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이거, 회사 경비 처리 된 거야?”
유효의 질문에 인한은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을 테지. 유호는 옅은 한숨을 쉬고 인한을 향해 몸을 돌려 말했다.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안 그래도 형한테 직접 고르게 하려다가, 그러면 못 사게 할 거 같아서.”
당연하지. 가구인데. 게다가 딱 봐도 비싸 보이고. 유호는 선물치고는 과하다는 생각에 한소리를 하려다가 그새 기가 죽은 인한의 얼굴을 확인하고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고마워. 바쁜데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네.”
유호의 대답에 인한은 기뻐하며 웃었다. 유호는 인한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래도 다음에는 같이 상의하고 결정하자. 이제 정산 바로 받는다고 돈 너무 막 쓰지 말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그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한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수긍했다. 다시 밝은 기운을 뿜어 대며 눈을 반짝이는 인한의 모습에 유호는 저항 없이 웃음을 흘렸다. 뭐든지 해 주고 싶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라 더 나무랄 수 없었다.
“그럼 오늘부터 나는, 이 방에서 지내면 되는 거지?”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유호는 장난스럽게 인한에게 물었으나 인한은 바로 정색하며 반응했다. 유호는 계속해서 농담을 이어 나갔다.
“왜? 그러라고 이렇게 열심히 꾸며 놓은 거 아니야?”
“그냥 관상용이지. 불청객들의 눈을 돌리기 위한.”
“너무 사용감이 없어도 좀 그렇잖아.”
“그걸 누가 알아본다고.”
유호의 예상대로 인한은 방을 따로 쓸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가 굳이 이 작은방을 이용해야 한다면 그 용도는 단 한 가지뿐일 것이다.
“아니면, 우리 오늘 여기서 같이 잘까요?”
“어?”
인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맞붙였다. 유호는 결국 제 무덤을 알아서 팠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했다.
“침대가 이렇게나 작은데?”
“혹시 숙소가 그리울까 봐 일부러 작은 거로 산 건데? 어제처럼 좁게 붙어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너 내일도 새벽에 나가야 하잖아.”
“우리 오늘, 첫날밤이잖아요.”
뭔가 단어가 많이 생략된 거 같은데. 유호는 진심으로 인한의 체력이 걱정됐지만 인한은 상관없다는 듯 계속해서 그를 침대로 몰아붙였다.
그래. 시작이 반이라잖아. 마지막만큼 시작도 중요하지. 유호는 순순히 인정하며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새 인한은 천천히 얼굴을 내려 다가왔고 유호는 고개를 든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인한은 유호의 입술이 아닌 귓가로 얼굴을 옮겨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난이에요. 얼른 씻고 와요.”
“어?”
“짐 정리는 내가 할게요. 피곤할 텐데 이제 자야지.”
인한은 그대로 유호의 등을 떠밀며 방 밖으로 내보냈다. 유호는 얼떨결에 방에서 내쫓겨 별수 없이 욕실로 향했다. 아니, 첫날밤이라며. 아쉬움은 혼자만의 몫인 듯했다.
“마지막 촬영은 어땠어요?”
인한은 침대에 누워 대본을 읽다 말고 유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잘 준비를 모두 마친 유호는 침대로 향하며 대답했다.
“잘 끝냈어. 아역 배우들 너무 연기 잘해서 계속 감탄만 하다 끝난 거 같아.”
“왜? 형도 곧잘 하잖아.”
“곧잘 하면 안 되지. 진짜 잘해야지.”
“그럼, 선찬이 형이랑은 이제 당분간 볼 일 없나?”
인한은 돌고 돌아 진짜로 묻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유호는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눈을 번뜩이며 인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계속 안 봤으면 좋겠어?”
“아니, 뭐…….”
인한은 부정하면서도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유호는 장난기가 발동해 바로 핸드폰 사진 앱을 켜 인한에게 들이밀었다.
“이거 봐. 오늘 막촬 기념으로 같이 사진 찍었어.”
“굳이?”
“왜? 우리 이제 절친인데?”
유호의 말에 인한은 표정을 굳히며 눈을 흘겼다. 이러다 진짜 삐칠 기세에 유호는 그대로 얼굴을 내려 인한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흘리며 놀리듯 말했다.
“질투하네, 정인한.”
“그럼, 안 해요?”
“나도 맨날 하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던데.”
인한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며 유호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유호는 과거의 일까지 끌어다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너 키스신 하는 거, 진짜 못 보겠더라.”
“…….”
“나 너 스캔들 날 때마다 엄청 속상해했던 거 알지?”
“항복.”
효과는 만점이었다. 반대로 인한은 쩔쩔매며 유호의 뺨을 매만졌다.
“보지 말아요, 그런 거. 어차피 다 가짜인데.”
“그럼 뭐가 진짜인데?”
“진짜는 여기 있잖아요. 형 앞에.”
인한은 유호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얘기했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드라마에서 못하는 것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말하며 인한은 한 번 더 유호의 입술에 입을 쪽쪽 맞췄다. 유호는 몸을 움츠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중간에 컷 해도 소용이 없고?”
“당연하죠. 우리한테 NG는 필요 없어요.”
“인한아.”
“응?”
“옷 벗겨도 돼?”
“……어?”
“아니, 시작도 당연히 중요한 거니까.”
