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6/12)

4장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 보인다. 탁, 탁, 탁, 경쾌하게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현아. 일어나야지.”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에 조지현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살폈다. 흐릿한 시야가 점점 명확하게 형태를 찾아간다.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건가.

멍하니 방을 살피고 있는데 방문이 열린다.

“지현아. 늦겠다. 얼른 일어나.”

“…….”

“왜 그래? 어디 아파?”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는다. 조지현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쳐냈다. 여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너 왜 그래. 엄마가 아침부터 일어나서 네 아침 차리고 있는데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게.”

소름끼칠 만큼 현실적인 말투와 목소리다. 조지현은 한참 눈을 깜빡거렸다.

“잠에서 덜 깼니? 세수부터 해. 얼른.”

그녀가 조지현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강제로 침대에서 끌어낸다. 바닥에 발이 닿았다. 온몸이 오싹 떨릴 만큼, 모든 것이 그럴듯하다.

엉겁결에 욕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연다. 졸졸졸 쏟아지는 물을 손을 모아 받은 후, 얼굴을 적셨다. 이성이 확연해진다. 몇 번이나 더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부엌에 있던 여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친다.

“안에서 뭐하는 거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뺨을 후려쳤다. 찰싹. 얼얼한 고통이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 번 더 세게 후려갈겼다. 한 번 더, 한 번 더. 연달아 몇 번 더 후려쳤지만 마찬가지였다.

입가에 찝찌름한 피 맛이 배어나왔다. 조지현은 세면대를 짚고 다시 몸을 일으켜 거울을 확인했다.

“지현아! 학교 늦는다니까!”

낯설고 낯익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열여덟의 자신이다.

“일주일 뒤에 모의고사 있는 거 알지?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고. 알았지?”

모의고사가 있는 달은 이 주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세듯 어머니는 같은 당부를 했다.

“알겠습니다.”

신발에 발을 넣으며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열고 기다리는 와중에도 현실감은 여전히 없었다.

땡.

엘리베이터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안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학생, 안 탈 거야?”

“아, 아니요.”

조지현은 서둘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로 다시 한 번 얼굴을 확인했다. 마찬가지였다.

교복을 입은 자신은 영락없는 열여덟의 학생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멍하니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조지현은 몇 번이나 제 팔을 꼬집어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버스가 도착해 습관적으로 바로 올라탔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자리를 잡고 서서 조지현은 최대한 생각나는 대로 기억을 더듬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통화를 하다가 창밖에서 커다란 달을 보았고, ……. ……강석원.

떠오르는 이름에 조지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제일 고등학교, 제일 고등학교 앞입니다. 하는 방송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버스에서 내렸다. 조지현도 그들을 따라 하차했다. 

낯익은 교복의 소년들이 낯익은 거리를 걷는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가 되어 진행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조지현은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길을 따라 학교로 걸어왔다. 교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책상도, 의자도, 주변의 학생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조지현은 앞에 앉은 녀석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저기.”

“응? 왜?”

“오늘 며칠이야?”

“4월 3일. 왜?”

“아니야. 아무것도.”

조지현은 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아직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이다. 

수학여행도, 최기열과의 일도, 미국으로의 전학도.

조지현은 뺨을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미쳐버렸다거나…….

“선생님 오신다!”

앞에 있던 학생의 외침에 다들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조지현도 습관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다들 다음 주에 모의고사 있는 거 알지? 정신들 차리고 공부해라. 아침에 떠들지 좀 말고.”

담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멀어졌다.

조지현은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혼란스러운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헤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조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놀라. 어디 가냐?”

최기열이었다. 그가 조지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조지현은 황급히 최기열을 떨쳐냈다. 최기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 저,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조지현은 변명처럼 중얼거리고 그 자리를 피했다.

최기열을 보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단순히 만들어낸 거짓 기억이 아니었다. 몸을 더듬고 더러운 욕설을 퍼붓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날카로운 이명이 일었다. 조지현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대로 아침에 먹은 것을 토해냈다. 모두 게워내고 나자 이명이 사라졌다.

조지현은 세면대로 와서 입을 헹궜다. 손이 떨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기억들은 망상이 아니다. 최기열은 분명 자신에게…….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든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던 남자가 조지현을 발견한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시선에 스치는 감정을 읽는 순간, 조지현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그대로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은 낯선 존재를 살피는 의아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강석원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 며칠이라고 했지?”

“4월 3일. 아까 물어봤잖아.”

앞에 앉은 녀석이 이상하단 눈으로 조지현을 쳐다보았다. 조지현은 미안, 하고 사과했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어디 아프냐?”

“아니. 아픈 건 아니고. ……혹시 어제 나 어땠는지 기억 나?”

“얘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어제의 너라니. 똑같지. 학교 와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하고.”

“……, 고마워.”

조지현은 멍하니 중얼거리고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의 자신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달라진 것일까.

조지현은 학교 도서관에 앉자마자 공책을 폈다.

기억이 나는 대로 그간의 일들을 정리해 적어 두었다. 시작은 강석원의 편지를 받는 날이다. 정확히 그때가 며칠이었지. 필사적으로 떠올려 보려고 노력해도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답답했다. 그날의 기분, 장면, 자신을 부르던 강석원의 목소리는 생생히 떠오르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다.

4월 3일. 

노트 귀퉁이에 날짜를 적어본다.

달라진 것.

아직은 알 수 없다.

같은 것.

사람. 공간. 

조지현은 펜으로 글자를 끄적이다가 강석원이라는 이름을 써 보았다.

오늘 낮에 우연히 마주쳤던 순간을 생각했다.

지현아.

그렇게 부르던 음성이 떠올라 가슴이 옭죄었다. 강석원은 아직 자신을 모른다. 결국, 그의 인생이 망가지기 전이라는 뜻이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현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온도와 냄새, 그의 손길이 또렷하다. 

지현아. 사랑해.

병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속삭이던 벅찬 음성은 없던 것으로 해야 한다.

같이 살자.

모든 것을 고백했던 순간에도 묵묵히 그렇게 답해주던 남자의 마음은 존재하지 말았어야 한다. 

조지현은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이런 일들이 어째서 벌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해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강석원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은 모른 채 살아야 한다. 

“아르바이트?”

“네.”

“학생이?”

“네.”

편의점 점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조지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은 못 하는 건가요?”

“아니. 가능이야 하지. 부모님 동의서만 있으면 돼.”

부모님 동의서라는 단어에 조지현은 일순 표정이 굳었다.

“미성년자는 부모님 동의가 꼭 필요하거든.”

“받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또 필요한 게 있나요?”

“주민등록 등본이랑, 신분증은 뭐 학생증 있으면 되고. 부모님 동의서 갖고 오면 돼. 그런데 정말 할 수 있겠어?”

점장이 여전히 못미더운 투로 물었다.

반듯하게 교복을 입은 소년의 모습은 아르바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점장이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밀었다. 

“그럼, 뭐. 일단 내일까지 여기에 적힌 대로 서류 들고 와.”

“알겠습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자신이 꿈을 꾸거나 미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그 이후부터는 빠르게 현실에 적응했다. 포기와 수용이 빠른 자신의 성격에 고마워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선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사건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걸 하는 데에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할 일들을 정했다.

대학을 간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학벌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면 집을 나온다. 대학에 들어가면 과외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전에 최대한 돈을 마련해 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가 필수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무가지를 찾아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동선과 겹치지 않는 곳을 골라 일일이 찾아가 면접을 보았다. 교복을 입은 미성년자를 보는 순간, 대부분의 점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마 간신히 수락을 한 곳이 편의점이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미성년자는 열 시 이후에는 고용이 불가능했다. 학원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시간을 쪼개어 공부를 하면 된다. 무엇보다 인지 능력이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기 때문에 수업 내용을 받아들이는 게 이전보다 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일은.

조지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나 이미 한 번 겪은 끔찍한 시간들을 다시 보내는 것 따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모습은 고등학생이지만 그 속은 이미 그로부터 몇 년이나 지난 자신인 것이다. 세월을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첫날 강석원과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한 번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학년도 다르고 접점도 없는 사이다. 애당초 마음먹고 찾아가지 않는 이상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계속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교실을 나와 복도를 걷거나 운동장에서 습관처럼 강석원의 모습을 눈으로 찾게 된다.

짝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조지현은 짧게 웃음을 삼켰다. 따지고 보면, 짝사랑이 맞다. 강석원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지현은 고개를 바로 세웠다.

강석원의 인생을 망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잡으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아들.”

어머니가 현관까지 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조지현은 가방에서 모의고사 성적표를 꺼내 건네주었다.

“영어, 수학은 만점이고, 언어만 하나 틀렸네?”

표정이 금세 험악해진다. 그녀는 만족이란 것을 할 줄 모른다.

“죄송합니다. 더 노력할게요.”

틀에 박힌 말을 듣고 나서야 어머니의 표정이 풀린다.

“그래. 사람이 늘 만점만 받을 수 있나. 그래도 우리 아들이 다음에는 실수 없이 시험을 보면 좋겠다.”

“네.”

“학원 수업은 어때? 이번에 들어온 선생님이 그렇게 유명하다던데.”

“잘 가르치세요.”

조지현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학원을 빠져야 했다. 그걸 어머니에게 들키는 날에는 불벼락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 엄마는 너만 믿는다. 무능한 니 애비처럼 되지 않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알지?”

“들어가서 공부할게요.”

“그래라.”

공부라는 단어에 어머니는 관대하게 웃어 보인다. 조지현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편의점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학원 수업 시간만큼은 따로 벌충을 해야 했다. 어머니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그녀가 만족할 만한 성적을 보여줘야 했다.

저녁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새벽 세 시까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더 이상 눈을 뜨기 힘들 정도가 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침대에 내던졌다.

“지현아.”

놀라서 퍼뜩 몸을 일으켰다. 강석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서 있다.

“괜찮아? 악몽 꿨어?”

조지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서관이다. 경비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흐릿한 기억 때문에 눈을 깜빡였다.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리가 무겁다. 

“안 나와서 올라와 봤어. 어디 안 좋아?”

교복 차림의 강석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금방 책 챙길게요.”

책상에 놓인 책을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강석원이 말없이 조지현의 가방을 들어 올렸다.

“괜찮습니다. 제가…….”

“가자. 늦었다.”

강석원이 먼저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조지현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도서관 건물을 나오자 아직은 뜨끈한 밤바람이 일었다. 나무들이 바람결에 일제히 제 몸을 흔들었다.

“선배님.”

“응.”

강석원이 돌아보았다. 다정한 눈이다. 하마터면 그대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을 뻔했다.

“왜?”

“아니요. 그냥…….”

걸음을 재촉해 그의 옆에 섰다. 나란히 길을 걸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기분이 느른하게 풀렸다.

“시험 잘 봤어?”

“네. 그럭저럭.”

강석원이 짧게 웃었다.

“왜 웃으세요.”

“이번에도 이름 쉽게 찾겠다 싶어서.”

“아직도 찾으세요?”

“응.”

강석원이 덧붙인다. 습관이 된 것 같아. 

습관이란 단어에 자신이 속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일 줄은 몰랐다. 조지현은 우물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뭐 마실래?”

편의점 앞을 지나며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주 사소한 지출조차 그의 몫이었다. 최대한 돈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큰길을 지나 공원 쪽으로 걸어왔다. 집으로 가려면 반대편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일부러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강석원과 걷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큰 위안이었다. 고장 난 가로등이 빛을 드문드문 흩어 놓았다. 어둠을 드리운 가로수 아래를 걸으며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그저, 그것만으로 충만했다. 

음료수 자판기 앞에서 강석원은 동전을 넣고 생수를 한 병 꺼냈다. 뚜껑을 따서 조지현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를 하고 조지현은 생수를 받아들고 마셨다. 삼분의 일가량 마시고 강석원에게 돌려주었다. 강석원은 단번에 생수를 들이켰다. 빈 통을 쓰레기통에 가볍게 던져버리고 강석원이 조지현을 불렀다. 

“지현아.”

물을 마시고도 그의 눈은 여전히 갈증에 차 있다.

“네?”

“내일 뭐 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지현은 설핏 고개를 기울인 채, 대답했다.

“학교 갔다가 도서관이요.”

늘 같은 일상이었다. 강석원도 모를 리 없다. 강석원이 그렇지, 하고 말끝을 늘인다.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조지현은 눈을 껌뻑이며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시합도 끝났고 너도 시험 끝났으니까, ……밖에서 볼까?”

별스럽지 않은 말이었다. 밖에서 만나자는.

그 말을 남자는 몹시 어렵게도 꺼냈다. 그답지 않게. 그답지 않은, 풋내 나는 소년다운 그 태도에 조지현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가 묻는다. 조지현은 아무거나요, 하고 대꾸했다.

“그런 음식은 없어.”

조지현은 작게 웃었다. 무뚝뚝한 그가 여상하게 농담을 던질 때마다 웃음이 났다. 그 순간, 강석원이 조지현을 바싹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지현은 숨이 멎을 뻔했다. 늦은 시간이라 공원에 인적이 드물다 해도, 어디서 누군가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교복차림이었다. 신분을 얼굴에 새기고 있는 꼴과 다름없다.

조지현이 작게 선배님, 하고 강석원을 불렀다. 그는 그제야 조지현을 놓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열기가 어린다. 그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열이 옮는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괜스레 뺨을 문지르며 시선을 떨구었다.

“네가 웃으면…….”

강석원이 말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미칠 것 같아.”

소년이 제 열병을 고백했다. 커다란 체구가 드리운 그림자가 조지현을 완전히 가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가자.”

강석원이 앞장서 걸었다. 조지현은 선배님, 하고 그를 불렀다. 강석원이 멈추어 서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빨리, 내일이면 좋겠어요.”

강석원이 웃었다. 소년다운 선선한 웃음이었다. 강석원이 나도 그래, 하고 대꾸했다. 조지현은 심장이 뛰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나무를 뒤흔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강석원의 체구가 큰 탓에 영화관 자리가 비좁게 느껴진 것도 있었지만 맞닿은 팔이 신경 쓰여, 몇 번이나 대사를 읽는 것을 놓쳤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고정된 장소에 살이 맞닿은 채로 있으면, 이상하리만치 신경이 쓰여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버스에서 단어를 외울 때 특히나 그랬다.

영화관까지 이럴 줄은 몰랐지만.

조지현은 흘깃 옆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드러난 강석원의 콧대가 매끈하게 뻗어 있다. 복싱을 하면 한두 번쯤은 코가 부러진다고 들었는데 강석원에게는 그런 흔적조차 없었다. 누구에게도 그만큼 맞아본 적 없다는 반증이다. 콧날에서 이어지는 모양 좋은 입술에 시선이 닿는다.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떠올랐다. 눈이 마주쳤다. 강석원이 입모양으로 왜, 하고 묻는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괜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동영상 강의를 보는 기분으로 화면에 열중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자 상영관에 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석원이 자리에서 커다란 몸을 일으키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얼굴에서 경외의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렸다.

“가자.”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얼른 일어섰다. 뒤에서 대체 키가 몇이야, 교복 입었으면 학생 아니야, 하는 경악 섞인 수군거림이 들렸다. 상영관을 나와 복도를 걸을 때도 사람들은 강석원을 흘끔거렸다. 정작 강석원은 그런 것 따윈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은 온전히 조지현에게 향해 있었다.

“재미없었어?”

“네?”

“영화. 집중 못하는 거 같던데.”

그는 눈치가 대단히 빠른 사람이었다. 조지현은 아니요, 하고 말을 이었다.

“재미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거의 십 년 만에 와보는 영화관이었다. 기억 속의 영화관은 훨씬 어둡고 더러웠는데, 입구부터 휘황찬란하게 번쩍여 적잖이 놀랐다.

복도를 걷는 강석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내려오는 내내,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어 조지현은 오늘 하루를 천천히 반추했다. 영화 티켓은 강석원이 예매했다. 조지현은 자신의 용돈으로 팝콘과 음료수를 샀다. 강석원이 극구 사양했지만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자신이 내겠다고 우겼다. 팝콘은 생각보다 비싸고 맛이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 걸까. 조지현은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친 강석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사람들이 모두 일 층에서 내렸다. 건물 로비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네요.”

조지현은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강석원의 표정이 한층 굳었다. 일기 예보에도 없는 비였기에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건물 로비에 서서 비가 내리는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난 로비에는 이제 둘만 남게 되었다.

“안 그칠 것 같은데요.”

조지현이 먹구름이 두껍게 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게.”

조지현은 다시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선배님.”

“응.”

“혹시 기분 안 좋으신가요? 제가 실수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고치겠습니다.”

속으로 수십 번 넘게 연습한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뱉어냈다. 

“없어.”

그가 조금 당황한 투로 대답했다. 조지현은 말가니 강석원을 바라보았다. 강석원이 제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가 곤란해 하고 있음을, 조지현은 바로 눈치챘다.

“……해본 적 없어서.”

“네?”

