며 강석원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탈칵, 하는 연결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선배님. 접니다. ……조지현.”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혹시나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인가 두려워 조지현은 화면을 확인했다. 통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선배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듣고 싶지 않아.」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온다. 달라진 게 없는 걸까. 돌아가기 전과 남자는, 같은 상황인 걸까.
“선배님, 만나서 얘기해요.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제발, 한 번만…….”
빠앙, 하는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무단횡단을 하려던 사람에게 운전자가 고성을 지르며 지나갔다. 조지현은 그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도 들렸음을 확인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강석원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러다 길 건너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한다.
“선…….”
그에게 다가가려다 눈이 마주친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다. 서늘한 증오가 내리꽂힌다. 운동을 그만두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래를 망치는 선택은,
「이제 이 번호도 없앨 거니까. 네 전화 받는 일도 이게 마지막이야. 그거 말하려고 받은 거야.」
강석원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선다.
“선배님!”
조지현은 인도를 내려왔다. 차도를 가로지르려 하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위로 향한다. 별들이 하늘을 긋는다. 그리고 그 순간 땅이 살아있는 것처럼 꿀렁, 흔들린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력을 잃은 것처럼 의식이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
진저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진창에 처박혔다가 숨이 막히기 직전에 건져진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한참 동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소리가 들린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자신의 숨소리임을 깨닫는다.
“지현아. 정신이 드니? 나 엄마야. 정신이 좀 들어?”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가 울린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병원의 흰색 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환자분, 정신이 들어요?”
조지현은 눈을 껌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 여기 어디예요?”
“네?”
“몇 년도, 몇 월 며칠이에요?”
어머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간호사도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의사를 콜한다.
“너 왜 그래? 머리 다쳤어? 얘가 지금 왜 이래요?”
“환자분. 지금 의식이 명확하지 않아요? 본인 이름이 뭔지 알겠어요?”
“너 버스 사고 나서 지금 병원 온 거야.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 없다는 애가 대체 왜 이래!”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 버스 사고라는 말에 조지현은 다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조지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야 해요.”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긴 어딜 가. 지금 그러고 어딜 간다고.”
아버지가 아들의 앞을 막아섰다.
“가야 해요. 만나기로 했어요. 선배님,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길 건너에서 자신을 서늘하게 노려보던 남자의 눈이 떠오른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자신이 아는 두 명의 강석원이 뒤엉킨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확인하고 싶다. 자신을 아직, 좋아하고 있는 강석원을.
“선배님, 만나기로 했어요. 가야 해요.”
조지현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바람에 링거병이 넘어져서 바닥에 유리파편이 튀었다. 맨발로 그걸 밟아 발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조지현은 밖으로 나가겠다고 버텼다.
“지현아, 왜 이래. 의사 선생님! 빨리 의사 불러 와!”
아버지가 조지현의 팔다리를 붙들었다. 조지현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발버둥 쳤다.
“놔! 가야 해요! 선배님, 약속했어. 가야 해요!”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조지현을 간호사와 의사가 달려들어 침대에 눕혔다. 안정제를 팔에 맞으면서도 조지현은 울부짖었다.
선배님, 선배님, 선배님 찾아야 해요. 만나기로 했어요. 선배님.
약 기운이 돌아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조지현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키려던 조지현은 링거병과 연결된 제 팔을 확인했다. 침대에 끈으로 묶어둔 게 보였다.
“이건 네가 또 너도 모르게 흥분할까 봐. 다시 상태가 안정되면 바로 풀어줄 거야.”
“……오늘, 무슨 요일인가요.”
“월요일 새벽.”
꼬박 이틀 동안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는 뜻이다.
강석원은 집으로 돌아갔을까.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아빠는 집에 좀 갔다 올게. 혹시 몰라서 며칠 입원해야 한다니까, 챙겨올 것들도 있고. 네 엄마도 걱정되고.”
“다녀오세요.”
차분한 대답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말한다.
“지현아. 다친 데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네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사고 소식 듣고 정말 놀랐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근데 그 시간에 대체 그 버스는 왜 탄 거야. 도서관 가는 방향도, 집으로 오는 방향도 아니었다고 엄마가 그러던데.”
그 와중에 버스 노선까지 확인한 여자의 주도면밀함에 소름이 돋았다.
“어디 가던 길이었어요.”
아버지가 그래, 하고 아들의 눈치를 살핀다. 조지현은 안 가세요? 하고 고개를 돌려 묻는다.
“무슨 일 있으면 간호사 선생님께 말씀드려. 바로 올 테니까.”
“네.”
아버지가 병실을 나갔다. 자신의 상태 때문인지 혼자 일 인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간호사가 조지현의 손을 묶은 끈을 풀어주었다.
“환자분, 이제 정신이 좀 들었어요? 손은 원래 안 묶어두는데, 보호자분이 원하셔서 그런 거예요. 원래 사고 당하고 처음 눈 뜨면 그렇게 흥분 상태 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너무 걱정 말아요.”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자 간호사가 저도 모르게 혀를 쯧쯧 찬다. 아들을 묶어두라고 어머니가 어떤 난동을 피웠는지, 조지현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저 벨 누르면 돼요. 원래 보호자가 계속 같이 있어야 하는데…….”
“혼자 있어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간호사가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알려주고 병실을 나갔다. 조지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3시가 넘어 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시간은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머릿속에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큰 맥락을 중심으로 자잘한 의문을 그 아래에 두고, 비슷한 것끼리 묶어둔다. 공부를 할 때 정보를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두 번이나 그때로 돌아갔다. 대체 왜, …….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다. 자신이 기억을 잃고 그때로 돌아간 시점.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랬다. 강석원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조지현은 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앞으로도 그에게는 아무것도 털어놓지 못한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그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다. 다음에는 아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강석원을 잃는다. 지금 당장 그에게 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자신을 노려보던 길 건너의 남자가 떠올라 차마 그럴 수 없다.
처음에는,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를, 서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던 강석원을 떠올린 순간 가슴이 미어진다. 길 건너에 강석원을 영영 두고 온 기분이 들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그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조지현은 몸을 웅크리고 울음을 삼켰다.
아침 일찍 입원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온 아버지는 병상을 몇 시간도 지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어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서 안절부절 못하는 그에게 조지현은 돌아가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거절하지도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씁쓸하다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이라고 여기니, 이제는 차라리 시원한 기분마저 들었다.
제법 큰 교통사고였음에도 버스 내의 승객들은 거의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이 전부였다. 그건 조지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첫날의 상황 때문에 며칠간 입원을 하고 두고 보자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종종 뇌출혈 증상이 늦게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그럼 공부하는 것도 지장 있나요, 하고 물었다. 의사가 당황해서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거듭 학습능력 저하와 관련이 있냐고 질문했다. 지금 당장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의사는 황망함에 조지현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대답했다. 조지현은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후로 의사도 간호사도 조지현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자신에게는 일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강석원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손에 동전 하나 쥐지 못했다. 옷에 남아있던 돈은 어머니가 모두 꺼내 가져갔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용돈을 좀 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예상치 못하게 강건한 거절이 돌아왔다. 그것도 모두 어머니의 뜻일 거라고 짐작했다. 예민한 만큼, 눈치가 빨랐다. 자신의 기질의 많은 부분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데스크에 가서 부탁이라도 해볼까, 하다가 도로 침대에 주저앉기를 여러 차례였다. 결국 강석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자신이 그를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간호사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뒤로 들어선 남자를 보고 조지현은 그대로 굳는다.
“학교 친구라고 하던데요?”
간호사가 강석원을 가리키며 말한다. 조지현이 넋이 나간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링거 주입 튜브에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약물이 천천히 혈관을 타고 몸으로 들어왔다. 조지현은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강석원을 바라보기만 한다.
“다 됐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죠?”
“네. 없습니다.”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대답했다. 병실을 나가려던 간호사가 강석원을 보고 친구 진짜 크네, 하고는 문을 닫는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은 후에도 강석원은 선 채로 꼼짝하지 않는다. 말을 건네거나 다가와 손을 잡지도 않는다. 한참을 쳐다보기만 한다. 조지현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천천히 깨닫는다. 강석원의 시선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샅샅이 조지현을 더듬는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몇 번이고 느릿하게 조지현의 무사를 곱씹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탐색을 끝내고 나서야, 남자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쉰다.
강석원이 침대로 다가선다.
“걱정했어.”
그 담담한 한마디에 실린, 수많은 의미가 숨 막힐 듯한 무게로 다가온다. 서울역에서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자신을 그는 얼마 동안, 어떤 심정으로 기다렸을까.
“많이 걱정했어.”
조지현이 어떻게, 하고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는다.
“네가 안 와서 기다리다가 집에 전화했어. 집으로 찾아갈 수는 없어서. 아버지랑 통화했어. 같은 반 친구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의심 사는 일 없을 거야.”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며 제 걱정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남자의 마음이 참담할 만큼 다정하다. 밤늦은 시간에 달려오면 혹시라도 의심을 받을까 봐, 강석원은 평범한 친구가 찾아올 법한 시간에 맞춰 면회를 온 것이다. 강석원의 얼굴이 평소보다 초췌하다. 이틀 동안 꼬박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조지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가 더럭, 굳은 표정으로 묻는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젓고는 선배님, 하고 그를 가만히 부른다. 강석원이 응, 하고 다가선다.
“선배님, 저, ……. …….”
자신을 바라보는 강석원의 얼굴에 길 건너 남자의 모습이 덧씌워진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다. 그를 종래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다.
“제가, 선배님을,”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놓는다. 그것에 관해서는 언급하면 안 된다. 그게 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규칙이다.
강석원은 묵묵히 서서 조지현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저……, 믿으십니까?”
“믿어.”
“제가 하는 말도, 믿어주실 건가요.”
“그래.”
강석원이 담담하게 제 다짐을 말한다.
“제가, 선배님 인생을 망칠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냥 들으세요.”
조지현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손톱이 새하얗게 일어날 정도로 시트를 힘껏 움켜쥐고, 조지현은 말을 이었다.
“저는 선배님을 불행하게 할 겁니다. 어떻게,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 분명히 그렇게 될 거예요. 저 때문에 선배님은, ……, ……, 죄송해요.”
조지현은 새빨간 눈을 들어 강석원을 바라본다. 맺힐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뺨을 적신다. 조지현은 온통 얼굴을 찡그린 채로, 말한다.
“쓰레기 같은, 정신병자인 제가 당신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 겁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조지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몇 번이고 삼켜냈다.
길 건너의 강석원이 잊히지 않는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차가운 시선이, 분노가, 그의 외로움이…….
그를 거기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다.
“어떡하죠.”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고 조지현이 묻는다.
“나, 그런데, 선배님 놓고 싶지가 않아요.”
“…….”
“선배님 좋아하면 안 되는데, 계속 좋아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지현이 울음을 터트렸다. 손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역류한 피가 링거 호스를 올라간다. 이기심인 것을 알면서 강석원을 놓을 수 없다. 영영 그곳에 서 있을 것 같은 강석원을, 지금이라도 당장 가서 끌어안아 주고 싶다.
“너무 좋아해서, 계속 좋아져서, 전보다 더……, 선배님, 미안해요, 내가, ……좋아해서, 죄송합니다. 나만 아니었으면, …….”
거세게 끌어 안긴다. 울지 마.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고 속삭인다. 지현아,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나직한 목소리에도 조지현의 울음은 잦아들지 않는다.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선배님.”
“네가 시키는 대로 하고,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게. 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강석원이 조지현을 마주본다. 그의 깊은 눈매에 두려움이 서린다.
“나 놓지 마.”
“…….”
“나, 포기하지 말아줘, 지현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 미친 소리를 참아줄 뿐만 아니라, 네가 하라는 대로 모든 것을 하겠다고 남자는 발밑에 엎드려 굴복한다. 그 깊고 깊은 감정에 결국에, 한계선이 무너지고 만다.
“사랑해요.”
조지현의 단정한 얼굴이 울음으로 일그러진다.
“사랑한단 말이에요.”
그 말에 강석원은 탄식처럼 숨을 토해내며 조지현을 안았다. 그는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조지현을 보듬어 안고, 제가 가진 전부를 손으로 더듬어 확인할 뿐이다.
지현아.
이윽고 입을 연 강석원이 조지현을 불렀다. 조지현은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서 미안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너를 만나겠다던 남자가 제 온 마음을 고백한다. 사랑해. 진심으로.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마에, 뺨에,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사랑해, 지현아. 사랑해.
그날 들은 숱한 고백이 물처럼 밀려들었다. 물에 잠겨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강석원의 고백을 간신히 버텨냈다.
강석원은 그날 병실을 지키다 저녁 늦게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 올게, 하고 말하는 강석원에게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하고 묻는 강석원의 표정이 굳었다. 조지현이 그대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건 아닐까. 본능적으로 그는 조지현의 불안을 읽었다.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약속했다. 절대로 선배 혼자 두고 가지 않을 겁니다. 진심이었다. 강석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는 병실을 찾았다. 네 엄마 상태가 좀 안 좋다. 몸도 아프고 헛소리도 계속 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아들을 앞에 두고 그는 제 아내에 대한 걱정을 토로했다. 얼른 가보세요. 이번에도 그렇게 말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병실의 밤은 고요했다. 약기운이 아니었다면 잠들지 못했을 정도로. 죽음 같은 고요가 숨통을 짓누른다. 그렇게 며칠을 버텨내고 퇴원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아들을 붙들고 물었다. 지현아, 너 머리는 괜찮니? 이상해진 건 아니지? 공부하는 데 지장 있는 건 아니지? 가여웠다. 이제는 혐오보다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조지현은 괜찮습니다,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방까지 쫓아와 끈질기게 물었다. 학교는 언제부터 나갈 수 있어? 수업 너무 뒤처지면 네가 더 힘들까봐 그래. 내일부터 나갈 겁니다. 아무 이상도 없다고 했고요. 어머니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진다. 여전히 꽃같이 아름다운 여자다. 저 피곤한데 좀 누울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여자는 방에서 나갔다. 조지현은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는 복잡하지만 결론은 명확하다. 말없이 강석원을 떠나지 않는다. 그뿐이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절대로 운동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강석원이 운동보다 우선에 두는 것.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조지현은 결심을 다잡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등굣길에 강석원을 만났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말을 건네지도 않고 눈인사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조지현을 확인한 후 그는 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강석원은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지현은 일부러 바로 그 앞에 앉았다.
“괜찮아?”
나직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온다. 조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안도의 한숨이 들린다. 학교로 가는 내내 강석원은 아무 말이 없다. 조지현의 불안을 모두 감내하겠다는 듯이, 그는 담담하게 제 마음을 갈무리했다.
학교 현관 앞에서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작게 눈인사를 했다.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히 풀렸다. 그뿐이었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몸짓에, 위로를 받는다.
조지현은 교실로 들어가 가방을 내렸다. 책을 꺼내고 필통을 여는데, 이쪽을 쳐다보는 몇몇 시선이 미묘하게 거슬렸다.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는 것은 익숙했다. 어머니가 물려준 외모 때문이다. 남학교에서 곱상한 외모는 생활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선은 늘 무시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무시했다.
“저기, 이거.”
조지현은 앞에 앉은 급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진도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 시발.”
