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이렇게 비좁은 침대에서 붙어 자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비좁은 걸 알긴 알았구나. 유호가 새삼 깨달을 새도 없이 인한은 유호를 안은 채로 몸을 반 바퀴 굴렸다. 덕분에 유호는 인한의 가슴팍에 얼굴이 짜부라진 채로 반대편 자리로 옮겨졌다.
“나, 이거 진짜 싫어.”
결국 강제 이동을 당한 유호가 뚱한 표정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인한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끅끅대며 웃기 바빴다.
가끔 보면 인한은 이렇게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걸 꽤 즐기는 것 같았다. 유호는 언젠가 그에게 되갚아 주리라고 생각했다.
“형한테 좋은 냄새 난다.”
“너한테도 똑같은 냄새 나는데.”
인한은 기분이 좋은지 유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푸스스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단단한 근육에 사로잡힌 유호는 답답함을 느꼈으나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안겨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유호 형.”
“응?”
“남들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말아요.”
인한은 유호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 말은 과거에도 인한이 유호에게 당부했던 말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형한테 뭐라고 하는 인간들, 나는 내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게 친구든, 가족이든, 그 누구든.”
인한은 줄곧 유호에게 말했었다. 자신이 하는 말에만 귀 기울여 달라고. 언제든 다정한 말로 안심시켜 주겠다고. 그렇게 늘 유호를 위로했었다.
“형은 그냥, 나만 믿고 의지하면 돼. 응?”
“언제까지?”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유호는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인한은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전과 똑같은 대답을 연이어 들려주었다.
“언제까지고.”
인한은 한결같이 굳은 의지를 담아서 유호에게 영원을 약속하고 있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유호는 그 말이 허무맹랑하고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응. 안 그럴게.”
유호는 단숨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한에게 대답했다. 지금은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할 수 있었다.
유호는 이제 알았다. 계속해서 인한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만 보고 너만 믿을게.”
그래서 유호는 아무렇지 않게 인한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었다.
“응. 나도 그럴게요.”
인한이 이렇게 곧바로 화답해 줄 걸 알아서. 자신을 끌어안는 인한의 행동에 기쁜 마음으로 응해 줄 수 있었다.
유호는 곧바로 손을 뻗어 인한을 마주 안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인한에게까지 전해질까 걱정됐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괜찮게 여겨졌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생각해 보니까, 침대가 좁은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는 거 같아.”
“응?”
유호는 인한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적어도 못 들은 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위험신호 정도는 감지했다.
역시나 인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호 쪽으로 몸을 더 밀착하며 사이를 좁혀 왔다. 유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다가 끝내 벽에 등이 닿아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인한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형이 도망갈 데가 없잖아.”
“그건 너한테만 좋은 거 아니야?”
“그럴 리가.”
귀를 은근하게 매만지며 점점 얼굴을 맞붙여 오는 인한의 행동에 유호는 속으로 당황했다. 어째, 이런 쪽으로만 더 능글맞아지는 것 같아 걱정됐다. 문제는 유호도 덩달아 동화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럼 해 봐.”
“어?”
“어디 한번 기분 좋게 해 보라고.”
예상 못 한 유호의 도발에 인한은 당황하기보다는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고 유호의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인한은 천천히 유호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유호는 잠든 여민의 숨소리를 의식하면서도 인한의 행동을 만류하지는 않았다.
유호가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있자 인한은 한 번 더 입을 맞붙이고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유호는 알아서 입을 벌리고 이어지는 키스에 협조적으로 굴었다.
정작 인한은 소리가 날까 걱정됐는지 감질 나게 움직이다 금세 뒤로 물러났다. 아쉬운지 유호의 고개가 절로 인한의 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왜 그러지?”
“뭐가?”
“오늘은 왜 이렇게 예쁘게 굴지? 설레게.”
“마지막 날이잖아.”
유호는 괜히 쑥스러워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인한은 순간 유호가 예쁜 것과 숙소에서의 마지막 날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고민해야 했다. 그런 인한의 생각을 알아채고 유호는 금세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마지막 기억이 좋아야 전부가 좋게 느껴지는 거잖아. 나뿐 아니라 너도 그랬으면 해서.”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유호의 대답에 인한은 생각이 많아졌다. 유호가 처음 이 숙소에 들어오고 지난 6년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서로를 원하고 원망하고 사랑하고 상처 주고 눈물에 겨울 만큼 기쁘게도 아프게도 했었다. 돌이켜 보니 참 감회가 새로웠다.
