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장
“오늘도 저희 항공과 즐거운 여행 되셨기를 바랍니다. 가시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기내방송이 시작되자 승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전벨트 불이 채 꺼지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보였다.
조지현은 숨을 삼키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이륙하기 직전 꿨던 악몽이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삼키지 못한 음식물이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도와드릴까요?”
단정한 외모의 승무원이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그녀는 퍼스트와 비즈니스석의 승객부터 차례대로 안내를 돕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조지현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행기와 연결된 브릿지로 들어선 순간, 특유의 큼큼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짐은 미리 뉴욕에서 보내놓은 터라 찾을 것도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조지현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비행기가 좀 연착이 되었습니다.”
“미리 연락 받았습니다. 차 대기시켜두었습니다.”
조지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남자를 따라 걸었다. 피곤했다. 오랜 비행시간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권태감을 안겼다. 차의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한강을 건널 무렵에야 조지현은 눈을 떴다. 비정상적으로 큰 달이 건물 뒤에 걸렸다. 아름답다는 느낌보다 기괴하다는 느낌이 먼저였다.
“신문 보셨습니까?”
운전석에서 들린 목소리에 조지현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네?”
“몇 주 뒤에 지구 근처로 커다란 소행성이 다가온답니다. 뉴욕 절반만하다고 하던데요.”
지상 최대의 우주 쇼니, 엄청난 유성우니 했던 뉴스가 떠올랐다.
“그런가요.”
“그렇게 큰 소행성이 부딪치면 지구는 멸망하는 걸까요?”
“그러게요.”
맥없는 맞장구가 이어졌다.
“하하하. 다음 달에 적금 만기인데 그렇게 되면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돈이라도 다 쓰고 죽는다면 모를까.”
지구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무게 없이 떠들어대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몇 마디 더 떠들던 사내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고급 주상복합 건물 주차장으로 차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면서도 두통은 계속되었다.
“말씀하신 대로 모두 준비해두었습니다.”
현관문을 열면서 사내가 몹시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혼자 지내기에 과분할 만큼 고급스러운 아파트였다.
“혹시 부족하신 게 있으시면…….”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고 사라졌다. 조지현은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던졌다.
욕실로 직행했다. 연착 때문에 비행기에서만 근 스무 시간을 앉아 있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욕구도 일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은 후, 그는 샤워 부스로 걸어 들어갔다.
“네. 잘 도착했어요.”
핸드폰을 어깨에 대고 건성건성 대답했다.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생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끊습니다.”
통화를 마무리하고 조지현은 소파에 앉았다. 샤워로 피로를 녹이고 나자 다른 욕구가 일었다.
“하아. …….”
난기류 때문에 비행기에서 준 기내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꼬박 하루를 굶은 것과 다름없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가 음식점을 찾는 것도 일이다. 오늘 이사 왔으니 근처의 배달 음식점도 알 리 없다.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으로 피자 가게를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주소를 불러주고 대충 주문을 한 뒤,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벨 소리가 울렸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인터폰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로비입니다. 4802호 배달 왔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올려 보내주세요.”
고급 아파트라더니 로비에서부터 확인을 하는 모양이었다. 안전하다는 생각보다는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한 번 더 상대를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문을 열었다. 크다. 그게 배달부에게 처음 받은 인상이었다.
“거기 놔주세요.”
바닥을 가리켰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급히 귀국하느라 아직 현금을 찾아놓은 게 없었다.
“카드 되나요?”
대답 대신 배달부는 카드 리더기를 내밀었다. 카드 결제가 진행되는 동안 조지현은 피자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피자를 썩 좋아하진 않는다. 가장 먼저 피자가 떠올랐을 뿐이다.
결제를 마친 배달부가 카드를 내밀었다. 조지현은 참 과묵한 배달부구나, 하고 생각하며 카드를 받아들었다. 배달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맛있게 드세요, 라든가 하는 흔한 멘트도 없었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조지현의 시야에 배달부의 손목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손목에 새겨진 글귀였다.
Dear.
그다음에 이어지는 글자는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조지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문이 닫혔다.
기억 저편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