거칠게 욕을 내뱉는 녀석을 보고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구나, 하고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짝인 홍순일이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였으면 인사말정도는 건넸을 텐데, 며칠간 결석을 한 짝을 보고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거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조지현이 물었는데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몰라, 하고 어색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조지현은 멍하게 홍순일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담임선생이 들어오는 바람에 몸을 바로 돌렸다.
담임은 간단한 조회를 하고 바로 교실을 나갔다. 교실은 바로 활기찬 소란으로 가득했다. 일 교시를 준비하려고 교실 뒤 사물함으로 걸어가는 조지현에게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호모 새끼.”
책을 꺼내려던 조지현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무리를 보고 조지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신경이 예민해진 거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바로 뒤따르는 욕설이 정확히 자신을 겨냥하지 않았다면.
“조지, 진짜 호모였어?”
“생긴 것만 그런 줄 알았더니. 존나 토 나와.”
조지현은 사물함을 닫았다.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조지현은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떠들어대던 놈들이 당황한 듯 눈을 피한다.
조지현은 자리로 돌아왔다. 책을 폈지만 글자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자신을 짓궂게 놀려대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낸 경우는 없었다.
자신이 결석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펜으로 가볍게 책장을 두드리던 조지현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최기열이었다. 뭔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녀석처럼 그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소문의 주범이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떠들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변하지 않는 그의 비열함에 넌더리가 났다.
어차피 상관없다. 원래도 다른 애들하고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조지현은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지현은 사물함을 열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책 한 권이었다. 그 다음에는 실내화, 이번엔 사물함이다. 사물함에 처박힌 쓰레기를 끄집어내며 조지현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책이 보이지 않는다.
“아, 시발 냄새. 어디서 호모냄새 안 나냐?”
“조지는 자지를 좋아해서 조오지인가? 그럼 차라리 자지현으로 이름을 바꾸지 그래?”
“아니, 보지현 어때. 호모들은 여자처럼 섹스한다던데. 그럼 보지도 달렸을 거 아니야.”
잔인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조지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쓰레기를 모두 끄집어내고 사물함을 비웠다. 그러고는 낄낄거리는 녀석들에게 걸어갔다.
“어디 있어?”
“뭐?”
“내 책 어디 있냐고.”
“시발. 그걸 왜 나한테 찾아. 호모 옮아. 말 걸지 마.”
“책 돌려 놔. 그건 절도죄니까.”
“뭐?”
녀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조지현은 다음 시간까지 돌려 놔, 하고는 교실을 나섰다. 다른 아이들이 조지현을 놀리고 괴롭힐 때마다 최기열은 구석에 앉아 웃다가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예나 지금이나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화장실로 들어간 조지현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쓰레기를 끄집어내느라 손에서 썩은 내가 났다.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내고 있는데, 한 무리의 2학년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중 몇의 얼굴이 낯익다. 최기열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놈들이었다.
“오우, 조지. 뭐하냐. 남자 화장실에서. 넌 여기 오면 안 되잖아. 남자 오줌 싸는 거 훔쳐보려고 온 거야?”
더러운 농담에 와르르 웃음이 터진다. 조지현은 물로 손을 깨끗이 씻어내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어디 가?”
최기열과 자주 어울려 다니는 녀석 하나가 조지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교실.”
“공부는 해서 뭐하냐. 나중에 남자한테 다리나 벌리면서 살면 될 텐데.”
조지현이 옆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이번에도 가로막힌다.
“비켜.”
“시발, 진짜 싸가지 없네. 호모새끼 주제에.”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어쭈, 웃어?”
녀석이 조지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최기열이 이러라고 시켜?”
조지현의 물음에 녀석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정곡을 찌른 것이다. 말없이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하던 녀석이 조지현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너는 내가 무슨 개좆밥인 줄 알아?”
“그런 말한 적 없어.”
“시발 새끼가.”
녀석이 갑자기 구석에 놓인 양동이를 가져와 조지현의 머리에 부었다. 대걸레가 담겨있던 물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복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쯤하면 겁을 먹고 기세가 꺾일 거라 생각했는데, 조지현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너같이 드러운 호모 새끼를 낳고 니네 엄마는 미역국을 먹었대?”
보통의 사람에겐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할 비아냥거림이었다. 조지현은 무표정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물에 젖은 눈이 묘한 선정을 자아냈다. 조지현을 둘러싼 몇 명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조지현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미역국 싫어해서 안 드셨을 거야. 평소에도 입에 안 대셔.”
조지현의 대답을 들은 녀석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더 물어볼 거 있어?”
조지현이 교복의 물기를 짜내며 묻는다. 녀석이 입술만 달싹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때리지는 못한다. 그것도 아마 최기열이 시켰을 것이다.
“없으면 비켜.”
녀석들이 주춤주춤 자리를 비켰다.
평생 타인의 악의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다. 누군가의 막말에 새삼 상처받지 않는다. 적당히 무반응으로 돌려주면 상대도 언젠가는 지쳐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차피 평생 볼 인간들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는 소문이 돌지 않았다. 소문의 당사자 귀에 들어갔다가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최기열도 알기에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최기열다웠다.
오늘 오전에 체육 수업이 있어 다행이었다. 젖은 교복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근처의 빨래방에 맡기면 된다. 문제는 냄새였다. 오래된 걸레를 담가놓았는지 움직일 때마다 불쾌한 냄새가 올라왔다.
어디 가서 샤워라도 하고 싶은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수업은 음악실, 이란 글자가 칠판에 보였다. 조지현은 일단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젖은 교복을 비닐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차라리 담임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오늘은 조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실을 나가려는데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최기열이다.
“조지현.”
그가 초조한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왜.”
“얘기 좀 하자.”
조지현은 해보라는 듯이 최기열을 쳐다보았다.
“너 사고 났다는 얘기 어머니한테 듣고 병실 찾아갔었어. 그리고 봤어, 강석원 그 새끼가 너한테 그 짓 하는 거.”
병실로 찾아온 강석원은 우는 자신을 달래고, 불안해하는 자신의 곁을 지켰다. 그뿐이었다. 그게 최기열의 눈에는 그 짓으로 보인 것이다.
“너, 그거 내가 애들에게 잘 말해줄 수도 있어.”
제대로 된 단어로 지칭하지도 않는 최기열의 비겁함에 조지현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내가 잘 말해준다고. 그러니까……. 강석원 그 새끼하고는 만나지 마.”
“할 말 끝났어?”
최기열이 조지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넌 왜 나한테만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한테만 그따위로 좆같이 구냐고.”
조지현은 최기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럼 넌 왜 나한테 그래.”
“뭐?”
“나한테 대체 왜 그러냐고.”
최기열이 그거야, 하고 말을 더듬는다.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조지현은 최기열이 싫었다. 비열하고 욕심 사나운 최기열이란 인간 자체도 싫었지만, 그가 저지른 일로 인해 강석원이 들어야 했던 말들을 용서할 수 없다. 짐승 같은 새끼. 이래서 아비어미 없는 것들은 가정교육이 그 모양이라고. 그 모욕은 모조리 최기열에게나 돌아갔어야 했던 것이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 부모님에게 가정교육 제대로 받고도 인간 노릇 못하는 놈.
“나 너한테 잘못한 거 없어.”
조지현이 최기열을 보며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지금도 새카만 벌레가 전신을 기어 다니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정신을 뒤흔들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길 건너에 혼자 서 있을, 그 남자를 위해서다.
“아직까지는 서로 잘못한 거 없어. 그러니까 부탁할게. 제발 이번에는, 그러지 마. 너도 바닥까지는 가지 말라고.”
“지현아. 그래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러니까 나하고 얘기 좀 하자.”
최기열이 초조하게 조지현의 손을 잡는다.
“할 말 없어.”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게진 최기열이 시발, 하고 이를 사리문다.
“얘기 좀 하자는데 뭐가 그렇게 잘났어? 사람이 잘해주니까 내가 병신호구로 보이냐? 너 오늘 진짜 내손으로…….”
최기열의 협박은 온전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들어온다. 최기열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강석원이 최기열의 머리통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복도 난간 모서리에 내던진다.
“선배님……!”
조지현이 비명처럼 외쳤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최기열의 얼굴이 난간 모서리 앞에서 멈춘다. 최기열이 히이, 히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숨소리를 낸다. 그도 아는 것이다. 강석원이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그대로 자신의 한쪽 눈이 완전히 망가졌을 거라는 사실을. 언제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 완전하게 제 몸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강석원이 최기열을 쥔 손을 놓는다. 눈이 마주치자 최기열이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부들부들 떨었다.
“네 손으로 어떻게 할 건데.”
강석원이 묻는다. 화를 내는 투도 아니고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다. 그런데도 상대는 위압감에 짓눌려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어떻게 할 거냐고.”
강석원이 재차 물었다. 조지현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강석원이 잠깐, 하고 조지현의 손을 놓고는 최기열을 일으켜 세운다. 최기열은 맹수를 앞에 둔 비루먹은 개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대답해.”
강석원의 시선이 최기열의 손에 닿는다. 대답 여하에 따라 손의 안녕이 갈린다는 사실을 최기열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안할, 게요.”
최기열이 간신히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 손을 놓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최기열은 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내가 네 목을 부러트리지 않는 건,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야.”
사나운 짐승은 제 흉포함을 평연하게 내보였다.
“너도 약속 지켜.”
강석원이 가자, 하고는 조지현의 손목을 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조지현은 교무실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하고 입을 연다.
“내가 나중에 말씀드릴게.”
“그래도…….”
“조지현.”
계단을 내려가던 강석원이 멈추어 선다.
“너 지금 손 떨고 있어.”
“…….”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제 손을 내려다본다. 제어를 잃은 것처럼 손이 마구 떨리고 있다. 참아낸다고 했는데 최기열에 대한 트라우마는 좀처럼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조지현은 죄송합니다, 하고 손을 재빨리 뒤로 숨겼다.
강석원이 눈을 내리감은 채, 턱을 단단히 당긴다. 뭐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에 그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다.
“가자.”
그가 조지현의 가방을 대신 받아들었다. 조지현은 이번에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강석원은 꼼꼼하게 조지현을 씻겨주었다. 자신이 하겠다고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강석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제 고집을 부리는 일은 드물었다. 조지현은 결국 그에게 몸을 맡겼다. 비누를 사이에 두고 그의 손이 몸의 구석구석을 스쳤다. 강석원이 거품을 내서 몸을 문질렀다.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닦아준다. 강석원은 말없이 씻기는 데 열중했다. 강석원의 굵직한 손가락이 어루만지고 지나간 자리의 열기를 물이 씻어 냈다.
“머리 감겨줄게. 몸 돌려.”
조지현은 몸을 돌리고 가만히 강석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눈 감아. 거품 들어간다.”
눈을 감았다. 강석원의 손가락이 두피를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강석원의 손이 머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목덜미를 만졌다. 비눗기가 어느 정도 사라졌는지 샤워기의 물이 등으로 내려왔다. 거품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강석원은 샤워기로 조지현을 헹궈주었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커다란 수건으로 감싼 후, 욕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몸에 담요를 둘러준 후에 그는 선풍기를 켰다.
머리카락을 말려주면서도 그는 아무 말도 없다. 상황에 대한 질문도, 최기열에 관한 비난도 없다. 앞으로 어떤 것도 일체 묻지 않고 조지현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왜 네가 죄송해.”
미묘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강석원이 이미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어차피 남 얘기, 며칠 떠들다 말 겁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머리카락을 말려주던 손이 멈칫 멎는다.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버텨냈을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길 건너에 서 있던 강석원이 떠오른다. 몇 년간 자신을 찾아 정신병원을 헤맸을 남자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돌려 저를 보게 한다. 조지현의 시선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최기열 겁 많아요. 아까도 보셨잖아요.”
조지현은 일부러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다시는 그러지 못할 겁니다. 괜찮아요.”
모든 일은 큰 맥락에 따라 흐른다. 사건의 경중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렇다면 최기열과 강석원의 악연도 오늘로써 끝난 것이다. 노트에 정리된 사건은 거의 빨간 펜으로 엑스표가 그려졌다. 남은 것은 어머니뿐이다. 가장 큰 산이기도 하다.
“괜찮아요, 선배님.”
그가 자신에게 했던 위로를 강석원에게 건넨다. 조지현은 강석원이 늘 굳건하리라 생각했다. 아름다울 만큼 강하고, 흔들림 없는 마음을 지닌 사람. 하지만 그가 제 마음을 지켜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극복했는지, 이제야 그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는 괜찮습니다.”
스스로를 다잡듯이 분명하게 말한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는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다. 그 경건하고 신성한 몸짓에 조지현은 할 말을 잃는다. 강석원은 거리낌 없이 제 신앙을 드러냈다.
“나는,”
강석원이 입을 연다.
“네가 아니면 안 돼.”
“…….”
“전부 다 그래.”
단순한 말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수업시간에 배운 유명한 시를 읽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남자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조지현은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고개를 떨군다.
강석원이 다시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털털털, 돌아가는 선풍기의 엔진 소리가 심장을 쿵쿵 울렸다.
조지현이 선배님, 하고 강석원을 불렀다.
“왜.”
물기가 거의 말라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흐트러트리며 강석원이 대답했다.
“……, 입 맞추고 싶습니다.”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조지현의 목덜미를 쥐어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는다. 선풍기의 미풍이 얼굴을 간질였다. 조지현은 몸에 두른 담요를 끌어내렸다. 강석원이 눈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담요자락을 여며준다.
“오늘은 몸 상태 안 좋잖아.”
괜찮다고는 해도 이래저래 힘든 날이었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담요째 바닥에 눕혀주고는 그 옆에 눕는다.
“한숨 자. 저녁에 깨워줄게.”
“운동은 안 가세요?”
“너 보내고.”
조지현은 흐리게 웃으면서 눈을 감는다. 발치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강석원이 가만가만 조지현의 가슴께를 도닥인다.
“선배님.”
“응.”
“운동 계속하셔야 해요.”
“저녁에 간다니까.”
자신의 말을 엉뚱하게 받아들인 강석원의 대답에 조지현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강석원이 바닥에 손을 짚고 그대로 조지현의 입술을 삼킨다. 입술이 벌어지고 혀가 뒤섞이는 질척이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강석원이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인 열기가 조지현에게 닿는다. 조지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감다가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맞거나 한 것도 아니고, 뜨거운 물로 샤워해서 감기도 안 걸릴 거고, ……. 괜찮을 거 같은데요.”
강석원이 눈을 살짝 치뜬 채로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번에도 대체할 단어를 찾지 못해서 조지현은 처음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선배님이랑 섹스하고 싶습니다.”
“…….”
자신이 이 단어를 꺼낼 때마다 남자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조지현은 어물거리면서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연애 소설을 읽어본 것도 아니고 관련 영화를 본 기억도 없다. 성인이 되어서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 기억뿐이다.
“적절치 못한 말인가요?”
강석원이 적절치 않다기보다, 하고 말끝을 조금 늘인다.
“너치고는 대단히 직설적인 표현이라, ……조금 놀라워서.”
남자의 쭉 뻗은 콧대는 청동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조형미가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그의 무표정도 거기에 한몫 했다. 그런 그가 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그 순간을, 조지현은 좋아했다.
“그럼 이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내 앞에서는 괜찮아.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하지 말고.”
“싫어하시는 표현이면 안 쓸게요. 다른 말로, 생각해볼 테니까…….”