유호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쭈뼛쭈뼛 말을 이었다. 인한은 하,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유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저 내일 촬영 늦으면 형이 책임져요.”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맞붙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책임지지. 유호는 알 수 없었으나 이어지는 상황에 순응하기로 했다. 이제 와 후퇴를 하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
세븐스팟의 다음 앨범 발매일은 6월 초로 결정됐다. 6곡 이내의 9집 미니 앨범을 발매하기로 정해졌고 타이틀 곡 선택권은 전적으로 멤버들의 결정을 따르기로 합의했다.
유호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운성과 비조는 곡을 하나씩 선물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테일러는 타이틀곡을 따내기 위해 작업실에 틀어박혀 퇴근 없는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일러 형. 집에는 대체 언제 갔어요?”
유호는 그새 살이 더 빠진 것 같은 테일러를 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몰라. 한 2주 됐나.”
“밥은 잘 챙겨 먹어요?”
“배고프면?”
“……이따 에너지 바라도 사다 드릴게요.”
“그러던가.”
테일러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대체로 식욕이 없는 테일러가 허기지면 밥을 먹는다는 얘기는 하루도 한 끼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컴백이고 뭐고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
“형.”
“응.”
“맨날 그렇게 작업실에 있으면, 데이트는 언제 해요?”
“데이트를 왜 해?”
유호는 진심으로 궁금해 물었으나 테일러에게서는 뜻 모를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설마. 혹시 근래에 안 좋은 일이라도 겪었나 염려도 됐다.
“혹시 실연이라도…….”
“당했을 리가.”
유호는 테일러의 싸늘한 눈빛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순간 도명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여겼으나 이상한 사람끼리 잘 만났으니 해결도 알아서 잘할 거라고 결론을 냈다.
도명 - [이따 꼭 저녁 먹으러 와요 안 오면 잡으러 갈 테니까]
하지만 유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테일러가 집에 안 간 지가 2주가 넘은 것이지, 도명의 집에 안 간 지 2주가 넘은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멜로디 라인 어떤 거 같아?”
“너무 좋은데요? 귀에 딱 들어와요.”
“그래도 임팩트가 좀 부족한 거 같지 않아? 악기를 좀 더 추가할까?”
“확실히 강하게 확 때려 박는 게 있으면 더 좋을 거 같긴 한데, 지금처럼 깔끔한 것도 나쁘지 않아요.”
“아. 그냥 컨셉부터 잡고 다시 쓸까? 한국풍이나 괴도, 뱀파이어, 늑대인간…… 뭐 그런 거로?”
테일러는 머리를 부여잡고 유호에게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유호는 보컬 가이드 녹음을 해 주러 왔다가 의도치 않은 피드백을 연달아서 하는 중이었다. 자주 있던 일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그거 다 합해서 한국풍으로 구미호나 저승사자 컨셉은 어때요?”
“오. 괜찮은데?”
“인한이 한복 입고 춤추면, 진짜 멋있을 거 같은데.”
유호는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다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인한이가 한복이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지.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무대 위를 날아다닐 인한의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테일러는 그 모습을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바로 불만을 드러냈다.
“누가 앨범 컨셉으로 네 사심 채우래.”
“무슨 소리예요? 열혈 팬의 입장으로 얘기한 건데.”
“너무 정인한 개인 팬의 마음이잖아.”
“에이. 저 올팬이에요. 인한이가 최애일 뿐.”
뻔뻔하게 이어지는 유호의 대답에 테일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유호는 지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형은 머리 기르는 거 어때요? 형 원래 데뷔 초부터 왕의 남자 같다고…….”
“싫어.”
테일러는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을 더 사납게 뜨며 유호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유호는 이번에도 지지 않고 꿍얼거리며 할 말을 다 했다.
“원스팟도 좋아할 텐데.”
테일러가 팬한테 얼마나 약한지 알고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유호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었다. 테일러는 곤경에 빠지더라도 혼자 당할 인간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약 한 달 뒤 자신의 의상 컨셉이 장발의 꼬마 여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야 오늘의 대화를 후회하게 될 예정이었다.
“곡 작업은 한번 해 볼게. 컨셉만 좋고 곡이 별로면 또 안 되니까.”
“네. 기대할게요.”
“이 곡 가이드나 빨리 녹음해 주고 가. 너 저녁 약속 있다며.”
“넹.”
유호는 테일러의 성화에 바로 보컬 파트 가이드 녹음을 시작했다. 아직 가사가 나오지 않은 탓에 외계어로 흥얼거려야 했지만 매번 해 왔던 일이라 한두 번 만에 끝이 났다. 유호는 슬슬 가야 할 시간임을 깨닫고 작업실을 나서려고 했다.
“근데, 유호 너는 이제 곡 안 써?”
“아. 제가 쓰는 곡은 다 잔잔해서.”
“그럼 보컬끼리만 따로 작업해. 그래도 되잖아.”
“아. 그래도 돼요?”
“그런 앨범도 많잖아. 래퍼 라인이랑 따로 한 곡씩 하면 되겠네.”
“그럼, 한번 해 볼게요.”
유호는 테일러의 제안에 솔깃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까지는 임원진이 반대할 게 뻔해 시도도 못 해 본 일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가능할 것도 같았다. 유호는 생각만으로도 신이 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건물 밖으로 향했다. 그새 인한에게서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