“이런 거 해본 적 없어서, 미안해. 네가 어떤 영화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았어. 왠지 망쳐버린 기분이라.”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석원이 미안해, 하고 다시 덧붙인다. 그 어색한 사과에 심장에 열이 홧홧하게 올랐다. 그는 본인의 서투름을 사과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두 사람의 첫 데이트일지도 모른다.

조지현은 아닙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둘 다 말주변도 없고, 말이 많은 성격도 아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빗소리가 들렸다.

“그날도 비가 왔는데.”

강석원이 흐리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치부를 강석원에게 고백하고 그와 약속의 말을 나눈 날이다.

조지현은 그러게요, 하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비를 몰고 다니나 봐요, 우리.”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나직하게 웃었다. 강석원이 그러게, 하고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비가 점점 더 거세게 내렸다.

“집으로 갈래?”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은 대답 대신 가방을 머리 위로 얹었다.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커다란 담요를 두른 채로, 라디오를 들었다. 이름 모를 노래에 빗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키스를 나누었다. 강석원의 커다란 손이 몇 번이고 등을 쓸어내렸다. 눈을 감은 채로 그에게 기댔다. 타인의 온기에 위로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무엇보다 특별했다. 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 교복이 말라갔다.

“오늘 동영상 강의 보는 날이었는데.”

조지현이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강석원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왠지 땡땡이 친 것 같아요.”

“땡땡이 친 기분이 어떤데.”

조지현의 입술 끝이 살짝 위로 말린다. 

“좋아요, 생각보다.”

강석원이 입술을 머금듯이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매번 처음 입을 맞추는 소년처럼 조지현은 가슴이 떨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목덜미에 코를 댄 채 숨을 들이켰다. 발끝이 간지러웠다. 라디오의 노래는 다른 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비가 내리면.”

조지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생각날 것 같아요. 오늘이.”

“나도, 그럴게.”

약속의 말이 더해진다. 강석원의 서늘한 눈매가 느슨하게 풀린다. 조지현은 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비가 내리면, 항상 오늘을 생각하리라 다짐했다. 

폭우가 창가를 흠뻑 적셨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창가를 두드렸다. 방금 꾼 꿈 때문인지 베개가 젖어 있다. 이전의 기억이, 아니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이 요즘 들어 자꾸 꿈으로 나타난다.

괴롭다.

자신만 갖고 있는 그 기억들이 불시에 의식을 점령한다.

강석원의 목소리가, 온기가, 그의 다정함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머리를 무겁게 했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어머니는 이 세상의 모든 우울함을 떠안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침 못 차려줘서 미안해.”

“괜찮아요.”

“내가 너 아침 먹여서 학교 보내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

“좀 쉬세요.”

빈 깡통이 날아들었다. 

“개새끼. 엄마가 아프다는데,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의 신경질은 배가 되었다.

“죄송합니다. 담요 가져다 드릴까요?”

자리를 피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그렇게 물었다. 어머니의 표정이 한결 느슨해졌다.

“그래. 뜨거운 물도 한 잔 갖다 주고.”

조지현은 담요와 물 컵을 가져다주고는 다시 물었다.

“더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없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는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너희 아빠는 아침 일찍 나갔어.”

“……네.”

“돈도 한 푼 못 벌어오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벌을 서는 아이처럼 조지현은 어머니의 앞에 서서 그녀의 한풀이를 모두 들어야 했다.

“너는 아빠처럼 되면 안 된다?”

그녀가 성모 마리아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손을 움켜잡았다. 온기가 닿은 부분부터 살이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조지현은 네, 하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얼른 가 봐. 학교 늦겠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괜찮다고,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신발을 신는 도중에도 온몸이 떨렸다.

“지현아.”

어머니가 자신을 불렀다. 조지현은 네, 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랑해. 아들.”

조지현은 최대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저도요, 하고 대꾸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손바닥이 흥건히 젖을 만큼 긴장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온몸이 식은땀이다.

“하하…….”

힘없이 웃는다. 전혀 괜찮지 않다. 과거로 돌아와 달라지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정신적 결함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기댈 수 없는 장애다.

우산을 폈다.

오늘따라 몸이 무거운 기분이었다.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기분이었다.

잘하고 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

대학을 가고 집에서 독립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자신의 곁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해 올라탔다. 뒷좌석에 앉아 습관처럼 단어장을 꺼내들었지만 단어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의 버스는 한산했다. 정류장을 지나도 버스에 올라타는 승객이 한두 명도 되지 않았다.

조지현은 차창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비가 오는 날이면 생각날 것 같아요, 오늘이.

부질없는 기억을 떨치며 조지현은 시선을 바로 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강석원이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그가 앞으로 걸어온다. 반듯한 걸음걸이, 서늘한 눈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체격.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대로다.

그가 자리에 앉는다.

이 시간에 등교하는구나.

그동안 노선이 겹치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눈으로 강석원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디가 견고한 손은 힘이 실리는 방향대로 굳은살이 박였다. 그의 머리카락도 젖어 있다. 비 때문이 아니다. 새벽 운동을 마치고 등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천재.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보석.

신문 지상에서 강석원을 수식하는 말들이었다. 뉴스와 기사에서는 앞다투어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를 칭송했다. 강석원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섰다. 

삐익. 부저 소리가 울렸다.

시선을 느꼈다. 뒷문 앞에 선 강석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지현은 그제야 학교 앞 정류장임을 깨닫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버스 기사에게 인사하고 버스에서 후다닥 뛰어내렸다. 강석원은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우산을 펴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빗물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자신에게 남는 건 없을지라도 강석원에게는 존재할 것들을. 그가 가졌어야 할 찬란한 미래와 노력의 대가. 

조지현은 천천히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 지현이 왔구나.”

이전 타임에 일하는 김수정이 알은척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교복을 입고 일을 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다고 판단해 늘 사복을 두고 다녔다. 시재 점검을 마치고 가방에서 꺼낸 책을 테이블에 올려두자 김수정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넌 진짜 편의점 알바랑 안 어울리는 거 알아?”

“그런가요.”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EBS표지 모델 이런 거나 해봐. 아니, 그런 거 하기에는 지나치게 예쁜가? 너 몇 살이냐고 물어보는 애들 제법 있더라?”

“늦지 않으셨습니까.”

조지현의 말에 그녀가 어머, 내 정신 좀 봐, 하고는 가방을 집어 든다.

“나중에 보자.”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책을 펼쳤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손님은 많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지나면 담배나 술을 사러오는 손님이 대다수였다.

딸랑.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종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마지막 손님이 다녀간 뒤로 한 시간만의 손님이었다. 조지현은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영어나 국어, 수학은 이전보다 이해하는 게 쉬웠지만 암기과목은 여전히 시간을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왔다.

큼직한 손이 계산대에 생수를 올려놓았다. 리더기로 생수기의 바코드를 읽고 팔백 원입니다, 하고 가격을 알려주었다. 천 원짜리가 내밀어진다. 조지현은 돈을 받고 포스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지폐를 가지런히 넣어둔 칸에 천 원짜리는 눕혀놓고 동전을 집었다. 거스름돈을 주려고 하는 순간 앞에 선 손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높이가 맞지 않아 상대의 얼굴이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조지현은 손에 든 동전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동안 조지현은 얼어붙은 듯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생수통을 든 상대가 의아하다는 듯이 눈썹을 휘어 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찾으려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동안 바닥을 더듬어 백 원을 찾아냈다. 나머지 백 원은 결국 찾지 못하고 포스대에서 다시 꺼내야 했다.

“여기, 거스름돈 이백 원입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돈을 받아든 강석원은 그대로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에 피가 몰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왜……. 

조지현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여기는 분명 강석원의 행동반경도 아니었다. 그의 집, 체육관하고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여길 다시 오면 어떻게 하지. 그만둬야 할까. 간신히 일에 적응했는데, ……어쩌지.

한참을 고민하던 중에 조지현은 문득 깨달았다. 전과 다름없이 강석원은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의식 과잉이다. 몇 번 우연히 마주친 것으로 그가 자신의 인생에 엮일 리가 없는데.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일 뿐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자 시원한 만큼 씁쓸했다.

그날 자신의 방 침대에서 눈을 뜬 이후로 거의 한 달이 지났지만 강석원과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조지현은 다시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한참을 읽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친 새끼. 이번에도 일 등이네.”

“조지, 요즘 약 먹냐? 어떻게 단 한 번도 일 등을 안 놓치냐? 너 전국 석차도 장난 아니라던데.”

전체 석차가 붙은 게시판 앞에서 반 아이들이 놀리는 투로 조지현에게 말을 건넸다. 조지현은 맥없이 웃어 보였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죽도록 공부를 했다. 전교 석차뿐만 아니라 전국 퍼센트까지 쭉쭉 올라갔다. 어머니의 히스테리는 놀라울 만큼 줄어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면을 세워주는 아들에게는 칼이나 가위를 휘두르진 않았다.

“너 비밀과외 하지? 같이 좀 하자. 조지.”

최기열이 치근덕거리며 조지현의 어깨에 기댔다. 그가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를 만큼 기분이 나빴지만 조지현은 애써 태연하게 반응했다.

“그런 거 안 해.”

“그런데 어떻게 성적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

“열심히 하는 거지.”

“하긴, 조지 수업 시간에도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더라. 요즘 왜 그래? 전에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슬슬 고3이니까.”

조지현은 대충 얼버무리고 최기열의 손을 떼어냈다. 지나치게 반발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곁을 주어서도 안 된다. 적당히 물 흐르듯이 있다가 끊어내야 할 관계다.

“헉, 강석원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조지현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강석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 장난 아니라며. 산상공고 애들 열 명이랑 붙어서 피떡을 만들었다던데.”

“졸업하면 들어오라는 조직이 벌써 줄을 섰다더라.”

여전했다. 강석원을 둘러싼 소문은 도시괴담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

강석원은 또래의 학생과는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 어색할 만큼,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경외에 가까웠다. 그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있긴 해도 감히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학생들이 자리를 피해주기 바빴다.

편하긴 하더라, 네 이름 찾는 것.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떠올랐다. 강석원은 습관처럼 자신의 이름을 게시판에서 찾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우연히 봤어. 나중에는 궁금하더라. 이번에는 몇 등일지, 얼마나 노력했을지.

그가 게시판으로 다가올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바로 귀에 대고 큰 북을 울리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쿵.

입안이 바싹 마른다. 뱃속부터 빠듯하게 압박감이 전해졌다. 주변의 소리가 사라지고 들리는 것은 오직 미친 듯이 뛰는 심장소리뿐이다.

강석원이 바로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게시판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스쳐 갔다.

“내 말 듣고 있어? 야! 조지!”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소리 내어 대답했다. 그 순간 강석원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공중에서 엉킨다.

“다음 시간 체육이라고. 빨리 들어가야 해.”

“응. 알겠어.”

조지현은 대충 대답하고 다시 강석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강석원이 자신을 홀린 듯이 바라보거나 게시판을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어서 오세요.”

조지현은 책을 덮으며 인사했다가 숨을 삼켰다. 

강석원이다.

오늘로 벌써 여덟 번째다. 500ml생수 한 병. 그게 전부였다.

“팔백 원입니다.”

이제 제법 떨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편의점에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 조지현은 너무 놀라 제 눈을 의심했다. 진지하게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석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게를 나갔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수 한 통을 사갔고, 천 원짜리를 내고 거스름돈 이백 원을 받아갔다.

그걸로 끝이다. 이 편의점에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강석원의 동선이 하나 있고, 그는 생수를 사러오는 것뿐이다. 

“아니.”

“네?”

“팔백 원, 아니라고.”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아니, 이미 잘 알고 있는 목소리다. 눈을 감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소리의 높낮이와 결을, 세심하게 재건해낼 수 있을 만큼.

그러나 다시 눈을 뜬 이후로는 처음이다.

강석원이 손가락으로 계산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생수가 아닌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얼굴에 피가 몰렸다. 조지현은 리더기를 집어 들었다. 바코드를 찍으려 하는데 생각만큼 쉽게 읽히지 않았다.

“천천히 해.”

낮은 음성이다. 저 목소리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부르는지 안다.

조지현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바코드를 찍었다.

“천이백 원입니다.”

강석원이 천원자리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하나 더 갖고 오세요.”

“뭘.”

“원 플러스 원 제품입니다.”

강석원이 진열대로 가서 같은 제품을 가져왔다. 조지현은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안녕히 가세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계산대 앞에 드리운 그림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조지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셔.”

강석원이 덤으로 받은 음료수를 내밀었다.

“아니요, 괜찮…….”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강석원은 가게 밖으로 나갔다. 벨소리만 차랑, 차랑, 울렸다.

조지현은 말없이 계산대에 놓인 음료수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온갖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다짜고짜 욕을 하거나 돈을 집어던지는 사람, 거스름돈은 그냥 가지라는 사람, 제가 먹던 것을 나눠주는 사람. 오늘처럼 원 플러스 원 상품을 사면 하나를 나눠주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냥 숱한 사람 중 하나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조지현은 한참동안 음료수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뭐라고.

울고 싶어졌다.

“지현아.”

현관을 막 나서려는데 뒤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불렀다.

“네.”

“너 숙현이 아줌마라고 알지?”

최기열의 어머니 이름이었다. 조지현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아줌마 아들이 너랑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하더라? 어머, 나는 몰랐는데 말이야. 그 아줌마가 네 칭찬을 그렇게 하더라고. 네가 공부도 잘하고 아주 착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대.”

그녀가 오랜만에 정말로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그 집 아들하고는 친하니?”

“아니요. 얼굴만 알아요.”

“그래. 그럼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니? 오랜만에 엄마 친구도 만나고 너도 걔랑 친해지고. 좋지?”

소름이 쭈뼛 돋았다. 어떻게든 최기열하고는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직도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게, 식은땀이 흐를 만큼 힘들었다.

“저 이번 주말에 학원 보강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보강?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학생에게는 공부가 제일 중요하니까.”

조지현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럼 그 다음 주는?”

어머니는 뱀 같은 여자였다. 꽃처럼 아름다운 몸뚱이를 하고 있지만 한번 물면 제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좀처럼 놓는 법을 몰랐다.

“그때는 그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라…….”

말을 맺지 못했다. 어머니의 손이 아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고개를 바로 세우기도 전에 연거푸 손바닥이 뺨을 내쳤다. 코피가 흘러내렸다. 조지현은 미처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엄마 말에 토 달아.”

“……, 죄송합니다.”

“니 애비도 징글징글하게 말 안 들어 처먹더니 너도 그 새끼랑 똑같이 굴어?”

코피가 교복 셔츠를 적셨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참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쉽지 않았다. 폭력에는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공부 열심히 해. 중간고사 준비 잘하고.”

그녀가 휴지를 내민다. 폭력에 대한 사과는 없다. 본인이 휘두르는 것이 폭력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터다.

조지현은 휴지로 코피를 닦아냈다.

“다녀오겠습니다.”

더 이상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점장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려 했다. 다른 일을 찾든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면 독립을 조금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강석원과 마주치는 횟수를 줄이려 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미 한 번 겪은 일들이니, 두 번째는 조금쯤은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잔등에 소름이 돋는다. 조지현은 화단의 구석진 곳으로 달려가 쭈그려 앉았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있었다. 

가방에서 음료수 캔을 꺼냈다. 강석원이 주고 간 것이었다. 버리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가방에 넣어 일주일을 갖고 다녔다.

캔의 고리를 뜯었다. 안에 든 음료수를 고스란히 하수구 안에 흘려보냈다. 그렇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버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교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최기열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다가왔다.

“야, 너 그거 알아?”

“뭘.”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뚝뚝하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너희 엄마랑 우리 엄마 아는 사이인 거. 고등학교 동창이셨대.”

“……응.”

“너희 어머니 그렇게 이뻤다며. 학교 다닐 때, 교문 앞에 남자들이 서로 얼굴 보겠다고 줄 서서 기다렸다던데.”

“조지는 그럼 엄마 닮은 거네? 조지도 남자들이 줄 서잖아.”

옆에 있던 녀석이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아니. 하나도 안 닮았어.”

조지현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분위기가 일시에 사늘하게 가라앉았다.

“야, 농담인데 뭘 그렇게 정색해.”

낄낄 웃던 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조지현은 자리에 앉았다.

“조지. 너 오늘 생리하냐? 왜 이렇게 까칠해. 어, 그러고 보니 여기 피가 묻어 있네.”

최기열이 맞은편에 의자를 빼서 앉으며 장난을 걸었다. 평소였음 적당히 넘겼겠지만 오늘은 받아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 마.”

“뭐?”

“제발 좀 그만하라고.”

교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몰렸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최기열의 표정이 잔뜩 구겨진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하니까…….”

최기열이 조지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책상이 와장창 넘어졌다. 조지현은 최기열을 직시했다. 욱하는 김에 멱살을 잡아놓고도 최기열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깨닫지는 못해도 본인의 감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를 보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최기열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때 교실로 담임이 들어왔다.

“뭣들 하는 거야. 둘 다.”

최기열이 욕을 중얼거리며 조지현을 놓아주었다.

“둘 다 교무실로 와.”