인한이 떠날 때의 마지막은 불행하고도 나빴으나 이렇게 다시 돌아와 함께 해피엔딩을 맞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인한은 어느새 울컥해 낮게 잠긴 목소리로 유호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랑 함께 보내는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은 어떤 거 같은데요?”
“행복해.”
옅은 미소와 함께 돌아온 유호의 대답에 인한은 가슴이 벅차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얼굴로 유호의 말에 화답했다.
“나도 그래요.”
유호 역시 인한의 말을 듣고 콧잔등이 시큰해질 만큼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울지 않기 위해 괜한 농담을 던졌다.
“너무 그리워서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면 어쩌지?”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며 인한은 유호의 얼굴로 손을 뻗어 자신을 보게 했다. 그리고 강한 확신을 담아 제 뜻을 전했다.
“내가 우리 집에서 훨씬 더 행복하게 해 줄게.”
인한의 그 말은 마치 다짐과도 같았다. 약속이었고 맹세였다.
유호는 그 말을 인한은 꼭 지켜 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응.”
유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자신이 훨씬 더 그를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인한은 유호의 대답에 만족하며 한 번 더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러다 못 참겠는지 이불을 살짝 들추어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유호는 인한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아 행동을 만류했다.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적당히 해.”
“아, 넵.”
인한은 순순히 이불을 놓고 다시 유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펼쳐질 성스럽고 활기찬 동거 생활을 위해 딱 하루만 더 참아 보기로 했다.
고단했는지 인한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유호는 인한의 숨소리가 일정해지자 몸을 뒤로 물려 인한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다음 고개를 들어 인한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이 시간만이 유호가 인한을 오롯이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좋아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나마 쏟아 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좋아해.”
그래서 유호는 수없이 내버려졌던 그 진심을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좋아해. 인한아.”
인한이 잠든 걸 알면서도 속으로 수없이 삭여야 했던 고백을 유호는 이제 시선 대신 말로 전할 수 있게 됐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유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한의 품속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그렇게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이었다.
유호는 인한의 집으로 옮길 짐을 현관 앞에 모두 챙겨 놓고 멤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가지 마, 효 형. 이대로 나만 두고 갈 수는 없어.”
여민은 여전히 아쉬운지 현관을 나서려는 유호를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게 진심으로 서운한 눈치였다. 영영 이별하는 게 아닌데도 헤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덩달아 유호도 울컥했다.
유호는 여민의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가끔 여민이 보러 올게.”
“잠도 자고 갈 거야?”
“응. 잠도 자고 갈게.”
“가끔 아니고 자주 와야 돼요, 형. 내가 침대도 더 큰 거로 바꿔 놓을게.”
“그래. 알겠어, 여민아.”
유호는 계속해서 여민을 달래 주며 눈물겨운 작별을 이어 나갔다. 결국엔 보다 못한 라울리가 딴지를 걸어 왔다.
“아니, 차로 5분이면 갈 거리로 이사하는데 뭐 이렇게 생난리들이야.”
“너처럼 사랑을 모르는 애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여민은 바로 날을 세우며 라울리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라울리는 어이없어하며 여민의 말을 손쉽게 받아쳤다.
“내가 너보다 사랑을 모를까.”
“아앗.”
연애 면에서는 라울리가 한참을 앞서는지라 여민은 더 반박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완벽한 패배였다.
“유호 형. 가요. 도훈 매니저님이 빨리 내려오래.”
“응. 알겠어.”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주언과도 포옹했다.
“주언이 형. 잘 지내요.”
“그래. 유호도 인한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네. 형은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알겠어. 회사에서 봐.”
“네.”
유호는 아쉬워하며 주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재촉하는 라울이에게도 양팔을 뻗으며 다가갔다.
“아. 나는 됐어. 갑자기 웬 포옹이야.”
라울리는 질색하며 뒷걸음질 쳤으나 유호가 그를 붙잡아 끌어안는 게 더 먼저였다. 유호는 라울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라울이도 사고 치지 말고. 힘든 일 있으면 형한테 전화해.”
“됐거든? 인한이나 잘 감시해.”
라울리는 멋쩍어하며 반응했다. 부끄러운지 귀가 빨개져 있었다. 유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숙소를 한 번 둘러본 뒤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잘 있어요. 또 올게요.”
그렇게 유호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숙소를 나섰다. 다시 새롭게 맞는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