“좋아해.”
“…….”
“너무 좋아서 문제지.”
그렇게 덧붙이는 강석원의 무표정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스민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의 얼굴이 더 붉어지는 것 같다. 강석원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조지현이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의 옷자락을 가만히 붙든다.
“미안해.”
강석원이 제 뺨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한 말, 어기는 거 싫어하는데.”
너랑 하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아.
강석원의 나직한 음성이 뒤따른다. 조지현은 몸을 일으켰다. 담요가 바닥에 툭, 떨어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날것의 몸이 드러난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몸을 따로 움직인다. 성체를 대하듯 공손하던 남자의 시선은 사라지고 짙은 화기가 스민다. 그것이 곧 끝 간 데 없는 정욕임이 여실히 폭로된다. 강석원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진다. 뒷머리가 잡힌다. 난폭한 키스가 이어진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배에 닿을 만큼 딱딱해진 성기를 조지현의 배 부근에 문지른다. 십여 일을 굶주린 야수처럼 그는 제 기갈을 드러냈다. 깡마른 몸에서 유일하게 솟아오른 둔덕을 강석원이 손바닥 가득 움켜쥔다. 강석원이 젖은 입술을 물어뜯고 혀를 빨아댄다. 읍, 음,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뒤따랐다. 기다란 손가락이 입구를 더듬었다. 푸욱, 하고 손가락을 안에 담근다. 흠칫 튀어 오르는 조지현의 몸을 강석원이 끌어안고 손으로 구멍을 넓혔다. 강석원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조지현은 두꺼운 팔에 매달려 새된 신음을 흘렸다. 이마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금세 단정한 눈가에 붉은 기가 어린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며 흥분했다. 굵직한 손가락이 구멍을 드나들며 아래를 흐물흐물 풀어냈다.
“선배님…….”
조지현이 참지 못하고 강석원을 불렀다. 동시에 구멍이 움찔거리며 강석원의 손가락을 조였다.
강석원이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하, 응, 아, 아, ……, 아.
조지현이 시트를 그러쥔 채 신음을 흘렸다. 엎드려 누운 채 남자를 뒤로 받는 자세는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조지현이 유난히 힘들어하는 체위였다. 강석원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흡사 바위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조지현은 그가 성기를 조금이라도 깊게 박을 수 있도록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그 움직임이라고 해봤자 허리를 들썩이는 정도였지만 그 미약한 행위에 남자는 머리가 터질 듯이 흥분하고 만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몸을 끌어안고 남자는 폭력적인 욕정을 한껏 박아 넣었다. 단단하고 굵직한 성기가 이미 두 번의 사정으로 질척이는 내벽을 쳐댔다. 배 아래부터 가득 밀려드는 감각에 조지현은 가쁜 숨을 헐떡였다.
“지현아.”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땀이 흘러내려 습한 온기가 등을 끌어안는다. 지현아, 지현아, 강석원의 음성이 등에 직접 닿는다. 조지현 역시 이미 세 번의 사정을 한 후였기에 아랫도리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저릿저릿했다. 그런데도 강석원이 이름을 부르며 등에 입을 맞추면 몸이 화답하듯 반응한다. 세포가 일제히 곤두서는 감각이다. 예민하게 날이 선 살갗을 강석원이 뜨겁고 진득하게 녹여낸다. 강석원이 팽팽하게 부푼 성기를 끝까지 박아 넣는다. 눈앞이 아찔해진다.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감각에 조지현은 허우적거리며 시트를 끌어안는다. 무섭다. 평소와는 다른 이질적이고 극단적인 감각들이 전신을 허물어트린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고 무엇인지 구분도 못할 감각들을 버텨내려 애썼다.
“힘들어?”
소름이 돋은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강석원이 열기어린 음성으로 묻는다. 조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으로 꾸며내 봤자 그는 언제나 알아채고 마는 것이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목덜미를 잘게 씹는다.
“뺄까?”
“아니요, …….”
“힘들잖아.”
강석원이 땀에 젖은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뒤에서 쓸어 넘겨준다. 욕망이 저 밑바닥 근간에 가라앉은 음성이다.
“괜찮습니다.”
조지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힘들지만, ……좋습니다.”
남자의 몸으로 남자를 상대하는 것은 몇 번을 한다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행위였다. 타고난 남성성을 누르고 다리를 벌려 타인의 성기를 깊숙이 받아내는 감각, 단단한 뼈와 근육이 부딪어 흥분을 고조시키는 감각, 무엇보다 안으로 사정당하는 감각. 어느 하나 쉽지 않다.
“선배님하고 하는 섹스, 좋아합니다.”
티 하나 섞지 않은 진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이다. 강석원이 주는 모든 것이 좋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너무 좋아요.”
강석원이 허리를 숙여 조지현을 끌어안는다. 결합이 깊어지면서 아래가 빠듯하게 물려온다.
“선배……, 아…….”
단단한 성기가 얕게 찰박찰박 내벽을 찔러댔다. 조지현은 응, 하고 신음을 삼키며 시트에 고개를 묻었다. 강석원이 사정없이 퍽퍽 성기를 찔러 넣었다. 출입을 거듭할수록 성기의 강직도가 올라갔다. 성기에 뼈가 있어 발기를 지속시키는 짐승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강석원의 성기가 딱 그러했다. 단순히 혈관이 팽창해 느껴지는 강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수준이었다. 뜨끈하게 달군 쇠몽둥이를 안으로 쑤셔 박는 느낌이었다. 허벅지에 대고 문지르면 저릿저릿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 서, 선배……님.”
강석원이 조지현의 귓바퀴를 물었다. 단 것을 먹듯이 입에 넣고 혀를 굴리며 귀를 빨았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머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배 아래로 손을 뻗는다. 사정을 거듭해 완전한 발기가 되지 않은 부드러운 성기를 강석원이 움켜쥔다.
조지현이 아, 하고 허리를 뒤틀었다.
“저는, 못합……니다, 더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강석원은 손을 떼지 않았다.
“응, 아, 하아, 읏……, 서, 선……아파, ……아.”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데 거친 손바닥 위에 성기가 문질러지자 금세 아래로 피가 몰렸다.
“아――!”
강석원이 조지현의 성기를 힘껏 쥔 채로 제 좆을 쑤셔 넣었다. 거듭된 출입으로 부어오른 입구에 음모가 비벼질 때까지 남자는 바싹 샅을 밀착시켰다. 조지현이 흐느끼듯 선배님, 선배님, 하고 그를 불렀다. 옆으로 긴 눈매에 언뜻 붉은 기가 스친다. 고통과 쾌감이 엉망으로 뒤섞여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에 강석원은 이를 사리물었다.
조지현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잠시만 손을 놓아도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에 눈을 떼지 못한다. 강석원을 늘 불안케 했다. 아무리 끌어안고 가느다란 몸에 저를 박아 넣어도 충족되지 않을 목마름이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잡아 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다음, 배에 가득 정액을 싸서 채우고 싶다. 다음날 일어서지 못할 만큼,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짐승처럼 난폭한 욕망이 들끓었다.
“지현아.”
더럭 가슴을 덮는 불안감에 강석원은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어 부른다.
지현아, 지현아, 조지현. ――지현아.
조지현이 응답한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매번 미칠 듯이 집착하고, 초조해 하며, 질투하면서도, 묵묵히 그걸 감내한다. 조지현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싶었다.
강석원의 성기가 내벽을 빠듯하게 밀어내며 무게감을 더했다.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다.
“선배님……, 안에…….”
목덜미까지 발갛게 열이 오른 채로, 조지현은 헐떡이며 말을 잇는다.
“걱정 마.”
강석원은 딱 한 번 조지현의 안에 사정했다. 몹시 흥분한 저녁이었다. 그러나 조지현이 그 다음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본 이후로는 다시는 안에 사정하지 않았다.
“……안에, 사정해주세요.”
강석원의 눈이 살짝 벌어진다.
“선배님, 빨리…….”
깊은 바다 아래에 침잠한 듯한 성격을 가진 조지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혹임을 강석원은 안다. 그 보잘 것 없는 행위가 커다란 파도처럼 강석원에게 밀려든다. 강석원은 짐승처럼 흥분해 조지현의 여린 속살을 파고든다. 긴장된 근육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당겨진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사정감에 시야가 흐려진다. 강석원이 이를 꽉 문 채로 한껏 부풀어 오른 성기를 조지현의 구멍 안에서 해소시킨다.
울컥, 울컥, 꽉 물린 구멍이 움찔거릴 때마다 뿌연 정액이 흘러넘쳤다. 강석원은 몇 번 더 허리를 추어올렸다. 남은 정액을 모조리 쥐어짜서 조지현의 몸에 흘려 넣었다. 가느다란 몸이 푸욱 꺼진다. 경련하듯 숨을 몰아쉬는 조지현을 끌어안고 강석원은 한숨처럼 속삭였다.
미안해. 다시 씻겨줄게.
“이상한 기분이에요.”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지현이 말했다.
“왜?”
“평일 낮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학교가 아닌 곳에 있는 거 처음이라서요.”
“땡땡이?”
강석원의 입에서 나온 표현에 조지현은 작게 웃었다.
“네. 땡땡이. 선배님도 땡땡이죠. 운동 가셔야 하는데.”
“가야지. 이따가.”
이따가 라고 말은 하면서도 강석원은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가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귀 뒤로 넘겨준다. 의미 없고 단조로운 행위를 세상에서 제일 즐겁다는 듯이, 남자는 손을 움직인다.
조지현의 눈에 문득 강석원의 손목이 들어온다.
“선배님.”
“응?”
“문신 같은 거, 안 좋아하시죠?”
“그렇지.”
“새기지 마세요. 앞으로도.”
그의 동맥을 가로지르던 글자가 눈앞에 선하다. 조지현은 그의 손목에 입을 맞추며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의 턱 선이 날카롭다. 조지현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입을 뗐다.
“언제 경기세요?”
강석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번 주 토요일.”
“……, 나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따가.”
조지현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강석원은 언제까지고 나가지 못할 것이다.
“저기 옷 좀, …….”
조지현이 시트로 몸을 가리며 부탁했다. 속옷은 세탁기에 넣어뒀고 교복은 세탁소에 맡겨둔 상황이었다.
“여기.”
강석원이 서랍장에서 새 속옷을 꺼내 건넸다. 조지현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강석원은 조지현이 입을 속옷과 간단한 옷가지를 사다 넣었다. 세면 용품과 몇 권의 책, 참고서 등. 조지현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늘어갈 때마다 강석원은 기쁘게 자리를 내주었다.
조지현이 체육복을 입는 동안 강석원은 등을 돌리고 기다려주었다. 가방을 챙겨든 조지현이 강석원을 보며 묻는다.
“선배님, 토요일에 하는 시합은 어디서 해요?”
“잠실.”
“잠실 어디요?”
조지현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강석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
강석원이 설핏 눈을 찌푸렸다.
“왜?”
“가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너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조지현은 체육관 근처에도 되도록 오지 않으려 했다. 강석원은 당연히 자신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운동 경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선배님 경기는 보고 싶습니다.”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결국 꽃다발을 건네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그의 승리를 제대로 축하하지 못했다. 아니, 승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강석원이 이루어낸 것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함께 기뻐하고 싶다.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강석원은 경기 규칙과 시합 관전의 포인트를 간단히 알려주었다. 조금은 들뜬 투로 평소답지 않게 길게 말을 이어가는 강석원을 보며 조지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을 기다리면서 조지현은 난생처음 복싱에 관한 책도 빌려 읽었다. 아르바이트는 교통사고 이후로 그만뒀기 때문에 남은 돈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전보다 더 큰 꽃다발을 샀다. 꽃을 들고 걷는 건 여전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조지현은 공중전화부터 찾았다. 강석원이 이전에 줬던 핸드폰은 사용할 수 없었다. 집에 가지고 갔다가 들키는 날에는 무슨 사달이 날지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갔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조지현은 입구에 있는 계단에서 기다리겠다고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선수들과 보호자, 학부모, 관람을 하러 온 사람들로 체육관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올해 열리는 전국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야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또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해야 올림픽 출전권을 따게 된다. 결국 이번 대회의 우승을 해야 그나마 올림픽 출전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며칠간 열심히 공부를 해서 조지현은 오늘 경기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꽃을 들고 계단에 서 있는 동안 조지현은 지나다니는 수많은 선수들을 보았다. 모두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석원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연습을 하는 모습은 몇 번 보긴 했지만 실질적인 시합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무리 강석원이라 할지라도 상대에게 몇 번의 공격은 허용하기 마련이다. 솔직히 그가 누군가에게 맞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계체량 통과했어?”
“완전 간발의 차로. 오줌 몇 방울만 덜 나왔어도 탈락할 뻔했다.”
“이번에 이정철 체급 내렸더라?”
“강석원이 그 체급에 있는 한 죽어도 안 되는 걸 아나보지.”
강석원이란 이름에 조지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이정철 완전 이를 갈던데. 최연소 국대 상비군이니 뭐니 얼마나 으스댔냐.”
“그런 놈이 시골에서 올라온 비체고 출신한테 제대로 맞고 기절해서 RSC를 당했으니. 이를 박박 갈만하지.”
“이만 갈면 뭐하냐. 그런 놈이 체급을 내려?”
“그런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나라도 강석원은 피하고 싶지. 우리 체육관 선배님 한 분이 걔랑 붙었었는데 진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래. 평생 그렇게 3분이 길게 느껴진 적이 없다더라.”
“아, 시발. 신은 존나 불공평하지. 그 새끼는 뭐 다 가졌냐.”
“다 가지긴. 강석원 말 못하잖아. 인터뷰 때마다 기자들이 미친다잖아. 네, 아니요, 감사합니다. 삼종 세트.”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강석원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화제였다.
“오래 기다렸어?”
“아, 선배님.”
조지현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놀란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계체량 측정이 좀 늦어져서 늦었어.”
묻지 않은 것을 강석원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통과하셨어요?”
“응.”
“다행이네요.”
시합 전날에는 물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강석원의 얼굴선은 며칠 전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롭게 다듬어진 채였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손에 들린 꽃다발에 닿았다.
“이기면 드리려고요.”
“고마워.”
“인사는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강석원은 말없이 느슨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다른 선수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남자는 평연한 투로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딱 한 번 판정패를 당한 것 외에는 그는 승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지루할 수도 있을 텐데.”
“괜찮습니다.”
“식사는?”
“먹고 왔어요.”
“저 아래에 매점 있어. 계단으로 내려가서 왼쪽으로 꺾으면. 음료수라도 사서 마셔.”
친절하게 매점의 위치까지 설명해주는 강석원을 모두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선배님, 시합 잘하세요.”
“그래.”
“……, 많이 맞지 마시고요. 맞는 거 보고 싶지 않습니다.”
강석원이 그럼 복싱 못해, 하고 가벼운 투로 맞받아친다. 자신이 상식 없는 이야기를 던진 것 같아 조지현이 벌게진 얼굴을 푹 숙인다.
“경기 끝나면 여기서 기다려. 정리하고 나오는 데 시간 좀 걸리지만.”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강석원이 걸음을 멈춘다.
“예쁘다. 꽃.”
강석원의 한마디에 저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체 얼마나 비싸고 예쁜 꽃인지 구경하려고 기웃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강석원의 너른 등에 가려져 있어 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석원은 조지현만을 바라본다.