같은 듯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기열이 먼저 씨근덕거리며 교실을 나갔다. 조지현은 한숨을 내쉬고 그 뒤를 따랐다.

교무실로 들어선 순간, 거구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뭐해. 안 들어오고!”

화가 난 담임이 소리 질렀다. 조지현은 손을 모으고 담임 앞에 섰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 새끼들.”

담임이 출석부로 조지현과 최기열의 머리를 차례대로 두들겼다. 조지현은 묵묵히 담임의 훈계를 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뒤에서 이어지는 강석원에 대한 칭찬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다.

“그래. 이번에 나가는 게 전국 체전이라고?”

“네.”

“거기서 우승하면 우리나라 학생 중에는 네가 최고라는 거잖아. 대단하네. 안 그런가?”

겉치레와 체면을 중시하는 교장은 최고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했다. 교장과 체육 주임의 칭찬이 이어졌다. 

강석원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선생님이 말하는데 어디 딴 델 보고 있어! 조지현, 너 똑바로 안 할래?”

조지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는다. 누구의 것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으휴, 진짜. 내가 니들 때문에 늙는다, 늙어. 조지현 너는 얌전한 줄 알았더니 다른 놈들이랑 똑같이 구냐.”

“죄송합니다.”

얼른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최기열. 너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어머니 호출한다.”

“죄송합니다.”

최기열도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담임이 나가 봐, 하고 무성의하게 손짓했다. 조지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교무실을 나왔다.

“야, 조지현.”

교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최기열이 이름을 불렀다. 조지가 아닌 조지현이었다.

“아까는, 젠장, 내가 좀 심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는다.

“그냥 장난친 건데 니가 그렇게 정색하니까, 애들 앞에서 내가 뭐가 되냐.”

“아니, 미안해. 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가 봐.”

성의 없이 맞장구쳤다. 최기열의 표정이 대번에 확 풀린다.

“어디 아파? 양호실 갈래? 데려다 줄까?”

그가 조지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다.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조지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교무실 문이 열렸다. 강석원이 나왔다.

같은 상황이다.

“너 안색이 안 좋아. 내가 양호실 데려다 줄게.”

최기열이 조지현의 팔을 붙든다. 누군가 혈관에 질소를 주입한 것처럼 일순 차갑게 몸이 굳는다. 조지현은 최기열을 떼어내려 했다.

“아니, 내가 갈게.”

“너 진짜 안색이 창백해.”

최기열이 더럭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강석원이 다가왔다. 그때와 같았다. 아니, 같을까 두려웠다. 강석원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도망쳐야 한다. 

강석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그는 그때 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짐승처럼 다가와 목줄기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지현!!”

비명 같은 최기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의 균형이 뒤로 무너졌다. 강석원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뿐이었다.

“얘. 정신이 좀 드니?”

약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조지현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정말 병원 안 가 봐도 돼? 병원 가자니까 네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구급차 안 부르긴 했는데.”

양호 선생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조지현을 살폈다. 조지현은 괜찮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강석원을 피하려다 계단에서 뒤로 넘어졌다. 부끄러웠다. 등이 얼얼했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 뼈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니지?”

“네. 괜찮습니다.”

조지현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수업 다 끝났어. 저기 너희 반 녀석이 가방 갖다 놓고 갔다.”

조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빠진 수업을 따라가려면 잠을 줄여야 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양호 선생이 어머, 하고 웃는다.

“너 지금 보니까 진짜 예쁘게 생겼다. 그래서 친구 녀석들이 그렇게 앞다투어 데려왔구나.”

“네?”

“그 너희반 애랑, 체격 큰 애, 둘이 왔어. 3학년 걔가 너 업고 왔잖아. 기억 안 나?”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계단에서 떨어진 충격 때문에 잠시 기억을 잃었다. 눈을 뜨고 나니 양호실이었고 병원에 가자는 양호 선생의 말을 듣고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고 다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조지현은 벌게진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가. 또 넘어지지 말고.”

“안녕히 계세요.”

조지현은 그대로 양호실을 나왔다. 걸을 때마다 등이 욱신거렸다. 화장실에 가 셔츠를 들어 확인하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걔가 너 업고 왔잖아. 기억 안 나?

“하아.”

셔츠를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인사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강석원은 편의점에 물을 사러 오지도, 음료수를 사러 오지도 않았다.

찾아가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나.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강석원도 그 이후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조지현은 자신이 강석원의 무심함에 서운해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기적이다. 절대로 다시 엮이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도 그가 보여주는 관심에 목말라 한다.

조지현은 두 손으로 뺨을 철썩 내리치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도어벨이 흔들렸다.

“어서……, 오세요.”

며칠 만에 보는 강석원이었다. 기분 탓인지 전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워보였다. 일 분가량이면 끝난다. 강석원은 물건을 계산하고 바로 나가니까. 조지현은 리더기를 손에 쥔 채로 그를 기다렸다. 강석원이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조지현은 그걸 보고 강석원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강석원이 이유를 묻듯이 슬쩍 눈썹을 올렸다.

“천사백 원입니다.”

강석원이 지폐를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건네주면서도 조지현은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패스트푸드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컵라면뿐만 아니라 피자나 햄버거도 마찬가지였다. 입맛에 맞지 않을뿐더러 체급 조절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물은?”

“저기서 받으시면 됩니다.”

조지현은 뜨거운 물이 나오는 배수대를 가리켰다. 강석원이 비닐을 뜯으며 배수대로 다가갔다. 라면에 물을 붓고 그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날, 눈을 뜬 이후로 바뀐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다면 강석원의 식성 역시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납득하려는데 뚜껑이 벌어진 채 놓인 컵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닫으셔야 하는데요.”

강석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뚜껑이요. 안 닫으면 잘 안 익어요.”

조지현이 라면을 가리켰다. 강석원이 컵라면 뚜껑을 누를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다. 조지현은 읽던 책을 그에게 건네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강석원은 컵라면 위에 책을 얹고는 말없이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이 지나도 그는 뚜껑을 열지 않아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3분 지났습니다, 하고 말을 건넸다. 강석원이 나무젓가락을 가르고 라면을 한 젓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미묘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에 조지현은 그가 여전히 라면을 즐겨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런데 왜 굳이,

“…….”

아니, 일일이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냥 끼니를 때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조지현은 일부러 강석원을 보지 않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도어벨이 울렸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한 무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어어, 알겠어. 여기 근처 편의점 왔으니까 바로 갈게. 거기 에쎄 한 갑.”

그중 한 명이 턱짓으로 담배를 가리켰다.

“신분증 주셔야 합니다.”

“응? 무슨 신분증이야.”

통화를 하던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담배와 술을 구입하시려면 신분증을 주셔야 합니다.”

미성년자에게 담배와 술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 점장은 누누이 설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분증을 확인하라는 말을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들은 것이다.

“야, 넌 내가 미자로 보이냐?”

남자가 전화기의 전원 버튼을 누른 후,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는 방침입니다.”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라.”

“신분증 안 갖고 오셨으면 일행 분 중에 다른 분 신분증을 보여주셔도 됩니다.”

조지현의 말을 들은 남자가 코웃음 쳤다.

“야! 너! 이리 와 봐.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담배 한 갑 사러 왔는데 내가 너 같은 놈한테 신분증까지 까야 해?”

“죄송합니다.”

유흥가는 아니라서 질 나쁜 놈은 거의 없을 거야. 편의점 점장의 말이 무색하게 남자는 질 나쁜 패악을 부렸다.

“당장 담배 내놔. 안 그러면 너 앞으로 여기서 일하는 거 고달파질 테니까.”

“죄송합니다. 신분증 확인이 안 되면…….”

멱살이 잡혀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어디 한마디만 더 씨부려 봐라. 생긴 것도…….”

조지현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뒷말을 미처 잇지 못했다. 그가 적당한 단어를 찾고 있는 사이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 어디에 둬.”

“……음식물 쓰레기는 노란 통에 버리시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버리시면 됩니다.”

일순 강석원에게 압도되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강석원이 쓰레기를 정리하러 가자 조지현의 멱살을 쥔 남자는 다시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 고딩이지? 어느 학교 다녀? 내가 이 근방 학교는 다 잡고 있거든?”

하필이면 이런 때에.

조지현은 당혹감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답 안 해?”

“죄송합니다. 제가…….”

조지현의 사과를 가로막은 것은 남자의 나직한 음성이었다.

“나가.”

“뭐?”

“나가라고.”

어느새 뒤에 선 강석원이 문을 눈짓했다. 남자는 물론이고 그의 일행들도 당혹감에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멱살을 쥔 남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해 문 앞까지 끌고 나갔다.

“야! 뭐하는 거야! 당장 그 손 안 놔!”

흥분한 일행들이 소리 질렀다. 강석원은 문을 열고는 남자를 밖으로 내던지듯 팽개쳤다.

“저 시발 새끼가.”

“죽고 싶냐?”

입으로는 욕설을 퍼붓고 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기다렸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시발, 개새끼가, 진짜.”

그가 강석원에게 달려들었다. 일행들도 옳다구나 하고 우르르 달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남자의 손에 들린 잭나이프를 본 조지현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조지현은 카운터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가 이전에 경찰서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보호자 없이 덩그러니 앉아있던 강석원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와장창.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결국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황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남자 무리는 물론이고 강석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경찰을…….

골목 안쪽에서 옷자락을 털며 나오던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멎었다. 그가 당황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괜찮으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아?”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이 제 귀를 의심하고 네? 하고 되물었다.

“그때 떨어진 거.”

조지현은 그제야 강석원이 일주일 전의 일을 묻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 괜찮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두 번이나 했다. 강석원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고 조지현이 숨을 삼켰다.

“별거 아니야. 괜찮아.”

강석원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 부근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그는 단 한 번도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제 희생과 고통을 당연하다는 듯이 감내했다. 조지현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일회용 밴드를 집어서 가지고 나왔다.

“붙이세요.”

조지현은 밴드를 내밀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걸, 붙이라고?”

강석원이 물었다. 그렇게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조지현은 제가 든 밴드를 확인했다.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유아용 밴드였다. 조지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다른 걸로…….”

“됐어.”

강석원이 밴드를 받아들고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안 올 거야.”

“…….”

“다시는 안 온다고 했어.”

강석원이 골목 안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강석원 본인이 아니라 양아치들의 얘기였음을 깨닫고 안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

조지현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강석원이 묻는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조지현은 조그맣게 대답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그만둔다고 하자 점장은 펄쩍 뛰었다. 사람을 구하기도 힘든 시즌이라 당장은 힘들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다음 사람이 구해지기 전까지는 다녀줘야 해. 이래서 미성년자는 되도록 안 쓰려던 건데, 네가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니까 쓴 거잖아.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어야지. 이력서에 쓴 전화번호, 집 전화번호 맞지? 너 말없이 그만두면 절대 안 된다. 협박에 가까운 회유에 결국 다음 사람이 구해지기 전까지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조지. 안 하냐?”

누군가 조지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조지현이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넌 쟤가 운동하는 거 봤냐?”

“하긴.”

저들끼리 금세 포기하고 체육관 중앙으로 공을 갖고 사라진다. 조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오전에 담임의 호출을 받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담임은 수업료와 수학여행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 달라진 게 없네.”

어깨를 뒤로 젖혀 체육관 계단에 기댔다. 수업료는 지금 모아둔 돈으로 어떻게든 되지만 수학여행비는 어림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받은 학원비가 고스란히 남아있긴 했지만 그 돈에는 손대고 싶지 않았다. 양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수학여행은 이번에도 못 가겠구나. 돈은 또 언제 모으지.

조지현은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조오지.”

최기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지현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밀려왔다.

“너 수학여행 조 짰냐?”

“아니.”

조지현이 몸을 바로 세우고 대답했다.

“그래?”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조지현 옆에 앉았다.

“우리 조에 한 명 더 들어올 수 있는데. 들어올래?”

대단한 관용이라도 베푸는 듯한 말투였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왜? 조 안 정했다며.”

“수학여행 안 가.”

“뭐? 수학여행을 안 간다고?”

최기열이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은 썩 반갑지 않았다.

“사정이 있어서.”

최기열의 표정이 흐려진다. 뭔가 잔뜩 들떠있다 사탕을 빼앗긴 아이 같은 얼굴이다.

“미안해. 모처럼 권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최기열의 뺨이 다시 상기된다.

“어, 하하하. 뭐.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가 조지현을 곁눈질로 흘끔거린다. 그 시선에 담긴 은근한 열기를 모를 수 없다.

“등은 괜찮아?”

“응.”

“멍든 거 아니야? 완전 큰소리 내면서 떨어졌는데. 한번 봐봐.”

최기열이 조지현의 체육복 자락을 우악스럽게 붙든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어? 그래.”

조지현은 책을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요즘 최기열의 접촉이 부쩍 늘었다. 썩 좋지 않은 징조였다. 어떻게든 조용히 넘어가야 할 텐데.

“조지. 체육이 오래.”

지나가던 학생 하나가 조지현을 보며 말을 건넸다.

“체육 선생님이?”

“응. 니가 오늘 당번 아니야? 당번 오라고 했으니까.”

“알겠어.”

오늘 수업은 운동장이 아닌 체육관이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이었다. 덕분에 다른 학년들과도 겹쳐서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조지현은 체육관 옆에 딸린 체육 준비실로 갔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 학생이 왜 여길 와.”

“내가 불렀어요. 너 당번이지. 이거 교무실에 갖다놓고 여기에 주임 선생님 도장 좀 받아와라.”

체육 선생이 조지현에게 출석부와 종이를 내밀었다. 식은땀이 흐른다. 사람들 앞이라 괜찮을 거라 수없이 되뇌면서 조지현은 체육 선생 앞으로 다가갔다. 시선이 느껴진다. 상대를 진득하게 훑는 시선에 담긴 더러운 욕구가 전신을 찌른다.

“몇 학년이야? 1학년 중에는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2학년. 2학년 전교 수석.”

체육 선생이 대신 대답했다. 

“예쁘게 생겼네.”

미술 선생이 웃고 있다.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곳을 나왔다.

출석부를 끌어안고 복도를 걸었다. 혹시 누군가 뒤에서 따라올까 두려워 나중에는 거의 내달리 듯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단단한 벽에 부딪히고 만다. 출석부와 종이가 바닥에 흐트러진다. 조지현은 얼얼한 코끝을 문지르며 종이를 도로 주웠다. 

커다란 손이 출석부를 대신 주워서 내민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손을 좋아했다. 대담하고 거침없이 이어지던 손끝에서부터 이어지던 선을, 종종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이후로 걔들 온 적 있어?”

강석원이 학교에서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구분되어 있던 편의점과 학교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조지현은 아니요,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강석원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나도 당분간 바빠서.”

이후로 그 역시 편의점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조지현은 네,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디 가.”

“교무실이요.”

강석원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준다.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조심히 걸어.”

또 넘어져. 덧붙는 말에 가슴이 옭죄어 온다.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모퉁이를 완전히 돌고 나서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강석원을 신경 쓰느라 미술 선생을 잊고 있었다. 그와의 접점을 아예 없애야 했다. 

“불참에 대한 학부모 확인서.”

조지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새겼다. 

도어벨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물건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강석원이 빗물을 털며 안으로 들어섰다. 강석원이 짧게 눈짓하며 알은척한다.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며칠 전에 봤던 모습보다 한층 더 얼굴선이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다. 시합을 마치고 온 것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손님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만 인사를 하고 조지현은 다시 물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음료수를 차례대로 진열하는데 강석원이 그 뒤에 선다. 음료수를 고르려는지 그가 한참을 진열대를 바라본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아닌데도 등줄기가 오싹오싹 떨렸다. 커다란 체격 때문에 뒤에 서 있을 뿐인데도 안겨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지현은 옆으로 한걸음 비켜 자리를 옮겼다. 강석원은 생수 한 통과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해주었다. 강석원은 컵라면의 비닐 포장지를 뜯어 물을 받았다.

체중 조절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왜 굳이 매번……. 

조지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여학생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지현은 계산대에 서서 그녀들이 물건을 가지고 오길 기다렸다. 초콜릿을 집어든 단발머리 여학생이 한참을 주저하다가 계산대로 걸어왔다.

“저기요.”

“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초콜릿을 건넸다. 바코드를 읽고 난 후 조지현은 천오백 원입니다, 하고 말했다. 돈을 받고 계산을 마쳤는데도 단발머리 여학생은 계산대 앞을 떠나지 않았다.

조지현이 의아함에 눈을 살짝 치떴다.

“빨리 말해.”

옆에 있던 여학생이 단발머리 여학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학생이 시뻘게진 얼굴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거.”

편지였다. 겉봉투에는 반듯한 글씨로 조지현 오빠에게, 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조지현은 자신의 명찰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여, 여자 친구 있으세요?”

에둘러 말하는 것보다 이럴 때는 단호한 편이 낫다는 사실을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저는…….”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강석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온몸의 신경이 눌린 듯이 손발이 저릿저릿하다.

“여자 친구 없으시면, 핸드폰 번호 알려주심 안 돼요?”

