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얼마 전 테일러가 음악방송을 돌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티오스랑 활동 시기가 겹친 것도 엿 같아 죽겠는데 과거 연습생 동기였던 한정현은 스쳐 지나갈 때마다 굳이 사람을 붙잡아 놓고 온갖 비아냥으로 약을 올려 댔다.
‘야. 너네 곧 해체한다며? 남돌이면 3군이어도 수익은 난다던데 계약 기간도 못 채우고 끝날 정도면 회사가 얼마나 열악한 거냐?’
아무튼 인성 파탄 난 새끼. 테일러는 차마 선배라 무시도 못 하고 개소리를 듣고 있느라 치를 떨었다. 너 내가 열 받으면 커뮤니티에 인성 폭로 글 써제낄 거다, 인마. 입조심해라. 한소리 왁 질러 주고 싶었으나 아이돌은 싸움마저 팬 많은 사람이 유리하다는 현실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 대신 평소처럼 같잖다는 표정이나 지어 주며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니까 회사는 왜 나가서. 등신같이.’
정현이 끝을 모르고 건방을 떨어 대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내가 계속 거기 있었으면, 너는 데뷔할 수 있었고?’
테일러는 순간 욱해서 정현에게 덤벼들었다. 별것도 아닌 도발에 넘어가 버린 이유는 아마 솔로 앨범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내 감춰 뒀던 못난 감정을 기어이 드러내고 만 것이다.
‘너 그거 자격지심이야. 좀 추하다.’
‘야, 한정현. 그만해. 태윤이, 너도.’
한 번 더 돌아온 멸시의 말을 듣고도 테일러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그만둔 건 순전히 티오스의 리더, 노석원 때문이었다. 그가 한때 동경하고 따랐던 그 잘나 빠진 인간 때문에.
석원 - [정현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너 팀 나간 거 걔가 제일 아쉬워했던 거 알잖아]
리더씩이나 돼서 본인 팀 멤버나 신경 쓸 것이지, 오지랖은. 테일러는 이후에 도착한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 메신저를 종료해 버렸다. 그렇게 확인만 하고 쌓아 놓은 메시지가 꽤 됐다. 답장을 못 받을 줄 알면서 꾸준히 연락을 해 오는 석원의 의도조차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사실은 한정현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걸 알아서, 더 초라해질 뿐이었다.
“곧 집도 뺏길 사람이 꿈도 크네요.”
그런 테일러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명은 계속해서 농담을 던졌다.
테일러는 도명의 곁에 있을 때도 다를 바 없는 기분을 느꼈다. 망할 티오스보다도 한참은 잘난 사람이 왜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잠깐의 호기심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가진 거 다 털리고 나면요?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니 테일러가 이런 구차한 질문을 던져서라도 그 이유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건 당연했다. 차마 버릴 거냐고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도명은 그런 테일러를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적선을 해 볼까 하는데.”
“아. 적선?”
“동정이나 기부, 아니면 스폰?”
결국 테일러는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리 자존감이 바닥까지 처박힌 상태라도 남에게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불만 가득한 테일러의 얼굴에도 도명은 표정 변화 없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쪽한테는 투자로 해 둘게요. 기왕 가여운 김에 내 도움받아요. 그게 뭐든, 다 해 줄 테니까.”
도명의 말에 좁아졌던 테일러의 미간이 다시 느슨해졌다.
그 모습에 도명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테일러가 가진 의외의 면모가 도명을 자꾸 헷갈리게 만들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그가 되고 싶다는, 절대 어울리고 싶지 않은 부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딱 봐도 성깔 있어 보이는 데다 입도 험해 보이고. 마약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웬걸, 문신은커녕 귀도 뚫지 않아 생채기 하나 없는 몸에 데뷔 이후에는 여자랑 겸상도 해 본 적 없다니. 과연 이런 사람이 아이돌을 하는구나 싶었다. 동시에 그런 부분이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쪽은 뭘 얻는데요?”
테일러는 그런 도명의 마음도 모르고 시시껄렁한 질문이나 던지고 있었다. 도명은 옅게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인생이 꽃길뿐이라 부족한 게 없어서.”
굳이 자신의 말을 빗대어 거들먹거리는 도명의 태도에 테일러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재수 없어.”
습관과도 같은 볼멘소리는 덤이었다.
그러면서도 테일러는 도명에게 비아냥인지 고백인지 모를 소리를 듣게 된 게 진짜로 재수가 없는 건지, 반대로 넘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안 어울리는 거에 굳이 미련 두지 말아요. 그냥 계속 잘하는 거 하면 되잖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테일러는 위로라고 건네는 도명의 말들이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때때로 어떤 불행은 주변 사람에게까지 해를 입혔다. 그래서 테일러는 도명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하는 짓을 보아하니 한 번쯤 제 덕에 가시밭길을 걷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내가 잘하는 게 뭔데요?”
