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재계약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사실 나쁜 쪽이 더 많았다. 소속사를 욕하는 글이 대부분이었고 개인 멤버의 탈주를 바라는 탄식 섞인 글도 연이어 올라왔다. 인기 멤버인 인한과 여민을 두고 서로 트집을 잡아 싸우는 양상도 줄을 이었다. 물론 유호의 탈퇴를 바라는 글도 꾸준히 있었다.
[우리 칠스팟 재계약 축하해]
[하... 할 말은 많지만... 우선 축하...]
[쌍쓰가 정신 차리는 게 빠를까 내가 탈덕하는 게 빠를까...]
[인한 여민은 배우 회사 갈 줄 알았는데 내가 다 안타까움]
[테일러도 제대로 음악 시켜주는 대로 들어가지... 어휴]
└ [제발 환기 안 되는 작업실 개선이나 해주길]
└ [그러니까 맨날 타돌한테 노래나 뺏기고]
└ └ [뺏기긴 뭘 뺏겨 그 타돌 덕분에 개인 독립할 정도로 번 건데]
└ └ [일러 원래 금수저인데 덕분에는 무슨]
└ └ [좋은 글에 타돌 끌어오지 마시길]
유호는 가만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인터넷 앱에 항상 띄워 두었던 세 개의 커뮤니티 페이지를 모두 지워 버렸다. 불호평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검색해 보기 시작한 뒤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굳이 찾아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주제 파악은 5년 넘게 충분히 해 왔으니 이제는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싶어졌다. 그래야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며칠 뒤에는 대대적인 숙소 정리가 이어졌다. 라울리는 바람대로 테일러와 인한이 쓰던 구석방을 혼자 쓰게 됐고 유호도 여민을 홀로 둔 채 인한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나눠 쓰던 방을 1인실로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구도 덜어내야 하고 개인 짐도 일일이 옮겨야 했다. 덕분에 모든 멤버들이 숙소를 정리하느라 며칠 동안을 정신없이 보내야 했다.
“효 형. 진짜 나만 두고 혼자 갈 거야?”
“응, 여민아. 그러려고.”
“우리 형아 없이는 여민이 외로워서 잠도 잘 못 잘 텐데?”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잠들면서 무슨 소리야.”
그 며칠 내내 여민은 유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유호는 한결같이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마음 약하게 굴다가 여민까지 인한의 집으로 데려가게 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여민이 귀찮아서라기보다는 인한에게 한소리를 들을까 걱정돼서였다.
“주언이 형. 그럼 형이라도 나랑…….”
“여민아. 너도 이제 스물네 살이잖아. 혼자 지낼 줄도 알아야지.”
여민은 바로 주언에게 가 들러붙었으나 그 역시 웃는 낯으로 매정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여민은 절망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형아들, 기억해 봐. 우리 셋이 옛날에 좋았잖아.”
여민은 셋이 함께 룸메이트였던 과거 연습생 시절까지 언급해 보았으나 유호와 주언은 들은 체도 않고 짐을 챙기는 데 신경을 쏟았다.
“형도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거지.”
“꺼져, 정인한.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인한은 눈치 없이 여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 괜히 욕만 먹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유호랑 동거하게 됐다는 사실에 온통 기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저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여민은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더더욱 유호를 보내기가 싫어졌다.
“유호 형, 다시 잘 생각해 봐. 인한이랑 둘이 사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일까?”
“응. 너무 편할 거 같은데.”
“그러다 만약 싸우기라도 해 봐. 얼마나 불편하겠어.”
“각방 쓸 거라 괜찮아.”
유호는 해맑은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인한뿐 아니라 유호 역시 숙소를 옮기는 것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우선 매니저 형들이 없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외박한다고 일일이 보고도 안 해도 되고. 회사에서 숙소를 나눠 준 것으로 처리됐으니 괜한 의심도 안 받을 테고. 지금은 좋은 점만 부각되어 느껴졌다.
물론 매분 매초 혈기가 넘치는 인한을 자제시키느라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힝. 유호 형 미워.”
여민은 토라진 티를 팍팍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유호는 자기 전에 제대로 달래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유호가 숙소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유호 형. 진짜 그 게이 드라마 출연하게?”
유호가 거실에서 한창 짐 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라울리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 왔다. 유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안 할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
“키스신 있다며. 남자랑 가능하겠어?”
“연기잖아. 영화에서는 외계인이나 기계랑도 사랑을 하는데?”
“으. 외계인이든 기계든, 나는 절대 못 할 듯.”
여과 없이 뱉어지는 라울리의 말에 유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닌 걸 알아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하지만 근처에서 짐을 옮기던 인한의 신경을 건드리기는 한 모양이었다.
“형한테는 누가 시키지도 않을 거 같은데.”