새빨개진 얼굴로 가여울 만큼 덜덜 떨면서 말을 건네는 여학생보다 비좁아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입맛에도 맞지 않는 컵라면이 익길 기다리는 남자가 신경 쓰였다.

“……있습니다.”

“네?”

“여자 친구, 있어요.”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여학생이 대번에 실망한 기색으로 그러시구나, 하고 중얼거린다. 조지현은 테이블에 놓인 편지를 도로 건넸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건 그냥…….”

“못 받겠습니다.”

여학생의 눈시울이 금세 붉게 달아오른다.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편지를 도로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친구와 함께 재빨리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뛴다.

괜찮다. 어차피 그는, 상관없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덜컹,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에 조지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채 익지도 않은 라면을 쓰레기통에 고스란히 부었다.

강석원이 저벅저벅 계산대로 걸어왔다. 그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내밀었다.

“밴드 값.”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강석원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이불 꼭 덮고 자야 한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심심하면 영어듣기 틈틈이 하면 좋을 거야.”

“네. 알겠어요.”

삼십 분째 같은 당부가 이어졌다. 

“늦겠다. 빨리 가 봐라.”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한마디 건네자, 어머니가 표정을 구겼다. 자신이 가고 나면 두 사람은 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따라 나왔다.

“지현아. 그래도 수학여행 가는데 용돈은 있어야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사양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기어코 주머니에 돈을 구겨 넣었다. 

“조심하고. 혹시 버스 놓치면 그냥 돌아와 돼.”

“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어머니의 당부는 계속되었다. 짐 가방은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최소한으로 줄여 꾸렸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히 강석원이 있을 리 없는데.

조지현은 쓰게 웃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수중에 남아있는 돈을 계산했다. 그럭저럭 수학여행 기간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에 머리를 기댔다. 강석원은 그날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던 것을 안다. 깨끗하게 정리한 것이다. 잘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를 찾아가 변명을 늘어놓고 싶다. 사실이 아니라고. 사귀는 사람은 없고, 나는 전부터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차창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때와 같은 눈이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를 이용하려 했던 욕심 사나운 눈.

조지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들 가고. 다른 데로 새면 안 된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학생들은 자신을 포함해 총 아홉 명이었다. 1학년 미술 선생이 들어와 무성의한 종례를 이어갔다.

“내일 지각하지 말고.”

미술 선생이 힐끔 이쪽을 쳐다보았다. 조지현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나가자 학생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은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선생님.”

조지현이 미술 선생을 부르자 그가 어? 하고 몸을 돌린다.

“확인서 저 못 받았습니다.”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확인서를 돌렸다는 사실을 옆 반 학생에게 확인했다.

“어, 그래? 네가 못 받았구나. 미안.”

미술 선생이 당황해 하며 출석부 사이에 끼워둔 종이를 꺼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종이를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더 걸려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도장은 미리 챙겨서 가방에 넣어 두었다. 적당히 부모님의 이름만 적어서 제출하면 된다.

이걸로 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강석원의 자취방에서 머물렀던 동안 그가 만들어주었던 오므라이스가 생각난다. 케첩으로 그렸던 스마일 표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고 웃음이 났다.

이전의 일들과 하나씩 어긋날 때마다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강석원과 보냈던 반짝반짝한 그 순간들이, 자신의 기억 속에만 남게 되는 일이 못내 안타깝다.

소중한 시간이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

지현아.

저를 부르던 다정한 음성이 공기 중에 스러진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지킬 차례다.

조지현은 숨을 한껏 들이켰다.

“나 잠깐 들어가서 눈 좀 붙여도 돼?”

“네. 그러세요.”

“땡큐. 이따가 교대하자.”

야간 알바생인 최정식이 하품을 하며 편의점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야간 근무 제가 대신해드리면 안 될까요. 그렇게 물었을 때 최정식은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미성년자는 안 돼. 최정식은 고개를 내저었다. 돈 안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자 잠시 생각하던 최정식은 그럼 점장님한테 걸리면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한 발 물러섰다. 다행히 점장은 2박 3일간 지방 교육을 갔다가 수요일에 돌아온다. 이틀은 이곳에서 밤을 새고 마지막 하루만 어떻게든 버티면 되는 것이다.

조지현은 바닥을 청소하고 아까 들어온 물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통 물건이 이때 들어오기 때문에 꼼꼼하게 정리를 해둬야 했다.

테이블까지 말끔하게 치워둔 후에 조지현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 시.

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하다.

주택가에 자리한 곳이라 거의 이 시간에는 손님이 오고가지 않는다. 책을 펼쳤다. 몇 장 읽지 않고 시야가 흐릿해진다. 꼬박 밤을 새우는 건 좀 무리긴 했다. 조지현은 뺨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꾸벅, 고개가 숙여졌다. 몇 번 몸을 바로 해보지만 잠이 물처럼 밀려왔다.

지현아.

다정한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준다. 

졸려?

그가 묻는다. 조지현은 가늘게 웃으며 그의 손등에 얼굴을 부볐다. 강석원의 손가락이 뺨을 가볍게 쥐었다. 살냄새가 났다. 

선배님.

응석을 부리듯 그를 불렀다. 강석원의 손가락이 움칫, 움츠러든다.

시선이 느껴진다.

기묘하게 어긋난 느낌에 조지현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서 있다. 그를 한참 동안 올려다본 뒤에, 꿈과 현실을 구분해 냈다.

“계산.”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 있다. 조지현은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들었다.

“팔백 원입니다.”

강석원이 동전을 건넸다. 거스름돈을 내밀 필요도 없었다. 물을 받아들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간만 이 시간에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렸다. 강석원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지현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건넸다.

“이거.”

계속 마음이 쓰였다. 강석원이 주고 간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만, 그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강석원이 짧게 대꾸하고는 물병의 캡을 열었다. 목울대를 타고 물이 흘러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갈증이 일었다. 남자가 얼마나 탐욕스럽게 저를 욕구했는지, 알고 있다.

조지현은 고개를 돌렸다.

“수학여행 아니었어?”

“안 갔습니다.”

물통을 비운 그가 빈 병을 흔들며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긴다.

“제주도, 였지.”

“네?”

“수학여행.”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수학여행을 간 곳은 경주였다. 그는 2학년의 수학여행지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아쉽겠네.”

“나중에 가면 됩니다. 기회 되면.”

결국엔 비가 쏟아져 가지 못했던 섬이었다. 이후로도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무더운 여름밤에 누워 그 섬을, 이야기하곤 했다.

강석원이 대수롭지 않게 그래, 하고 대꾸하고는 빈 병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그는 밖으로 나갔다.

조지현은 자리에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밤에 악몽을 꾼 자신을 강석원이 끌어안은 채 도닥이며 재워줬을 것이다.

괜찮아. 꿈이니까.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와 등을 도닥이던 그 손길이 생각났다. 자신은 어떤 현실에 머무르고 싶은 것일까.

조지현은 가만히 책에 고개를 묻었다.

“그럼 다들 오늘도 집에 바로 가고. 이상.”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미술 선생은 종례를 마쳤다. 조지현은 가방을 들고 바로 일어섰다.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오늘만 버티면 수학여행은 끝이다.

오늘은 점장이 지방 교육에서 돌아오는 날인 데다 낮에도 본점에서 점검을 나온다고 해서 편의점에는 아예 가지 않기로 했다. 적당히 24시간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다 밤에는 사우나를 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주신 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였다. 그동안 식사는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것은 적당히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강석원의 동선과 겹치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좋은 일자리였다. 그만두는 게 벌써 아쉬워진다.

하는 수 없지.

조지현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를 나섰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24시간 커피숍과 목욕탕이 한 건물에 있는 곳을 어제 봐두었다. 커피 한 잔을 사서 2층으로 올라갔다. 예민한 만큼 집중력도 좋은 편이었기에 주변의 소음은 곧 적당한 백색소음으로 멀어졌다. 수학 문제집을 정해둔 분량만큼 모두 푼 후에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9시. 목 부근이 찌뿌듯했다.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면서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획했던 것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가방을 들고 위로 올라가려다 조지현은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24시간 사우나에 교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보다 사복으로 갈아입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했다. 복도 맨 끝 화장실로 가서 문을 닫고 옷걸이에 가방을 걸었다. 교복 셔츠 단추를 푸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사람 있어요.”

바로 대답했는데도 상대방은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 있습니다.”

혹시 못 들었을까 봐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쿵, 쿵, 쿵.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지현은 도로 셔츠를 잠그고 가방을 들었다.

“나갈게요.”

조지현은 문을 열었다.

“어, 안녕.”

문밖에 선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아까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너 공부하는 거 봤거든.”

미술 선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다시 가던 길이었는데 네가 아직도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올라와 봤어.”

그가 징그럽게 웃으며 조지현을 위아래로 훑는다.

“왜 이 시간에 사복으로 갈아입어? 어디 가게?”

“집에 갈 겁니다.”

조지현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미술 선생이 조지현의 앞을 가로막는다.

“너 집에다 거짓말 하고 나왔지?”

“…….”

“그러니까 사복으로 갈아입는 거 아니야. 얌전하게 생겼는데 발라당 까졌네.”

조지현은 다시 옆으로 비켜 걸었다. 남자가 손을 뒤로 뻗어 화장실 문을 걸어 잠갔다.

“무슨 짓이십니까.”

“아니, 그냥 얘기 좀 하자고.”

조지현은 그를 밀어내려 했다. 미술 선생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는다.

“사복 입고 어디 가려는 거였어?”

“집에 가려고 했습니다. 비키세요.”

“집? 그럼 내가 지금 집에 전화 걸어볼까? 너희 집 전화번호, 출석부에서 확인해 갖고 왔는데.”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이며 말한다. 조지현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미술 선생이 조지현의 팔목을 움켜쥔 채로 벽에 거세게 갖다 박았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저릿한 고통에 조지현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 응? 선생님이, 돈 줄게. 너 돈 필요해서 그런 거잖아.”

“하, 하지 마세요.”

손이 덜덜 떨렸다. 똑같은 상황이다. 이걸 벗어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볼 때마다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따먹어 달라는 얼굴이었어. 다른 선생들도 수업시간에 너랑 눈이 마주치면 자지가 발딱 서는 기분이라고 하더라.”

그가 조지현의 셔츠자락을 헤집으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년은 벌써 몇 번이나 따먹혔을 거 아니야. 응? 그러니까 선생님한테도 한번 대줘.”

밀어내야 하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관절이 망가진 인형처럼 늘어져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선생님 자지 잘 빨아주면 돈 줄 테니까, 응?”

그가 조지현을 변기에 억지로 앉히고 제 바지 퍼스너를 내렸다. 반쯤 일어선 검붉은 성기를 입에 가져다 대면서 그가 지현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남자는 조지현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입 벌려. 빨리.”

시퍼런 쇠붙이가 심장을 짓이기고 파고드는 고통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상황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조지현의 입속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숨이 막혔다. 남자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입에 추삽질을 반복했다. 생리적인 혐오감에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 진짜 미칠 것 같다. 넌 사람 미치게 하는 눈이야. 입술 오므려 봐. 하아, 시발.”

그가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로 허리를 추어올렸다. 성기가 빳빳하게 부풀어 오르자 남자는 얼른 허리를 뒤로 빼서 조지현의 얼굴에 정액을 쏘았다. 뜨끈하고 비릿한 액체가 얼굴에 닿자 조지현은 토악질을 시작했다. 남자가 황홀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다가 조지현을 일으켜 세운다.

“하지 마, ……제발, 그만…….”

남자가 허겁지겁 조지현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보지에 박히는 거 좋아하지?”

그의 손이 허벅지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경련하며 빳빳하게 굳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조지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있어. 허튼 짓 했다가는…….”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청소 중입니다.”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노크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쾅. 발길질 한 번에 화장실 문 경첩이 너덜너덜 떨어졌다.

“누, 누구야…….”

화장실 칸 안으로 쑥 들어온 손이 남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세면대에 피가 튀었다.

남자가 숨넘어갈 듯이 헐떡거렸다.

“사, 살려줘, 제, 제발……컥.”

남자의 머리통이 소변기에 처박혔다. 박살난 소변기와 함께 그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미술 선생의 가랑이가 누런 액체로 흥건했다.

“손끝 하나라도 대 봐.”

나직한 음성이 그날과 같다. 미술 선생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와 조지현을 바로 세워준다. 그는 휘청거리며 벽에 기대어 선 조지현의 옷을 추슬러주고 가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가자.”

그가 조지현의 손목을 쥐고 그대로 데리고 나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강석원은 말이 없다. 그는 작게 숨을 헐떡이며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조지현은 눈을 감은 채 숨을 삼켰다.

왜 자꾸 같아지는 걸까. 소소한 것들이 달라져도 큰 맥락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쳇바퀴를 열심히 구르는 쥐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다친 데는?”

“……, 없습니다.”

강석원이 제 옷자락으로 조지현의 얼굴을 닦아준다. 그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조지현은 흠칫흠칫 몸이 떨렸다. 강석원이 이를 낮게 사리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조지현이 눈을 피하며 물었다.

“같은 버스 탔어. 그 사람이 갑자기 버스에서 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네가 커피숍에 있는 게 보여서.”

“…….”

“소문이 안 좋아, 그 사람. 그래서 도중에 내려서 와본 거야.”

누구라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에, 남자는 머리가 땀에 젖을 정도로 뛰어 돌아온 것이다. 전에는 그의 다정함이 못내 좋았지만 지금은 괴롭다.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했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데리고 복도로 나가 그의 얼굴을 살핀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에 들린 가방을 잡으려 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끈을 잡는 게 고작이었다.

“뭘 알아서 해.”

강석원이 조금 화난 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큰 줄기를 벗어나야 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조지현은 뜨거운 것을 삼켜냈다.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상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차갑게 밀어냈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천, 수만 마리의 벌레가 장기를 파먹고 들어온다. 참아야 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강석원의 턱이 단단하게 굳는다.

“……!”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쥐고 건물을 나왔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손을 놓아주고는 가방을 건넸다. 그는 그대로 조지현을 두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와중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여기까지 데리고 나온 것이다. 그는 언제든, 잔인할 만큼 다정하다. 

조지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지만 누구도 말을 건네거나 도와주진 않았다.

먼저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어야 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학교에서 징계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해줘서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고, ……, 도와주세요.

조지현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아직도 벌레들이 사각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몸을 더듬던 남자의 손길이 끈적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비릿한 정액 냄새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제아무리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노력해도 진창에 처박힌다. 

누군가 바로 앞에 멈추어 서는 기척이 들린다. 

“미안해.”

“…….”

“신경 쓰여.”

눈앞이 뜨겁다.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잠깐만.”

조지현이 현관에 들어서자 강석원은 먼저 들어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깔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큰 물건 몇 개를 제자리에 두는 것만으로도 정리는 끝났다.

“들어와.”

지금이라도 그냥 나갈까. 강석원이 이끄는 대로 자취방까지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저, 그냥…….”

조지현이 현관에서 머뭇거리자 강석원이 그의 신발을 벗겨냈다. 그러고는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고 밖에 다닐 거야?”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미술 선생이 조지현의 얼굴에 대고 사정을 하는 바람에 옷이 얼룩진 채였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어.”

그가 욕실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나는 잠깐 나갔다 올게. 삼십 분 뒤에 올 거야.”

강석원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조지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을 열어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아직도 그 미끈한 액체가 얼굴에 들러붙어 있는 기분이다. 일단은 씻고 싶었다.

조지현은 욕실로 들어갔다.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에 잠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변한 게 없다.

조지현은 교복 셔츠 단추를 끌러 내렸다.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내렸다. 차가운 공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석원이 드물게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강석원이 문을 한 번 두드린다. 문을 사이에 두고 강석원이 밖에 있다는 생각에 아래가 저릿했다. 강석원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네.”

조지현의 대답이 돌아오자 강석원이 작게 숨을 내쉰다.

“……온수, 켜줄게.”

그가 보일러 스위치를 눌렀는지 위잉, 하고 기계가 돌아갔다. 

“씻어.”

강석원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로써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큰 줄기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하는 것도 있다. 열 오른 얼굴을 감싸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은 현재의 강석원을 몇 배나 더 좋아하게 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말리는 사이, 강석원이 돌아왔다. 그는 봉투에 든 것을 냉장고에 정리했다.

“밥은.”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도 먹어야지.”

“속이 안 좋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웠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는 강석원은 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금세 주전자의 물이 뚜껑을 밀어내며 삑, 삑, 소리를 내고 방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찼다.

“이거라도 마셔.”

보리차였다.

조지현은 컵을 든 채로, 망연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식혀서. 조금씩.”

어린 아이에게 하듯, 말을 건네는 강석원의 마음에 눈앞이 시큰했다. 조지현은 얼른 고개를 떨구고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인사했다.

한 모금 마신 보리차가 몸을 뜨끈하게 데웠다. 컵에 담긴 보리차를 모두 마시는 데 한참이 걸렸다. 강석원은 옆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빈 컵을 작은 상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강석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히 풀어진다.