“참는 거. 울면서도 버티는 거. 오기로 싫은 것도 해내는 거. 그런 거 잘하잖아요.”
“좋아서 잘하는 거 아니거든요?”
“가끔은 즐기는 것도 같던데?”
중의적으로 들리는 도명의 말에 테일러는 못마땅한 듯 눈을 흘겼다. 말로 불만을 제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그거, 되게 불순한 말로 들리는데.”
“알아들었으면 다행이고.”
인생이 장애물 없이 탄탄대로인 걸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긴. 1군 아이돌인 절친들 말로는 꿈을 다 이루고 나니 허망해져서 갈피를 못 잡겠다고는 하던데. 그들 딴에는 진지한 고민이었겠지만 테일러가 듣기에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다. 그런 생각의 차이에서부터 이미 글러먹은 건지도 몰랐다.
“인생이 아무리 불공평하다지만 그쪽 인생에 꽝만 있으란 법은 없잖아요. 우선 나부터가 1등 상품에 가깝고.”
자기객관화가 잘돼 있는 남자의 말은 고까우면서도 너무 맞는 말이라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다만 1등 상품이 한시적일 수도 있는 건 테일러의 입장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일어나 밥부터 먹어요. 저당 잡힌 몸이니까 열심히 살아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도명은 테일러의 턱을 붙잡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테일러는 괜히 민망해 고개를 비틀어 빼며 뒤로 물러났다.
“배 안 고픈데.”
“애도 아니고, 밥 먹는 것까지 사정해야 돼요?”
“신경 안 쓰면 되잖아요.”
그런 와중에도 조금 잘해 준다고 도명과 집에까지 드나드는 사이가 되어 버린 건 박탈감에 마음이 허해서인 게 분명했다. 가까운 이들에게는 꽁꽁 감추기 바빴던 열등감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그가 생판 남이라서였다. 관계가 끝나면 다시는 안 봐도 될 사이라서.
하지만 관계가 끝나도 괜찮은 사이인지는 테일러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가엾지를 말던가.”
누가 누구보고 가엾다는 건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곁에 있으려고 하는 건 본인이면서, 내내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는 도명이 테일러는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순순히 그의 뒤를 따르게 되는 건 배고프지 않아도 밥을 챙겨 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가 않아서. 단지 그뿐이었다.
***
유호는 회사 연습실에서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 준비부터 주말 공연 준비까지 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여 있는 상태였다.
유호는 우선 공식 SNS 계정에 새로운 소식을 올리는 일부터 차근히 해 나갔다.
[7SPOT ⓥ @7SPOT_MEMBERS · 0초
안녕하세요. #유호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 7시 홍대 ‘벨루가’에서 프로듀서 #비조 님의 첫 단독 공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비조 님의 3집 앨범의 3번 트랙 #Pattern에 참여한 저도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B_JO #Yuho # 패턴 #세븐스팟]
비조의 앨범은 발매 이후 나름대로 호평을 받고 있었다.
타이틀 곡이야 대중 픽인 데다 고정 팬덤도 탄탄한 운성 덕에 음원차트 중위권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음반 전체가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유호의 음원은 팬들만 알아 주는 정도였다. 분명 좋은 곡인데, 이렇게 묻히는 게 민망하면서도 씁쓸했다. 미리부터 솔로 데뷔 성적을 맛본 기분이었다.
- 여섯 점돌이들 방 6 -
테일러 - [일정이 공유되었어요.│목요일 오후 04:00 ~ 오후 06:00│초대 6명]
테일러 - [이번 주 목요일 안 잊었지? 모여서 재계약 최종 결정합시다]
여민 - [넹... ㅜ]
주언 - [알겠어]
라울리 - [ㅇㅇ]
유호 - [네]
유호는 세븐스팟 단체방에도 뒤늦게 확인 답장을 남겼다.
재계약 여부를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으니 멤버들끼리 먼저 의견을 모아서 회사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전 해체 논의 때처럼 갑작스럽지는 않았지만, 절망적인 건 똑같았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인한 - [네]
곧바로 인한도 답장을 해 왔다.
유호는 저도 모르게 핸드폰 화면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메신저 창에 뜬 인한의 이름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는 중이었다. 제대로 헤어진 것도 아닌데 유호는 벌써부터 이별을 겪은 듯 서글퍼졌다.
유호는 단체방을 나와 채팅 목록을 더 아래로 내렸다. 답을 찾는 걸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호는 호흡을 가다듬고 수한과의 채팅 창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전의 메시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수한 - [결정했어?]
유호 -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수한 - [얼마나?]
유호 - [금방 연락 드릴게요]
다시 연락하기까지 얼마 안 걸릴 줄 알고 전한 메시지였는데 이미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유호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겨우 새로운 메시지를 전송했다.
유호 - [형 저희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수한 - [그래 언제쯤 시간 될 거 같은데?]
수한의 답장은 바로 돌아왔다. 유호는 긴장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