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응, 인한아. 도착했어?”
- 응. 바로 앞에 검은색 SUV.
유호는 곧바로 회사 앞에 세워진 검은색 SUV를 발견하고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이 차 뭐야? 렌트했어? 그냥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아. 그게…….”
“설마.”
“제 차예요.”
유호는 잠시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얘가 원래 이렇게 씀씀이가 컸었나. 앞으로 이 소비요정을 어떻게 자제시켜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 수한이 통장 관리를 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나 싶었다.
“인한아. 차라리 열심히 모아서 건물을 사자. 응?”
“왜요? 형 건물 갖고 싶어?”
그렇게 묻는 인한의 얼굴이 갖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서든 사 줄 기세라 유호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뭐 갖고 싶어요? 말해 봐.”
“나는 그냥, 너만 있으면 돼.”
유호는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하긴, 돈 잘 버는 애가 저를 위해 과소비 좀 하겠다는데 어쩌겠어. 이러다 인한이 빈털터리가 된다고 해도 자신이 먹여 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인한은 유호의 대답에 감동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왼손을 끌어와 깍지를 껴 잡았다. 유호는 괜히 민망해 말을 돌렸다.
“이거 타고 어디까지 가려고?”
“갈 수 있는 데는 다 가야지.”
“사진 또 엄청나게 찍히겠네.”
“사람 많이 없는 데로 열심히 찾아볼게요.”
“찍혀도 뭐, 상관은 없는데…….”
유호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전과 달라진 그의 유연한 태도에 인한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들어 유호의 손등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유호는 좋으면서도 혹시 몰라 인한에게 주의를 줬다.
“대신 밖에서 스킨십 하는 건…….”
“조심할게요.”
“차 안에서도야. 방심하다가 큰일난다고.”
“알겠어. 우리 집에서만 할게요. 아. 호텔에서도.”
인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잡은 손은 풀지 않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유호도 굳이 손을 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20분이면 도착하지?”
“응. 23분 후 도착이라고 나와.”
“엄마한테 미리 말해 둬야겠다.”
유호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두 사람의 저녁 식사 장소는 다름 아닌 유호의 본집이었다. 명목상은 유호가 드라마 촬영을 끝낸 기념이었지만 정확히는 부모님께 남자친구를 소개하러 가는 자리였다. 인한은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모양인지 이따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호는 손가락을 대 그 행동을 만류했지만 초조한 건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유호의 본집에 도착한 인한은 곧바로 유호의 부모님께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그전까지는 유호의 친한 동생 정도로 그의 가족을 마주했지만, 오늘부터는 입장이 달랐다. 그런 이유로 굳이 됐다는 데도 양손까지 무겁게 온 참이었다.
“그래. 인한이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작년 콘서트 때 뵙고 처음 뵙네요.”
“아유, 인한아.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니깐.”
유호의 아빠는 인자한 얼굴로 인한을 반겨 줬고 유호의 엄마는 놀란 얼굴로 인한의 짐을 받아들었다. 인한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제가 드리고 싶어서요.”
인한은 나머지 선물도 아버지께 건네드린 후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유호는 이미 거실로 입성해 부모님께 잊혀지고 있는 중이었다. 유호는 알아서 들고 있던 짐을 거실 한쪽에 내려놓았다.
“뭐야, 인한이도 왔어?”
집이 소란스러워지자 유현도 방에서 나와 인한에게 말을 걸었다. 인한은 반가워하며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누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유호와 쌍둥이처럼 똑 닮은 얼굴에 인한의 마음이 절로 무장해제 됐다. 언제가 두 사람의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 동시에 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기에,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했다.
“여민이는? 여민이는 안 데리고 왔어?”
“아…… 저 혼자 왔는데.”
“데리고 왔겠어? 누나가 있는데?”
“우씨.”
유호의 냉정한 반응에 유현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볼일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식탁으로 향했다.
“근데 누나.”
“왜?”
“우리 인한이한테는 왜 관심이 없어?”
유호는 은근히 기분 나빠 유현에게 물었다. 물론 관심을 두는 것도 기분이 더러울 거 같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불청객 취급하는 건 더 열 받았다. 아니, 우리 애가 어디 가서 누구한테 무시당하고 그런 애가 아닌데. 스쳐 지나가다가도 꼭 한 번씩 돌아보는 얼굴과 몸을 가진 그런 아이인데, 얘가. 당장에 따져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어우. 인한이는 너무 어릴 때 봤잖아. 무려 만 15세 때.”
“여민이랑 인한이랑 한 살 차이거든?”
“한 살 차이가 얼마나 큰데. 하늘과 땅 차이라고. 그렇지, 인한아?”
“네. 그렇죠.”
인한은 유현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두 살 연상을 사귀면서 그런 얘기가 하고 싶니. 유호는 자신 대신 유현의 편을 드는 인한을 눈으로 욕해 보았지만, 인한은 이리저리 분위기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그의 모습에 유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니면, 인한아. 네가 누나랑 결혼할래?”
“아뇨.”
“그니까 다음에는 여민이 데리고 와.”
“넵. 끌고라도 올게요.”
인한은 순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호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봤다. 그래. 여민이를 팔아서라도 그렇게 철벽 방어를 하는 거야. 죄 없는 여민의 고통만 커질 예정이었다.