“좀 쉬어.”

“아닙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지현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 하자 강석원이 대번에 낯을 굳힌다.

“어디로 가는데.”

“…….”

“여기서 자고 가. 내일이면 집에 가도 되잖아.”

조지현이 수학여행 기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강석원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괜찮습니다.”

“조지현.”

조지현은 어깨를 움찔했다. 강석원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서로의 이름을 말한 적은 없다.

조지현의 당황을 알아챘는지 강석원이 이름표 봤어, 하고 말한다.

“……네.”

“나가지 마. 부탁할게.”

그가 고개를 숙인다. 

무엇에도 흔들림 없고 강해 보이는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여 부탁한다. 자신이 대체 뭐라고.

조지현은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입술 다쳐.”

그가 건네는 모든 말이 흉기처럼 가슴에 내리꽂힌다.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 펴줄게.”

강석원이 일어선다.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만큼 큰 거구의 사내가 바닥에 반듯하게 이불을 깐다. 

익숙한 이불이다. 강석원과 저 이불을 덮고 비가 내리는 날, 라디오를 들으며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나눴다. 따지고 본다면 어제 오늘의 일인데 마치 십 수 년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미안해.”

그가 불쑥 사과를 건넸다.

“……세탁해두는 건데.”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그가 내주는 대로 담요를 몸에 감았다. 희미한 섬유 유연제의 향기가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이다.

조지현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불 끌까.”

“네.”

강석원이 불을 끄고 한참 멀찍하게 눕는다.

피곤함이 산처럼 묵직하게 무게를 더했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곧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어슴푸레 주변의 경계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낡은 책상, 몇 권의 책, 털털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선풍기, 옷걸이, 아무렇게나 세워진 상패와 트로피.

그대로다.

주변을 둘러보던 조지현은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그는 내도록, 조지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수록 열기가 더해갔다. 조지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 힘들지 않아?”

가라앉은 침묵을 흔들며 나직한 목소리가 파고든다. 

“할 만합니다.”

조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집이랑 편의점이랑 멀지 않나요.”

혹시 그의 집이 편의점 근처로 이사라도 온 것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와보니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체육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깅 코스.”

그가 가끔 들러 물을 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부러 강석원의 집과 체육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골랐는데도 그의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묘한 기분이었다.

“어느 학교야.”

“네?”

“여자 친구.”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지현은 놀라서 한참을 눈만 깜빡였다. 강석원이 대답 안 해도 돼, 하고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린다.

“아, ……, …….”

강석원이 오해한 채로 두는 편이 그를 위해 좋을 것이다. 그게 옳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기적인 연정이 불쑥 고개를 들이민다.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강석원의 등 뒤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리고 만다.

그가 듣지 말았으면 했다. 아니, 오해를 풀어줬으면 한다. 이중적인 마음이 교차하며 수런수런 마음이 흔들렸다.

어느새 강석원이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에 머무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읽힌다. 당혹, 놀라움, 그리고 옅은 기쁨.

그조차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미묘하게 들뜬 공기가 목구멍을 간질였다. 

조지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잘 자.

강석원의 나지막한 음성이 등 뒤에 닿았다. 그 순간, 몸의 긴장이 느슨하게 풀렸다. 

눈을 감았다.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미술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문제도 불거지지 않았다. 강석원은 가끔 편의점에 들러 생수를 사거나 때때로 컵라면을 먹었다. 대수롭지 않은 두어 마디를 던지고는 다른 손님과 다르지 않게 돌아갔다.

일견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을 텐데.

조지현은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둔 공책을 폈다. 붉은 색 펜으로 현재와 비슷하게 진행된 사건들을 표시했다. 시간 순서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얼추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조지.”

조지현은 제 이름을 부르는 최기열의 목소리를 듣고 공책을 덮었다.

“뭐 하냐?”

“공부하지, 뭘 해.”

“흐음, 공부. 지겹지도 않냐?”

너야말로 지겹지도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과거와 가장 변한 게 없는 인물은 최기열이었다.

“야. 내가 좋은 거 보여줄까?”

최기열이 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내밀었다. 여학생이 아슬아슬하게 교복 셔츠 자락을 벌린 사진이었다.

“이번에 수학여행 가서 만난 애들인데. 존나 웃기지 않냐? 지들이 막 이런 사진 보낸다. 몸매 죽이지?”

조지현은 눈길도 주지 않고 그러게, 하고 대꾸했다. 머릿속으로는 아까 노트에 정리된 사건을 되짚었다. 

큰 맥락은 변하지 않는다. 강석원과의 일이 어긋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최기열이었다.

“넌 이런 거 안 좋아해?”

최기열이 묻는다.

“응, 별로.”

“야동도 안 봐? 야한 동영상 보면서 자위 같은 건 할 거 아니야.”

최기열이 뭔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가늘게 뜬다. 조지현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웃음을 터트린다.

“하긴, 조지 니가 뭘 알겠냐. 우리 이번 주에 얘네 만나기로 했거든. 혹시 같이 갈래?”

조지현은 물끄러미 최기열을 바라보았다. 

큰 맥락. 최기열. 

눈이 마주치자 최기열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오른다.

“뭐, 뭐. 왜? 내가 뭐 못할 말 했냐?”

“그래.”

“어?”

“갈게. 이번 주말이지?”

“뭐? 온다고? 여자들 만나는데 조지 네가 온다고?”

최기열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조지현은 왜, 하고 물었다.

“같이 가자며.”

“어, 그, 그렇지만.”

그가 도로 자리에 앉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너 여자, 이런 거 관심 있었어?”

“아니.”

조지현은 짧게 대꾸했다. 최기열이 그렇지, 하고 안도한다.

“그래서 한 번 나가보려고. 어떤 건가.”

“별거 없어. 딱히 이쁜 애도 없고, 사진발이야. 사진발. 가슴 사진도 다 뽕브라 입고 찍었을걸.”

방금까지 엄청난 것을 보여주는 듯이 거들먹거리던 최기열이 여자애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가지 마?”

조지현이 물었다. 최기열이 그건 아니고, 하고 어물거리며 눈을 피한다. 조지현과 어울리고 싶은데 여자애들을 소개시켜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

큰 맥락을 바꿀 수 없으면 다른 걸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 나 이 사람 알아.”

나갈 채비를 하던 김수정이 조지현이 보던 신문을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여기서 몇 번 봤어. 유명한 사람이야?”

매서운 신예의 등장.

신문 귀퉁이에 난 기사의 사진을 그녀는 대번에 알아봤다.

“넌 본 적 없어? 엄청 눈에 띄던데.”

도어벨이 울렸다. 강석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김수정이 조지현의 어깨를 툭 치며 저 사람이야, 하고 속삭인다.

“엄청 크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조지현에게 몸을 기울여 말을 잇는다.

“괜히 눈 마주치지 마. 한 대 맞으면 어떡해.”

“늦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조지현의 말에 그녀가 아참, 하고 바로 몸을 일으킨다.

“그럼 다음에 봐.”

김수정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슬쩍 눈짓하면서 사라진다. 문이 닫히고 나서 강석원은 음료수 하나를 가지고 온다.

“천삼백 원입니다. 하나 더 갖고 오세요.”

강석원은 이렇게 종종 원 플러스 원 제품을 고른다. 진열대에서 같은 제품을 하나 더 가져온 그는 조지현에게 그걸 건넸다.

“마셔.”

“괜찮습니다.”

“그럼 버리든가.”

“……,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음료수를 계산대 아래에 내려놓았다. 계산을 마치고도 강석원은 한동안 계산대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기색에 조지현은 눈을 살짝 치떴다.

“시합 끝났어.”

알고 있었다.

강석원은 시합에 들어가면 한동안은 편의점에 들르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턱선은 한층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다. 한창 체중 감량을 할 때는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중간고사 끝났지?”

“네? 아, 네.”

조지현은 눈을 껌뻑거렸다. 강석원도 같은 학교였기 때문에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답이었던 터다. 그러다 문득, 강석원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캔을 두드린다. 그는 한껏 긴장한 채다. 침묵이 길어진다.

“영화표가 생겼어.”

그가 가까스로 말을 잇는다.

“관장님이 주셔서.”

강석원과의 첫 데이트가 떠올랐다. 비가 오고, 영화 내용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엉망이었다. 그의 자취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후, 같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키스를 나누었다. 대단하지 않은 일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그를 통해 배웠다.

“이번 주 토요일에 뭐해.”

그의 질문에 조지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학원 보강이 있습니다.”

거짓이었다. 최기열과의 선약이 있었다. 그와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맥락에 대한 실험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원치도 않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 그것도 최기열과의 약속 때문에 당신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말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구나.”

음료캔을 쥔 강석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뭐가 죄송해.”

“……, 그냥.”

방금, 자신은 강석원과의 소중한 시간을 사라지게 했다. 그 시간을 만든 것은 강석원과 함께였다. 그런데도 그의 의사는 존중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

강석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영화를 고르고, 식사를 할 식당을 알아보고, 그 길을 이동하는 버스와 지하철 노선까지 알아보는 과정이 즐거웠다고, 강석원은 말했었다. 

“……나중에.”

조지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같이 밥 한번 먹어요.

길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흔한 말이었다. 모두들 숱하게 어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말이었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인사치레처럼 툭 던지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

그 한마디에 남자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뿌듯한 기쁨을 억누르며 대답한다. 첫 번째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이, 이제는 더 눈에 잘 들어온다.

강석원의 표정이, 웃음이, 그의 감정들이.

“나중에 봐.”

강석원은 그렇게 말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여기야, 여기.”

조지현을 알아본 최기열이 손을 흔든다.

“넌 어떻게 핸드폰도 없냐. 도중에 약속 장소 바뀌면 찾지도 못하겠다.”

그가 투덜거리면서도 조지현을 위아래로 훑는다. 사복차림으로 만난 것은 처음인 터다.

“최기열. 여자애들 왔대. 데리러 오라는데?”

“지들이 뭐라고 데리러 가. 알아서 오라고 해.”

최기열이 조지현을 힐끔 쳐다본다.

“뭐 먹고 싶어? 점심 뭐 먹으러 갈까.”

“아무거나.”

“너 뭐 좋아하는데?”

“최기열. 여자애들 왔다.”

화려한 옷차림의 여학생들 여럿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뭐야. 매너가 왜 이렇게 없어. 한참 찾았잖아.”

“2번 출구라는데 그걸 왜 못 찾아 오냐. 숫자 못 읽어?”

“여기 출구가 복잡해서 힘들단 말이야.”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며 여학생 한 명이 조지현을 힐긋 쳐다본다.

“쟤는 누구야? 처음 보는데?”

“우리 반. 조지현.”

“지현? 얘 이름도 지현인데.”

긴 생머리 여학생이 안녕, 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조지현도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럼 지현이끼리 잘해보는 건가?”

“뭔 헛소리야.”

최기열이 듣자마자 짜증을 부렸다.

“왜? 너 지현이 마음에 두고 있었어?”

처음에 말을 건넨 여학생이 까르르 웃으며 최기열을 놀렸다.

“어떤 지현이인지는 모르는 거지, 그거.”

같은 반 박동철이 히죽거리며 최기열을 놀렸다.

“닥쳐. 이 새끼야. 아무튼 뭐 먹으러 갈래.”

“뭐 사줄 건데?”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골라.”

최기열의 말에 여학생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최기열은 다시 조지현을 흘끔 쳐다보았다.

“넌 뭐 먹고 싶은 것도 없냐.”

“응. 별로.”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시간에 강석원을 만나 영화관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이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 집 있대. 블로그에 맛집이라고 많이 나오던데. 좀 비싼데 괜찮아?”

“뭐 얼마나 한다고.”

최기열은 몇 걸음 걷지 않고 조지현을 돌아보았다.

“너 파스타는 먹냐?”

“응.”

“그럼 거기로 가자.”

“그럼 최기열은 거기 살아? 그 아파트 완전 비싼 곳 아니야?”

“내가 부자인가. 아버지가 부자지.”

“저 새끼 잘난척하는 것 봐.”

오늘의 물주가 누구인지 모두 충분히 인지한 상태였다.

“저 친구는 오늘 왜 나온 거야?”

가장 옷차림이 화려한 이윤희가 조지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 나오면 안 되냐?”

최기열이 대신 맞받아쳤다.

“아니, 왠지 기분이 안 좋아보여서. 우리랑 있는 거 싫은 거 아니야?”

샐러드를 먹던 조지현이 그런 건 아니야, 하고 대꾸했다.

“얘 원래 조용해. 학교에서도 거의 말 없어.”

“정말?”

“우리 학교 전교 1등이야. 전국석차도 거의 100등 안이고. 공부 진짜 존나 잘해.”

최기열이 마치 제 자랑을 하듯 으쓱거리며 조지현에 대해 늘어놓았다.

“와. 나 공부 잘하는 남자 좋아하는데. 넌 이름이 뭐라고 했지?”

“조지현.”

“목소리랑 분위기가 되게 차분하다. 넌 취미가 뭐야?”

조지현은 조금 당황한 듯 어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쟨 취미도 공부일걸.”

“맨날 공부만 하거든.”

같은 반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조지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딱히 취미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쟤 얼굴 빨개진 것 봐. 되게 귀엽다.”

“이윤희, 너 쟤한테 관심 있어?”

“있으면 안 되나?”

이윤희가 자리를 바꿔 조지현 옆에 앉았다.

“핸드폰 번호 찍어줘.”

“미안. 핸드폰이 없어.”

“뭐? 야 너무한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이윤희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자 최기열이 진짜 없어, 하고는 조지현을 거들었다.

“진짜? 왜? 세상에. 나 요즘에 핸드폰 없는 애 처음 본다. 얘 엄청 순수한 앤가 봐. 말로만 듣던 모솔 아니야?”

여학생들이 저들끼리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으며 포크로 샐러드를 휘저었다.

“너 누구 사귀어본 적 있어?”

“나?”

조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까지 누구 좋아해보거나, 사귀어본 적 있냐고.”

강석원이 떠올랐다.

이전의 세계에서도 누군가와 관계를 가진 것은 그뿐이었다. 

“……, 없어.”

대답을 해놓고도 씁쓸했다. 앞으로 모든 시간을 그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데 써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럼 이상형은? 그런 건 있어?”

여자애들은 자기들보다 예쁘장한 조지현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 호기심어린 태도로 대했다. 최기열은 찬물을 마시며 대답을 기다리듯 조지현을 힐끔거렸다. 조지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다정한, 사람.”

조지현의 대답을 들은 이윤희가 그게 뭐야, 하고 웃어버린다.

“다정한 사람이면 다 좋아? 나 다정한데.”

“나도, 나도.”

여학생들끼리 한참을 까르르 웃다가 금세 화제가 전환되었다. 조지현은 한숨을 삼키었다.

정말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지현은 물을 마시고 시계를 보았다. 지금쯤이면 영화가 끝났을 거다.

“약속 있냐?”

최기열이 묻는다. 조지현이 살짝 눈을 치떴다.

“아까부터 계속 시계를 보는 것 같아서. 누구 만나기로 했어?”

“아니.”

“재미없지?”

최기열이 은근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으며 말없이 물을 마셨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기는 하는 걸까.

식사를 마치고 나자 다들 노래방으로 가자고 의기투합했다.

“나는 먼저 가볼게.”

조지현이 일어서며 최기열에게 말하자 그가 왜? 하고 얼굴을 찌푸린다.

“몸이 좀 안 좋아서.”

“넌 뭐 걸핏하면 아프냐. 그러게 팍팍 먹어야지. 아까도 새 모이처럼 풀만 조금 처먹고 말더니. 일부러 비싼 데 왔는데 돈 아깝게 말이야.”

조지현은 최기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건을 변하게 할 수 없으면, 사람을 변하게 할 수는 없는 걸까.

“왜,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최기열이 손바닥으로 벌게진 얼굴을 문지르며 말을 더듬었다.

“최기열, 너…….”

조지현이 말을 건네려고 입을 떼는데 앞서 걷던 이윤희가 몸을 빙글 돌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뭐야. 왜 둘만 얘기해? 너 진짜 저 앞에 있는 지현이 아니고, 여기 있는 지현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윤희의 놀림에 최기열이 미쳤냐, 하고 정색했다.

“내가 미쳤다고 사내새끼를.”

“아님 말지. 뭘 그렇게 화를 내. 지현아, 우리 같이 노래방 가자.”

그녀가 조지현의 팔을 붙들고 끌어안는다. 얇은 니트 차림이었던 터라 팔에 가슴 부근이 닿았다. 조지현은 상대가 민망하지 않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윤희는 집요하게 조지현의 팔을 끌어안았다. 눈이 마주쳤다.

일부러 그러는구나.

조지현은 한숨을 삼켰다.

“나는 여기서 먼저 가볼게. 다들 잘 놀아.”

“왜? 같이 가자. 응? 노래방 갔다가 윤정이네 놀러가기로 했어. 오늘 윤정이 부모님 안 오신다고 했단 말이야.”

“나는…….”