“……, 감사합니다.”
조지현이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강석원은 고갯짓을 까딱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지현을 흘깃거리며 수군거렸다. 썩 달갑지 않은 시선에 조지현은 얼른 자리를 피해 관중석으로 갔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경기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강석원의 말대로였다. 지루했다. 조지현은 자세를 몇 번이나 고쳐 앉으며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몇 차례의 경기가 진행되고 드디어 강석원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가 링에 올라서자 순식간에 공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도 없었다. 관장이 강석원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지시했다. 상대편의 세컨드도 마찬가지였다. 두 선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석원을 마주한 선수가 저도 모르게 움찔, 하며 숨을 삼켰다. 압도적인 위압감이 강석원의 전신에서 흘렀다. 경기는 공이 울리기 전부터 시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려주는 선수, 강석원의 이름 앞에 자주 붙는 수식 중 하나였다.
“정신 차려, 새끼야.”
상대 선수의 감독이 기합을 외친다. 그도 형세를 읽은 것이다. 주심이 링 중심에 서서 손을 들어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땡, 공이 울렸다. 두 선수가 글러브를 몸 중심으로 가져오며 서로에게 다가섰다. 강석원의 상대편 선수는 선제 권을 잡기 위해 빠르게 발을 가볍게 내디디며 블로우를 날렸다.
“쟤 아웃복서지?”
“강석원도 이번엔 애 좀 먹겠어. 저번에 강석원이 판정패 당한 선수도 아웃복서였잖아.”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팔짱을 낀 채 제 지식을 늘어놓았다. 상대 선수가 빠른 발놀림을 보이면서 강석원에게 유효타를 날렸다.
“짧게! 그렇지! 옆으로, 고개 숙이고!”
상대 감독이 흥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강석원, 뭐하는 거야! 피해야지!”
체육관 관장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꽃다발을 쥔 조지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 선수는 기세를 몰아 강석원의 몸에 연신 잽을 날렸다.
“잘했어, 더 짧게, 그렇지! 옳지!”
상대 감독이 희열에 찬 얼굴로 외쳤다. 강석원이 몸을 옆으로 살짝 틀자, 팔꿈치를 몸에 밀착시킨 채 주먹을 날리던 선수의 몸이 일순 휘청거렸다. 강석원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블로우를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 선수가 일시에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야 인마. 커버, 커버!”
상대 선수가 학습된 동작으로 두 손을 치켜들어 제 머리를 방어했다. 강석원이 스텝을 바꾸며 상대방의 복부를 연속으로 타격했다. 상대 선수가 강석원에게 밀접해 팔꿈치를 껴안으며 클린치를 했다. 주심이 브레이크를 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 1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양쪽의 감독이 준비한 의자를 재빨리 링 모서리에 올렸다.
“계속 밀어 붙여. 쟤 발이 빨라서 잘 파고드는 놈이니까, 말려들지 말고. 알았지?”
감독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강석원의 시선은 관중석에 고정된 채였다. 조지현의 창백한 낯이 보인다. 처음 보는 경기였으니 겁을 먹을 만도 하다. 그런데도 눈 한 번 떼는 일이 없다. 그것이 남자에게 빠듯한 충만감을 준다.
“정신 차리고 해라. 이거 우승하면 세계 선수권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강석원은 대답 대신 물로 입을 헹궈냈다.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상대 선수는 전보다 더 현란한 스텝을 선보이며 빠르게 강석원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강석원은 방어를 풀고 허리를 틀었다. 와이드 오픈이었다. 상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접근해 어퍼컷을 날렸다. 한 치의 차이였다. 아주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강석원이 상체를 뒤로 젖힘과 동시에 상대에게 스트레이트로 주먹을 내뻗었다. 믿지 못할 만큼 완벽한 제어였다. 자신에게 주먹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상대는 그걸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뻑, 하고 안면을 가격당한 상대는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강석원의 시선이 힐긋 관중석에 닿았다. 조지현은 눈을 부릅뜬 채로 이쪽을 바라본다. 조지현의 시선이 땀에 젖은 남자의 피부에 닿는다. 폭력적인 쾌감이 가득하다.
상대 선수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방금 맞은 주먹의 타격이 너무 컸는지 제대로 손을 뻗지 못했다. 무참한 강타가 이어졌다. 상대는 클린치도 커버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퍽.
망치로 강타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상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괴물…….”
조용한 관중석에서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쓰러진 상태에서 미동조차 없는 선수에게 감독은 차마 일어나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KO패가 없었다. 대신 심판의 판단 아래 한쪽 선수의 기울어진 실력 차이로 경기 진행이 위험하다 싶을 경우 레퍼리 스톱 콘테스트(referee stop contest, RSC)를 선언할 수 있었다.
“제일고 강석원 선수, 2라운드 1분 20초 RSC승을 선언합니다.”
장내에 방송이 나오고 주심이 강석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쓰러진 선수는 부축당해 간신히 링 밖으로 내려왔다.
“잘했어. 진짜 넌 최고야.”
관장이 다가와 강석원에게 수건과 물을 건네며 그를 칭찬했다. 강석원은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아냈다. 그는 눈으로 조지현을 찾았지만 이미 그는 관중석을 떠난 후였다.
조지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습을 제외하고 강석원의 경기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천재,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보석, 세기의 선수가 될 신인. 그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다는 걸 오늘 확인한 기분이다.
강석원은 제 몸을 정확히 어떻게 사용하고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다. 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완벽한 제어로 움직임을 통제한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단단하게 수축된 근육이 남자의 의지에 따라 폭발적인 힘을 갖고 내뻗는다. 혹사에 가까운 단련이 만들어낸 근육은 뼈의 모양대로 완벽한 형태를 갖추었다. 강석원이 주먹을 휘둘러 상대를 타격할 때마다 그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에 앉은 자신을 향한다고 느낀다. 폭력적인 상황 앞에서 조지현은 아래가 저릿저릿 당겼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에게 난폭하게 구는 순간을 알고 있다. 난폭한 짐승이 뼈도 남기지 않고 집어 삼킬 기세로 달려들어 제 욕구를 채우는 순간을,
“조지현.”
강석원의 낮은 음성에 조지현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턱 끝으로 모인 땀방울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열이 오른다. 조지현은 제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듯, 놀라서 시선을 피한다.
“아직 안 끝나셨죠? 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듯이 낚아챈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자.”
“네? 어? 가셔도 되는 겁니까?”
뭐가 뭔지 몰라도 아직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강석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는다. 새빨간 장미 꽃다발을 들고 걷는 강석원을 모두들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그러지 않아도 이쪽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석원이 누구한테 꽃을 받았어? 저런 거 안 받잖아, 별일이 다 있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강석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건물을 나오자마자 강석원은 택시를 잡아탔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강석원은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기에 조지현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택시에 탄 이후에도 강석원은 한동안 말이 없다.
“무슨 일 있으세요?”
조지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석원은 대답 대신 몸을 앞으로 내밀어 기사에게 질문한다.
“얼마나 걸립니까.”
“주말이니까 그래도 이십 분은 걸리죠.”
기사가 흘끔 뒤를 보며 선수세요? 하고 물었다. 강석원은 네, 하고 대답하고 창밖을 본다. 조지현은 여전히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강석원을 바라본다.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감정이 밀려온다. 남자의 기갈이, 흥분이, 초조함이. 무서울 정도로 남자는 조지현에게 몰두한다. 주먹을 휘두르기 직전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는 눈빛이다. 그의 시선은 폭력적이다. 잔인한 욕구가 뱃속을 들쑤신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꽃다발을 쥔 강석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힘줄이 도드라질 만큼 힘을 준 손은 그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 보여준다. 강석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들어 밀어붙일 것이다. 링에서 상대 선수를 향해 주먹을 날렸던 것처럼. 몸이 아찔하게 떨려오고 피가 바싹 마른다. 신호가 걸릴 때마다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택시에서 내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강석원에게 손을 잡혀 그의 집까지 끌려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고 벽에 밀어붙였다. 바위처럼 단단한 몸이 온힘을 다해 짓치어 오는 순간, 조지현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몇 배는 더 난폭하고 다급하게 그는 제 욕망을 밀어붙였다. 단단한 성기가 허벅지에 아플 만큼 세게 문질러졌다. 깊게 들어오는 입맞춤이 숨 막힌다.
“지현아.”
강석원의 초조한 부름에 조지현은 얕게 숨을 헐떡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지금, 넣고 싶어.”
그가 이토록 솔직하게 제 욕망을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은 처음이었다. 강석원은 늘 조지현이 아프지 않도록 아래를 공들여 풀어준 후, 삽입했다. 지금은 아래에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조지현은 대답 대신 자신의 바지 버클을 끌렀다. 그걸 본 강석원의 눈에 시퍼런 불꽃이 튄다. 그가 조지현을 벽을 보게 서게 하고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끌어내렸다. 뽀얗게 살이 오른 둔덕이 드러났다. 유난히 마른 조지현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이 붙은 곳이었다. 그 미묘한 간극이 남자의 선정을 자극했다. 단번에 삽입이 이루어졌다.
“아, ――.”
남자의 성기가 미처 벌어지지 못한 틈을 파고들었다. 벽을 짚은 조지현의 손끝이 구부러졌다. 강석원이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두 사람의 신장 차이 때문에 조지현의 발끝이 들렸다.
“선배님, 조금만……, …….”
조금만 천천히 해달라고 부탁을 하려 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자는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며 바특하게 제 몸을 박아 올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힘줄이 도드라진 성기를 쑤셔 박았다. 발끝이 거의 들려 조지현은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서 그를 받아냈다. 강석원의 땀이 조지현의 어깨에 떨어진다. 그가 뒤에서 조지현의 목덜미를 핥고 냄새를 맡으며 발정했다. 음모가 벌어진 입구에 닿을 만큼 남자는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지현아…….”
탁한 음성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조지현은 부들부들 떨며 버티는 와중에도 대답한다. 애처로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강석원은 몇 번이나 조지현을 부른다. 지현아, 지현아, 조지현, 지현아. 제가 안는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강석원은 대답을 요구했다. 조지현은 그때마다 온몸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그의 움직임에 조금이라도 맞춰주려고 발끝을 올려 보기도 하고 엉덩이를 들기도 하며. 그럴수록 믿기지 않을 만큼, 남자의 성기는 단단하게 부풀었다.
“아, 하아……, 선배님, ……읏, 아, ……읏.”
내벽을 짓치는 감각에 조지현은 흐트러진 소리를 내며 강석원에게 매달렸다. 남자의 성기가 아랫배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데도 조지현은 이를 물고 버텨냈다. 뒤에 선 남자의 기쁨이 느껴진다. 그는 기꺼이 제 승리를 만끽했다. 지금까지 지나온 숱한 승리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조지현의 앞에서 이겼다. 흠모하는 상대 앞에서 자신의 강건함을 증명 받은 것이다. 그 단순하고 우직한 기쁨이 남자의 온몸을 통해 전해진다. 사랑스럽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내줄 수 있었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팔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그렇게 속삭이는 순간, 남자는 조지현의 안에 파정한다. 왈칵, 뜨끈한 정액이 내벽에 쏘아진다. 조지현의 다리를 타고 불투명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린다.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
“아까, 말하려고 했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상황도 이렇고. 어물거리며 시선을 내리는 조지현의 목덜미에 강석원의 이마가 닿았다.
“꽃, 고마워.”
나도 인사가 늦었어.
덧붙는 말 뒤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조지현이 강석원을 불렀다. 샤워를 하던 그가 샤워기를 잠그고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회용 밴드 있으신가요?”
“왜?”
“쓸려서…….”
아까 현관 벽에 선 채로 남자가 뒤에서 밀어붙이는 바람에 무게가 실린 팔꿈치가 조금 까졌다.
“찾아줄게.”
샴푸거품을 씻어내지도 않았는데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오려는 강석원을 보고 조지현이 기겁해서 말렸다.
“됐습니다.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세요.”
“캐비닛 두 번째 칸.”
강석원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가 조지현의 팔을 내려다보며 낮게 혀를 찼다.
“금방 씻고 나가서 약 발라줄게.”
“괜찮아요. 밴드만 붙이면 돼요.”
살짝 쓸리기만 한 상처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한다.
“빨리 씻고 나오세요. 저 배고파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바로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조지현은 그가 알려준 대로 캐비닛을 열어 약상자를 찾았다. 그러나 흰색 구급함 안에는 일회용 밴드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뒤적이다가 상자를 도로 넣으려는데 한쪽 구석에 놓인 밴드통이 눈에 들어왔다. 조지현은 그걸 집어 들고 포장을 뜯어 팔꿈치에 붙였다. 알록달록한 무늬에 이전의 일이 떠올라 웃는 사이 강석원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며 나왔다. 찾았어? 하고 묻던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에 들린 밴드를 보는 순간 표정이 굳는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워낙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퍽 심경의 변화가 크다는 사실을, 조지현은 알 수 있었다.
“……, 뜯으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니.”
강석원이 남은 밴드를 집어 상자에 넣은 다음, 다시 캐비닛 안에 올려두었다.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자신이 강석원에게 건네주었던 밴드였다.
“……, 일부러 안 쓰고 둔 건지 몰랐습니다.”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강석원은 아무런 말이 없다. 조지현은 조금 미안해졌다.
“새 거 사드릴게요.”
“됐어.”
조지현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자신의 재킷을 뒤적여 천 원짜리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뭔데.”
“그때 돈 주셨잖아요.”
강석원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가 천 원을 받아들고 뒤끝 있네, 하고 놀리는 투로 말했다.
“돈 주고 간 사람이 할 말은 아닙니다.”
“그때 처음 알았어.”
조지현이 눈을 치떴다.
“내가 그렇게 질투가 많은지.”
강석원이 천 원을 곱게 접어 책상에 올려둔다.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거짓말에 남자가 돈을 던지듯 건네고 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얽혀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그러고 나가던 강석원을 붙들고 싶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항상 그랬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다시 뜬 날부터, 자신은 강석원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강석원이 허리를 굽혀 생각에 잠긴 조지현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본능적으로 조지현의 불안을 알아챈 것이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그런 건 없어.”
그가 조지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린다.
“오므라이스 해줄까?”
조지현이 네, 하고 대답했다. 그가 음식을 하는 동안 조지현은 방을 정리하고 빨래를 갰다.
“식는다. 먹어.”
강석원이 작은 상에 오므라이스를 담은 그릇을 올리며 말했다. 수건을 반듯하게 개던 조지현은 오므라이스를 보고 잠시 말없이 그걸 지켜보고만 있다.
“왜.”
“아닙니다.”
조지현은 수건을 옆에 두고 상 앞에 앉았다.
케첩으로 그린 스마일 표시.
시간을 돌아, 몇 번이고 다시 온다 해도 조지현은 자신이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주하게 된다.
“왜?”
숟가락을 든 채 오므라이스가 담긴 접시를 바라보기만 하는 조지현에게 강석원이 묻는다.
“반가워서요.”
강석원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목이 메어왔다. 조지현은 얼른 오므라이스를 떠서 입 안 가득 넣었다.
“입맛에 맞아?”
그는 늘 요리를 해준 후, 그렇게 물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요리를 해주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면 뭐든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들에게 굴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그녀는 종종 굴전을 해서 식탁에 내놓곤 했다.
