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그게, 자신이 바라는 답이었을까. 인한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엄마한테 커밍아웃까지 하고 주승과도 맞서 싸웠는데. 유호는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쩌면 인한을 놓아주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막상 듣게 된 이별의 말은 가슴이 시릴 만큼 아팠다.
“여기서, 끝낼까요?”
인한 역시 끝을 말하면서도 겁을 내고 있었다. 사실 속으로는 유호가 전부 다 버리고 자신만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게 잘못된 마음인 걸 알아서 인한이 먼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유호가 지금 바라는 게 도망이 아니란 걸 알아서였다.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유호는 대답 대신 시간을 요구했다. 인한은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끝까지 답을 안 줘도 상관없어요.”
“미안해. 수한이 형 얘기는 도저히 너한테 할 수가 없었어.”
“알아요.”
“다른 건…… 나도 노력하는 중이었어.”
“그것도, 알아요.”
이미 이별을 각오한 듯 체념 섞인 인한의 대답에 유호는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서로를 위해 잠시 거리를 두자고 했지만, 인한이 그대로 손을 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붙잡을 용기도, 놓아줄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기다려요. 택시 잡아 줄게요.”
“아냐. 알아서 갈 수 있어.”
유호는 그대로 돌아서서 문밖으로 향했다. 자고 가려고 도훈에게 말까지 해 놨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발걸음이 무거워 떨어지지 않았다.
인한도 마찬가지였다. 배웅까지 마다하고 멀어지는 유호의 뒷모습을 보며 몇 번이고 붙잡고 싶어서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부디 이 순간이 유호와의 마지막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
“전과 다르게 오늘은 분위기가 좀 가라앉아 있네요?”
“네? 아. 죄송해요.”
유호는 윤성진 감독의 말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 사과부터 전했다. 오디션장에까지 우울한 기분을 가지고 온 건 잘못된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였으니 떨어뜨려 달라고 시위를 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에요. 미안하라고 얘기한 건 아니고. 그동안 루머 때문에 마음고생 좀 했나 봐요.”
다행히 윤성진 감독은 이해해 주는 눈치였다. 유호는 다시 활기찬 모습을 만들어내 보였다.
“잠깐 힘들었기는 했는데, 잘 마무리가 돼서요. 요새는 더 바빠졌어요.”
“그러게요. 이곳저곳 예능에 많이 나오던데.”
“맞아요.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잖아요?”
유호는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다행히 오디션장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고 유호는 속으로 안심했다.
“그래요. 액땜했다고 생각해요. 더 좋은 일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말을 듣고 오디션장을 나섰지만 유호는 별로 들뜨지 않았다. 그냥 덕담이겠지. 오디션도 자주 떨어지다 보니 기대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됐다.
실패는 언제나 뼈아프고 괜한 희망은 더 큰 상처로 돌아오니까.
언젠가 자신에게도 오디션을 보지 않고 작품을 고르는 날이 올까 싶었다.
“이제 가요, 유호 형?”
“아. 선배님?”
근처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유호는 뒤를 돌아봤다. 다름 아닌 도명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이 일순간에 집중됐다.
“오디션은? 잘 봤어요?”
“왜 여기 계세요?”
“제작사 미팅 때문에요. 일정 조율하느라.”
유호는 그제야 도명에게 작품을 같이하자던 윤성진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지나가는 인사인 줄 알았는데 벌써 그런 결정이 났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선배님도 출연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공개된 캐스팅 라인업에는 이름이 없으셔서.”
“특별 출연이라.”
“아.”
“나도 유호 형이 오디션 보는 줄은 몰랐는데, 반갑네요.”
도명은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유호도 함께 걸음을 옮기며 뒤따르게 됐다. 두 사람 다 매니저 없이 혼자였다.
“근데 저는 떨어진 거 같아요.”
“그래요? 아쉽네.”
“그렇죠? 같이 작품 들어가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우정에 금 가는 상황을 좀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네?”
“농담이에요.”
표정 변화 없이 전해진 농담에 유호는 당혹스러웠다. 도명만이 평화롭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유호 형은 이제 어디 가요?”
“아. 저는…….”
“회사면 태워다 주고.”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유호는 습관적으로 거절하려다가 그의 제안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태도를 바꿨다.
“안 바쁘신 거면, 그러실래요?”
“그래요. 가요.”