조지현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뚝 선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체육관 동료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여럿 서 있었다. 모두 체격이 좋았지만 강석원은 개중 단연 두드러진다.

“어, 나 저 사람 알아.”

이연희가 저 멀리 떨어진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고 말을 잇는다.

“우리 삼촌이 국가대표 복싱 선수였거든. 요즘 맨날 티비 보면서 저 사람 얘기만 하더라고. 아, 대체 난 왜 권투 같은 걸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야만적이지 않아?”

그녀가 동조를 바라는 듯 조지현의 팔을 한껏 잡아끈다. 그녀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 조지현이 어? 하고 되물었다.

“근데 너희랑 같은 학교 아니야?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맞아. 우리 학교야.”

다른 녀석이 끼어들었다.

“그럼 같이 놀자고 해봐. 저 사람 유명인이잖아. 신문이랑 뉴스에 나오던데.”

“미쳤냐. 강석원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

“왜? 무서워?”

“말이라고. 딱 봐라. 눈도 못 마주치……, 헉.”

강석원이 다가왔다. 여자들은 뉴스와 신문에 나오는 유명인을 앞에 두고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소곤거렸다.

“학원 가?”

의외였다. 강석원이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멀리서 바라보다가 그냥 제 갈 길을 갈 거라고 여겼다. 

“학원 보강이라며.”

“…….”

조지현은 그제야 강석원이 타고난 파이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다정하고 친절한 모습 뒤에 난폭하고 집요한 면모를 지닌 남자였다. 

“너랑 아는 사이야?”

이윤희가 조지현의 손을 꼭 잡고 끌며 보챘다. 강석원의 시선이 일순 가늘어진다.

“키가 몇이세요? 완전 크다. 저번에 뉴스에 나온 거 봤어요. 스포츠 뉴스.”

그녀가 은근히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본능적으로 여자들은 안다. 어떤 남자가 수컷들 사이에서 가장 우월한지. 남자로서 강석원은 압도적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왕 노릇을 하던 최기열도 강석원 앞에서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저희 노래방 갈 건데 같이…….”

조지현은 이윤희의 손을 떼어 놓았다.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매몰차게.

“잘 아는 사람 아니야.”

“뭐?”

“나 먼저 갈게.”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강석원도 최기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무례한 말을 했다. 화가 났을 것이다. 사과를 해야 하는데, ……. 기분이 좋지 않다. 뱃속에서부터 뜨끈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배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였다. 제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질시한다. 여자를 상대로 꼴사납게 질투하는 것이다.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큰 맥락을 바꾸기 위해서 가장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은 최기열이 아닌, 자신이었다. 

“어서……, 오세요.”

뒷말은 거의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강석원이 생수를 하나 가지고 계산대로 온다. 조지현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자 강석원이 생수통의 뚜껑을 돌리며 말한다.

“10시에 끝나지?”

“네?”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그 말만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퇴근까지는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야간 타임의 알바생과 시재를 맞추면서 몇 번이나 돈을 잘못 세서 혼이 났다. 시재를 모두 맞추고 조지현은 창고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10시 10분. 강석원을 25분을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무서웠다. 화를 내는 강석원의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강석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크다. 언제 봐도 늘 느낌은 같다.

“가자.”

조지현은 그의 옆에서 한 발 물러선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주택가를 벗어날 때까지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은 더해갔다.

“이쪽으로 갈까.”

강석원이 공원으로 나 있는 길을 가리킨다. 한밤의 공원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한적했다. 조지현은 천천히 그를 따라 걸었다.

그는 자신을 두 번이나 도와주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그를 무안 주는 것은 옳지 않았다. 조지현은 손을 쥐었다 폈다. 사과를 해야 한다.

“내 이름 알아?”

“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조지현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두어 번 껌뻑거렸다.

“내 이름.”

“압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꾸한다. 그러고는 평연한 투로 말을 잇는다.

“나 운동해.”

“……,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요즘 부쩍 강석원에 대한 기사가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렸다. 도시괴담에 스포츠 뉴스까지 더해져 학교에서 강석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혈액형은 O형이고.”

“……네.”

대화는 더더욱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부모님은 안 계셔.”

이번엔 알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조지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형제는 없어. 그리고, …….”

강석원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는다. 

“뭘 더 알려주면 돼.”

“네?”

“너한테 아는 사람이 되려면, 뭘 더 알려주면 되냐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기분이 좋으면 어떻게 웃는지. 모두 알고 있다. 자신의 불안을 어르는 남자의 커다란 손을, 보기보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 맛을, 단단하고 너른 그의 어깨의 감촉을.

자신이 아는 강석원의 모습은 모두 사적이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강석원이 됐어, 하고 짧게 대꾸했다.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한다. 사람의 눈이 그토록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부드러운 봄바람이 흔들고 지나간다. 조지현은 눈가를 좁히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강석원은 여전히 자신을 못 박힌 듯이 바라본다. 그의 시선에 온몸의 신경이 핀에 눌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대로 열이 오른다. 꽃을 피운다.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꽃이 만개한다. 

“나 내일 미국으로 가. 연습 시합. 토요일에 돌아와.”

연습 시합이라고 했지만 몹시 중요한 시합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거.”

강석원이 주머니에서 두 번 접은 종이를 꺼낸다. 종이를 받아들었다. 거기에 적힌 번호를 보는 순간, 뜨거운 것이 울컥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사건이 뒤죽박죽 엉키고 시간대가 흐트러진다. 

하지만 부족함 없이 온전한 것도 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들여다봐서 외우고 있는 번호다. 악몽에서 깨고 나면 습관처럼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수롭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의 숨소리만 밤새도록 들은 날도 있다. 

모두가 자신에게는 위안이었다. 강석원의 존재는 전과 다름없이 오롯이 소중하다. 

눈앞이 흐려진다. 다시는 오지 못할, 아니 가져서는 안 될 시간이다.

“왜.”

강석원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묻는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조지현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고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힘든 일 있어?”

“…….”

“내가, 도와줄게.”

그를 붙들고 싶다. 무섭다. 지금도 하루하루 눈을 뜰 때마다 이것이 꿈은 아닐까,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닐까 혼란스럽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강석원의 미래를 망쳐버린, 그에게 버림받게 될, 그 시간으로.

“조지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조지현은 그 나직한 울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다.

“고개 들어 봐.”

그의 다정함은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을 물어뜯었다.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위로받고 싶어진다.

강석원이 손을 뻗어 턱을 쥐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만 같다. 입안이 바싹 마른다. 

“거기 지현이니?”

맹세코,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만큼 반갑게 들린 적은 없었다.

“지현이 맞아?”

강석원의 손이 물러선다. 조지현은 네, 하고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녀가 강석원을 발견하고 대번에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훑는다.

“누구야?”

“학교 선배님이요.”

“그래?”

“안녕히 가세요.”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공원을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들의 뒤를 따라왔다.

“친해? 선배면 3학년이겠네? 공부는 잘해?”

“잘 몰라요.”

“잘 모르는데 둘이 같이 와?”

“그냥 이 앞에서 만나서 잠깐 인사만 했어요.”

그녀가 흐음, 하고 눈가를 좁힌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아, 맞다. 너 숙현이 아줌마 기억나지?”

기억 못할 리가 없다. 이틀이 멀다하고 그녀는 최기열과 자신의 아들을 비교하는 말을 떠들어댔다.

“네. 기억나요.”

“숙현이가 우리 지현이 너무 보고 싶다고 꼭 좀 오라는 거야. 우리 아들 별거 하지도 않았는데 저번 모의고사가 전국 28등이었다는 얘기 듣더니 그러는 거지. 누군들 안 그러겠어.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둬. 아버지도 같이 가기로 했어.”

“토요일에 해야 할 공부가 많아요.”

“하루는 쉬어도 돼.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저는 괜찮으니까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이 일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뼈가 두드러진 새햐얀 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녀가 눈을 새파랗게 뜨며 소리 질렀다.

“다시 한 번 말해 보라고! 가자면 가는 거지, 네까짓 게 뭔데 엄마 말을 무시해!”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들을 향해 휘둘렀다. 빗자루, 구두 주걱, 액자. 내키는 대로 분노를 퍼붓던 그녀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목소리를 바꾼다.

“갈 거지?”

“…….”

“엄마도, 친구한테 하나쯤은 자랑하고 싶은 게 있어. 내가 걔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 이러고 살아야 해. 정말 지긋지긋해. 죽고 싶어.”

결론은 자신에 대한 동정이다. 조지현은 알겠습니다,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씻고 들어가서 공부해.”

조지현은 방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지금이라도 어머니가 들어와 제 목에 날붙이를 꽂아 넣을 것 같은 공포에 숨이 막힌다.

괜찮아. 지현아.

기억을 더듬어 그의 다독임을 떠올린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손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교복 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를 꺼냈다. 열한 개의 숫자. 그 아래에는 해외 콜렉트 콜을 사용하는 방법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조금씩 변해간다.

조지현은 종이를 쥐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지현아.

남자의 부름에 응답하듯 입술을 열었다. 그가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입맞춤은 어느새 깊게 맞물린다. 남자의 손이 몸을 더듬는다. 그의 손길을 따라 열감이 흐른다.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 닿고 싶다. 그를 느끼고 싶다. 남자의 너른 등을 끌어안는다. 그의 흐트러진 숨결이 목에 닿았다. 발끝까지 온몸이 저릿하다. 조지현은 선배님, 하고 그를 부르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남자끼리 붙어먹는 더러운 짐승 새끼들. 날카로운 날붙이를 손에 쥔 여자가 달려든다. 시야가 새빨간 피로 물든다.

“――!”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살폈다. 시트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대로 숨을 토해냈다. 온몸이 식은땀이었다. 한기가 스몄다. 한겨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호흡이 가빠온다. 까맣게 변한 시야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점멸을 반복한다. 조지현은 시트를 그러쥐고 컥, 컥, 숨을 토해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곳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침대 위에서 기어 내려와 가까스로 전화기를 가져왔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강석원이 무사한지, 그가 제대로 자신의 삶을 지키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의 온전함을 확인받고 싶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우, 하는 신호음이 들린다. 숫자를 누르기만 하면 강석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에게 위로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를 망칠 것이다.

조지현은 다시 전원을 눌렀다. 사위가 어둠이다.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저 아래로 추락하고 마는 가파른 낭떠러지다. 전화기를 도로 가져다 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교복 주머니에서 강석원이 준 종이를 꺼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조지현은 종이를 손에 쥔 채로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바다 건너에 있을 남자를 그렸다. 

좀처럼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네가 지현이구나. 너희 엄마 젊었을 때랑 어쩜 그리 똑같니? 너무 예쁘게 생겼다.”

“안녕하세요.”

“그래. 우리 기열이하고 같은 반이라며. 얘는 아침부터 옷 갈아입고 그러더니 왜 안 내려왔지? 기열아.”

위층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을 발견한 최기열이 얼굴을 붉히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고 제 어머니를 타박했다.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이숙현의 남편이 조지현의 어머니를 보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과찬이세요.”

여자는 오늘 아침부터 옷장에 있는 모든 옷을 끄집어내 입다가 눈물을 터트렸다. 자신은 예전과 비교해 너무 늙었고 옷들은 하나같이 낡았다며 그녀는 펑펑 울어댔다. 뭘 입어도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예쁘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여자는 가장 최근에 산 옷을 꺼내 걸쳤다. 

“내 정신 좀 봐. 얼른 들어오세요.”

이숙현이 식탁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식사 시간 동안 조지현은 말없이 젓가락만 움직였다. 

“지현이는 입맛에 안 맞아?”

“원래 쟤는 조금만 먹어. 새 모이만큼.”최기열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생긴 것도 예쁜데 목소리도 참 예쁘네. 공부도 그렇게 잘한다면서? 전국 석차가 100등 안이라니. 우리 기열이가 그러는데 학교에서도 항상 그렇게 열심히 한다며.”

“제가 언제 그랬어요.”

최기열이 팔짝 뛰며 투덜거렸다.

“조지는 일 등만 한다고 네가 그랬잖아. 그런데 네 별명이 조지야? 정말 귀엽다.”

이숙현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말에는 그 어떤 음험한 의도나 가시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받고 부유하게 살아온 여자의 인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투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쟤 싫어해.”

“넌 지현이 대변인이야?”

“아, 또 뭘 그래요.”

최기열이 투덜거리자 이숙현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다. 식사를 마치고 어른들은 와인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조지현이 인사를 하자 이숙현이 눈웃음을 짓는다.

“아들이 아니라 딸로 태어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너 아들 너무 예쁘게 낳았다. 기열이하고 위에 올라가서 놀아. 과일 조금 이따가 올려 보낼게.”

“아닙니다. 저는…….”

어머니가 사납게 눈을 치뜬다. 오늘 집에서 나오기 전에 그녀는 아들에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당부했다.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 무슨 뜻인지 알지? 엄마 얼굴에 먹칠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올라가자.”

최기열이 고갯짓을 한다. 어머니가 아들의 등을 밀어냈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은 것을 꾸욱 참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여기가 내 방이야. 저기는 티비 보는 방, 저기는 서재.”

최기열이 2층의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쑥스러운 듯 조지현을 돌아본다.

“책 볼래?”

“아니, 괜찮아.”

“과일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최기열이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넌 왜 맨날…….”

“최기열.”

조지현이 제 이름을 부르자 최기열이 꿈을 꾸는 소년처럼 열에 들뜬 표정으로 응, 하고 대답했다.

“할 말 있어.”

최기열이 마른 침을 삼켰다.

“무슨 말. 방으로 들어갈까.”

“아니. 여기서 할게.”

폐쇄된 공간에 둘만 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너 성격 욱하는 거 알아.”

“뭐?”

“그래도 본성은 나쁘지 않잖아.”

저를 지지해주는 가족, 재력, 온전한 부모. 그에게는 부족한 게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조지현은 최기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키는 대로 저질렀다가는 결국엔 본인도 힘들어지니까.”

최기열은 그 일로 결국 전학을 가게 되었다. 학기 중의 갑작스러운 전학으로 본인도 매우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용서해 줘야지.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쯤에 최기열의 아버지와 아버지는 동업을 하게 된 터다.

“어차피 사람 감정 같은 건 변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한때 앓고 지나가는 열병 같은 거야.”

그 열병에 걸려 평생을 앓았다. 병이 남기고 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사는 사람도 있다. 최기열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조지현의 말에 최기열이 허, 하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약속이 있어서.”

“야! 조지현!”

조지현은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다. 한참 화기애애하게 대화중이던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지현아!”

어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등에 꽂혔지만 조지현은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현관을 나와 걸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최기열은 자신에게 저열한 말을 쏟아내지도, 더러운 짓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식사 시간은 지나갔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나중에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달리고 있었다. 걸음이 꼬여 몇 번 넘어졌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강석원의 체육관 앞이었다. 그때와 같다. 아니, 다르다. 달라질 것이다. 달라질 수 있다.

조지현은 마음을 다잡으며 체육관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미트를 강타하는 소리가 텅텅 울렸다. 강석원은 오늘 미국에서 돌아온다.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전화는 한 번도 걸지 않았다.

악몽에서 허우적거리다 눈을 뜬 밤에도, 혼자 끔찍한 외로움을 견뎌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조지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강석원이 준 종이가 손끝에 걸린다. 그는 약속받은 찬란한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조금씩, 바꿔나가면 된다.

조지현은 체육관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저 아래서 이쪽으로 올라오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맞닥트렸다. 조지현을 발견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어 선다. 그가 눈을 살짝 치떴다. 의외의 만남에 당혹스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그가 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지현에게 다가왔다.

일주일 만이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 그를 보지 못한 적도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 매우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물리적 거리가 빚은 그리움이다.

“안녕하세요.”

조지현은 애써 평연함을 꾸며내어 말했다. 

“오랜만이다.”

“네. ……어쩐 일이세요.”

일부러 모른 척, 말을 건넸다. 

“이 위에 있는 체육관 다녀.”

강석원이 언덕 너머의 건물을 가리킨다. 

“전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강석원이 그렇구나, 하고 대답한다. 자신을 샅샅이 훑는 시선을 느낀다. 일주일, 그 짧은 기간 동안 혹시라도 있었을 변화를 탐색한다. 애틋한 걱정이 깃든다.

주머니에 넣은 손끝에 접어둔 종이가 닿았다.

할 수 있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올려다보았다.

“식사하셨나요?”

강석원이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밥, 오늘 먹을 수 있을까요.”

강석원이 잠시 생각하더니 잠시만, 하고 도로 일행에게 달려간다. 뭐라고 말을 건네자 관장이 뭐? 하고 언성을 높인다.

“오늘 모처럼 회식하는 날인데 가긴 어딜 간다고.”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조지현에게 다시 다가왔다.

“가자.”

“야! 강석원, 이 새끼야!”

관장이 노기어린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도착했을 때, 강석원은 손을 놓아주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십니까?”

조지현도 가쁘게 호흡하며 물었다.

“아니. 전혀.”

강석원이 느슨하게 웃는 투로 덧붙였다.

내일 죽겠지.