“엄마. 나 다음에는 누나 없을 때 올래.”
“그래. 내가 미리 내보낼게.”
늘상 있는 유호의 투정에 엄마는 영혼 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 식구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다들 얼른 와. 밥 먹자.”
“네.”
인한은 야무지게 대답하고 제일 먼저 식탁으로 향했다.
“와. 이게 다 뭐야?”
유호는 식탁을 빼곡히 채운 음식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등갈비에 잡채, 전복 조림에 이어 씨암탉으로 만든 삼계탕까지. 평소대로라면 식사 때마다 하나씩 나와야 할 메인 메뉴들이 동시에 모여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유현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누가 보면 잔치라도 하는 줄 알겠어. 요리를 몇 개나 한 거야?”
“오늘 인한이 온대서.”
“인한이가 엄마 사위야? 나중에 여민이 올 때나 이렇게 하라고.”
사위. 인한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힘주어 내렸다.
엄마는 의아해하는 가족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한에게 국그릇을 건네주며 말했다. 정확히는 인삼과 씨암탉의 다리가 든 그릇이었다.
“인한아. 많이 먹어.”
“네.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인한은 넉살을 부리며 태연하게 그릇을 받아 들었다. 닭 다리가 두 개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치를 보기는 했으나 얼른 먹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안심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나머지 닭 다리 하나는 유현에게로 돌아갔다.
“엄마. 아무리 선유호가 내놓은 아들이라지만 남의 집 아들만 계속 챙기는 건 그렇지 않아?”
한창 식사가 이어지는 도중 유현은 식탁에서 이루지는 기이한 현상을 눈치채고 한 번 더 엄마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어느새 온갖 반찬 접시가 인한의 밥그릇 근처로 옮겨 가 있었다.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유호는 오히려 만족하며 자신 앞에 놓인 반찬을 집어 인한의 밥 위로 올려놓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아빠는 그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 막둥이가 누구 챙길 줄도 알고 다 컸네.”
“아빠. 나 우리 팀에서 형 라인이야. 동생이 셋이나 된다고.”
“그래. 장하다, 우리 아들.”
유호의 아빠는 칭찬을 이어 나가며 유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인한의 시선이 한참 동안 그 손끝에 머물렀다. 인한은 부모님의 이혼 후 10년이 넘게 아빠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얘기해 본 건 돈이 급하다고 도와달라던 2년 전의 통화가 전부였다.
“인한이가 왜 남의 아들이야? 우리 아들 하기로 한 지 꽤 됐는데. 그렇지, 인한아?”
엄마는 곧바로 유현의 말을 부정하며 인한에게 동의를 구했다. 인한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처음 뵀을 때 그러셨어요.”
“그래. 한번 아들이면 계속 아들이지. 우리 인한이, 많이 먹어.”
“네.”
인한은 어머니의 기대에 힘입어 평소보다 더 야무지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유호가 좋아할 만한 반찬을 골라 다시 유호 쪽으로 슬쩍 밀어 주었다. 유현은 그런 두 사람의 염병 천병을 썩은 얼굴로 쳐다봤다. 두 사람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밥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돼.”
“진짜요?”
“응. 유호 없이도 혼자 와. 뭐든 해 줄게.”
“네. 꼭 그럴게요.”
자상한 어머니의 말에 인한의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가족과 밥을 먹었던 기억이 이제는 너무 오래돼 희미하게 남겨져 있었다.
인한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한때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워 냈다. 이제 더는 과거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더 행복하니까.
“인한이는 여전히 의젓하네. 집에서도 팀에서도 막낸데.”
“아.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칭찬에 인한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의젓한, 애어른. 그런 수식어를 갖는 사람들은 보통 남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인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쩌면 처음 유호를 보고 내내 시선을 떼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이런 가족의 틈바구니에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을, 계속해서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했는지도 몰랐다.
“아냐. 얘 평소에 되게 애같이 굴어.”
“진짜?”
“응. 형들 말도 잘 안 듣고 아주 힘으로 이겨 먹는다니까. 그래서 별명도 막나니잖아.”
“형…….”
“인한이도 아직 애기구나.”
“응. 애기지. 그러니까 내가 돌봐 줘야 돼.”
유호의 말에 인한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팬들한테나 당해 본 아이 취급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싫은가 하면 오히려 반대였다. 울컥해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래. 그렇게 서로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그래. 그런 사람이 있는 것만 해도 되게 의미 있는 삶인 거야.”
다정하게 전해진 아버지의 말에는 여러 가지 속뜻이 담겨 있었다. 유호는 금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한 역시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당차게 대답했다.
“네. 저도 형 잘 챙길게요.”
“뭐야. 이 훈훈한 분위기는. 지금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유현은 거듭 이어지는 따스한 대화에 불편함을 느끼고 의문을 표했다.
“응. 누나만 이상한 거야.”
유호는 홀로 아무것도 모르는 유현을 나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인한은 연이어 발발하는 남매 싸움을 보면서도 즐거워하며 웃었다. 역시 혼자인 것보다는 다 같이인 게 시끌벅적해 좋았다. 그렇게 계속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벌써 이루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