도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유호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단둘이 있는 차 안은 생각 외로 어색하지 않았다. 적응이 돼서 그런지 꽤 길게 이어지는 정적에도 유호는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뜬금없이 던져지는 도명의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요새는 별일 없어요?”
별일이, 많았죠. 그저 안부 인사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유호는 잠시 답변을 고르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근래 일어난 파란만장한 일을 털어놓을 창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 입이 무거워 보이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
“그냥, 얼마 전에 운성 선배님 소개로 외부작업한 개인 곡이 발매됐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묻힌 거랑요. 회사에서 재계약 제안받았는데 멤버들끼리 의견이 갈려서 서로 어색해진 거랑 오늘 오디션 망한 거, 그리고 인한이한테 헤어지자는 얘기 듣게 된, 그런 우울한 일들이 연달아 있었어요.”
유호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근래 일어난 불행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도명은 놀란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반응했다.
“우리가 생각보다 친했나 봐요.”
“그냥 물으셔서 대답해드린 건데.”
“이상하네.”
“뭐가요?”
“인한이 말이에요. 절대 먼저 헤어지자고 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봐요.”
“그거까지는…… 말씀 못 드려요.”
“그래서? 헤어질 생각이에요?”
여전히 유호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가라고 등 떠밀리고 나니 그동안 결심했던 게 오히려 불확실해졌다. 덕분에 수한과의 담판도 짓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유호는 대답 대신 화제를 바꿔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은 연애 안 하세요?”
유호의 뜬금없는 질문에 도명이 시선을 돌려 유호를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 관심 있는 거면, 좀 곤란한데.”
“전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만나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네? 언제부터요?”
유호는 진심으로 놀라 반응했다. 테일러가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터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얼마 안 됐어요.”
“축하드려요.”
“글쎄. 축하받을 일인가.”
도명은 한결같이 무던한 반응을 보였다. 유호는 묻고 싶은 말이 넘쳐났지만 차가 벌써 회사 앞에 당도한 탓에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도명은 정차해 잠시 핸드폰을 확인한 후 유호에게 바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가요.”
“아.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가서 테일러 형…….”
“안 그래도 돼요. 아직 집에 있어서.”
“네?”
“다음에 또 봐요.”
“아, 네. 안녕히 가세요.”
도명은 유호를 데려다주는 게 유일한 목적이었는지 정말 미련 없이 떠나갔다. 유호는 멀어져가는 고급 외제 차를 바라보며 꽤 비싼 택시를 타고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여태 그러고 있었어요? 작업실에 있는 줄 알았는데.”
도명은 당연히 비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자신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놀라 질문을 던졌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여태 소파에 흐물흐물 퍼져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가 너무 의외라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점심은? 먹었어요?”
“아뇨.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어디 아픈가. 도명은 우선 다가가 테일러의 상태를 살폈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 봐도 반응이 없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가뜩이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을 더 사납게 뜨면서 경계 태세를 취하기 바빴을 텐데. 눈이 텅 비어 생기 없이 구는 건 반대로 영 재미가 없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있을 거예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요.”
테일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곧 세상이 끝날 사람처럼 굴었다. 도명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테일러에게 되물었다.
“그렇게까지 절망적일 필요가 있어요?”
“데뷔 이래 꽃길만 걷던 사람은 이해 못 할 거예요. 한때의 유망주로 잊혀 가는 사람의 기분을.”
어쩐 일로 못 마시는 술을 죽어라 퍼마시더라니. 도명은 전날 밤부터 테일러의 낌새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답지 않게 앓는 소리까지 여과 없이 늘어놓는 걸 보면 그룹 해체가 어지간히 속상한 모양이었다.
“지금 지나치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데요.”
“나는 되게 으스대고 싶었어요.”
테일러는 도명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한탄을 계속 이어 나갔다. 도명은 어디 들어나 보자 싶어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겸손이고 뭐고 있는 부심은 다 부리면서 거들먹거리고 싶었다고요.”
“그건 별로 내 취향이 아닌데.”
“그쪽 취향이든 말든, 나한테는 한때의 로망이었다고요.”
테일러는 대형 기획사에 들어간 후로 딱 3년을 그렇게 살았었다. 쟤 아이돌 연습생이래. 어디? WG. 와, 미쳤네. 그 타이틀이 뭐라고 턱 끝을 한없이 치켜들고 다녔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무시나 당하는 처지였다.