“맛있어요.”
그가 해주는 모든 요리는 맛있다.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티백을 넣고 끓이기만 한 보리차조자, 특별한 맛이 된다.
체중 감량중이라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하는데, 남자는 마치 제가 먹는 것처럼 퍽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눈물이 날 것 같이 목이 메고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번졌다.
결국, 그릇을 모두 비워냈다.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생존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과학서적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천적이 많거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동물은 선천적으로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현이 왔구나.”
어머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그래. 조심히 가고.”
“나중에 보자.”
이숙현이 현관을 나서며 조지현에게 눈인사를 한다. 그녀의 눈에 스친 감정을 읽는다. 동정, 안타까움, 연민.
현관문이 닫힌다. 조지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감는다.
“지현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여자가 저렇게 운을 뗀 이후로,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고간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대로 도망치고 싶다. 조지현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현관에 우뚝 서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엄마랑 얘기 좀 하자, 우리 아들.”
어린 아이를 꾀어내는 마녀처럼 달콤하고 사악한 목소리다. 도망칠 곳은 없다. 조지현은 신발을 벗고 소파에 앉았다.
“숙현이 아줌마가 오늘 할 얘기가 있다고 나를 찾아온 거야.”
“네.”
“엄마 바쁘다는데 굳이 만나서 얘기하자고, 중요한 얘기라고 하더라고. 분명 그 과외 부탁이겠지 하고 만났어.”
정성 들여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반듯한 웃음을 그린다. 옷차림도 머리도 하루 종일 공을 들인 티가 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정말 엉뚱한 소리를 하잖아.”
그녀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웃는다.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야. 학교에 그런 소문이 돈다고. 정말 우습지 않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웃는다. 조지현은 말없이 그녀의 웃음을 들어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뭘 말씀입니까.”
“그년이 한 새빨간 거짓말.”
“…….”
“걔는 항상 그랬어. 고등학교 때도 항상 나한테 네가 부러워, 부러워하면서 나를 좋아하는 척했지만 뒤에서는 늘 딴 짓을 꾸몄다고. 나보다 더 잘나고 싶어서,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려고.”
우습지 않아? 여자는 한껏 허세를 떨며 말을 잇는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도 그년은 나를 질투해. 저보다 잘난 게 있는 걸 못 참는 거야.”
커피 잔을 든 가느다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내 잘난 아들이 남자를 좋아하는 그런 더러운 인간일 리 없잖아.”
그녀는 대답을 받아내려는 듯 조지현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렇지?”
조지현은 입술을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라고, 당신의 아들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적당한 거짓말을 둘러대면 여자는 믿는 척을 할 것이다. 스스로 믿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눈치가 빠르고 예민해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녀는 그대로 넘어가줬을지도 모른다.
“대답해.”
어머니가 대답을 재촉했다.
“무슨 대답이요.”
“있는 그대로 말해.”
“…….”
“왜 네가 남자를 좋아해? 부족한 게 뭐가 있어서, 그런 끔찍한 짓을 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다. 여자는 제가 저지르는 수많은 끔찍한 짓을 알지 못한다. 잠자는 어린 아들의 목을 조르고,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크로 손등을 찍고, 성적이 떨어졌다고 종아리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회초리를 휘두르고, 신경을 거스른다고 날붙이로 손을 긋는 여자에게, 강석원이 자신에게 해준 것들을 끔찍한 짓이라고 긍정하고 싶지 않다.
“대답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는 뺨을 후려갈긴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세게 얻어맞았다. 아들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여자는 몇 번이나 더 뺨을 후려친다. 코피가 흐르고 입가에서 피가 터졌다.
“대답 안 해!”
여자가 소리를 높여 외친다.
조지현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오늘 강석원은 경기가 있다. 밖으로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그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본 그의 재능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서, 절대로 망가트리고 싶지 않다.
“대답하라고! 이 발정난 개 같은 새끼야.”
여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아들의 뺨을 내리쳤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섰다.
“왜 그래. 지금 뭐하는 거야, 당신.”
여자는 남자를 보는 순간 울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결국에는 제 편이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당신,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
“무슨 말인데. 얘기를 좀 해봐야 알지.”
“숙현이가, 걔가 와서, 당신 아들이…….”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운다. 가녀린 어깨가 울음으로 들썩인다. 여배우를 했어야 했다. 저런 얼굴과 재능으로는.
“무슨 일이야. 지현이 네가 말해 봐.”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더러운 호모새끼라잖아! 걔가, 그년이 내 아들을 호모라고 말했다고! 걱정해주는 척했지만 집에 가서 웃을 생각을 하니 분해 죽을 거 같아!”
그녀가 서러움을 토해내며 남자에게 매달려 운다. 남자는 당황을 금치 못하며 아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지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본다. 한쪽 얼굴이 부어 거리감이 온전치 못하다.
“지현아. 엄마가 하는 말이 사실이냐? 네 엄마가 물어볼 때는 대답을 해야지.”
아버지가 엄한 목소리로 다그친다. 조지현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얼른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가긴 어딜 가! 당신은 왜 그따위야. 그러다 쟤 인생 망가지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내가 잘 말해볼게. 응? 또 쓰러진다고.”
남자는 제 아내를 달랜다. 조지현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여자는 세 번이나 쓰러졌다고 했다. 아들이 전교1등을 놓치는 일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안 될 끔찍한 공포였다.
조지현은 제 방으로 건너왔다. 방문을 닫는다. 지친다. 어머니는 결국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후에 보일 여자의 행동도, 번연하다. 도로에 퍼지던 강석원의 피가 떠올랐다. 방금까지 행복하게 반짝이던 시간들이 발밑으로 부스러진다. 끝이 어떻게 될 줄 알면서도, 외면하려 했다.
방 밖에서는 여자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아버지의 설득이 뒤엉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소리가 들렸다.
“지현아. 들어가도 되니?”
“네.”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섰다.
“요즘 공부하기 많이 힘들지?”
“아니요.”
조지현은 손등으로 피를 닦아냈다.
“네 엄마가 저러는 거 이해 좀 해줘라. 그렇지 않아도 숙현 씨랑 동창이고 그래서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나 보다.”
“네. 이해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래. 그러면 아빠는 아들만 믿는다.”
어머니하고는 다르게 그는 끈덕지게 캐묻지도 않고 혼을 내지도 않았다. 전에는 그걸 자상함이라 여겼다.
“피곤할 텐데 얼른 자.”
하지만 이젠 그게 무관심에서 오는 배려임을 안다. 그의 애정은 오롯이 여자에게만 향해 있다. 조지현은 아버지가 나가고 나서 티슈를 뽑아 피를 닦았다. 눈가가 부어올라 얼굴이 엉망이었다. 침대에 누워 손으로 부은 곳을 찜질하듯 문질렀다.
시합은 어떻게 되었을까.
눈을 감고 링 위에 선 강석원을 떠올려 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제 승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거머쥐었을 것이다. 묵묵히, 차근차근 밟아온 시간을 따라 정상에 우뚝 설 것이다.
보고 싶어.
조지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선 그를, 그 시간들을 지켜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그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영영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걸까.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이 뒤엉켜 무겁게 침잠한다.
이대로는 강석원이 다치게 될 것이다. 그는 세계 선수권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다. 제발 걔 앞에서 꺼지라고 관장이 침을 뱉으며 저주할 만한 상황이다.
나 놓지 마. 지현아.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제 인생을 망칠 정신병자가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 거구의 짐승은 떨고 있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대체 이까짓 게 뭐라고,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괴로운 걸까.
목구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지현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켜냈다.
“조지현, 얼굴이 왜 그러냐.”
수업을 하던 수학 선생이 놀라서 물었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굴렀습니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벌써 같은 대답을 네 번이나 한 것이다. 수업을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조지현을 보고 놀라 똑같은 것을 묻는다.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예쁜 얼굴에 그게 뭐냐.”
그 엇비슷한 소리도 네 번째였다.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부은 눈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필기를 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판서를 열심히 받아 적는 도중에 시선을 느꼈다. 이쪽을 보던 최기열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그가 느끼는 게 양심의 가책인지 고소일지는 모른다. 상관조차 없다. 이로써 더 이상은 얽히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차렷, 경례.”
반장이 일어서서 구령을 붙이자 아이들이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저마다 앞 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책을 폈다. 삼십 분쯤 그렇게 책을 읽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리 지금 식당에 내려가는 편이 덜 붐비었다. 배가 고프더라도 한가한 편이 낫다. 전처럼 그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도 없지만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다. 미국에서의 학교생활도 그랬다.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지냈다. 이쪽이 편하고 좋았다. 어차피 인간관계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
식당으로 내려온 조지현은 식판에 밥을 받아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볼이 부어 음식을 씹는 게 어려웠다. 몇 번이나 입 안쪽 살이 씹혔다. 조지현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 분 동안 세 숟가락을 먹은 게 전부다.
그냥 일어설까.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는다. 조금 난폭한 기세에 조지현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다. 그가 의자를 빼서 앉는다. 경기 일정이 어제로 끝났다. 오늘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그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확인했다. 강석원은 우승했다. 며칠만의 제대로 된 점심 식사일 텐데도 강석원은 숟가락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조지현의 부어오른 얼굴에 닿는다.
조지현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묵묵히 식사를 재개했다. 밥을 떠 넣고 천천히 씹는데도 또 입 안쪽이 씹힌다. 조지현이 움찔하며 눈가를 찌푸리는 것을, 강석원은 빠짐없이 지켜본다.
강석원이 식판을 들고 일어선다. 눈이 마주쳤다. 조지현은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바로 일어서서 식판을 정리했다. 복도로 나가니 강석원은 저만치 앞서 걷고 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비가 새서 공사 중인 5층 구관의 교실로 들어갔다. 조지현이 안으로 들어가자 강석원은 바로 문을 닫는다.
“누가 그랬어.”
살벌한 음성에 노기가 스민다. 어디서 넘어지거나 부딪쳐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아는 것이다.
“학교에서 그런 거 아닙니다.”
조지현이 변명처럼 중얼거린다. 강석원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가 지현아, 하고 입을 여는 순간,
“선배님. 우승 축하드립니다.”
“……, 조지현.”
“어제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전화하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전화 통화를 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나와.”
그의 짧은 한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조지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가정 폭력에 관대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대도 훈육차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 또래의 남학생은 대체로 신고를 한다 해도 경찰 측에서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습니다.”
얘가 사춘기라 그렇다고 어머니가 슬픈 눈을 하고 말하면 대부분의 경찰들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엄마 말씀 좀 잘 들어라. 경찰관이 돌아가고 나면,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해서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몇 번 당하고 나자 조지현은 신고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집을 나와도 소용없다. 청소년 보호 기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최우선으로 삼는 해결책은 부모였고, 그것은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최악의 선택지였다.
“왜 그런 말을 해.”
“시기가 적절치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주먹을 쥔 강석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와 같이 살날들을 꿈꿨다. 이번에도 갖지 못할 날들이다.
“그럼 언제.”
“저 졸업해야죠.”
“…….”
강석원의 표정이 굳는다. 조지현이 졸업하기까지는 거의 일 년이란 시간이 남아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처참한 소년의 얼굴을 앞에 둔 그 시간은 까마득하기만 하다.
“졸업하고 나면,”
강석원이 흐트러진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을 잇는 도중에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다음에 얘기해요.”
“그래.”
교실을 나가려던 강석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왜 그러세요?”
“그냥.”
보고 싶어서.
덤덤하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의 음성에 귀가 먹먹하다. 조지현은 눈을 살짝 내리감은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따 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지켜지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뭐하세요.”
교문에 선 여자를 보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솟는다.
“아들 기다렸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가 눈을 희번덕 움직여 주변을 살핀다. 조지현의 주변에 수상한 인물이 있는지 찾는 것이다.
“가요.”
조지현은 앞장서 걸었다. 여자가 황급히 아들의 뒤를 따른다.
“오늘 수업은 어땠니?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고?”
마치 초등학생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평소랑 같아요.”
조지현은 대답하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강석원은 오늘 시상식이 있어 수업 도중에 학교를 나갔다. 오늘 굳이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두어 시간 출석을 하려고 학교에 들른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나란히 오르면서 조지현은 일 인석에 앉았다.
“왜? 저 뒤에 앉지 않고?”
“여기가 편해요.”
여자와 나란히 살을 부대끼며 가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조지현의 앞에 앉는다.
“도서관까지 같이 가실 건가요?”
“아니. 도서관에 왜?”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당연히 집으로 가야지.”
조금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들은 조지현을 절망케 했다.
“너도 오늘부터 집에서 해. 괜히 도서관 이런 데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낭비하지 말고.”
“버스로 한 정거장밖에 안 돼요.”
“엄마 말 들어.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여자는 아들의 눈을 살핀다. 뱀의 혀처럼 교묘한 움직임이다.
“명필이 붓 가리는 거 봤니? 공부 잘하는 애들은 어디에 갖다 놔도 다 잘해.”
“도서관이 더 집중 잘돼요.”
“안 돼.”
본색을 드러낸다.
“집에서 해. 앞으로도 계속.”
“…….”
“그리고 주말에도 밖에 나가지 마. 집에서만 해. 알았어?”
“차라리 학교도 가지 말까요.”
여자가 무심코 손을 치켜들었다가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아들의 옷매무시를 고쳐준다.
“언제 엄마가 너 해 되는 말 한 적 있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어머니.”
조지현은 그녀를 부른다.
“응. 왜?”
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웃는다. 대가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붓으로 단번에 그려낸 듯한 눈매다.
“이제 그만하세요.”
아름다운 눈에 시퍼런 독기가 스민다.
강석원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어제도 조지현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등교시간도 하교시간도 달라서 마음먹고 찾아가지 않으면 마주치는 게 쉽지 않다.
만약 이대로 조지현이 연락을 끊기라도 한다면,
“…….”
강석원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날 아침은 벤치에서 조지현을 기다렸다. 조지현이 보인다. 입김이 나기 시작한 아침공기보다 서늘한 낯이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을 것처럼 날이 서 있다. 그러나 그게 제 약한 부분을 지켜내기 위한 방편임을 남자는 안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약한 것이 지닌 난방(蘭芳)이 흘러내린다. 지켜주고 싶은 감정을 배반하고 고개를 쳐드는 잔인하고 선정적인 정복욕이 금세 그 뒤를 따른다.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던 남학생 몇이 홀린 사람처럼 소년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준다. 강석원은 자리에서 일어서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조지현의 뒤로 다가섰다. 깊은 생각에 잠겼는지 조지현은 강석원이 다가서는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다. 예민한 조지현답지 않은 유별한 일이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복도를 걷는 조지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점심시간에 5층 그 교실로 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조지현이 강석원을 알아보고 놀라서 고개를 든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여전히 푸르스름한 멍이 남은 뺨에 가슴이 분노로 욱신거린다.
강석원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제 소맷자락을 잡아끈다. 고개를 돌리자 조지현이 따라오라고 작게 눈짓한다. 지하 식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식당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불 꺼진 계단은 어둡고 고요하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세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강석원은 눈을 살짝 치뜬다.
“다시 한 번만.”
조지현이 살짝 몸을 반대편으로 기울인다. 강석원은 그제야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다.
“안 들려?”
“그건 아닙니다.”