그답지 않은 가벼운 농담에 조지현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조지현은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자신을 바라본다. 웃음기가 증발한 눈으로.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가늠되지 않는 깊은 감정에 숨이 막힌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조지현은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란 음식은 없는데요.”

강석원이 이전에 했던 농담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저녁 공기가 가볍게 흔들렸다. 

기억을 더듬어 강석원과 같이 왔었던 가게 중 하나를 골랐다. 강석원이 라면을 보고 잠시 표정이 굳는다.

“이건 입맛에 맞으실 거예요. 담백해서…….”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자신은 아직 강석원의 취향을 알 정도로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어야만 한다.

“어떻게 알았어.”

강석원이 묻는다. 그는 한마디 말도 허투루 흘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운동하시니까, 너무 짜게 드시면 안 되잖아요. 인스턴트 같은 것도 몸에 안 좋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관리 더 잘하셔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픽, 웃음을 삼킨다.

“왜 그러십니까.”

“너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봐서.”

자신의 긴장을 읽힌 것 같아 부끄러웠다. 조지현은 젓가락을 들고 말없이 면을 휘휘 저었다. 둘 다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했다. 이상했다. 그와 식사를 한 것은 이미 여러 차례나 있어왔던 일인데, 마치 처음인 것처럼 긴장되었다. 조지현은 몇 번이나 단무지를 집으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강석원이 대신 단무지를 집어 조지현의 그릇에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입맛에 맞아?”

“네. 괜찮습니다.”

이전에 처음 밥을 먹은 날이 생각난다. 그날 두 사람은 거의 한마디 말없이 밥만 먹고 헤어졌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어떠셨습니까.”

조지현의 질문에 강석원이 음, 하고 말을 고른다.

“그냥. 똑같지.”

그다운 대답이다.

“넌.”

그가 물었다. 조지현이 저요? 하고 되물었다. 

“왜 전화 안 했어.”

강석원이 직접적으로 묻는다.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몰랐다. 짧고 간단한 말로, 제 진심을 전했다. 

“별일 없었습니다.”

거짓이었다.

강석원이 미국으로 가고 나자 매일 밤 악몽을 꿨다. 자신이 그를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반증하는 결과였다.

“별일 없어도 전화해도 돼.”

“…….”

“기다렸어, 전화.”

조지현은 해설피 웃었다.

“안 할 겁니다.”

강석원이 눈썹을 살짝 올린다. 그의 표정에 언뜻 불만이 어린다.

“전화하는 일 없을 겁니다.”

조지현은 주머니에 든 종이를 강석원에게 도로 건넸다. 강석원은 그게 자신이 준 종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 눈을 감았다 뜬다.

“이거 주려고 불렀어?”

그의 눈에 화기가 스며있다. 조지현은 마른침을 삼키고 네, 하고 고개를 들었다.

“왜.”

강석원이 묻는다.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조지현이 자신에게 가지는 막연한 호감을.

“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진작에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다시 만난 그가 좋아서, 마치 또 한 번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 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보처럼 굴었다.

“이제 저도 고3이고, 일도 곧 그만둘 겁니다. 그리고, …….”

어떤 이유를 가져온다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자신은 강석원을 좋아하고 그 역시 자신에게 끌리고 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거짓말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히 계세요. 저는 이만…….”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붙든다.

“내가 실수했어?”

두려울 게 없는 남자가 겁먹은 듯이 그렇게 묻는다. 제가 알아채지 못한 실수가 있을까, 두려워한다.

“아닙니다, 그런 거.”

잡힌 손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겁다. 손바닥을 타고 그의 단단하게 튀어 오르는 맥이 느껴진다.

“아까 그게 정말 이유야?”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이 숙덕거리며 이쪽을 쳐다본다. 강석원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흐트러짐 없이 조지현에게만 향해 있다. 남자의 그런 곧은 집중이 무서웠다. 한번 방향을 정하면 그는 주변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몰두했다.

“놔주세요.”

조지현이 손목을 뿌리치려 했다.

“그거 말하려고, 나 부른 거냐고.”

“…….”

경계가 무너진다. 강석원이 제 진심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조지현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쟁반에 라면을 얹어가던 점원과 부딪히고 말았다. 뜨거운 국물이 조지현의 허벅지에 쏟아졌다.

“손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일어나셔서…….”

당황한 점원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 어디 있어.”

“네?”

“화장실 어디 있냐고.”

강석원에게 압도당한 점원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화장실 방향만 가리켰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번쩍 안아들었다.

“제가…….”

“가만히 있어.”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어가며 고통을 참아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강석원은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했다. 옷이 쓸리는 곳마다 살갗이 에이는 느낌이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바지 버클을 끌렀다.

“아닙니다, 그냥…….”

제지하기도 전에 강석원은 조지현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하얀 허벅지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참아. 차가울 거야.”

바지를 마저 벗겨내고 강석원은 차가운 물을 허벅지에 뿌렸다. 다리를 타고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마치 실금이라도 하는 듯한 그 모습에 조지현의 얼굴에 피가 몰린다. 다리 사이로 강석원의 정수리와 콧대가 보였다. 뜨거운 기운으로 아릿한 살갗에 그의 시선이 직접적으로 닿는다.

“물집은 안 잡힐 거 같아.”

강석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는다. 뭔가를 한껏 참아내듯이 이를 사리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제야 강석원의 시야에 셔츠로 살짝 가려진 조지현의 다리 사이가 들어온다.

“저기, 손님. 이거 바셀린인데…….”

문을 열고 들어선 점원이 아래를 탈의한 조지현을 발견하고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강석원이 점원의 손에 들린 바셀린을 빼앗듯이 받아들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강석원이 다시 화장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약 발라줄게.”

“제가, 하겠습니다.”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약통의 뚜껑을 열었다. 손가락에 듬뿍 약을 묻혀 조지현의 허벅지에 살살 펴서 문지른다.

“제가…….”

“가만히 있어. 셔츠에 스치면 더 아프니까.”

장님이 아니고서 강석원이 모를 리 없다. 아무리 셔츠 자락으로 가리려 해도 속옷이 살짝 들릴 정도의 흥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석원은 아무런 말없이 조지현의 허벅지에 약을 발랐다. 투명하고 찐득한 액을 사이에 두고 문지르는 남자의 손길이, 고통보다 우위에 섰다. 

“일단 소독하고 병원으로…….”

강석원의 표정이 멎는다. 조지현이 눈물을 뚝뚝 흘린다. 어쩌지 못하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기다란 속눈썹에 눈물이 맺히기 무섭게 뺨을 타고 툭툭 떨어졌다. 세필로 그려낸 듯 섬세한 눈매가 금세 물기로 젖어든다. 강석원은 작게 한숨을 삼키고는 조지현의 바지를 세면대에서 대충 헹궈냈다.

“입을 수 있겠어?”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고 바지를 받아들었다. 천이 닿기만 해도 아팠지만 단숨에 바지를 끌어당겨 입었다.

“잠깐 있어.”

강석원은 나갔다가 바로 제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거기서 트레이닝 자켓 하나를 꺼내 조지현의 허리에 두르게 했다.

“옷 젖었으니까 일단 이러고 가.”

“아닙니다.”

“옷은 안 돌려줘도 돼.”

옷에 실수를 한 어린아이처럼 조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강석원은 말없이 그의 상태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계산은 내가 했어. 택시 태워줄게.”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강석원이 조지현, 하고 그를 부른다. 강석원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아 있다.

“이제 안 만날 거라며.”

“…….”

“그럼 이 정도는 하게 해줘.”

마지막까지 강석원은 제 욕심을 들이밀지 않는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럼 2주 뒤에 그만두는 거야? 아쉽네.”

김수정이 가방을 옆에 멘 채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정들 만하면 그만두고, 정들 만하면 도망가고. 넌 좀 성실해서 오래할 것 같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아닌데 서운해서. 넌 시재도 잘 맞추고 일도 잘해서 점장님도 은근 마음에 들어 했거든. 처음에는 고딩이라고 투덜투덜하셨지만. 앗, 이건 비밀이다.”

조지현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다들 떠나는 시즌인가. 주말 알바하는 현정이도 이제 그만둔다 하고. 에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고쳐 멨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 사람 안 보이던데.”

“누구요.”

“그 큰 사람. 무섭게 생긴.”

그날 이후로 강석원은 편의점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성실한 사람이었다. 제가 한 말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고 다짐한 날, 그의 시선에 욕정을 느낀 자신과는 천지차이였다. 

“알고 보니 유명인이더라고. 내 남동생한테 말하니까 대번에 알던데? 요즘 남자들 사이에서는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이라고. 어쩌면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천재 복서라나 뭐라나. 그거 알아? 남자들도 은근 허풍이 심하다는 거. 내 남동생만 해도 말의 반은 덜어들어야 하거든.”

그녀는 조지현의 반응이 돌아오거나 말거나 제 할 말을 떠들었다.

“그 사람한테도 무패의 복서니 뭐니 떠들어대더니, 진짜 허풍은.”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사람 졌더라고. 신문에 났는데 안 봤어? 아. 나 늦었다. 가볼게.”

그녀가 후다닥 뛰어 나갔다. 조지현은 계산대에서 일어나 진열대로 가서 오늘자 스포츠 신문을 꺼내 들었다. 몇 장을 뒤로 넘기자 천재 복서의 안타까운 석패,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강석원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패배를 해 본 적이 없다. 자꾸 현실이 어긋나고 있다. 자신 때문일까. 조지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조지현은 3학년 4반으로 올라갔다. 그의 모습만 확인하고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실 어디에서도 강석원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2교시가 끝나고 다시 올라가도, 3교시가 끝나서 다시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 서성이던 조지현을 알아본 3학년 4반 학생이 말을 건넸다.

“너 아까도 오지 않았냐?”

조지현은 일단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구 찾으러 온 거야? 불러줄게.”

“아니요. 저기, …….”

조지현은 교실 안을 한 번 더 기웃거렸다.

“강석원 선배님, 오늘 학교 안 오셨나요?”

“강석원? 글쎄. 걔는 워낙 시합 때문에 학교를 자주 안 와서. 야, 오늘 강석원 왔냐?”

“아니. 안 왔을걸. 걔 어제부터 안 나왔어.”

사탕을 쭉쭉 빨아먹던 3학년 학생이 히죽거리며 대꾸한다.

“혹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기 반장 지나가니까 물어봐줄게. 반장!”

안경을 낀 남학생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강석원 왜 안 나오는지 아냐?”

“몰라. 안 그래도 담임도 한소리 하셨어. 연락도 안 된다고. 누구 아는 사람 없냐고 하시던데.”

“누가 알아. 어떤 미친놈이 걔한테 말을 붙인다고. 난 그리고 걔가 말하는 것도 본 적 없어.”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강석원은 근데 왜? 팬이야? 아서라. 티비나 뉴스에서 보는 것보다 직접 보면 몇 배는 더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일 거다.”

“그런데 걔는 왜 안 나오는 거지?”

“시합에 져서 쪽팔려서 그런 거 아니야? 천재니 뭐니, 주변에서 얼마나 치켜세워줬겠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다시 고개만 꾸벅 숙이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수업시간 내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합에서 졌다고 무단으로 학교를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편의점에서 일을 하는 내도록 강석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루 종일 넋이 나간 듯했다. 계산도 몇 번이나 틀리고 시재도 비어 처음으로 크게 혼이 났다. 다음 날에도 강석원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강석원의 자취방을 찾아갔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 밤늦게라도 불이 켜지지는 않을까, 새벽 1시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마찬가지였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강석원이 운동을 하는 체육관으로 갔다. 미친 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침 운동을 하러 온 사람을 무작정 붙들고 물었다. 강석원? 요 며칠 안 보이던데? 전화도 안 받고 연락도 없다고 안 그래도 관장님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더라.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끊어진 기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강석원은 운동을 쉬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극도의 불안이 숨통을 짓눌렀다.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갔지만 십 분도 앉아있을 수 없었다. 가방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학교에도, 체육관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의 일이. 그때 창밖에서 끼익, 하는 제동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억누르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강석원의 피가 도로에 퍼진다. 그의 옷을 적시고 그를 끌어안은 제 손을 적신다. 끔찍한 공포가 등골을 할퀴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칼날이 심장에 박힌다. 벌떡 일어나 제 손을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손발이 벌벌 떨린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의무다. 삶의 이유다. 집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딜 가느냐는 어머니의 날카로운 소리가 등 뒤에 꽂혔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다.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강석원의 온전함을 제 눈으로 봐야만 한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지켜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이나 그의 인생을 망가트릴 순 없다. 그래선 안 된다. 택시를 잡아탔다. 신호가 한 번 걸릴 때마다 심장을 파고든 칼날이 깊이를 더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내달렸다. 그의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참다못한 옆집에서 짜증을 내며 욕설을 퍼부을 때까지, 강석원은 나오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조지현은 강석원과 같이 갔던 곳들을 모두 찾아다녔다.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가 바싹바싹 마르고 입술이 타들어갔다. 누군가 줄로 목을 단단히 매어 조금씩 위로 당기는 기분이었다. 발끝이 아득해지고 점점 힘이 풀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헤맸다. 강석원이 했던 일이었다. 흔적도, 소식도 없이 사라진 사람을 강석원은 몇 년간 찾으러 다녔다. 단 몇 시간만으로도 피가 타들어갈 만큼 이렇게나 애가 닳는 이 일을, 그는 몇 년이나 버텼다. 자신이 뭔가 잘못을 해서 그에게 나쁜 일이 생긴 거라면.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간다.

“…….”

조지현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강석원의 강건함을, 그의 온전함을 제 눈으로, 이 손으로 확인해야 한다. 체육관으로 향했다. 집을 제외하면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폐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언덕을 따라 오르면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지현은 신에게 기도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해주길 기도했던 어린 날의 그 숱한 밤들보다, 수천, 아니 수만 배는 절실하게 기도했다. 신이 자신을 버린다 해도 그만은 버리지 않길. 그가 약속받은 삶을 누릴 수 있길. 가쁜 숨을 내뱉으며 체육관을 올려다본다. 밤이 늦은 시간인데도 체육관의 불은 환하게 밝혀져 있다. 커다란 유리 사이로 언뜻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도록 조지현은 가까이 다가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움직인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강렬한 타격음이 울린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매서운 기세다. 조지현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석원이다. 그가 움직인다.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이 오롯한 그다. 퍽, 하는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샌드백이 주저앉는다. 강석원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비가 속눈썹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을 깜빡하는 사이 강석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조지현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조지현!”

강석원이 큰소리로 조지현을 불렀다. 몇 걸음 떼지 못하고 그의 손에 붙들린다. 강석원이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왜 여기 이러고 있어.”

“……, …….”

지나던 길이었다고,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상태로는 그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잠깐 들어와.”

그가 조지현의 손을 잡아끈다.

“아닙니다. 무사하신 거……, 저는 가보겠습니다.”

조지현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무사함을 확인한 순간,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뿐이다. 설사 세상 귀퉁이가 무너져내린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의 안위가 중요했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체육관에 아무도 없어. 잠깐만 올라와.”

“……,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강석원이 조지현을 이끌고 언덕을 오른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타들어갈 듯이 뜨겁다. 그의 맥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강석원의 존재에 감사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강석원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체육관은 텅 빈 채였다. 강석원은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비에 젖은 조지현을 닦아주었다. 몇 시간 동안 빗속을 돌아다닌 덕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빗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다. 결국 몇 개의 수건을 더 가져와야만 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조금씩 제 색을 찾아간다. 강석원을 한참 바라보던 조지현은 그제야 그의 실재를 받아들인다. 머릿속에 피가 돌고 이성이 자리를 찾는다. 조지현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잠깐만 기다려. 나도 정리하고 나갈 참이었어.”

강석원이 새로 가져온 수건으로 조지현의 머리를 감싸주고는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가지고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도 조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쓰고 가. 나는 뛰어가면 금방이니까.”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우산을 펴서 건넸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아닙니다. 쓰고 가세요.”

“괜찮아.”

강석원이 가방을 머리에 올리고 그대로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내 미약한 힘에 붙들리고 만다. 조지현은 자신이 그를 붙들어 놓고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강석원이 우뚝 서서 조지현을 바라본다. 조지현이 입술을 천천히 달싹인다.

“같이, ……쓰고 가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은 무장해제를 당한 표정이다. 그는 머리에 올린 가방을 천천히 내렸다. 그가 조지현의 손에 들린 우산을 도로 가져갔다.

“가자.”

두 사람은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낙하하며 판판하게 펴진 섬유를 가볍게 두드렸다. 우산 밖의 빗소리보다 톡, 톡, 톡, 떨어지는 물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우산의 손잡이를 쥔 손이 보인다. 복싱 밴디지도 풀지 않은 채였다. 강석원의 한쪽 어깨가 고스란히 비를 맞는다.

“우산 옆으로 더 하셔도 됩니다.”

강석원은 응, 하고 대꾸할 뿐 우산의 방향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빗소리가 침묵을 대신했다. 

“……, 안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연다.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무슨 말을 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미안해.”