인한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불만스럽게 라울리를 타박했다. 라울리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내가 안 하는 거거든?”
“못하는 거야.”
유호는 고민 끝에 BL 웹드라마 ‘다섯 번의 고백’에 출연하기로 했다. 이미 거절했음에도 제작사에서 한 번 더 제안하며 적극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별다른 하반기 스케줄이 없는 상황에 굳이 주어진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무엇보다 억측과 편견을 넘어서서 당당해지고 싶었다.
“이게, 오랜만에 숙소 와서는. 여민아. 이 불청객 좀 쫓아내.”
“안 돼. 걔 오늘 일꾼으로 온 거야. 이라울, 너도 빨리 일해.”
어림없다는 듯 이어지는 여민의 잔소리에 라울리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인한이 어느새 유호에게 가까이 다가와 겨우 들릴 만큼 작게 속삭이며 질문을 던졌다.
“근데 12세 관람가면 그냥 입만 살짝 맞대는 정도겠지? 어린애들 뽀뽀 같은.”
“글쎄. 아직 대본이 안 나와서.”
유호의 대답에 인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유호는 그의 적반하장에 어이가 없어 반대로 인한을 추궁했다.
“너는 이번 영화에 베드신도 있다며?”
“그건 그냥, 하는 척만 하는 건데. 침대에 눕자마자 장면 전환 되는, 그런…….”
인한은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입을 다물어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베드신이래 봤자 그런 뉘앙스만 풍기는 정도일 테지만 그 전에 19금 관람가다운 키스신이 이어질 거라는 걸 대본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형. 응원할게. 각자 열심히 일하자.”
결국 인한은 유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수 물러나는 걸 택했다. 하지만 유호는 눈을 흘긴 채 끝까지 인한을 노려보았다. 인한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시선을 내리깔며 냉큼 자리를 피했다.
“뭐라고, 여민 형? 짐 더 옮길 거 있다고?”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인한의 행동에 유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짐 정리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마무리됐다. 아직 버리지 못한 가구들은 숙소에 남게 될 멤버들이 다음날 처리하기로 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모든 짐을 챙겨 떠날 예정이었다.
“그럼, 나는 들어가 본다.”
그 첫 번째 주자는 테일러였다. 처음 이사할 때 웬만한 물건은 다 옮겨 놨기 때문에 당장 챙겨 가야 할 짐은 박스 몇 개뿐이었다.
그래도 수형은 걱정스러워 테일러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짜 안 옮겨 줘도 돼?”
“네. 밑에 지인 와 있어요. 같이 옮기면 돼요.”
“그래. 집 도착하면 연락하고.”
“네.”
그렇게 테일러는 가장 먼저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다음 차례는 인한이었다. 하지만 인한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멤버들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라울리는 황당해하며 인한에게 시비를 걸었다.
“뭐야, 정인한. 집에 안 가냐?”
“피곤해. 그냥 여기서 잘래.”
“너 이제 방 없잖아. 어디서 자게.”
“맨날 자던 데서.”
인한은 유호를 빤히 쳐다보며 뻔뻔하게 말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여민이 바로 끼어들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버렸다.
“웃기지 마. 우리 두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방해할 생각 마.”
“여민 형. 그럼 앞으로 우리 집 와도 안 재워 준다.”
“우리 집? 하. 우리 집?”
“빨리 선택해. 재워 줘, 말아.”
“너 아주, 맨날 가 줄 테니까 앞으로 각오해라.”
“그러던가.”
인한은 간단하게 여민을 회유하고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유호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 사람은 결국 다음 날이면 치워질 2층 침대에서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됐다.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됐던 그 일이 유호는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형. 얼른 이리 와요.”
유호는 방문 앞에 서서 1층 침대에 누워 있는 인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제 침대인 양 자리를 차지하고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2층 침대의 여민은 피곤했는지 벌써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너 피곤하다며. 먼저 자라니까.”
“형이 와야 자죠.”
인한은 등을 벽에 붙여 유호가 들어갈 공간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유호가 불을 끄니 인한은 수면등을 켜고 침대의 빈 곳을 팡팡 두드렸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었다.
“또 한 바퀴 구르려고?”
“응.”
“나 그거 싫은데.”
유호는 침대 앞까지 다가가 인한에게 말했다. 인한은 영화 촬영 때문에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야 했다. 바깥쪽에서 자야 편하게 침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인한은 굳이 벽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어나기 귀찮아요.”
“…….”
“빨리.”
인한의 채근에 유호는 마지못해 침대에 누웠다. 등지고 눕는 건 서운해할 테니 마주 본 채로 누워야 했다.
인한은 자연스럽게 유호의 목덜미와 허리로 손을 뻗어 유호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