완전한 부정이 아니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턱을 쥐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귀 안쪽에 피가 고인 흔적이 보인다.
“경찰서 가자.”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는다.
“실수였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고막이 나갈 때까지 때려?”
어둠 속에서 강석원의 눈빛이 시퍼렇게 빛난다. 어디 하나 아깝지 않은 곳이 없는 상대였다. 그런 사람이 가장 편하게 지내야 할 곳에서, 하루가 지날 때마다 성치 않은 곳이 늘어나 나타난다. 미칠 지경이었다.
“놀라셨거든요. 제가 그렇게 나와서.”
이제 그만하세요.
조용한 한마디에 실린 날카로운 거부를 어머니는 예민하게 알아챘다.
뭐라고?
늦기 전에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개 같은 새끼. 명확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는 아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집에 가면 죽을 줄 알아. 네까짓 게 감히 엄마한테. 버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어지간해선 타인 앞에서는 제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었다. 버스는 어느새 집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저는 도서관으로 가겠습니다.
조지현이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내려. 조지현은 의자에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우악스럽게 아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뒷문까지 가까스로 끌고 갔지만 조지현도 손잡이를 움켜쥐고 버티었다. 내릴 거면 내리고 말 거면 말아요. 버스 기사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내리라고 하잖아! 어머니가 조지현을 잡아당겼다. 조지현은 있는 힘껏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 반동에 그녀가 버스 정류장 바닥에 두 손을 짚고 넘어진다. 그녀가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아들을 노려보았다. 버스 뒷문이 닫혔다. 그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자 잔뜩 화가 난 아버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뺨을 얻어맞았다. 그대로 넘어져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남자의 힘은 여자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엄마를 때려. 남자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어머니가 자식을 때린 것은 수도 없이 방관했던 남자가, 몹시 화를 냈다. 제가 사랑했던 여자를 누군가 해한 것이 싫은 터다. 여자가 옆에서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제 늙고 병들면 자신은 자식에게 매 맞는 어미가 될 거라고. 늙은 것도 서러운데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삶을 대체 왜 살아가야 하냐고. 찢어질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형태를 잃은 것처럼 해체된다. 날카로운 이명에 조지현은 귀를 움켜쥐었다. 평소 같은 공황발작이 아니었다. 현기증이나 구역질도 없었다. 그저 움직일 때마다 귀가 찢어질 듯이 아플 뿐이었다. 아버지는 여자를 달래며 엄한 투로 아들을 꾸짖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알겠지?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세요. 귀를 틀어막은 아들은 설핏 인상을 찌푸린 채로 대답했다. 어디서 버릇없는 짓이냐고 아버지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귀가 지잉하고 울렸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안 들려서 그래요. ……. 귀를 틀어막은 조지현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나왔다. 결국,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간단한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기침 같은 거 하지 말고 시끄러운 소리만 피하면 됩니다. 물 안 들어가게 하고요. 그냥 두면 자연 치유되는 수준입니다.”
강석원이 입술을 사리문다.
“이 상태로 학교에 온 거야?”
“거기 있을 수는 없잖아요.”
조지현이 쓰게 웃었다. 차라리 학교에 있는 편이 마음 편했다.
“집으로 갈래?”
강석원의 입에서 집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조지현은 십수 년을 산 집보다 그의 자취방을 먼저 떠올렸다.
“괜찮습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창백한 조지현의 안색을 보고 강석원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는다.
“조지현. 경찰서 가자. 같이 가줄게.”
조지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굴어. 낳는다고 다 부모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전제는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적인 프레임이 된다. 조지현은 이미 예전에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제가 걱정하는 건 부모님이 아닙니다.”
강석원이 사고를 당했던 것은 경찰서 앞이다. 보란 듯이 아들의 머리채를 잡고 두들겨 패는 어머니에게서 조지현을 구하려 했을 뿐이다. 달려오는 차에 아들을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자동차 제동소리와 퍽, 하고 뭔가 부스러지던 소리, 자신을 감싸 안던 단단한 몸, 도로에 퍼지던 피. 무엇도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비슷한 상황이라도 최대한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저 들어가 볼게요.”
“조지현.”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붙든다. 혹여나 아플까 세게 쥐지도 못한다.
“제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잖아요.”
“…….”
침묵에 가슴이 아팠다. 가여울 정도로 남자는 순종하고 만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아까 하신 말씀 한 번 더 해주세요.”
“점심시간에 5층, 그 교실로 와.”
강석원이 허리를 굽혀 다치지 않은 왼쪽 귀에 말해준다.
어떻게 하면, 그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강석원이 고갯짓한다. 계단을 오르려던 조지현은 아, 하고 몸을 돌린다. 세 계단 위에 서고 나서야 그보다 조금 높은 정도가 된다.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강석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신장 차이를 고려한다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행위다.
강석원이 표정이 멎은 채로 조지현을 올려다본다.
“이따 봬요.”
“응.”
모호한 말들이 구체적인 약속이 되어간다.
조지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이게 다 뭡니까?”
“도시락.”
강석원은 책상에 반찬을 늘어놓으며 대꾸했다.
“너 얼굴 보기 힘들어서.”
그가 변명처럼 덧붙인다. 전화 통화도 주말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전처럼 자유롭지 않았다. 강석원이 떠올린 방법은 너무도 그답다. 조지현은 멍한 눈으로 책상에 조르륵 놓인 도시락을 바라본다.
“왜? 입맛 없어?”
“아닙니다.”
조지현은 얼른 숟가락을 든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왼편에 앉는다.
“귀는 어때.”
“그냥 그래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괜찮은 척해봤자 강석원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수업 종소리만 들어도 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아직까지 큰소리는 좀 그래요.”
스피커에서 2학년 학년 부장을 찾는 방송이 나왔다. 조지현이 저런 거요, 하고 스피커를 가리키며 웃었다. 강석원은 따라 웃지 않는다.
“밥 먹어.”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든다. 곱게 간 쌀로 만든 죽은 씹지 않아도 될 만큼 묽었다. 입안이 부어서 잘 씹지 못하는 상태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남자는 아는 것이다. 강석원의 배려는 늘 묵묵하다. 조지현은 죽을 떠서 입안에 넣는다.
“맛있어요.”
웃으며 말하다 귀에 찌릿한 통증이 올라온다. 소리를 듣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힘들다. 움찔하는 조지현을 본 강석원이 말하지 마, 하고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숟가락에 얹어준다. 모두 소화도 잘 되고 조지현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둘은 말없이 도시락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한 후,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아 펴게 한다.
―내일 또, 여기서 봐.
한 글자 한 글자 혹시라도 알아보지 못할까 정성들여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조지현은 가만히 웃음을 삼킨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선배님 목소리는 낮아서 편해요.”
―나을 때까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손바닥에 쓴다. 조지현은 그의 손바닥을 쥐었다.
―금방 나을 겁니다.
―그래.
원래도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짧은 단어 몇 개로도 대화는 충분했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모양 좋은 손톱을, 손가락의 마디를, 부드러운 손바닥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는 다시 글자를 쓴다.
―무슨 일 있으면 나 불러.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가락에 입을 맞춘다.
수업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을 잡았다. 강석원이 가만히 손을 펴고 기다린다. 조지현에게 음식을 먹이고 나서 그 감상을 기다리던 모습과 퍽, 닮아 있다. 조지현의 목덜미가 따끈따끈 달아오른다. 전기가 이는 것처럼 알싸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머리가 굳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미안해요. 저 같은 거 신경써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 좋아합니다. 다치지 마세요. 사랑해요. 옆에 있고 싶어요. 무서워요. 선배님 저 미워하지 마세요.
솔직한 마음들이 엉켜간다. 손끝이 움칠 떨린다. 강석원이 눈을 살짝 치뜬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커다란 손바닥에 조그맣게 하트를 그려 넣었다. 강석원은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손바닥을 천천히 쥐었다 편다.
방금 제 손바닥을 스친 그 감각을 되새기듯.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바닥을 쥐고 뭔가를 그려준다. 스마일 표시.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앞으로 고개를 내민다. 키스해도 돼?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낮게 묻는다. 한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입술이 스친다. 오싹한 감각이 발끝을 타고 오른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겹친다. 들어오기 전 몇 번이고 문단속을 했다. 맨 끝에 있어 복도로는 창이 나지도 않은 교실이다. 열렬한 몰두였다. 수업종이 울리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만큼.
조지현은 그날 처음으로 수업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은 일제히 교실을 뛰어 나갔다. 조지현도 책을 덮었다. 처음이었다. 점심시간이 이렇게 기다려지는 것은. 강석원과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뒤로 조지현은 4교시 시작되는 순간부터 시계만 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교실에서 나가기 전에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혹시 누군가 보지는 않을까 뒤를 확인했다.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다. 걸음이 점점 빨라져 나중에는 거의 뛰듯이 계단을 올랐다. 5층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강석원이 눈웃음을 건넨다. 그가 의자를 빼준다. 조지현은 얕게 숨을 내쉬며 강석원에게 다가갔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바닥을 쥔다.
―귀는 좀 어때.
조지현이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내자 손바닥을 내밀었던 강석원의 표정이 잠시 멈춘다.
“이게 더 편할 거 같아서요…….”
손바닥으로 글씨를 써서 알아보는 건 꽤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강석원을 생각해서 펜과 수첩을 챙겨왔는데 그가 머뭇거리자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조지현이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에 펜을 쥐어 주고 수첩을 펴준다.
―어제보다는 좋아졌어요.
조지현의 글자를 강석원은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본다. 조지현이 종이에 물음표를 그려 넣었다.
―글씨가 너랑 닮아서.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글씨 칭찬은 숱하게 들어왔다. 글자의 모양이 워낙 훌륭해서 수업 시간에 조지현에게 판서를 시키는 선생도 있을 정도였다. 저 새끼는 생긴 것도 그런데 글씨체도 존나 꼴린다고, 판서를 하는 조지현의 등에 대고 키득거리던 놈들도 여럿이었다.
글씨가 자신과 닮았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조지현은 펜을 들고 화제를 돌렸다.
―선배님도 잘 쓰시는데요.
강석원의 글씨를 본 것은 이전의 기억이다. 흰색 봉투에 적혀있던 Dear. George. 강석원은 알지 못하는 장면이다.
―아무거나 더 써 봐.
강석원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종이를 내려다본다.
―밥 먹어요.
강석원이 웃으며 숟가락을 건넸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도시락을 먹다가 조지현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웃음을 삼켰다.
강석원이 왜, 하고 입모양으로 묻는다.
―같은 반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땠을 거 같아.
―글쎄요.
쓸모없는 가정을 열심히 생각해본다.
―좋았을 거 같습니다.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같이 밥을 먹는다.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축복 같은 일이었다.
―그럼 뭐라고 부를 거야?
강석원의 질문에 조지현이 물음표를 적었다.
―선배님은 아니잖아. 같은 반이니까.
조지현은 조금 당황한 듯 어, 하고 고개를 떨군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얼굴에 열이 오른다. 선배님, 이란 호칭을 제외하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같은 반이라도 한 살 많은 거잖아요.
출생 신고가 늦어서 실질적으로 강석원은 조지현보다 두 살이 많았다.
―그렇다고 선배님이라고 부르게?
조지현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강석원이 그럼, 하고 대답을 종용한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조지현은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형.”
조지현이 소리 내어 불렀다. 강석원의 표정이 멎는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호칭이었음에도 전혀 뜻밖이었다는 듯이. 그는 한참을 조지현의 말을 제 안에서 되새기듯 숨을 들이켜고 뱉는다.
―어색하네요.
조지현은 펜으로 글자를 끼적이다가 다시 밥을 먹는다. 방금까지만 해도 맛있게 느껴지던 음식이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강석원도 식사를 재개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도시락을 정리하고 나서 강석원은 펜을 들었다.
―먹고 싶은 반찬 있어?
―다 좋아요.
―그래도. 원하는 거.
조지현은 고민하다가 계란말이요, 하고 적는다. 강석원이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글자를 계속 쓰라고 조르듯이 조지현의 손을 툭 친다.
―무슨 글자요?
―아무거나.
조지현은 고민하다가 강석원이란 이름을 적는다. 부족한 것 같아 그 옆에 선배님도 붙인다. 강석원은 책상에 턱을 괸 채로 조지현이 종이에 글씨를 쓰는 모습을 바라본다.
―운동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본격적인 건 고등학교 올라와서.
―얼마 안 되셨네요.
―그렇지.
체고 출신이 아닌 선수는 판정에 있어서 불리하기 때문에 국가대표가 되는 경우가 몹시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석원은 체고 출신도 아닌 데다 그를 키우는 관장도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철저한 비주류였다. 그런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가 돌았지만, 결론은 늘 한결같았다.
괴물 같은 천재.
조지현은 강석원을 물끄러미 보다가 펜을 움직인다.
―저는 선배님이 운동하시는 거 좋아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도 공부 잘하잖아.
―그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하는 겁니다.
―난 아무리 해도 전교 1등은 못해.
비슷한 이야기를 이전에도 했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사람이다. 감정도, 생각도, 말하는 것도 이전의 강석원과 같다.
―왜.
조지현은 펜을 움직였다.
―좋아서요.
강석원이 말없이 웃는다. 그러다가 지현아, 하고 낮은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무리한 부탁인지 아는데,
그가 펜을 쥔 채로 글자를 쓰는 것을 망설인다.
―말씀하세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을까?
조지현의 어머니는 그 사건이 있은 후로도 아침에는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고 오후에는 학교 앞까지 찾아왔다. 주말에 외출을 금지시킨 것은 당연했다.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 괜한 불똥이 강석원에게까지 튈 것 같아서 일단 어머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조지현의 현재 이런 상황을 강석원도 모를 리 없었다.
―무리한 부탁인 거 알아. 정 안 되면…….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조지현은 얼른 글씨를 쓴다.
―괜찮을 거 같아요.
조지현은 속으로 날짜를 헤아려보고는 덧붙였다.
―이번 주 주말에 외할머니 제사라서 부모님 집 비우실 거예요. 저 시간 낼 수 있어요.
―너는 거기 안 가?
―네. 저는 안 갈게요.
강석원이 만족한 얼굴로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이렇게 나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강원도 가려고. 할머니 댁. 정리할 일도 있고 겸사겸사.
강석원이 며칠 전 우승한 대회는 운동선수로서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들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찾아뵙고 싶을 것이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소개하고 싶고.
조지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아니, ……안 좋아하실 거 같은데요.
아무리 고인이라 할지라도 손자의 남자 애인을 봐야 하는 심정을 헤아리자니 마음이 어두워진다.
―분명 좋아하실걸.
―……, …….
조지현은 말줄임표를 여러 개 그려 넣었다. 강석원이 웃었다.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강석원이 얼른 손을 들어 조지현의 귀를 막는다. 조지현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좋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고 싶다.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무슨 샤워를 그렇게 오래 해?”
여자가 뾰족한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조지현은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시트 속에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더해지자 몸이 오싹 떨린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어머니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왜 창을 열어 놔. 보일러 헛돌잖아.”
“졸려서요.”
조지현은 손에 든 영어책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여자의 얼굴에 금세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진다.
“그래. 졸리다고 막 자면 안 돼. 그 정도 정신력은 있어야 공부를 하지.”
“알겠습니다.”
조지현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내일 외할머니 제사인 거 알지?”