강석원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조지현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말주변도 없고, 이런 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강석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잇는다.

“내가 너한테 실수한 게 있으면, 사과할게. 그러니까…….”

그는 며칠 전의 말을 철회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실수하신 거 없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강석원은 잘못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전보다 강석원을 더 좋아하게 된 자신 때문이다. 처음으로 되돌린다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할 수 있다 여겼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만나게 된 강석원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사랑에 빠지고 만다.

“제가 지금은 상황이 좀 복잡해서……, 자꾸 신경 쓰이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일부러 찾아온 거야?”

“학교에, 오지 않으셔서…….”

강석원의 물음에 걱정했다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할머니 기일이라 시골에 내려갔다 왔어. 거긴 핸드폰이 안 터져.”

자신 때문이 아니란 사실에 일단 안심했다. 마음도 좀 어수선하고, 덧붙은 말에 조지현은 손끝을 움츠린다. 걸을 때마다 어깨가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한번 의식을 하고 나자 온몸의 세포가 곤두설 만큼 신경 쓰인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조지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조지현은 다시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강석원의 시선이 뺨에 닿는다. 다리를 어떻게 움직여 걸어야 할지도 몰라 그 차례가 머릿속에서 엉키기 시작했다.

“시합에서 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다음번 시합에서는 이기실 수…….”

조지현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강석원이 손으로 제 턱을 감싸 쥔다. 드물게 그가 몹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딴 생각 하다가, ……정신 차려 보니까 끝나 있었어.”

강석원의 목덜미가 붉다. 그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적 없었는데.”

조지현은 문득, 그가 자신보다 어린 나이임을 떠올렸다.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자신을 깨닫는다.

“다들, 놀라셨겠네요.”

강석원만큼 훌륭한 선수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관장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도핑 검사 해보자고 하더라.”

조금 불퉁한 기운이 느껴지는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시 만난 강석원이 좋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럼 도핑 검사는…….”

조지현은 웃음을 삼키며 시선을 들었다. 강석원이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본다. 몹시 아름다운 절경을 대하듯. 빈틈없이 단단한 감정이 그의 눈에 스민다. 그의 시선에 속절없이 붙들린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같다. 우산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비가 얼굴에 흩뿌려진다.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잡아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선 순간, 강석원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다. 깊은 입맞춤이었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억누른 그의 기갈이 느껴졌다. 그의 입술은 낯설면서 지극히 익숙했다. 조지현은 입술을 벌렸다. 우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 깊숙이 손을 찔러 넣고 단단히 붙든다. 조금의 틈도 없이. 지르지 못한 탄성이 강석원의 젖은 입술 위에 맴돈다. 그마저 강석원이 허겁지겁 삼켰다. 흐트러지는 숨결이 다디달았다. 처음 태어나 엄마의 젖을 빠는 아이처럼 본능적으로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입술이 맞물린 채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비에 차갑게 식은 몸에 금세 뜨거운 피가 돌았다. 등 뒤의 벽보다 강석원의 몸이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끌어안은 몸으로 흥분이 닿는다. 강석원은 아랫도리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제 흥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리고 그 순간, 조지현은 제가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강석원을 밀어낸 후였다. 강석원이 한 발, 뒤로 밀려나 있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사과하지 마.”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조지현, 나는,”

그 뒷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조지현은 그대로 강석원을 밀어내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큰길까지 달려와서 행선지도 확인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뒤늦게 달려온 강석원이 망연히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본다. 조지현은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어쩜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 걸까. 이번 것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직도 강석원의 감촉이 남아있는 듯하다. 한강을 건너고 나서야 조지현은 자신이 한참 잘못된 방향의 버스를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니 밤 12시가 넘어 있었다. 비를 쫄딱 맞은 아들을 본 어머니는 신경질적인 잔소리를 퍼부었다.

“하루 종일 집안일만 하는 엄마 생각도 좀 해.”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치울게요.”

그녀는 비에 젖은 아들보다 바닥을 더 걱정했다. 조지현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손끝으로 메마른 입술을 만져보았다. 깊게 입을 맞추어오던 남자의 숨결이 떠오른다. 허리를 거세게 끌어안던 그의 커다란 손도, 단단하게 부딪쳐 오던 그의 가슴과, 잔뜩 흥분해 닿던 아랫도리. 조지현은 허겁지겁 잠옷을 끌어내리고 성기를 쥐었다. 강석원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안는지 안다. 손에 쥐면 부서질 듯이 소중히 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몹시 탐욕스럽게 변했다. 몇 번이고 사정을 해도 그는 좀처럼 만족하는 법을 몰랐다. 입 벌려 봐. 강석원의 요구는 늘 명확하고 단순했다. 탐욕스러운 혀가 입안을 핥았다. 허락 받은 육욕은 거침없이 젖은 점막을 범했다. 커다란 손이 둔덕을 움켜쥐었다. 솟아오른 살덩이를 붙들고 용두질을 하듯 남자는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인다. 허벅지 사이를 스치는 살덩이의 감각이 불처럼 뜨겁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강석원이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느릿한 속삭임이 귓가에 닿는다. 지현아. 조지현은 그 순간 토정하고 말았다.

하아, 하아. 밭은 숨소리가 이성을 현실로 돌린다. 손바닥에 고인 희뿌연 액체를 보고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현실의 강석원으로 모자라 머릿속으로도 그를 함부로 대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미처 신경 쓰지도 못한 한기가 그제야 몸에 돌았다.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도 뼛속까지 스민 한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밤새 신열이 올랐다.

열이 40도까지 오르내렸다. 체온계를 확인한 어머니는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비를 맞고 다니면 어떡하니. 자기 몸 관리는 자기가 해야지. 고작 감기 갖고 다 큰 애가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어.”

어릴 때 밤새 열이 나도 어머니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고작 감기 갖고 뭘 그렇게 아픈 척 해. 내가 너를 낳을 때 훨씬 아팠어. 애를 낳는 고통이 어떤 건지나 알아? 그녀에게서는 그 어떤 동정도 받아낼 수 없었다. 여자는 저보다 불쌍하고, 가련하고, 어여쁜 존재를 견뎌내지 못했다.

“죄송……해요.”

목소리가 갈라져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기 약 갖다 놨으니까 먹어. 오늘 학교는 쉬고.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대단한 관용이라도 베푸는 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그 관용이 몹시 고맙기만 하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고 나갔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 컵이 시야에 들어온다. 목이 타들어갈 것처럼 기갈을 느꼈지만 물 컵까지 손을 뻗지도 못했다. 몸에 덮은 시트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몇 번 몸을 뒤척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력이 다한 느낌이었다. 도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사이로 열감이 느껴졌다. 지현아.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떨어진다. 그에게 안겨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목구멍이 들러붙은 것처럼 목이 부었다. 침도 삼킬 수 없었다. 시트에 실수라도 한 것은 아닐까 헷갈릴 만큼 식은땀을 흘렸다. 누군가 머리에 망치를 대고 두드리는 것처럼 아팠다. 열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침대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데 한참이 걸렸다. 벽을 짚고 일어서 간신히 화장실로 걸어갔다. 어머니는 결벽증이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없이 화장실 청소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결벽증은 쉽게도 무너졌다. 한 달 내내 설거지거리를 쌓아두기만 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치우려고 손을 대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어릴 때 바닥에 음식을 흘리거나 실수로 물을 엎기라도 하면 눈앞이 번쩍할 만큼 얻어맞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져 게워내고 싶지만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화장실까지 걸어가 불을 켰다. 흰색 타일이 눈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조지현은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변기를 끌어안고 고스란히 토해냈다. 먹은 것이 없어 위액만 꺽꺽거리며 게워냈다.

“지현이니?”

잠에서 깬 어머니가 소리를 들었는지 화장실로 다가왔다. 조지현은 얼른 변기 레버를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속 안 좋아서 토했어?”

그녀가 어쩐 일로 다정하게 묻는다. 그나마 몸에 품고 있던 음식물마저 뱉어내자 너무도 추웠다.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한기가 스몄다. 그래서, 잠시 그 여자의 목소리가 온기를 띤다고 착각했다.

“그렇게 아파서 어떡해. 너 내일은 학교 가야 하는데. 병결이라도 자꾸 빠지면 내신에 영향 있잖아.”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빨리 자. 그리고 혹시라도 바닥에는 토하지 마. 더러우니까.”

어머니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위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지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변기에 웩, 웩, 토해냈다. 세면대를 붙들고 일어서 입을 헹궈냈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이명이 일었다.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규칙적으로 등을 도닥이던 손의 감각이 불안을 어른다.

……보고 싶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이는 생각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학교 안 가? 너 정말 어쩌려고 그러니.”

“아니, 애가 아프다는데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학생이 학교를 가야지.”

“열이 안 떨어지잖아. 좀 냅둬.”

“냅두면 당신이 쟤 인생 책임질 거야? 쟤 좋은 대학 못가서 당신처럼 쓰레기 같은 인생 살면 어쩔 거냐고!”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드문드문 이어지던 의식 사이로 부모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뜰 때마다 시계의 시침이 각도를 달리했다.

“지현아. 눈 떠 봐.”

자신을 붙들고 흔드는 기척에 조지현은 간신히 눈을 떴다.

“아직도 몸 안 좋아?”

“……, 아까보다는 나아졌어요.”

아주 미약한 차이였지만 그렇게 말을 해야만 여자는 질문을 멈출 것이다.

“그래? 그럼 내일은 학교 갈 수 있지?”

조지현은 네, 하고 대답했다. 이틀 간 결석하고 아르바이트도 빠졌다. 강석원이 괜한 오해를 할까 미안했다. 그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빗속에 그를 버려두고 도망친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병결이라도 많이 빠지면 내신에 안 좋아. 너도 이제 고3인데 슬슬 준비해야지. 안 그래?”

슬슬 준비하라는 말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조지현은 작게 고갯짓만 했다.

“그래. 너 샤워 좀 해야겠다. 땀 많이 흘렸지?”

땀 때문에 잠옷이 눅눅했다. 하지만 아직 샤워를 할 만큼 몸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원래 감기 걸렸을 때는 땀 쭉 빼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싹 나아. 엄마 말 들어.”

여기서 다른 주장을 폈다가는 몇 배는 더 피곤해진다. 조지현은 알겠습니다, 하고 몸을 일으켰다. 먹은 게 없어 머리가 핑글 돌았지만 전처럼 토할 정도는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선배가 누구야?”

“네?”

소름이 쭈뼛 돋았다.

“자는데 네가 선배님을 찾아서. 너 요즘 여자 만나고 다니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악몽 꿨나 봐요.”

“그래. 연애는 나중에 대학 가서도 충분히 해. 괜히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우리 아들, 이렇게 예쁜데 이상한 불여시 같은 애가 채갈까 엄마는 걱정되네.”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여자는 밝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조지현은 방을 나섰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로 몸을 닦는데도 욕실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쭈그려 앉아 머리를 감아야 했다. 계속 강석원을 생각했다. 만나지 말자고 다짐해도 그와 마주치게 된다. 정해진 길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처럼. 아니, 분명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 당장 내일 학교에 가서 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조차 까마득하다.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조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샤워까지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여는 순간, 조지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책상의 서랍이 모두 빠져 있고 물건들이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채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기어오른다.

“지현아.”

어머니가 뒤에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엄마랑 얘기 좀 하자.”

“무슨…….”

고개를 돌리자마자 손바닥이 날아든다. 서 있는 것도 고작이었던 터라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가.”

어머니가 손에 든 돈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동안 받았던 학원비였다. 고스란히 모아 책상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너 이 돈 뭐야. 어?”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들을 만큼 여자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의 몸을 사정없이 짓밟으며 소리 질렀다. 죽여 버려도 시원찮을 새끼.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악마 같은 새끼, 지 어미 보지 찢고 나온 주제에 은혜도 모르는 새끼. 끔찍한 욕들이 퍼부어졌다. 코피가 흐르고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배를 몇 번이나 걷어차여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웅크려 최대한 머리를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소란을 들은 아버지가 달려왔지만 그녀를 제대로 막지는 못했다.

“지금 아픈 애한테 뭐하는 거야?”

“아프면, 아프면 엄마 속여도 돼? 얘 지금 이 돈이 왜 서랍에서 나와? 너 밖에서 뭐하고 다니는 거야? 야! 대답해!”

“좀 참아. 동네 창피하지도 않아?”

“창피할 게 뭐 있어. 아들이 엄마를 속이는데, 내가 어떻게 이걸 참아!”

발악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시퍼런 부엌칼을 보는 순간, 끔찍한 장면들이 머리를 스쳤다.

“죽여 버릴 거야. 거짓말만 하는 네 혓바닥을 잘라버릴 거라고!”

여자가 달려들었다. 엉겁결에 날아드는 칼을 손으로 막았다. 손바닥에 뜨끈한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바닥을 적신다. 아버지가 뒤에서 제 아내를 끌어안고 막았지만 그녀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짐승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조지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엉망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여 버릴 거라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순간, 현관까지 따라 나온 여자가 칼을 휘둘렀다. 간발의 차로 문이 닫혔다. 어머니가 자신을 쫓아와 칼을 꽂아 넣을 것만 같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참을 달리다 자신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두 쪽 모두 맨발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가볍게 걸치고 나온 옷을 밤바람이 파고들었다. 공포에 밀려있던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갈 곳도 없다. 누군가에게 기댈 수조차 없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조지현의 눈에 공중전화 박스가 들어왔다. 홀린 듯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맨발에 돌이 스쳐 발바닥이 따끔했다.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 쭈그려 앉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어떻게 하지. 열 때문에 눈앞이 흐렸다. 조지현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면서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경찰서로 가게 된다. 그러면 분명 집으로 연락이 닿고, ……. 사라질까.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 누구의 소식도 닿지 않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까. 신원 확인이 되지 않는 미성년자를 써줄 일자리가 있을까. 아니, 있다 하더라도 당장 기차역으로 갈 버스비조차 없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빗물이 부스 안으로 쳐들어왔다. 조지현은 몸을 옹송그린 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나약함을 짓밟고 솔직한 이기심이 고개를 든다. 강석원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보고 싶다. 그 밤에 전화 한 통에 달려와 준 그 남자가, 그의 목소리가, 그의 손이, 모든 게 그립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더 이상 그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면, 강석원의 인생에서 자신은 상처로 남지 않을 수 있다. 한 발만 더 나가면 그때는…….

“조지현?”

처음엔 자신이 미친 거라 여겼다. 환영이나 환청이 드문 것이 아니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듯이 그리워서, 제 망가진 정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라 여겼다.

강석원이 우산을 내던지고 달려온다. 조지현은 숨을 삼키며 몸을 뒤로 젖혔다.

“누가 이랬어. 얼마나 다쳤어.”

피투성이가 되어 부들부들 떠는 소년을 본 순간, 이성을 잃은 남자가 소리친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했어요.”

“뭐?”

“전화, 안 했어요. 전화 안 걸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병원부터 가자.”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으려 손을 뻗었다. 조지현이 발작적으로 몸을 피하며 소리 질렀다.

“왜 오셨습니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난 부른 적 없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요.”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강석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조지현을 살피려 했지만 그럴수록 조지현은 격렬하게 반항했다. 피 묻은 손으로 조지현이 강석원을 밀어낸다. 어린아이보다 미약한 힘으로, 가여울 만큼 필사적으로.

“조지현, 병원 가자. 내가 데려가줄게.”

“안 돼. 싫어, ……선배님, ……제발.”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던 조지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강석원의 표정이 더럭 굳는다. 목을 졸린 사람처럼 조지현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진다. 강석원이 조지현, 조지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지만 반응이 없다.

“지현아!”

애 닳는 듯한 그 부름에, 조지현은 눈을 부릅뜬다. 악몽에서 깬 어린 아이처럼 조지현의 눈빛이 일시에 나약해진다. 눈물이 깊은 눈에 가득 고인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말하며 강석원은 자신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준다.

미칠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쥐어짜서 강석원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도 모자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느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조지현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이번 한 번만,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 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제발.”

지금이라도 강석원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강석원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것이 곧 그의 미래가 될 것 같아 두려워졌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놓아준다. 온기가 멀어진다.

“못 해.”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린다. 

“어떻게 너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

그 무엇으로도 흠집 내지 못할 듯이 사납고 단단해 보이는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연약한 부분을 드러낸다. 그 엄청난 간극에 숨이 막힌다.

“너를 어떻게 여기에 두고 가. 내가 어떻게 너를…….”

강석원이 주먹을 힘껏 쥔다. 북받치는 감정을 그대로 쥐어 바스라트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주먹을 쥔 채로 느리게 숨을 몰아쉰다.

“나 다시는 안 봐도 돼. 다시는 안 만나줘도 좋으니까,”

도와줄게.

나직이 속삭이는 그 혼잣말에 남자의 오롯한 진심이 실려 있다.

지현아. 이리 와.

강석원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제 마음을 고백했다. 간신히 지탱하던 마음의 둑이 무너진다. 그에게 저항하는 방법 따윈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 결국 강석원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비가 어둠을 세차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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