“네. 알고 있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어머니가 문을 닫고 나갔다. 조지현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한기가 스며들어 몸이 덜덜 떨렸다.
얼음장 같은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직후였다. 창으로 넘어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얼어붙는 기분이다. 조지현은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졸음이 밀려오고, 춥고, 머리가 무거웠지만 버텨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목이 따끔거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조지현은 그제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금세 열이 올랐다. 나약하고 비루한 몸뚱이가 이렇게 반가운 순간은 처음이었다.
외할머니의 고향은 땅 끝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외할머니의 제사에는 참여했다. 외삼촌도, 외할아버지도, 어느 날 이유 없이 자살을 했다. 어머니는 그걸 더러운 피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절대로 그 더러운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집착했다. 외할머니의 영역에 속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부득불 제사를 챙기는 이유도 그와 같았다.
“지현아. 일어나. 빨리 준비해.”
어머니가 문을 열어젖혔다. 조지현은 간신히 시트를 내렸다. 열이 오른 얼굴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너 왜 그래? 또 어디 아파?”
“감기, 걸린 거 같습니다.”
목소리도 갈라졌다. 찬바람을 맞아가며 밤을 새운 보람이 있었다.
“감기 걸렸다고?”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선다.
“그래도 일어나. 외할머니 제사에 그렇다고 안 가?”
“아프다는데 어떻게 가.”
아버지는 손으로 아들의 이마를 짚어보고는 말을 잇는다.
“열이 절절 끓잖아.”
며칠 전,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때려 고막을 찢어지게 한 이후로 남자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관대하게 굴었다.
“너는 왜 그렇게 몸 관리도 제대로 못해.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한 날에.”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른다. 조지현은 무심코 습관적으로 귀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지현이 그냥 오늘은 쉬라고 합시다. 저번에 의사가 그랬잖아. 무리하면 청력에 영구적인 손상 올 수도 있다고.”
영구적인 손상이란 단어에 어머니의 표정도 흔들린다. 귀에 이상이 생기면 그녀가 갖고자 하는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많이 아파?”
“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쉰다.
“하는 수 없지. 그럼 넌 집에서 쉬어.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 알겠어?”
“네.”
“전화로 확인할 거야. 아니, 전화기 쓰지 마.”
그녀는 거실로 나가 전화기 선을 뽑아 가방에 챙겨 넣는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와 조지현의 옷을 뒤져 남아있는 동전과 지폐를 끄집어낸다.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조지현은 일찌감치 돈을 숨겨두었다.
“밥은 냉장고에 있는 거 먹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알겠어?”
“……네.”
“아픈 애가 뭘 한다고 그래. 얼른 준비하고 나갑시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갔다.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얼마 뒤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와 다시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나가지 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가만 안 둘 거야. 집에서 공부만 해. 밥은 알아서 챙겨먹고. 토할 거 같아도 바닥에는 토하지 마. 더러워. 어지르지 말고, 아프다고 너무 잠만 자지 말고. 조지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버지가 어머니를 끌고 나간 뒤에야 평화가 찾아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 뒤에야 조지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마가 뜨끈할 정도로 열이 났다. 선반에서 해열제를 찾아 삼켰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몸이 어느 정도는 풀리는 느낌이었다. 옷을 입고 나서 조지현은 해열제와 감기약을 챙겼다. 강석원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조금만 쉴까.
조지현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비참하고 한심했다. 그래도 괜한 의심을 사서 강석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했는지 몸이 늘어졌다.
“죄송해요.”
조지현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잠깐 잠이 들어서…….”
“괜찮아. 여기 있어. 버스표 사올게.”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에 강석원이 버스표와 물을 사서 돌아왔다.
“십 분 뒤에 출발한대.”
강석원이 조지현의 왼쪽에 서서 말한다. 두 사람은 표에 적힌 대로 24번 승차 홈으로 나갔다.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 몇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조지현이 작게 기침을 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물을 건네주고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금연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들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가 강석원을 보고는 황급히 담배를 끈다. 강석원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조지현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물을 마셨다.
버스는 금방 승차 홈에 도착했다. 표를 내고 버스에 올라탔다. 강석원은 조지현에게 창가자리를 주고 옆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순간 잠이 쏟아져 왔다.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않은 데다, 약기운, 감기기운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저 잘게요.”
조지현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강석원이 대답 대신 창가의 커튼을 쳐주고 조지현의 고개를 제 어깨로 닿게 했다.
조지현은 눈을 감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간신히 눈을 떴다. 휴게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화장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계속 잠만 자고 싶었다. 조지현이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열나잖아.”
조지현은 자다 깨서 그래요, 하고 고개를 돌렸다. 강석원의 손이 끈질기게 조지현의 이마를 짚는다. 그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이렇게 아픈데 왜 왔어.”
“…….”
“터미널 도착하면 서울로 다시 가자.”
조지현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조지현.”
“가고 싶습니다.”
“다음에 가도 돼.”
“오늘 꼭, 가고 싶습니다.”
그가 자란 고향에 가고 싶었다. 싫어하실 수도 있겠지만, 할머니께 인사도 드리고 싶다. 강석원과 같이 있고 싶다.
다음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을 느끼는 매 순간, 그 사실을 마주한다. 처참하게 밑바닥까지 끌어내려진다. 강석원에게 제가 느끼는 이 불안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음이 가장 참담하다.
“지현아.”
강석원이 어리광 심한 아이를 달래는 투로 이름을 부른다.
“저 언제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선배님.”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은 한숨을 내쉰다.
“그럼 원주 도착하자마자 병원부터 가자.”
강석원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닿는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 마시고 자.”
그가 물병을 건넸다. 목이 부어 침을 삼키는 것도 어려웠지만 조지현은 그가 시키는 대로 물을 몇 번이고 나누어 마셨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조지현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했다. 모자란 잠을 보충한 덕인지 다행히 열은 아까보다 조금 내린 상태였다.
강석원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병원을 찾았다.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았다. 병원 건물 아래층에 죽 집이 있었다. 죽을 먹고 약을 삼켰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힘들면 말해. 지금 서울로 가도 돼.”
“오늘 중요한 일이잖아요.”
“아픈 너 끌고 다닐 만큼 중요한 일 없어.”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조지현은 웃어 보였다.
“아프면 말씀드릴게요. 신경 쓰게 해드려 죄송해요.”
“……, 말하지 마. 귀도 아픈데.”
“거의 다 아물었어요.”
어제 혼자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이대로 두면 며칠 내에 다 아물 거라고 의사는 말했다.
“빨리 가요, 선배님.”
조지현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는 약봉투를 주머니에 넣는다. 두 사람은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다. 원주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자.”
강석원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조지현의 이마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강석원은 조심스럽게 조지현의 몸을 잡아주고 이마를 짚어본다. 남자의 손가락은 마디를 따라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조지현은 그의 손이 좋았다. 강석원의 손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저려올 만큼.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버스가 한적한 정류장에 멈추어 섰다. 종점이었는지 기사도 버스에서 내려 찌뿌듯한 몸을 폈다.
“좀 걸어야 해. 걸을 수 있어?”
강석원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조지현의 옷자락을 여며주며 묻는다.
“괜찮습니다.”
“힘들면 말해.”
업어줄 테니까.
조지현은 덧붙은 말을 듣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포장된 도로는 금세 끝이 났다.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는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문명의 흔적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다.
“괜찮아?”
강석원은 몇 번이나 조지현의 상태를 확인했다.
“네.”
“사람 없어. 업혀도 돼.”
조지현은 웃으면서 다시 걸었다. 그렇게 이십 분을 더 걷고 나서야 강석원은 여기야, 하고 낡은 한옥을 가리켰다. 강석원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세 생활감이 사라진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집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강석원은 먼지를 대충 털어내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툇마루에 앉아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강석원이 자랐을 곳이라고 생각하자 모든 곳에 눈길이 닿는다.
“잠깐 있어. 안쪽에 정리할 거 있나 보고 올게.”
강석원이 부엌과 연결된 창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정리를 마쳤는지 쌓여있는 물건이나 가재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마루 기둥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아니, 마루 기둥에 그어진 선들이. 조지현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기둥에 다가갔다. 몇 개의 선이 아래서부터 위로 이어진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가장 아래에 있던 선부터 위까지 차례대로 손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그에게도 이렇게 작고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자, 마음 한켠이 간지럽다.
“뭐 해.”
창고에서 나온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은 대답 대신 기둥을 가리켰다.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린다.
“할머니께서 그어두신 거야. 나중에는 너무 커서 그만뒀지만.”
마지막에 그은 선은 아마 노인의 팔이 닿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조차 모두 애틋하다.
“뭐 찾으셨어요?”
“사진 몇 장.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강석원이 낡은 봉투에 든 사진을 건넨다. 색 바랜 사진 속의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
“언제예요?”
“초등학교 졸업식.”
강석원이 조지현의 옆에 앉는다.
“이때부터 크셨군요.”
강석원이 그렇지, 하고 여상하게 대꾸한다. 다음 사진은 그의 조모와 함께였다. 혼자 있을 때보다 훨씬 긴장이 풀린 얼굴로 조모의 손을 잡고 있다. 그가 조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다.
조지현은 물끄러미 사진을 보다가 강석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응.”
“저 이 사진 갖고 싶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있는 사진이 아닌 혼자 서 있는 강석원의 사진을 골랐다. 강석원이 느슨하게 웃으며 하필 왜, 하고 묻는다.
“그냥요.”
외로워 보여서요.
길 건너에 있던 남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래. 가져.”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서 계속 사셨던 거예요?”
“응. 계속.”
강석원이 눈을 아래로 내리감았다가, 말을 잇는다.
“여기 개발 때문에 건물 철거한다고 연락 받았어. 오늘 마지막이야.”
조지현은 눈을 깜빡거리며 남자의 말을 듣는다.
“좀, 아쉽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좀 아쉬운 게 아닐 것이다. 할머니와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보지 못할 곳이다. 그걸 포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던 남자 때문에 조지현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일어날까.”
“더 안 보셔도 됩니까.”
“정리할 건 전에 다 했어.”
조지현은 몸을 일으켰다. 집을 나오기 전에 남자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을 뿐,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강에.”
그곳이 할머니의 유골을 뿌린 장소임을 조지현은 바로 짐작했다. 길을 따라 조금 걷자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느껴졌다. 성인의 허리를 넘어서는 갈대밭이 이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풀이 서로를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울렸다.
“여기야.”
강석원이 멈추어 선다. 시야가 트인다. 바람이 갈대를 뒤흔들었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는다. 강석원의 온기가 손을 단단히 감싸 쥔다.
“걱정이 많으셨어.”
남자의 목소리는 겨울의 문턱에 선 지금의 계절과 퍽 닮아 있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공기가 강바람을 타고 닿는다.
“잘못된 길로 빠지지는 않을까, 부모 없는 아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을까, 밥은 잘 챙겨 먹을까, 하는 그런 거.”
“좋은 분이셨던 거 같아요.”
“응. 많이.”
강석원이 한숨처럼 숨을 내뱉으며 말을 잇는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셨어. 그래서 널 보면 좋아하셨을 거야, 분명.”
강석원의 시선이 빛이 부서지는 강의 수면에 닿는다.
“그게 바라는 전부셨으니까.”
남자는 자신의 충만한 행복을 고백한다. 할머니가 바라던 전부를 이루었다고, 조지현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현아.”
강석원의 낮은 부름이 닿는다.
“같이 살자.”
“…….”
“나랑 같이 살자.”
남자의 고백은 이전에도 그랬듯이 단조롭고 담담하기만 하다. 꾸밈도 없고 가식도 없다. 그저 그대로의 온전한 마음이다.
울컥, 뜨거운 것이 치솟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잘해줄게.”
이보다 더 상냥한 보살핌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항상, 매번, 당연하다는 듯이, 저보다 조지현을 더 우선으로 했다.
“계속, 너랑 있고 싶어.”
조지현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저는, …….”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돼.”
강석원이 조지현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조지현이 가지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을 읽은 것이다.
“선배님과 같이할 수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
“그게 무엇이든, 선배님이 행복하실 수 있으면, ……,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냥 있어.”
그거면 돼.
남자는 바람에 흐트러진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덧붙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정당한 존재를, 남자는 매순간 긍정한다. 그냥 옆에만 있어달라고, 그것이 모든 의미라고. 그런 강석원이, 자신에게는 전부가 된다. 조지현은 담담하게 웃었다. 문득,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는다. 조지현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그때 생각나요.”
“언제.”
“비오는 날 저 데려오셨을 때요. 항상 열 이렇게 재주셨잖아요.”
강석원이 손을 내린다.
“미안해.”
그때, 너 너무 만지고 싶어서 그랬어.
언뜻 열기가 묻어나는 남자의 말에 조지현은 눈을 떴다.
“괜찮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강석원이 고개를 숙여 조지현에게 입을 맞춘다. 혹시 스치는 강바람에 귀가 아프지는 않을까, 두 손으로 귀를 포옥 감싼다.
바싹 마른 갈대가 바람에 부스러지는 소리가 일시에 멀어졌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계였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10시가 넘어 있었다. 강석원은 들어가, 하면서 입구에 선다.
“집으로 가시게요?”
“옷 갈아입고 좀 달려야지.”
그는 놀라울 정도로 성실한 노력가였다.
“오늘 고마웠어. 몸도 안 좋은데.”
“아닙니다.”
“얼른 들어가.”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살짝 밀어낸다. 조지현이 저기, 하고 그를 불렀다.
“잠깐 올라갔다 가실래요?”
“……, 너희 집에?”
강석원이 조금 당황한 투로 묻는다.
“네. 오늘 부모님 안 오세요. 내일 오후 늦게나 오실 거예요.”
말해놓고 너무 노골적인 발언인가 싶어서 조지현은 잠깐 차라도,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
강석원은 선선히 조지현의 뒤를 따라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조지현은 강석원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아까 급하게 나오느라 제 방 안 치웠어요.”
강석원의 자취방은 늘 깨끗했다. 반면 자신은 이불 정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온 것이다. 부끄러웠다.
“괜찮아.”
강석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 비밀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주면서 조지현은 들어오세요, 하고 비켜섰다. 강석원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집 천장이 이렇게 낮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가 제 방입니다.”
조지현이 방으로 안내했다. 그가 방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방 안이 비좁아 보인다.
“주스 드실래요?”
“응.”
강석원이 건성으로 대꾸하며 시선을 돌린다. 방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정신은 온통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데 팔려있다. 조지현은 외투를 벗어 걸쳐두고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컵에 담아 쟁반에 받쳐왔다.
“뭐하세요?”
“구경.”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는 책상을 보는 중이었다.
“구경할 게 뭐 있어요. 다 책인데.”
“그냥. 신기해서.”
조지현이 컵을 건넸다. 강석원은 고마워, 하고 받아들면서도 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거 너야?”
강석원이 어렸을 적 사진을 가리킨다.
“네.”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예쁘다. 감탄 어린 한마디에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다른 사진은 없어?”
“몇 장 없어요. 어머니가 안 좋아하셔서.”
강석원의 시선은 방의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다 상 받은 거야?”
“네.”
“이건 무슨 상이야?”
“글짓기 상이요. 시 대회.”
“이건?”
늘 묵직한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묻는다. 조지현은 웃으면서 강석원이 가리킨 책자를 꺼내준다. 그동안 모은 성적우수상을 파일에 껴둔 것이었다.
“대단하네.”
강석원이 앞뒤로 넘겨보며 말한다. 조지현은 쑥스러운 듯 뭘요, 하고 웃어 보인다.
“별로 볼 거 없죠?”
“아니.”
책상에는 책과 상장들만 수두룩하게 꽂혀 있다. 침대와 교복을 걸어두는 옷걸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구경거리도 없는 살풍경한 방을 한참 동안 둘러본다.
“여기서 자?”
강석원이 침대에 앉으며 묻는다.
“네.”
조지현이 그의 옆에 앉았다. 찬찬히 침대를 둘러보던 강석원의 시선이 일순 가늘어진다. 피가 벽에 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지현이 얼른 베개를 들어 가렸다. 그제야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에 있는 날카로운 것으로 찍은 듯한 자국들, 부서진 문고리.
강석원이 두 손을 모은 채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조지현이 사과했다.
“뭐가.”
“그냥, ……다.”
주제도 모르고 이 끔찍한 곳으로 강석원을 불러들인 것이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네가 사과할 일 아니잖아.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자신이 모두 사과할 일이다. 자신의 불행은 온전히 자신이 타고난 것이지만 강석원은 그렇지 않았다.
“졸업하기 전에는 안 되는 거지?”
강석원이 묻는다. 괴로운 얼굴이다.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떨군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 순간조차 빼앗기고 만다.
“내가, 방법을 더 생각해볼게.”
“……,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코끝에, 그리고 입술로 내려온다.
그와의 입맞춤은 몹시도 황홀했다. 호흡이 뒤섞이고 말로는 전하지 못할 언어가 혀끝으로 넘나든다. 입맞춤이 멎는다.
“아직도 열 좀 있네.”
“조금요.”
약을 먹으면 떨어졌던 열이 약 기운이 사라지면 다시 오른다. 아마 오늘 밤은 밤새 앓을 것이다.
“약 먹고 자. 나는 이제 갈게.”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에 입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선다. 조지현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벌써요?”
차만 마시고 가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그는 일찍 일어섰다. 자신이 혹시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제가 혹시 실수한 거 있습니까?”
조지현의 물음에 강석원이 눈을 살짝 치뜨더니, 이내 웃는다.
“아니.”
“그럼, 왜…….”
“계속 있다가는 분위기 이상해질 것 같아서.”
너 몸도 안 좋은데.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한다. 그가 재킷을 집어 들었다. 간다, 하고 나가려는 강석원의 손을 붙든다.
“선배님. 가지 마세요.”
“…….”
“오랜만이잖아요. 더 있다 가세요.”
“다음에.”
“다음에, 언제요.”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초조함을 드러낸다. 강석원이 그런 조지현을 응시하다가 낮게 혀를 찬 후, 입을 연다.
“그거 안 좋은 버릇이야.”
“…….”
“왜 자꾸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굴어.”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사실까지 모두 관통 당한다. 조지현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 너랑 계속 만날 거야.”
“……, 죄송합니다.”
머리 위에서 강석원의 한숨이 들린다. 그가 조지현의 턱을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한다고 말했지.”
의지가 담긴 강석원의 음성은 무엇으로도 흠집 내지 못할 만큼 견고하다.
“네가 싫어져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게 아니라면,”
거기까지 말해놓고 강석원은 잠시 숨을 고른다.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다.
“나 너 죽어도 안 놓을 거야. 아니, 못 놔.”
그의 무서운 몰두가 다가선다. 조지현은 그게 무엇인지 안다. 정신병원에 없는 거 확인했으면 됐어. 인터폰을 통해 들려오던 차가운 목소리에는 강석원이 지켰던 약속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양보 못해. 아무리 너라도.”
“알겠습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얼른 자, 하고는 조지현의 뺨을 어루만진다. 열이 오른 뺨이 부드럽다. 조지현은 멍하니 중얼거리듯 말한다.
“다음에 만나면 선배님하고 섹스하고 싶습니다.”
가끔 조지현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직설적인 말을 쏟아냈다. 강석원은 그때마다 당혹감과 기쁨을 함께 느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조지현이 머뭇거리다가 눈을 든다. 열기가 어린 시선이 강석원의 입술에 닿는다.
“키스해주세요.”
강석원이 한숨처럼 무너지며 조지현을 끌어안는다. 가느다란 몸을 바싹 끌어안고 입술을 삼켰다. 조지현이 그의 재킷을 벗겼다. 열렬하고 적극적인 몸짓에 강석원의 머리는 열기로 하얗게 번진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은 채로 침대로 걸어갔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셔츠를 벗겨냈다. 조지현이 몸을 떨면서 강석원의 어깨에 매달린다. 키스를 한 것도, 몸을 겹친 것도, 이미 여러 차례다. 그런데도 매번 손이 떨릴 만큼 긴장된다.
“너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강석원의 눈이 웃음을 머금는다. 조지현이 강석원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강석원이 이리 와, 하고는 조지현을 아이처럼 끌어안아준다. 마주보고 끌어안긴 채로 조지현은 강석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조지현다운 구애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셔츠 안에 손을 넣었다. 작게 솟아오른 돌기를 강석원이 손끝으로 문질렀다. 조지현이 아, 하고 허리를 비튼다. 가느다란 신음을 내면서도 조지현은 쉬지 않고 강석원에게 입술을 부빈다. 그 달큼함에 한껏 취한 남자가 조지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는다. 셔츠의 단추를 끌어내리자 빛을 받지 못해 새하얀 몸이 드러난다. 강석원이 돌기에 입을 댄다.
“선배님, 아, …….”
조지현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밀어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쥔 채로 조지현은 어쩔 줄 몰라 한다. 바르작거리던 조지현은 발끝으로 강석원을 차고 말았다.
“싫어?”
강석원이 물었다.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머뭇거리던 조지현은 조그만 목소리로 싫지 않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 …….”
이런 것을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지현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자 강석원이 어떤데, 하고 재차 묻는다.
“잘, ……모르겠어요.”
조지현이 말을 잇는다. 간지럽기도 하고, 발끝이 오싹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런데 싫은 건 아닙니다, 선배 숨이 거기에 닿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래가 저릿하고……그래요.
모범생다운 조지현의 자세한 대답에 강석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고 한숨처럼 속삭인다.
“좋다는 거잖아.”
그가 조지현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아 다시 돌기를 머금는다. 몇 번 입술에 머금은 채 빨아올리는 것만으로도 유두가 솟아오른다. 전체적으로 색이 옅은 유두는 물고 핥는 것으로 금세 피가 몰려 발갛게 변한다. 예쁘다. 강석원이 가슴부근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이로 살짝살짝 돌기를 씹으며 그렇게 몇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의 반듯한 콧대가 보인다.
“선배님.”
강석원이 눈만 들어 시선을 맞춘다.
“키스, 하고 싶어요.”
커다란 손이 조지현의 뒤통수를 단단히 붙들었다. 강석원이 단번에 다가온다. 조지현은 입을 한껏 벌려 그의 혀를 삼켰다. 타액이 뒤섞이고 어릿어릿한 열기가 스민다. 입맞춤이 더 깊어진다. 강석원이 거칠게 입술을 비비고 조지현의 혀를 핥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두 사람은 헤아리기 힘든 황홀함에 숨을 헐떡였다.
“……, 오늘은 키스만 하실 겁니까.”
조지현이 물었다.
“네가 그러라고 한다면.”
강석원이 조지현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대답했다. 남자의 아래가 아까부터 단단하게 성이 난 채였다. 그건 조지현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조지현의 말끝은 남자의 입술에 삼켜진다. 바지가 끌어내려지고 속옷이 다리에 걸린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다리사이에 고개를 묻는다.
“――.”
터지지 못한 비명이 혀끝에 맺힌다. 남자가 성기를 빨아올린다. 체모가 그의 타액으로 금세 흠뻑 젖는다. 미칠 것 같은 쾌감에 조지현은 목을 뒤로 젖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낯설고 초조한 감각에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가 하는 대로 두었다. 강석원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아, 아, ……응. 선배님…….”
욕망에 젖은 음성으로 조지현은 강석원을 연신 불렀다. 선배님, 선배님, ……. 강석원은 그 부름에 화답하듯 혀를 움직였다. 남자가 성기를 삼킬 때마다 오싹한 공포와 쾌감이 뒤섞였다.
“선배님, 나올 것 같, ――.”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석원이 살덩이를 끝까지 삼켜냈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인다. 조지현은 민망함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 먹지 마세요.”
말을 해봐도 소용없다. 그는 제 입술에 묻은 정액까지 핥아낸다. 강석원의 탐욕스러운 몸짓은 낯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가 제게 욕심을 부릴 때마다 조지현은 뱃속이 오싹했다.
강석원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사타구니가 닿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발가락에 스쳤다. 조지현은 발끝을 움츠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발목을 쥐었다. 그러고는 허락을 구하는 듯이 바라본다. 조지현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강석원이 그대로 발목에 이를 세운다. 앙상한 발목을 물고 핥으며 그는 제 성기를 꺼내어 주물렀다. 커다란 살덩이가 금세 젖는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발을 빨며 한껏 흥분했다. 사나운 숨소리가 들렸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을 침범했다. 뜨거운 피가 돌았다. 무너지듯 조지현은 강석원의 위로 몸을 내던졌다. 바닥에 뒹굴면서 서로의 옷을 벗겼다. 짐승처럼 알몸이 된 채로 엉겨 붙었다. 강석원이 성기가 아래를 문지른다. 조지현은 그의 몸짓을 보채듯이 허리를 흔들었다. 단번에 삽입된다. 뜨거운 정욕이 아래를 가득 채운다. 숨을 멈춘 채로, 조지현은 강석원을 기껏 느꼈다. 강석원이 안으로 조금씩 침범했다. 초조한 탐식이다. 굶주린 짐승에게 뱃속부터 물어 뜯긴다. 조지현은 다리를 벌리고 그의 허리를 끌어당긴다. 남자는 욕망을 한껏 처박았다. 거칠게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온몸의 감각이 뒤흔들렸다.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아 그저 남자의 굵직한 팔을 붙드는 게 고작이었다.
“지현아.”
강석원에게 이름이 불리는 순간, 사정으로 인해 늘어진 성기에 피가 돌았다. 눈앞이 번뜩였다. 아래를 짓치는 쾌락이 몸을 자극했다. 말 못하는 어린 짐승처럼 울면서 조지현은 강석원을 바싹 끌어안았다. 조지현이 먼저 절정에 다다랐다. 가느다란 몸이 잘게 경련하며 남자의 성기를 조였다. 강석원이 이를 문 채로 허리를 추어올렸다. 한계에 다다른 성기를 바로 끄집어냈다. 그가 성기를 조지현의 배에 문지르며 사정했다. 뜨끈한 정액이 배를 적시는 감각에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름끼칠 만큼, 좋았다. 강석원이 테이블을 더듬어 티슈를 가져와 조지현의 배를 닦아준다. 조지현이 흐트러진 숨을 내뱉으며 그를 바라본다. 정액에 젖은 조지현의 살덩이를 보고 남자는 작게 숨을 삼킨다. 강석원은 다시 흥분한다. 체모 사이로 보이는 두꺼운 성기가 온전히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한 번 더 하셔도 돼요.”
“힘들잖아.”
그는 티슈로 마저 조지현의 몸을 닦아주었다. 손이 스칠 때마다 조지현의 몸이 오싹오싹 떨렸다.
“선배님…….”
조지현이 그를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침대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 허리를 숙인다. 뽀얗게 살이 오른 둔부가 보인다. 성기의 출입으로 발갛게 부어오른 구멍이 드러난다. 방금까지 성기를 품었던 곳이다. 강석원이 그 감각을 떠올리는 순간, 아래에 바싹 피가 몰렸다. 마른침을 삼키는 기척을 듣고 조지현이 고개를 돌린다. 수치와 기대감에 젖은 눈과 마주하자 남자는 간신히 붙든 이성을 놓아버린다. 그대로 조지현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단단한 좆을 박아 넣었다. 조지현이 자지러지듯이 울면서 시트를 움켜쥔다. 뽀얀 엉덩이 사이로 힘줄이 돋은 검붉은 성기가 출입하는 모습이 보인다. 깨끗하고 정결한 것을 더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강석원은 이를 사리물었다. 엉덩이가 벌어지면서 성기가 끝까지 박혔다. 조지현이 바르작거리면서 작게 울었다. 그 가여운 몸짓에 남자는 숨 쉬기 힘들 만큼 흥분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지현아. 무게에 짓눌려 헐떡이면서도 조지현은 그의 부름에 응답한다. 살이 오른 엉덩이가 강석원의 납작한 배에 닿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분이 치솟는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둔부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쩍, 쩍, 하고 살덩이가 내벽에 질척하게 들러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조지현이 평소 누워 잠드는 침대다. 조지현이 공부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생활하는 곳에서 그의 옷을 모두 벗겨내고 짐승처럼 뒤에서 그를 범했다. 그의 경계를 흩트리고 영역을 침범했다. 동물적인 본능이 고개를 든다. 조지현에게 제 것이라는 낙인을 찍듯, 강석원은 그의 안에 욕구를 배설한다. 정액이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강석원은 조지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있는 힘껏 끌어안고 다시 한 번 허리를 추어올린다. 정액이 깊숙한 곳까지 닿는다. 조지현의 허벅지가 가늘게 경련했다. 맞물린 틈으로 정액이 흘러넘친다. 실금처럼 조지현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다. 강석원은 일부러 한참 동안 그걸 바라보기만 했다. 조지현이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지현이 살짝 눈가를 찌푸려 보인다.
강석원은 그제야 손을 뻗어 티슈를 쥐었다.
지현아.
조지현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뒷정리 다 해뒀어. 나 갈게.”
옷을 모두 차려입은 남자가 침대 맡에 앉아 말한다. 조지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있어.”
“몇 시예요?”
“새벽 4시.”
“버스 없잖아요.”
“뛰어가면 돼.”
새벽 내내 발정한 짐승처럼 들러붙어 성교했다. 조지현은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데 뒷정리까지 다하고 집까지 뛰어간다고 한다. 인간 같지 않은 그의 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이랑 약 갖다놨어. 열나면 먹고.”
“네.”
그가 조지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조지현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가 조지현을 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왜요.”
“두고 가기 싫어서.”
“…….”
조지현에게 이곳이 어떤 의미인지 남자는 알고 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공중전화 카드 베개 안에 넣어뒀어.”
이전에 전화를 하라고 돈을 주려 하는 걸 조지현이 극구 거부한 이후로 강석원은 가끔 이렇게 공중전화 카드를 사서 건넸다.
“감사합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준 후, 이제 진짜 갈게, 하고는 방을 나선다. 뒤이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몸에는 열이 오르는데 이상하게 추웠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작은 방이 이렇게나 넓어 보이는 것은.
벽 쪽으로 몸을 돌려보지만 어디선가 강석원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깨닫고 만다. 이 방은 이미 강석원에게 침범 당했다. 어디를 보더라도 그가 떠오르고 만다.
잠은 다 잤구나.
조지현은 한숨을 몰아쉬며 시트를 끌어당겼다. 희뿌연 새벽빛이 창가로 천천히 스며들 때까지도, 조지현은 남자를 생각했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